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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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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의 시대
중국의 신화(神話)는 주로 한민족(漢民族)에 의해서 전해졌던 것이었지만
그러나 다른 소수민족들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3) 요순(堯舜)의 시대
(3) 순(舜)
순(舜)은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군주(君主)로, 오제(五帝) 중 한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성(姓)은 요(姚)였으며, 이름은 중화(重華)였고, 우(虞) 씨(氏)로도 불렸다.
※ 단, 요사(姚姒)는 순(舜)과 우(虞)를 아울러서 이르는 말이고, 요(姚)는 순(舜)의 성(姓)이며, 사(姒)는 우(虞)의 성이므로, 참고바람.
순(舜)은 유가(儒家)에 의해서 신성시(神聖視)되었고, 요(堯)와 함께 요순(堯舜)으로 불리면서 성인(聖人)으로 숭배되었다. 그리고 또 순(舜)은 24효(孝) 중 한사람으로도 손꼽혔다.
순(舜)은 전욱(顓頊)의 7대손(代孫)이었다고 하며,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계모(繼母)와 그의 자식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그들은 계모(繼母)가 데려왔던 그 아들에게 후계를 물려주려고 획책했고, 그래서 틈만 나면 순(舜)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순(舜)은 그것을 알고서도 자기 아버지에 대한 효(孝)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러자 또 그 명성이 높아져서 결국 요(堯)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요(堯)는 순(舜)의 인격을 알기 위해서 행동거지를 죽 지켜보다가 자신의 딸이었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순(舜)에게 강가(降嫁)시켰는데, 그러자 순(舜)은 그 두 여인에게 지극정성을 다했으며, 그 결과로 또 그 두 여인 또한 순(舜)을 정성으로 받들게 되어서, 그 후에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순(舜)의 주위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3년 후에는 순(舜)이 살던 곳이 도시(都市)가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 아황(娥皇)은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여성이며, 요(堯)의 딸이었고, 여동생 여영(女英)과 함께 순(舜)에게로 강가(降嫁)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아황(娥肓), 아황(倪皇), 후육(後育), 아맹(娥盲), 아형(娥娙)으로도 불렸으며, 성(姓)은 이기(伊祁) 씨였다. 그녀는 순(舜)이 자신의 가족들로부터 계속해서 살해 위협을 받는 것을 보고 여영(女英)과 함께 재치로서 순(舜)을 도왔다고 하며, 순(舜)이 즉위하여 천자(天子)가 되자 그녀는 후(后)가 되었으며, 여영(女英)은 비(妃)가 되었다. 그녀는 총명하고 바르기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순(舜)이 창오(蒼梧)에서 사거(死去)하자, 그녀와 여영(女英)은 상강(湘江)에서 자살했다. 그러자 그 후, 세상에는 그녀들이 상군(湘君-상강의 물귀신 또는 상강의 神)이 되었다고 전해졌다.(女英도 上記와 같음)
하지만 그러던 중에서도 그의 원 가족들은 변함없이 그를 죽이려고 그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하루, 순(舜)이 지붕을 수리할 것이란 말을 들었던 그들은, 순(舜)이 지붕으로 올라간 사이에 아래에서 불을 질러서 순(舜)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순(舜)은 두 개의 우산(雨傘)을 새의 날개처럼 펼쳐서 그곳을 탈출했는데, 그러자 또 그들은 그에도 단념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또 그 다음에는 순(舜)이 우물 안을 청소한다고 했을 때, 그 위에다 흙을 덮어서 그를 생매장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또 순(舜)은 그 우물 벽에다 굴을 파서 그곳에서 탈출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순(舜)은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변함없이 부친(父親)에 대해서 지극한 효(孝)를 다했다고 한다.
