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5)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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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그리고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5패(覇)의 대표격이었다고 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

 ♣ 제(齊-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386년)

<제의 위치 右上>


 제(齊)는 주대(周代)와 춘추시대 그리고 전국시대 초기에 걸쳐서, 현재의 산동(山東)성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제후국)였다. 주(周) 건국의 공신이었던 태공망(太公望)에 의해서 건국되었고, 성(姓)이 강(姜)이었기 때문에 전국시대의 제(齊-田齊) 등과 구별해서 강제(姜齊)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기원전 386년에 가신이었던 전화(田和)에 의해서 찬탈되었고, 그리하여 그 시점에서 멸(滅)했으며, 수도는 임치(臨淄)였다.

 제(齊)는 은(殷) 멸망 후, 태공망이 제(齊)의 땅에 봉해지면서 건국되었지만, 그러나 당시 주(周)의 세력은 그곳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는 당시, 내 또는 래(萊)라는 부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래서 또 그 태공망(太公望)은 처음에 그곳을 하사받아서 갔다기보다는, 그곳을 제압해서 다스리라는 명을 받고 갔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래서 태공망은 그 래(萊)를 제압했고, 그런 다음 그곳의 풍속(風俗)에 맞게 정치를 간소화했으며, 그것으로 또 그 지방의 안정을 꾀했다. 그러자 또 3감(監)의 난 때, 성왕(成王)은 그에게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하수(河水)에 이르고, 남으로는 목능(穆稜)에 이르고, 북으로는 무양(無樣)에 이르기까지, 5후(侯)9백(伯)이 죄를 범하거든, 그들을 토벌해도 좋다>라고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 태공망은 계속해서 영토를 넓혀나갔고, 그래서 춘추시대에 들어섰을 때쯤에 제(齊)는 동쪽의 강국(强國)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또 그때부터 바다를 이용해서 소금을 생산했으며, 그곳에 철(鐵)이 많이 났기 때문에 큰 부(富)를 누리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제15대 환공(桓公)의 시대에는 관중(管仲)의 보좌로 더욱 강대한 나라가 되었고, 주(周)왕조를 대신해서 제후들을 주도(主導)했으며, 그리하여 남쪽의 초(楚)의 위협에 대항해 나갔다. 그러자 또 기원전 667년에 환공(桓公)은 주(周)의 왕으로부터 패자(覇者)로 인정되었고, 후세에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사람으로 기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환공 사후(死後)에 후계를 둘러싸고 다툼이 계속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패자(覇者)의 지위는 진(晋)의 문공(文公)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또 그 후에도 나라는 대국(大國)을 유지했지만, 그러나 그 주역은 점점 더 북쪽의 진(晋)과 남쪽의 초(楚)에게로 넘어갔으며, 그러자 또 제(齊)는 그에 두려움을 느끼고서 진(秦)과 손을 잡는 형태로 되어갔다는 것이 춘추시대 중기의 정세(情勢)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또 그때부터 대신(大臣)들의 힘은 점점 더 강해져갔고, 그러자 또 군주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해져갔다. 그리고 또 그때의 강대한 귀족들의 씨명(氏名)을 거론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국(國)씨(氏), 고(高)씨(氏), 포(鮑)씨(氏), 최(崔)씨(氏), 경(慶)씨(氏), 진(陳)씨(氏).

 그 후였던 24대 장공(莊公)의 시대에 재상(宰相)이었던 최저(崔杼)는 장공(莊公)이 자신의 아내와 밀통(密通)했던 것으로 해서 화를 내고는 그 장공(莊公)을 죽여 버렸다. 그런 다음 다른 군주를 세우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역시도 나중에는 자살했다.(또는 살해당했다)

 그 후였던 기원전 532년에 안영(晏嬰)이 재상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군사(軍事) 면에서 사마양저(司馬穰苴)를 등용해서 국정(國政)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안영(晏嬰)은 숙향(叔向)과의 대화에서 <제(齊)는 머지않아 전 씨(田氏)에게 찬탈당하고 말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하며, 그리고 또 그 전 씨(田氏)란 이미 앞에서 말한 진(陳)씨(氏)가 그 전 씨(田氏)였고, 그들은 또 기원전 672년에 진(陳)으로부터 망명해 왔던 전완(田完)의 혈통이었다.

 그리고 또 당시, 유력(有力)했던 귀족들은 항쟁을 통해서 서서히 탈락되어 갔고, 그리하여 최후에 그 전 씨(田氏)가 승리해서 남게 되었다. 그래서 안영(晏嬰)의 예언은 적중했고, 기원전 386년에는 그 전 씨(田氏)에서 나왔던 전화(田和)가, 강(姜)성(姓) 여 씨(呂氏)의 군주로서는 최후였던 강공(姜公)을 대신해서 제(齊)의 군주가 되었다. 그래서 그 후로 그 제(齊)는 전제(田齊)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강제(姜齊)는 강공(康公)을 군주로 해서 존속했고, 전제(田齊)로부터 발해(渤海)만(灣)에 면한 래(萊)의 땅이었던 곳에 조그마한 영토를 얻어 받아서 잠시 이어갔지만,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그것도 멸하고 말았다.


<제의 화폐-齐刀币>

 ○ 제(齊)의 환공(桓公)

 환공(桓公)은 춘추시대, 제(齊)의 제16대 군주였고, 문공(文公)과 함께 춘추오패의 필두였다. 그리고 그는 포숙아(鮑叔牙)의 활약으로 공자(公子) 규(糾)와의 공위(公位)계승전에서 승리했고,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해서 제(齊)를 강대한 국가로 이끌었다. 그리고 또한, 당시에는 이미 힘을 잃고 있었던 동주(東周)를 대신해서 회맹도 이끌었다.

 ⊙ 포숙아(鮑叔牙)포숙아(鮑叔牙) 또는 포숙(鮑叔)은 관중(管仲)과 더불어서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지만, 그러나 생몰연대는 알 수가 없고, 중국 춘추시대 때 제(齊)의 정치가였다. 그리고 성(姓)은 사(姒)였고, 씨(氏)는 그 봉지(封地)로부터 포(鮑), 휘(諱)는 아(牙), 자(字)는 숙(叔)이었다. 그는 환공(桓公)을 섬겼지만, 그의 선조(先祖)는 사성(姒姓)의 나라 기(杞)의 공자(公子)였으며, 제(齊)를 따랐기 때문에 포(鮑)의 땅을 하사받음으로 해서 포(鮑)씨(氏)란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포숙아(鮑叔牙)는 어려서부터 관중(管仲)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런데 한번은 두 사람이 같이 동업을 해서 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관중(管仲)이 실수로 아주 큰 손실을 입었다고 했는데, 그러자 포숙(鮑叔)은 <장사란 때가 있는 것>이라면서 결코 관중(管仲)을 책망(責望)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에 장사를 잘해서 아주 큰 이익을 봤다고 하는데, 그러자 또 포숙(鮑叔)은 당시, 아주 힘들게 살고 있었던 관중(管仲)을 위해서 그 이익의 거의 전부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관중(管仲)은 <나를 낳으신 분은 우리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너뿐이로구나>라고 말을 하면서 그 대은(大恩)에 감사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후세의 사람들은 그 일을 가리켜서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칭송했다. 그리고 그 후에 포숙(鮑叔)은 희공(釐公-그러나 리공 또는 이공이라고 표현한 곳도 있으므로, 참고바람)의 아들이었던 공자(公子) 소백(小白)을 모시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소백(小白)의 형이었던 양공(襄公)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 소백(小白)과 함께 거(莒)로 망명했다. 그 후, 양공(襄公)이 암살당하자 제(齊)에서는 후계자를 놓고 싸움이 일어났는데, 그러자 소백(小白)이 다시 제(齊)로 돌아가서 공자(公子) 규(糾)와 싸웠고, 그때 또 포숙(鮑叔)의 활약으로 소백(小白)은 승리해서 제(齊)의 군(君)이 되었다. 그 후, 포숙(鮑叔)은 공자(公子) 규(糾)를 도왔던 노(魯)에서, 그 규(糾)의 신하로 있었던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을 데려오려고 했지만, 그러나 소홀(召忽)은 규(糾)가 죽자 자해(自害)를 했고, 관중(管仲)은 제(齊)로 데려왔다. 그러자 또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을 재상의 자리에 앉혔고, 그러자 또 포숙(鮑叔)은 관중(管仲)을 도와주는 형식으로 같이 정치를 펼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 사기(史記)에서는 <사람들이 환공(桓公)을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관중(管仲)보다도, 그 관중(管仲)의 역량을 미리 발견하고 끝임 없이 믿어주었던 포숙(鮑叔)이었다>라고 말을 한다면서 포숙(鮑叔)을 칭송했다.

