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3)

 <周>


 주(周-기원전 1046년경에서 기원전 256년)는 중국 고대의 왕조로, 은(殷)을 멸하고 왕조를 열었다.
 국성(國姓)은 희(姬). 주(周)의 전설상의 시조(始祖)는 후직(后稷)이라고 알려져 있고, 제 순(帝舜)을 섬겼으며, 농정(農政)에 공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고공단보(古公亶父) 시대에 주의 땅에 정주(定住)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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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상기(上記)대로, 문왕(文王) 사후(死後) 무왕(武王)은 아우였던 주공단(周公旦)과 태공망(太公望) 그리고 소공(召公) 등의 조력(助力)을 받아서 은(殷)을 멸했고, 주(周)왕조를 세웠다.

 ※ 무왕(武王)

<무왕>


 무왕은 주조(周朝)의 창시자였으며, 문왕의 차남이었다. 동모형(同母兄)에 백읍고(伯邑考)가 있었고, 역시 동모제(同母弟)에 관숙선(管叔鮮)과 주공단(周公旦) 그리고 채숙도(蔡叔度)와 곽숙처(霍叔處) 그리고 강숙봉(康叔封) 등이 있었다. 자(子)로는 성왕(成王), 당숙우(唐叔虞-晋의 開祖), 우숙(邘叔), 응숙(應叔), 한숙(韓叔) 등이 있었다.<春秋左氏傳에서>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공자(孔子)가 편찬했던 것이라고 전해지며, 역사(歷史)서 <춘추(春秋)-儒學에서 五經의 하나이며, 공자가 노나라 隱公에서 哀公에 이르는 242년(B.C.722~B.C.481) 동안의 사적(事跡)을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라고 전해지지만, 그러나 공자가 직접 저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11권>의 대표적인 주석(註釋)서 중의 하나로, 기원전 700년경부터 약 250년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통칭으로는 <좌전(左傳)>이라고 불리며 <춘추좌전(春秋左傳)> 또는 <좌씨전(左氏傳)>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현존하는 다른 주석서인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과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아울러서 춘추삼전(春秋三傳) 또는 삼전(三傳)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 삼전(三傳) 중에서도 좌전(左傳)은 제일 기본적인 것으로 되어있고, 그 좌전(左傳)의 작자(作者)는 노(魯)의 좌구명<左丘明-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학자(?~?)로, 벼슬은 태사(太史)를 지냈으며, 공자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국어(國語)도 그가 저술한 것이라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것도 반드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일설에는 옛날부터 존재했던 사서(史書)를 전한(前漢)의 유흠(劉歆)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라고 개명(改名)한 후,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것이라고 선전을 했으며, 그리하여 자신이 옹립했던 왕망(王莽)의 한(漢)왕조 찬탈의 근거로 삼았다는 유력한 강유위(康有爲)의 이설(異說)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도 입증(立證)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좌전(左傳)은 다른 삼전(三傳)과는 달리 풍부한 자료를 기본으로, 춘추(春秋)를 상세히 보완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현재에도 그 춘추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당시의 전쟁에 관한 기재(記載)는 상세하다. 그리고 또 동(同) 시기를 취급했던 역사서 국어(國語)는 좌전(左傳)과 견줄만한 작품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그것은 또 <춘추외전(春秋外傳)>으로 불리고 있다.

 ♣ 관숙선(管叔鮮)은 주(周) 문왕(文王)의 3남이며, 성은 희(姬), 이름은 선(鮮)이었고, 관숙(管叔) 또는 관숙(關叔)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서주(西周) 초년(初年)에 관(管)에 봉해졌으며 제후가 되었다. 그는 무왕(武王) 12년에 은(殷)이 멸하자 그 다음해 관(管-현재의 河南省 鄭州市 老城區)에 봉해졌으며,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녹부(武庚祿父)와 함께 은(殷)의 유민들을 통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자 관숙선(管叔鮮)은 채숙도(蔡叔度)와 곽숙처(霍叔處)와 함께 주(周)초(初) 3감(監)으로 칭해졌다. 그 후, 성왕(成王) 원년에 성왕(成王)이 즉위했을 때, 그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주공단(周公旦)이 섭정을 했다. 그러자 관숙선(管叔鮮)은 주공단(周公旦)이 그 자리를 찬탈할 것을 염려해서 채숙도(蔡叔度)와 함께 무경(武庚)을 옹립하기 위해서 기병(起兵)했고, 그것이 후에 <3감(監)의 난>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3년이나 이어졌으며, 그러자 주공단(周公旦)이 동정(東征)해서 관숙선(管叔鮮)을 파(破)하고 살해했다.

