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7-2)
|
※ 왕전(王翦-생몰불상)은,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무장이었고, 빈양동향(頻陽東郷) 출신의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그리고 왕분(王賁)의 아버지였고, 왕이(王離)의 조부(祖父), 진(秦)의 왕 정(政)을 섬겼으며, 초(楚)와 월(越)을 멸하는 등, 진(秦)이 천하통일을 하는데 공헌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원전 236년, 정(政) 11년에 환기(桓齮), 양단화(楊端和) 등과 함께 위(魏)의 업(鄴-현재의 河南省)을 공격해서 9개의 성을 빼앗았다. 그 후, 왕전(王翦)은 혼자서 알여(閼與) 등을 공격한 후, 모든 병사들을 모아서 일군(一軍)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군대의 장군이 된 후, 18일 안에 군중(軍中)에서 두식(斗食-콩밥을 먹을 정도의 지위 또는 능력자) 이하의 공로(功勞)도 올리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다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그것으로 군(軍)을 거의 1/5이나 감축해서 정예군으로 편성했다. 그런 다음, 그때까지도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었던 업(鄴)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229년, 왕전(王翦)은 상군(上郡-魏의 文侯가 현재의 陝西省에 설치했던 郡으로, 기원전 328년에 魏는 秦에 그 上郡 15縣을 헌상했고, 그 후로 秦의 영토가 되었던 곳)지방 군(軍)의 대장 자격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조(趙)로 쳐들어갔으며, 그 결과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즉, 정형(井陘)을 함락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28년, 정(政)19년에는 강외(羌瘣)와 조(趙)를 평정하고 그곳의 영토를 모조리 빼앗았으며, 유목왕(幽繆王)을 포획했다.
참고 1: 유목왕(幽繆王-생몰불명. 재위는 기원전 236년부터 기원전 228년)은 중국 전국시대 조(趙)의 제10대 군주였고, 왕으로서는 제4대였다.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은 천(遷), 도양왕(悼襄王)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즉위하고 2년째 되던 해에 진(秦)이 쳐들어왔는데, 그 결과 평양(平陽-현재의 河北省 臨漳県 西部)과 무성(武城-현재의 山東省 武城県 西部)을 빼앗겼으며, 무수(武遂)에서는 조(趙)의 장군 호첩(扈輒)이 진군(秦軍)에 패해서 10만이란 수의 수급(首級)이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유목왕(幽繆王)은 이목(李牧)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해서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자 이목(李牧)은 진군(秦軍)을 의안宜安(현재의 河北省 石家荘市 南東部)에서 격퇴했고, 그러자 또 진(秦)의 장수였던 환기(桓齮)는 패주했다. 그러자 또 그 공으로 유목왕(幽繆王)은 이목(李牧)을 무안군(武安君)에 봉했다. 그 후, 이목(李牧)은 자주 진군(秦軍)을 격파했으며, 그러자 진(秦)에서는 그 이목(李牧)을 제거하기 위해서 조(趙)의 신하였던 곽개(郭開)란 자에게 아주 많은 뇌물을 보냈고, 그리고는 이목(李牧)이 모반을 기도하고 있다는 참언을 유목왕(幽繆王)에게 올리게 했다. 그러자 그 후, 유목왕(幽繆王)은 그 참언을 그대로 믿고 이목(李牧)을 죽였는데, 그러자 또 기원전 228년에 진(秦)은 장군 왕전(王翦)을 보내서 조군(趙軍)을 격파했으며, 이어서 수도 한단(邯鄲)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유목왕(幽繆王)은 진군(秦軍)에 투항했고, 이어서 방능(房陵)이란 곳으로 귀양을 갔다. 그리하여 결국 조(趙)는 멸해졌으나, 그러나 또 그때, 조(趙)의 왕자였던 가(嘉)가 대(代-현재의 河北省 蔚県)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스스로 자립(自立)하고는 왕이라고 자칭했다(代王嘉). 거기다 병(兵)을 이끌고 연(燕)을 치기 위해서 중산(中山-현재의 山西省 北部)으로 가서 주둔했다.