그러자 요(堯)가 그것을 알고 몹시 기뻐했다. 그래서 요(堯)는 순(舜)을 등용시켰고, 천하(天下)를 섭정(攝政)하게 했다. 그러자 또 그 후로 조정(朝廷)에서 간신(奸臣)들은 모두 추방되었으며, 백관(百官)들은 훌륭한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
그로부터 20년 후, 요(堯)는 순(舜)에게 선양(禪讓)했다. 그러자 순(舜)은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서 우(禹)를 채용했고, 그러자 또 그 우(禹)는 그 일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그 후, 39년 간 제위(帝位)에 있었던 순(舜)은 결국 우(禹)에게 선양(禪讓)하고 사거(死去)했다. 그러자 순(舜)의 자손들은 주대(周代)에 우(虞)로 봉(封)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또 순(舜)은 생전에 남풍가(南風歌)라는 노래도 지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 후의 진(陳)나라 진(陣) 씨(氏)의 조상으로 알려졌고, 그리고 그 진(陳)나라로부터 나뉘어졌던 전제(田齊)의 조상으로도 알려져 있다.
※ 전제(田齊)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386년에 전(田) 씨(氏)가 강성여씨(姜姓呂氏)의 제(齊)를 멸하고 새롭게 세웠던 나라로, 국호(國號)는 간단하게 제(齊)로 표기하지만, 그러나 서주(西周)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여 씨(呂氏)의 제(齊)와 특히 구별하는 경우에는 전제(田齊)라고 표현함.(후술 또는 생략)
4) 예우(羿禹)의 시대
(1) 예(羿)는 앞에서 설명이 되었음.
(2) 우(禹)

우(禹)는 중국고대의 전설적인 제왕(帝王)으로, 하조(夏朝)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禹)의 이름은 문명(文命) 또는 대우(大禹), 하우(夏禹), 융우(戎禹) 등으로 불렸다고 하며, 성(姓)은 사(姒), 하(夏)왕조 창시 후의 씨(氏)는 하후(夏后)였다고 한다.
그리고 우(禹)의 부(父)는 곤(鯀)이었고, 그 곤(鯀)의 부(父)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오제(五帝)의 일인(一人)이었던 전욱(顓頊)이었다고 했으므로, 우(禹)는 전욱(顓頊)의 손자였다. 그리고 또 그 전욱(顓頊)과 함께 오제(五帝) 중 한명이었던 황제(黃帝)의 후손이기도 했기 때문에, 우(禹)는 황제(黃帝)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高孫)에 해당한다.
참고: 곤(鯀)은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로, 사기(史記)에 의하면 전욱(顓頊)이 그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스스로 포기하고 신하의 신분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요(堯)의 시대에 황하(黃河)의 범람이 잦자 그 치수(治水)를 할 사람을 구했는데, 요(堯)의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곤(鯀)을 추천했다. 하지만 9년이 지나도록 성과를 보지 못하자 요(堯)는 그 대신으로 순(舜)을 등용했다. 그러자 순(舜)이 황하(黃河)를 시찰(視察)했는데, 그때 곤(鯀)은 우산(羽山)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사람들은 순(舜)이 그 곤(鯀)을 살해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의심을 했다는데, 하지만 그 순(舜)은 곤(鯀)의 아들이었던 우(禹)에게 그 사업을 계속하도록 인계했다. 그리고 또 전설에 의하면 곤(鯀)이 처형되었던 그 우산(羽山)에서 황웅(黃熊)이 났다고 전해졌다.
우(禹)는 후에 도산(塗山) 씨(氏)의 후손을 아내로 맞았으며, 그 사이에 계(啓)라는 아들을 두었다.
