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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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

주(周-기원전 1046년경에서 기원전 256년)는 중국 고대의 왕조로, 은(殷)을 멸하고 왕조를 열었다.
국성(國姓)은 희(姬). 주(周)의 전설상의 시조(始祖)는 후직(后稷)이라고 알려져 있고, 제 순(帝舜)을 섬겼으며, 농정(農政)에 공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고공단보(古公亶父) 시대에 주의 땅에 정주(定住)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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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직(后稷)은 전설상의 주(周)왕조 희(姬) 성(姓)의 선조로, 중국 농업의 신으로 추앙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사기(史記)의 주(周) 본기(本紀)에 의하면, 제 곡(帝嚳)의 원비(元妃-正妃)였던 강원(姜原)이 들(野)에서 발견했던 거인(巨人)의 족적(足跡)을 밟고 임신했다고 하며, 그로부터 1년 만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자 강원(姜原)은 그 갓난아이를 길에다 버렸는데, 그러자 또 우마(牛馬)가 그 아이를 피해서 지나갔다. 그러자 또 강원(姜原)이 이번에는 숲에다 그를 버리려고 했으나, 사람들이 자주 나타나는 차에 버리지를 못했고, 그러자 또 강원(姜原)이 이번에는 얼음 위에 그를 버렸으나, 새들이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강원(姜原)은 그것을 이상히 여겨서 마침내 그를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강원(姜原)은 그의 이름을 기(弃)라고 지었다고 했으며, 그 기(弃)는 기(棄)와 같은 의미인 버린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또 산해경(山海經)에서는 그를 제 준(帝俊-帝嚳의 다른 이름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의 아들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 기(弃)는 성장하자 농경(農耕)을 좋아했고, 그래서 또 마(麻)와 콩(菽)을 심어놓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순(舜)을 섬기게 되었으며, 농사(農師) 직을 맡게 되었다. 그런 다음 후직(后稷)이란 관(官)을 맡게 되었으며, 이어서 태(邰)에 봉해져서 후직(后稷)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 불줄(不窋)이 그의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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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주(周)왕조 초대 무왕(武王)의 증조부(曾祖父)였고, 주(周) 선왕(先王) 중 한명이었다. 공숙조류(公叔祖類)의 아들이었으며, 성(姓)은 희(姬)였고, 선조(先祖) 후직(后稷)과 공유(公劉)의 업(業)을 이어받아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고공(古公)이라고도 불린다.
★ 공유(公劉-생몰년불명)는 전설적인 주(周)의 선왕(先王)으로, 국(鞠)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며, 후직(后稷)의 증손(曾孫)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융적(戎狄-서방, 북방오랑캐를 가리키는 말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들을 말함)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줄립(窋立-公劉의 祖父, 后稷의 子) 말년(末年)에, 하후(夏后) 씨(氏-夏왕조)를 떠나서 융(戎)과 적(狄)을 떠돌았던 후직(后稷)의 일족(一族)은, 그 손(孫) 공유(公劉) 대에 이르자, 다시 후직(后稷)의 업을 이어받아서 농경(農耕)을 시작했다. 그리고 또 그때, 공유(公劉)는 각지를 전전하면서 칠수(漆水)와 저수(沮水)에서 위수(渭水)를 건너서 목재(木材)를 조달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곧 부유하게 되었고, 그 후로 그를 칭송하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 소문을 듣고 타국(他國)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거처로 이주해 왔다. 그러자 시인(詩人)이 그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으며, 그 노래는 바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대아(大雅)의 독공유(篤公劉)>다. 그리고 그의 자식 대(代)에 빈(豳)에 정주(定住)했다.
아무튼, 시경(詩經)에서는 대왕(大王)으로, 그리고 주(周)가 은(殷)을 멸한 후에는 태왕(太王)으로 존칭되었다. 그리고 또 태공(太公)으로 표현한 곳도 있으며, 문왕(文王)이 여상(呂尙)의 일을 <태공(太公)이 원했던 사람이었다>라는 뜻으로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불렀다는 일화(逸話)는 유명하다. <단, 태공(太公)은 조부(祖父) 또는 부(父)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라는 이설(異說)도 있다> 아무튼, 그는 후에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서 일족(一族)을 테리고 기산(岐山)의 록(麓)이란 곳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그때, 사기(史記)에 의하면 백성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그들과 싸우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고공(古公)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으로 그들을 달랬다고 한다. <백성들이 임금을 옹립하는 것은 나라를 잘 다스려 달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백성들이 그들과 싸우려 하는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백성들을 전쟁에 내몰면서까지 임금의 자리에 앉아있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이다>
그 후, 고공(古公)은 자신의 일족들을 데리고 록(麓)으로 도망을 갔고, 그러자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그곳으로 이주했다. 그러자 고공(古公)은 성곽(城郭)과 가옥(家屋)을 건축했으며, 부락을 나누어서 백성들을 정주시켰고, 5관(官)을 만든 다음 행정을 돌보도록 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시(詩)를 지어서 그의 덕을 칭송했다.
