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2)


 <周>


 주(周-기원전 1046년경에서 기원전 256년)는 중국 고대의 왕조로, 은(殷)을 멸하고 왕조를 열었다.
 국성(國姓)은 희(姬). 주(周)의 전설상의 시조(始祖)는 후직(后稷)이라고 알려져 있고, 제 순(帝舜)을 섬겼으며, 농정(農政)에 공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고공단보(古公亶父) 시대에 주의 땅에 정주(定住)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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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직(后稷)은 전설상의 주(周)왕조 희(姬) 성(姓)의 선조로, 중국 농업의 신으로 추앙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사기(史記)의 주(周) 본기(本紀)에 의하면, 제 곡(帝嚳)의 원비(元妃-正妃)였던 강원(姜原)이 들(野)에서 발견했던 거인(巨人)의 족적(足跡)을 밟고 임신했다고 하며, 그로부터 1년 만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자 강원(姜原)은 그 갓난아이를 길에다 버렸는데, 그러자 또 우마(牛馬)가 그 아이를 피해서 지나갔다. 그러자 또 강원(姜原)이 이번에는 숲에다 그를 버리려고 했으나, 사람들이 자주 나타나는 차에 버리지를 못했고, 그러자 또 강원(姜原)이 이번에는 얼음 위에 그를 버렸으나, 새들이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강원(姜原)은 그것을 이상히 여겨서 마침내 그를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강원(姜原)은 그의 이름을 기(弃)라고 지었다고 했으며, 그 기(弃)는 기(棄)와 같은 의미인 버린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또 산해경(山海經)에서는 그를 제 준(帝俊-帝嚳의 다른 이름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의 아들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 기(弃)는 성장하자 농경(農耕)을 좋아했고, 그래서 또 마(麻)와 콩(菽)을 심어놓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순(舜)을 섬기게 되었으며, 농사(農師) 직을 맡게 되었다. 그런 다음 후직(后稷)이란 관(官)을 맡게 되었으며, 이어서 태(邰)에 봉해져서 후직(后稷)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 불줄(不窋)이 그의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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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주(周)왕조 초대 무왕(武王)의 증조부(曾祖父)였고, 주(周) 선왕(先王) 중 한명이었다. 공숙조류(公叔祖類)의 아들이었으며, 성(姓)은 희(姬)였고, 선조(先祖) 후직(后稷)과 공유(公劉)의 업(業)을 이어받아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고공(古公)이라고도 불린다.

 ★ 공유(公劉-생몰년불명)는 전설적인 주(周)의 선왕(先王)으로, 국(鞠)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며, 후직(后稷)의 증손(曾孫)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융적(戎狄-서방, 북방오랑캐를 가리키는 말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들을 말함)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줄립(窋立-公劉의 祖父, 后稷의 子) 말년(末年)에, 하후(夏后) 씨(氏-夏왕조)를 떠나서 융(戎)과 적(狄)을 떠돌았던 후직(后稷)의 일족(一族)은, 그 손(孫) 공유(公劉) 대에 이르자, 다시 후직(后稷)의 업을 이어받아서 농경(農耕)을 시작했다. 그리고 또 그때, 공유(公劉)는 각지를 전전하면서 칠수(漆水)와 저수(沮水)에서 위수(渭水)를 건너서 목재(木材)를 조달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곧 부유하게 되었고, 그 후로 그를 칭송하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 소문을 듣고 타국(他國)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거처로 이주해 왔다. 그러자 시인(詩人)이 그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으며, 그 노래는 바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대아(大雅)의 독공유(篤公劉)>다. 그리고 그의 자식 대(代)에 빈(豳)에 정주(定住)했다.

 아무튼, 시경(詩經)에서는 대왕(大王)으로, 그리고 주(周)가 은(殷)을 멸한 후에는 태왕(太王)으로 존칭되었다. 그리고 또 태공(太公)으로 표현한 곳도 있으며, 문왕(文王)이 여상(呂尙)의 일을 <태공(太公)이 원했던 사람이었다>라는 뜻으로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불렀다는 일화(逸話)는 유명하다. <단, 태공(太公)은 조부(祖父) 또는 부(父)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라는 이설(異說)도 있다> 아무튼, 그는 후에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서 일족(一族)을 테리고 기산(岐山)의 록(麓)이란 곳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그때, 사기(史記)에 의하면 백성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그들과 싸우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고공(古公)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으로 그들을 달랬다고 한다. <백성들이 임금을 옹립하는 것은 나라를 잘 다스려 달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백성들이 그들과 싸우려 하는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백성들을 전쟁에 내몰면서까지 임금의 자리에 앉아있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이다>

 그 후, 고공(古公)은 자신의 일족들을 데리고 록(麓)으로 도망을 갔고, 그러자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그곳으로 이주했다. 그러자 고공(古公)은 성곽(城郭)과 가옥(家屋)을 건축했으며, 부락을 나누어서 백성들을 정주시켰고, 5관(官)을 만든 다음 행정을 돌보도록 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시(詩)를 지어서 그의 덕을 칭송했다.

 그리고 또 시경(詩經)에는 그가 강족(姜族)의 처(妻)와 함께 그곳으로 가서 번영했다고 했으며, 그리고 그 후에 상(商)의 왕실과 친교를 맺었고, 그러자 또 그의 아들이었던 계력(季歷)에게 왕실로부터 아내가 주어졌으며<그러자 열녀전에서는 지(摯)의 임 씨(任氏)의 딸이었다고 함>, 그러자 또 그 아내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나중의 문왕(文王)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고공(古公)에게는 계력(季歷) 외에도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이라는 장남과 차남이 있었다지만, 그러나 고공(古公)이 어느 때에 예언하기를 <나의 뒤를 이어서 흥륭(興隆)할 자는 바로 창(昌-文王의 諱)이 아날까>라고 말을 했다고 하고, 그러자 동생 계력(季歷)에게 후계를 양보하기 위해서 그 두 장남과 차남은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고공단보(古公亶父) 사후, 계력(季歷)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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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그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3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설명은 위와 같으며, 그리고 계력(季歷)의 아들 창(昌)이 탄생했을 때, 여러 가지의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자 고공단보(古公亶父)는 그가 후계가 될 것임을 예언했고, 그러자 계력(季歷)의 두 형은 남쪽의 형만(荊蠻)이란 곳으로 떠나서 그곳에서 부임했다. 그리고 태백(太伯)은 그곳에서 구오(句吳)란 나라를 열었고, 그러자 형만(荊蠻)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고 그 나라가 바로 후의 오(吳)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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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은 위의 설명대로, 태백(太伯)은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장남이었고, 우중(虞仲)은 차남이었다. 그리고 태백(太伯)은 후에 오(吳)의 시조(始祖)가 되었으며, 태백(泰伯)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우중(虞仲)은 사기(史記)의 주(周) 본기(本紀)에서는 우중(虞仲)이라고 되어있지만, 그러나 오세가(吳世家)에서는 중옹(仲雍)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공히 생몰연대는 미상이지만, 그러나 기원전 12세기에서 11세기에 살았던 인물이었고,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이 주(周)를 떠났을 때, 주(周)의 사람 두 사람이 그들을 전송하러 나갔는데, 그러자 그 두 사람은 그 주(周)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랐고, 전신(全身)에 자청(刺靑-먹물을 뜨는 것으로, 일종의 文身)을 하는 것으로, 다시 그곳으로 돌아올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그 후, 태백(太伯)은 오(吳)를 열었지만,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자손이 없었다. 그러자 동생 우중(虞仲)이 그의 뒤를 이었고, 그러자 또 후에 사기(史記)는 그의 자손인 오(吳)에 경의를 표했으며, 논어(論語)의 태백(太伯)편에서도 그의 지덕(至德-최고의 德)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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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력(季歷)은 위의 설명대로이며, 그 역시도 생몰년미상이고, 고공단보(古公亶父)의 3남으로, 태임(太任)이란 여성을 아내로 맞았다. 그리고 후에 문왕(文王) 창(昌)을 낳았으며, 그 후에 무왕(武王)으로부터 추존(追尊)되었고, 왕계(王季)라고 칭해졌다. 그는 고공단보(古公亶父)의 뒤를 이었고, 그리하여 고공단보(古公亶父)와 같은 정치자세로 정의(正義)를 행했지만, 그러나 후에 은(殷)의 문무정(文武丁)에게 감금되어 아사(餓死)했다.