참고1: 계(啓)는 하조(夏朝) 제2대 제(帝)로, 아들에 제(帝) 태강(太康)과 제(帝) 중강(中康)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적어도 다섯 명의 아들이 더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그는 39년간 제위에 있었고, 78세에 몰(沒)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처음에 우(禹)는 제위를 익(益)에게 물려주려고 했지만, 그러나 우(禹)가 죽자 익(益)이 제위를 포기했고, 그러자 계(啓)가 제위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러자 제후(諸侯)들도 익(益)을 떠나서 계(啓)에게로 갔고, 그리하여 계(啓)가 제위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에는 익(益)이 실제로는 제위에 올랐지만, 그러나 계(啓)가 익(益)을 죽이고 제위를 취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계(啓)는 재위(在位) 중에 제후(諸侯)였던 유호(有扈) 씨(氏)가 그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감(甘-현재의 陝西省 戶県 甘亭鎭에 해당)에서 싸워서 승리했다. 그리고 또 그 싸움 전에 계(啓)는 육경(六卿)들 앞에서 감서(甘誓)를 피로(披露)했다고 하며, 그 감서(甘誓)는 또 서경(書經)에 기록되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계(啓)가 지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있다고 하고, 그리고 또 그 유호(有扈) 씨는 바로 익(益)의 지지자였다는 설이 있다.
참고2: 익(益)은 중국 고대 전설상의 인물로, 순(舜)과 우(禹)를 섬겼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순(舜)의 시대에서는 우<虞=山澤=山林川澤을 맡은 관리>의 직무를 맡았고, 우(禹)와 함께 치수(治水) 등의 정치를 행했다. 그리고 그 후, 우(禹)가 제위(帝位)에 오르자 그는 우(禹)를 섬겼으며, 그리고 또 그 후에 우(禹)와 함께 정치를 도맡아서 하던 고도(皋陶)가 죽자, 그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하(夏) 본기(本紀)에 의하면, 우(禹)가 죽을 때 그 제위(帝位)를 익(益)에게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익(益)은 우(禹)의 삼년 상(喪)을 마친 후, 계(啓)에게 제위를 물려주고는 기산(箕山)으로 들어가서 은거(隱居)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에는 익(益)이 정치를 잘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제후들이 계(啓)를 추대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또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그 익(益)은 제위를 물려받았지만, 그러나 계(啓)가 그를 살해하고 제위에 올랐다고도 한다.
우(禹)는 인덕(人德)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우(禹)는 탁월한 정치능력의 소유자였다고는 했지만, 그러나 결코 스스로 교만해하거나 과시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열자(列子) 양주(楊朱) 第七>에 의하면, 그가 아버지 곤(鯀) 대신으로 치수(治水)에 임했을 때, 그 일에 빠져서 자식이나 가정도 돌보지 않았으며, 몸은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될 정도로 그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온 손발이 다 엉망이 되었던 모양이었는데, 하지만 또 그에는 [원래부터 전해져오던 <우(禹)는 반신불수(半身不隨)...>라고 묘사했던 말을, 후세인들이 합리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결과에서 지어졌던 이야기였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리고 또 시라카와(白川靜)는 산해경(山海經)에 보이는 물고기(魚)에 편고(偏枯)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에 주목해서, 우(禹)은 당초(當初) 물고기의 모습을 했던 신격(神格)이었다는 가설(假說)을 세웠으며, 그리고 또 실제로 우(禹)란 글자는 본래(本來) 석척(蜥蜴-도마뱀)과 악(鰐-악어) 그리고 용(龍)의 모습을 묘사했던 상형문자(象形文字)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우(禹)의 기원(起源)은 황하(黃河)에 살던 수신(水神)이었을 것이라고도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 그 편고(偏枯)라고 하는 특징을 닮은 보행(步行)방법이 바로 우보(禹步)라고 하며, 그것은 또 반신불수(半身不隨)로 인해서 비틀거린다거나, 또는 편각(片脚-외다리)으로 뜀뛰듯이 걷는 신체(身體) 기법(技法)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또 그 우보(禹步)는 도교(道敎)와 중국의 민간신앙의 의식(儀式)에서 무자(巫子-무당)가 실제로 행했다고 하며, 그것으로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했었다든지, 또는 바위를 움직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아무튼, 그랬던 우(禹)는 즉위 바로 후에 무기(武器)의 생산을 중지시켰고,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궁전의 대 증축을 보류시켰으며, 관소(關所-關門)와 시장(市場)에 이르는 제세(諸稅)를 면제했다. 그리고 또 지방에 도시를 건설했고, 번잡한 제도들을 폐지해서 행정의 간략화를 도모했다. 그러자 또 그 결과, 중국 내는 물론이었고, 외부에서까지도 조공(朝貢)을 자진해서 바쳐올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거기다 또 우(禹)는 물길(水路)을 의도적으로 바꾸는 등, 여러 하천을 정비했고, 주변의 토지를 경작해서 초목의 육성(育成)을 도모했으며, 중앙과 동서남북의 구별을 기(旗)로써 표시해서 모든 사람들이 알게 했다. 그리고 또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방식들을 답습(踏襲)해서 전국을 아홉으로 나눈 구주(九州)를 두었다고 한다.
