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5)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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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그리고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5패(覇)의 대표격이었다고 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

 ♣ 제(齊-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386년)

<제의 위치 右上>


 제(齊)는 주대(周代)와 춘추시대 그리고 전국시대 초기에 걸쳐서, 현재의 산동(山東)성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제후국)였다. 주(周) 건국의 공신이었던 태공망(太公望)에 의해서 건국되었고, 성(姓)이 강(姜)이었기 때문에 전국시대의 제(齊-田齊) 등과 구별해서 강제(姜齊)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기원전 386년에 가신이었던 전화(田和)에 의해서 찬탈되었고, 그리하여 그 시점에서 멸(滅)했으며, 수도는 임치(臨淄)였다.

 제(齊)는 은(殷) 멸망 후, 태공망이 제(齊)의 땅에 봉해지면서 건국되었지만, 그러나 당시 주(周)의 세력은 그곳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는 당시, 내 또는 래(萊)라는 부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래서 또 그 태공망(太公望)은 처음에 그곳을 하사받아서 갔다기보다는, 그곳을 제압해서 다스리라는 명을 받고 갔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래서 태공망은 그 래(萊)를 제압했고, 그런 다음 그곳의 풍속(風俗)에 맞게 정치를 간소화했으며, 그것으로 또 그 지방의 안정을 꾀했다. 그러자 또 3감(監)의 난 때, 성왕(成王)은 그에게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하수(河水)에 이르고, 남으로는 목능(穆稜)에 이르고, 북으로는 무양(無樣)에 이르기까지, 5후(侯)9백(伯)이 죄를 범하거든, 그들을 토벌해도 좋다>라고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 태공망은 계속해서 영토를 넓혀나갔고, 그래서 춘추시대에 들어섰을 때쯤에 제(齊)는 동쪽의 강국(强國)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또 그때부터 바다를 이용해서 소금을 생산했으며, 그곳에 철(鐵)이 많이 났기 때문에 큰 부(富)를 누리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제15대 환공(桓公)의 시대에는 관중(管仲)의 보좌로 더욱 강대한 나라가 되었고, 주(周)왕조를 대신해서 제후들을 주도(主導)했으며, 그리하여 남쪽의 초(楚)의 위협에 대항해 나갔다. 그러자 또 기원전 667년에 환공(桓公)은 주(周)의 왕으로부터 패자(覇者)로 인정되었고, 후세에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사람으로 기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환공 사후(死後)에 후계를 둘러싸고 다툼이 계속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패자(覇者)의 지위는 진(晋)의 문공(文公)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또 그 후에도 나라는 대국(大國)을 유지했지만, 그러나 그 주역은 점점 더 북쪽의 진(晋)과 남쪽의 초(楚)에게로 넘어갔으며, 그러자 또 제(齊)는 그에 두려움을 느끼고서 진(秦)과 손을 잡는 형태로 되어갔다는 것이 춘추시대 중기의 정세(情勢)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또 그때부터 대신(大臣)들의 힘은 점점 더 강해져갔고, 그러자 또 군주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해져갔다. 그리고 또 그때의 강대한 귀족들의 씨명(氏名)을 거론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국(國)씨(氏), 고(高)씨(氏), 포(鮑)씨(氏), 최(崔)씨(氏), 경(慶)씨(氏), 진(陳)씨(氏).

 그 후였던 24대 장공(莊公)의 시대에 재상(宰相)이었던 최저(崔杼)는 장공(莊公)이 자신의 아내와 밀통(密通)했던 것으로 해서 화를 내고는 그 장공(莊公)을 죽여 버렸다. 그런 다음 다른 군주를 세우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역시도 나중에는 자살했다.(또는 살해당했다)

 그 후였던 기원전 532년에 안영(晏嬰)이 재상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군사(軍事) 면에서 사마양저(司馬穰苴)를 등용해서 국정(國政)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안영(晏嬰)은 숙향(叔向)과의 대화에서 <제(齊)는 머지않아 전 씨(田氏)에게 찬탈당하고 말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하며, 그리고 또 그 전 씨(田氏)란 이미 앞에서 말한 진(陳)씨(氏)가 그 전 씨(田氏)였고, 그들은 또 기원전 672년에 진(陳)으로부터 망명해 왔던 전완(田完)의 혈통이었다.