참고 2: 대왕 가(代王嘉-생몰불상. 재위: 기원전 227년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전국시대 조(趙) 최후의 군주(11대)였고, 왕으로서는 제5대였다.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가(嘉), 도양왕(悼襄王)의 아들이었고, 유목왕(幽繆王)의 동생이었다. 그는 도양왕(悼襄王)의 적출(嫡出) 장자(長子)였지만, 그러나 도양왕(悼襄王)은 자신이 총애하고 있었던 창후(倡后)가 생산했던 왕자 천(遷)을 태자로 삼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왕이 되질 못했다. 그리고 그 후, 조(趙)는 진군(秦軍)의 공격을 받아서 결국 멸해졌고, 유목왕(幽繆王)은 포로가 된 후 방능(房陵)이란 곳으로 귀양을 떠났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일족(一族)들을 데리고 대(代)로 도망을 갔으며, 그곳에서 대왕(代王)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연(燕)의 왕 희(喜)와 손을 잡고 진(秦)에 저항했지만, 그러나 연(燕)의 태자 단(丹)이 인솔했던 연(燕)대(代) 연합군은 역수(易水-中國 河北省에 있는 강 이름)에서 진군(秦軍)에 패했고, 그 때문에 연왕(燕王) 부자(父子)는 요동(遼東)으로 도망을 갔다. 그러자 가(嘉)는 연왕(燕王) 희(喜)에게 단(丹)을 죽이고 진(秦)에게 화의를 청해보자고 했고, 그러자 희(喜)는 단(丹)을 죽였다. 그리고는 그 머리를 진왕(秦王) 정(政)에게 헌상했는데, 그러자 그 뜻을 정(政)이 받아들여서 일단 공격은 중지되었다. 하지만 그 화목은 얼마가지 못했고, 그리하여 기원전 223년에 왕전(王翦)의 아들이었던 왕분(王賁)이 이끌었던 진군(秦軍)은 요동(遼東)을 공격했으며, 그 결과로 희(喜)는 포로가 되었으며, 그것으로 연(燕)은 멸망했다. 그러자 또 왕분(王賁)은 이어서 대(代)마저 공격했고, 그 결과로 가(嘉)도 포로로 잡혔으며, 그리하여 조(趙)의 왕통(王統)은 영원히 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227년, 정(政) 20년에 왕전(王翦)은 신승(辛勝)과 함께 연(燕)을 공격해서 연(燕)대(代)연합군을 역수(易水)에서 격파했다. 그리고 기원전 226년에는 대(大)원군(援軍)을 받아서 연(燕)의 공자(公子) 단(丹)이 이끌었던 군대를 격파하고는 연(燕)의 수도 계(薊)를 평정했다.
참고 3: 공자(公子) 단(丹-?부터 기원전 226년)은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 연(燕)의 왕족이었고, 성(姓)은 길(姞-竹書紀年에 의한 것이며, 史記에서는 周 왕조와 같은 성인 姬라고 함), 휘(諱)는 단(丹), 연왕(燕王) 희(喜)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진(秦)이 점점 더 강국이 되어가자 그에 위기를 느끼고는 당시 중신(重臣)이었던 국무(鞠武)란 사람에게 그에 대해서 의견을 구했는데, 그러자 국무(鞠武)가 이렇게 말을 했다. <진(秦)은 현재 북쪽으로는 감천(甘泉)과 곡구(谷口)란 천연요새를 가지고 있고, 남쪽으로는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에 연(沿)한 비옥한 대지(大地)를 가진 것으로 삼진(三晋-趙・魏・韓)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또 비옥한 파(巴)와 한중(漢中)을 독점하고 있으며, 그곳은 또 오른쪽으로는 농(隴)과 촉(蜀)의 산맥이, 그리고 왼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과 효산(崤山)에 둘려져서 그곳을 보호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지형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그래서 