그리고 또 시경(詩經)에는 그가 강족(姜族)의 처(妻)와 함께 그곳으로 가서 번영했다고 했으며, 그리고 그 후에 상(商)의 왕실과 친교를 맺었고, 그러자 또 그의 아들이었던 계력(季歷)에게 왕실로부터 아내가 주어졌으며<그러자 열녀전에서는 지(摯)의 임 씨(任氏)의 딸이었다고 함>, 그러자 또 그 아내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나중의 문왕(文王)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고공(古公)에게는 계력(季歷) 외에도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이라는 장남과 차남이 있었다지만, 그러나 고공(古公)이 어느 때에 예언하기를 <나의 뒤를 이어서 흥륭(興隆)할 자는 바로 창(昌-文王의 諱)이 아날까>라고 말을 했다고 하고, 그러자 동생 계력(季歷)에게 후계를 양보하기 위해서 그 두 장남과 차남은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고공단보(古公亶父) 사후, 계력(季歷)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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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3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설명은 위와 같으며, 그리고 계력(季歷)의 아들 창(昌)이 탄생했을 때, 여러 가지의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자 고공단보(古公亶父)는 그가 후계가 될 것임을 예언했고, 그러자 계력(季歷)의 두 형은 남쪽의 형만(荊蠻)이란 곳으로 떠나서 그곳에서 부임했다. 그리고 태백(太伯)은 그곳에서 구오(句吳)란 나라를 열었고, 그러자 형만(荊蠻)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고 그 나라가 바로 후의 오(吳)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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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은 위의 설명대로, 태백(太伯)은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장남이었고, 우중(虞仲)은 차남이었다. 그리고 태백(太伯)은 후에 오(吳)의 시조(始祖)가 되었으며, 태백(泰伯)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우중(虞仲)은 사기(史記)의 주(周) 본기(本紀)에서는 우중(虞仲)이라고 되어있지만, 그러나 오세가(吳世家)에서는 중옹(仲雍)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공히 생몰연대는 미상이지만, 그러나 기원전 12세기에서 11세기에 살았던 인물이었고,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이 주(周)를 떠났을 때, 주(周)의 사람 두 사람이 그들을 전송하러 나갔는데, 그러자 그 두 사람은 그 주(周)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랐고, 전신(全身)에 자청(刺靑-먹물을 뜨는 것으로, 일종의 文身)을 하는 것으로, 다시 그곳으로 돌아올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그 후, 태백(太伯)은 오(吳)를 열었지만,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자손이 없었다. 그러자 동생 우중(虞仲)이 그의 뒤를 이었고, 그러자 또 후에 사기(史記)는 그의 자손인 오(吳)에 경의를 표했으며, 논어(論語)의 태백(太伯)편에서도 그의 지덕(至德-최고의 德)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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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력(季歷)은 위의 설명대로이며, 그 역시도 생몰년미상이고, 고공단보(古公亶父)의 3남으로, 태임(太任)이란 여성을 아내로 맞았다. 그리고 후에 문왕(文王) 창(昌)을 낳았으며, 그 후에 무왕(武王)으로부터 추존(追尊)되었고, 왕계(王季)라고 칭해졌다. 그는 고공단보(古公亶父)의 뒤를 이었고, 그리하여 고공단보(古公亶父)와 같은 정치자세로 정의(正義)를 행했지만, 그러나 후에 은(殷)의 문무정(文武丁)에게 감금되어 아사(餓死)했다.
