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7-1)


 ※ 이사(李斯-?부터 기원전 208년)는 중국 진(秦)대(代)의 재상이었고, 법가(法家)에 사상적 기반을 두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도량형(度量衡)을 통일시켰고, 분서(焚書)를 행했던 등, 진(秦) 제국(帝國)의 성립에 크게 공헌했지만, 그러나 시황제(始皇帝) 사후에 권력 싸움에서 패하고는 살해되었다.

 그는 초(楚)의 상채(上蔡-현재의 河南省 上蔡県) 출신으로, 젊어서는 말단관리로 초(楚)에서 벼슬을 했다. 그러다가 변소에서 사람의 분뇨(糞尿)를 먹고 있다가,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도망을 가던 쥐와 병량고(兵糧庫)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도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병량(兵糧)을 먹고 있던 쥐를 보고는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사람은 그 처한 환경만으로도 현명함 등, 자신의 가치가 결정되고 마는 것인가?!> 그리고는 유가(儒家) 순자(荀子)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또 당시의 동문(同門)으로 한(韓)의 공자(公子)였던 한비(韓非)가 있었으며, 그와 함께 순자(荀子)에게서 배우고 그는 진(秦)으로 들어가서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 되었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절찬(絶讚)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어서 진왕(秦王) 정(政-始皇帝)에게 추천했다. 그러자 그 후, 그는 정(政)의 근시(近侍)가 되었고, 정(政)의 명령으로 타국(他國)에 잠입해서 각국(各國)의 왕족들과 장군들 사이를 이간질했으며, 그 공적으로 객경(客卿-타국출신의 大臣)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순조롭게 출세를 하는가 싶었지만, 그러나 기원전 238년경에 노애(嫪毐)란 타국출신자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진(秦) 국내에서는 타국출신자들의 평판이 나빠졌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타국인들에게 추방령(逐客令)까지 내려졌다.

 참고: 노애(嫪毐-?부터 기원전 238년)는 중국 진(秦)의 왕 정(政)을 모셨던 신하 중 한사람이었고, 당초에는 이사(李斯)처럼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거근(巨根)으로 알려졌다고 하고, 그래서 또 연회(宴會) 같은 자리에서 그 여흥(餘興)으로 스스로 나서서 마차(馬車)의 차륜(車輪)을 회전시키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 특이했던 기행(奇行)으로 그는 여불위(呂不韋)의 눈에 들었고, 그것은 또 당시 그 여불위(呂不韋)는 정(政)의 어머니였던 태후(太后)와 오랜 시간동안 불륜관계를 지속해오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런데 또 그 태후(太后)가 아주 음란한 여자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즈음에 여불위(呂不韋)는 자신의 능력부족을 느끼고 있었던 참이었으며, 동시에 그 관계란 것도 잘못되면 아주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불위(呂不韋)는 그 노애(嫪毐)를 이용하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여불위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로 태후도 만족시켜주고, 자신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를 당시에는 남자라고는 내시(內侍-宦官)밖에는 출입할 수 없었던 후궁(後宮)으로 몰래 들여 넣었다. 그리고는 환관(宦官)처럼 변장을 시키고는 태후(太后)에게 소개를 시켰는데, 그러자 그 후, 여불위(呂不韋)의 생각대로 그는 태후(太后)의 총애를 듬뿍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에 2명의 아이까지 생산했고, 그 후로는 태후(太后)의 후원을 받아서 권세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신장후(長信侯)에 봉해지기까지도 했다. 그러자 또 그 후에 그는 아주 많은 식객(食客)을 모았으며, 그것으로 여불위(呂不韋) 다음의 권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결국에는 태후(太后)와의 밀통(密通)이 발각되었고, 그러자 그는 옥새(玉璽)를 훔쳐서 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군사를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때 이미 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정(政)에 의해서 그 반란군은 진압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도망을 갔지만, 하지만 또 포로로 잡혀서 차열(車裂)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의 일족과 함께 태후(太后)가 생산했던 아이들도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 사건에 연좌(連座)해서 당시 재상이었던 여불위(呂不韋)도 세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는 정(政)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러자 이사(李斯)도 그에 위기감을 느끼고는 정(政)에게 편지를 써서 그 추방령을 철회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가 썼다던 그 <간축객서(諫逐客書)>는 실로 논리 정연했던 명문(名文)이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나중에 문선(文選)에도 수록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것을 읽었던 정(政)은 그 명문(名文)에 설득당해서 추방령을 철회했고, 당시의 실력자였던 여불위가 자살한 후에는 정(政)의 신임을 계속해서 쌓아갔다.