 ★ 문무정(文武丁=太丁)은 은조(殷朝) 제28代 제(帝)로, 그러나 성탕(成湯)의 아들 중에서도 태정(太丁)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과 혼동이 되어서, 사기(史記) 등에서는 그 이름이 태정(太丁)이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또, 갑골문(甲骨文)에서는 문무정(文武丁)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실제로는 문무정(文武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주(周)의 계력(季歷)을 중용했지만, 그러나 후에 감금해서 아사(餓死)시켰다. 그리고 또 그는 기자(箕子)와 비간(比干) 그리고 제(帝)을(乙)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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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그 후에 창(昌)이 또 그 후계를 이었고, 그러자 또 그 창(昌)은 고공단보(古公亶父)의 기대대로 주(周)의 세력을 확장시켰고, 은(殷)에 의해서 서백(西伯)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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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백은 나라를 동서남북으로 나누었을 때, 그 서쪽을 관할하는 권한을 가졌던 제후(諸侯)로, 왕의 판단에 관계없이 독단으로 무력을 사용해서 그 지방을 다스리는 것이 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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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자 그때 이미 주(周)는 은(殷)을 상회(上廻)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창(昌)은 어디까지나 은(殷)의 신하로 지내는 것을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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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왕(文王-기원전 1152년부터 기원전 1056년으로 壽命은 97세 卒)은 중국 주조(周朝)의 시조(始祖)였으며, 성은 희(姬), 휘(諱)는 창(昌), 부(父) 계력(季歷)과 모(母) 태임(太任)의 자(子), 주조(周朝)의 창시자였던 무왕(武王)의 아버지였다.

 문왕(文王)은 상(商)의 신하로서,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었고, 부(父) 계력(季歷) 사후(死後)에 주(周)의 땅을 승계했으며, 그 후에 본거지를 풍하<灃河-渭河의 지류로, 湖南성의 예수(澧水)와는 글자가 다름>의 서안(西岸)에 있던 풍읍(豊邑-더욱 정확하게는 豐邑이며, 후의 長安 근처)으로 이주했다. 그리고는 인정(仁政)을 펼쳐서 그 지방을 풍요롭게 했다.

 그런데 그때, 상(商)은 폭군의 대명사였던 주왕(紂王)이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어느 때, 창(昌)과 같이 삼공(三公)의 한사람이었던 악숭우(鄂崇禹)가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것으로 해서 창(昌)이 무심결에 한숨을 쉬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가 보고 주왕(紂王)에게 불만이 있다고 참언(讒言-中傷謀略)을 했고, 그러자 또 창(昌)은 그 때문에 유리(羑里)란 곳에 유폐되었으며, 그곳에서 주역(周易)을 썼다고 한다.

 ★ 단, 주역(周易)의 성립에는 먼저 복희(伏羲)가 팔괘(八卦)를 만들었고, 거기에 더해서 64괘를 만들었는데, 일설(一說)에 의하면 그 64괘를 만든 사람은 신농(神農)이었다고 하며, 그 다음은 주(周)의 문왕(文王)이 괘사(卦辭)를 지었고,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지었으며, 그리고 또 일설(一說)에는 그 효사(爻辭)도 문왕(文王)이 지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랬던 것이 공자(孔子)가 전(傳)을 써서 상구(商瞿)에게 전했으며, 한 대(漢代)의 전하(田何)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나머지는 다음 기회에 설명함.

 아무튼 그 후, 창(昌)은 재보(財寶)와 영지(領地)를 제 신(帝辛)에게 헌상하고 석방되었으며, 서백(西伯)에 부임되었다. 그 후, 창(昌)은 주왕(紂王)의 눈 밖에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인정(仁政)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창(昌)은 근처 나라 왕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 후로도 영토를 넓혔다든지,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을 군사(軍師)로 맞이하였고, 그러자 또 제후들은 창(昌)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창(昌)은 결코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았고, 그래서 끝까지 상(商)의 신하로 남았다지만, 그러나 그가 죽자 상기(上記)대로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했으며, 그것으로 그는 후에까지 칭송되면서 위정자의 본보기가 되었다.(文王 끝)

 
백읍고(伯邑考-생몰년미상)주(周)의 왕족으로, 문왕(文王)의 장자(長子)였으며, 무왕(武王)의 형이었다. 어머니는 대사(大姒)였고, 문왕(文王)이 13세 때 그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사기(史記)의 관채세가(管蔡世家)에 의하면, 문왕(文王)은 차남 무왕(武王)과 4남 주공단(周公旦)이 특히 뛰어나고 문왕(文王)에게 협력하고 보좌했기 때문에, 그래서 백읍고(伯邑考)는 젖혀두고 무왕(武王)을 태자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무왕(武王)이 주(周)왕으로 즉위했을 때는 이미 백읍고(伯邑考)는 사망한 뒤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자손과 봉지(封地) 등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예기(禮記)의 단궁(壇弓)에도 문왕(文王)이 그를 버리고 무왕(武王)을 선택했다고 했으며, 그리고 또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문왕(文王)이 은(殷) 주왕(紂王)에 의해서 유리(羑里)에 유폐되었을 때, 그 백읍고(伯邑考)는 은(殷)의 인질로 있었다고 했으며, 그러자 또 주왕(紂王)은 그를 죽인 후에 삶아서 죽을 만든 다음, 문왕(文王)에게 먹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주왕(紂王)은 문왕(文王)에게 말하기를 <성인(聖人)이라면 자기 자식 삶은 국물을 어찌 먹겠는가?>라고 했다지만, 그러자 문왕(文王)은 그것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주왕(紂王)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도대체 누가 당신을 성인(聖人)이라고 했던가? 자기 자식 삶은 국을 먹고도 저렇게 태연한 당신을!> 그는 또 명대(明代)의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에서는 금(琴-거문고)의 명수(名手)로 묘사되어 있고, 아버지 문왕(文王)이 유폐되었을 때, 그 석방을 위한 재보를 모으기 위해서 왕도(王都) 조가(朝歌)로 떠났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주왕(紂王)에게 헌상했던 원숭이가 달기(妲己)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에 외육형(隗肉刑-凌遅刑)에 처해졌으며, 그 유체(遺體)는 육병(肉餠-일종의 햄버그)으로 만들어서 문왕(文王)에게 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문왕은 그것을 먹고 풀려났다고 하며, 그러자 또 문왕(文王)은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가던 길에 토해서 그것을 뱉어냈는데, 그러자 그것은 토끼로 변했다고 한다.

 ○ 위의 외육형은 능지형 또는 능지처참형으로도 불리지만, 그러나 좀 더 상세히 설명을 하면, 사람을 매단 다음 살점을 조금씩 발라내어 고통을 주면서, 좀 더 천천히 죽이는 잔인한 형벌을 말함.

 ★ 여상(呂尙)은 기원전 11세기경에 활약했던 주(周)의 군사(軍師)였으며, 나중에 제(齊)의 시조(始祖)가 되었던 인물이다. 성은 강(姜),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 또는 망(望), 자(字)는 자아(子牙) 또는 아(牙), 시(諡)는 태공(太公). 제(齊)태공(太公), 강(姜)태공(太公)으로도 불린다. 일반적으로는 태공망(太公望)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상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전설만 무성한 인물이며, 그 실태(實態)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리고 역시, 주(周)의 신하로 지냈던 경위에 대해서도 전승(傳乘)만 무성할 뿐이며, 출신이 강(羌-중국 서북부)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그 또한 불명이다. 그러나 그는 주(周)의 군사(軍師)로서, 문왕(文王)의 아들 무왕(武王)을 보좌해서 은(殷)을 목야(牧野)에서 파(破)했으며, 후에 제(齊)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가 육도(六韜)란 병법서를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는 전부 창작으로, 후대(後代)에 다른 전략가에 의해서 저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전승(傳乘)으로 전해져오는 여상(呂尙)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1. 태공망(太公望)이란 별명은 일반적으로는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그를, 문왕(文王)이 <그야말로 우리 태공(太公-祖父)께서 기다려 바라마지 않던 인물이다>라고 말을 하고는 자신의 신하로 불러들였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그는 굽히지 않은 바늘, 즉 말 그대로 바늘 같은 낚싯바늘을 물에 담그고만 있었다거나, 또는 그 바늘을 물에 넣지 않고 수면 위에 띄운 채로 앉아만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2. 협서성(陝西省) 보계(寶鷄)에는 그가 낚시를 했던 자리(釣魚臺)가 있다고 하며, 현재는 관광지가 되었다.
 3. 그가 제(齊)에 봉해졌을 때에, 이미 헤어졌던 그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찾아왔으나, 이미 엎지른 물(覆水盆)은 어쩔 수가 없다면서 그냥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 그가 때를 기다리면서 바늘 없는 낚시를 하고 있었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버리고 떠났던 여자를 말함.

 4. 그가 주공단(周公旦)과 인재(人材)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주공(周公)은 혈연(血緣)주의를 강조했다. 그러자 그는 <그런 나라는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가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곧 그들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주공(周公)은 그런 능력주의(能力主義)의 태공(太公)에 대해서 <그런 나라는 가신(家臣)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는데, 그런데 나중에 주공(周公)의 노(魯)는 주변 나라들의 알력(軋轢)으로 시달리다 멸했으며, 태공(太公)의 제(齊)는 대신(大臣) 전(田)씨(氏)가 찬탈(簒奪)해서 멸망했다.