 ⊙ 관중(管仲) 즉, 관이오(管夷吾)는 중국 춘추시대에 제(齊)의 정치가였고, 환공(桓公)을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字)는 중(仲)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관중(管仲)이라고 표현한다.(단, 鮑叔에서 설명한 것과 중복되는 것은 설명을 생략함) 그리고 앞의 포숙(鮑叔)에서 설명했던 대로, 그들이 한번 장사를 같이 했는데, 포숙(鮑叔)은 그가 실패했을 때는 오히려 격려를 해주었고, 장사가 잘 되어서 큰돈을 벌었을 때 관중(管仲)은 그것을 거의 독식(獨食)했지만, 그러나 포숙(鮑叔)은 당시 힘들게 살고 있었던 관중(管仲)을 생각하면서 그를 이해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 두 사람이 제(齊)로 들어갔을 때, 관중(管仲)은 공자(公子) 규(糾)를 섬기게 되었고, 포숙(鮑叔)은 공자 소백(小白)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또 당시의 군주였던 양공(襄公)은 아주 포악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관중(管仲)은 공자(公子) 규(糾)와 함께 노(魯)로 도망쳤고, 포숙(鮑叔)은 소백(小白)과 함께 거(莒)로 도망을 갔다. 그 후, 양공(襄公)은 자신의 형제였던 공손무지(公孫無知)의 모반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그러자 또 그 공손무지(公孫無知)도 군사들에 의해서 주살(誅殺)되자 그곳은 군주(君主)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자 제(齊)에서는 규(糾)와 소백(小白) 중 누구를 부를 것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는데, 그러자 그 두 공자(公子)는 서로 먼저 제(齊)로 들어가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때, 관중(管仲)은 자신이 모시던 규(糾)를 서둘러서 제(齊)로 보내려했던 한편, 소백(小白)이 지나갈 길에서
매복을 했다가 그를 암살하려고 기도(企圖)했다. 그래서 관중(管仲)은 숲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소백(小白)이 나타나자 독(毒)을 바른 화살을 소백(小白)의 배를 향해서 쏘았다. 그러자 그 화살은 보기 좋게 소백(小白)의 배에 꽂혔으나, 그러나 그 화살은 그때 소백(小白)이 입고 있던 복대(腹帶)를 뚫지 못했고, 그러자 결국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단, 춘추좌씨전 등에서는 그 내용이 없음)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소백(小白)은 죽을힘을 다해서 차(車)를 몰았고, 마침내 그곳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러자 또 그는 자객(刺客)이 다시 올 것을 염려해서 다음 숙박지에서 관(棺)을 준비시켰고, 그러자 관중(管仲)은 소백(小白)이 죽었다고 확신했다. 그러자 그 후, 관중(管仲)은 그 사실을 규(糾)에게 알리고는 그때부터는 여유롭게 제(齊)로 향했는데, 그런데 막상 그 제(齊)에 들어가 보니, 그때는 이미 소백(小白)과 그의 신하들이 제(齊)를 장악하고 난 뒤였다. 그러자 관중(管仲)과 규(糾)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노(魯)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제공(齊公)에 즉위했던 소백(小白)은 환공(桓公)이 되었고, 그러자 또 그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군사들을 노(魯)로 보내서 규(糾)를 토벌하게 했다. 하지만 그때, 노(魯)의 항전도 거셌다. 그러자 제(齊)군(軍)은 더욱 강하게 노(魯)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그때, 환공(桓公)이 나서서 규(糾)의 수급(首級)과 함께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의 신병(身柄)을 요구했다. 그러자 노(魯)는 규(糾)를 참수했고, 관중(管仲)은 죄인으로 제(齊)에 보내지게 되었지만, 그러나 소홀(召忽)은 그 전에 자결(自決)했다. 그리고 또 관중(管仲)은 제(齊)에 들어서자 구속이 풀어졌는데, 그것은 또 애초 환공(桓公)이 노(魯)를 치려고 했을 때, 환공(桓公)은 규(糾)와 함께 관중(管仲)도 죽일 생각이었지만, 그러나 그때 포숙(鮑叔)이 <환공(桓公)께서 이 제(齊)만을 통치하실 생각이시라면 저와 고혜(高傒) 2사람만 있으면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천하의 패권을 원하신다면 관중(管仲)을 재상에 앉히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을 듣고 환공(桓公)은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환공(桓公)을 만나게 되었던 관중(管仲)은 강병(强兵) 전에 국부(國富)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했고, 그것으로 민생의 안정과 규율(規律)의 필요성에 대해서 설파했다. 그러자 그는 바로 그날로 재상에 임명되었으며, 그러자 또 포숙(鮑叔)은 지위로 봤을 때 그의 아래에 놓이게 되었지만, 그러나 포숙(鮑叔)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를 보좌했다. 그러자 또 관중(管仲)은 그때부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으며, 그래서 또 그때 행했던 그의 정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관중(管仲)은 우선 내정(內政)개혁에 들어서면서, 그때까지 주대(周代)초기 이래(以來)부터 내려오던 오래된 제도인 <공전(公田)제>부터 폐지했다. 그리고는 제(齊)의 영토를 21향(鄕)으로 나누었으며, 물가안정책과 제(齊)의 지리를 이용해서 생산한 소금과 어업을 통해서 벌어들인 이익 등으로 농민과 어민들이 안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기쁨에 찬 생활을 하면서 더욱 생산에 박차를 가했고, 그러자 또 자연스럽게 산업이 활성화 되었으며, 그에 더불어서 상업도 활성화 되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타국(他國) 사람들이 제(齊)로 몰려들었으며, 그러자 또 관중(管仲)은 그 중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골라서 적극적으로 등용시켰다. 그런 한편, 다섯 집(5戶)을 한 단위로 묶는 방법으로 서로간의 감시를 의무화시켰으며, 부정(不正)에 대해서는 엄벌(嚴罰)이 내려지게 했다. 그러자 그때부터 백성들의 준법정신이 강해졌으며, 세수(稅收)도 증대되었다. 그렇게 해서 국내를 정비했던 환공(桓公)은, 이어서 노(魯)를 침략해서 그 영토를 탈취했다. 그런데 그 강화조약을 맺었을 때, 노(魯)의 장군이었던 조말(曹沫)이 스스로 패전의 책임을 지겠다면서 환공(桓公)의 머리에 비수를 겨누고는 자신들의 잃어버린 영토를 반환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환공(桓公)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승낙했고 제(齊)로 다시 돌아갔지만, 그러나 그는 곧 <협박으로 이루어진 맹약 따위는 지킬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다시 노(魯)를 침략해서 그 조말(曹沫)의 머리를 베어서 올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관중(管仲)은 <예를 들어서, 비록 협박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하더라도, 한번 맺은 약속을 깨는 것은 제후들의 신망을 잃어버릴 염려가 있다>라고 간언했다. 그러자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의 말을 따라서 노(魯)의 영지를 돌려주었고, 그러자 또 그 후, 그 환공(桓公)의 약속에 대해서 알게 된 제후들은 환공(桓公)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으며, 다른 소국(小國)의 군주들도 그때부터는 환공(桓公)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했던 정책들에 의해서 증대되었던 국력과 신뢰를 배경으로 해서 환공(桓公)은 패자(覇者)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또 그는 주(周)왕실 내부의 분쟁을 다스렸다든지, 당시 북상(北上)해서 올라오던 초(楚)를 토벌해서 다시 주(周)에의 충성을 서약하게 했던 것으로 해서, 그는 주(周)왕실로부터 방백(方伯-周를 중심으로 한 四方 내에서 동쪽을 관할했던 제후를 말함)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그 후에 환공(桓公)은 번번이 오만(傲慢)함을 보였고, 주(周)왕실을 업신여기는 행동을 했다. 그러자 또 관중(管仲)은 그때마다 그의 경솔함에 대해서 간언을 했고, 환공(桓公)은 또 관중(管仲)의 말을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관중(管仲)의 간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조말(曹沫)의 건(件)과 연제(燕齊)의 국경에 대한 불리(不利)한 변경에 관해서도, 환공(桓公)은 몹시 불쾌해 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관중(管仲)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또 후세에 그 관중(管仲)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 <관자(管子)>에는 그때를 두고 <창름(倉廩-곡식창고)은 가득차고, 예절을 알며, 의식(衣食)도 충분하고, 영욕(榮辱)을 안다>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일단, 그런 민생(民生)의 안정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도 순조로웠을 것으로 생각이 되며, 그리고 또 환공(桓公)의 명령으로 주(周)왕실의 내분(內紛)을 진정시켰을 때, 그에 기뻐했던 주(周)의 양왕(襄王)이 관중(管仲)에게 그 상(賞)으로 상경(上卿)의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러자 또 관중(管仲)은 <저는 신하(臣下)밖에는 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대우(待遇)는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을 하고는 끝까지 그것을 고사(固辭)했다. 그런데 그랬던 관중(管仲)도 기원전 645년에는 세상을 떠났으며, 그러자 환공(桓公)은 그에게 경(敬)이란 시(諡)를 내렸으며, 그러자 또 그 후로 그는 관경중(管敬仲) 또는 관자(管子)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 관중(管仲)을 잃었던 환공(桓公)은 서서히 정채(精彩-총명함으로 해석함)를 잃어갔고, 그러자 또 관중(管仲)이 죽었을 때 유언했던 <결코 옆에 두어서는 안 될> 3인의 간신[奸臣=3貴로, 그 첫째는 공자(公子)개방<開方-이름은 姬開方 또는 啓方이었으며, 衛 의공(懿公) 또는 대공(戴公)의 公子였고, 母國을 배신했던 인물이었다>이었고, 둘째는 역아(易牙-요리사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다음, 그 고기를 환공에게 헌상했던 인물이었다)였고, 마지막으로 수조<豎刁-자궁(自宮-내시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거세함)환관(宦官)>가 그들이었다]들을 환공(桓公)은 자신의 측근에 두게 되었다. 그러자 그 3인은 공모(共謀)해서, 당시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공자(公子) 소(昭)를 폐했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괴뢰 인물로 무궤(無詭)를 옹립하고는 음모를 진행시켰다.

  제후(齊侯) 무궤(無詭)는 춘추시대 제(齊)의 제 17대 군주였고, 무휴(無虧) 또는 무맹(武孟)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그는 환공(桓公)과 측실(側室)의 장(長)이었던 희(姬)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환공(桓公) 사후(死後)에 그를 포함한 5명의 공자<公子-무궤(無詭), 원(元-후의 혜공(惠公), 반(潘-후의 소공(昭公), 상인(商人-후의 의공(懿公), 공자(公子) 옹(雍)>가 그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게 되었기 때문에, 태자(太子)였던 소(昭-후의 孝公)는 당시 그를 후견하고 있던 송(宋)의 양공(襄公)에게로 망명해 버렸다. 그러자 그 후, 그 무궤(無詭)를 옹립하려 했던 일당들이 반대파들을 암살하는 것으로 그 일을 수습했고, 그러자 무궤(無詭)는 왕위에 오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3개월 후, 송(宋)의 양공(襄公)이 태자 소(昭)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제(齊)를 공격해왔기 때문에, 제(齊)의 신하들은 그에 겁을 먹고 그 무궤(無詭)를 미리 암살해 버렸다. 그러자 또 태자 소(昭)는 신군(新君)으로서 제(齊)의 환영을 받으면서 입성했고, 그 후에 즉위해서 효공(孝公)이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환공(桓公)이 병사(病死)하자 그 상중(喪中)에 아주 격한 후계쟁탈전이 일어났고, 끝내는 그것이 내란(內亂)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환공(桓公)의 사해(死骸)는 방치되어서 부패(腐敗)했고, 그러자 또 그 시체에서 생긴 구더기가 바깥 복도까지 기어나와서 돌아다녔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생전에 관중(管仲)이 미리 깔아두었던 복안을 따라서 행했던 환공(桓公)의 유언에 따라서 당시, 제후들의 후원(後援)을 받고 있었던 공자(公子) 소(昭)가 즉위해서 효공(孝公)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내란을 겪었던 데다가, 그 3귀(貴)에 의한 중신들의 모살(謀殺)에 의해서 국력은 대폭 저하(低下)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제(齊)의 패권(覇權)은 그 후에 진(晋)의 문공(文公)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후세의 진수(陳壽)는 제갈량(諸葛亮)을 평가했을 때 <그의 재능은 관중과 소하(蕭何)에 필적(匹敵)하고...>라고 기술했고, 그 제갈량(諸葛亮) 본인도 스스로를 관중(管仲)과 악의(樂毅 또는 락의)에 비교했던 등, 그래서 그 관중(管仲)의 이름은 <최상급 내정(內政)의 재능(을 가졌던 자)>과 <최고의 신하>에 대한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에서도 그 관중(管仲)을 <차라리 그 분의 마부(馬夫-또는 시종)라도 되고 싶다>라고까지 숭경(崇敬)했다던 안영(晏嬰)과 동열(同列)에 세우는 등, 제법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제(齊)의 환공(桓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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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4)

 <周>


 주(周-기원전 1046년경에서 기원전 256년)는 중국 고대의 왕조로, 은(殷)을 멸하고 왕조를 열었다.
 국성(國姓)은 희(姬). 주(周)의 전설상의 시조(始祖)는 후직(后稷)이라고 알려져 있고, 제 순(帝舜)을 섬겼으며, 농정(農政)에 공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고공단보(古公亶父) 시대에 주의 땅에 정주(定住)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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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상기(上記)대로, 문왕(文王) 사후(死後) 무왕(武王)은 아우였던 주공단(周公旦)과 태공망(太公望) 그리고 소공(召公) 등의 조력(助力)을 받아서 은(殷)을 멸했고, 주(周)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그 무왕(武王)은 건국 바로 직후에 사거(死去)했고, 그러자 그 뒤를 성왕(成王)이 잇게 되었다.(그 내용에 대해서는 前 回 참조)

 ※ 성왕(成王)은 주조(周朝) 제2대 왕으로, 성왕(成王)이란 이름은 시호(諡號)일 뿐만 아니라, 생전에도 불렸던 칭호였다. 그의 동모제(同母弟)는 진(晋)의 개조(開祖)였던 당숙우(唐叔虞)가 있었고, 그 외에 우숙(邘叔)과 응숙(應叔) 그리고 한숙(韓叔) 등이 있었다. 그리고 <역성(易姓)혁명> 후, 대충 2년 만에 붕어했던 무왕(武王)의 뒤를 이어서 그는 즉위했으며, 그러나 또 당시에는 아직 정치체제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즉위 후 곧 <3감(監)의 난>을 겪어야 했고, 그리고 또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의 모(母) 읍강(邑姜)과 숙부였던 주공단(周公旦) 그리고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 그리고 소공(召公)석(奭-燕의 開祖) 등이 그를 후견했다. 그 후, 그가 성장하자 스스로 정무를 보기도 했다지만, 그러나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 붕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그의 아들 쇠(釗-康王)가 그 후계를 이었으며, 그리고 또 그때까지가 주(周)의 확립기로, 그것을 <성강(成康)의 치(治)-기원전 1043년에서 기원전 996년경>라고 한다.