 그런데 또 그 얼마 후에 그런 이사(李斯)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동문수학했던 한비(韓非子는 너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소개를 생략함)였다. 그것은 또 정(政)이 벌써 전에 한비(韓非)가 썼던 그 한비자(韓非子)를 읽고는 <그 작자(作者)와 친하게 지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고 말을 했을 정도로 한비(韓非)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이사(李斯)는 한비(韓非)가 정(政)을 만나게 되면 자신의 지위가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비(韓非)를 모함했다. 그리고는 한비(韓非)를 투옥(投獄)시켰으며, 그러자 또 그는 옥중에 있던 한비(韓非)를 찾아가서 독(毒)을 주어서 죽게 했다.

 그 후, 더 이상의 경쟁자가 없어진 이사(李斯)는 진(秦)의 부국강병정책을 적극적으로 헌책(獻策)해서 시행하게 했으며, 그 결과로 기원전 221년에 마침내 진(秦)은 중국을 통일했고, 그러자 정(政)은 시황제(始皇帝)가 되었다.

 그 후, 시황제(始皇帝)는 승상(丞相)이었던 왕관(王綰)과 어사대부(御史大夫-副丞相 格)였던 풍겁(馮劫) 등의 중신들로부터, 과거 주(周)의 제도였던 봉건(封建)제를 실시해서 시황제(始皇帝)의 자식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해서 보낼 것을 진언(進言)받았다. 그러자 이사(李斯)는 그것에 맹(猛) 반대를 하면서, 과거 주(周)가 어떻게 해서 망하게 되었던가에 대해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그래서 또 그 해결책으로 그보다 한층 더 강한 군현제(郡縣制)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또한, 정치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비판만 일삼는 학자들의 책들을 모두 모아서 태워버릴 것을 진언(進言)했다.

 하지만 그 후였던 기원전 210년 가을 7월에 시황제(始皇帝)가 순행(巡幸) 도중에 죽었고, 그러자 또 이사(李斯)는 조고(趙高)와 함께 위소(僞詔-始皇帝의 거짓 명령장)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또 그것으로 호해(胡亥)를 즉위시켜서 2세 황제로 만들었으며, 원래의 태자였던 부소(扶蘇)를 자결시켰다.

 참고: 일설에는 이사(李斯)가 조고(趙高)를 협박했고, 그러자 조고(趙高)는 부득이 호해(胡亥)의 즉위를 인정했다고 하며, 위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소개할 예정임.

 아무튼 그 후, 진(秦)에서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을 처음으로 해서 반란이 계속해서 발생했으며, 그것으로 중국 본토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호해(胡亥)는 궁정 깊은 곳에서 노느라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또 조고(趙高)가 책략을 써서 그런 호해(胡亥)를 각성시켰으며, 그 때문에 이사(李斯)는 호해(胡亥)와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08년에 이사(李斯)는 우(右)승상이었던 곽거질(霍去疾)과 장군이었던 풍겁(馮劫)과 함께 아방궁(阿房宮) 조영(造營) 등의 압박(壓迫)정책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호해(胡亥)에게 진언(進言)했지만 거절당했고, 그러자 곽거질(霍去疾)과 풍겁(馮劫)은 자살했다. 그러자 이사(李斯)는 제삼(第三) 간언(諫言)을 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또 조고(趙高)의 참언(讒言)을 받아서 포박 당했으며, 이어서 그 조고(趙高)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에도 굴하지 않자 조고(趙高)는 더욱 고문의 강도를 높여갔고, 그러자 또 이사(李斯)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고(趙高)가 날조했던 죄를 시인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또 일찍이 초(楚)의 항량(項梁)에 패했던 이사(李斯)의 장남으로, 삼천군(三川郡)의 태수였던 이유(李由)가 생전(生前)에 초(楚)와 내통했다는 것을 시인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결국 저자거리에서 요참(腰斬-허리를 잘라서 죽이는 벌)형에 처해졌으며, 그러자 또 그때, 이사(李斯)는 함께 끌려왔던 자신의 차남(次男-이름은 不明)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전에 너와 함께 고향 상채(上蔡)로 붉은 사냥개를 데리고 가서 토끼사냥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일이 없겠구나...>

