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10년 / 시황제(始皇帝) 동방순행(東方巡行) 中 사거(死去)



 ※ 시황제(始皇帝)

 진조(秦朝)의 황제였으며, 성(性)은 영(嬴), 씨(氏)는 진(秦), 시호(諱)는 정(政).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고 있고, 진(秦)왕으로 기원전 246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는 또한 중국 사상 처음으로 황제로 칭해졌던 인물이었다.

 <약력(略曆)>

 4. 황제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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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소개>

 ※ 장양
(또는 장량 張良-?부터 기원전 186년) 1



 그는 중국 한나라의 건국공신으로, 자(字)는 자방(子房), 한나라의 고조를 도와서 천하를 통일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소하(蕭何) · 한신(韓信)과 함께 한나라 창업의 삼걸(三傑)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진(秦) 말기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정치가였고, 모장(謀將)이었다. 시(諡)는 문성(文成). 그리고 또 그는 유방(劉邦)의 군사(軍師)로서 많은 작전을 입안(立案)했으며, 유방(劉邦)의 패업(霸業)을 크게 도왔다. 그리하여 유방(劉邦)으로부터 류<또는 유 : 留 - 강소성(江蘇省) 서주시(徐州市-舊 彭城) 패현(沛縣)의 東南>를 영지(領地)로 하사받았기 때문에 유후(留侯)라고도 불렸다. 자식으로는 사자(嗣子-상속자, 대을 잇는 자식) 장불의(張不疑)와 소자(少子) 장벽강(張辟彊)이 있었다.


<강소성>

<서주시>

'패현'은 북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유방'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유'는 '패현'의 동남에 위치(정확한 자료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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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生涯)>

 1. 시황제(始皇帝) 암살

 그의 조부(祖父) 장개지(張開地)는 한(韓)의 소후(昭侯)와 선혜왕(宣惠王) 그리고 양왕(襄王)'의 재상(宰相)을 맡았던 사람이었고, 부(父) 장평(張平)은 리왕(釐王)과 환혜왕(桓惠王)의 재상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史記索隠>에 의하면 <그의 선조들은 한(韓)의 공족(公族)이었고, 주(周) 왕실과 같은 희 성(姬姓)이었지만, 그러나 진(秦)에 의한 적(賊)의 탐색이 실시되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장(張) 씨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부(父) 장평(張平)이 죽은 후 20년이 지났을 때 진(秦)이 한(韓)을 멸했다(
기원전 230년). 하지만 그때까지도 장양은 관(官職)에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그러나 남자 나이 20세정도면 성인(成人)으로, 그가 부(父) 장평(張平)이 죽기 바로 직전에 태어났던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때는 그도 관직에 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그가 그때까지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고 했던 것은, 아마도 한(韓)이 멸망했을 당시, 그 분위기와 함께 그의 나이는 대충 20대 전()반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 않았겠는가 하고 추측해 볼 수 있다.<그러나 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는 장양이 항백(項伯)보다 연하(年下)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 항백(項伯-?부터 기원전192년)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정치가였고, 무장(武將)이었으며, 子는 항수(項睢=劉睢), 항우의 숙부였고, 항연(項燕)의 子였으며, 항양(項梁)의 형제였지만, 보다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

 아무튼 한(韓)이 진(秦)에 멸해지자, 그에 장양(張良)은 복수를 맹세했으며,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졌던 전 재산을 처분해서 그것을 자금으로 사용했다는데, 그것은 또 그 당시 자신의 남동생이 사망했던 일이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는 그 비용이 아까워서 장례도 치르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장량(張良)은 자신과 뜻을 같이할 동지(同志)를 찾기 위해서 동쪽으로 여행하던 중 창해군(倉海君)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대단한 역사(力士)를 구해서는 기원전 218년경에 순행(巡行)을 하던 시황제(始皇帝)를 암살하기 위해서 박랑사(博浪沙)에서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이어서 장양은 도망쳤다. 그러자 정(政)은 그에 격노하고는 전국에 장양을 잡으라는 포고를 내렸다. 그러자 또 장양은 가명을 사용하면서 하비(下邳-江蘇省 徐州市=앞에서 설명되었음. 그리고 邳는 丕로도 쓸 수 있음)로 숨어들었다.

 2.
하비(下邳) 시대의 일화(逸話)

 어느 날 장양(張良)이 다리를 건너가는데, 어느 거지 노인이 자신의 신발을 벗어서 다리 아래로 던졌다. 그리고는 장양(張良)에게 <젊은이, 저 신발을 건져 오게!>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장양(張良)은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상대가 나이든 노인이라 그는 말없이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또 이번에는 자신의 다리를 쑥 내밀더니 <신겨라!>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장양은 기분이 더욱 나빴지만, 그러나 '이왕에 하는 것!' 하듯이 꾹 참으면서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또 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아주 좋아하면서 대소(大笑)하더니 그에게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너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으니 5일 후 아침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러자 장량(張良)은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그 5일 후의 아침에 그곳으로 나가보니 그 노인은 이미 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또 그 노인은 <어른과의 약속인데 젊은이가 늦다니, 어찌된 일이냐?!>라고 말을 하고는 <5일 후에 다시 와라!>라는 말을 남기고는 떠나버렸다. 그러자 또 장양(張良)은 이번에는 아주 전날 저녁때부터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또 얼마 후에 그 노인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매우 흡족한지 웃으면서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아, 이번에는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군! 그런 겸허함이야말로 (사람이 지녀야할) 정말로 소중한 것이야!> 그리고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태공망(太公望-강태공)의 병법서(兵法書)를 그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것을 독파(讀破-通達)하면 왕(王)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지금으로부터 13년 후에 어느 산기슭에서 황색(黃色)의 돌(石)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일 것이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그 노인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13년 후 장양(張良)은 그 황색의 돌을 어느 산기슭에서 찾았고, 그래서 또 그것을 가보(家寶)로 삼았는데, 그의 사후(死後)에는 무덤에까지 넣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물론, 그 황석공(黃石公)의 일화는 당연히 전설로 보아야할 것이겠지만, 그러나 또 그 일화를 통해서 그가 어느 누군가에게서 병법을 배웠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며, 그리고 또 그 '황석공'이 주었다는 그 '태공망(太公望)'의 병법서는 <육도(六韜)>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하지만 현존하는 그 <육도(六韜)>의 성립 연도는 위진대(魏晋代)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적어도 그때 장양(張良)이 읽었을 그 병법서는 <육도(六韜)>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또 그 하비(下邳)에서 장양(張良)이 도피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항우(項羽)의 숙부였던 항백(項伯)이 사람을 죽이고 그곳으로 도망쳐 온 일이 있었는데, 그러자 장양(張良)이 그를 숨겨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이하, 유방과의 이야기는 그때 가서 다시 소개하거나, 아니면 생략함)

 ※ 육도(六韜)=중국 주(周)나라 태공망이 지은 병법서(兵法書). 무경칠서의 하나로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견도(犬韜), 표도(豹韜)의 6장으로 되어 있다. 6권 60편


<黃石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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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10년 / 시황제(始皇帝) 동방순행(東方巡行) 中 사거(死去)





 ※ 시황제(始皇帝)


 진조(秦朝)의 황제였으며, 성(性)은 영(嬴), 씨(氏)는 진(秦), 시호(諱)는 정(政).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고 있고, 진(秦)왕으로 기원전 246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는 또한 중국 사상 처음으로 황제로 칭해졌던 인물이었다.

 <약력(略曆)>

 3. 통일(統一)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칠국(七國)의 군주 모두가 스스로 왕을 자칭(自稱)하고 있었다.<다만, 한때는 진왕(秦王)이 서제(西帝)로, 제왕(齊王)이 동제(東帝)로 칭해졌던 때는 있었다> 하지만 통일 후, 그런 칭호가 적당치 않다고 생각했던 정(政)은 가신들에게 새로운 칭호의 고안을 명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옛날 전설상의 삼황(三皇)이었던 천황(天皇)과 지황(地皇), 태황(泰皇) 중에서 제일로 존경을 받았던 태황(泰皇)을 상주(上奏)하였으나, 정(政)은 그에 만족하지 않았고, 태황의 황(皇)과 태고(太古)의 제(帝) 호(號)를 혼합해서 황제(皇帝)라고 칭할 것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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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에 있어서 신화전설시대의 제왕들을 말하는 것이며, 현재는 실제의 인물로 생각하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삼황(三皇)은 신(神)으로, 오제(五帝)는 성인(聖人)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으며, 전설(傳說)에서는 최초의 세습왕조였던 하(夏) 이전(以前)의 시대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아래는 다만 참고일 뿐이므로, 한글표기는 가능한 생략합니다. 그리고 또한 더욱 상세한 것은 앞의 <참고>를 참조바랍니다. 

