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周-기원전 1046년경에서 기원전 256년)는 중국 고대의 왕조로, 은(殷)을 멸하고 왕조를 열었다.
국성(國姓)은 희(姬). 주(周)의 전설상의 시조(始祖)는 후직(后稷)이라고 알려져 있고, 제 순(帝舜)을 섬겼으며, 농정(農政)에 공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고공단보(古公亶父) 시대에 주의 땅에 정주(定住)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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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상기(上記)대로, 문왕(文王) 사후(死後) 무왕(武王)은 아우였던 주공단(周公旦)과 태공망(太公望) 그리고 소공(召公) 등의 조력(助力)을 받아서 은(殷)을 멸했고, 주(周)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그 무왕(武王)은 건국 바로 직후에 사거(死去)했고, 그러자 그 뒤를 성왕(成王)이 잇게 되었다.(그 내용에 대해서는 前 回 참조)
※ 성왕(成王)은 주조(周朝) 제2대 왕으로, 성왕(成王)이란 이름은 시호(諡號)일 뿐만 아니라, 생전에도 불렸던 칭호였다. 그의 동모제(同母弟)는 진(晋)의 개조(開祖)였던 당숙우(唐叔虞)가 있었고, 그 외에 우숙(邘叔)과 응숙(應叔) 그리고 한숙(韓叔) 등이 있었다. 그리고 <역성(易姓)혁명> 후, 대충 2년 만에 붕어했던 무왕(武王)의 뒤를 이어서 그는 즉위했으며, 그러나 또 당시에는 아직 정치체제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즉위 후 곧 <3감(監)의 난>을 겪어야 했고, 그리고 또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의 모(母) 읍강(邑姜)과 숙부였던 주공단(周公旦) 그리고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 그리고 소공(召公)석(奭-燕의 開祖) 등이 그를 후견했다. 그 후, 그가 성장하자 스스로 정무를 보기도 했다지만, 그러나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 붕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그의 아들 쇠(釗-康王)가 그 후계를 이었으며, 그리고 또 그때까지가 주(周)의 확립기로, 그것을 <성강(成康)의 치(治)-기원전 1043년에서 기원전 996년경>라고 한다.
♣ 강왕(康王)은 주조(周朝) 제3대 왕으로, 부(父) 성왕(成王)이 죽자 바로 즉위했다. 그 치세(治世)는 <天下安寧,刑錯四十余年不用-천하가 강령하고, 형벌을 40여년이나 행할 일이 없었다>의 치세로 알려졌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소공(召公)석(奭)과 필공(畢公)고(高)의 보좌를 받았으며, 외정(外征)을 되풀이했던 시대였다. 그리고 또 그의 시대에 주(周)는 각 제후들로부터의 위신을 확립했으며, 국가체제의 안정을 창출했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주(周)는 서서히 쇠퇴(衰退)의 길을 걸었고, 10대 여왕(厲王) 대에 이르자 그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 없이, 모든 것을 독점하려 들었기 때문에, 제후들로부터 원망을 샀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대란(大亂)이 발생했고, 그러자 또 여왕(厲王)은 변경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 여왕(厲王)은 주조(周朝)의 제10대 왕으로, 그 재위기간에는 영신(佞臣-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 영이공(榮夷公)을 중용했고, 현신(賢臣)이었던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등의 간언을 물리치고 폭정을 일삼았다. 그러자 민중들은 말조심을 했으며, 눈짓으로 의사를 전달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곧 국세(國勢)는 조락(凋落)하기 시작했으며, 그와 더불어서 조정(朝廷)의 부패(腐敗)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자 또 민중들의 불만도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그 결과 기원전 842년에는 민중들이 봉기해서 왕궁으로 침입하는 일까지 발생했으며, 그러자 또 그 여왕(厲王)을 죽이자는 민중폭동이 각지에서 발생했다. 