 ♣ 강왕(康王)은 주조(周朝) 제3대 왕으로, 부(父) 성왕(成王)이 죽자 바로 즉위했다. 그 치세(治世)는 <天下安寧,刑錯四十余年不用-천하가 강령하고, 형벌을 40여년이나 행할 일이 없었다>의 치세로 알려졌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소공(召公)석(奭)과 필공(畢公)고(高)의 보좌를 받았으며, 외정(外征)을 되풀이했던 시대였다. 그리고 또 그의 시대에 주(周)는 각 제후들로부터의 위신을 확립했으며, 국가체제의 안정을 창출했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주(周)는 서서히 쇠퇴(衰退)의 길을 걸었고, 10대 여왕(厲王) 대에 이르자 그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 없이, 모든 것을 독점하려 들었기 때문에, 제후들로부터 원망을 샀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대란(大亂)이 발생했고, 그러자 또 여왕(厲王)은 변경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 여왕(厲王)은 주조(周朝)의 제10대 왕으로, 그 재위기간에는 영신(佞臣-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 영이공(榮夷公)을 중용했고, 현신(賢臣)이었던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등의 간언을 물리치고 폭정을 일삼았다. 그러자 민중들은 말조심을 했으며, 눈짓으로 의사를 전달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곧 국세(國勢)는 조락(凋落)하기 시작했으며, 그와 더불어서 조정(朝廷)의 부패(腐敗)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자 또 민중들의 불만도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그 결과 기원전 842년에는 민중들이 봉기해서 왕궁으로 침입하는 일까지 발생했으며, 그러자 또 그 여왕(厲王)을 죽이자는 민중폭동이 각지에서 발생했다. 그러자 여왕(厲王)은 호경(鎬京)을 탈출해서 황하를 건넜다. 그리고는 체(彘-現在의 山西省 霍州市)로 도망을 갔는데, 그러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그를 대신해서 정치하는 <공화제>가 시행되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828년이었던 공화14년에 그 여왕(厲王)이 사망하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에 의해서 그의 아들이었던 희정(姬靜)이 즉위해서 선왕(宣王)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선왕(宣王)의 대에 여왕(厲王)의 또 다른 아들이었던 희우(姬友)는 정(鄭)에 봉해졌으며, 그리하여 정(鄭)의 환공(桓公)이 되었다.(이상은 史記에 의함) 그러나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는, 제후들의 추천을 받았던 공백(共伯)의 화(和)란 자가 그 부재 시의 왕을 대신해서 정무를 행했으며, 그것이 공화제의 유래라고 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본 四夷의 명칭>


 선왕(宣王)은 주조(周朝)의 제11대 왕이었으며, 부(父) 여왕(厲王) 사망 후에 즉위했다. 그 치세기간에는 주정공(周定公)과 소목공(召穆公)의 도움으로 국세가 중흥했으며, 군사(軍事) 면에서는 진중(秦仲)과 두백(杜伯)이라는 대부(大夫-중국에서 벼슬아치를 3등급으로 나눈 품계 중의 하나로, 周나라 때는 鄕의 아래 士의 위였다고 함))들에 명해서, 적극적으로 이민족(異民族)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서서히 열세로 돌아섰으며, 그리하여 결국에는 기원전 789년의 <천무(千畝)의 싸움>에서 강융(姜戎)에 대패하는 등, 점점 더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그의 치세 후기에는 정치면에서도 부(父) 여왕(厲王)처럼 군주독재화가 진행되었으며, 그리고 또 노(魯)의 후계문제에 개입했다거나, 두백(杜伯)의 처형 등, 제후들에게도 압박이 강해졌기 때문에, 그 결과 주(周)왕조는 점점 더 구심력을 잃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그의 아버지 여왕(厲王) 그리고 그의 아들 유왕(幽王)과 더불어서 선왕(宣王) 역시도 주(周)의 멸망을 부추겼던 폭군과 암군(暗君)으로 그 이름이 남게 되었다. 그런 한편, 문화면에서는 그 시대에 주(籀)에 의해서 사주편(史籀篇)이 저술되었고, 서체(書體)의 하나인 대전(大篆)에 해당하는 주문(籀文-籀書)이 만들어졌다.



<전서체의 예이며, 내용은 始皇帝>


 그리하여 그 주(周)에는 왕이 없게 되었고, 그러자 또 당시 재상(宰相)이었던 공백화(共伯和)가 태자 정(靜)을 옹립해서 정치를 행했다. 그러자 후에 그 시대를 공화(共和)의 시대라고 불렀으며, 현대의 공화제(共和制)의 유래가 되었다.<하지만 그에는 또 異說이 있으며, 그것은 또 주(周) 정공(定公)과 소목공(召穆公) 그 두 사람의 대신(大臣)이 합의제(合議制)로‘함께 화합해서’ 정치를 행했기 때문에, 공화(共和)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무튼, 그 선왕(宣王)의 치세에서 겨우 주(周)의 국세(國勢)는 회복되었다지만, 그러나 그 선왕(宣王)도 후반기에는 정치에 싫증을 냈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 나라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또 제12대였던 유왕(幽王)의 시대에 신(申-중국의 周代와 春秋時代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으로, 犬戎을 끌어들여서 西周를 멸했다)으로부터 맞아들였던 황후를 폐(廢)하고, <포사(褒姒)>를 황후의 자리에 올렸기 때문에 신(申)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신(申)은 견융(犬戎)을 끌어들여서 주(周)의 왕도(王都)를 공략했다. 그리하여 유왕(幽王)은 살해당했고, 그러자 또 태자는 서쪽의 휴왕(携王)과 싸워서 물리쳤으며, 그 후에 동쪽의 낙읍(洛邑-王城・成周로, 現在의 河南省 洛陽市 부근)으로 이주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그곳을 <동주(東周)>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시대 구분으로는 <춘추시대(春秋時代)>로 넘어가는 시기가 되었다.

 ※ 유왕(幽王)은 주조(周朝)의 제12대 왕으로, 선왕(宣王)의 아들이었고, 평왕(平王), 휴왕(携王), 태자 백복(伯服) 등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기원전 780년에 관중<關中은 函谷関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의 협서성 渭水盆地(渭河平原)의 西安을 중심으로 했던 그 일대를 말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秦의 영지였고, 그 후에 前漢과 唐도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백양보(伯陽甫)라는 자가 그것이 바로 주조(周朝) 멸망의 전조라고 말을 했다고 하며, 사서(史書)의 기록에서는 그때가 주조(周朝)의 쇠퇴기였다고 했다. 그리고 또 그때, <포사(褒姒)>가 후궁으로 들어와서 유왕(幽王)의 총애를 받아서 백복(伯服)을 낳았으며, 그러자 또 유왕(幽王)은 정실(正室)이었던 신(申)후(后)와 태자였던 의구(宜臼)를 폐했고, 포사(褒姒)를 왕후에 그리고 백복(伯服)을 태자로 삼았다. 그런데 포사(褒姒)는 좀처럼 웃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유왕(幽王)은 갖은 방법으로 그 포사(褒姒)를 웃게 만들려고 해보았지만,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견(絹)을 찢는 소리에는 조금 반응을 보였는데, 그러자 또 유왕(幽王)은 나라의 견(絹)을 모두 징수(徵收)해서 그것을 찢었다든지, 거기다 또 봉화를 이용해서 제후들을 집결시켜서 포사(褒姒)를 웃겨보려고 했다든지 해서, 마침내 제후들로부터 신뢰를 잃어갔다. 그리고 나중에 실제로 신(申)후(后)의 아버지 신(申)후(侯)가 자신의 딸과 외손자를 폐한 일에 앙심을 품고 쳐들어왔을 때, 아무리 봉화를 올렸어도 제후들이 모여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유왕(幽王)은 아유추종(阿諛追從-아첨)의 달인이었고 또한 왕족이었던 영신(佞臣) 괵석부(虢石父)를 경(卿)에 임명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신(申)후(后)를 폐해서 신(申)후(侯)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유왕(幽王)은 여산(驪山-陝西省의 秦嶺山脈 중에 있는 山)에서 죽임 당했으며, 포사(褒姒)도 그때 붙잡힌 후 행방불명됨으로 해서 서주(西周)는 멸망했다. 그리고 유왕(幽王) 사망 후, 제후들과 신후(申侯)는 폐(廢)태자였던 선구(宜臼)를 평왕(平王)으로 즉위시켜서 주(周)사(祀)를 잇게 했는데, 그러나 그때, 전쟁 때문에 그 도시가 온통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평왕(平王)은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천도했으며, 그리하여 그때부터 동주(東周)가 시작되게 되었다.

 ♣ 괵석부(虢石父)는 기원전 771년경에 살았던 사람으로, 괵(虢)의 군주였으며, 주(周)의 공족(公族)이었고, 괵공고(虢公鼓)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양관(楊寬)의 서주사연구(西周史研究)에서는 고(鼓)가 이름이었고, 석부(石父)는 그의 자(字)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주(周)의 유왕(幽王)은 그를 상경(上卿)으로, 제공(祭公)을 사도(司徒)로, 그리고 윤구(尹球)를 대부(大夫)로 했는데, 그는 아첨을 해서 이(利)를 취하는 것을 좋아했고, 백성들을 수탈(收奪)했기 때문에 그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그리고 또 그는 유왕(幽王)에게 여산(驪山)의 봉화대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며, 그 수병(守兵)에게 명해서 봉화를 올리라고 했다. 그러자 제후들이 황망히 모여들었는데, 그것을 보고 포사(褒姒)가 웃었다. 그러자 유왕(幽王)은 그에게 천금(千金)의 포상을 내렸다. 하지만 역시, 신후(申侯)가 쳐들어왔을 때, 그 선봉대에 의해서 그는 살해되었다.