 <三皇>

 三皇에 관해서는 諸說이 있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아래와 같은 5說이 잘 알려져 있다.

 1. 天皇 · 地皇 · 泰皇(人皇) - 前漢의 司馬遷이 쓴 史記의 秦始皇本紀에 의하면, 皇帝라고 칭하게 된 배경에는 옛날 중국 전설상의 三皇이 擧名되었으며, 그에 정(政-秦始皇)은 그 중에서 皇과 帝를 取해서 皇帝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만, 이 부분에서 司馬遷은 반드시 ‘三皇’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후에 司馬貞이 썼던 '史記索隱'에서는 <泰皇=人皇>으로 되어 있고, 그리하여 天皇 · 地皇 · 人皇을 三皇으로 하고 있으며, 그 前에 泰皇이 있었다는 등으로 썼다. 그리고 또 그가 보충했던 史記의 三皇本紀(補三皇本紀 또는 補史記라고도 한다)에서는 三皇을 伏羲, 女, 神農이라고 해놓고 또한 天皇 · 地皇 · 人皇이라고도 倂記해두었다.

 2. 伏羲 · 女 · 神農 - 춘추위운두추(春秋緯運斗樞)의 풍속통(風俗通) 황패편(黃覇篇)에 의함. 唐의 司馬貞 補 史記 三皇本紀도 그것을 承繼했다.

 3. 수인(燧人) · 伏羲 · 神農 - 예위함문가(禮緯含文嘉)의 風俗通 黃覇篇에 의함.

 4. 伏羲・神農・축융(祝融-불을 다스리는 신) - 後漢・班固의 白虎通 號篇

 5. 伏羲・神農・黄帝 - 西晋・황보밀(皇甫謐)의 帝王世紀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天皇 · 地皇 · 人皇이라고 하는 天地人 三才에 유래하는 추상적인 존재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인류에게 문명을 가져다주는 문화영웅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前漢 末부터 융성했던 신비주의적인 참위사상(讖緯思想-고대 중국에서 음양오행설에 의하여 인간 사회의 길흉화복을 예언했던 학설)에 의해서 半獸半神의 모습을 한 神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또한 伏羲와 神農에 관해서는 일찍이 周易의 계사하전(繫辭下傳)에서 괘(卦-점괘)를 사용해서 文明을 가져다준 聖人으로서, 黃帝 · 堯 · 舜 앞에 존재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들을 三皇에 넣어서 역사적인 帝王으로서 五帝 앞에 固定시켰던 것은 魏, 晋 이후의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五帝>

 그리고 五帝를 누구로 정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래 표와 같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러나 그 이야기의 내용을 보아서는 많은 矛盾이 있다. 그리고 일단, 그들을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던 것은 司馬遷이었지만(史記의 五帝本紀), 그래서 그는 <黃帝傳說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民俗風土가 공통으로 그것을 인정하고 있고, 또한 그 속에 사실도 조금은 섞여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기록하는데서
가치를 찾아내려는 것이다>라고 부연을 해놓았다.




大載禮記, 史記


戰國策, 易經


禮記, 淮南子


世經


三統經

資治通鑑外記


伏羲




1










神農




2










太昊






1








炎帝






2








黃帝


1


3


3






1


少昊






4


1




2


顓頊


2




5


2




3




3






3


1


4




4


4




4


2


5




5


5




5


3














4














5



  

 <備考> 그 후, 중국의 지배자들은 모두 황제를 자칭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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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그와 동시에 왕명(王命)을 제(制)로, 왕령(王令)을 조(詔)로, 천자(天子)의 자칭(自稱)으로서는 짐(朕-나중에 眞人으로 고쳤다. 그러나 政 死後에는 다시 朕을 사용했다)을 사용할 것을 정했다. 그리고 또 시호(諡號)제도는 자식이나 신하들이 선군(先君)을 비평할 수 있다고 해서 불경(不敬)하다는 이유로 폐지했고, 이후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하면서, 그 다음으로 이세(二世)황제, 삼세(三世)황제... 만세(萬世)황제로 칭할 것도 정했다. 그리고 또 그 광대한 영토의 통치에 대해서는 <정(政)의 자식들을 지방으로 파견해서 봉건(封建)으로 통치하는 방법>을 신하들이 제안했으나, 하지만 이사(李斯)가 주(周)의 예를 들면서 군현제(郡縣制)를 주장해서 채택되었다. 정(政)은 그 후 전국(全國)을 36군(郡-나중에는 48군)으로 분할했고, 그 각각에 수(守-행정담당) · 위(尉-군사담당) · 감(監-감찰담당)을 설치했으며, 군(郡)의 하부에는 현(縣)을 설치해서 통치했다. 그리고 또 정(亭)이라는 일종의 파출소(派出所)를 제도화 해서, 가도(街道) 10리(里)마다 설치하고는 인부징병이나 치안유지 또는 관리용 숙박시설로 활용했다. 그리고 또한 도성(都城)인 함양(咸陽)에는 전국의 부호(富豪) 12만호를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거기에다 이미 멸망한 육국(六國)의 왕궁을 본뜬 건물도 세웠다. 그 다음, 정(政)은 민간의 무기소지를 금지해서 몰수했고, 중국통일의 상징으로 거대한 상(像)도 만들었다. 그리고 또한 도량형(度量衡 : 度=길이, 量=체적, 衡=무게의 단위)과 화폐, 차(車)의 폭을 통일('軌를 하나로 한다’의 故事)했다. 그리고 또 한자(漢字)는 그때까지 지방마다 사용하는 것이 다 달랐지만, 그러나 그것까지도 고쳐서 진체(秦體)를 표준자체(標準字體)로 채용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후세(後世)에까지 통일왕조의 모범이 되는 정밀하고도 합리적인 지배체제를 가지는 중앙집권국가가 처음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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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斯

 중국 진나라의 정치가(?~B.C.208). 법가사상을 이용하여 여러 나라를 병합하였다. 시황제의 승상(丞相)으로서 군현제의 실시, 문자와 도량형의 통일, 분서(焚書) 등을 행하는 등, 통일 제국의 확립에 공헌했다. 그러나 시황제가 죽은 뒤, 이세(二世) 황제를 옹립하고 권력을 잡았으나, 조고(趙高)의 참소로 실각하여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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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황제로서
 

<만리장성>
사진의 벽돌 장성은 明代의 것이며
시황제 시대의 것은 版築土壘로 되어 있었다
또 위치도 명대보다 북방에 있었다.


<장성의 모습= 赤色=明代>

 기원전 214년, 북방 '흉노(匈奴)'의 진입을 막기 위해서 '만리(의)장성'을 복구(復舊)했고, 장군 '몽염(蒙恬)'에게 명(命)해서 30만의 군세(軍勢)로 '흉노'를 토벌시켰으며, 그 여세를 몰아서 '오르도스 지방((앞에서 설명되었음)'까지 세력을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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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匈奴)는  중국의 이민족인 오호(五胡) 가운데 진(秦)나라와·한(漢)나라 때에 몽골고원에서 활약하던 기마민족으로, 기원전 3세기 말에 묵돌선우(冒頓單于=Maodun Chanyu)가 모든 부족을 통일하여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건설하고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하였으나, 한(漢)나라 무제의 잦은 침공으로 쇠약해져 1세기경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冒頓單于 때의 영토>

<冒頓單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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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죄인을 군사로 징병해서 남쪽의 영남(嶺南-베트남 북부)을 정복하고 군(郡)을 설치했다. 그리고 또 그때에 양자강의 지류 상강<湘江-湘은 강 이름, 광서성(廣西省) 흥안현(興安縣)에서 동정호에 흘러드는 강>과 광동(廣東)지방의 서강(西江)으로 흘러드는 '이강(漓江)'을 묶는 운하령거(運河靈渠-全長 33.1 ㎞)를 쌓아올렸다.
 