그러자 여왕(厲王)은 호경(鎬京)을 탈출해서 황하를 건넜다. 그리고는 체(彘-現在의 山西省 霍州市)로 도망을 갔는데, 그러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그를 대신해서 정치하는 <공화제>가 시행되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828년이었던 공화14년에 그 여왕(厲王)이 사망하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에 의해서 그의 아들이었던 희정(姬靜)이 즉위해서 선왕(宣王)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선왕(宣王)의 대에 여왕(厲王)의 또 다른 아들이었던 희우(姬友)는 정(鄭)에 봉해졌으며, 그리하여 정(鄭)의 환공(桓公)이 되었다.(이상은 史記에 의함) 그러나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는, 제후들의 추천을 받았던 공백(共伯)의 화(和)란 자가 그 부재 시의 왕을 대신해서 정무를 행했으며, 그것이 공화제의 유래라고 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본 四夷의 명칭>
※ 선왕(宣王)은 주조(周朝)의 제11대 왕이었으며, 부(父) 여왕(厲王) 사망 후에 즉위했다. 그 치세기간에는 주정공(周定公)과 소목공(召穆公)의 도움으로 국세가 중흥했으며, 군사(軍事) 면에서는 진중(秦仲)과 두백(杜伯)이라는 대부(大夫-중국에서 벼슬아치를 3등급으로 나눈 품계 중의 하나로, 周나라 때는 鄕의 아래 士의 위였다고 함))들에 명해서, 적극적으로 이민족(異民族)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서서히 열세로 돌아섰으며, 그리하여 결국에는 기원전 789년의 <천무(千畝)의 싸움>에서 강융(姜戎)에 대패하는 등, 점점 더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그의 치세 후기에는 정치면에서도 부(父) 여왕(厲王)처럼 군주독재화가 진행되었으며, 그리고 또 노(魯)의 후계문제에 개입했다거나, 두백(杜伯)의 처형 등, 제후들에게도 압박이 강해졌기 때문에, 그 결과 주(周)왕조는 점점 더 구심력을 잃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그의 아버지 여왕(厲王) 그리고 그의 아들 유왕(幽王)과 더불어서 선왕(宣王) 역시도 주(周)의 멸망을 부추겼던 폭군과 암군(暗君)으로 그 이름이 남게 되었다. 그런 한편, 문화면에서는 그 시대에 주(籀)에 의해서 사주편(史籀篇)이 저술되었고, 서체(書體)의 하나인 대전(大篆)에 해당하는 주문(籀文-籀書)이 만들어졌다.

<전서체의 예이며, 내용은 始皇帝>
그리하여 그 주(周)에는 왕이 없게 되었고, 그러자 또 당시 재상(宰相)이었던 공백화(共伯和)가 태자 정(靜)을 옹립해서 정치를 행했다. 그러자 후에 그 시대를 공화(共和)의 시대라고 불렀으며, 현대의 공화제(共和制)의 유래가 되었다.<하지만 그에는 또 異說이 있으며, 그것은 또 주(周) 정공(定公)과 소목공(召穆公) 그 두 사람의 대신(大臣)이 합의제(合議制)로‘함께 화합해서’ 정치를 행했기 때문에, 공화(共和)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무튼, 그 선왕(宣王)의 치세에서 겨우 주(周)의 국세(國勢)는 회복되었다지만, 그러나 그 선왕(宣王)도 후반기에는 정치에 싫증을 냈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 나라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또 제12대였던 유왕(幽王)의 시대에 신(申-중국의 周代와 春秋時代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으로, 犬戎을 끌어들여서 西周를 멸했다)으로부터 맞아들였던 황후를 폐(廢)하고, <포사(褒姒)>를 황후의 자리에 올렸기 때문에 신(申)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신(申)은 견융(犬戎)을 끌어들여서 주(周)의 왕도(王都)를 공략했다. 그리하여 유왕(幽王)은 살해당했고, 그러자 또 태자는 서쪽의 휴왕(携王)과 싸워서 물리쳤으며, 그 후에 동쪽의 낙읍(洛邑-王城・成周로, 現在의 河南省 洛陽市 부근)으로 이주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그곳을 <동주(東周)>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시대 구분으로는 <춘추시대(春秋時代)>로 넘어가는 시기가 되었다.