 ♣ 주공단(周公旦)은 주(周)왕조의 정치가로, 성은 희(姬), 휘(諱)는 단(旦)이었다. 그리고 그는 노(魯)나라를 열었던 개조(開祖)였으며, 주공(周公)은 그의 칭호(稱號)였다고 생각이 된다. 그는 또 문왕의 4자(子)로, 무왕(武王)의 동생이었으며, 그 무왕(武王)과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을 보좌했으며, 건국 직후의 주(周)를 안정시켰다. 그는 또 태공망(太公望), 소공석(召公奭)과 함께 주(周) 건국의 대(大)공신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는 또 주(周) 성립 후, 곡부(曲阜)에 봉해져서 노공(魯公)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때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魯)로 가지 않고 무왕(武王)의 적자(嫡子) 백금(伯禽)을 보좌하기 위해서 스스로 정치를 맡았다는데, 그래서 또 그 연유에 대해서도 조금 설명을 하면, 건국 초기에 무왕(武王)이 병으로 쓰러져서 여생이 얼마 남지 않게 되자, 그는 탄식하면서 자신을 산 제물(祭物)로 해서 무왕(武王)을 살려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무왕(武王)은 잠시 회복하는가 싶더니 결국 죽고 말았다. 그러자 무왕의 뒤를 이어서 성왕(成王)이 그 자리를 이었지만, 그러나 또 그때, 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단(旦)은 연(燕)의 소공(召公)과 함께 섭정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그러던 중에 <3감(監)의 난(亂)>이 발생했고, 그러자 또 단(旦)은 그 난을 진압하고는 무경(武庚)과 관숙선(管叔鮮)을 주살(誅殺)했으며, 채숙도(蔡叔度)는 그의 아들 중호(仲胡)에게 가독(家督)을 잇게 하고는 유형(流刑)에 처했다. 그 후, 7년이 경과했을 때 성왕(成王)은 성인(成人)이 되었고, 그러자 단(旦)은 정권을 성왕(成王)에게 물려주고는 원래대로 신하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그 후, 단(旦)은 낙읍(雒邑=洛陽)을 정비했고, 그러자 그곳은 주(周)의 부도(副都)가 되었다. 그리고 또 단(旦)은 예학(禮學)의 기초를 닦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주대(周代)의 의식(儀式)과 의례(儀禮)에 관해서 쓴 <주례(周禮)>와 <의례(儀禮)>를 저작했던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 단(旦)의 시대로부터 적어도 약 500년간의 춘추시대에 유학(儒學)을 열었던 공자(孔子)는 그 노(魯) 출신으로, 단(旦)을 이상(理想)적인 성인(聖人)으로 숭배했으며, 자주 단(旦) 꿈을 꾸었을 정도로 경모(敬慕)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느 때에 더 이상 꿈에 단(旦)이 나타나지 않자 공자는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주공(周公)의 호칭에 대해서는, 그 단(旦)이 주(周)의 연고지였던 기산(岐山)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주(周)의 공(公=君主)이 되어서 그렇게 불렸을 것이란 설(說)이 있다. 그리고 또 무왕(武王)이 붕어한 후, 그는 당연히 즉위해서 왕이 되었고, 그러나 그 후에 성왕(成王)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설(說)도 있다. 아무튼, 그 주공(周公)의 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근래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었지만, 그러나 2004년에 협서성(陜西省) 옥계(玉鷄)시에서 그의 묘로 추정되는 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여러 나라의 위치도>


 채숙도(蔡叔度)는 성은 희(姬), 이름은 도(度)였고, 서주(西周)의 제후였으며, 채(蔡)의 초대 군주였다. 그는 주(周) 문왕의 5남으로 태어났고, 무왕(武王)이 은을 멸하자 채(蔡-河南省 駐馬店市 上蔡県의 南西)에 봉해져서 무경(武庚)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성왕이 즉위하고 주공단(周公旦)이 섭정을 시작하자 그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으며, 결국 관숙선(管叔鮮)과 함께 <3감(監)의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또 그 전쟁에서 패하자 곽린(郭邻)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러자 아들 희호(姬胡-蔡仲)가 채(蔡)에 봉해졌으며, 제사를 이었다.