또 그곳에는 인구도 많고, 병사(兵士)들도 용맹하며, 무기(武器)방구(防具) 같은 것들도 충분하게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진(秦)과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그러나 단(丹)은 그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그런데 그 즈음에, 진(秦)에서는 소수정예(少數精銳)화로 군(軍)을 개편했는데, 그러자 또 그 때문에 해고된 병사들이 늘어났다. 그러자 또 그것을 보고 안타깝게 느꼈던 장군 번어기(樊於期)는 그때부터 그 자신도 정(政)으로부터 소외를 당하자 연(燕)으로 망명을 해왔다. 그러자 단(丹)은 그를 숨겨주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국무(鞠武)가 이렇게 말을 했다. <지금 번어기(樊於期)를 보호해주는 것은 굶주린 호랑이(秦) 눈 앞에 고기를 놓아두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 번어기(樊於期)를 흉노(匈奴) 쪽으로 추방을 하고, 삼진(三晋)과 함께 제(齊), 초(楚), 흉노(匈奴)까지 동맹을 맺어서 진(秦)에 대항해야한다!>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단(丹)은 그때, 정(政)의 비정한 정책에 의해서 목숨까지 위협 당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몰살당하고는 정처도 없이 진(秦)의 추격을 받으면서 연(燕)으로까지 도피를 해왔던 그 번어기(樊於期)를 도저히 추방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단(丹)은 국무(鞠武)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러자 또 국무(鞠武)는 전광(田光)이란 사람을 단(丹)에게 소개시켜주면서 서로 이야기를 한번 나눠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남의 자리를 가졌는데, 그러자 그때, 전광(田光)은 형가(荊軻)라는 사람을 추천했다. 그리고 또 그 뒤의 이야기는 본문(7,8)에 자세히 소개가 되어 있으므로 참고바라며,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226년에 정(政)은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단(丹)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연(燕)을 침공했고, 그러자 또 연왕(燕王) 희(喜) 등은 일시 요동(遼東)으로 도망을 갔지만, 그 후의 이야기는 앞에서 소개한 그대로이다.
아무튼 그 후에 이신(李信)이 요동(遼東)으로 가서 단(丹)의 머리를 가져왔지만, 연왕(燕王) 희(喜)는 그곳에서 왕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해, 왕전(王翦)은 노병(老病)을 핑계로 장군의 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기원전 224년, 정(政) 23년에 정(政)은 다시 왕전(王翦)을 불렀으며, 그러자 그는 다시 출사(出師)해서 초(楚)를 공격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남(河南)의 진(陳)에서부터 그 남쪽의 평여(平輿-河南省의 駐馬店市)까지 점령을 했으며, 거기다 초(楚)의 왕 부추(負芻)까지 포획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23년에는 몽무(蒙武-蒙恬의 父)와 함께 초(楚)를 다시 공략했으며, 그 결과로 그때 초왕(楚王)이 되어있었던 창평군(昌平君)이 전사했으며, 항연(項燕)도 자살했다.