※ 유왕(幽王)은 주조(周朝)의 제12대 왕으로, 선왕(宣王)의 아들이었고, 평왕(平王), 휴왕(携王), 태자 백복(伯服) 등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기원전 780년에 관중<關中은 函谷関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의 협서성 渭水盆地(渭河平原)의 西安을 중심으로 했던 그 일대를 말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秦의 영지였고, 그 후에 前漢과 唐도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백양보(伯陽甫)라는 자가 그것이 바로 주조(周朝) 멸망의 전조라고 말을 했다고 하며, 사서(史書)의 기록에서는 그때가 주조(周朝)의 쇠퇴기였다고 했다. 그리고 또 그때, <포사(褒姒)>가 후궁으로 들어와서 유왕(幽王)의 총애를 받아서 백복(伯服)을 낳았으며, 그러자 또 유왕(幽王)은 정실(正室)이었던 신(申)후(后)와 태자였던 의구(宜臼)를 폐했고, 포사(褒姒)를 왕후에 그리고 백복(伯服)을 태자로 삼았다. 그런데 포사(褒姒)는 좀처럼 웃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유왕(幽王)은 갖은 방법으로 그 포사(褒姒)를 웃게 만들려고 해보았지만,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견(絹)을 찢는 소리에는 조금 반응을 보였는데, 그러자 또 유왕(幽王)은 나라의 견(絹)을 모두 징수(徵收)해서 그것을 찢었다든지, 거기다 또 봉화를 이용해서 제후들을 집결시켜서 포사(褒姒)를 웃겨보려고 했다든지 해서, 마침내 제후들로부터 신뢰를 잃어갔다. 그리고 나중에 실제로 신(申)후(后)의 아버지 신(申)후(侯)가 자신의 딸과 외손자를 폐한 일에 앙심을 품고 쳐들어왔을 때, 아무리 봉화를 올렸어도 제후들이 모여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유왕(幽王)은 아유추종(阿諛追從-아첨)의 달인이었고 또한 왕족이었던 영신(佞臣) 괵석부(虢石父)를 경(卿)에 임명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신(申)후(后)를 폐해서 신(申)후(侯)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유왕(幽王)은 여산(驪山-陝西省의 秦嶺山脈 중에 있는 山)에서 죽임 당했으며, 포사(褒姒)도 그때 붙잡힌 후 행방불명됨으로 해서 서주(西周)는 멸망했다. 그리고 유왕(幽王) 사망 후, 제후들과 신후(申侯)는 폐(廢)태자였던 선구(宜臼)를 평왕(平王)으로 즉위시켜서 주(周)사(祀)를 잇게 했는데, 그러나 그때, 전쟁 때문에 그 도시가 온통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평왕(平王)은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천도했으며, 그리하여 그때부터 동주(東周)가 시작되게 되었다.
♣ 괵석부(虢石父)는 기원전 771년경에 살았던 사람으로, 괵(虢)의 군주였으며, 주(周)의 공족(公族)이었고, 괵공고(虢公鼓)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양관(楊寬)의 서주사연구(西周史研究)에서는 고(鼓)가 이름이었고, 석부(石父)는 그의 자(字)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주(周)의 유왕(幽王)은 그를 상경(上卿)으로, 제공(祭公)을 사도(司徒)로, 그리고 윤구(尹球)를 대부(大夫)로 했는데, 그는 아첨을 해서 이(利)를 취하는 것을 좋아했고, 백성들을 수탈(收奪)했기 때문에 그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그리고 또 그는 유왕(幽王)에게 여산(驪山)의 봉화대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며, 그 수병(守兵)에게 명해서 봉화를 올리라고 했다. 그러자 제후들이 황망히 모여들었는데, 그것을 보고 포사(褒姒)가 웃었다. 그러자 유왕(幽王)은 그에게 천금(千金)의 포상을 내렸다. 하지만 역시, 신후(申侯)가 쳐들어왔을 때, 그 선봉대에 의해서 그는 살해되었다.