 ♣ 포사(褒姒)는 기원전 8세기(기원전 770년)경에 주(周) 유왕(幽王)의 왕비로 활약했던 여성이었고, 절세의 미녀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나중에 그 주(周)를 멸망시키는 원흉(元兇)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출생에 관한 것은 여러 가지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러나 정확한 것은 없다. 하지만 또 일설(一說)에 따르면, 그녀는 원래 혈통도 모른 채로 버려졌던 아이였다든지, 또는 용의 입에서 나온 거품이 도마뱀으로 변했고, 그것이 당시 미망인(未亡人)이었던 그녀의 어머니와 통정(通情)해서 그녀가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리고 또 포국(褒國-陝西 褒城에 존재했던 姒姓의 나라)의 가난했던 한 상인이 그녀를 주워서 절세의 미녀로 키웠다고도 전한다. 그리고 그 후, 그 포국(褒國)이 주(周)의 노여움을 샀으며, 그러자 또 그 포국(褒國)의 왕은 주(周)의 벌을 피하기 위해서 그녀를 유왕(幽王)에게 헌상했다고 하며, 그러자 또 유왕(幽王)은 그녀의 미색에 빠져서 원래의 왕후였던 신후(申后)와 태자를 폐하고 그녀를 왕비의 자리에 올렸다. 그런 다음 그녀가 낳았던 아들을 태자로 삼았으며, 그리고 또 앞에서 설명되었던 대로 그녀를 웃게 하기 위해서 유왕(幽王)은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런데 또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의 착오로 봉화가 올랐는데, 그러자 제후들이 황급히 왕궁으로 모였다. 그러자 그런 갑작스런 장면을 보고 그녀가 웃었다고 하며, 그 다음은 이미 설명한 대로이다.
그리고 그 후, 유왕(幽王)은 여산(驪山)의 록(麓)에서 붙들렸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하지만 그녀도 그때 살해당했다든지, 또는 유왕(幽王)을 따라서 자살했다든지, 또는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고도 전하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 휴왕(携王)은 주조(周朝)의 제12대 유왕(幽王)의 아들로, 주조(周朝)의 정치세력이 2분되어 동(東)의 성주(成周)를 거점으로 했던 평왕(平王)과 대립했다. 그리고 주(周)의 동서(東西) 분열에 관해서도 조금 설명을 해보면, 기원전 772년(또는 771년)에 이민족이었던 견융(犬戎) 출신의 신(申)황후의 냉대에 반감을 가졌던 그녀의 부(父) 신후(申侯)가 견융(犬戎)과 함께 군(軍)을 이끌고 와서 주도(周都)를 공략했고, 그 결과로 유왕(幽王)이 죽었다. 그리고 또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당시의 혼란했던 시절에 주(周)의 수뇌(首腦)들과 제후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계산을 가지고 있었고, 휴왕(携王)은 평왕(平王)과 대결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각각 저마다의 진영으로 나뉘어져서 주조(周朝)의 재(再) 부흥이란 대의명분으로 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 소위 평왕(平王) 파(派-申侯, 晋의 文侯, 鄭의 武公, 許의 文公, 秦의 襄公, 文公父子, 魯의 孝公, 東虢 등, 有力 諸侯 다수)는 동(東)의 낙읍(洛邑)에서 유왕(幽王)의 원(元) 태자였던 의구(宜臼)를 평왕(平王)으로 즉위시켰으며, 휴왕(携王) 파(派-西虢의 虢公翰을 筆頭)는 그 2년 전에 휴(携)라는 곳에서 왕자 여(余)를 데려와서 호경(鎬京)에서 즉위시켰고, 그리하여 휴왕(携王)이 되었다. 그런데 그 동서(東西) 분열 극(劇)의 배후에는 괵(虢)이란 제후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고 하며, 그 나라는 또 당시, 대국(大國)이었던 진(晋)처럼 본가(本家-東虢)와 분가(分家-서괵)로 영지가 나뉘어져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또 특히, 서괵은 그때 주왕(周王)의 측근(側近=卿士=執政)으로서는 선왕(宣王) 때보다 왕실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동서(東西) 분열의 한 원인을 제공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것은 사기(史記)보다도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더욱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근년의 연구에서 그것은 사실(史實)로 그 신빙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혼란과 위험상황에서 어떻게 그 휴왕(携王) 세력이 호경(鎬京)에서 진영(陣營)을 펼치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어쨌든, 그리하여 십수(十數) 년의 정쟁(政爭) 후였던 기원전 759년(平王12年)에 많은 유력 제후들을 거느렸던 평왕(平王)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휴왕(携王) 세력을 타도했고, 그러자 괵(虢)의 힘은 분산되었으며, 결국 휴왕(携王)도 평왕(平王)에게 협조적이었던 진(晋)의 문후(文侯)에게 살해당했다. 그렇게 해서 또 당시 전화(戰禍)로 황폐해졌던 호경(鎬京)은 그 후, 진(秦)이 그곳을 수도로 삼을 때까지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주(周)의 정치무대는 낙읍(洛邑)으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것을 <주(周)의 동천(東遷)>이라고 하며, 그래서 또 그때까지를 서주(西周) 그리고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시대구분 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때, 주(周)는 겨우 낙읍(洛邑) 주변을 지배하는 소국(小國)으로 변했고, 과거와 비교가 되지 않았을 만큼 그 위세가 축소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 권위만큼은 유지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또 제후들은 그 권위를 이용해서 각자 주도권을 쥐려고 노력했다.(春秋五覇-후술)

 하지만 그 조그마한 권위도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서자 완전하게 사라지게 되었고, 그래서 또 그때부터 이름 있었던 제후들은 각각 왕(王)으로 칭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또 그 작은 왕조(王朝) 안에서도 권력싸움은 계속되었으며, 그래서 또 동서(東西)로 분열되었다든가, 몇 번이고 왕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또, 그리하여 결국에 주(周)는 기원전 256년 난왕(赧王) 때 진(秦)에 의해서 멸해졌지만, 그러나 다행인지 그 왕족만은 그대로 존속했다.

 그리고 그 주(周)의 정치와 문화 등에 대해서도 조금 설명을 하고 넘어가면, 그 주(周)의 관제(官制)에 대해서는 주공단(周公旦)의 주례(周禮)에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있지만, 그러나 그 주례(周禮)가 완성되었던 것은 전국시대 이후라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만으로 대변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고 보아지고 있다. 그래서 또 금문(金文-金石文)에서 또 그것을 찾아보면, 그 주(周)에는 어사요(卿事寮)와 대사요(大史寮)라고 불렀던 2개의 조직이 있었다고 하며, 어사요의 장관에는 태보(太保)와 태사(太師)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태사만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밑으로는 사마(司馬-軍事担当)와 사토(司土-土地管理担當) 그리고 사공(司工=司空=사마, 사토와 함께 삼공의 하나로, 토지와 민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벼슬)이 있었으며, 그것은 또 각 제후들 아래에도 같은 직(職)이 있었다. 그리고 또 대사요의 장관은 태사(太史)라고 불렀고, 그것은 또 역사의 편찬이나, 각종의 의례(儀禮) 그리고 제사(祭祀) 등을 주관했다.

 그리고 또, 신분제도에 관해서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따르면, 왕 아래에 제후들이 있고, 그 아래에 대부(大夫-일종의 귀족층)가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사(士)라고 불렸던 계층이 있었고, 또 그 아래에는 서민의 계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 그 대부(大夫)와 사(士)란 계층은 금문(金文)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그 사회에서도 일종의 노예계층은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며, 그래서 또 그들은 주로, 주인을 대신해서 농업을 했다거나, 직공(職工) 또는 청동기의 주조(鑄造)에 관련된 일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토지제도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그 당시에도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했을 것으로 생각이 되지만
 그러나 그 실제에 대해서는 의문시하는 의견이 많다.

<정전제의 모델>


 ※ 정전제(井田制)는, 고대중국의 하나라와 은나라 그리고 주나라에서 실시했던 토지제도로 알려져 있고, 특히 주(周)나라에서는 사방 1리(里)의 농지를 우물 井자 모양으로 100무(畝)씩 9등분한 다음, 그 중앙의 한 구역을 공전(公田)이라고 하고, 그 둘레의 여덟 구역을 사전(私田)이라고 하여, 그 여덟 농가에게 맡기고, 여덟 집에서 공동으로 공전을 부쳐서 그 수확을 나라에 바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주공단(周公旦)이 정비했던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고, 특히 맹자(孟子)는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제도라고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周)의 문화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원래 은(殷)의 청동기문화에 대해서는 그 예술성에 대해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고, 그래서 또 그 주(周)도 기본적으로는 그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예술성에 대해서는 주(周)에서 간소화되었고, 그래서 또 은(殷)에 비해서는 그 평가가 조금 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기의 청동기는 거의가 제사(祭祀)용으로 제작되었으며, 실용적인 것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기(器)에는 점복(占卜)의 결과를 주입(鑄入)시켰으며, 그것이 또 바로 금문(金文)으로 불리게 되면서, 그 시대를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되고 있다. 그리고 또, 은(殷)대에 비해서 금문(金文)은 주(周)대에서 특히 길어진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때까지 내려오던 절대적이었던 조상숭배의 의식이 엷어졌던 것도 은(殷)과 주(周)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역시, 은(殷)에서는 선조에 대한 숭배와 경외심이 특히 강했고, 그래서 또 그 제사를 태만히 했을 때는 그 즉시 재앙이 닥칠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주(周)의 사람들은 제사는 모셨지만, 그러나 재앙에 대한 생각은 엷어졌다. 그리고 또한, 은(殷)에서는 일이 생기면 점을 쳐서 혹시라도 조상이 노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을 점으로 물어보는 일이 많았지만, 그러나 주(周)에서는 그런 것도 적어졌고, 그래서 또 은(殷)이 남겼던 금문(金文)에 비해서 주(周)의 것으로 남아있는 금문(金文)의 수는 많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또 그 결과, 주(周)보다는 은(殷)이 더 많은 자료들을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문자의 주입(鑄入) 기술은 당시에는 왕실의 독점기술이었지만, 그러나 때로 그 일을 제후들에게도 시켰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춘추시대에 들어갔을 때, 그 혼란했던 틈을 타서 그 기술이 제후들에게도 전파되었고, 그리하여 나중에는 제후들 간에도 그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한, 건축분야에서는 주(周)에 들면서부터 기와(瓦)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은(殷)대에서부터 춘추시대에 걸쳐서 읍(邑)이라고 불렸던 도시국가가 다수 산재(散在)해 있었다. 그리고 은대(殷代)와 동주(東周)시대에 그 읍(邑)에는 군주가 살고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곳에는 종묘(宗廟) 등, 읍(邑)의 중핵이 되는 시설들이 구릉(丘陵) 위에 설치되었고, 그 주변으로는 또 튼튼한 성벽이 둘러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다 또 그 주변에는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비교적 간단한 토벽(土壁)이 건축되었으며, 그래서 또 전시(戰時)가 되면 일반백성들은 그 구릉 위의 견고한 성벽으로 몰려들어서 방전(防戰)을 했다.

 그리하여 서주(西周)시대에는 외벽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그 결과 내벽(內壁)은 성(城) 그리고 외벽은 곽(郭=內城外郭式)이라는 이중구조로 벽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화북(華北)에서는 당시 무진장 존재했던 황토를 나무가루 등과 섞어서 단단하게 한 후에 견고한 층을 쌓아올리는 판축(版築)공법으로 성벽을 쌓았다. 그러자 그 성벽은 특히 견고한 토벽이 되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물에는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또 그 화북(華北)에는 비가 적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곳에서는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그것을 전(磚-벽돌)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또 그 성벽에는 황토를 소성(燒成-굽기)해서 만든 연와(煉瓦)로 덮어서 방수가공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웬만한 비가와도 견딜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읍(邑)은 성벽으로 둘러싸여진 도시(都市) 부(部)와 주변의 경작지로 나뉘어졌으며, 그 외측에는 또 미개발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서, 그곳에서는 수렵이나 채집 등을 하면서 살아가는 비(非)정주(定住)의 부족들이 생활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夷)라고 불렸고, 때때로 그 읍(邑)을 습격하거나, 약탈을 행하기도 했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존속이 어려워졌던 소읍(小邑)들은 보다 큰 읍(邑)들에 병합되었다. 거기다 또 춘추시대에 접어들자 전란(戰亂)에 의해서 그런 일들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그러자 또 대읍(大邑)들은 그들에게서 철기(鐵器) 등의 보급을 받기 위해서라도 더욱 그 영역을 넓혀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결과, 춘추(春秋) 말기에서 전국(戰國)에 걸쳐서 중국의 나라 형태들은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발전해나가게 되었던 것이다.(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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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3)

 <周>


 주(周-기원전 1046년경에서 기원전 256년)는 중국 고대의 왕조로, 은(殷)을 멸하고 왕조를 열었다.
 국성(國姓)은 희(姬). 주(周)의 전설상의 시조(始祖)는 후직(后稷)이라고 알려져 있고, 제 순(帝舜)을 섬겼으며, 농정(農政)에 공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고공단보(古公亶父) 시대에 주의 땅에 정주(定住)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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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상기(上記)대로, 문왕(文王) 사후(死後) 무왕(武王)은 아우였던 주공단(周公旦)과 태공망(太公望) 그리고 소공(召公) 등의 조력(助力)을 받아서 은(殷)을 멸했고, 주(周)왕조를 세웠다.