 ♣ 곽숙처(霍叔處)는 문왕의 8남이었고, 역시 서주(西周)의 제후였으며, 곽(霍-山西省 霍州市)의 초대 군주였다. 그리고 역시, 무경(武庚)의 감시 역을 맡았지만, 3감의 난을 일으킨 후 패배했고, 주공단(周公旦)에 의해서 서인(庶人)으로 강등(降等)되었다. 그러자 역시, 그의 아들이 곽(霍)에 봉해져서 그의 뒤를 이었다.

 ♣
강숙(康叔)은 위(衛)의 초대 군주였으며, 문왕의 9남, 무왕의 동모제(同母弟)였고, 위강숙(衛康叔) 또는 강숙봉(康叔封)으로도 불렸다. 그는 3감(監)의 난 이후 주공단(周公旦)에 의해서 은(殷)의 백성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게 되었고, 위군(衛君)에 봉해져서 황하와 기수(淇水) 사이에 있던 고상허(故商墟-旧殷의 수도였으며, 뒤의 朝歌로, 현재의 河南省 淇県)로 부임했다. 그러자 또 그때, 주공단(周公旦)은 그가 아직 어리다는 것이 염려가 되어서 서경(書經)에 수록되어 있는 강고(康誥)와 주고(酒誥) 그리고 재재(梓材)를 가르쳐서 위정자의 법칙으로 삼게 했다. 그리하여 강숙(康叔)은 부임지로 떠났고, 그 후에 주공단(周公旦)의 가르침대로 선정(善政)을 베풀었기 때문에 나중에 성왕(成王)은 그를 주(周)의 사구(司寇-일종의 사법장관)로 삼았으며, 거기에 더해서 주(周)왕실의 보물을 하사해서 그의 유덕(有德)을 표창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 강백(康伯)이 그의 뒤를 이었다.

 무왕(武王)은 아버지 서백창(西伯昌)이 죽자 여상(呂尙), 주공단(周公旦)과 함께 문왕(文王)의 업(業)을 이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당시, 학정(虐政)을 일삼던 주왕(紂王)을 멸하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켰고, 문왕(文王)의 위패(位牌)를 높이 들고 스스로를 태자 발(發)이라고 부르게 했으며, 그 원정(遠征)이 문왕의 뜻에 의한 것임을 천명(闡明)했다. 그러자 그때, 그를 도우기 위해서 달려왔던 제후들은 800명에 달했고, 그것을 목격했던 제후들은 또 <이번에야말로 은(殷)을 멸할 때다!>라고 말하면서 의기충천(意氣衝天)했다지만, 그러나 또 그때, 무왕(武王)은 <아직 시기상조(時機尙早)다!>라고 생각하고는 군을 철수시
켰다.

 그로부터 2년 후, 무왕(武王)은 다시 군사를 일으켰고, 이어서 목야(牧野)에서 두 군대는 격돌했다. 그리고 이미 설명한대로 무왕(武王)은 그 전쟁에서 승리했고, 이어서 분신자살했던 주왕(紂王)의 시체를 찾아내서 화살 3발을 쏘고는 황금으로 만든 도끼로 그의 머리를 자른 다음, 기(旗)의 끝에 꽂아서 하늘 높이 게양(揭揚)했다.

 그 후, 무왕(武王)은 주(周)왕조를 열었고, 이어서 서백창(西伯昌)에 문왕(文王)을 추호(追號-죽은 임금에게 시호를 올림. 또는 그 시호)했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주왕(紂王)에게 살해당했던 비간(比干)의 묘를 개장했으며, 유폐되어 있던 기자(箕子)도 해방시켜주었다. 그리고 또, 주왕(紂王)의 이모형(異母兄)이었던 미자계(微子啓)에게는 은(殷)의 제사를 계속해서 모실 수 있게 했고, 송(宋)에 봉했다.