참고: 구주(九州)는 중국 고대에 전국을 나눈 9개의 주를 의미하며, 요순시대(堯舜時代)와 하(夏)나라 때에는 기(冀)·연(兗)·청(靑)·서(徐)·형(荊)·양(揚)·예(豫)·양(梁 )·옹(雍)이었으며, 은(殷)나라 때에는 기·예·옹·양·형·연·서·유(幽)·영(營)이었고, 주(周)나라 때에는 양·형·예·청·연·옹·유·기·병(幷)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우(禹)는 검약(儉約)정책을 폈으며, 스스로도 솔선해서 행동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우(禹)는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45년간 제위에 있었다고 하며, 절강 성(浙江省) 소흥 시(紹興市)에 있는 회계산(會稽山)에 그의 무덤 대우능(大禹陵)이 있다고 한다.

<절강성 위치도>
3) 탕(湯) 
탕(湯)은 은조(殷朝)의 창시자로, 기원전 1600년 경의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이(履) 또는 대을(大乙) 또는 태을(太乙) 또는 성탕(成湯) 또는 성당(成唐)으로 불렸으며. 초대(初代)제(帝)였고, 하(夏) 최후의 제(帝) 걸(桀)을 추방하고 하(夏) 왕조를 멸(滅)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 걸(桀)은 폭학(暴虐)한 정치를 폈기 때문에 인심(人心)이 하(夏)를 떠났다고 하며, 그러자 또 당시 하(夏)의 신하였던 천을(天乙=湯)은 같은 명신(名臣)이었던 이윤(伊尹)의 도움을 받아서 걸(桀)을 쳤고, 이어서 멸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서경(書經)에는 그가 걸(桀)을 멸하려 했을 때, 제후(諸侯)들을 향해서 연설을 했다고 하는 <탕서(湯誓)>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며, 그 후에 천을(天乙)은 하(夏)의 우(禹), 주(周)의 문왕(文王), 무왕(武王)과 함께 성왕(聖王)으로 존경받았고, 후세에 숭배되었다.