<상강 위치도>

<漓江>

 기원전 213년 '이사(李斯)'의 진언으로 '주조(周朝)'의 재흥(再興)을 바라서 '진조(秦朝)'를 비판하던 유생(儒生)들을 견제하기 위해 의학서(醫學書)와 농서(農書) 등 실용(實用)서를 제외한 서적의 소각처분을 실시했다.(焚書) 그리고 또 그 다음 해에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영약(靈藥)을 만들기를 명받았던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끼고는 자신들이 받을 罰이 무서워서 도망을 가버리자, 그에 화가 난 정(政)은 '함양(咸陽)'에 있던 학자(學者)들을 구속하고는 460명을 구덩이에 묻어버렸다.(坑儒).


<함양 시>

 그러자 장자(長子) '부소(扶蘇)'가 그러한 시정(施政)에 대해서 간(諫)했지만, 그러나 '정(政)'은 오히려 화를 내고는 그를 '몽념(蒙恬)' 휘하로 보내서 북방방위를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또 '정(政)'은 5회에 이르는 대규모 순행(巡行)을 실시하면서 전국의 교통망정비(古代道路)를 추진시켰고, 그와 더불어서 중국 국내의 장성(長城)도 파괴했다.

 그런데 그때 '항우(項羽)'와 '유방(劉邦)'도 그런 '정(政)'의 순행(巡行)을 지켜보다가 '항우(項羽)'가 <내가 곧 저 자리를 빼앗을 것이다-筆者 譯>라고 말을 했다고 하고, 그에 또 '유방(劉邦)'은 <남자로 태어난 이상, 그런 것은 당연한 것이다(희망사항이다)-筆者 譯>라고 말을 했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또 기원전 219년, 2번째의 순행에서는 '태산(泰山)'에서의 '봉선의식<封禪儀式-제왕(帝王)이 하늘과 땅에 자신의 즉위를 알리고, 천하가 태평한데 감사를 드리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러자 그때 그 의식의 상세(詳細)에 대한 고례(古例)를 유가(儒家)에게 물었지만, 고대의 의식이었기 때문에 유가의 답변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결국 '정(政)'은 자신 마음대로 의식을 실시했고, 그리고는 기념으로 그곳에다 '태산각석(泰山刻石)'을 설치했다.


<태산-세계유산 위치도>

<泰山 南天門>


 
그리고 또 기원전 218년의 3번째 순행에서는 '박랑사(博浪沙)'를 통과했을 때, 큰 철추<鐵鎚=철퇴(鐵槌)>가 '정(政)'이 타고 가던 차(車)를 노리고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차에 떨어졌고, 그에 '정(政)'은 목숨을 건졌다. 그러자 '정(政)'은 그 범인을 잡을 것을 명했지만, 하지만 주범이었던 '장량(또는 장양-張良)'은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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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랑사(博浪沙)는, 중국 허난 성(河南省) 우양현(武陽縣)의 고적으로, 진(秦)나라 무양 성의 남쪽에 있으며, 장량(張良-후술)이 역사(力士)들로 하여금 철퇴로 진나라 시황제를 저격하게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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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4)


연도, 연

사건


 BC210

 시황제(始皇帝) 동방순행(東方巡行) 中 사거(死去)


※ 시황제(始皇帝)
진조(秦朝)의 황제였으며, 성(性)은 영(嬴), 씨(氏)는 진(秦), 시호(諱)는 정(政).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고 있고, 진(秦)왕으로 기원전 246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는 또한 중국 사상 처음으로 황제로 칭해졌던 인물이다.

<약력(略曆)>

2. 즉위(卽位)


 
 ※ 보충설명

 형가(荊軻-?-기원 전 227년)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자객(刺客)으로, 연(燕) 나라의 태자 단(丹)의 명을 받아 책략을 써서 진왕(秦王) 정(政)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살해당했다.

 <
생애(生涯)>

 1. 출생(出生)

 그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독서와 검술을 좋아했으며, 젊어서부터 제국(諸國)을 유랑하면서 유세술(遊說術-理論)을 배웠다.

*사기색은(史記索隠-唐代에 司馬貞이 史記에 註釋을 단 책)에 의하면 그의 선조는 제(齊)의 명족(名族) 경 씨(慶氏)였으며, 그래서 위(衛)나라 사람들은 그를 경경(慶卿)이란 존칭을 써서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연(燕)으로 들어갔을 때는 사람들이 형경(荊卿)으로 불렀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 관료(官僚)에 뜻을 두고 당시 위(衛)의 군주였던 원군(元君)을 알현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여행을 하면서 배웠던 유세(遊說)술로 국가정책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그러나 원군(元君)은 그의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후, 그는 몹시 실망하여 협객(俠客)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그는 사소한 일들로 많은 다툼을 벌일 뻔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스스로 물러났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비웃었다.(刺客列傳) 그 후, 연(燕)나라로 들어갔던 그는 구살인(狗殺人-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개 같은 동물을 도살하는 개백정으로 봄=역주)과 고점리(高漸離)라고 하는 축(筑-현악기의 일종)을 잘 연주하던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고점리(高漸離)는 중국 전국시대의 사람으로, 음악에 밝았으며, 축(筑)이란 악기를 잘 다루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형가(荊軻)를 만나서 친구가 되었으나, 그러나 그 형가(荊軻)가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를 암살하는데 실패를 하자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가 축을 잘 다룬다는 소문이 나서 결국 시황제에게 불려갔다. 그러나 시황제는 그가 형가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자 몹시 고민했지만,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아껴서 측근에 두고 음악을 감상했다. 하지만 그 후에 그는 형가의 뜻을 이어서 정(政)을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주살(誅殺)당했다.

 
그 후, 그는 연(燕)의 시내(市內)를 돌아다니면서 만취하는 등,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독서와 사람 사귀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 나중에는 당지(當地)의 실력자였던 전광(田光)이란 사람의 빈객(賓客)까지 되어서 우대받았다.

 
2. 자객(刺客)으로

 기원전 233년, 연(燕)의 태자 단(丹)이 인질로 잡혀 있던 진(秦)에서 도망쳐 왔다. 그리고 당시, 단(丹)은 정(政)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고 있었지만,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 정(政)이 자신을 업신여기자 그에 불만을 품고 연(燕)으로 도망쳐 왔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정(政)에게 복수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또 그때는 머지 않아 연(燕)도 진(秦)에 멸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단(丹)은 어느 하루 전광(田光)에게 그런 뜻을 전했다. 그러자 또 전광(田光)은 그 적임자로 형가(荊軻)를 추천했다. 하지만 단(丹)은 그때, 전광(田光)과 헤어지면서 <이 일은 절대로 비밀로 해달라...>는 당부의 말을 하고 갔다. 그러자 전광은 그 일을 형가(荊軻)에게 모두 말해주고는 <태자로 하여금 의심을 가지게 한 것은 나의 不德의 所致이다>라고 말을 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의뢰를 받았던 형가(荊軻)는 그때부터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궁리를 거듭했다. 그리고는 당시 연(燕)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었던 독항(督亢)의 지도(地圖)를 정(政)에게 진상(進上)하려는 책략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을 해서 당시 진(秦)의 장군으로, 그러나 진군(秦軍)의 개혁에 반대하다 가족들을 모두 잃고 연(燕)으로 피신해 와있었던 번어기(또는 번오기-樊於期)의 머리를 받치기로 책략을 세웠다. 그래서 형가(荊軻)는 그 책략을 단(丹)에게 진언했지만, 그러나 단(丹)의 우유부단과 人情에 의해서 그 책략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형가(荊軻)는 이번에는 번어기(樊於期)를 직접 찾아갔고, 그리고는 또 그런 사실들을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또 그는 그 자리에서 <당신의 목숨은 현재 현상금이 걸려있는 바, 그러므로 내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정(政)을 찾아가면 필시 정(政)이 나를 만나주게 될 것인데, 그러면 나는 그를 죽이고, 당신은 또 그로써 억울한 복수도 할 수 있어 좋지 않겠는가...>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번어기(樊於期)는
그의 말에 동의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출국
(出國)

 그리하여 기원전 227년, 단(丹)은 그 일이 결정되자 형가(荊軻)의 보조자로서 진무양(秦舞陽)이라는 사람을 추천했다. 그리고 또 그 진무양(秦舞陽)은 당시 불과 13세에 사람을 죽였던 경험이 있었고, 장사(壯士)로서도 유명했다지만, 그러나 형가(荊軻)는 그가 미숙하다고 보아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형가(荊軻)는 자신의 옛 친구<史記索隠에 의하면 그는 楚나라 사람 박색(薄索)이었다고 한다>를 부르고는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단(丹)이 <형가(荊軻)가 두려워서 출발을 늦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의심하고는 출발을 서둘렀기 때문에, 그래서 형가(荊軻)는 하는 수없이 진무양(秦舞陽)을 데리고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이윽고 그곳을 출발하던 날, 단(丹)을 시작으로 전송을 나왔던 사람들은 모두 상복(喪服)과 같은 흰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역수(易水-황하의 북쪽)부근까지 그들을 전송해 주었다. 그리고 또 그들은 그때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배웅했으며, 특히 고점리(高漸離)는 축(筑)을 연주하면서 그들을 전송해 주었다. 그러자 그 답으로 형가(荊軻)는 다음과 같은 비장한 시(詩)를 읊었다고 한다.