♣ 포사(褒姒)는 기원전 8세기(기원전 770년)경에 주(周) 유왕(幽王)의 왕비로 활약했던 여성이었고, 절세의 미녀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나중에 그 주(周)를 멸망시키는 원흉(元兇)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출생에 관한 것은 여러 가지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러나 정확한 것은 없다. 하지만 또 일설(一說)에 따르면, 그녀는 원래 혈통도 모른 채로 버려졌던 아이였다든지, 또는 용의 입에서 나온 거품이 도마뱀으로 변했고, 그것이 당시 미망인(未亡人)이었던 그녀의 어머니와 통정(通情)해서 그녀가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리고 또 포국(褒國-陝西 褒城에 존재했던 姒姓의 나라)의 가난했던 한 상인이 그녀를 주워서 절세의 미녀로 키웠다고도 전한다. 그리고 그 후, 그 포국(褒國)이 주(周)의 노여움을 샀으며, 그러자 또 그 포국(褒國)의 왕은 주(周)의 벌을 피하기 위해서 그녀를 유왕(幽王)에게 헌상했다고 하며, 그러자 또 유왕(幽王)은 그녀의 미색에 빠져서 원래의 왕후였던 신후(申后)와 태자를 폐하고 그녀를 왕비의 자리에 올렸다. 그런 다음 그녀가 낳았던 아들을 태자로 삼았으며, 그리고 또 앞에서 설명되었던 대로 그녀를 웃게 하기 위해서 유왕(幽王)은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런데 또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의 착오로 봉화가 올랐는데, 그러자 제후들이 황급히 왕궁으로 모였다. 그러자 그런 갑작스런 장면을 보고 그녀가 웃었다고 하며, 그 다음은 이미 설명한 대로이다. 그리고 그 후, 유왕(幽王)은 여산(驪山)의 록(麓)에서 붙들렸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하지만 그녀도 그때 살해당했다든지, 또는 유왕(幽王)을 따라서 자살했다든지, 또는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고도 전하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 휴왕(携王)은 주조(周朝)의 제12대 유왕(幽王)의 아들로, 주조(周朝)의 정치세력이 2분되어 동(東)의 성주(成周)를 거점으로 했던 평왕(平王)과 대립했다. 그리고 주(周)의 동서(東西) 분열에 관해서도 조금 설명을 해보면, 기원전 772년(또는 771년)에 이민족이었던 견융(犬戎) 출신의 신(申)황후의 냉대에 반감을 가졌던 그녀의 부(父) 신후(申侯)가 견융(犬戎)과 함께 군(軍)을 이끌고 와서 주도(周都)를 공략했고, 그 결과로 유왕(幽王)이 죽었다. 그리고 또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당시의 혼란했던 시절에 주(周)의 수뇌(首腦)들과 제후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계산을 가지고 있었고, 휴왕(携王)은 평왕(平王)과 대결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각각 저마다의 진영으로 나뉘어져서 주조(周朝)의 재(再) 부흥이란 대의명분으로 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 소위 평왕(平王) 파(派-申侯, 晋의 文侯, 鄭의 武公, 許의 文公, 秦의 襄公, 文公父子, 魯의 孝公, 東虢 등, 有力 諸侯 다수)는 동(東)의 낙읍(洛邑)에서 유왕(幽王)의 원(元) 태자였던 의구(宜臼)를 평왕(平王)으로 즉위시켰으며, 휴왕(携王) 파(派-西虢의 虢公翰을 筆頭)는 그 2년 전에 휴(携)라는 곳에서 왕자 여(余)를 데려와서 호경(鎬京)에서 즉위시켰고, 그리하여 휴왕(携王)이 되었다. 그런데 그 동서(東西) 분열 극(劇)의 배후에는 괵(虢)이란 제후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고 하며, 그 나라는 또 당시, 대국(大國)이었던 진(晋)처럼 본가(本家-東虢)와 분가(分家-서괵)로 영지가 나뉘어져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또 특히, 서괵은 그때 주왕(周王)의 측근(側近=卿士=執政)으로서는 선왕(宣王) 때보다 왕실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동서(東西) 분열의 한 원인을 제공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것은 사기(史記)보다도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더욱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근년의 연구에서 그것은 사실(史實)로 그 신빙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혼란과 위험상황에서 어떻게 그 휴왕(携王) 세력이 호경(鎬京)에서 진영(陣營)을 펼치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어쨌든, 그리하여 십수(十數) 년의 정쟁(政爭) 후였던 기원전 759년(平王12年)에 많은 유력 제후들을 거느렸던 평왕(平王)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휴왕(携王) 세력을 타도했고, 그러자 괵(虢)의 힘은 분산되었으며, 결국 휴왕(携王)도 평왕(平王)에게 협조적이었던 진(晋)의 문후(文侯)에게 살해당했다. 