참고1: 걸(桀)은 하조(夏朝) 최후의 왕이었으며, 이름은 이계(履癸)였고, 일설(一說)에는 제(帝) 고(皐-夏朝의 第15代帝)의 아들<사기(史記) 등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걸(桀)의 부(父)는 제(帝) 발(發-夏朝의 第16代帝로, 桀의 父라고 하지만, 일설에는 桀의 兄이었다고 하고, 그가 즉위 했을 때, 변방의 많은 오랑캐들이 찾아와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이라고 되어있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짐심(斟尋)이란 곳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며, 공갑(孔甲) 이래(以來) 하후(夏后=夏)로부터 제후(諸侯)들의 배반이 계속되었는데, 그러나 걸(桀)은 덕(德)으로 정치를 하지 않고 무력으로 그 제후(諸侯)들과 민중들을 억누르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제후들과 민중들은 걸(桀)을 증오했다. 그러던 중 걸(桀)이 유시(有施) 씨(氏)를 토벌했을 때, 말희(末喜)라는 미녀(美女)를 포획해서 자신의 아내로 삼았고, 그러자 걸(桀)은 그 말희(末喜)에게 빠져서 정치를 게을리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술의 호수(酒池)에 배를 띄우고 육산포림(肉山脯林-殷 紂王의 酒池肉林과 함께 亡國의 宴會)이라고 했을 정도로 고기(肉)를 산 같이 쌓아올려서 호화로운 연회를 개최했으며, 그로써 국력을 탕진했다. 거기다 또 충신들을 멸시하고 탕(湯)을 불러들여서 감옥에다 가두어버리니, 그러자 탕(湯)은 용서를 구하고서야 풀려났다. 그러자 보다 못했던 제후들이 모두 탕(湯)에게로 몰려들었고, 결국 탕(湯)은 걸(桀)을 무너뜨렸다. 그러자 걸(桀)은 명조(鳴條-현재의 山西省 安邑)로 도망을 갔는데, 그런데 그곳에서
<吾悔不遂殺湯於夏台使至此>
해석해보면
<(나는) 탕(湯)을 감옥에 가둔 후에 죽이지만 않았던 것뿐이었는데, (내가) 이런 처지에까지 몰리고 말았다는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라고 말을 하고는 죽었다고 한다.
단, 일설(一說)에 의하면, 걸(桀)은 말희(末喜)와 함께 남방(南方)으로 도망을 가서 죽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그는 죽었다지만, 그러나 그는 후세에 상(商)의 주(紂), 주(周)의 여왕(厲王)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가 민산(岷山)을 토벌했을 때, 완(琓)과 염(琰)이라는 두 명의 여성을 포획해서 열애(熱愛)를 했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소화(笤華)라는 옥(玉)에다 그 두 명의 여성 이름을 새겼으며, 그리고 소(笤)에는 완(琓)을, 그리고 화(華)에는 염(琰)을 새겼다고 한다.
참고2: 이윤(伊尹)은 하(夏) 말기(末期)에서 상(商=殷) 초기의 정치가였으며, 상(商) 성립에 큰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지(摯)였다고 하며, 전설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대홍수에 휩쓸려서 떠내려간 후 큰 뽕나무(巨桑木)가 되었는데, 그런데 그 가지에서 이윤(伊尹)이 탄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런 연유로 해서 그가 홍수(洪水)의 신(神)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성인이 된 후, 요리사(料理師)였다거나 또는 귀족(貴族)의 집에서 일을 했던 사람으로, 그 주인의 딸이 자리(子履-나중의 湯王)에게 시집을 갔을 때, 그 시중꾼으로 따라갔다가 자리(子履)를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재능이 자리(子履)에게 인정되었고, 그리하여 상(商)의 국정에도 참여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상(商)이 하(夏)를 멸했을 때도 그는 활약했으며, 그 후에도 탕왕(湯王)을 보좌했고, 그 후로도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던 상(商) 왕조의 기초를 다졌다. 그리고 또 그는 탕왕(湯王)이 사거(死去)한 후에도 그 자식이었던 외병(外丙)과 중임(仲壬) 두 왕을 보좌했으며, 그 후에 탕왕(湯王)의 손(孫) 태갑(太甲)이 즉위하자 그 역시도 보좌했다. 하지만 그 태갑(太甲)이 방탕을 일삼으며 국정을 교란시켰기 때문에, 이윤(伊尹)은 그를 동(桐)으로 추방했고, 그 후에 스스로 섭정(攝政)했다. 그 3년 후, 태갑(太甲)이 후회를 하고 개과천선(改過遷善)했던 것을 확인했던 이윤(伊尹)은 다시 태갑(太甲)을 왕좌에 앉히고는 신하의 임무를 다했다. 그리고는 그 태갑(太甲)의 아들 옥정(沃丁) 시대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후세(後世)에 그는 명신(名臣)으로 평가받았지만, 그러나 태갑(太甲)을 추방했던 일로 해서 다소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또, 그 일은 전한(前漢) 때의 곽광(霍光)의 예처럼, 유력자(有力者)가 나쁜 군주(君主=主君)를 추방하는데 구실을 주는 선례도 남겼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는 <그가 태갑(太甲)을 추방한 후,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그 7년 후에 태갑(太甲)에게 토벌되었다>라고 했다.