 풍소소혜역수한 장사일거혜불복환<風蕭蕭兮易水寒 壮士一去兮不復還>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구나
 장사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그리고
위의 시구(詩句)는 사기(史記) 중에서도 제일로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이며, 사람들의 입으로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어쨌든,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두 전율을 느꼈다지만, 그러나 정작 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4.
암살실패와 형가의 최후

 함양(咸陽)에 도착했던 그들은 원 계획대로 영토할양의 증거인 지도(地圖)와 번어기(樊於期)의 머리를 진왕(秦王)에게 바쳤다. 그러자 정(政)은 몹시도 기뻐하면서 그들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때 진무양(秦舞陽)이 진왕(秦王) 앞으로 나아가자 공포를 느끼고는 몹시 떨고 있었으므로, 그에 정(政)의 신하들이 무언가 의심을 느끼고는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형가(荊軻)는 재치로써 <그가 시골 촌놈이기 때문에 천자(天子)를 보자 무서워서 그렇다>고 변명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가져갔던 지도를 정(政)에게 헌상했다. 그러자 정(政)이 그것을 펼쳐보려 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를 노렸던 형가(荊軻)가 달려들어서 그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서 정(政)의 소매를 잡고는 政을 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또 바로 그때, 불운하게도 정(政)의 소매가 찢어졌고, 형가(荊軻)는 암살에 실패했다. 그러자 또 정(政)이 자신이 차고 있던 장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칼이 너무 길어서 결국
뽑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정(政)의 신하들은 그 장면을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또 그 궁전 내에 무기를 반입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지게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맨손으로 그 장면을 목격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러자 또 아무튼, 형가(荊軻)는 처음의 실패를 딛고 다시 정(政)을 죽이려고 궁내를 쫓아다녔지만, 그러나 정(政)은 기둥 주위로 필사적으로 도망치면서 형가(荊軻)의 공격을 피했다. 그런데 또 그때, 그때까지는 당황을 해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정(政)의 신하들이 맨손으로라도 형가(荊軻)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또 그때였다, 시의(侍醫)였던 하무차(夏無且)가 약상자를 형가(荊軻)에게 집어던졌다. 그러자 형가(荊軻)가 그것을 피하려고 몸을 숙였는데, 그러자 또 그 사이에 주위에서 <왕이시여! 검을 등에 차소서!>라는 소리가 들렸고, 그러자 정(政)이 재빨리 검을 등에 지고는 칼을 뽑았다. 그러자 또 형가(荊軻)는 장도(長刀)와는 상대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쥐고 있던 단검을 정(政)에게 던졌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해서 검은 기둥에 박혀버렸고, 이어서 형가(荊軻)는 政에게 난자(亂刺)당했다는데, 그때 정(政)은 너무도 격앙해서 형가(荊軻)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난자했고, 끝내는 갈기갈기 찢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진무양(秦舞陽)은 계속해서 떨고 있기만 했다고 한다.

 5.
그 후(後)

 아무튼, 그 일이 있은 후 정(政)은 격노해서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226년에 연(燕)을 공격했고, 그 수도였던 계(薊-지금의 北京)를 함락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암살의 주범이었던 단(丹)도 강화(講和)의 조건으로써 연왕(燕王)의 명령으로 살해당했고, 연(燕) 또한 진(秦)의 공격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서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했다. 그리고 그 후, 전술(前述)한 대로 고점리(高漸離)가 납(鉛)을 넣은 축(筑)을 던져서 정(政)을 살해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아무런 계획도 없이 거의 즉흥적으로 저질렀던 일이라 미수(未遂)에 그쳤으며, 그 후에도 장량(張良-후술) 등 많은 암살자들이 있었다지만 결국에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6. 평가(評價)

 그 형가(荊軻)는 당시 강대했던 제왕을 자신의 기상(氣像) 하나로만 상대하려 했던 의사(義士)라는 점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사마천은 <자객열전>의 끝에다 <하무차(夏無且)와 친분이 있었던 공손계공(公孫季功)과 동중서(董仲舒)로부터 그 사건을 전해 들었다>라고 밝히면서, 그리고 <비록 그 형가(荊軻)의 암살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그의 높은 뜻과 의지로 인해서 그는 이름을 남길 수는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시인(詩人) 도연명(陶淵明)은 자신의 시 <영형가(詠荊軻)>에서 <그 형가(荊軻)는 이미 죽고 없지만, 그러나 그의 의지(意志)는 아직도 남아있다(筆者 譯)>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그런 한편, 또 현대에서는 그를 일개 테러리스트로 규정해서, 테러에 국운을 맡기려 했던 태자 단(丹)을 저평가(低平價)하기도 했다.(陳舜臣의 小說十八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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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7-2)


 ※
 왕전(王翦-생몰불상)은,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무장이었고, 빈양동향(頻陽東郷) 출신의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그리고 왕분(王賁)의 아버지였고, 왕이(王離)의 조부(祖父), 진(秦)의 왕 정(政)을 섬겼으며, 초(楚)와 월(越)을 멸하는 등, 진(秦)이 천하통일을 하는데 공헌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원전 236년, 정(政) 11년에 환기(桓齮), 양단화(楊端和) 등과 함께 위(魏)의 업(鄴-현재의 河南省)을
공격해서 9개의 성을 빼앗았다. 그 후, 왕전(王翦)은 혼자서 알여(閼與) 등을 공격한 후, 모든 병사들을 모아서 일군(一軍)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군대의 장군이 된 후, 18일 안에 군중(軍中)에서 두식(斗食-콩밥을 먹을 정도의 지위 또는 능력자) 이하의 공로(功勞)도 올리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다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그것으로 군(軍)을 거의 1/5이나 감축해서 정예군으로 편성했다. 그런 다음, 그때까지도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었던 업(鄴)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229년, 왕전(王翦)은 상군(上郡-魏의 文侯가 현재의 陝西省에 설치했던 郡으로, 기원전 328년에 魏는 秦에 그 上郡 15縣을 헌상했고, 그 후로 秦의 영토가 되었던 곳)지방 군(軍)의 대장 자격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조(趙)로 쳐들어갔으며, 그 결과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즉, 정형(井陘)을 함락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28년, 정(政)19년에는 강외(羌瘣)와 조(趙)를 평정하고 그곳의 영토를 모조리 빼앗았으며, 유목왕(幽繆王)을 포획했다.

 참고 1: 유목왕(幽繆王-생몰불명. 재위는 기원전 236년부터 기원전 228년)은 중국 전국시대 조(趙)의 제10대 군주였고, 왕으로서는 제4대였다.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은 천(遷), 도양왕(悼襄王)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즉위하고 2년째 되던 해에 진(秦)이 쳐들어왔는데, 그 결과 평양(平陽-현재의 河北省 臨漳県 西部)과 무성(武城-현재의 山東省 武城県 西部)을 빼앗겼으며, 무수(武遂)에서는 조(趙)의 장군 호첩(扈輒)이 진군(秦軍)에 패해서 10만이란 수의 수급(首級)이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유목왕(幽繆王)은 이목(李牧)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해서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자 이목(李牧)은 진군(秦軍)을 의안宜安(현재의 河北省 石家荘市 南東部)에서 격퇴했고, 그러자 또 진(秦)의 장수였던 환기(桓齮)는 패주했다. 그러자 또 그 공으로 유목왕(幽繆王)은 이목(李牧)을 무안군(武安君)에 봉했다. 그 후, 이목(李牧)은 자주 진군(秦軍)을 격파했으며, 그러자 진(秦)에서는 그 이목(李牧)을 제거하기 위해서 조(趙)의 신하였던 곽개(郭開)란 자에게 아주 많은 뇌물을 보냈고, 그리고는 이목(李牧)이 모반을 기도하고 있다는 참언을 유목왕(幽繆王)에게 올리게 했다. 그러자 그 후, 유목왕(幽繆王)은 그 참언을 그대로 믿고 이목(李牧)을 죽였는데, 그러자 또 기원전 228년에 진(秦)은 장군 왕전(王翦)을 보내서 조군(趙軍)을 격파했으며, 이어서 수도 한단(邯鄲)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유목왕(幽繆王)은 진군(秦軍)에 투항했고, 이어서 방능(房陵)이란 곳으로 귀양을 갔다. 그리하여 결국 조(趙)는 멸해졌으나, 그러나 또 그때, 조(趙)의 왕자였던 가(嘉)가 대(代-현재의 河北省 蔚県)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스스로 자립(自立)하고는 왕이라고 자칭했다(代王嘉). 거기다 병(兵)을 이끌고 연(燕)을 치기 위해서 중산(中山-현재의 山西省 北部)으로 가서 주둔했다.