 그리고 또 당시, 유력(有力)했던 귀족들은 항쟁을 통해서 서서히 탈락되어 갔고, 그리하여 최후에 그 전 씨(田氏)가 승리해서 남게 되었다. 그래서 안영(晏嬰)의 예언은 적중했고, 기원전 386년에는 그 전 씨(田氏)에서 나왔던 전화(田和)가, 강(姜)성(姓) 여 씨(呂氏)의 군주로서는 최후였던 강공(姜公)을 대신해서 제(齊)의 군주가 되었다. 그래서 그 후로 그 제(齊)는 전제(田齊)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강제(姜齊)는 강공(康公)을 군주로 해서 존속했고, 전제(田齊)로부터 발해(渤海)만(灣)에 면한 래(萊)의 땅이었던 곳에 조그마한 영토를 얻어 받아서 잠시 이어갔지만,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그것도 멸하고 말았다.


<제의 화폐-齐刀币>

 ○ 제(齊)의 환공(桓公)

 환공(桓公)은 춘추시대, 제(齊)의 제16대 군주였고, 문공(文公)과 함께 춘추오패의 필두였다. 그리고 그는 포숙아(鮑叔牙)의 활약으로 공자(公子) 규(糾)와의 공위(公位)계승전에서 승리했고,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해서 제(齊)를 강대한 국가로 이끌었다. 그리고 또한, 당시에는 이미 힘을 잃고 있었던 동주(東周)를 대신해서 회맹도 이끌었다.

 ⊙ 포숙아(鮑叔牙)포숙아(鮑叔牙) 또는 포숙(鮑叔)은 관중(管仲)과 더불어서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지만, 그러나 생몰연대는 알 수가 없고, 중국 춘추시대 때 제(齊)의 정치가였다. 그리고 성(姓)은 사(姒)였고, 씨(氏)는 그 봉지(封地)로부터 포(鮑), 휘(諱)는 아(牙), 자(字)는 숙(叔)이었다. 그는 환공(桓公)을 섬겼지만, 그의 선조(先祖)는 사성(姒姓)의 나라 기(杞)의 공자(公子)였으며, 제(齊)를 따랐기 때문에 포(鮑)의 땅을 하사받음으로 해서 포(鮑)씨(氏)란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포숙아(鮑叔牙)는 어려서부터 관중(管仲)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런데 한번은 두 사람이 같이 동업을 해서 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관중(管仲)이 실수로 아주 큰 손실을 입었다고 했는데, 그러자 포숙(鮑叔)은 <장사란 때가 있는 것>이라면서 결코 관중(管仲)을 책망(責望)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에 장사를 잘해서 아주 큰 이익을 봤다고 하는데, 그러자 또 포숙(鮑叔)은 당시, 아주 힘들게 살고 있었던 관중(管仲)을 위해서 그 이익의 거의 전부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관중(管仲)은 <나를 낳으신 분은 우리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너뿐이로구나>라고 말을 하면서 그 대은(大恩)에 감사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후세의 사람들은 그 일을 가리켜서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칭송했다. 그리고 그 후에 포숙(鮑叔)은 희공(釐公-그러나 리공 또는 이공이라고 표현한 곳도 있으므로, 참고바람)의 아들이었던 공자(公子) 소백(小白)을 모시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소백(小白)의 형이었던 양공(襄公)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 소백(小白)과 함께 거(莒)로 망명했다. 그 후, 양공(襄公)이 암살당하자 제(齊)에서는 후계자를 놓고 싸움이 일어났는데, 그러자 소백(小白)이 다시 제(齊)로 돌아가서 공자(公子) 규(糾)와 싸웠고, 그때 또 포숙(鮑叔)의 활약으로 소백(小白)은 승리해서 제(齊)의 군(君)이 되었다. 그 후, 포숙(鮑叔)은 공자(公子) 규(糾)를 도왔던 노(魯)에서, 그 규(糾)의 신하로 있었던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을 데려오려고 했지만, 그러나 소홀(召忽)은 규(糾)가 죽자 자해(自害)를 했고, 관중(管仲)은 제(齊)로 데려왔다. 그러자 또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을 재상의 자리에 앉혔고, 그러자 또 포숙(鮑叔)은 관중(管仲)을 도와주는 형식으로 같이 정치를 펼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 사기(史記)에서는 <사람들이 환공(桓公)을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관중(管仲)보다도, 그 관중(管仲)의 역량을 미리 발견하고 끝임 없이 믿어주었던 포숙(鮑叔)이었다>라고 말을 한다면서 포숙(鮑叔)을 칭송했다.