참고3: 공갑(孔甲)은 하조(夏朝)의 제14대 제(帝)였으며, 소위 폭군(暴君)이었고, 성격이 음란(淫亂)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귀신(鬼神)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러자 제후(諸侯)들이 하(夏)를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재위(在位) 중에 자웅(雌雄) 한 쌍의 용(龍)이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런데 그때 마침 환용 씨(豢龍氏-龍의 飼育을 맡았던 氏族)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돌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당시 용(龍)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길조(吉兆)였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에 대한 합당한 처우를 하지 않으면 곧 하(夏)의 덕(德)이 쇠(衰)함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루(劉累)란 자에게 시켜서 그 용(龍)들을 관리하게 했는데, 그런데 그 중에 암컷이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유루(劉累)는 그 고기를 공갑(孔甲)에게 헌상했다. 그러자 또 공갑(孔甲)은 그 고기가 너무 맛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유루(劉累)에게 명해서 그 고기를 더 가져오라고 했지만, 그러나 유루(劉累)는 그것을 더 구할 수가 없어서 도망을 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와 관련된 사기(史記)의 내용을 보게 되면(周本紀), 하(夏)왕조 때 용(龍) 두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러자 점(占)을 쳐보니 <그 용(龍)의 입에서 나오는 거품(泡)을 얻을 수 있으면(받아두면) 길(吉)하다>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래서 그 용(龍)들에게서 거품을 받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상(商)과 주(周)까지 물려졌고, 그러자 또 그 주대(周代)에 그 거품으로부터 포사(褒姒-後述)가 탄생했다고 한다.
참고4: 유루(劉累)는 기원전 1734년부터 기원전 1692년까지 살았던 사람으로, 하(夏) 왕조의 중신(重臣)이었으며, 요(堯)의 자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漢) 유방(劉邦)의 123대 선조였고, 그리하여 그 유(劉) 씨의 시조로 되어있다. 그리고 또 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기(祁) 씨(氏)와 두(杜) 씨도 그의 자손이었다고 한다. 그는 환용 씨(豢龍氏)라는 일족에게서 용(龍)을 사육하는 방법을 배운 후, 공갑(孔甲)의 명을 받아서 용(龍)들을 사육했지만 실패하자 도망쳤다고 하며, 그 전에 공갑(孔甲)으로부터 어용(御龍) 씨라는 성(姓)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참고5: 말희(末喜)는 하(夏) 최후의 제(帝) 걸(桀) 비(妃)들 중 하나였으며, 말희(妺喜) 또는 말희(末嬉) 또는 말희(妺嬉)라고도 쓰지만, 그러나 간혹 말(妺)을 매(妹)로 혼동하여 표기한 곳도 다수 있으므로 참고 바람. 아무튼, 그 말희(末喜)는 당시, 산동(山東) 유시(有施) 씨의 딸이었다고 하며, 걸(桀)이 그 유시(有施) 씨를 토벌했을 때, 항복의 의미로 걸(桀)에게 헌상되었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또 일설(一說)에 의하면, 걸(桀)이 항복의 의미로 그녀를 헌상 받았던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걸(桀)이 그녀를 요구했던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당시 절세(絶世)의 미녀였던 그 말희(末喜)는 걸(桀)의 마음에 들었고, 그러자 비(妃)가 되어서 사랑을 받았다. 