 참고 2: 대왕 가(代王嘉-생몰불상. 재위: 기원전 227년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전국시대 조(趙) 최후의 군주(11대)였고, 왕으로서는 제5대였다.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가(嘉), 도양왕(悼襄王)의 아들이었고, 유목왕(幽繆王)의 동생이었다. 그는 도양왕(悼襄王)의 적출(嫡出) 장자(長子)였지만, 그러나 도양왕(悼襄王)은 자신이 총애하고 있었던 창후(倡后)가 생산했던 왕자 천(遷)을 태자로 삼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왕이 되질 못했다. 그리고 그 후, 조(趙)는 진군(秦軍)의 공격을 받아서 결국 멸해졌고, 유목왕(幽繆王)은 포로가 된 후 방능(房陵)이란 곳으로 귀양을 떠났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일족(一族)들을 데리고 대(代)로 도망을 갔으며, 그곳에서 대왕(代王)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연(燕)의 왕 희(喜)와 손을 잡고 진(秦)에 저항했지만, 그러나 연(燕)의 태자 단(丹)이 인솔했던 연(燕)대(代) 연합군은 역수(易水-中國 河北省에 있는 강 이름)에서 진군(秦軍)에 패했고, 그 때문에 연왕(燕王) 부자(父子)는 요동(遼東)으로 도망을 갔다. 그러자 가(嘉)는 연왕(燕王) 희(喜)에게 단(丹)을 죽이고 진(秦)에게 화의를 청해보자고 했고, 그러자 희(喜)는 단(丹)을 죽였다. 그리고는 그 머리를 진왕(秦王) 정(政)에게 헌상했는데, 그러자 그 뜻을 정(政)이 받아들여서 일단 공격은 중지되었다. 하지만 그 화목은 얼마가지 못했고, 그리하여 기원전 223년에 왕전(王翦)의 아들이었던 왕분(王賁)이 이끌었던 진군(秦軍)은 요동(遼東)을 공격했으며, 그 결과로 희(喜)는 포로가 되었으며, 그것으로 연(燕)은 멸망했다. 그러자 또 왕분(王賁)은 이어서 대(代)마저 공격했고, 그 결과로 가(嘉)도 포로로 잡혔으며, 그리하여 조(趙)의 왕통(王統)은 영원히 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227년, 정(政) 20년에 왕전(王翦)은 신승(辛勝)과 함께 연(燕)을 공격해서 연(燕)대(代)연합군을 역수(易水)에서 격파했다. 그리고 기원전 226년에는 대(大)원군(援軍)을 받아서 연(燕)의 공자(公子) 단(丹)이 이끌었던 군대를 격파하고는 연(燕)의 수도 계(薊)를 평정했다.

 참고 3: 공자(公子) 단(丹-?부터 기원전 226년)은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 연(燕)의 왕족이었고, 성(姓)은 길(姞-竹書紀年에 의한 것이며, 史記에서는 周 왕조와 같은 성인 姬라고 함), 휘(諱)는 단(丹), 연왕(燕王) 희(喜)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진(秦)이 점점 더 강국이 되어가자 그에 위기를 느끼고는 당시 중신(重臣)이었던 국무(鞠武)란 사람에게 그에 대해서 의견을 구했는데, 그러자 국무(鞠武)가 이렇게 말을 했다. <진(秦)은 현재 북쪽으로는 감천(甘泉)과 곡구(谷口)란 천연요새를 가지고 있고, 남쪽으로는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에 연(沿)한 비옥한 대지(大地)를 가진 것으로 삼진(三晋-趙・魏・韓)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또 비옥한 파(巴)와 한중(漢中)을 독점하고 있으며, 그곳은 또 오른쪽으로는 농(隴)과 촉(蜀)의 산맥이, 그리고 왼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과 효산(崤山)에 둘려져서 그곳을 보호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지형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그래서 또 그곳에는 인구도 많고, 병사(兵士)들도 용맹하며, 무기(武器)방구(防具) 같은 것들도 충분하게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진(秦)과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그러나 단(丹)은 그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그런데 그 즈음에, 진(秦)에서는 소수정예(少數精銳)화로 군(軍)을 개편했는데, 그러자 또 그 때문에 해고된 병사들이 늘어났다. 그러자 또 그것을 보고 안타깝게 느꼈던 장군 번어기(樊於期)는 그때부터 그 자신도 정(政)으로부터 소외를 당하자 연(燕)으로 망명을 해왔다. 그러자 단(丹)은 그를 숨겨주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국무(鞠武)가 이렇게 말을 했다. <지금 번어기(樊於期)를 보호해주는 것은 굶주린 호랑이(秦) 눈 앞에 고기를 놓아두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 번어기(樊於期)를 흉노(匈奴) 쪽으로 추방을 하고, 삼진(三晋)과 함께 제(齊), 초(楚), 흉노(匈奴)까지 동맹을 맺어서 진(秦)에 대항해야한다!>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단(丹)은 그때, 정(政)의 비정한 정책에 의해서 목숨까지 위협 당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몰살당하고는 정처도 없이 진(秦)의 추격을 받으면서 연(燕)으로까지 도피를 해왔던 그 번어기(樊於期)를 도저히 추방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단(丹)은 국무(鞠武)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러자 또 국무(鞠武)는 전광(田光)이란 사람을 단(丹)에게 소개시켜주면서 서로 이야기를 한번 나눠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남의 자리를 가졌는데, 그러자 그때, 전광(田光)은 형가(荊軻)라는 사람을 추천했다. 그리고 또 그 뒤의 이야기는 본문(7,8)에 자세히 소개가 되어 있으므로 참고바라며,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226년에 정(政)은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단(丹)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연(燕)을 침공했고, 그러자 또 연왕(燕王) 희(喜) 등은 일시 요동(遼東)으로 도망을 갔지만, 그 후의 이야기는 앞에서 소개한 그대로이다.

 아무튼 그 후에 이신(李信)이 요동(遼東)으로 가서 단(丹)의 머리를 가져왔지만, 연왕(燕王) 희(喜)는 그곳에서 왕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해, 왕전(王翦)은 노병(老病)을 핑계로 장군의 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기원전 224년, 정(政) 23년에 정(政)은 다시 왕전(王翦)을 불렀으며, 그러자 그는 다시 출사(出師)해서 초(楚)를 공격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남(河南)의 진(陳)에서부터 그 남쪽의 평여(平輿-河南省의 駐馬店市)까지 점령을 했으며, 거기다 초(楚)의 왕 부추(負芻)까지 포획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23년에는 몽무(蒙武-蒙恬의 父)와 함께 초(楚)를 다시 공략했으며, 그 결과로 그때 초왕(楚王)이 되어있었던 창평군(昌平君)이 전사했으며, 항연(項燕)도 자살했다.