 <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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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1)


 <殷>         


 은(殷 또는 商-기원전 17세기경에서 기원전 1046년)은 중국의 왕조 중 하나였으며, 문헌(文獻)에는 하(夏)왕조를 멸하고 세워진 왕조라고 했고, 고고학적으로 그 실재(實在)가 확인되고 있는 최고(最古)의 왕조였다. 그리고 기원전 11세기에 주(周)에 의해서 멸해졌다.


 주왕(紂王) 제 신(帝辛-기원전 1100년경)은, 은(殷)왕조의 제30대 왕이었으며 또한 최후의 왕이었다.

 아무튼 당시, 은(殷)의 최고 중요한 지위였던 삼공(三公)에는 제후들 중의 실력자였던 서백창(西伯昌)이 있었고, 그리고 9후(候)와 악공(鄂公)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9후(候)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자 신(辛)이 그녀를 데려가서 첩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후에 그

9후(候)와 악공(鄂公)이 연루된 모반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신(辛)은 9후(候)를 잡아서 소금에 절여버렸고(젓갈로 만듦), 악공(鄂公)은 건육(乾肉)을 만드는 것으로 처형했으며, 그 아름다웠다던 9후(候)의 딸도 함께 처형했다. 그리고 또한, 그때 서백창(西伯昌)도 의심을 받아서 유폐되었는데, 그러나 서백창(西伯昌)은 많은 재물을 헌상해서 석방되었다. 그 후, 서백창(西伯昌)이 죽자 무왕(武王)이 그 뒤를 이었으며, 그리하여 드디어 천하의 제후들은 신(辛)을 처단할 것을 결의했고, 그러자 또 무왕(武王)은 서백창(西伯昌)의 위패(位牌)를 내세우고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또 그때, 하늘의 소리를 들었던 무왕(武王)은 일단 군을 후퇴시켰다. 그리하여 그 2년 후에 다시 군을 일으켰으며, 그렇게 해서 양군(兩軍)은 목야(牧野)에서 격돌했다.

 <목야의 싸움>

 목야(牧野)의 싸움은, 고대 중국 기원전 11세기에 은(殷)의 주왕(紂王)과 주(周)의 무왕(武王)을 중심으로 했던 세력 싸움이었고, 주(周)가 승리해서 은(殷)이 멸했던 싸움이었다. 그리고 또, 그리하여 그때부터 주(周)의 천하가 시작되었다.

 당시, 은(殷) 주왕(紂王)의 폭정을 견디지 못했던 사람들은 마침내 그를 멸하기로 결의를 했다. 그러자 그것을 미리 알게 되었던 주왕(紂王)은 노하고는, 그 결의에 가담했던 제후들을 불러들여서 죽인 후에 소금에 절여버렸다. 하지만 그때, 서백희창(西伯姬昌-周의 文王)은 독실(篤實)한 성격으로 그 결의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주왕(紂王)은 그도 의심을 해서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는 인질로 잡고 있던 서백희창(西伯姬昌)의 장남 백읍고(伯邑考-武王의 兄)를 삶아서 죽(일종의 수프-soup)으로 만든 다음, 그것을 서백희창(西伯姬昌)에게 먹였다. 그러자 서백희창(西伯姬昌)의 가신(家臣)들이 막대한 양의 재산을 모아서 주왕(紂王)에게 헌상했고, 그 덕으로 서백희창(西伯姬昌)은 풀려났는데, 서백창(西伯昌)은 그에 한(恨)을 품고 은(殷)에의 복수를 다짐했다.

 그 후, 주(周)로 다시 돌아갔던 서백창(西伯昌)은 인근(隣近)의 제국(諸國)을 병합해서 국력을 증대시켰지만, 그러나 당시 노령(老齡)이었던 서백창(西伯昌)은 그 대결을 바로 목전에 두고 사망했다. 그러자 차남이었던 희발(姬發-후의 武王)이 태자(太子)로서 그 뒤를 이어받았고, 그리하여 이윽고는 제후들과 함께 은(殷)에의 결전에 나섰다. 그러자 그 군대는 순식간에 대군(大軍)이 되었으며, 그 결과로 또 쉽게 은(殷)을 공략할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 순간에 돌연 희발(姬發)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회군(回軍)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불명(不明)이지만, 그러나 아마도 그때 점괘(占卦)가 불길(不吉)로 나왔던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또 그때, 희발(姬發)이 제후들의 힘을 빌려서 그 은(殷)을 공략하기는 쉬웠겠으나, 그러나 그때는 이미 강해져있던 제후들이 그 다음에 자신이 주(周) 왕조를 여는 데까지 협조할 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 않았겠는가 하고 추측해볼 수 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또 그로부터 수년(數年-2년?) 후에 희발(姬發)은 다시 군을 일으켰으며, 그때는 또 여러 가지의 서조(瑞兆-吉兆)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주군(周軍)은 맹진(孟津)이라는 항구에서 황하를 건너려고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마침 뇌우(雷雨)와 폭풍이 몰아쳤기 때문에 황하를 건널 수가 없었다. 그러자 희발(姬發)은 화가 나서 강의 신(神)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천명(天命)은 벌써 떨어졌다! 그런데 어쩌자고 나의 앞길을 막는단 말인가?!> 그러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개였고, 그렇게 해서 주군(周軍)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그런데 또 그때, 그 강을 건너던 그 주군(周軍)의 배에 백어(白魚-뱅어)들이 날아 들었다는데, 그런데 그 백어(白魚)는 은(殷)의 상징(symbol)이었다고 한다.



<하남 성>

<학벽시 위치도>

 
 그렇게 해서 주군(周軍)과 은군(殷軍)은 수도였던 조가(朝歌-현재의 河南省 鶴壁市) 근처의 목야(牧野)라는 곳에서 결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하지만 사기(史記)의 주(周) 본기(本紀)에 의하면, 그때는 은(殷)도 준비에 만전(萬全)을 기했던 상태였고, 군사도 70만 명이나 동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주군(周軍)의 병력은 겨우 40만이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또 그 결전 바로 전에 또 다시 뇌우(雷雨)가 몰아쳐서 그치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희발(姬發)이 그것을 보고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전군(全軍)에 용기를 북돋았다고 한다. <옛날, 은(殷)의 탕왕(湯王)이 하(夏)의 걸왕(桀王)을 파(破)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을 때도 저렇게 뇌우(雷雨)가 몰아쳤다던데,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주(周)가 승리할 것이란 전조(前兆)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그때, 은군(殷軍)은 그 수에서 우월했다고는 했지만, 그러나 그 질(質)에서는 형편없는 군대였다. 그러니까 그 무리들 중에서는 전장(戰場)에서의 불길(不吉)을 빌기 위한 신관(神官)을 위시(爲始)해서, 그동안 은(殷)이 복속시켰던 조그마한 나라들의 잡병(雜兵)들과 노예(奴隸)병(兵)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은 또 그동안 포학(暴虐)한 주왕(紂王)의 지배에 아주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전쟁이 시작되자 그들은 스스로 창끝을 돌려서 은군(殷軍)을 공격했고, 그러자 은군(殷軍)은 곧 괴멸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승리한 주군(周軍)은 이제 주왕(紂王)을 잡기 위해서 조가(朝歌)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었던 주왕(紂王)은 희망을 잃고 왕궁(王宮)에 불을 지르고는 그 불길 속에서 타죽었다.(혹은 鹿台 위에서 분신자살했다) 그러자 또 희발(姬發)은 그 주왕(紂王)의 유체(遺體)를 찾아내서 3발의 화살을 쏜 후, 도끼로 그의 머리를 잘랐다고 한다.

 그리고 또 상서(尙書)의 목서(牧誓)에 의하면, 그 날의 간지(干支)가 갑자(甲子)였다고 하고, 출토된 청동기의 명문(銘文)에서도 그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600년이나 내려왔던 은(殷)은 멸망했고, 그때부터 희발(姬發)이 주(周) 왕조를 열게 되었다.(紂王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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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은(殷) 멸망 후, 주왕(紂王)의 아들이었던 무경(武庚)은 주(周) 무왕(武王)에 의해서 은(殷)의 고지(緣故地)에 봉해졌다. 그러자 무왕(武王) 사후(死後)에 그는 무왕(武王)의 형제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주살(誅殺)되었다.