 ※ 무왕(武王)

<무왕>


 무왕은 주조(周朝)의 창시자였으며, 문왕의 차남이었다. 동모형(同母兄)에 백읍고(伯邑考)가 있었고, 역시 동모제(同母弟)에 관숙선(管叔鮮)과 주공단(周公旦) 그리고 채숙도(蔡叔度)와 곽숙처(霍叔處) 그리고 강숙봉(康叔封) 등이 있었다. 자(子)로는 성왕(成王), 당숙우(唐叔虞-晋의 開祖), 우숙(邘叔), 응숙(應叔), 한숙(韓叔) 등이 있었다.<春秋左氏傳에서>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공자(孔子)가 편찬했던 것이라고 전해지며, 역사(歷史)서 <춘추(春秋)-儒學에서 五經의 하나이며, 공자가 노나라 隱公에서 哀公에 이르는 242년(B.C.722~B.C.481) 동안의 사적(事跡)을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라고 전해지지만, 그러나 공자가 직접 저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11권>의 대표적인 주석(註釋)서 중의 하나로, 기원전 700년경부터 약 250년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통칭으로는 <좌전(左傳)>이라고 불리며 <춘추좌전(春秋左傳)> 또는 <좌씨전(左氏傳)>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현존하는 다른 주석서인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과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아울러서 춘추삼전(春秋三傳) 또는 삼전(三傳)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 삼전(三傳) 중에서도 좌전(左傳)은 제일 기본적인 것으로 되어있고, 그 좌전(左傳)의 작자(作者)는 노(魯)의 좌구명<左丘明-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학자(?~?)로, 벼슬은 태사(太史)를 지냈으며, 공자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국어(國語)도 그가 저술한 것이라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것도 반드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일설에는 옛날부터 존재했던 사서(史書)를 전한(前漢)의 유흠(劉歆)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라고 개명(改名)한 후,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것이라고 선전을 했으며, 그리하여 자신이 옹립했던 왕망(王莽)의 한(漢)왕조 찬탈의 근거로 삼았다는 유력한 강유위(康有爲)의 이설(異說)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도 입증(立證)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좌전(左傳)은 다른 삼전(三傳)과는 달리 풍부한 자료를 기본으로, 춘추(春秋)를 상세히 보완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현재에도 그 춘추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당시의 전쟁에 관한 기재(記載)는 상세하다. 그리고 또 동(同) 시기를 취급했던 역사서 국어(國語)는 좌전(左傳)과 견줄만한 작품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그것은 또 <춘추외전(春秋外傳)>으로 불리고 있다.

 ♣ 관숙선(管叔鮮)은 주(周) 문왕(文王)의 3남이며, 성은 희(姬), 이름은 선(鮮)이었고, 관숙(管叔) 또는 관숙(關叔)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서주(西周) 초년(初年)에 관(管)에 봉해졌으며 제후가 되었다. 그는 무왕(武王) 12년에 은(殷)이 멸하자 그 다음해 관(管-현재의 河南省 鄭州市 老城區)에 봉해졌으며,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녹부(武庚祿父)와 함께 은(殷)의 유민들을 통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자 관숙선(管叔鮮)은 채숙도(蔡叔度)와 곽숙처(霍叔處)와 함께 주(周)초(初) 3감(監)으로 칭해졌다. 그 후, 성왕(成王) 원년에 성왕(成王)이 즉위했을 때, 그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주공단(周公旦)이 섭정을 했다. 그러자 관숙선(管叔鮮)은 주공단(周公旦)이 그 자리를 찬탈할 것을 염려해서 채숙도(蔡叔度)와 함께 무경(武庚)을 옹립하기 위해서 기병(起兵)했고, 그것이 후에 <3감(監)의 난>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3년이나 이어졌으며, 그러자 주공단(周公旦)이 동정(東征)해서 관숙선(管叔鮮)을 파(破)하고 살해했다.

 ♣ 주공단(周公旦)은 주(周)왕조의 정치가로, 성은 희(姬), 휘(諱)는 단(旦)이었다. 그리고 그는 노(魯)나라를 열었던 개조(開祖)였으며, 주공(周公)은 그의 칭호(稱號)였다고 생각이 된다. 그는 또 문왕의 4자(子)로, 무왕(武王)의 동생이었으며, 그 무왕(武王)과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을 보좌했으며, 건국 직후의 주(周)를 안정시켰다. 그는 또 태공망(太公望), 소공석(召公奭)과 함께 주(周) 건국의 대(大)공신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는 또 주(周) 성립 후, 곡부(曲阜)에 봉해져서 노공(魯公)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때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魯)로 가지 않고 무왕(武王)의 적자(嫡子) 백금(伯禽)을 보좌하기 위해서 스스로 정치를 맡았다는데, 그래서 또 그 연유에 대해서도 조금 설명을 하면, 건국 초기에 무왕(武王)이 병으로 쓰러져서 여생이 얼마 남지 않게 되자, 그는 탄식하면서 자신을 산 제물(祭物)로 해서 무왕(武王)을 살려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무왕(武王)은 잠시 회복하는가 싶더니 결국 죽고 말았다. 그러자 무왕의 뒤를 이어서 성왕(成王)이 그 자리를 이었지만, 그러나 또 그때, 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단(旦)은 연(燕)의 소공(召公)과 함께 섭정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그러던 중에 <3감(監)의 난(亂)>이 발생했고, 그러자 또 단(旦)은 그 난을 진압하고는 무경(武庚)과 관숙선(管叔鮮)을 주살(誅殺)했으며, 채숙도(蔡叔度)는 그의 아들 중호(仲胡)에게 가독(家督)을 잇게 하고는 유형(流刑)에 처했다. 그 후, 7년이 경과했을 때 성왕(成王)은 성인(成人)이 되었고, 그러자 단(旦)은 정권을 성왕(成王)에게 물려주고는 원래대로 신하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그 후, 단(旦)은 낙읍(雒邑=洛陽)을 정비했고, 그러자 그곳은 주(周)의 부도(副都)가 되었다. 그리고 또 단(旦)은 예학(禮學)의 기초를 닦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주대(周代)의 의식(儀式)과 의례(儀禮)에 관해서 쓴 <주례(周禮)>와 <의례(儀禮)>를 저작했던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 단(旦)의 시대로부터 적어도 약 500년간의 춘추시대에 유학(儒學)을 열었던 공자(孔子)는 그 노(魯) 출신으로, 단(旦)을 이상(理想)적인 성인(聖人)으로 숭배했으며, 자주 단(旦) 꿈을 꾸었을 정도로 경모(敬慕)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느 때에 더 이상 꿈에 단(旦)이 나타나지 않자 공자는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주공(周公)의 호칭에 대해서는, 그 단(旦)이 주(周)의 연고지였던 기산(岐山)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주(周)의 공(公=君主)이 되어서 그렇게 불렸을 것이란 설(說)이 있다. 그리고 또 무왕(武王)이 붕어한 후, 그는 당연히 즉위해서 왕이 되었고, 그러나 그 후에 성왕(成王)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설(說)도 있다. 아무튼, 그 주공(周公)의 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근래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었지만, 그러나 2004년에 협서성(陜西省) 옥계(玉鷄)시에서 그의 묘로 추정되는 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여러 나라의 위치도>


 채숙도(蔡叔度)는 성은 희(姬), 이름은 도(度)였고, 서주(西周)의 제후였으며, 채(蔡)의 초대 군주였다. 그는 주(周) 문왕의 5남으로 태어났고, 무왕(武王)이 은을 멸하자 채(蔡-河南省 駐馬店市 上蔡県의 南西)에 봉해져서 무경(武庚)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성왕이 즉위하고 주공단(周公旦)이 섭정을 시작하자 그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으며, 결국 관숙선(管叔鮮)과 함께 <3감(監)의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또 그 전쟁에서 패하자 곽린(郭邻)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러자 아들 희호(姬胡-蔡仲)가 채(蔡)에 봉해졌으며, 제사를 이었다.

 ♣ 곽숙처(霍叔處)는 문왕의 8남이었고, 역시 서주(西周)의 제후였으며, 곽(霍-山西省 霍州市)의 초대 군주였다. 그리고 역시, 무경(武庚)의 감시 역을 맡았지만, 3감의 난을 일으킨 후 패배했고, 주공단(周公旦)에 의해서 서인(庶人)으로 강등(降等)되었다. 그러자 역시, 그의 아들이 곽(霍)에 봉해져서 그의 뒤를 이었다.

 ♣
강숙(康叔)은 위(衛)의 초대 군주였으며, 문왕의 9남, 무왕의 동모제(同母弟)였고, 위강숙(衛康叔) 또는 강숙봉(康叔封)으로도 불렸다. 그는 3감(監)의 난 이후 주공단(周公旦)에 의해서 은(殷)의 백성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게 되었고, 위군(衛君)에 봉해져서 황하와 기수(淇水) 사이에 있던 고상허(故商墟-旧殷의 수도였으며, 뒤의 朝歌로, 현재의 河南省 淇県)로 부임했다. 그러자 또 그때, 주공단(周公旦)은 그가 아직 어리다는 것이 염려가 되어서 서경(書經)에 수록되어 있는 강고(康誥)와 주고(酒誥) 그리고 재재(梓材)를 가르쳐서 위정자의 법칙으로 삼게 했다. 그리하여 강숙(康叔)은 부임지로 떠났고, 그 후에 주공단(周公旦)의 가르침대로 선정(善政)을 베풀었기 때문에 나중에 성왕(成王)은 그를 주(周)의 사구(司寇-일종의 사법장관)로 삼았으며, 거기에 더해서 주(周)왕실의 보물을 하사해서 그의 유덕(有德)을 표창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 강백(康伯)이 그의 뒤를 이었다.

 무왕(武王)은 아버지 서백창(西伯昌)이 죽자 여상(呂尙), 주공단(周公旦)과 함께 문왕(文王)의 업(業)을 이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당시, 학정(虐政)을 일삼던 주왕(紂王)을 멸하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켰고, 문왕(文王)의 위패(位牌)를 높이 들고 스스로를 태자 발(發)이라고 부르게 했으며, 그 원정(遠征)이 문왕의 뜻에 의한 것임을 천명(闡明)했다. 그러자 그때, 그를 도우기 위해서 달려왔던 제후들은 800명에 달했고, 그것을 목격했던 제후들은 또 <이번에야말로 은(殷)을 멸할 때다!>라고 말하면서 의기충천(意氣衝天)했다지만, 그러나 또 그때, 무왕(武王)은 <아직 시기상조(時機尙早)다!>라고 생각하고는 군을 철수시
켰다.