 참고 4: 이신(李信-생몰불명)은 중국 전국시대부터 진(秦)대에 걸쳐서 활약했던 진(秦)의 무장이었고, 기원전 226년에 왕전(王翦)과 왕분(王賁)이 전년(前年) 연(燕)의 태자 단(丹)이 주도했던 형가(荊軻)의 정(政) 살해 미수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연(燕)을 공격했을 때, 그는 약 천 명 정도의 군사를 이끌고 연군(燕軍)을 추격했으며, 그 결과 단(丹)의 군대를 토벌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25년에 정(政)이 초(楚)를 정복하려고 했을 때, 그는 정(政)의 물음에 <20만의 군사면 충분하다>고 답을 했다. 하지만 그때, 왕전(王翦)은 <60만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러자 정(政)은 <왕전(王翦)이 이제는 늙었다>고 생각해서 이신(李信)에게 20만의 병사를 주어서 초(楚)를 치게 했다. 그러자 이신(李信)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서 초(楚)로 쳐들어갔는데, 그 결과 그 자신은 평여(平輿)에서, 그리고 몽염(蒙恬)은 침구(寢丘)에서 각각 초(楚)군에 대승했다. 그 후, 이신(李信)과 몽염(蒙恬)은 영(郢) 주변까지 공격해서 다시 초군(楚軍)을 물리쳤지만, 그러나 성부(城父)란 곳에서 이신(李信)과 몽염(蒙恬)이 합류했을 때, 그들은 3일 밤낮으로 추격을 해왔던 항연(項燕) 군에 기습을 당해서 두 곳 성(城)과 7명의 장수를 잃는 대패를 맛봐야만 했다. 그러자 정(政)은 장수를 교체해서 왕전(王翦)을 그곳으로 다시 투입시켰다. 그러자 왕전(王翦)은 그 다음해 몽무(蒙武)와 함께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楚)를 다시 쳤으며, 그 결과 초왕(楚王) 부추(負芻)를 포획하고 초(楚)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이신(李信)은 왕분(王賁)과 몽염(蒙恬)과 함께 제(齊)를 공격했으며, 그 결과 제(齊)는 멸망했다. 그리고 이신(李信)이 그 대(對)초(楚)전(戰)에서 대패했음에도 숙청당하지 않았고, 거기다 자손들까지도 살아 남았던 것은, 정(政)이 그만큼 그를 믿고 있었던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그래서 또 그의 후손에 대해서도 잠시 알아보면, 일단 증손(曾孫)에 전한(前漢)시대의 장군 이광(李廣)이 있었으며, 그 자손으로 이능(李陵)이 있었고, 그리고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에 서량(西涼)을 건국했던 이고(李暠)는 이광(李廣)의 자손으로 알려졌으며, 그 자손에 당(唐)의 시인 <이백(李白)>이 있었다.

 참고 5: 몽염(蒙恬-?부터 기원전 210년)은 중국 진(秦)의 장군이었고, 몽오(蒙驁)의 손자, 몽무(蒙武)의 아들이었으며, 몽의(蒙毅)의 형이었다. 그리고 생전에 흉노 토벌 등의 공적을 세웠지만, 그러나 조고(趙高) 등의 음모에 말려들어서 부소(扶蘇)와 함께 자살했다. 그리고 몽(蒙)씨는 조부(祖父) 대에 제(齊)에서 진(秦)으로 이주해서 살게 되었으며, 몽염(蒙恬)은 또 당초에는 문관으로, 궁정에 들어가서 소송과 재판 등에 관여를 했었는데, 그런데 기원전 224년에 이신(李信)의 부장(副將)으로 초(楚) 토벌에 나섰고, 그 결과 침(寢丘-河南省)을 공격해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후에 항연(項燕)에게 대패했으며, 그 다음 기원전 221년에 가문의 도움으로 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제(齊)를 토벌하러 갔을 때는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으며, 그 결과 제(齊)는 멸해졌고, 그 공적으로 그는 내리(內吏-수도권의 長官)가 되었다. 그 후, 기원전 215년에는 흉노를 30만 대군으로 공격했으며, 오르도스지방을 빼앗고 흉노를 북쪽으로 내쫓았고, 그 경계의 진(陣)으로 장성(長城)의 직도(直道-직선으로 연결된 길)를 축조했다. 그러자 정(政)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그의 공적을 인정했고, 그 결과로 그의 동생이었던 몽의(蒙毅)도 받아들였으며, 그래서 또 몽염(蒙恬)은 외정(外政)에서, 몽의(蒙毅)는 내정(內政)에서 활약하면서 그 충성심과 공적을 정(政)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즈음에, 그 벌써 전에 정(政)에게 분서(焚書)를 중지해 달라는 말을 해서 원방(遠方)으로 쫓겨가 있었던 왕자 부소(扶蘇)가 몽염(蒙恬)의 진으로 옮겨왔다.(겉으로는 扶蘇가 政에게 내쳐진 후에 蒙恬의 居所로 보내진 형식을 취했지만, 그러나 그 속내는 蒙恬을 감시하라는 감시 역으로 보내졌던 것으로 생각됨) 그리고 기원전 210년, 드디어 시황제(始皇帝)가 순행 중에 사망했고, 그러자 호해(胡亥), 조고(趙高), 이사(李斯)가 공모(共謀)를 해서 호해(胡亥)를 왕위에 올렸으며, 이어서 조서(詔書)를 위조해서 부소(扶蘇)와 몽염(蒙恬)에게 자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몽염(蒙恬)은 그에 의심을 품고 그 진상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부소(扶蘇)는 저항 없이 자살했다. 그러자 또 몽염(蒙恬)은 더욱 저항했지만, 그러나 그도 결국에는 자살했다. 그리고 또 그 몽염(蒙恬) 사후에는 조고(趙高)에 의해서 몽의(蒙毅)와 함께 그 일족도 모두 멸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어 소개하면, 그는 생전에 동물들의 털을 모아서 만든 붓()을 시황제에게 헌상했는데, 그래서 그것이 붓 사용의 시작이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또 1928년에 전국시대의 유적에서 필(筆)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현재에는 갑골문자에서도 필(筆)을 표현한 문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필(筆)의 사용 또는 발명은 아마도 은(殷)대까지는 올라갔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또 몽염(蒙恬)은 아마도 그것을 개량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고 있다.

 참고 6: 항연(項燕-?부터 기원전 223년)은 전국시대 말기 초(楚)의 대장군이었고, 하상(下相-현재의 江蘇省 宿遷市 宿城区)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는 항우(項羽)와 항장(項莊)의 조부(祖父)였고, 항량(項梁)과 항백(項伯)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또 진(秦)의 무장 이신(李信)을 대파했지만, 그러나 또 나중에 초(楚)가 멸하면서 자살했다. 그리고 또 그 항(項)씨(氏)에 관해서 사기(史記)는, 항(項)씨는 대대로 초(楚)의 무장 집안이었으며, 항(項)이라는 읍(邑)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항(項)이라는 성(姓)의 선조(先祖)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기원전 225년에 진(秦)의 장군 이신(李信)이 쳐들어왔을 때, 그것을 대파해서 물리쳤으며, 기원전 224년에는 진(秦)의 장군 왕전(王翦)이 쳐들어와서 견수(堅守), 불출(不出)의 전술을 구사해서 항연(項燕)을 괴롭혔다. 그러자 항연(項燕)의 방비에 틈이 생겼고, 그러자 또 왕전(王翦)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습작전을 펼쳐서 항연(項燕)의 군대를 대파했다. 그러자 또 그 결과 초왕(楚王)이었던 부추(負芻)가 포로로 잡혔는데, 그러자 항연(項燕)은 회수(淮水) 이남(以南)으로 내려가서 초(楚)의 공자였던 창평군(昌平君)을 초왕(楚王)에 올리고는 반항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 다음해 왕전(王翦)이 다시 쳐들어왔고,
그러던 중에 창평군과 항연(項燕)은 사망했으며, 그것으로 초(楚)도 완전히 멸해졌다. <『史記』의 秦始皇本紀에 의함. 그러나 또『史記』의 楚世家에서는 項燕 死後에 負芻가 포로가 되었다고 함.>

 그리고 기원전 222년, 정(政) 25년에 진(秦)은 대병(大兵)을 일으켜서 왕전(王翦)과 몽무(蒙武)에게 초(楚)의 강남(江南)을 평정시켰으며, 이어서 동(東)월(越)의 왕을 항복시켰던 동시에, 그곳에다 회계(會稽)군(郡)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진(秦)은 제(齊)를 멸망시켰고, 그것으로 천하통일의 업은 완수되었다. 그리고 그 후, 왕전(王翦)은 별 탈 없이 천수(天壽)를 누렸으며, 그 후에도 그의 자손들은 번창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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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7-1)


 ※ 이사(李斯-?부터 기원전 208년)는 중국 진(秦)대(代)의 재상이었고, 법가(法家)에 사상적 기반을 두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도량형(度量衡)을 통일시켰고, 분서(焚書)를 행했던 등, 진(秦) 제국(帝國)의 성립에 크게 공헌했지만, 그러나 시황제(始皇帝) 사후에 권력 싸움에서 패하고는 살해되었다.

