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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始皇帝) 동방순행(東方巡行) 中 사거(死去)

※ 시황제(始皇帝)
진조(秦朝)의 황제였으며, 성(性)은 영(嬴), 씨(氏)는 진(秦), 시호(諱)는 정(政).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고 있고, 진(秦)왕으로 기원전 246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는 또한 중국 사상 처음으로 황제로 칭해졌던 인물이다.
<약력(略曆)>
2. 즉위(卽位)
※ 보충설명
형가(荊軻-?-기원 전 227년)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자객(刺客)으로, 연(燕) 나라의 태자 단(丹)의 명을 받아 책략을 써서 진왕(秦王) 정(政)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살해당했다.
<생애(生涯)>
1. 출생(出生)
그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독서와 검술을 좋아했으며, 젊어서부터 제국(諸國)을 유랑하면서 유세술(遊說術-理論)을 배웠다.
*사기색은(史記索隠-唐代에 司馬貞이 史記에 註釋을 단 책)에 의하면 그의 선조는 제(齊)의 명족(名族) 경 씨(慶氏)였으며, 그래서 위(衛)나라 사람들은 그를 경경(慶卿)이란 존칭을 써서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연(燕)으로 들어갔을 때는 사람들이 형경(荊卿)으로 불렀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 관료(官僚)에 뜻을 두고 당시 위(衛)의 군주였던 원군(元君)을 알현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여행을 하면서 배웠던 유세(遊說)술로 국가정책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그러나 원군(元君)은 그의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후, 그는 몹시 실망하여 협객(俠客)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그는 사소한 일들로 많은 다툼을 벌일 뻔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스스로 물러났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비웃었다.(刺客列傳) 그 후, 연(燕)나라로 들어갔던 그는 구살인(狗殺人-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개 같은 동물을 도살하는 개백정으로 봄=역주)과 고점리(高漸離)라고 하는 축(筑-현악기의 일종)을 잘 연주하던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고점리(高漸離)는 중국 전국시대의 사람으로, 음악에 밝았으며, 축(筑)이란 악기를 잘 다루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형가(荊軻)를 만나서 친구가 되었으나, 그러나 그 형가(荊軻)가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를 암살하는데 실패를 하자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가 축을 잘 다룬다는 소문이 나서 결국 시황제에게 불려갔다. 그러나 시황제는 그가 형가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자 몹시 고민했지만,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아껴서 측근에 두고 음악을 감상했다. 하지만 그 후에 그는 형가의 뜻을 이어서 정(政)을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주살(誅殺)당했다.
그 후, 그는 연(燕)의 시내(市內)를 돌아다니면서 만취하는 등,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독서와 사람 사귀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 나중에는 당지(當地)의 실력자였던 전광(田光)이란 사람의 빈객(賓客)까지 되어서 우대받았다.
2. 자객(刺客)으로
기원전 233년, 연(燕)의 태자 단(丹)이 인질로 잡혀 있던 진(秦)에서 도망쳐 왔다. 그리고 당시, 단(丹)은 정(政)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고 있었지만,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 정(政)이 자신을 업신여기자 그에 불만을 품고 연(燕)으로 도망쳐 왔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정(政)에게 복수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또 그때는 머지 않아 연(燕)도 진(秦)에 멸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단(丹)은 어느 하루 전광(田光)에게 그런 뜻을 전했다. 그러자 또 전광(田光)은 그 적임자로 형가(荊軻)를 추천했다. 하지만 단(丹)은 그때, 전광(田光)과 헤어지면서 <이 일은 절대로 비밀로 해달라...>는 당부의 말을 하고 갔다. 그러자 전광은 그 일을 형가(荊軻)에게 모두 말해주고는 <태자로 하여금 의심을 가지게 한 것은 나의 不德의 所致이다>라고 말을 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의뢰를 받았던 형가(荊軻)는 그때부터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궁리를 거듭했다. 그리고는 당시 연(燕)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었던 독항(督亢)의 지도(地圖)를 정(政)에게 진상(進上)하려는 책략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을 해서 당시 진(秦)의 장군으로, 그러나 진군(秦軍)의 개혁에 반대하다 가족들을 모두 잃고 연(燕)으로 피신해 와있었던 번어기(또는 번오기-樊於期)의 머리를 받치기로 책략을 세웠다. 그래서 형가(荊軻)는 그 책략을 단(丹)에게 진언했지만, 그러나 단(丹)의 우유부단과 人情에 의해서 그 책략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형가(荊軻)는 이번에는 번어기(樊於期)를 직접 찾아갔고, 그리고는 또 그런 사실들을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또 그는 그 자리에서 <당신의 목숨은 현재 현상금이 걸려있는 바, 그러므로 내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정(政)을 찾아가면 필시 정(政)이 나를 만나주게 될 것인데, 그러면 나는 그를 죽이고, 당신은 또 그로써 억울한 복수도 할 수 있어 좋지 않겠는가...>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번어기(樊於期)는 그의 말에 동의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출국(出國)
그리하여 기원전 227년, 단(丹)은 그 일이 결정되자 형가(荊軻)의 보조자로서 진무양(秦舞陽)이라는 사람을 추천했다. 그리고 또 그 진무양(秦舞陽)은 당시 불과 13세에 사람을 죽였던 경험이 있었고, 장사(壯士)로서도 유명했다지만, 그러나 형가(荊軻)는 그가 미숙하다고 보아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형가(荊軻)는 자신의 옛 친구<史記索隠에 의하면 그는 楚나라 사람 박색(薄索)이었다고 한다>를 부르고는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단(丹)이 <형가(荊軻)가 두려워서 출발을 늦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의심하고는 출발을 서둘렀기 때문에, 그래서 형가(荊軻)는 하는 수없이 진무양(秦舞陽)을 데리고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이윽고 그곳을 출발하던 날, 단(丹)을 시작으로 전송을 나왔던 사람들은 모두 상복(喪服)과 같은 흰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역수(易水-황하의 북쪽)부근까지 그들을 전송해 주었다. 그리고 또 그들은 그때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배웅했으며, 특히 고점리(高漸離)는 축(筑)을 연주하면서 그들을 전송해 주었다. 그러자 그 답으로 형가(荊軻)는 다음과 같은 비장한 시(詩)를 읊었다고 한다.