★ 문무정(文武丁=太丁)은 은조(殷朝) 제28代 제(帝)로, 그러나 성탕(成湯)의 아들 중에서도 태정(太丁)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과 혼동이 되어서, 사기(史記) 등에서는 그 이름이 태정(太丁)이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또, 갑골문(甲骨文)에서는 문무정(文武丁)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실제로는 문무정(文武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주(周)의 계력(季歷)을 중용했지만, 그러나 후에 감금해서 아사(餓死)시켰다. 그리고 또 그는 기자(箕子)와 비간(比干) 그리고 제(帝)을(乙)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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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 후에 창(昌)이 또 그 후계를 이었고, 그러자 또 그 창(昌)은 고공단보(古公亶父)의 기대대로 주(周)의 세력을 확장시켰고, 은(殷)에 의해서 서백(西伯)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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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백은 나라를 동서남북으로 나누었을 때, 그 서쪽을 관할하는 권한을 가졌던 제후(諸侯)로, 왕의 판단에 관계없이 독단으로 무력을 사용해서 그 지방을 다스리는 것이 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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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그때 이미 주(周)는 은(殷)을 상회(上廻)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창(昌)은 어디까지나 은(殷)의 신하로 지내는 것을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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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왕(文王-기원전 1152년부터 기원전 1056년으로 壽命은 97세 卒)은 중국 주조(周朝)의 시조(始祖)였으며, 성은 희(姬), 휘(諱)는 창(昌), 부(父) 계력(季歷)과 모(母) 태임(太任)의 자(子), 주조(周朝)의 창시자였던 무왕(武王)의 아버지였다.
문왕(文王)은 상(商)의 신하로서,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었고, 부(父) 계력(季歷) 사후(死後)에 주(周)의 땅을 승계했으며, 그 후에 본거지를 풍하<灃河-渭河의 지류로, 湖南성의 예수(澧水)와는 글자가 다름>의 서안(西岸)에 있던 풍읍(豊邑-더욱 정확하게는 豐邑이며, 후의 長安 근처)으로 이주했다. 그리고는 인정(仁政)을 펼쳐서 그 지방을 풍요롭게 했다.
그런데 그때, 상(商)은 폭군의 대명사였던 주왕(紂王)이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어느 때, 창(昌)과 같이 삼공(三公)의 한사람이었던 악숭우(鄂崇禹)가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것으로 해서 창(昌)이 무심결에 한숨을 쉬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가 보고 주왕(紂王)에게 불만이 있다고 참언(讒言-中傷謀略)을 했고, 그러자 또 창(昌)은 그 때문에 유리(羑里)란 곳에 유폐되었으며, 그곳에서 주역(周易)을 썼다고 한다.
★ 단, 주역(周易)의 성립에는 먼저 복희(伏羲)가 팔괘(八卦)를 만들었고, 거기에 더해서 64괘를 만들었는데, 일설(一說)에 의하면 그 64괘를 만든 사람은 신농(神農)이었다고 하며, 그 다음은 주(周)의 문왕(文王)이 괘사(卦辭)를 지었고,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지었으며, 그리고 또 일설(一說)에는 그 효사(爻辭)도 문왕(文王)이 지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랬던 것이 공자(孔子)가 전(傳)을 써서 상구(商瞿)에게 전했으며, 한 대(漢代)의 전하(田何)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나머지는 다음 기회에 설명함.
아무튼 그 후, 창(昌)은 재보(財寶)와 영지(領地)를 제 신(帝辛)에게 헌상하고 석방되었으며, 서백(西伯)에 부임되었다. 그 후, 창(昌)은 주왕(紂王)의 눈 밖에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인정(仁政)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창(昌)은 근처 나라 왕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 후로도 영토를 넓혔다든지,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을 군사(軍師)로 맞이하였고, 그러자 또 제후들은 창(昌)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창(昌)은 결코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았고, 그래서 끝까지 상(商)의 신하로 남았다지만, 그러나 그가 죽자 상기(上記)대로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했으며, 그것으로 그는 후에까지 칭송되면서 위정자의 본보기가 되었다.(文王 끝)