 ⊙ 관중(管仲) 즉, 관이오(管夷吾)는 중국 춘추시대에 제(齊)의 정치가였고, 환공(桓公)을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字)는 중(仲)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관중(管仲)이라고 표현한다.(단, 鮑叔에서 설명한 것과 중복되는 것은 설명을 생략함) 그리고 앞의 포숙(鮑叔)에서 설명했던 대로, 그들이 한번 장사를 같이 했는데, 포숙(鮑叔)은 그가 실패했을 때는 오히려 격려를 해주었고, 장사가 잘 되어서 큰돈을 벌었을 때 관중(管仲)은 그것을 거의 독식(獨食)했지만, 그러나 포숙(鮑叔)은 당시 힘들게 살고 있었던 관중(管仲)을 생각하면서 그를 이해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 두 사람이 제(齊)로 들어갔을 때, 관중(管仲)은 공자(公子) 규(糾)를 섬기게 되었고, 포숙(鮑叔)은 공자 소백(小白)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또 당시의 군주였던 양공(襄公)은 아주 포악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관중(管仲)은 공자(公子) 규(糾)와 함께 노(魯)로 도망쳤고, 포숙(鮑叔)은 소백(小白)과 함께 거(莒)로 도망을 갔다. 그 후, 양공(襄公)은 자신의 형제였던 공손무지(公孫無知)의 모반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그러자 또 그 공손무지(公孫無知)도 군사들에 의해서 주살(誅殺)되자 그곳은 군주(君主)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자 제(齊)에서는 규(糾)와 소백(小白) 중 누구를 부를 것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는데, 그러자 그 두 공자(公子)는 서로 먼저 제(齊)로 들어가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때, 관중(管仲)은 자신이 모시던 규(糾)를 서둘러서 제(齊)로 보내려했던 한편, 소백(小白)이 지나갈 길에서
매복을 했다가 그를 암살하려고 기도(企圖)했다. 그래서 관중(管仲)은 숲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소백(小白)이 나타나자 독(毒)을 바른 화살을 소백(小白)의 배를 향해서 쏘았다. 그러자 그 화살은 보기 좋게 소백(小白)의 배에 꽂혔으나, 그러나 그 화살은 그때 소백(小白)이 입고 있던 복대(腹帶)를 뚫지 못했고, 그러자 결국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단, 춘추좌씨전 등에서는 그 내용이 없음)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소백(小白)은 죽을힘을 다해서 차(車)를 몰았고, 마침내 그곳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러자 또 그는 자객(刺客)이 다시 올 것을 염려해서 다음 숙박지에서 관(棺)을 준비시켰고, 그러자 관중(管仲)은 소백(小白)이 죽었다고 확신했다. 그러자 그 후, 관중(管仲)은 그 사실을 규(糾)에게 알리고는 그때부터는 여유롭게 제(齊)로 향했는데, 그런데 막상 그 제(齊)에 들어가 보니, 그때는 이미 소백(小白)과 그의 신하들이 제(齊)를 장악하고 난 뒤였다. 그러자 관중(管仲)과 규(糾)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노(魯)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제공(齊公)에 즉위했던 소백(小白)은 환공(桓公)이 되었고, 그러자 또 그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군사들을 노(魯)로 보내서 규(糾)를 토벌하게 했다. 하지만 그때, 노(魯)의 항전도 거셌다. 그러자 제(齊)군(軍)은 더욱 강하게 노(魯)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그때, 환공(桓公)이 나서서 규(糾)의 수급(首級)과 함께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의 신병(身柄)을 요구했다. 그러자 노(魯)는 규(糾)를 참수했고, 관중(管仲)은 죄인으로 제(齊)에 보내지게 되었지만, 그러나 소홀(召忽)은 그 전에 자결(自決)했다. 그리고 또 관중(管仲)은 제(齊)에 들어서자 구속이 풀어졌는데, 그것은 또 애초 환공(桓公)이 노(魯)를 치려고 했을 때, 환공(桓公)은 규(糾)와 함께 관중(管仲)도 죽일 생각이었지만, 그러나 그때 포숙(鮑叔)이 <환공(桓公)께서 이 제(齊)만을 통치하실 생각이시라면 저와 고혜(高傒) 2사람만 있으면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천하의 패권을 원하신다면 관중(管仲)을 재상에 앉히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을 듣고 환공(桓公)은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환공(桓公)을 만나게 되었던 관중(管仲)은 강병(强兵) 전에 국부(國富)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했고, 그것으로 민생의 안정과 규율(規律)의 필요성에 대해서 설파했다. 그러자 그는 바로 그날로 재상에 임명되었으며, 그러자 또 포숙(鮑叔)은 지위로 봤을 때 그의 아래에 놓이게 되었지만, 그러나 포숙(鮑叔)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를 보좌했다. 그러자 또 관중(管仲)은 그때부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으며, 그래서 또 그때 행했던 그의 정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관중(管仲)은 우선 내정(內政)개혁에 들어서면서, 그때까지 주대(周代)초기 이래(以來)부터 내려오던 오래된 제도인 <공전(公田)제>부터 폐지했다. 