 그 후, 녹부(祿父=武庚)의 백부(伯父)였던 미자계(微子啓-紂王의 형)가 송(宋)에 봉해졌고, 그러자 그는 그곳에서 은(殷)왕조의 제사를 계속해서 모셨다. 하지만 그 미자계(微子啓)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었다. 그래서 같은 주왕(紂王)의 형이었던 미중연(微仲衍)이 송공(宋公)을 이었다. 그리고 또 이설(異說)도 있지만, 어쨌든 그 미중연(微仲衍)의 자손이 공자(孔子)라는 설이 있고, 그래서 또, 그 공자(孔子)의 가계(家系)가 세계 최장(最長)의 가계로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상인(商人)>이란 말은, 그 상(商=殷)의 사람(商人)들이 나라가 망한 후에 생업(生業)을 목적으로 각지를 전전하면서 물건들을 팔러 다녔던 데서 유래했다고 하고, 그래서 또 점포(店鋪)를 가지지 않고 또는 점포도 없이 각지를 전전하면서 물건을 팔러 다니는 사람들을,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 바로 상(商)의 사람들이다>라고 말을 했던 것으로부터 상인(商人)이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하지만 그에는 또 부정의 說도 있다)

 아무튼 또, 그런데 그 주(周)가 은(殷)을 멸했던 때가 정확이 언제였던가 하는데 많은 관심들이 있었고, 그래서 또 중국의 <하상주년표(夏商周年表) 프로젝트>는 그것을 기원전 1046년이라고 주장했던 바 있다.

 하지만 또 그에 대해서는 오래된 설(說)로,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무왕(武王)부터 유왕(幽王-西周 최후의 왕)까지는 257년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유왕(幽王)이 죽은 것이 기원전 771년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은(殷)이 망했던 것은 기원전 1027년이라는 설과 <한서(漢書)>에 주(周)는 867년이나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또 그것은 기원전 1123년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아무튼, 그것에 대해서는 위의 것 외에도 아주 많은 설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은(殷) 멸망의 해를 제일로 높게 잡았던 것은 기원전 1127년이고, 그 반대로 제일 아래로 잡았던 것은 기원전 1018년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그 은(殷) 사회의 기본단위는 읍(邑)이라고 불렸던 민족끼리의 집락(集落)이었으며, 그래서 수천(數千)의 읍(邑)들이 수백(數百)의 호족(豪族)들과 왕족에게 종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殷)의 왕은 그들 지배계급 연합체에서도 최대의 유력자였으며, 또한 절대의 권력자였기도 했다. 하지만 지방 유력호족들의 독립성은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은(殷)의 왕은 단지 중원(中原)의 일부만을 지배했던데 불과했다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아래는 殷商王室系圖이므로, 필요하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은(殷)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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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0)

 <夏>

<夏의 영역 圖>

 
 夏는 기원전 2070년경부터 기원전 1600년경까지 중국에 존재했던 최고(最古)의 왕조(王朝)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하후(夏后)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또한 하(夏)와 은(殷) 그리고 주(周)를 삼대(三代)라고 하며, 사기(史記)의 죽서기년(竹書紀年) 등,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는 초대(初代) 우(禹)로부터 말대(末代) 걸(桀)까지 14세(世) 17대(代) 471년간 계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 은(殷)에 의해서 멸해졌으며, 그리고 종래(從來) 그것은 전설로 취급되기도 했으나, 근래의 고고학 자료의 발굴에 의해서 점점 실재(實在)였던 것으로 재평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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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殷>
 



 은(殷 또는 商-기원전 17세기경에서 기원전 1046년)은 중국의 왕조 중 하나였으며, 문헌(文獻)에는 하(夏)왕조를 멸하고 세워진 왕조라고 했고, 고고학적으로 그 실재(實在)가 확인되고 있는 최고(最古)의 왕조였다. 그리고 기원전 11세기에 주(周)에 의해서 멸해졌다.

 ※ 단, 은(殷)은 이(夷-漢民族이 봤을 때의 異民族)이기 때문에, 중국 최고(最古)의 왕조는 주(周)라는 설이 있으며, 한민족(漢民族)은 현재 중국인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족이다. 그리고 그 유래는 한(漢) 시대까지 거슬러서 올라가며, 그 전에는 한민족(漢民族)이라고 하지 않고 화하족(華夏族)이라고 불렀다. 그랬던 것이 한(漢)이 시작되면서부터 그 명칭이 사용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은(殷)은 주(周) 등에 의해서 사용되었던 명칭이었으며, 그것은 하(夏) 역시도 마찬가지로 은(殷)에 의해서 불려졌던 이름이었다. 그리고 사기(史記)에서는 일관되게 은(殷)이라고 표현했으며, 그 한편으로는 상(商)을 자칭(自稱)했다는 관점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현재 중국에서는 그 은(殷)을 거의가 상(商) 또는 상은(商殷)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또 그 상(商)은 <통지(通志)> 등에 의하면 은(殷)왕조의 조계(祖契)가 그 상(商-)에 부임했던 것이 유래였다고 한다.

 ※ 계(契)는 은(殷)왕조의 시조(始祖)라고 생각되는 전설상의 인물이었고, 자계(子契)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는 유융 씨(有娀氏)의 딸로, 제 곡(帝嚳)의 둘째 왕비였던 간적(簡狄)이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현구(玄丘)라는 곳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제비 알을 먹고 태어났다고 하며, 요(堯)의 시대에 탄생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자 그는 그 후에 요(堯)와 순(舜) 그리고 우(禹)를 섬겼으며, 특히 우(禹)의 황하(黃河) 치수(治水) 때 우(禹)를 도왔고, 그러자 또 순(舜)은 그 공적을 높이 평가해서 상(商)의 땅으로 그를 부임시키면서 자(子)라는 성(姓)까지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간적(簡狄)은 위의 설명대로, 고대중국의 전설상의 여성이었으며, 유융 씨(有娀氏)의 장녀(長女)였고, 제곡(帝嚳)의 둘째 왕비, 계(契)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또 그녀는 요(堯) 시대에 여동생과 함께 물놀이를 갔다가 알을 입에 물었던 현조(玄鳥=제비)가 실수로 떨어뜨린 오색(五色)의 진귀한 알을 주웠다고 한다. 그러자 자매(姉妹)는 그것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었지만, 그러나 간적(簡狄)이 그것을 차지했다. 하지만 간적(簡狄)은 또 실수로 그것을 삼키고 말았는데, 그러자 그 후에 계(契)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간적(簡狄)은 인사(人事) 즉, 지금 말로 하면 정치 같은 것을 좋아했고, 천문(天文)을 알았다고 하며,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 후, 계(契)가 성장했을 때, 그에게 사람의 도리(道理)를 가르쳤다고 하며, 그러자 또 총명하고 우수했던 계(契)는 그 가르침을 잘 받아서 나중에 남들에게 이름을 알릴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후에 계(契)는 요(堯)를 섬기게 되었고, 이어서 사도(司徒)에 임명되어서 박(亳)에 봉해졌다.

 ○ 사도(司徒)는 삼공(三公)의 하나로, 고대 중국에서 호구(戶口)와 전토(田土) 그리고 재화(財貨)와 교육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벼슬이름이며, 박(亳)은 땅이름으로, 위치는 아래의 그림 참조바람.

<현 亳州市> 

 
 그 후, 순(舜)이 즉위한 후에도 그는 사도(司徒)의 직을 유지했으며, 그의 자손대대로 그 박(亳)에 살았고
 성탕(成湯) 때에 천자(天子)가 되었다.

 그리고 은허(殷墟)에서 발견되었던 갑골문자(甲骨文字)로부터 그 도(都)를 상(商) 또는 대읍상(大邑商)이라고 불렀던 사례(事例)도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그런 연고로 그 후의 주(周)는 은(殷)의 도(都)를 상읍(商邑)이라고 불렀다. 


<갑골문자>


 ※ 은허(殷墟)는, 중국 허난 성(河南省)의 안양 현(安陽縣)에 있는 은나라 때의 유적으로, 기원전 14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까지 은나라 후기의 도읍이 있었던 곳이었으며, 19세기 말에 문자가 새겨진 귀갑수골(龜甲獸骨-위릐 사진 참조)이 발굴되었고, 1928년부터 행해졌던 조사에서는 크고 작은 분묘와 궁전 그리고 종묘지(宗廟址), 움집터, 청동기, 토기, 옥석기(玉石器) 등의 유물이 발굴되어서, 은나라의 정치와 사상 그리고 그 생활과 교역권(交易圈) 등을 알게해 주었다.


<세계유산 은허 유적지>

 
 하지만 그것은 확정적으로 해석된 것은 아니며, 상서(尙書)에서는 상(商)이 사둉되었다.

 그리고 또, 그 왕가(王家)의 성(姓)이 자(子)라고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러나 은(殷)에서는 왕족(王族)을 자정(子鄭) 또는 자상(子商) 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그래서 또 아마도 그것은 자(子) 자(字)에다 영지(領地)라고 생각되는 지명(地名)을 붙여서 불렀던 결과였을 것으로 생각이 되며, 그리고 또한 그들의 성(姓)이 자(子)가 아닌 호(好)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20세기 초두(初頭)까지만 해도 그 은(殷)은 전설상의 왕조로 생각되었고, 특히 19세기 말기의 중국(中國)고대사(古代史) 계(界)에서는 그에 대한 의문을 품으면서 사기(史記)의 기술(記述)조차도 전부 가공(架空)의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런데 그 후에 갑골문자(甲骨文字-龜甲獸骨문자)의 연구가 시작되었고, 그러자 그 내용이 사기(史記)의 기술(記述)과 거의 일치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그것으로 은(殷)의 실재성(實在性)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고고학의 진전에 따라서 그 은(殷)이 <이리강(二里岡) 문화>였다는 것이 통설(通說)이 되었고, 정주(鄭州) 부근이 상(商)왕조의 초기 중심지라고 생각됨에 따라서, 그 <이리강 문화>를 <상(商)왕조의 초기단계>였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은(殷)왕조는 시조(始祖)였던 계(契) 이후, 탕(湯)까지의 14대 간에 8번 도읍을 옮겼다고 하며, 아래는 그 14대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 바랍니다.