그렇게 해서 또 당시 전화(戰禍)로 황폐해졌던 호경(鎬京)은 그 후, 진(秦)이 그곳을 수도로 삼을 때까지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주(周)의 정치무대는 낙읍(洛邑)으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것을 <주(周)의 동천(東遷)>이라고 하며, 그래서 또 그때까지를 서주(西周) 그리고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시대구분 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때, 주(周)는 겨우 낙읍(洛邑) 주변을 지배하는 소국(小國)으로 변했고, 과거와 비교가 되지 않았을 만큼 그 위세가 축소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 권위만큼은 유지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또 제후들은 그 권위를 이용해서 각자 주도권을 쥐려고 노력했다.(春秋五覇-후술)
하지만 그 조그마한 권위도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서자 완전하게 사라지게 되었고, 그래서 또 그때부터 이름 있었던 제후들은 각각 왕(王)으로 칭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또 그 작은 왕조(王朝) 안에서도 권력싸움은 계속되었으며, 그래서 또 동서(東西)로 분열되었다든가, 몇 번이고 왕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또, 그리하여 결국에 주(周)는 기원전 256년 난왕(赧王) 때 진(秦)에 의해서 멸해졌지만, 그러나 다행인지 그 왕족만은 그대로 존속했다.
그리고 그 주(周)의 정치와 문화 등에 대해서도 조금 설명을 하고 넘어가면, 그 주(周)의 관제(官制)에 대해서는 주공단(周公旦)의 주례(周禮)에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있지만, 그러나 그 주례(周禮)가 완성되었던 것은 전국시대 이후라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만으로 대변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고 보아지고 있다. 그래서 또 금문(金文-金石文)에서 또 그것을 찾아보면, 그 주(周)에는 어사요(卿事寮)와 대사요(大史寮)라고 불렀던 2개의 조직이 있었다고 하며, 어사요의 장관에는 태보(太保)와 태사(太師)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태사만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밑으로는 사마(司馬-軍事担当)와 사토(司土-土地管理担當) 그리고 사공(司工=司空=사마, 사토와 함께 삼공의 하나로, 토지와 민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벼슬)이 있었으며, 그것은 또 각 제후들 아래에도 같은 직(職)이 있었다. 그리고 또 대사요의 장관은 태사(太史)라고 불렀고, 그것은 또 역사의 편찬이나, 각종의 의례(儀禮) 그리고 제사(祭祀) 등을 주관했다.
그리고 또, 신분제도에 관해서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따르면, 왕 아래에 제후들이 있고, 그 아래에 대부(大夫-일종의 귀족층)가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사(士)라고 불렸던 계층이 있었고, 또 그 아래에는 서민의 계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 그 대부(大夫)와 사(士)란 계층은 금문(金文)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그 사회에서도 일종의 노예계층은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며, 그래서 또 그들은 주로, 주인을 대신해서 농업을 했다거나, 직공(職工) 또는 청동기의 주조(鑄造)에 관련된 일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토지제도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그 당시에도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했을 것으로 생각이 되지만
그러나 그 실제에 대해서는 의문시하는 의견이 많다.