 ♣ 미자계(微子啓)는 중국 은(殷)나라의 왕족으로, 제 을(帝乙)의 장자(長子)였다. 그리고 미(微)는 그 봉해졌던 나라의 이름이었으며, 자(子)는 자작(子爵)의 뜻, 그리고 계(啓)는 휘(諱)였다. 그러나 사기(史記)에서는 그의 휘(諱)를 개(開)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전한(前漢) 경제(景帝-휘는 劉啓)와 피휘(避諱)한 것이었다. 아무튼, 그는 주왕(紂王)의 장형(長兄)이었지만, 서자(庶子)였기 때문에 왕위를 물려받지 못했고, 미(微)에 봉해져서 미자계(微子啓)라고 불리게 되었다.(史記) 그리고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의하면, 그의 생모(生母)가 제 을(乙)의 측실로 있었을 때 그와 중연(仲衍)을 낳았고, 그 후에 정실(正室)로 승격되고 나서 주왕(紂王)을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조용하고 평온한 성격으로 인망(人望)이 높았다. 그리고 주왕(紂王)이 폭정을 일삼자 몇 번에 걸쳐서 간언을 했고, 그 뒤의 주(周)와의 전쟁 때도 화목(和睦)을 주장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 후에도 조상들을 모시기 위해서 은(殷)에 남았지만, 그러나 또 당시, 지인이었던 태사(太師)와 소사(少師)에게 자문을 구했던 바, 그들 양인(兩人) 모두 그곳을 떠나는 것을 권유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동생 미자연(微子衍)과 함께 봉지(封地)였던 미(微)로 돌아갔다. 그 후, 주왕(紂王)이 무왕(武王)에게 패해서 죽자, 그 두 사람은 스스로 무왕(武王)을 찾아가서 항복을 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미자계(微子啓)는 상반신을 벗은 채로 양손을 뒤로 결박했고, 그리고는 왼손으로는 양(羊)을 끌고, 오른손에는 억새를 꺾어 든 채로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그러자 무왕(武王)은 흔쾌히 그의 항복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조카였던 무경(武庚)이 반란을 일으켜서 주살(誅殺)되자, 섭정(攝政)의 주공(周公)은 구(舊)은(殷)을 2분(分)했다. 그리고는 동부(東部) 송(宋)에 그 미자계(微子啓)를 보냈으며, 그리하여 은(殷)의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그리하여 또 미자계(微子啓)는 그곳에서 초대 송공(宋公)이 되었고, 그러자 또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던 그를 잘 알고 있던 은(殷)의 유민들은 그를 존경하고 숭배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자식은 없었고, 그리하여 사기(史記)에서는 그의 아우 미중연(微仲衍)이 그의 뒤를 이었다고 써두었다.

 그런 한편, 무왕(武王)은 고대(古代)의 성왕(聖王)들의 자손들을 찾아내서

 신농(神農)의 자손은 초(焦)에
 황제(黃帝)의 자손은 축(祝)에
 요(堯)의 자손은 계(薊)에
 순(舜)의 자손은 진(陳)에
 우(禹)의 자손은 기(杞)에 각각 봉했다.

 그 후, 무왕(武王)은 공신(功臣)들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열고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여상(呂尙)은 제(齊)에
 주공단(周公旦)은 노(魯)에

 그런 다음, 무왕(武王)은 수도를 호경(鎬京-長安) 이외에 낙읍(洛邑)을 부도(副都)로 했고, 천하(天下)의 무기들을 모두 모아서 폐(廢)하고, 군사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임을 천명했다.

 하지만 그 후, 무왕(武王)은 곧 병이 들었다. 하지만 또 그때, 후계자였던 성왕(成王)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래서 무왕(武王)은 주(周)의 장래를 공신이었던 여상(呂尙)과 주공단(周公旦)에게 부탁하고는 병몰(病沒)했다.

 그리하여 무왕(武王)은 하(夏)의 우(禹) 그리고 은(殷)의 탕왕(湯王) 그리고 또 자신의 아버지였던 문왕(文王)과 함께 성왕(聖王)으로서 후세에 숭배되었다. 그리고 또 도교(道敎)에서는 그 무왕(武王)을 <영보천존(靈寶天尊)의 화신(化身)>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영보천존(靈寶天尊)은 태상도군(太上道君)으로 불리는 도교(道敎)의 신이다. 별명은 영보천존(靈寶天尊) 또는 상청천존(上淸天尊)이며, 태상노군(太上老君=道徳天尊)과 원시천존(元始天尊)과 함께 3주(柱)로, 3청(淸)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또 원시천존은 태원(太元) 그리고 태상노군은 노자(老子)를 신격화한 것에 대해서, 태상도군(太上道君)은 도(道)를 신격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도교(道敎)에서의 최고(最高)의 천상계(天上界)인 3청경(淸境)의 상청경(上淸境)의 미라궁(弥羅宮)에 산다고 해서 상청(上淸-天尊)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삼존(三尊)은 또 그 상청경(上淸境)에 살기 때문에 3청(淸)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武王 끝)


 



 <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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