 契(始祖)-昭明(契의 子)-相土(昭明의 子)-昌若(相土의 子)-曹圉(昌若의 子)-冥(曹圉의 子)-王亥(高祖-冥의 子)-王恆(王亥의 弟)-上甲微(王亥의 子)-報丁(上甲微의 子)-報乙(報丁의 子)-報丙(報乙의 子)-主壬(報丙의 子)-主癸(主壬의 子)-湯(主癸의 子)

 그리고 은(殷)의 마지막 왕이었던 신(辛-紂王)은 즉위한 후 <달기(妲己)>라는 미녀에게 빠져서 폭정을 일삼았으며, 그 때문에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주살(誅殺)되었고, 그것으로 은(殷)왕조는 어이없이 멸망하고 말았다.

 ※ 
주왕(紂王) 제 신(帝辛-기원전 1100년경)은, 은(殷)왕조의 제30대 왕이었으며 또한 최후의 왕이었다. 그리고 그의 인물상은 아름다운 미모에다 언변(言辯)이 뛰어났었고, 머리의 회전이 매우 빨랐으며, 힘은 또 맹수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하들이 그에게 간언(諫言)을 했어도 오히려 그의 언변에 말려들고 말았다고 했으며, 그러자 그는 더욱 교만해져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도 소홀히 했고, 중세(重稅)를 부과해서 천하(天下)의 보물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우혼(尤渾)과 비중(費仲)이란 자들을 중용(重用)해서 달기(妲己)라는 애첩(愛妾)에게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연회를 열어서 난잡한 일을 벌였으며, 달기(妲己)의 말이라면 모두 따랐다고 한다. 그리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말도 그의 지나친 향락에서 나왔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친척들 중에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이란 현자(賢者)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어느 날, 기자(箕子)는 신(辛)이 상아(象牙)로 젓가락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면 도기(陶器)로 만든 것에는 만족을 할 수가 없고, 오히려 다음에는 옥(玉)으로 만든 것을 찾을 것이다. 그러면 또 그 옥저(玉箸)에 알맞는 요리를 찾을 것인데, 그러면 또 그 요리는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치(奢侈)는 그렇게 해서 끝이 없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辛)은 그런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러자 또 자신의 간언으로 인해서 주살될 공포를 느꼈던 기자(箕子)는 그때부터 미친 것처럼 행동하다가 결국에는 노예의 신분이 되었다고 한다.

 ○ 기자(箕子)는 고조선(古朝鮮)과 함께 논의가 많으므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며, 그래서 그 대충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자(箕子)의 생몰년은 미상(未詳)이며, 중국 은(殷)왕조의 정치가였고, 문정(文丁)의 자(子)였으며, 제 을(帝乙)의 동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辛)에게서는 숙부(叔父)에 해당되었고, 기(箕)나라에 봉해졌기 때문에 기자(箕子)로 불렸다. 그리고 이름은 서여(胥余)였고, 조선(朝鮮) 즉 <기자조선(箕子朝鮮)>과 관련이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기국(箕國)은, 은(殷) 당시 최북단에 있었다고 하며, 그곳은 또 북방 이민족(土方, 鬼方 등)의 세력이 강했던 지역이었지만, 그러나 기자(箕子)는 선량한 정치를 펴서 그들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공적이 인정되어서 그는 중앙으로 불려갔고, 제 을(帝乙)과 제 신(帝辛)을 섬겼다. 그리고 또 그는 농사(農事)와 상업 그리고 예법 등에 통달했던 사람이었다고 하며, 그래서 그가 정치를 했던 동안에 은(殷)은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위에서 설명했던 대로 어느 때, 그는 신(辛)에게 사치에 대한 경계를 간언했고, 하지만 신(辛)이 자신의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자 발광(發狂)하여 신(辛)에 의해서 유폐(幽閉)되었다. 그 후,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하고 그를 초빙했다. 그리고는 정치에 대해서 물었는데, 그때 무왕(武王)은 그의 해박(該博)함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무왕(武王)은 그를 조선(朝鮮) 땅으로 보냈고, 그러자 또 그는 유민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서 예의와 농사 그리고 양잠(養蠶)과 기직(機織-베틀로 베를 짜는 것) 기술을 전파했으며, 범금팔조(犯禁八條)란 것을 실시했다고 한다. 그 후에 그는 주(周)에 참조(參朝)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그는 상(商)의 폐허를 지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그 파괴된 궁전 자리에 보리가 무성히 자란 것을 보고는 슬퍼서 통곡했다고 하고, 또 그 주(周)로 가는 길이 너무도 싫어서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맥추(麥秋)의 시(詩)>였다고 
한다.

 
原文:麥秀歌麥秀漸漸兮禾黍油油.彼狡僮兮不與我好兮

 그래서 또 해석을 해보면...

 <제목>은 <맥추(麥秋)의 탄식> 또는 <맥수가(麥秀歌)> 또는 <맥추(麥秋)의 시>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리들도 쑥쑥 잘 자랐고
 벼, 기장도 기름진데
 그 교동(狡童-辛-얼굴은 아름다우나 성실치 못한 교활한 아이)
 우리들과 어울리지는 못하였구나.

 그러자 그 노래를 들엇던 상(商)의 백성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그 노래가 망국(亡國)을 한탄하는 <맥추(麥秋)의 탄(嘆)>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기자 묘로 알려진 곳>


 ○ 비간(比干) 역시 생몰년미상이며, 중국 은(殷)대(代)의 왕자였다. 그리고 그 역시도 신(辛)의 숙부에 해당되었다고 하며, 이름은 비(比)였고, 간(干)의 나라에 봉해졌기 때문에 비간(比干)으로 불렸다. 사기(史記)의 은(殷) 본기(本紀)에 의하면, 신(辛)이 폭정을 일삼자 당시 <서주(西周)의 서백창(西伯昌-후의 文王)이 세력을 증대시키고 있다>면서 주의를 당부하는 간언을 했지만, 그러나 신(辛)이 듣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 후에 주(周)의 문왕(文王-서백창)이 죽고 발(發-후의 武王)이 들어서자 주(周)의 세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자 또 비간(比干)은 그와 같은 사실을 고하고는 다음과 같이 신(辛)에게 간언했다. <신하가 된 자는 무릇, 목숨을 걸고 간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辛)은 그 말도 듣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비간(比干)을 죽였다고 한다. <무릇, 성인(聖人)의 심장(心臟)에는 7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다-그러나 이 부분은 아래 妲己 참조> 

 아무튼 그 후, 신(辛)은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토벌되었고, 은(殷)은 멸망했다. 그러자 무왕(武王)은 그 비간(比干)의 무덤에 두텁게 흙을 올리고는 애도(哀悼)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충렬(忠烈)을 높이 받들어서 그의 아들 견(堅)에게 임(林)이라는 성(姓)을 내렸으며, 그리하여 비간(比干)은 그때부터 임(林) 성(姓)의 시조가 되었다.