★ 백읍고(伯邑考-생몰년미상)주(周)의 왕족으로, 문왕(文王)의 장자(長子)였으며, 무왕(武王)의 형이었다. 어머니는 대사(大姒)였고, 문왕(文王)이 13세 때 그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사기(史記)의 관채세가(管蔡世家)에 의하면, 문왕(文王)은 차남 무왕(武王)과 4남 주공단(周公旦)이 특히 뛰어나고 문왕(文王)에게 협력하고 보좌했기 때문에, 그래서 백읍고(伯邑考)는 젖혀두고 무왕(武王)을 태자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무왕(武王)이 주(周)왕으로 즉위했을 때는 이미 백읍고(伯邑考)는 사망한 뒤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자손과 봉지(封地) 등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예기(禮記)의 단궁(壇弓)에도 문왕(文王)이 그를 버리고 무왕(武王)을 선택했다고 했으며, 그리고 또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문왕(文王)이 은(殷) 주왕(紂王)에 의해서 유리(羑里)에 유폐되었을 때, 그 백읍고(伯邑考)는 은(殷)의 인질로 있었다고 했으며, 그러자 또 주왕(紂王)은 그를 죽인 후에 삶아서 죽을 만든 다음, 문왕(文王)에게 먹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주왕(紂王)은 문왕(文王)에게 말하기를 <성인(聖人)이라면 자기 자식 삶은 국물을 어찌 먹겠는가?>라고 했다지만, 그러자 문왕(文王)은 그것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주왕(紂王)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도대체 누가 당신을 성인(聖人)이라고 했던가? 자기 자식 삶은 국을 먹고도 저렇게 태연한 당신을!> 그는 또 명대(明代)의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에서는 금(琴-거문고)의 명수(名手)로 묘사되어 있고, 아버지 문왕(文王)이 유폐되었을 때, 그 석방을 위한 재보를 모으기 위해서 왕도(王都) 조가(朝歌)로 떠났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주왕(紂王)에게 헌상했던 원숭이가 달기(妲己)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에 외육형(隗肉刑-凌遅刑)에 처해졌으며, 그 유체(遺體)는 육병(肉餠-일종의 햄버그)으로 만들어서 문왕(文王)에게 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문왕은 그것을 먹고 풀려났다고 하며, 그러자 또 문왕(文王)은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가던 길에 토해서 그것을 뱉어냈는데, 그러자 그것은 토끼로 변했다고 한다.
○ 위의 외육형은 능지형 또는 능지처참형으로도 불리지만, 그러나 좀 더 상세히 설명을 하면, 사람을 매단 다음 살점을 조금씩 발라내어 고통을 주면서, 좀 더 천천히 죽이는 잔인한 형벌을 말함.
★ 여상(呂尙)은 기원전 11세기경에 활약했던 주(周)의 군사(軍師)였으며, 나중에 제(齊)의 시조(始祖)가 되었던 인물이다. 성은 강(姜),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 또는 망(望), 자(字)는 자아(子牙) 또는 아(牙), 시(諡)는 태공(太公). 제(齊)태공(太公), 강(姜)태공(太公)으로도 불린다. 일반적으로는 태공망(太公望)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상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전설만 무성한 인물이며, 그 실태(實態)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리고 역시, 주(周)의 신하로 지냈던 경위에 대해서도 전승(傳乘)만 무성할 뿐이며, 출신이 강(羌-중국 서북부)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그 또한 불명이다. 그러나 그는 주(周)의 군사(軍師)로서, 문왕(文王)의 아들 무왕(武王)을 보좌해서 은(殷)을 목야(牧野)에서 파(破)했으며, 후에 제(齊)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가 육도(六韜)란 병법서를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는 전부 창작으로, 후대(後代)에 다른 전략가에 의해서 저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전승(傳乘)으로 전해져오는 여상(呂尙)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1. 태공망(太公望)이란 별명은 일반적으로는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그를, 문왕(文王)이 <그야말로 우리 태공(太公-祖父)께서 기다려 바라마지 않던 인물이다>라고 말을 하고는 자신의 신하로 불러들였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그는 굽히지 않은 바늘, 즉 말 그대로 바늘 같은 낚싯바늘을 물에 담그고만 있었다거나, 또는 그 바늘을 물에 넣지 않고 수면 위에 띄운 채로 앉아만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2. 협서성(陝西省) 보계(寶鷄)에는 그가 낚시를 했던 자리(釣魚臺)가 있다고 하며, 현재는 관광지가 되었다.
3. 그가 제(齊)에 봉해졌을 때에, 이미 헤어졌던 그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찾아왔으나, 이미 엎지른 물(覆水盆)은 어쩔 수가 없다면서 그냥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 그가 때를 기다리면서 바늘 없는 낚시를 하고 있었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버리고 떠났던 여자를 말함.
4. 그가 주공단(周公旦)과 인재(人材)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주공(周公)은 혈연(血緣)주의를 강조했다. 그러자 그는 <그런 나라는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가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곧 그들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주공(周公)은 그런 능력주의(能力主義)의 태공(太公)에 대해서 <그런 나라는 가신(家臣)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는데, 그런데 나중에 주공(周公)의 노(魯)는 주변 나라들의 알력(軋轢)으로 시달리다 멸했으며, 태공(太公)의 제(齊)는 대신(大臣) 전(田)씨(氏)가 찬탈(簒奪)해서 멸망했다.
<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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