풍소소혜역수한 장사일거혜불복환<風蕭蕭兮易水寒 壮士一去兮不復還>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구나
장사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그리고 위의 시구(詩句)는 사기(史記) 중에서도 제일로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이며, 사람들의 입으로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어쨌든,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두 전율을 느꼈다지만, 그러나 정작 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4. 암살실패와 형가의 최후
함양(咸陽)에 도착했던 그들은 원 계획대로 영토할양의 증거인 지도(地圖)와 번어기(樊於期)의 머리를 진왕(秦王)에게 바쳤다. 그러자 정(政)은 몹시도 기뻐하면서 그들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때 진무양(秦舞陽)이 진왕(秦王) 앞으로 나아가자 공포를 느끼고는 몹시 떨고 있었으므로, 그에 정(政)의 신하들이 무언가 의심을 느끼고는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형가(荊軻)는 재치로써 <그가 시골 촌놈이기 때문에 천자(天子)를 보자 무서워서 그렇다>고 변명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가져갔던 지도를 정(政)에게 헌상했다. 그러자 정(政)이 그것을 펼쳐보려 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를 노렸던 형가(荊軻)가 달려들어서 그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서 정(政)의 소매를 잡고는 政을 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또 바로 그때, 불운하게도 정(政)의 소매가 찢어졌고, 형가(荊軻)는 암살에 실패했다. 그러자 또 정(政)이 자신이 차고 있던 장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칼이 너무 길어서 결국 뽑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정(政)의 신하들은 그 장면을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또 그 궁전 내에 무기를 반입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지게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맨손으로 그 장면을 목격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러자 또 아무튼, 형가(荊軻)는 처음의 실패를 딛고 다시 정(政)을 죽이려고 궁내를 쫓아다녔지만, 그러나 정(政)은 기둥 주위로 필사적으로 도망치면서 형가(荊軻)의 공격을 피했다. 그런데 또 그때, 그때까지는 당황을 해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정(政)의 신하들이 맨손으로라도 형가(荊軻)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또 그때였다, 시의(侍醫)였던 하무차(夏無且)가 약상자를 형가(荊軻)에게 집어던졌다. 그러자 형가(荊軻)가 그것을 피하려고 몸을 숙였는데, 그러자 또 그 사이에 주위에서 <왕이시여! 검을 등에 차소서!>라는 소리가 들렸고, 그러자 정(政)이 재빨리 검을 등에 지고는 칼을 뽑았다. 그러자 또 형가(荊軻)는 장도(長刀)와는 상대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쥐고 있던 단검을 정(政)에게 던졌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해서 검은 기둥에 박혀버렸고, 이어서 형가(荊軻)는 政에게 난자(亂刺)당했다는데, 그때 정(政)은 너무도 격앙해서 형가(荊軻)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난자했고, 끝내는 갈기갈기 찢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진무양(秦舞陽)은 계속해서 떨고 있기만 했다고 한다.
5. 그 후(後)
아무튼, 그 일이 있은 후 정(政)은 격노해서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226년에 연(燕)을 공격했고, 그 수도였던 계(薊-지금의 北京)를 함락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암살의 주범이었던 단(丹)도 강화(講和)의 조건으로써 연왕(燕王)의 명령으로 살해당했고, 연(燕) 또한 진(秦)의 공격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서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했다. 그리고 그 후, 전술(前述)한 대로 고점리(高漸離)가 납(鉛)을 넣은 축(筑)을 던져서 정(政)을 살해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아무런 계획도 없이 거의 즉흥적으로 저질렀던 일이라 미수(未遂)에 그쳤으며, 그 후에도 장량(張良-후술) 등 많은 암살자들이 있었다지만 결국에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6. 평가(評價)
그 형가(荊軻)는 당시 강대했던 제왕을 자신의 기상(氣像) 하나로만 상대하려 했던 의사(義士)라는 점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사마천은 <자객열전>의 끝에다 <하무차(夏無且)와 친분이 있었던 공손계공(公孫季功)과 동중서(董仲舒)로부터 그 사건을 전해 들었다>라고 밝히면서, 그리고 <비록 그 형가(荊軻)의 암살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그의 높은 뜻과 의지로 인해서 그는 이름을 남길 수는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시인(詩人) 도연명(陶淵明)은 자신의 시 <영형가(詠荊軻)>에서 <그 형가(荊軻)는 이미 죽고 없지만, 그러나 그의 의지(意志)는 아직도 남아있다(筆者 譯)>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그런 한편, 또 현대에서는 그를 일개 테러리스트로 규정해서, 테러에 국운을 맡기려 했던 태자 단(丹)을 저평가(低平價)하기도 했다.(陳舜臣의 小說十八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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