 ○ 달기(妲己)에 대해서는 별 내용이 없어서 쓰지 않으려고 했으나, 비간(比干)의 죽음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하나있어 소개하는데, 달기(妲己)는 이미 앞에서 소개한 대로 <말희(末喜)>와 더불어서 중국에서는 악녀(惡女)의 대명사로 되어있는 인물이며, 제 신(帝辛-紂王)이 총애했던 여자였다. 그리고 기본이 되는 사기(史記)의 은(殷) 본기(本紀)에 의하면, 그녀는 신(辛)의 총애를 받았고, 그러자 신(辛)은 그녀가 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辛)은 부세(賦稅)를 높여서 녹대(鹿臺-중국 은나라 주왕이 財寶를 모아두었던 곳)에 돈을 쌓았고, 거교(鉅橋-아주 거대한 다리)에는 조(粟-곡식)를 가득히 채워두었으며, 구마(狗馬-개와 말)와 기물(奇物)을 수집해서 궁실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그리고 또 사구(沙丘-모래언덕)의 원대(苑臺)를 확장해서 야수비조(野獸蜚鳥-야생의 동물들과 곤충, 새 등)를 모은 일종의 동물원을 그 한중간에 설치했다. 그리고 또 신(辛)은 귀신(神)을 업신여겼으며, 많은 사람들을 그 사구(沙丘)에 불러놓고 즐겁게 놀았다. 그리고 또한, 술을 부어서 연못을 만들었고, 고기를 나무에 매달아서 소위,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었다. 그리고 남녀들을 불러서 난잡하게 놀게 했으며, 밤새도록 그곳에서 먹고 마시게 하면서 놀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은(殷)이 멸망했을 때, 신(辛)은 무왕(武王)에게 죽임 당했다고 한다(자살 설도 있음). 그리고 또 국어(國語)에서는 신(辛)이 유소 씨(有蘇氏)를 토벌했을 때, 그 유소 씨(有蘇氏)가 신(辛)에게 헌상했던 것이 달기(妲己)였다고 했으며, 그녀의 성(姓)은 기(己)이며, 달(妲)은 자(字)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이유는, 그 당시에는 여성은 자(字)를 앞으로 그리고 성(姓)은 뒤에 쓰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달기(妲己)를 자(字)라고 본 것은 후세의 오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열녀전(烈女傳) 권7 얼폐전(孽嬖傳)에서는, 달기(妲己)가 포락(炮烙)의 법을 보고 웃었다고 한다. 그러자 비간(比干)이 신(辛)에게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고 한다. <선왕(先王)의 법전(法典)을 아직 마무리 짓지도 못했는데, 부인(婦人)의 말을 따르는 것은 화(禍)가 닥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달기(妲己)가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7개의 구멍이 있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그러자 신(辛)은 비간(比干)의 심장을 꺼내서 (그것이 사실인지를) 살폈다고 한다. 그 후에 은(殷)은 망했고, 신(辛)도 자살했으며, 그러자 달기(妲己)도 무왕(武王)에 의해서 참수되었다. 그러자 무왕(武王)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주(紂)를 망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 여자다>

 그리고 어느 날, 비간(比干)이 당시에 널리 행해지고 있었던 <포락(炮烙)>이란 잔혹한 형벌을 그만둘 것을 신(辛)에게 간했다.

 ● 포락(炮烙)은 불에 달구어서 지지는 것을 말하며, 포락지형(炮烙之刑)은 뜨겁게 달군 쇠로 살을 지지는 형벌 또는 중국 은나라 주왕(紂王) 때, 기름칠한 구리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놓고 죄인을 그 위로 건너가게 했다던 형벌을 말함.

 그러자 신(辛)이 노하고는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7개가 있다고 들었다. 내 그것을 확인해봐야겠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비간(比干)은 자신의 심장을 꺼내놓고 죽었다고 한다.

 


 

  <주왕(紂王)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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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9)


 <장강(長江) 황하(黃河) 문화>


<참고도>


 


 黄河 流域


 上流域


 中流域


下流域


紀元前8000年以前


 


 


玉蟾岩遺跡


仙人洞・呂桶環遺跡


 


 


7000~6000


 


 


彭頭山文化


 


 


 


6000~5000


 


 


湯家崗文化


城背渓文化


 


 


5000~

4000


仰韶文化


 


 


馬家浜文化


河姆渡文化


4000~3000


 


大渓文化


崧沢文化


 


良渚文化


3000~2000


竜山文化


宝墩遺跡(龍馬古城)


屈家嶺文化


三星堆遺跡


石家河文化


2000~1000


二里頭文化(夏?)


馬橋文化


 


二里頭文化


 


 


二里岡文化(殷遷都前)


二里岡文化


 


 


殷遷都後




呉城文化


湖熟文化


 








 


1000以後


巴蜀


 


呉越

 

 <개요>

 장강(長江) 문명(文明)은 중국의 장강(長江) 유역에서 일어났던 고대문명의 총칭이며, 황하(黃河) 문명과 함께 중국문명의 대표적인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시기(時期)는 대충 기원전 1000년 전 정도까지가 그 범위에 들어가며(단, 문명의 추정 년대에 관해서는 100년 단위의 誤差가 있음), 나중의 초(楚)와 오(吳) 그리고 월(越) 등의 선조(先祖)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황하(黃河) 문명은 황하(黃河)의 중, 하류 유역에서 번영했던 고대문명으로, 황하의 범람원(汎濫原)에서 농업을 개시했었고, 그리하여 그 황하의 치수(治水)와 관개(灌漑)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강화했으며, 그로서 발전 등을 이루었던 문명이었다. 그리고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앙소(仰韶) 문화를 거쳐서 은(殷), 주(周)의 청동기(靑銅器)문화로 발전했으며, 그리고 또 근래 동아시아의 역사교과서에서는 그 황하 문명을 <세계4대문명> 중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많지만, 그러나 현재에는 장강(長江) 문명과 요하(遼河) 문명 등, 여러 가지의 문명들이 차례로 중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표기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장강(長江), 황하(黃河) 문명>으로 소개하고 하고 있으며, 그리고 또 이야기가 나온 차에 요하(遼河) 문명에 대해서도 간단히 기술하면, 그것은 만주(滿洲)의 남부와 중국 동북(東北)부의 요하(遼河) 유역에서 일어났던 중국의 고대문명 중 하나로, 기원전 6200년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

 2. 황하(黃河) 문명 ※단, 개요는 앞에서 설명되었으므로 생략함.

<황하유역 참고 도>

<황하유역의 諸 문화 참고도>

 5) 앙소(仰韶) 문화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또는 기원전 4800년에서 기원전 2500년)
 유적지는 하남성(河南省) 면지(澠池=미안치-錝池라고 쓰인 곳도 있으므로, 참고바람)현 앙소촌(仰韶村)
 유물은 채도(彩陶-바탕에 彩色을 한 토기)를 특징으로 함.

 1) 전기(前期)는 기원전 4800년경으로 보고 있으며, 그때는 홍도(紅陶)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대표유적은 섬서성 서안(西安)시 반파(半坡)였고, 앙소(仰韶) 반파(半坡) 유형문화로 불린다. 그리고 또 모계(母系)제였으며, 농촌의 계층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녹노(轆轤-도르래 또는 돌림판)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앙소묘저구류형(仰韶廟底溝類型) 문화도 나타났다.

 2) 후기(後期)는 기원전 3500년 이후로 생각되고 있으며, 반파후기유형(半坡後期類型), 서왕촌(西王村)유형, 대사공(大司空)유형, 진왕새(秦王塞)유형 해서, 4종의 문화로 대별(大別)된다. 그리고 그때쯤부터는 빈부(貧富)의 격차도 생기고 있었으며, 사회의 분업과 계층화가 진행되었다.


 앙소(仰韶) 인(人)들의 자급자족(自給自足)생활은 다양했으며, 그들은 조(粟)를 주로 경작했지만, 그러나 보리나 쌀도 경작했다. 그러나 그 농업형태의 성질에 관해서는 소전(燒畑-火田)이었던가, 아니면 영속(永續)적인 집약(集約)농업이었던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의 소지가 남아있다.

 그리고 또 역시, 그들도 돼지와 소, 그 외에도 양(羊)이나 산양(山羊)까지도 사육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식육(食肉)의 대부분은 수렵(狩獵)과 어업(漁業)에 의존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들은 또 석기(石器)에서 아주 큰 발전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비록 원시적이기는 했지만
 양잠(養蠶)의 가능성도 매우 높다.

 그리고 또 그들의 채도(彩陶)는 유명하며, 그때의 장인(匠人 또는 陶工)들은 아름다운 백색과 적색 그리고 흑색의 채도(彩陶)에다 사람의 얼굴이나 동물 또는 기하학(幾何學)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었다. 하지만 그들은 후세의 용산(龍山) 문화와는 달리, 녹노(轆轤-돌림판)는 사용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또 발굴조사에 의하면, 아이들이 채문토기(彩文土器)의 항아리에 넣어져서 매장되었던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그리고 또 아래는 앙소(仰韶) 문화 중에서도 특별한 몇 시기를 소개하는 것이므로 참고바랍니다.

 반파(半坡)기(期)- 기원전 4800년에서 기원전 4200년경. 중원(中原)
 묘저구(廟底溝)기- 기원전 4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경. 반파(半坡)의 후계(後繼)
 마가요(馬家窯)기- 기원전 33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경. 감숙성(甘肅省), 청해성(靑海省) 등
 반산(半山)기- 기원전 2700년에서 기원전 2300년경. 마가요의 후계
 마창(馬廠)기- 기원전 24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경.

<일명 각화부호(一名 刻畵符號)들>


 6) 후강(後岡) 문화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4000년경.
 대표유적은 하남성(河南省) 안양 시(安陽市) 후강(後岡)
 북신(北辛) 문화를 계승해서 발전했던 문화였다.