 아무튼 그 후, 이사(李斯)의 일족(一族)은 모두 처형되었는데, 그런데 그의 아들(그러나 누구인지,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음)은 시황제(始皇帝)의 황녀(皇女-공주)에게 장가를 갔다고 하고, 그 딸은 또 시황제(始皇帝)의 공자(公子-아들)에게 시집을 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그 이사(李斯)는 법가이론의 완성자였던 한비(韓非)에 대해서 법가실무의 완성자로 알려졌지만, 그러나 그의 생전의 업(業) 즉, 한비(韓非)를 죽였던 일과 위소(僞詔)로 부소(扶蘇)를 죽였던 일, 그리고 또 유자(儒者)들을 탄압해서 분서갱유(焚書坑儒)했던 일 등으로 해서 후세의 평판은 아주 나빴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진(秦) 통일에서 최고의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며, 그래서 또 사기(史記)에서는 <이사(李斯)가 길을 잘못 가지만 않았더라면, 그 공적은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에 비견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사마천(司馬遷)은 술회(述懷)했던 바 있었다.

----------------------------------------------------------------------------------------------------

 ※
여불위(呂不韋-?부터 기원전 235년)는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정치가였고, 시황제(始皇帝)의 부(父)였던 장양왕(莊襄王)을 왕위에 올리는 일에 진력했으며, 그 공으로 후에 권세를 누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일설(一說)에는 그가 시황제(始皇帝)의 진짜 친부(親父)였다는 설도 있는데, 아무튼 그는 복양(濮陽-河南省) 출신으로 상인(商人)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젊어서부터 각국(各國)을 전전하면서 상술(商術)을 익혔고, 그것으로 부(富)를 축적했다.

 그런데 어느 때, 그는 조(趙)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고, 그래서 아주 초라하게 보였던 진(秦)의 공자였던 이인(異人-나중에 子楚로 改稱했으며, 그 후에 秦의 莊襄王이 됨)을 보게 되었는데, 그러자 그는 첫눈에 <此奇貨可居!>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뜻은 <대단히 진기(珍奇)한 보배다! 미리 사두(확보해두)지 않을 수가 없겠군!>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 후에 양책(陽翟)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그 일을 그의 아버지와 의논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잘 되지 않았던지 그런 일은 몇 번이나 있었고, 그 결과 여(呂)부자(父子)는 먼 장래를 보고 이인(異人)에게 투자를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다시 조(趙)로 갔고, 그곳에서 이인(異人)과 첫 대면을 했다.

 그런데 당시, 그 이인(異人)은 진(秦) 소양왕(昭襄王)의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나중의 孝文王)의 서자(庶子)였는데, 그런데 또 그 안국군(安國君)은 자식을 20명 이상이나 두고 있었으며, 거기에다 또 이인(異人)의 어머니 하(夏)씨(氏)는 당시 그 안국군(安國君)의 총애마저 잃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이인(異人)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또 당시, 진(秦)은 인접했던 조(趙)와 항상 대립하고 있었으며, 그 관계는 날로 악화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랬으므로 또, 그 이인(異人)이 조(趙)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는 것은 진(秦)의 입장에서는 그가 죽어도 아무 것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의미였고, 그래서 또 이인(異人)은 그곳에서 감시를 당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대우란 것도 형편없었으며, 그래서 또 생활비조차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여불위(呂不韋)는 그런 이인(異人)에게 접근을 해서 왕으로 즉위시킬 꿈을 꾸었으며, 그 공적으로 자신은 나중에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에는 또 그 나름대로의 승산(勝算)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 후, 그는 이인(異人)에게 돈(金)을 주어서 사교계로 진출할 것을 지도했고, 그런 다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게 했다. 그런 다음 자신은 진(秦)으로 들어가서 안국군(安國君)의 총희(寵姬)였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을 만나서 이인(異人)이 <아주 현명한 사람이며, 화양부인(華陽夫人)을 마치 친어머니처럼 생각해서 매일 그리워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라고 말을 하면서 꼬드겼다. 거기다 그 부인의 언니까지 만나서 자신이 가지고 갔던 재보(財寶)의 일부를 뇌물로 바치고는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그리고는 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 말을 잘 해서 이인(異人)을 화양부인(華陽夫人)의 양자로 삼고, 그런 다음에는 안국군(安國君)의 세자(世子)로 만들면 좋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런데 또 그때, 사실 그 화양부인(華陽夫人)도 비록 안국군(安國君)의 총애는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자기가 낳은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또 그대로 세월만 보내다가는 안국군(安國君)의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그렇게 되면 또 자신의 지위도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던 참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불위(呂不韋)의 계산은 그녀들과도 딱 맞아떨어져서 그녀들이 나서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안국군(安國君)도 그녀의 뜻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인(異人)은 하루아침에 신분이 상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급히 다시 조(趙)로 돌아가서 그 낭보(朗報)를 이인(異人)에게 전했다. 그러자 이인(異人)은 여불위(呂不韋)를 후견자로 결정했고, 그때부터 또 양모(養母)가 되었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이 초(楚)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신의 이름도 자초(子楚)로 바꿨다.