 그는 초(楚)의 상채(上蔡-현재의 河南省 上蔡県) 출신으로, 젊어서는 말단관리로 초(楚)에서 벼슬을 했다. 그러다가 변소에서 사람의 분뇨(糞尿)를 먹고 있다가,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도망을 가던 쥐와 병량고(兵糧庫)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도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병량(兵糧)을 먹고 있던 쥐를 보고는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사람은 그 처한 환경만으로도 현명함 등, 자신의 가치가 결정되고 마는 것인가?!> 그리고는 유가(儒家) 순자(荀子)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또 당시의 동문(同門)으로 한(韓)의 공자(公子)였던 한비(韓非)가 있었으며, 그와 함께 순자(荀子)에게서 배우고 그는 진(秦)으로 들어가서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 되었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절찬(絶讚)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어서 진왕(秦王) 정(政-始皇帝)에게 추천했다. 그러자 그 후, 그는 정(政)의 근시(近侍)가 되었고, 정(政)의 명령으로 타국(他國)에 잠입해서 각국(各國)의 왕족들과 장군들 사이를 이간질했으며, 그 공적으로 객경(客卿-타국출신의 大臣)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순조롭게 출세를 하는가 싶었지만, 그러나 기원전 238년경에 노애(嫪毐)란 타국출신자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진(秦) 국내에서는 타국출신자들의 평판이 나빠졌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타국인들에게 추방령(逐客令)까지 내려졌다.

 참고: 노애(嫪毐-?부터 기원전 238년)는 중국 진(秦)의 왕 정(政)을 모셨던 신하 중 한사람이었고, 당초에는 이사(李斯)처럼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거근(巨根)으로 알려졌다고 하고, 그래서 또 연회(宴會) 같은 자리에서 그 여흥(餘興)으로 스스로 나서서 마차(馬車)의 차륜(車輪)을 회전시키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 특이했던 기행(奇行)으로 그는 여불위(呂不韋)의 눈에 들었고, 그것은 또 당시 그 여불위(呂不韋)는 정(政)의 어머니였던 태후(太后)와 오랜 시간동안 불륜관계를 지속해오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런데 또 그 태후(太后)가 아주 음란한 여자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즈음에 여불위(呂不韋)는 자신의 능력부족을 느끼고 있었던 참이었으며, 동시에 그 관계란 것도 잘못되면 아주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불위(呂不韋)는 그 노애(嫪毐)를 이용하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여불위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로 태후도 만족시켜주고, 자신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를 당시에는 남자라고는 내시(內侍-宦官)밖에는 출입할 수 없었던 후궁(後宮)으로 몰래 들여 넣었다. 그리고는 환관(宦官)처럼 변장을 시키고는 태후(太后)에게 소개를 시켰는데, 그러자 그 후, 여불위(呂不韋)의 생각대로 그는 태후(太后)의 총애를 듬뿍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에 2명의 아이까지 생산했고, 그 후로는 태후(太后)의 후원을 받아서 권세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신장후(長信侯)에 봉해지기까지도 했다. 그러자 또 그 후에 그는 아주 많은 식객(食客)을 모았으며, 그것으로 여불위(呂不韋) 다음의 권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결국에는 태후(太后)와의 밀통(密通)이 발각되었고, 그러자 그는 옥새(玉璽)를 훔쳐서 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군사를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때 이미 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정(政)에 의해서 그 반란군은 진압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도망을 갔지만, 하지만 또 포로로 잡혀서 차열(車裂)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의 일족과 함께 태후(太后)가 생산했던 아이들도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 사건에 연좌(連座)해서 당시 재상이었던 여불위(呂不韋)도 세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는 정(政)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러자 이사(李斯)도 그에 위기감을 느끼고는 정(政)에게 편지를 써서 그 추방령을 철회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가 썼다던 그 <간축객서(諫逐客書)>는 실로 논리 정연했던 명문(名文)이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나중에 문선(文選)에도 수록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것을 읽었던 정(政)은 그 명문(名文)에 설득당해서 추방령을 철회했고, 당시의 실력자였던 여불위가 자살한 후에는 정(政)의 신임을 계속해서 쌓아갔다.

 그런데 또 그 얼마 후에 그런 이사(李斯)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동문수학했던 한비(韓非子는 너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소개를 생략함)였다. 그것은 또 정(政)이 벌써 전에 한비(韓非)가 썼던 그 한비자(韓非子)를 읽고는 <그 작자(作者)와 친하게 지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고 말을 했을 정도로 한비(韓非)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이사(李斯)는 한비(韓非)가 정(政)을 만나게 되면 자신의 지위가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비(韓非)를 모함했다. 그리고는 한비(韓非)를 투옥(投獄)시켰으며, 그러자 또 그는 옥중에 있던 한비(韓非)를 찾아가서 독(毒)을 주어서 죽게 했다.

 그 후, 더 이상의 경쟁자가 없어진 이사(李斯)는 진(秦)의 부국강병정책을 적극적으로 헌책(獻策)해서 시행하게 했으며, 그 결과로 기원전 221년에 마침내 진(秦)은 중국을 통일했고, 그러자 정(政)은 시황제(始皇帝)가 되었다.

 그 후, 시황제(始皇帝)는 승상(丞相)이었던 왕관(王綰)과 어사대부(御史大夫-副丞相 格)였던 풍겁(馮劫) 등의 중신들로부터, 과거 주(周)의 제도였던 봉건(封建)제를 실시해서 시황제(始皇帝)의 자식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해서 보낼 것을 진언(進言)받았다. 그러자 이사(李斯)는 그것에 맹(猛) 반대를 하면서, 과거 주(周)가 어떻게 해서 망하게 되었던가에 대해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그래서 또 그 해결책으로 그보다 한층 더 강한 군현제(郡縣制)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또한, 정치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비판만 일삼는 학자들의 책들을 모두 모아서 태워버릴 것을 진언(進言)했다.

 하지만 그 후였던 기원전 210년 가을 7월에 시황제(始皇帝)가 순행(巡幸) 도중에 죽었고, 그러자 또 이사(李斯)는 조고(趙高)와 함께 위소(僞詔-始皇帝의 거짓 명령장)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또 그것으로 호해(胡亥)를 즉위시켜서 2세 황제로 만들었으며, 원래의 태자였던 부소(扶蘇)를 자결시켰다.

 참고: 일설에는 이사(李斯)가 조고(趙高)를 협박했고, 그러자 조고(趙高)는 부득이 호해(胡亥)의 즉위를 인정했다고 하며, 위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소개할 예정임.

 아무튼 그 후, 진(秦)에서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을 처음으로 해서 반란이 계속해서 발생했으며, 그것으로 중국 본토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호해(胡亥)는 궁정 깊은 곳에서 노느라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또 조고(趙高)가 책략을 써서 그런 호해(胡亥)를 각성시켰으며, 그 때문에 이사(李斯)는 호해(胡亥)와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08년에 이사(李斯)는 우(右)승상이었던 곽거질(霍去疾)과 장군이었던 풍겁(馮劫)과 함께 아방궁(阿房宮) 조영(造營) 등의 압박(壓迫)정책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호해(胡亥)에게 진언(進言)했지만 거절당했고, 그러자 곽거질(霍去疾)과 풍겁(馮劫)은 자살했다. 그러자 이사(李斯)는 제삼(第三) 간언(諫言)을 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또 조고(趙高)의 참언(讒言)을 받아서 포박 당했으며, 이어서 그 조고(趙高)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에도 굴하지 않자 조고(趙高)는 더욱 고문의 강도를 높여갔고, 그러자 또 이사(李斯)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고(趙高)가 날조했던 죄를 시인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또 일찍이 초(楚)의 항량(項梁)에 패했던 이사(李斯)의 장남으로, 삼천군(三川郡)의 태수였던 이유(李由)가 생전(生前)에 초(楚)와 내통했다는 것을 시인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결국 저자거리에서 요참(腰斬-허리를 잘라서 죽이는 벌)형에 처해졌으며, 그러자 또 그때, 이사(李斯)는 함께 끌려왔던 자신의 차남(次男-이름은 不明)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전에 너와 함께 고향 상채(上蔡)로 붉은 사냥개를 데리고 가서 토끼사냥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일이 없겠구나...>

 아무튼 그 후, 이사(李斯)의 일족(一族)은 모두 처형되었는데, 그런데 그의 아들(그러나 누구인지,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음)은 시황제(始皇帝)의 황녀(皇女-공주)에게 장가를 갔다고 하고, 그 딸은 또 시황제(始皇帝)의 공자(公子-아들)에게 시집을 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그 이사(李斯)는 법가이론의 완성자였던 한비(韓非)에 대해서 법가실무의 완성자로 알려졌지만, 그러나 그의 생전의 업(業) 즉, 한비(韓非)를 죽였던 일과 위소(僞詔)로 부소(扶蘇)를 죽였던 일, 그리고 또 유자(儒者)들을 탄압해서 분서갱유(焚書坑儒)했던 일 등으로 해서 후세의 평판은 아주 나빴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진(秦) 통일에서 최고의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며, 그래서 또 사기(史記)에서는 <이사(李斯)가 길을 잘못 가지만 않았더라면, 그 공적은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에 비견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사마천(司馬遷)은 술회(述懷)했던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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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불위(呂不韋-?부터 기원전 235년)는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정치가였고, 시황제(始皇帝)의 부(父)였던 장양왕(莊襄王)을 왕위에 올리는 일에 진력했으며, 그 공으로 후에 권세를 누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일설(一說)에는 그가 시황제(始皇帝)의 진짜 친부(親父)였다는 설도 있는데, 아무튼 그는 복양(濮陽-河南省) 출신으로 상인(商人)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젊어서부터 각국(各國)을 전전하면서 상술(商術)을 익혔고, 그것으로 부(富)를 축적했다.

