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왕(紂王) 제 신(帝辛-기원전 1100년경)은, 은(殷)왕조의 제30대 왕이었으며 또한 최후의 왕이었다.
아무튼 당시, 은(殷)의 최고 중요한 지위였던 삼공(三公)에는 제후들 중의 실력자였던 서백창(西伯昌)이 있었고, 그리고 9후(候)와 악공(鄂公)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9후(候)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자 신(辛)이 그녀를 데려가서 첩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후에 그
9후(候)와 악공(鄂公)이 연루된 모반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신(辛)은 9후(候)를 잡아서 소금에 절여버렸고(젓갈로 만듦), 악공(鄂公)은 건육(乾肉)을 만드는 것으로 처형했으며, 그 아름다웠다던 9후(候)의 딸도 함께 처형했다. 그리고 또한, 그때 서백창(西伯昌)도 의심을 받아서 유폐되었는데, 그러나 서백창(西伯昌)은 많은 재물을 헌상해서 석방되었다. 그 후, 서백창(西伯昌)이 죽자 무왕(武王)이 그 뒤를 이었으며, 그리하여 드디어 천하의 제후들은 신(辛)을 처단할 것을 결의했고, 그러자 또 무왕(武王)은 서백창(西伯昌)의 위패(位牌)를 내세우고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또 그때, 하늘의 소리를 들었던 무왕(武王)은 일단 군을 후퇴시켰다. 그리하여 그 2년 후에 다시 군을 일으켰으며, 그렇게 해서 양군(兩軍)은 목야(牧野)에서 격돌했다.
<목야의 싸움>
목야(牧野)의 싸움은, 고대 중국 기원전 11세기에 은(殷)의 주왕(紂王)과 주(周)의 무왕(武王)을 중심으로 했던 세력 싸움이었고, 주(周)가 승리해서 은(殷)이 멸했던 싸움이었다. 그리고 또, 그리하여 그때부터 주(周)의 천하가 시작되었다.
당시, 은(殷) 주왕(紂王)의 폭정을 견디지 못했던 사람들은 마침내 그를 멸하기로 결의를 했다. 그러자 그것을 미리 알게 되었던 주왕(紂王)은 노하고는, 그 결의에 가담했던 제후들을 불러들여서 죽인 후에 소금에 절여버렸다. 하지만 그때, 서백희창(西伯姬昌-周의 文王)은 독실(篤實)한 성격으로 그 결의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주왕(紂王)은 그도 의심을 해서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는 인질로 잡고 있던 서백희창(西伯姬昌)의 장남 백읍고(伯邑考-武王의 兄)를 삶아서 죽(일종의 수프-soup)으로 만든 다음, 그것을 서백희창(西伯姬昌)에게 먹였다. 그러자 서백희창(西伯姬昌)의 가신(家臣)들이 막대한 양의 재산을 모아서 주왕(紂王)에게 헌상했고, 그 덕으로 서백희창(西伯姬昌)은 풀려났는데, 서백창(西伯昌)은 그에 한(恨)을 품고 은(殷)에의 복수를 다짐했다.
그 후, 주(周)로 다시 돌아갔던 서백창(西伯昌)은 인근(隣近)의 제국(諸國)을 병합해서 국력을 증대시켰지만, 그러나 당시 노령(老齡)이었던 서백창(西伯昌)은 그 대결을 바로 목전에 두고 사망했다. 그러자 차남이었던 희발(姬發-후의 武王)이 태자(太子)로서 그 뒤를 이어받았고, 그리하여 이윽고는 제후들과 함께 은(殷)에의 결전에 나섰다. 그러자 그 군대는 순식간에 대군(大軍)이 되었으며, 그 결과로 또 쉽게 은(殷)을 공략할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 순간에 돌연 희발(姬發)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회군(回軍)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불명(不明)이지만, 그러나 아마도 그때 점괘(占卦)가 불길(不吉)로 나왔던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또 그때, 희발(姬發)이 제후들의 힘을 빌려서 그 은(殷)을 공략하기는 쉬웠겠으나, 그러나 그때는 이미 강해져있던 제후들이 그 다음에 자신이 주(周) 왕조를 여는 데까지 협조할 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 않았겠는가 하고 추측해볼 수 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또 그로부터 수년(數年-2년?) 후에 희발(姬發)은 다시 군을 일으켰으며, 그때는 또 여러 가지의 서조(瑞兆-吉兆)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주군(周軍)은 맹진(孟津)이라는 항구에서 황하를 건너려고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마침 뇌우(雷雨)와 폭풍이 몰아쳤기 때문에 황하를 건널 수가 없었다. 그러자 희발(姬發)은 화가 나서 강의 신(神)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천명(天命)은 벌써 떨어졌다! 그런데 어쩌자고 나의 앞길을 막는단 말인가?!> 그러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개였고, 그렇게 해서 주군(周軍)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그런데 또 그때, 그 강을 건너던 그 주군(周軍)의 배에 백어(白魚-뱅어)들이 날아 들었다는데, 그런데 그 백어(白魚)는 은(殷)의 상징(symbol)이었다고 한다.