 7) 대문구(大汶口) 문화
 



<태안 시에 있는 泰山>

 <브리태니커 인용> 다원커우<Dawenkou (웨)Tawênk'ou> 문화(Culture)중국 신석기시대 후기의 문화. 주로 산둥[山東]과 장쑤[江蘇] 북부에 분포되어 있으며, 1959년 산둥 타이안[泰安]의 다원커우[大汶口]에서 그 흔적이 처음 발굴되었다. 다원커우 문화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비교적 체격이 커서 남자의 평균신장이 173㎝나 되었으며 그들간에는 위턱의 어금니를 뽑아내는 풍습이 성행했다. 일반적으로 동이족(東夷族)의 선조로 여겨지고 있다. 그들은 대단히 정교한 석기를 만들었는데 도끼나 구멍을 파는 데 쓰이는 평날도끼·끌·자귀·정 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토기제작도 발달하여, 붉은채색토기·검은채색토기·회색토기 외에도 청회색토기와 흰색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대부분 단색(單色)에 무늬가 없는 것들이지만 구멍을 뚫거나 그림을 새긴 것, 여러 색의 무늬를 넣은 것 등도 간간이 섞여 있다. 원시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는 입이 큰 모양의 준(尊:술그릇)도 출토되었다. 공예품 제작기술도 정교하여, 상아를 깎아 만든 통이나 빗, 그리고 옥도끼나 옥구슬 등의 공예품들은 대단히 수준높은 것들로 평가되고 있다. 다원커우 문화의 유적 가운데에는 씨족의 공동묘지가 있는데 묘의 배열이 가지런하며 모두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있다. 대부분 개인묘이지만, 간혹 부부간의 합장형태도 보인다. 나무관을 사용한 예가 많고, 커다란 묘에는 부장품이 100~200점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옥기(玉器)·상아조각·귀갑(龜甲)·악어가죽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묘의 부장품에는 돼지머리가 들어 있기도 한데, 그 수가 묘 하나당 10~20여 개에 이른다. 일반적인 묘에는 몇 가지의 조잡한 토기나 석기(石器)만이 부장되어 있는 것과 비교해볼 때, 당시에 이미 명확한 빈부의 격차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화는 BC 4000년경이나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시작되어 BC 2600년경을 전후로 하는 시기에 룽산 문화[龍山文化]로 넘어갔다.

 기원전 4300년에서 기원전 2400년경.산동(山東)성 영양현(寧陽縣) 보두촌(堡頭村)에서 처음으로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나중에는 산동성 태안 시(泰安市) 대문구(大汶口)에서도 유적이 발견되었고, 그것이 대표유적이 되었다. 전기(前期)에는 홍도(紅陶)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후기에는 흑도와 회도(灰陶)가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특히, 그 후기의 난각(卵殼-알 껍질)흑도(黑陶) 고병배(高柄杯)는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후기의 용산(龍山) 문화로 승계되었다.


<일조 시(日照市) 거현(莒県)에서 발굴된 도기>

<출토된 도기에 그려진 문양들>

 
 8) 용산(龍山) 문화

 기원전 25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경. 중국중앙연구원 역사어언(語言)연구소에 의해서 1930년, 산동성 장구(章丘)현에서 발견되었던 흑도(黑陶-흑색토기)와 회도(灰陶)를 특색으로 했던 문화였다. 그리고 그 흑도(黑陶)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흑색의 토기로, 제작 시에 녹노(轆轤)가 사용되었으며, 소성(燒成)온도는 약 1000도 이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후기에는 동기(銅器)의 주조(鑄造)도 행해졌던 것으로 보이며, 중원(中原)용산(龍山)문화<=섬서(陝西), 진남예서(晋南予西), 하남(河南), 산동(山東)용산문화>와 산동(山東)용산 문화로 구분된다. 그리고 또, 그 중원(中原)용산 문화는 앙소(仰韶) 후기 문화를 승계했으며, 회도(灰陶)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또 그때부터 동물의 뼈(肩胛骨-어깨뼈)를 태운 후에 그 균열 상태를 보고 점을 쳤던 것으로 생각되며, 산동(山東) 문화는 대문구(大汶口) 문화를 승계해서 흑도(黑陶)가 주류를 이루었다.

 

<난각도(卵殼陶)로 만든 고병배(高柄杯) 山東龍山文化出土品>

<규(鬹), 세발솥 조리기(調理器) 山東龍山文化出土品>

<하남 용산 문화 출토 도기에 그려진 그림>

<협서 문화에서 출토된 뼈로 만든 비녀(骨笄)>

<산동 문화에서 발견된 그림 문자>

 
 9) 이리두(二里頭) 문화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1600년경(또는 2100년에서 1500년). 1959년, 하남성 언사 시(偃師市) 이리두(二里頭)에서 발견되었던 유적으로, 유적지의 넓이는 사방(四方) 약 2킬로였고, 그 중심부에는 2개의 궁전(宮殿)적(跡)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유적의 사람들은 진남예서용산(晋南予西龍山) 문화와 하남(河南)용산 문화를 승계했으며, 청동(靑銅) 주조(鑄造)의 기술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궁전(宮殿)적(跡)>

<이리두 문화 圖>

 
 이리두(二里頭) 유적은 언사시(偃師市)의 서쪽에 있는 이수(伊水)와 용수(溶水) 사이에 위치하며, 초기왕조시대의 초기 도시 유적이다. 그리고 또 그곳은 하(夏)왕조의 후기도시였다는 설(說)로 인해서 주목되었으며, 그곳에는 궁전 유적 외에도 청동기를 제작했던 곳이라거나 골기(骨器)의 제작 장소도 있었고, 주거지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성벽(城壁)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출토품 중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문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청동기였고, 그것은 또 바로 그곳이 청동기문화의 발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의의는 큰 것이었다.

 1984년부터 북경대학의 역사계 고고(考古)교연실(敎硏室)에서 노서남가택지방(魯西南渮澤地方)과 예동상구지방(豫東商丘地方)을 조사 발굴했고, 1981년부터 1987년까지는 예북(豫北)의 신향(新鄕)과 안양(安陽)지방을 조사 발굴했다. 그리고 예북지방이 장하형선상 문화(漳河型先商文化)와 이리두 문화의 인접지대였다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이리두 문화 기에는 장하형선상 문화와 악석(嶽石) 문화 그리고 이리두 문화 그 3자(者)가 황하의 중하류에 정립(鼎立)했던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그리고 또 이리강(二里岡) 하층 기(下層期)에는 장하형선상 문화가 남하(南下)를 개시했으며, 그리하여 우선은 서쪽의 이리두 문화를 흡수한 다음에 동쪽의 악석(嶽石) 문화를 흡수했다.

 그런데 그 상황은 거의 은(殷=商)이 하(夏)를 멸했던 시기와 부합(符合)하기 때문에, 이리강(二里岡) 문화가 조(早=전기) 상(商)의 문화였으며, 이리두 문화는 하(夏) 문화였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증명되게 되었다고 한다.(북경대한 고고학계 부교수:劉緒・徐天進의 三代文明의探索에서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문화들이 있었으나, 그러나 문화에 대한 소개는 이것으로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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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8)


 <장강(長江) 황하(黃河) 문화>



<참고도>


 


 黄河 流域


 上流域


 中流域


下流域


紀元前8000年以前


 


 


玉蟾岩遺跡


仙人洞・呂桶環遺跡


 


 


7000~6000


 


 


彭頭山文化


 


 


 


6000~5000


 


 


湯家崗文化


城背渓文化


 


 


5000~

4000


仰韶文化


 


 


馬家浜文化


河姆渡文化


4000~3000


 


大渓文化


崧沢文化


 


良渚文化


3000~2000


竜山文化


宝墩遺跡(龍馬古城)


屈家嶺文化


三星堆遺跡


石家河文化


2000~1000


二里頭文化(夏?)


馬橋文化


 


二里頭文化


 


 


二里岡文化(殷遷都前)


二里岡文化


 


 


殷遷都後




呉城文化


湖熟文化


 








 


1000以後


巴蜀


 


呉越

 

 <개요>

 장강(長江) 문명(文明)은 중국의 장강(長江) 유역에서 일어났던 고대문명의 총칭이며, 황하(黃河) 문명과 함께 중국문명의 대표적인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시기(時期)는 대충 기원전 1000년 전 정도까지가 그 범위에 들어가며(단, 문명의 추정 년대에 관해서는 100년 단위의 誤差가 있음), 나중의 초(楚)와 오(吳) 그리고 월(越) 등의 선조(先祖)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황하(黃河) 문명은 황하(黃河)의 중, 하류 유역에서 번영했던 고대문명으로, 황하의 범람원(汎濫原)에서 농업을 개시했었고, 그리하여 그 황하의 치수(治水)와 관개(灌漑)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강화했으며, 그로서 발전 등을 이루었던 문명이었다. 그리고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앙소(仰韶) 문화>를 거쳐서 은(殷), 주(周)의 청동기(靑銅器)문화로 발전했으며, 그리고 또 근래 동아시아의 역사교과서에서는 그 황하 문명을 <세계4대문명> 중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많지만, 그러나 현재에는 장강(長江) 문명과 요하(遼河) 문명 등, 여러 가지의 문명들이 차례로 중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표기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장강(長江), 황하(黃河) 문명>으로 소개하고 하고 있으며, 그리고 또 이야기가 나온 차에 요하(遼河) 문명에 대해서도 간단히 기술하면, 그것은 만주(滿洲)의 남부와 중국 동북(東北)부의 요하(遼河) 유역에서 일어났던 중국의 고대문명 중 하나로, 기원전 6200년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

 2. 황하(黃河) 문명 ※단, 개요는 앞에서 설명되었으므로 생략함.
 