 그런데 어느 때, 그는 조(趙)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고, 그래서 아주 초라하게 보였던 진(秦)의 공자였던 이인(異人-나중에 子楚로 改稱했으며, 그 후에 秦의 莊襄王이 됨)을 보게 되었는데, 그러자 그는 첫눈에 <此奇貨可居!>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뜻은 <대단히 진기(珍奇)한 보배다! 미리 사두(확보해두)지 않을 수가 없겠군!>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 후에 양책(陽翟)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그 일을 그의 아버지와 의논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잘 되지 않았던지 그런 일은 몇 번이나 있었고, 그 결과 여(呂)부자(父子)는 먼 장래를 보고 이인(異人)에게 투자를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다시 조(趙)로 갔고, 그곳에서 이인(異人)과 첫 대면을 했다.

 그런데 당시, 그 이인(異人)은 진(秦) 소양왕(昭襄王)의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나중의 孝文王)의 서자(庶子)였는데, 그런데 또 그 안국군(安國君)은 자식을 20명 이상이나 두고 있었으며, 거기에다 또 이인(異人)의 어머니 하(夏)씨(氏)는 당시 그 안국군(安國君)의 총애마저 잃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이인(異人)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또 당시, 진(秦)은 인접했던 조(趙)와 항상 대립하고 있었으며, 그 관계는 날로 악화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랬으므로 또, 그 이인(異人)이 조(趙)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는 것은 진(秦)의 입장에서는 그가 죽어도 아무 것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의미였고, 그래서 또 이인(異人)은 그곳에서 감시를 당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대우란 것도 형편없었으며, 그래서 또 생활비조차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여불위(呂不韋)는 그런 이인(異人)에게 접근을 해서 왕으로 즉위시킬 꿈을 꾸었으며, 그 공적으로 자신은 나중에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에는 또 그 나름대로의 승산(勝算)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 후, 그는 이인(異人)에게 돈(金)을 주어서 사교계로 진출할 것을 지도했고, 그런 다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게 했다. 그런 다음 자신은 진(秦)으로 들어가서 안국군(安國君)의 총희(寵姬)였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을 만나서 이인(異人)이 <아주 현명한 사람이며, 화양부인(華陽夫人)을 마치 친어머니처럼 생각해서 매일 그리워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라고 말을 하면서 꼬드겼다. 거기다 그 부인의 언니까지 만나서 자신이 가지고 갔던 재보(財寶)의 일부를 뇌물로 바치고는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그리고는 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 말을 잘 해서 이인(異人)을 화양부인(華陽夫人)의 양자로 삼고, 그런 다음에는 안국군(安國君)의 세자(世子)로 만들면 좋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런데 또 그때, 사실 그 화양부인(華陽夫人)도 비록 안국군(安國君)의 총애는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자기가 낳은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또 그대로 세월만 보내다가는 안국군(安國君)의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그렇게 되면 또 자신의 지위도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던 참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불위(呂不韋)의 계산은 그녀들과도 딱 맞아떨어져서 그녀들이 나서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안국군(安國君)도 그녀의 뜻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인(異人)은 하루아침에 신분이 상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급히 다시 조(趙)로 돌아가서 그 낭보(朗報)를 이인(異人)에게 전했다. 그러자 이인(異人)은 여불위(呂不韋)를 후견자로 결정했고, 그때부터 또 양모(養母)가 되었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이 초(楚)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신의 이름도 자초(子楚)로 바꿨다.

 그런데 또 그때, 여불위(呂不韋)는 어떤 기생 여자를 한명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자초(子楚)가 그 여자를 탐냈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고민이 되었지만, 그러나 자신이 그것을 거부하면 자초(子楚)와의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동안 투자했던 것이 아까워서라도 그녀를 자초(子楚)에게 주었다. 그런데 또 그때, 그 여자는 이미 여불위(呂不韋)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던 상태였다. 하지만 여불위(呂不韋)는 그런 사실을 숨기고 그 여자를 자초(子楚)에게 보냈으며, 그러자 그 아이는 나중에 자초(子楚)의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아이가 바로 나중의 시황제(始皇帝)가 되는 정(政)이라는 설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 진위(眞僞)에 관해서는 현재 알 길이 없지만, 하지만 또 그 당시에는 그 소문이 넓게 펴졌다고 하며, 그래서 사기(史記)에서도 그것을 사실(事實)로 기록했다.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252년에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이 고령(高齡)에다 재위 55년에 사망했고, 그러자 차남 효문왕(孝文王)이 즉위했다. 그러자 자초(子楚)도 그때서야 진(秦)으로 돌아가서 태자가 되었으며, 하지만 또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효문왕(孝文王)마저 50대에 사망하자, 자초(子楚)는 자동적으로 즉위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장양왕(莊襄王)이었다. 그러자 또 여불위(呂不韋)도 승상이 되었으며, 문신후(文信侯)로 칭해져서 낙양(洛陽)의 10만 호(戶)를 영지로 내려 받았다. 그리하여 또 그것으로 그의 계산은 맞아 떨어졌으며, 그 후 진(秦)의 재상으로 무한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46년에 장양왕(莊襄王)마저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그러자 태자 정(政)이 왕이 되었다. 그러자 또 여불위(呂不韋)는 그 정(政)으로부터 중부(仲父-둘째아버지 또는 삼촌 격)라는 칭호를 내려 받았으며, 그 후로 그의 권세는 더욱더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기에는 맹상군(孟嘗君)과 신능군(信陵君) 등이 많은 식객들을 받아들여서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도 그에 대항해서 식객 3000명을 받아들였으며, 그 시중을 들기 위해서 거느리고 있던 하인, 하녀들도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객 중에는 이사(李斯)도 있었는데,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정(政)에게 추거했고, 거기다 객들의 지식을 한곳에 모았던 여씨춘추(呂氏春秋)란 책도 출간했다. 그리고 또 그 책은 당시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책들과는 달랐던 것으로, 말하자면 사상적으로는 중립적인 일종의 백과사전 같은 것이었다.

 그러자 또 여불위(呂不韋)는 그 책에 아주 만족을 해서, 시장 한가운데에다 그것을 펼쳐놓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 책에서 한 자(一字)라도 빼거나 더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천금(千金)을 주겠다!(以呂氏春秋 布咸陽市門 縣千金其上 延諸侯游士賓客 有能增損一字者 予千金.『史記』巻八五 呂不韋列傳에서)> 그리고 그것은 후에 일자천금(一字千金)이란 말의 유래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당시, 그 여불위(呂不韋)는 그렇게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세를 휘두르면서도 자신의 원래 애인이었던 태후와 밀통(密通)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또 그 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미 노애(嫪毐)에서 소개가 되었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어쨌든 그 노애(嫪毐)로 인해서 여불위(呂不韋) 역시도 연좌(連座)되어서 죽을 처지에 놓였지만, 그러나 그 간의 공을 참작해서 승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게만 했고, 그 후에는 칩거(蟄居)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후로도 여불위(呂不韋)는 식객 등, 객(客)들과의 교류는 끊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또 제국(諸國)에서는 그의 명성이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정(政)은 그가 식객이나 제국(諸國)들과 함께 모반(謀反)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여불위(呂不韋)를 힐문(詰問)하는 글을 써서 보내고는, 촉(蜀)의 땅으로 유배(流配)를 보내버렸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 다음해에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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