그러자 말희(末喜)는 걸(桀)에게 궁전을 지어달라고 요구했는데, 그러자 걸(桀)은 경궁(傾宮)이란 거대한 궁전을 짓고는, 그 낙성(落城-竣工) 축하 때에 일찍이 그 예가 없었던 대규모의 연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축연(祝宴)에서는 연못에다 술을 채우고, 나무(木)마다에 고기(肉)를 걸어둔 육산포림(肉山脯林)이 행해졌다고 하며, 그리고 또 말희(末喜)가 견(絹-명주)을 찢는 소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나라 안에 있던 견(絹)을 고가(高價)로 긁어모았다고 했는데, 그러자 그런 난행(亂行)을 나중에 사람들은 <열백(裂帛-비단을 찢는 소리)의 소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포사(褒姒)의 고사(故事)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으며, 포사(褒姒)는 후술(後述)함> 아무튼 그 후, 걸(桀)은 충언을 간(諫)하던 현신(賢臣) 관용봉(關龍逢)을 죽였고, 그러자 탕(湯)이 군사를 일으켜서 하(夏)를 멸했다. 그러자 걸(桀)과 말희(末喜)는 탕(湯)에게 붙잡혀서 남소(南巢-양쯔 강 유역에 있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음)의 어떤 산으로 추방되었고, 그러자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바로 그것을 하상혁명(夏商革命) 또는 은혁명(殷革命)이라고 하며, 그리고 또 여자에 약했던 그 걸(桀)은 후세에 악왕(惡王)으로 불렸을 뿐만 아니라, 하걸은주(夏桀殷紂)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후세의 역사서 국어(國語)에서도 위와 같은 내용이 실렸다고 하며, 그리고 또 열녀전(烈女傳)에도 하걸말희(夏桀末喜)를 은주달기(殷紂妲己)와 주유포사(周幽褒姒)와 함께 나란히 세우고는 <말희(末喜)는 하(夏) 걸(桀)의 비(妃)가 되었는데, 아름답기는 했지만, 덕(德)이 부족했고, 도(道)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마음이 대장부 같았기 때문에, 허리에는 검(劍)을 찼으며, 머리에는 관(冠)을 썼다. 그리고 또 음란(淫亂)하고 사치스러운 여자였으며, 걸(桀)로 하여금 도(道)를 잃게 만들었다>라고 비판했다.
참고: 그러나 일설(一說)에는, 그녀가 걸(桀)에게 망했던 자신의 부족(部族-또는 氏族)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했었다고 하는 설(說)도 있다.
그리고 또 황보밀(皇甫謐)의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도 <말희(妺喜)는 매일 궁녀(宮女)들에게 술을 마시게 했다. 걸(桀)은 말희(妺喜)를 항상 무릎 위에 앉혔다. 말희(妺喜)는 견(絹)을 찢는 소리를 듣고 웃었다. 그리하여 걸(桀)은 견(絹)을 모았다. 걸(桀)은 말희(妺喜)가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라는글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그 末喜의 에피소드는 은(殷) 주왕(紂王)의 비(妃)였던 달기(妲己)와 서주(西周) 유왕(幽王)의 비였던 포사(褒姒)의 에피소드와 거의 닮은 점이 많은데, 그것은 또 걸(桀)의 전설을 후세에서 유용(流用)했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또 그러한 구성(構成) 또는 구조(構造) 즉, 미녀에게 빠졌던 왕이 간언(諫言)을 한 충신을 죽였다든지, 그리하여 명신(名臣)의 도움을 받았던 한 영웅이 그런 왕을 멸했다든지 하는 등의 이야기구조는 중국사(中國史)에 있어서 신화의 한 전형(典型)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또 <부권제(父權制)사회>의 한 특징으로, 실제로 그런 여성들에 의해서 나라가 망했다기보다는, 혁명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서 그 여성들을 이용하려 했던 측면이 강했던 결과에서였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은 또 근래 모택동(毛澤東)이 죽자 강청(江靑)이 비판받았던 예에서도 잘 알 수 있었던 것이었으며, 그것으로 또 아직도 중국에서는 그런 고질병이 만연해서 내려오고 있다고 이해할 수가 있다.
<참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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