<정전제의 모델>
※ 정전제(井田制)는, 고대중국의 하나라와 은나라 그리고 주나라에서 실시했던 토지제도로 알려져 있고, 특히 주(周)나라에서는 사방 1리(里)의 농지를 우물 井자 모양으로 100무(畝)씩 9등분한 다음, 그 중앙의 한 구역을 공전(公田)이라고 하고, 그 둘레의 여덟 구역을 사전(私田)이라고 하여, 그 여덟 농가에게 맡기고, 여덟 집에서 공동으로 공전을 부쳐서 그 수확을 나라에 바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주공단(周公旦)이 정비했던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고, 특히 맹자(孟子)는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제도라고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周)의 문화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원래 은(殷)의 청동기문화에 대해서는 그 예술성에 대해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고, 그래서 또 그 주(周)도 기본적으로는 그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예술성에 대해서는 주(周)에서 간소화되었고, 그래서 또 은(殷)에 비해서는 그 평가가 조금 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기의 청동기는 거의가 제사(祭祀)용으로 제작되었으며, 실용적인 것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기(器)에는 점복(占卜)의 결과를 주입(鑄入)시켰으며, 그것이 또 바로 금문(金文)으로 불리게 되면서, 그 시대를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되고 있다. 그리고 또, 은(殷)대에 비해서 금문(金文)은 주(周)대에서 특히 길어진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때까지 내려오던 절대적이었던 조상숭배의 의식이 엷어졌던 것도 은(殷)과 주(周)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역시, 은(殷)에서는 선조에 대한 숭배와 경외심이 특히 강했고, 그래서 또 그 제사를 태만히 했을 때는 그 즉시 재앙이 닥칠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주(周)의 사람들은 제사는 모셨지만, 그러나 재앙에 대한 생각은 엷어졌다. 그리고 또한, 은(殷)에서는 일이 생기면 점을 쳐서 혹시라도 조상이 노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을 점으로 물어보는 일이 많았지만, 그러나 주(周)에서는 그런 것도 적어졌고, 그래서 또 은(殷)이 남겼던 금문(金文)에 비해서 주(周)의 것으로 남아있는 금문(金文)의 수는 많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또 그 결과, 주(周)보다는 은(殷)이 더 많은 자료들을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문자의 주입(鑄入) 기술은 당시에는 왕실의 독점기술이었지만, 그러나 때로 그 일을 제후들에게도 시켰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춘추시대에 들어갔을 때, 그 혼란했던 틈을 타서 그 기술이 제후들에게도 전파되었고, 그리하여 나중에는 제후들 간에도 그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한, 건축분야에서는 주(周)에 들면서부터 기와(瓦)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은(殷)대에서부터 춘추시대에 걸쳐서 읍(邑)이라고 불렸던 도시국가가 다수 산재(散在)해 있었다. 그리고 은대(殷代)와 동주(東周)시대에 그 읍(邑)에는 군주가 살고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곳에는 종묘(宗廟) 등, 읍(邑)의 중핵이 되는 시설들이 구릉(丘陵) 위에 설치되었고, 그 주변으로는 또 튼튼한 성벽이 둘러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다 또 그 주변에는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비교적 간단한 토벽(土壁)이 건축되었으며, 그래서 또 전시(戰時)가 되면 일반백성들은 그 구릉 위의 견고한 성벽으로 몰려들어서 방전(防戰)을 했다.
그리하여 서주(西周)시대에는 외벽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그 결과 내벽(內壁)은 성(城) 그리고 외벽은 곽(郭=內城外郭式)이라는 이중구조로 벽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화북(華北)에서는 당시 무진장 존재했던 황토를 나무가루 등과 섞어서 단단하게 한 후에 견고한 층을 쌓아올리는 판축(版築)공법으로 성벽을 쌓았다. 그러자 그 성벽은 특히 견고한 토벽이 되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물에는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또 그 화북(華北)에는 비가 적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곳에서는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그것을 전(磚-벽돌)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또 그 성벽에는 황토를 소성(燒成-굽기)해서 만든 연와(煉瓦)로 덮어서 방수가공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웬만한 비가와도 견딜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읍(邑)은 성벽으로 둘러싸여진 도시(都市) 부(部)와 주변의 경작지로 나뉘어졌으며, 그 외측에는 또 미개발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서, 그곳에서는 수렵이나 채집 등을 하면서 살아가는 비(非)정주(定住)의 부족들이 생활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夷)라고 불렸고, 때때로 그 읍(邑)을 습격하거나, 약탈을 행하기도 했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존속이 어려워졌던 소읍(小邑)들은 보다 큰 읍(邑)들에 병합되었다. 거기다 또 춘추시대에 접어들자 전란(戰亂)에 의해서 그런 일들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그러자 또 대읍(大邑)들은 그들에게서 철기(鐵器) 등의 보급을 받기 위해서라도 더욱 그 영역을 넓혀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결과, 춘추(春秋) 말기에서 전국(戰國)에 걸쳐서 중국의 나라 형태들은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발전해나가게 되었던 것이다.(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