 그런데 또 그때, 여불위(呂不韋)는 어떤 기생 여자를 한명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자초(子楚)가 그 여자를 탐냈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고민이 되었지만, 그러나 자신이 그것을 거부하면 자초(子楚)와의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동안 투자했던 것이 아까워서라도 그녀를 자초(子楚)에게 주었다. 그런데 또 그때, 그 여자는 이미 여불위(呂不韋)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던 상태였다. 하지만 여불위(呂不韋)는 그런 사실을 숨기고 그 여자를 자초(子楚)에게 보냈으며, 그러자 그 아이는 나중에 자초(子楚)의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아이가 바로 나중의 시황제(始皇帝)가 되는 정(政)이라는 설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 진위(眞僞)에 관해서는 현재 알 길이 없지만, 하지만 또 그 당시에는 그 소문이 넓게 펴졌다고 하며, 그래서 사기(史記)에서도 그것을 사실(事實)로 기록했다.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252년에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이 고령(高齡)에다 재위 55년에 사망했고, 그러자 차남 효문왕(孝文王)이 즉위했다. 그러자 자초(子楚)도 그때서야 진(秦)으로 돌아가서 태자가 되었으며, 하지만 또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효문왕(孝文王)마저 50대에 사망하자, 자초(子楚)는 자동적으로 즉위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장양왕(莊襄王)이었다. 그러자 또 여불위(呂不韋)도 승상이 되었으며, 문신후(文信侯)로 칭해져서 낙양(洛陽)의 10만 호(戶)를 영지로 내려 받았다. 그리하여 또 그것으로 그의 계산은 맞아 떨어졌으며, 그 후 진(秦)의 재상으로 무한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46년에 장양왕(莊襄王)마저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그러자 태자 정(政)이 왕이 되었다. 그러자 또 여불위(呂不韋)는 그 정(政)으로부터 중부(仲父-둘째아버지 또는 삼촌 격)라는 칭호를 내려 받았으며, 그 후로 그의 권세는 더욱더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기에는 맹상군(孟嘗君)과 신능군(信陵君) 등이 많은 식객들을 받아들여서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도 그에 대항해서 식객 3000명을 받아들였으며, 그 시중을 들기 위해서 거느리고 있던 하인, 하녀들도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객 중에는 이사(李斯)도 있었는데,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정(政)에게 추거했고, 거기다 객들의 지식을 한곳에 모았던 여씨춘추(呂氏春秋)란 책도 출간했다. 그리고 또 그 책은 당시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책들과는 달랐던 것으로, 말하자면 사상적으로는 중립적인 일종의 백과사전 같은 것이었다.

 그러자 또 여불위(呂不韋)는 그 책에 아주 만족을 해서, 시장 한가운데에다 그것을 펼쳐놓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 책에서 한 자(一字)라도 빼거나 더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천금(千金)을 주겠다!(以呂氏春秋 布咸陽市門 縣千金其上 延諸侯游士賓客 有能增損一字者 予千金.『史記』巻八五 呂不韋列傳에서)> 그리고 그것은 후에 일자천금(一字千金)이란 말의 유래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당시, 그 여불위(呂不韋)는 그렇게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세를 휘두르면서도 자신의 원래 애인이었던 태후와 밀통(密通)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또 그 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미 노애(嫪毐)에서 소개가 되었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어쨌든 그 노애(嫪毐)로 인해서 여불위(呂不韋) 역시도 연좌(連座)되어서 죽을 처지에 놓였지만, 그러나 그 간의 공을 참작해서 승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게만 했고, 그 후에는 칩거(蟄居)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후로도 여불위(呂不韋)는 식객 등, 객(客)들과의 교류는 끊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또 제국(諸國)에서는 그의 명성이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정(政)은 그가 식객이나 제국(諸國)들과 함께 모반(謀反)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여불위(呂不韋)를 힐문(詰問)하는 글을 써서 보내고는, 촉(蜀)의 땅으로 유배(流配)를 보내버렸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 다음해에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