 그로부터 2년 후, 무왕(武王)은 다시 군사를 일으켰고, 이어서 목야(牧野)에서 두 군대는 격돌했다. 그리고 이미 설명한대로 무왕(武王)은 그 전쟁에서 승리했고, 이어서 분신자살했던 주왕(紂王)의 시체를 찾아내서 화살 3발을 쏘고는 황금으로 만든 도끼로 그의 머리를 자른 다음, 기(旗)의 끝에 꽂아서 하늘 높이 게양(揭揚)했다.

 그 후, 무왕(武王)은 주(周)왕조를 열었고, 이어서 서백창(西伯昌)에 문왕(文王)을 추호(追號-죽은 임금에게 시호를 올림. 또는 그 시호)했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주왕(紂王)에게 살해당했던 비간(比干)의 묘를 개장했으며, 유폐되어 있던 기자(箕子)도 해방시켜주었다. 그리고 또, 주왕(紂王)의 이모형(異母兄)이었던 미자계(微子啓)에게는 은(殷)의 제사를 계속해서 모실 수 있게 했고, 송(宋)에 봉했다.

 ♣ 미자계(微子啓)는 중국 은(殷)나라의 왕족으로, 제 을(帝乙)의 장자(長子)였다. 그리고 미(微)는 그 봉해졌던 나라의 이름이었으며, 자(子)는 자작(子爵)의 뜻, 그리고 계(啓)는 휘(諱)였다. 그러나 사기(史記)에서는 그의 휘(諱)를 개(開)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전한(前漢) 경제(景帝-휘는 劉啓)와 피휘(避諱)한 것이었다. 아무튼, 그는 주왕(紂王)의 장형(長兄)이었지만, 서자(庶子)였기 때문에 왕위를 물려받지 못했고, 미(微)에 봉해져서 미자계(微子啓)라고 불리게 되었다.(史記) 그리고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의하면, 그의 생모(生母)가 제 을(乙)의 측실로 있었을 때 그와 중연(仲衍)을 낳았고, 그 후에 정실(正室)로 승격되고 나서 주왕(紂王)을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조용하고 평온한 성격으로 인망(人望)이 높았다. 그리고 주왕(紂王)이 폭정을 일삼자 몇 번에 걸쳐서 간언을 했고, 그 뒤의 주(周)와의 전쟁 때도 화목(和睦)을 주장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 후에도 조상들을 모시기 위해서 은(殷)에 남았지만, 그러나 또 당시, 지인이었던 태사(太師)와 소사(少師)에게 자문을 구했던 바, 그들 양인(兩人) 모두 그곳을 떠나는 것을 권유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동생 미자연(微子衍)과 함께 봉지(封地)였던 미(微)로 돌아갔다. 그 후, 주왕(紂王)이 무왕(武王)에게 패해서 죽자, 그 두 사람은 스스로 무왕(武王)을 찾아가서 항복을 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미자계(微子啓)는 상반신을 벗은 채로 양손을 뒤로 결박했고, 그리고는 왼손으로는 양(羊)을 끌고, 오른손에는 억새를 꺾어 든 채로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그러자 무왕(武王)은 흔쾌히 그의 항복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조카였던 무경(武庚)이 반란을 일으켜서 주살(誅殺)되자, 섭정(攝政)의 주공(周公)은 구(舊)은(殷)을 2분(分)했다. 그리고는 동부(東部) 송(宋)에 그 미자계(微子啓)를 보냈으며, 그리하여 은(殷)의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그리하여 또 미자계(微子啓)는 그곳에서 초대 송공(宋公)이 되었고, 그러자 또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던 그를 잘 알고 있던 은(殷)의 유민들은 그를 존경하고 숭배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자식은 없었고, 그리하여 사기(史記)에서는 그의 아우 미중연(微仲衍)이 그의 뒤를 이었다고 써두었다.

 그런 한편, 무왕(武王)은 고대(古代)의 성왕(聖王)들의 자손들을 찾아내서

 신농(神農)의 자손은 초(焦)에
 황제(黃帝)의 자손은 축(祝)에
 요(堯)의 자손은 계(薊)에
 순(舜)의 자손은 진(陳)에
 우(禹)의 자손은 기(杞)에 각각 봉했다.

 그 후, 무왕(武王)은 공신(功臣)들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열고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여상(呂尙)은 제(齊)에
 주공단(周公旦)은 노(魯)에

 그런 다음, 무왕(武王)은 수도를 호경(鎬京-長安) 이외에 낙읍(洛邑)을 부도(副都)로 했고, 천하(天下)의 무기들을 모두 모아서 폐(廢)하고, 군사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임을 천명했다.

 하지만 그 후, 무왕(武王)은 곧 병이 들었다. 하지만 또 그때, 후계자였던 성왕(成王)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래서 무왕(武王)은 주(周)의 장래를 공신이었던 여상(呂尙)과 주공단(周公旦)에게 부탁하고는 병몰(病沒)했다.

 그리하여 무왕(武王)은 하(夏)의 우(禹) 그리고 은(殷)의 탕왕(湯王) 그리고 또 자신의 아버지였던 문왕(文王)과 함께 성왕(聖王)으로서 후세에 숭배되었다. 그리고 또 도교(道敎)에서는 그 무왕(武王)을 <영보천존(靈寶天尊)의 화신(化身)>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영보천존(靈寶天尊)은 태상도군(太上道君)으로 불리는 도교(道敎)의 신이다. 별명은 영보천존(靈寶天尊) 또는 상청천존(上淸天尊)이며, 태상노군(太上老君=道徳天尊)과 원시천존(元始天尊)과 함께 3주(柱)로, 3청(淸)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또 원시천존은 태원(太元) 그리고 태상노군은 노자(老子)를 신격화한 것에 대해서, 태상도군(太上道君)은 도(道)를 신격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도교(道敎)에서의 최고(最高)의 천상계(天上界)인 3청경(淸境)의 상청경(上淸境)의 미라궁(弥羅宮)에 산다고 해서 상청(上淸-天尊)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삼존(三尊)은 또 그 상청경(上淸境)에 살기 때문에 3청(淸)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武王 끝)


 



 <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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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2)


 <周>


 주(周-기원전 1046년경에서 기원전 256년)는 중국 고대의 왕조로, 은(殷)을 멸하고 왕조를 열었다.
 국성(國姓)은 희(姬). 주(周)의 전설상의 시조(始祖)는 후직(后稷)이라고 알려져 있고, 제 순(帝舜)을 섬겼으며, 농정(農政)에 공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고공단보(古公亶父) 시대에 주의 땅에 정주(定住)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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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직(后稷)은 전설상의 주(周)왕조 희(姬) 성(姓)의 선조로, 중국 농업의 신으로 추앙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사기(史記)의 주(周) 본기(本紀)에 의하면, 제 곡(帝嚳)의 원비(元妃-正妃)였던 강원(姜原)이 들(野)에서 발견했던 거인(巨人)의 족적(足跡)을 밟고 임신했다고 하며, 그로부터 1년 만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자 강원(姜原)은 그 갓난아이를 길에다 버렸는데, 그러자 또 우마(牛馬)가 그 아이를 피해서 지나갔다. 그러자 또 강원(姜原)이 이번에는 숲에다 그를 버리려고 했으나, 사람들이 자주 나타나는 차에 버리지를 못했고, 그러자 또 강원(姜原)이 이번에는 얼음 위에 그를 버렸으나, 새들이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강원(姜原)은 그것을 이상히 여겨서 마침내 그를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강원(姜原)은 그의 이름을 기(弃)라고 지었다고 했으며, 그 기(弃)는 기(棄)와 같은 의미인 버린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또 산해경(山海經)에서는 그를 제 준(帝俊-帝嚳의 다른 이름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의 아들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 기(弃)는 성장하자 농경(農耕)을 좋아했고, 그래서 또 마(麻)와 콩(菽)을 심어놓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순(舜)을 섬기게 되었으며, 농사(農師) 직을 맡게 되었다. 그런 다음 후직(后稷)이란 관(官)을 맡게 되었으며, 이어서 태(邰)에 봉해져서 후직(后稷)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 불줄(不窋)이 그의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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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주(周)왕조 초대 무왕(武王)의 증조부(曾祖父)였고, 주(周) 선왕(先王) 중 한명이었다. 공숙조류(公叔祖類)의 아들이었으며, 성(姓)은 희(姬)였고, 선조(先祖) 후직(后稷)과 공유(公劉)의 업(業)을 이어받아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고공(古公)이라고도 불린다.

 ★ 공유(公劉-생몰년불명)는 전설적인 주(周)의 선왕(先王)으로, 국(鞠)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며, 후직(后稷)의 증손(曾孫)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융적(戎狄-서방, 북방오랑캐를 가리키는 말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들을 말함)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줄립(窋立-公劉의 祖父, 后稷의 子) 말년(末年)에, 하후(夏后) 씨(氏-夏왕조)를 떠나서 융(戎)과 적(狄)을 떠돌았던 후직(后稷)의 일족(一族)은, 그 손(孫) 공유(公劉) 대에 이르자, 다시 후직(后稷)의 업을 이어받아서 농경(農耕)을 시작했다. 그리고 또 그때, 공유(公劉)는 각지를 전전하면서 칠수(漆水)와 저수(沮水)에서 위수(渭水)를 건너서 목재(木材)를 조달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곧 부유하게 되었고, 그 후로 그를 칭송하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 소문을 듣고 타국(他國)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거처로 이주해 왔다. 그러자 시인(詩人)이 그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으며, 그 노래는 바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대아(大雅)의 독공유(篤公劉)>다. 그리고 그의 자식 대(代)에 빈(豳)에 정주(定住)했다.

 아무튼, 시경(詩經)에서는 대왕(大王)으로, 그리고 주(周)가 은(殷)을 멸한 후에는 태왕(太王)으로 존칭되었다. 그리고 또 태공(太公)으로 표현한 곳도 있으며, 문왕(文王)이 여상(呂尙)의 일을 <태공(太公)이 원했던 사람이었다>라는 뜻으로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불렀다는 일화(逸話)는 유명하다. <단, 태공(太公)은 조부(祖父) 또는 부(父)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라는 이설(異說)도 있다> 아무튼, 그는 후에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서 일족(一族)을 테리고 기산(岐山)의 록(麓)이란 곳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그때, 사기(史記)에 의하면 백성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그들과 싸우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고공(古公)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으로 그들을 달랬다고 한다. <백성들이 임금을 옹립하는 것은 나라를 잘 다스려 달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백성들이 그들과 싸우려 하는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백성들을 전쟁에 내몰면서까지 임금의 자리에 앉아있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이다>

 그 후, 고공(古公)은 자신의 일족들을 데리고 록(麓)으로 도망을 갔고, 그러자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그곳으로 이주했다. 그러자 고공(古公)은 성곽(城郭)과 가옥(家屋)을 건축했으며, 부락을 나누어서 백성들을 정주시켰고, 5관(官)을 만든 다음 행정을 돌보도록 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시(詩)를 지어서 그의 덕을 칭송했다.