그리고는 제(齊)의 영토를 21향(鄕)으로 나누었으며, 물가안정책과 제(齊)의 지리를 이용해서 생산한 소금과 어업을 통해서 벌어들인 이익 등으로 농민과 어민들이 안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기쁨에 찬 생활을 하면서 더욱 생산에 박차를 가했고, 그러자 또 자연스럽게 산업이 활성화 되었으며, 그에 더불어서 상업도 활성화 되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타국(他國) 사람들이 제(齊)로 몰려들었으며, 그러자 또 관중(管仲)은 그 중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골라서 적극적으로 등용시켰다. 그런 한편, 다섯 집(5戶)을 한 단위로 묶는 방법으로 서로간의 감시를 의무화시켰으며, 부정(不正)에 대해서는 엄벌(嚴罰)이 내려지게 했다. 그러자 그때부터 백성들의 준법정신이 강해졌으며, 세수(稅收)도 증대되었다. 그렇게 해서 국내를 정비했던 환공(桓公)은, 이어서 노(魯)를 침략해서 그 영토를 탈취했다. 그런데 그 강화조약을 맺었을 때, 노(魯)의 장군이었던 조말(曹沫)이 스스로 패전의 책임을 지겠다면서 환공(桓公)의 머리에 비수를 겨누고는 자신들의 잃어버린 영토를 반환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환공(桓公)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승낙했고 제(齊)로 다시 돌아갔지만, 그러나 그는 곧 <협박으로 이루어진 맹약 따위는 지킬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다시 노(魯)를 침략해서 그 조말(曹沫)의 머리를 베어서 올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관중(管仲)은 <예를 들어서, 비록 협박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하더라도, 한번 맺은 약속을 깨는 것은 제후들의 신망을 잃어버릴 염려가 있다>라고 간언했다. 그러자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의 말을 따라서 노(魯)의 영지를 돌려주었고, 그러자 또 그 후, 그 환공(桓公)의 약속에 대해서 알게 된 제후들은 환공(桓公)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으며, 다른 소국(小國)의 군주들도 그때부터는 환공(桓公)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했던 정책들에 의해서 증대되었던 국력과 신뢰를 배경으로 해서 환공(桓公)은 패자(覇者)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또 그는 주(周)왕실 내부의 분쟁을 다스렸다든지, 당시 북상(北上)해서 올라오던 초(楚)를 토벌해서 다시 주(周)에의 충성을 서약하게 했던 것으로 해서, 그는 주(周)왕실로부터 방백(方伯-周를 중심으로 한 四方 내에서 동쪽을 관할했던 제후를 말함)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그 후에 환공(桓公)은 번번이 오만(傲慢)함을 보였고, 주(周)왕실을 업신여기는 행동을 했다. 그러자 또 관중(管仲)은 그때마다 그의 경솔함에 대해서 간언을 했고, 환공(桓公)은 또 관중(管仲)의 말을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관중(管仲)의 간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조말(曹沫)의 건(件)과 연제(燕齊)의 국경에 대한 불리(不利)한 변경에 관해서도, 환공(桓公)은 몹시 불쾌해 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관중(管仲)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또 후세에 그 관중(管仲)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 <관자(管子)>에는 그때를 두고 <창름(倉廩-곡식창고)은 가득차고, 예절을 알며, 의식(衣食)도 충분하고, 영욕(榮辱)을 안다>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일단, 그런 민생(民生)의 안정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도 순조로웠을 것으로 생각이 되며, 그리고 또 환공(桓公)의 명령으로 주(周)왕실의 내분(內紛)을 진정시켰을 때, 그에 기뻐했던 주(周)의 양왕(襄王)이 관중(管仲)에게 그 상(賞)으로 상경(上卿)의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러자 또 관중(管仲)은 <저는 신하(臣下)밖에는 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대우(待遇)는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을 하고는 끝까지 그것을 고사(固辭)했다. 그런데 그랬던 관중(管仲)도 기원전 645년에는 세상을 떠났으며, 그러자 환공(桓公)은 그에게 경(敬)이란 시(諡)를 내렸으며, 그러자 또 그 후로 그는 관경중(管敬仲) 또는 관자(管子)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 관중(管仲)을 잃었던 환공(桓公)은 서서히 정채(精彩-총명함으로 해석함)를 잃어갔고, 그러자 또 관중(管仲)이 죽었을 때 유언했던 <결코 옆에 두어서는 안 될> 3인의 간신[奸臣=3貴로, 그 첫째는 공자(公子)개방<開方-이름은 姬開方 또는 啓方이었으며, 衛 의공(懿公) 또는 대공(戴公)의 公子였고, 母國을 배신했던 인물이었다>이었고, 둘째는 역아(易牙-요리사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다음, 그 고기를 환공에게 헌상했던 인물이었다)였고, 마지막으로 수조<豎刁-자궁(自宮-내시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거세함)환관(宦官)>가 그들이었다]들을 환공(桓公)은 자신의 측근에 두게 되었다. 그러자 그 3인은 공모(共謀)해서, 당시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공자(公子) 소(昭)를 폐했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괴뢰 인물로 무궤(無詭)를 옹립하고는 음모를 진행시켰다.