<하남 성>

<학벽시 위치도>
그렇게 해서 주군(周軍)과 은군(殷軍)은 수도였던 조가(朝歌-현재의 河南省 鶴壁市) 근처의 목야(牧野)라는 곳에서 결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하지만 사기(史記)의 주(周) 본기(本紀)에 의하면, 그때는 은(殷)도 준비에 만전(萬全)을 기했던 상태였고, 군사도 70만 명이나 동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주군(周軍)의 병력은 겨우 40만이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또 그 결전 바로 전에 또 다시 뇌우(雷雨)가 몰아쳐서 그치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희발(姬發)이 그것을 보고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전군(全軍)에 용기를 북돋았다고 한다. <옛날, 은(殷)의 탕왕(湯王)이 하(夏)의 걸왕(桀王)을 파(破)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을 때도 저렇게 뇌우(雷雨)가 몰아쳤다던데,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주(周)가 승리할 것이란 전조(前兆)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그때, 은군(殷軍)은 그 수에서 우월했다고는 했지만, 그러나 그 질(質)에서는 형편없는 군대였다. 그러니까 그 무리들 중에서는 전장(戰場)에서의 불길(不吉)을 빌기 위한 신관(神官)을 위시(爲始)해서, 그동안 은(殷)이 복속시켰던 조그마한 나라들의 잡병(雜兵)들과 노예(奴隸)병(兵)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은 또 그동안 포학(暴虐)한 주왕(紂王)의 지배에 아주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전쟁이 시작되자 그들은 스스로 창끝을 돌려서 은군(殷軍)을 공격했고, 그러자 은군(殷軍)은 곧 괴멸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승리한 주군(周軍)은 이제 주왕(紂王)을 잡기 위해서 조가(朝歌)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었던 주왕(紂王)은 희망을 잃고 왕궁(王宮)에 불을 지르고는 그 불길 속에서 타죽었다.(혹은 鹿台 위에서 분신자살했다) 그러자 또 희발(姬發)은 그 주왕(紂王)의 유체(遺體)를 찾아내서 3발의 화살을 쏜 후, 도끼로 그의 머리를 잘랐다고 한다.
그리고 또 상서(尙書)의 목서(牧誓)에 의하면, 그 날의 간지(干支)가 갑자(甲子)였다고 하고, 출토된 청동기의 명문(銘文)에서도 그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600년이나 내려왔던 은(殷)은 멸망했고, 그때부터 희발(姬發)이 주(周) 왕조를 열게 되었다.(紂王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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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은(殷) 멸망 후, 주왕(紂王)의 아들이었던 무경(武庚)은 주(周) 무왕(武王)에 의해서 은(殷)의 고지(緣故地)에 봉해졌다. 그러자 무왕(武王) 사후(死後)에 그는 무왕(武王)의 형제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주살(誅殺)되었다.
그 후, 녹부(祿父=武庚)의 백부(伯父)였던 미자계(微子啓-紂王의 형)가 송(宋)에 봉해졌고, 그러자 그는 그곳에서 은(殷)왕조의 제사를 계속해서 모셨다. 하지만 그 미자계(微子啓)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었다. 그래서 같은 주왕(紂王)의 형이었던 미중연(微仲衍)이 송공(宋公)을 이었다. 그리고 또 이설(異說)도 있지만, 어쨌든 그 미중연(微仲衍)의 자손이 공자(孔子)라는 설이 있고, 그래서 또, 그 공자(孔子)의 가계(家系)가 세계 최장(最長)의 가계로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상인(商人)>이란 말은, 그 상(商=殷)의 사람(商人)들이 나라가 망한 후에 생업(生業)을 목적으로 각지를 전전하면서 물건들을 팔러 다녔던 데서 유래했다고 하고, 그래서 또 점포(店鋪)를 가지지 않고 또는 점포도 없이 각지를 전전하면서 물건을 팔러 다니는 사람들을,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 바로 상(商)의 사람들이다>라고 말을 했던 것으로부터 상인(商人)이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하지만 그에는 또 부정의 說도 있다)
아무튼 또, 그런데 그 주(周)가 은(殷)을 멸했던 때가 정확이 언제였던가 하는데 많은 관심들이 있었고, 그래서 또 중국의 <하상주년표(夏商周年表) 프로젝트>는 그것을 기원전 1046년이라고 주장했던 바 있다.
하지만 또 그에 대해서는 오래된 설(說)로,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무왕(武王)부터 유왕(幽王-西周 최후의 왕)까지는 257년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유왕(幽王)이 죽은 것이 기원전 771년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은(殷)이 망했던 것은 기원전 1027년이라는 설과 <한서(漢書)>에 주(周)는 867년이나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또 그것은 기원전 1123년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아무튼, 그것에 대해서는 위의 것 외에도 아주 많은 설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은(殷) 멸망의 해를 제일로 높게 잡았던 것은 기원전 1127년이고, 그 반대로 제일 아래로 잡았던 것은 기원전 1018년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그 은(殷) 사회의 기본단위는 읍(邑)이라고 불렸던 민족끼리의 집락(集落)이었으며, 그래서 수천(數千)의 읍(邑)들이 수백(數百)의 호족(豪族)들과 왕족에게 종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殷)의 왕은 그들 지배계급 연합체에서도 최대의 유력자였으며, 또한 절대의 권력자였기도 했다. 하지만 지방 유력호족들의 독립성은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은(殷)의 왕은 단지 중원(中原)의 일부만을 지배했던데 불과했다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아래는 殷商王室系圖이므로, 필요하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은(殷)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