 그리고 또 시경(詩經)에는 그가 강족(姜族)의 처(妻)와 함께 그곳으로 가서 번영했다고 했으며, 그리고 그 후에 상(商)의 왕실과 친교를 맺었고, 그러자 또 그의 아들이었던 계력(季歷)에게 왕실로부터 아내가 주어졌으며<그러자 열녀전에서는 지(摯)의 임 씨(任氏)의 딸이었다고 함>, 그러자 또 그 아내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나중의 문왕(文王)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고공(古公)에게는 계력(季歷) 외에도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이라는 장남과 차남이 있었다지만, 그러나 고공(古公)이 어느 때에 예언하기를 <나의 뒤를 이어서 흥륭(興隆)할 자는 바로 창(昌-文王의 諱)이 아날까>라고 말을 했다고 하고, 그러자 동생 계력(季歷)에게 후계를 양보하기 위해서 그 두 장남과 차남은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고공단보(古公亶父) 사후, 계력(季歷)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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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그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3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설명은 위와 같으며, 그리고 계력(季歷)의 아들 창(昌)이 탄생했을 때, 여러 가지의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자 고공단보(古公亶父)는 그가 후계가 될 것임을 예언했고, 그러자 계력(季歷)의 두 형은 남쪽의 형만(荊蠻)이란 곳으로 떠나서 그곳에서 부임했다. 그리고 태백(太伯)은 그곳에서 구오(句吳)란 나라를 열었고, 그러자 형만(荊蠻)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고 그 나라가 바로 후의 오(吳)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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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은 위의 설명대로, 태백(太伯)은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장남이었고, 우중(虞仲)은 차남이었다. 그리고 태백(太伯)은 후에 오(吳)의 시조(始祖)가 되었으며, 태백(泰伯)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우중(虞仲)은 사기(史記)의 주(周) 본기(本紀)에서는 우중(虞仲)이라고 되어있지만, 그러나 오세가(吳世家)에서는 중옹(仲雍)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공히 생몰연대는 미상이지만, 그러나 기원전 12세기에서 11세기에 살았던 인물이었고,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이 주(周)를 떠났을 때, 주(周)의 사람 두 사람이 그들을 전송하러 나갔는데, 그러자 그 두 사람은 그 주(周)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랐고, 전신(全身)에 자청(刺靑-먹물을 뜨는 것으로, 일종의 文身)을 하는 것으로, 다시 그곳으로 돌아올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그 후, 태백(太伯)은 오(吳)를 열었지만,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자손이 없었다. 그러자 동생 우중(虞仲)이 그의 뒤를 이었고, 그러자 또 후에 사기(史記)는 그의 자손인 오(吳)에 경의를 표했으며, 논어(論語)의 태백(太伯)편에서도 그의 지덕(至德-최고의 德)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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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력(季歷)은 위의 설명대로이며, 그 역시도 생몰년미상이고, 고공단보(古公亶父)의 3남으로, 태임(太任)이란 여성을 아내로 맞았다. 그리고 후에 문왕(文王) 창(昌)을 낳았으며, 그 후에 무왕(武王)으로부터 추존(追尊)되었고, 왕계(王季)라고 칭해졌다. 그는 고공단보(古公亶父)의 뒤를 이었고, 그리하여 고공단보(古公亶父)와 같은 정치자세로 정의(正義)를 행했지만, 그러나 후에 은(殷)의 문무정(文武丁)에게 감금되어 아사(餓死)했다.

 ★ 문무정(文武丁=太丁)은 은조(殷朝) 제28代 제(帝)로, 그러나 성탕(成湯)의 아들 중에서도 태정(太丁)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과 혼동이 되어서, 사기(史記) 등에서는 그 이름이 태정(太丁)이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또, 갑골문(甲骨文)에서는 문무정(文武丁)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실제로는 문무정(文武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주(周)의 계력(季歷)을 중용했지만, 그러나 후에 감금해서 아사(餓死)시켰다. 그리고 또 그는 기자(箕子)와 비간(比干) 그리고 제(帝)을(乙)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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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그 후에 창(昌)이 또 그 후계를 이었고, 그러자 또 그 창(昌)은 고공단보(古公亶父)의 기대대로 주(周)의 세력을 확장시켰고, 은(殷)에 의해서 서백(西伯)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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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백은 나라를 동서남북으로 나누었을 때, 그 서쪽을 관할하는 권한을 가졌던 제후(諸侯)로, 왕의 판단에 관계없이 독단으로 무력을 사용해서 그 지방을 다스리는 것이 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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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자 그때 이미 주(周)는 은(殷)을 상회(上廻)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창(昌)은 어디까지나 은(殷)의 신하로 지내는 것을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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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왕(文王-기원전 1152년부터 기원전 1056년으로 壽命은 97세 卒)은 중국 주조(周朝)의 시조(始祖)였으며, 성은 희(姬), 휘(諱)는 창(昌), 부(父) 계력(季歷)과 모(母) 태임(太任)의 자(子), 주조(周朝)의 창시자였던 무왕(武王)의 아버지였다.

 문왕(文王)은 상(商)의 신하로서,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었고, 부(父) 계력(季歷) 사후(死後)에 주(周)의 땅을 승계했으며, 그 후에 본거지를 풍하<灃河-渭河의 지류로, 湖南성의 예수(澧水)와는 글자가 다름>의 서안(西岸)에 있던 풍읍(豊邑-더욱 정확하게는 豐邑이며, 후의 長安 근처)으로 이주했다. 그리고는 인정(仁政)을 펼쳐서 그 지방을 풍요롭게 했다.

 그런데 그때, 상(商)은 폭군의 대명사였던 주왕(紂王)이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어느 때, 창(昌)과 같이 삼공(三公)의 한사람이었던 악숭우(鄂崇禹)가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것으로 해서 창(昌)이 무심결에 한숨을 쉬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가 보고 주왕(紂王)에게 불만이 있다고 참언(讒言-中傷謀略)을 했고, 그러자 또 창(昌)은 그 때문에 유리(羑里)란 곳에 유폐되었으며, 그곳에서 주역(周易)을 썼다고 한다.

 ★ 단, 주역(周易)의 성립에는 먼저 복희(伏羲)가 팔괘(八卦)를 만들었고, 거기에 더해서 64괘를 만들었는데, 일설(一說)에 의하면 그 64괘를 만든 사람은 신농(神農)이었다고 하며, 그 다음은 주(周)의 문왕(文王)이 괘사(卦辭)를 지었고,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지었으며, 그리고 또 일설(一說)에는 그 효사(爻辭)도 문왕(文王)이 지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랬던 것이 공자(孔子)가 전(傳)을 써서 상구(商瞿)에게 전했으며, 한 대(漢代)의 전하(田何)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나머지는 다음 기회에 설명함.

 아무튼 그 후, 창(昌)은 재보(財寶)와 영지(領地)를 제 신(帝辛)에게 헌상하고 석방되었으며, 서백(西伯)에 부임되었다. 그 후, 창(昌)은 주왕(紂王)의 눈 밖에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인정(仁政)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창(昌)은 근처 나라 왕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 후로도 영토를 넓혔다든지,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을 군사(軍師)로 맞이하였고, 그러자 또 제후들은 창(昌)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창(昌)은 결코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았고, 그래서 끝까지 상(商)의 신하로 남았다지만, 그러나 그가 죽자 상기(上記)대로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했으며, 그것으로 그는 후에까지 칭송되면서 위정자의 본보기가 되었다.(文王 끝)

 
백읍고(伯邑考-생몰년미상)주(周)의 왕족으로, 문왕(文王)의 장자(長子)였으며, 무왕(武王)의 형이었다. 어머니는 대사(大姒)였고, 문왕(文王)이 13세 때 그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사기(史記)의 관채세가(管蔡世家)에 의하면, 문왕(文王)은 차남 무왕(武王)과 4남 주공단(周公旦)이 특히 뛰어나고 문왕(文王)에게 협력하고 보좌했기 때문에, 그래서 백읍고(伯邑考)는 젖혀두고 무왕(武王)을 태자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무왕(武王)이 주(周)왕으로 즉위했을 때는 이미 백읍고(伯邑考)는 사망한 뒤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자손과 봉지(封地) 등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예기(禮記)의 단궁(壇弓)에도 문왕(文王)이 그를 버리고 무왕(武王)을 선택했다고 했으며, 그리고 또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문왕(文王)이 은(殷) 주왕(紂王)에 의해서 유리(羑里)에 유폐되었을 때, 그 백읍고(伯邑考)는 은(殷)의 인질로 있었다고 했으며, 그러자 또 주왕(紂王)은 그를 죽인 후에 삶아서 죽을 만든 다음, 문왕(文王)에게 먹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주왕(紂王)은 문왕(文王)에게 말하기를 <성인(聖人)이라면 자기 자식 삶은 국물을 어찌 먹겠는가?>라고 했다지만, 그러자 문왕(文王)은 그것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주왕(紂王)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도대체 누가 당신을 성인(聖人)이라고 했던가? 자기 자식 삶은 국을 먹고도 저렇게 태연한 당신을!> 그는 또 명대(明代)의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에서는 금(琴-거문고)의 명수(名手)로 묘사되어 있고, 아버지 문왕(文王)이 유폐되었을 때, 그 석방을 위한 재보를 모으기 위해서 왕도(王都) 조가(朝歌)로 떠났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주왕(紂王)에게 헌상했던 원숭이가 달기(妲己)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에 외육형(隗肉刑-凌遅刑)에 처해졌으며, 그 유체(遺體)는 육병(肉餠-일종의 햄버그)으로 만들어서 문왕(文王)에게 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문왕은 그것을 먹고 풀려났다고 하며, 그러자 또 문왕(文王)은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가던 길에 토해서 그것을 뱉어냈는데, 그러자 그것은 토끼로 변했다고 한다.

 ○ 위의 외육형은 능지형 또는 능지처참형으로도 불리지만, 그러나 좀 더 상세히 설명을 하면, 사람을 매단 다음 살점을 조금씩 발라내어 고통을 주면서, 좀 더 천천히 죽이는 잔인한 형벌을 말함.

 ★ 여상(呂尙)은 기원전 11세기경에 활약했던 주(周)의 군사(軍師)였으며, 나중에 제(齊)의 시조(始祖)가 되었던 인물이다. 성은 강(姜),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 또는 망(望), 자(字)는 자아(子牙) 또는 아(牙), 시(諡)는 태공(太公). 제(齊)태공(太公), 강(姜)태공(太公)으로도 불린다. 일반적으로는 태공망(太公望)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상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전설만 무성한 인물이며, 그 실태(實態)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리고 역시, 주(周)의 신하로 지냈던 경위에 대해서도 전승(傳乘)만 무성할 뿐이며, 출신이 강(羌-중국 서북부)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그 또한 불명이다. 그러나 그는 주(周)의 군사(軍師)로서, 문왕(文王)의 아들 무왕(武王)을 보좌해서 은(殷)을 목야(牧野)에서 파(破)했으며, 후에 제(齊)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가 육도(六韜)란 병법서를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는 전부 창작으로, 후대(後代)에 다른 전략가에 의해서 저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전승(傳乘)으로 전해져오는 여상(呂尙)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1. 태공망(太公望)이란 별명은 일반적으로는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그를, 문왕(文王)이 <그야말로 우리 태공(太公-祖父)께서 기다려 바라마지 않던 인물이다>라고 말을 하고는 자신의 신하로 불러들였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그는 굽히지 않은 바늘, 즉 말 그대로 바늘 같은 낚싯바늘을 물에 담그고만 있었다거나, 또는 그 바늘을 물에 넣지 않고 수면 위에 띄운 채로 앉아만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2. 협서성(陝西省) 보계(寶鷄)에는 그가 낚시를 했던 자리(釣魚臺)가 있다고 하며, 현재는 관광지가 되었다.
 3. 그가 제(齊)에 봉해졌을 때에, 이미 헤어졌던 그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찾아왔으나, 이미 엎지른 물(覆水盆)은 어쩔 수가 없다면서 그냥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 그가 때를 기다리면서 바늘 없는 낚시를 하고 있었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버리고 떠났던 여자를 말함.