  제후(齊侯) 무궤(無詭)는 춘추시대 제(齊)의 제 17대 군주였고, 무휴(無虧) 또는 무맹(武孟)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그는 환공(桓公)과 측실(側室)의 장(長)이었던 희(姬)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환공(桓公) 사후(死後)에 그를 포함한 5명의 공자<公子-무궤(無詭), 원(元-후의 혜공(惠公), 반(潘-후의 소공(昭公), 상인(商人-후의 의공(懿公), 공자(公子) 옹(雍)>가 그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게 되었기 때문에, 태자(太子)였던 소(昭-후의 孝公)는 당시 그를 후견하고 있던 송(宋)의 양공(襄公)에게로 망명해 버렸다. 그러자 그 후, 그 무궤(無詭)를 옹립하려 했던 일당들이 반대파들을 암살하는 것으로 그 일을 수습했고, 그러자 무궤(無詭)는 왕위에 오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3개월 후, 송(宋)의 양공(襄公)이 태자 소(昭)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제(齊)를 공격해왔기 때문에, 제(齊)의 신하들은 그에 겁을 먹고 그 무궤(無詭)를 미리 암살해 버렸다. 그러자 또 태자 소(昭)는 신군(新君)으로서 제(齊)의 환영을 받으면서 입성했고, 그 후에 즉위해서 효공(孝公)이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환공(桓公)이 병사(病死)하자 그 상중(喪中)에 아주 격한 후계쟁탈전이 일어났고, 끝내는 그것이 내란(內亂)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환공(桓公)의 사해(死骸)는 방치되어서 부패(腐敗)했고, 그러자 또 그 시체에서 생긴 구더기가 바깥 복도까지 기어나와서 돌아다녔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생전에 관중(管仲)이 미리 깔아두었던 복안을 따라서 행했던 환공(桓公)의 유언에 따라서 당시, 제후들의 후원(後援)을 받고 있었던 공자(公子) 소(昭)가 즉위해서 효공(孝公)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내란을 겪었던 데다가, 그 3귀(貴)에 의한 중신들의 모살(謀殺)에 의해서 국력은 대폭 저하(低下)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제(齊)의 패권(覇權)은 그 후에 진(晋)의 문공(文公)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후세의 진수(陳壽)는 제갈량(諸葛亮)을 평가했을 때 <그의 재능은 관중과 소하(蕭何)에 필적(匹敵)하고...>라고 기술했고, 그 제갈량(諸葛亮) 본인도 스스로를 관중(管仲)과 악의(樂毅 또는 락의)에 비교했던 등, 그래서 그 관중(管仲)의 이름은 <최상급 내정(內政)의 재능(을 가졌던 자)>과 <최고의 신하>에 대한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에서도 그 관중(管仲)을 <차라리 그 분의 마부(馬夫-또는 시종)라도 되고 싶다>라고까지 숭경(崇敬)했다던 안영(晏嬰)과 동열(同列)에 세우는 등, 제법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제(齊)의 환공(桓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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