<황하유역 참고 도>

<황하유역의 諸 문화 참고도>


 1) 배리강 문화(裴李崗文化-기원전 7000년?- 기원전 5000년?)의 대표 유적은 하남성(河南省) 신정 현(新鄭縣) 배리강(裴李崗-위 그림 위치 참조)에 있으며, 원형(圓形) 또는 방형(方形)의 수혈식(竪穴式-땅 표면에 수직으로 파서 지은 고대인들의 주거지) 주거생활을 했었고, 조(粟) 등의 밭농사(畑作農業)가 행해졌다. 그리고 또한 광(光)을 낸(입힌) 홍갈색(紅褐色)의 도기(陶器)와 마제석기(磨製石器) 등을 사용했던 특징이 있었으며, 인더스문명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배리강 유적지>


 그리고 또 그곳은 1977년에 발견되었으며, 주거지와 그릇을 만들었던 곳 그리고 또 묘지(여성의 묘 등) 등이 발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서, 그 규모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제법 문화생활을 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고 하며, 그리고 또 돼지(豚)와 개도 키웠으며, 고대의 피리(笛)나 미(未)해독(解讀)의 가호계각문자(賈湖契刻文字) 등도 발견되었던 것으로 해서, 고대 최고(最古)의 유적 중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고 한다.

 

<출토된 도기의 예>


 ※ 가호계각문자는 가호유적(賈湖遺跡-裴李崗文化遺跡)에서 발견되었던 선사시대의 유물에 새겨졌던 16개의 표시를 말함.

<가호계각문자>

 

 2) 노관대(老官台) 문화

 기원전 6000년?- 기원전 5000년? 또는 3000년?. 대표유적은 섬서성(陝西省) 화현(華縣)의 노관대(老官台)이며, 원형(圓形)의 수혈식(竪穴式) 주거생활을 했었고, 조(粟) 등의 전작(畑作)농업이 행해졌다. 암홍색(暗紅色)의 협사도(夾砂陶)를 특색으로 했다.

 

<섬서성 위치도>

<위남시(渭南市)의 위치도-화현은 그 안에 있음>

<협사도의 예>


 노관대(老官台) 문화는 중국 북부(華北)의 황하 유역에서 발견되었던 신석기시대의 문화로, 섬서성(陝西省)에서 발견되었던 것 중에서는 현재까지 최고(最古)의 신석기문화였다. 그리고 또 그것은 1950년대 후반에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그 위치는 화현(華縣) 서남(西南-渭河의 支流・西沙河 沿岸) 쪽에 있는 노관대(老官台) 유적이 그것이다.

 그리고 또 그곳은 문화유형유적 중에서는 최초로 발견되었던 곳이란 것에 의의가 있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출토된 문물(文物)이 비교적 적었고, 하지만 또 그보다도 나중에 감숙성(甘肅省) 태안(泰安)현의 대지만(大地灣)유적에서 대량의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 노관대(老官台)문화를 차라리 대지만(大地灣)유적에 포함시켜서, 그 전체를 <대지만(大地灣)문화>라고 부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대지만(大地灣)유적에서는 복수(複數) 시대의 문화 유물이 나왔기 때문에, 차라리 서안 시(西安市)의 임동구(臨潼區)에서 발견된 백가촌(百家村)유적에 포함시켜서, 그래서 그 전체를 백가촌(百家村) 문화라고 부르자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하지만 그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중이며, 그래서 또 그것을 총합적으로 미루어볼 때, 그 노관대(老官台) 문화는 2가지의 단계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그 전기(前期)는 대지만(大地灣) 일기(一期)를 대표하는 약 7300년 전의 것이었다는 것. 그리고 또 그 후기(後期)는 섬서성(陝西省) 보계(寶鷄)시에서 출토되었던 북수령하층(北首嶺下層)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약 7300년부터 7000년 전 사이의 것이 그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그곳은 그 후에 그곳에서 생겨났었던 채도(彩陶) 등을 특색으로 했던 신석기문명 앙소(仰韶)문화의 기원이었던 것으로 해서 깊은 의의가 있다고 하겠으며, 그리고 또 당시의 사람들은 거의가 조(粟) 등의 잡곡류를 재배했었고, 돼지나 개를 키우면서 정주(定住)하는 집락(集落)생활을 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당시의 공구(工具)는 마제석기(磨製石器)가 주류였지만, 타제석기(打製石器)나 세석기(細石器) 등도 조금씩 발견되고 있으며, 그리고 또, 그 당시에는 도기(陶器)의 제작도 시작되어서, 그 수는 많지가 않았겠지만, 그러나 비교적 저온(低溫)에서 구운 것을 사용해서 썼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고, 그리고 채도(彩色土器)는 아직 초보단계였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3) 북신(北辛) 문화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약 5000년? 경(또는 기원전 5300년?에서 기원전 4100년 경).
 대표유적은 산동(山東)성 등(滕)현 북신(北辛).
 황갈색의 도기(陶器)를 특징으로 했던 문화였다.


<산동성>

<산동성 조장시(棗荘市=滕州市=滕縣) 위치도> 


 1964년, 산동성 남부에 있는 등주시(滕州市-당시에는 滕縣)의 북신가도(北辛街道)에서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考古)연구소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대문구(大汶口) 문화 유적층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그 일부가 1978년부터 1979에 걸쳐서 발굴되었으며, 그 결과 황갈도(黃褐陶-모래를 섞은 흙을 낮은 온도에서 구운 陶器)와 홍도(紅陶-結晶이 작은 진흙을 높은 온도에서 구운 陶器)로 만든 솥 등, 조리기(調理器)가 발견되었으며, 그 일부에서는 회도(灰陶-높은 온도에서 구운 陶器)와 흑도(黑陶)도 출토되었다. 그리고 또한, 돌도끼와 돌로 만든 낫(石鐮) 등에 사용했던 마제석기와 타제석기 그리고 골각기(骨角器) 등도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시작된 연구로부터, 그 당시에 채집과 함께 수렵도 행해졌으며, 거기다 잡곡을 재배하는 원시적인 농업과 함께 돼지와 수우(水牛-물소)도 사육했음을 알게 되었다.


<북신 문화 유적지 원경>

<출토 유물의 예>

 

 4) 자산(磁山) 문화

 기원전 6000년?- 기원전 5000?(또는 기원전 5400년에서 기원전 5100년)
 대표유적은 하북성(河北省) 무안현(武安縣) 자산(磁山)
 원형과 타원형의 수혈식 주거에서 살았으며, 조(粟) 등의 밭농사가 행해졌다.
 특징은 홍갈색의 협사도

<하북성 한단시(邯鄲市=武安市) 위치도>


 자산(磁山) 문화는 남접(南接)하는 하남성(河南省)에서 발견되었던 배리강(裴李崗) 문화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자산(磁山) 문화 = 배리강(裴李崗) 문화> 또는 그 역(逆)으로도 칭해진다. 그런 한편, 동접(東接)하는 산동성에서 발견되었던 북신(北辛) 문화와도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자산(磁山) 문화유적은 8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해있으며, 정형도기(鼎形陶器)와 함께 돼지, 개, 닭 등을 사육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또 그 외에도 어로(漁勞)활동의 흔적도 발견되었으며, 저장(貯藏)목적의 구멍(窖穴)도 500곳 이상이나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곳에다 곡식을 저장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최대 규모의 것은 깊이 5미터=1000킬로 정도 저장 추측)


<출토 유물>


 5) 앙소(仰韶) 문화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또는 기원전 4800년에서 기원전 2500년)
 유적지는 하남성(河南省) 면지(澠池=미안치-錝池라고 쓰인 곳도 있으므로, 참고바람)현 앙소촌(仰韶村)
 유물은 채도(彩陶-바탕에 彩色을 한 토기)를 특징으로 함.

 1) 전기(前期)는 기원전 4800년경으로 보고 있으며, 그때는 홍도(紅陶)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대표유적은 섬서성 서안(西安)시 반파(半坡)였고, 앙소(仰韶) 반파(半坡) 유형문화로 불린다. 그리고 또 모계(母系)제였으며, 농촌의 계층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녹노(轆轤-도르래 또는 돌림판)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앙소묘저구류형(仰韶廟底溝類型) 문화도 나타났다.

 2) 후기(後期)는 기원전 3500년 이후로 생각되고 있으며, 반파후기유형(半坡後期類型), 서왕촌(西王村)유형, 대사공(大司空)유형, 진왕새(秦王塞)유형 해서, 4종의 문화로 대별(大別)된다. 그리고 그때쯤부터는 빈부(貧富)의 격차도 생기고 있었으며, 사회의 분업과 계층화가 진행되었다.


 

 
 <앙소 문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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