 4. 그가 주공단(周公旦)과 인재(人材)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주공(周公)은 혈연(血緣)주의를 강조했다. 그러자 그는 <그런 나라는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가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곧 그들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주공(周公)은 그런 능력주의(能力主義)의 태공(太公)에 대해서 <그런 나라는 가신(家臣)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는데, 그런데 나중에 주공(周公)의 노(魯)는 주변 나라들의 알력(軋轢)으로 시달리다 멸했으며, 태공(太公)의 제(齊)는 대신(大臣) 전(田)씨(氏)가 찬탈(簒奪)해서 멸망했다.





 <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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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1)


 <殷>         


 은(殷 또는 商-기원전 17세기경에서 기원전 1046년)은 중국의 왕조 중 하나였으며, 문헌(文獻)에는 하(夏)왕조를 멸하고 세워진 왕조라고 했고, 고고학적으로 그 실재(實在)가 확인되고 있는 최고(最古)의 왕조였다. 그리고 기원전 11세기에 주(周)에 의해서 멸해졌다.


 주왕(紂王) 제 신(帝辛-기원전 1100년경)은, 은(殷)왕조의 제30대 왕이었으며 또한 최후의 왕이었다.

 아무튼 당시, 은(殷)의 최고 중요한 지위였던 삼공(三公)에는 제후들 중의 실력자였던 서백창(西伯昌)이 있었고, 그리고 9후(候)와 악공(鄂公)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9후(候)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자 신(辛)이 그녀를 데려가서 첩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후에 그

9후(候)와 악공(鄂公)이 연루된 모반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신(辛)은 9후(候)를 잡아서 소금에 절여버렸고(젓갈로 만듦), 악공(鄂公)은 건육(乾肉)을 만드는 것으로 처형했으며, 그 아름다웠다던 9후(候)의 딸도 함께 처형했다. 그리고 또한, 그때 서백창(西伯昌)도 의심을 받아서 유폐되었는데, 그러나 서백창(西伯昌)은 많은 재물을 헌상해서 석방되었다. 그 후, 서백창(西伯昌)이 죽자 무왕(武王)이 그 뒤를 이었으며, 그리하여 드디어 천하의 제후들은 신(辛)을 처단할 것을 결의했고, 그러자 또 무왕(武王)은 서백창(西伯昌)의 위패(位牌)를 내세우고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또 그때, 하늘의 소리를 들었던 무왕(武王)은 일단 군을 후퇴시켰다. 그리하여 그 2년 후에 다시 군을 일으켰으며, 그렇게 해서 양군(兩軍)은 목야(牧野)에서 격돌했다.

 <목야의 싸움>

 목야(牧野)의 싸움은, 고대 중국 기원전 11세기에 은(殷)의 주왕(紂王)과 주(周)의 무왕(武王)을 중심으로 했던 세력 싸움이었고, 주(周)가 승리해서 은(殷)이 멸했던 싸움이었다. 그리고 또, 그리하여 그때부터 주(周)의 천하가 시작되었다.

 당시, 은(殷) 주왕(紂王)의 폭정을 견디지 못했던 사람들은 마침내 그를 멸하기로 결의를 했다. 그러자 그것을 미리 알게 되었던 주왕(紂王)은 노하고는, 그 결의에 가담했던 제후들을 불러들여서 죽인 후에 소금에 절여버렸다. 하지만 그때, 서백희창(西伯姬昌-周의 文王)은 독실(篤實)한 성격으로 그 결의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주왕(紂王)은 그도 의심을 해서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는 인질로 잡고 있던 서백희창(西伯姬昌)의 장남 백읍고(伯邑考-武王의 兄)를 삶아서 죽(일종의 수프-soup)으로 만든 다음, 그것을 서백희창(西伯姬昌)에게 먹였다. 그러자 서백희창(西伯姬昌)의 가신(家臣)들이 막대한 양의 재산을 모아서 주왕(紂王)에게 헌상했고, 그 덕으로 서백희창(西伯姬昌)은 풀려났는데, 서백창(西伯昌)은 그에 한(恨)을 품고 은(殷)에의 복수를 다짐했다.

 그 후, 주(周)로 다시 돌아갔던 서백창(西伯昌)은 인근(隣近)의 제국(諸國)을 병합해서 국력을 증대시켰지만, 그러나 당시 노령(老齡)이었던 서백창(西伯昌)은 그 대결을 바로 목전에 두고 사망했다. 그러자 차남이었던 희발(姬發-후의 武王)이 태자(太子)로서 그 뒤를 이어받았고, 그리하여 이윽고는 제후들과 함께 은(殷)에의 결전에 나섰다. 그러자 그 군대는 순식간에 대군(大軍)이 되었으며, 그 결과로 또 쉽게 은(殷)을 공략할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 순간에 돌연 희발(姬發)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회군(回軍)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불명(不明)이지만, 그러나 아마도 그때 점괘(占卦)가 불길(不吉)로 나왔던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또 그때, 희발(姬發)이 제후들의 힘을 빌려서 그 은(殷)을 공략하기는 쉬웠겠으나, 그러나 그때는 이미 강해져있던 제후들이 그 다음에 자신이 주(周) 왕조를 여는 데까지 협조할 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 않았겠는가 하고 추측해볼 수 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또 그로부터 수년(數年-2년?) 후에 희발(姬發)은 다시 군을 일으켰으며, 그때는 또 여러 가지의 서조(瑞兆-吉兆)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주군(周軍)은 맹진(孟津)이라는 항구에서 황하를 건너려고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마침 뇌우(雷雨)와 폭풍이 몰아쳤기 때문에 황하를 건널 수가 없었다. 그러자 희발(姬發)은 화가 나서 강의 신(神)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천명(天命)은 벌써 떨어졌다! 그런데 어쩌자고 나의 앞길을 막는단 말인가?!> 그러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개였고, 그렇게 해서 주군(周軍)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그런데 또 그때, 그 강을 건너던 그 주군(周軍)의 배에 백어(白魚-뱅어)들이 날아 들었다는데, 그런데 그 백어(白魚)는 은(殷)의 상징(symbol)이었다고 한다.



<하남 성>

<학벽시 위치도>

 
 그렇게 해서 주군(周軍)과 은군(殷軍)은 수도였던 조가(朝歌-현재의 河南省 鶴壁市) 근처의 목야(牧野)라는 곳에서 결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하지만 사기(史記)의 주(周) 본기(本紀)에 의하면, 그때는 은(殷)도 준비에 만전(萬全)을 기했던 상태였고, 군사도 70만 명이나 동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주군(周軍)의 병력은 겨우 40만이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또 그 결전 바로 전에 또 다시 뇌우(雷雨)가 몰아쳐서 그치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희발(姬發)이 그것을 보고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전군(全軍)에 용기를 북돋았다고 한다. <옛날, 은(殷)의 탕왕(湯王)이 하(夏)의 걸왕(桀王)을 파(破)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을 때도 저렇게 뇌우(雷雨)가 몰아쳤다던데,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주(周)가 승리할 것이란 전조(前兆)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그때, 은군(殷軍)은 그 수에서 우월했다고는 했지만, 그러나 그 질(質)에서는 형편없는 군대였다. 그러니까 그 무리들 중에서는 전장(戰場)에서의 불길(不吉)을 빌기 위한 신관(神官)을 위시(爲始)해서, 그동안 은(殷)이 복속시켰던 조그마한 나라들의 잡병(雜兵)들과 노예(奴隸)병(兵)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은 또 그동안 포학(暴虐)한 주왕(紂王)의 지배에 아주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전쟁이 시작되자 그들은 스스로 창끝을 돌려서 은군(殷軍)을 공격했고, 그러자 은군(殷軍)은 곧 괴멸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승리한 주군(周軍)은 이제 주왕(紂王)을 잡기 위해서 조가(朝歌)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었던 주왕(紂王)은 희망을 잃고 왕궁(王宮)에 불을 지르고는 그 불길 속에서 타죽었다.(혹은 鹿台 위에서 분신자살했다) 그러자 또 희발(姬發)은 그 주왕(紂王)의 유체(遺體)를 찾아내서 3발의 화살을 쏜 후, 도끼로 그의 머리를 잘랐다고 한다.

 그리고 또 상서(尙書)의 목서(牧誓)에 의하면, 그 날의 간지(干支)가 갑자(甲子)였다고 하고, 출토된 청동기의 명문(銘文)에서도 그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600년이나 내려왔던 은(殷)은 멸망했고, 그때부터 희발(姬發)이 주(周) 왕조를 열게 되었다.(紂王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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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은(殷) 멸망 후, 주왕(紂王)의 아들이었던 무경(武庚)은 주(周) 무왕(武王)에 의해서 은(殷)의 고지(緣故地)에 봉해졌다. 그러자 무왕(武王) 사후(死後)에 그는 무왕(武王)의 형제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주살(誅殺)되었다.

 그 후, 녹부(祿父=武庚)의 백부(伯父)였던 미자계(微子啓-紂王의 형)가 송(宋)에 봉해졌고, 그러자 그는 그곳에서 은(殷)왕조의 제사를 계속해서 모셨다. 하지만 그 미자계(微子啓)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었다. 그래서 같은 주왕(紂王)의 형이었던 미중연(微仲衍)이 송공(宋公)을 이었다. 그리고 또 이설(異說)도 있지만, 어쨌든 그 미중연(微仲衍)의 자손이 공자(孔子)라는 설이 있고, 그래서 또, 그 공자(孔子)의 가계(家系)가 세계 최장(最長)의 가계로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상인(商人)>이란 말은, 그 상(商=殷)의 사람(商人)들이 나라가 망한 후에 생업(生業)을 목적으로 각지를 전전하면서 물건들을 팔러 다녔던 데서 유래했다고 하고, 그래서 또 점포(店鋪)를 가지지 않고 또는 점포도 없이 각지를 전전하면서 물건을 팔러 다니는 사람들을,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 바로 상(商)의 사람들이다>라고 말을 했던 것으로부터 상인(商人)이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하지만 그에는 또 부정의 說도 있다)

 아무튼 또, 그런데 그 주(周)가 은(殷)을 멸했던 때가 정확이 언제였던가 하는데 많은 관심들이 있었고, 그래서 또 중국의 <하상주년표(夏商周年表) 프로젝트>는 그것을 기원전 1046년이라고 주장했던 바 있다.

 하지만 또 그에 대해서는 오래된 설(說)로,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무왕(武王)부터 유왕(幽王-西周 최후의 왕)까지는 257년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유왕(幽王)이 죽은 것이 기원전 771년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은(殷)이 망했던 것은 기원전 1027년이라는 설과 <한서(漢書)>에 주(周)는 867년이나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또 그것은 기원전 1123년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아무튼, 그것에 대해서는 위의 것 외에도 아주 많은 설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은(殷) 멸망의 해를 제일로 높게 잡았던 것은 기원전 1127년이고, 그 반대로 제일 아래로 잡았던 것은 기원전 1018년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그 은(殷) 사회의 기본단위는 읍(邑)이라고 불렸던 민족끼리의 집락(集落)이었으며, 그래서 수천(數千)의 읍(邑)들이 수백(數百)의 호족(豪族)들과 왕족에게 종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殷)의 왕은 그들 지배계급 연합체에서도 최대의 유력자였으며, 또한 절대의 권력자였기도 했다. 하지만 지방 유력호족들의 독립성은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은(殷)의 왕은 단지 중원(中原)의 일부만을 지배했던데 불과했다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아래는 殷商王室系圖이므로, 필요하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은(殷)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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