참고 4: 이신(李信-생몰불명)은 중국 전국시대부터 진(秦)대에 걸쳐서 활약했던 진(秦)의 무장이었고, 기원전 226년에 왕전(王翦)과 왕분(王賁)이 전년(前年) 연(燕)의 태자 단(丹)이 주도했던 형가(荊軻)의 정(政) 살해 미수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연(燕)을 공격했을 때, 그는 약 천 명 정도의 군사를 이끌고 연군(燕軍)을 추격했으며, 그 결과 단(丹)의 군대를 토벌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25년에 정(政)이 초(楚)를 정복하려고 했을 때, 그는 정(政)의 물음에 <20만의 군사면 충분하다>고 답을 했다. 하지만 그때, 왕전(王翦)은 <60만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러자 정(政)은 <왕전(王翦)이 이제는 늙었다>고 생각해서 이신(李信)에게 20만의 병사를 주어서 초(楚)를 치게 했다. 그러자 이신(李信)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서 초(楚)로 쳐들어갔는데, 그 결과 그 자신은 평여(平輿)에서, 그리고 몽염(蒙恬)은 침구(寢丘)에서 각각 초(楚)군에 대승했다. 그 후, 이신(李信)과 몽염(蒙恬)은 영(郢) 주변까지 공격해서 다시 초군(楚軍)을 물리쳤지만, 그러나 성부(城父)란 곳에서 이신(李信)과 몽염(蒙恬)이 합류했을 때, 그들은 3일 밤낮으로 추격을 해왔던 항연(項燕) 군에 기습을 당해서 두 곳 성(城)과 7명의 장수를 잃는 대패를 맛봐야만 했다. 그러자 정(政)은 장수를 교체해서 왕전(王翦)을 그곳으로 다시 투입시켰다. 그러자 왕전(王翦)은 그 다음해 몽무(蒙武)와 함께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楚)를 다시 쳤으며, 그 결과 초왕(楚王) 부추(負芻)를 포획하고 초(楚)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이신(李信)은 왕분(王賁)과 몽염(蒙恬)과 함께 제(齊)를 공격했으며, 그 결과 제(齊)는 멸망했다. 그리고 이신(李信)이 그 대(對)초(楚)전(戰)에서 대패했음에도 숙청당하지 않았고, 거기다 자손들까지도 살아 남았던 것은, 정(政)이 그만큼 그를 믿고 있었던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그래서 또 그의 후손에 대해서도 잠시 알아보면, 일단 증손(曾孫)에 전한(前漢)시대의 장군 이광(李廣)이 있었으며, 그 자손으로 이능(李陵)이 있었고, 그리고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에 서량(西涼)을 건국했던 이고(李暠)는 이광(李廣)의 자손으로 알려졌으며, 그 자손에 당(唐)의 시인 <이백(李白)>이 있었다.
참고 5: 몽염(蒙恬-?부터 기원전 210년)은 중국 진(秦)의 장군이었고, 몽오(蒙驁)의 손자, 몽무(蒙武)의 아들이었으며, 몽의(蒙毅)의 형이었다. 그리고 생전에 흉노 토벌 등의 공적을 세웠지만, 그러나 조고(趙高) 등의 음모에 말려들어서 부소(扶蘇)와 함께 자살했다. 그리고 몽(蒙)씨는 조부(祖父) 대에 제(齊)에서 진(秦)으로 이주해서 살게 되었으며, 몽염(蒙恬)은 또 당초에는 문관으로, 궁정에 들어가서 소송과 재판 등에 관여를 했었는데, 그런데 기원전 224년에 이신(李信)의 부장(副將)으로 초(楚) 토벌에 나섰고, 그 결과 침(寢丘-河南省)을 공격해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후에 항연(項燕)에게 대패했으며, 그 다음 기원전 221년에 가문의 도움으로 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제(齊)를 토벌하러 갔을 때는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으며, 그 결과 제(齊)는 멸해졌고, 그 공적으로 그는 내리(內吏-수도권의 長官)가 되었다. 그 후, 기원전 215년에는 흉노를 30만 대군으로 공격했으며, 오르도스지방을 빼앗고 흉노를 북쪽으로 내쫓았고, 그 경계의 진(陣)으로 장성(長城)의 직도(直道-직선으로 연결된 길)를 축조했다. 그러자 정(政)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그의 공적을 인정했고, 그 결과로 그의 동생이었던 몽의(蒙毅)도 받아들였으며, 그래서 또 몽염(蒙恬)은 외정(外政)에서, 몽의(蒙毅)는 내정(內政)에서 활약하면서 그 충성심과 공적을 정(政)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즈음에, 그 벌써 전에 정(政)에게 분서(焚書)를 중지해 달라는 말을 해서 원방(遠方)으로 쫓겨가 있었던 왕자 부소(扶蘇)가 몽염(蒙恬)의 진으로 옮겨왔다.(겉으로는 扶蘇가 政에게 내쳐진 후에 蒙恬의 居所로 보내진 형식을 취했지만, 그러나 그 속내는 蒙恬을 감시하라는 감시 역으로 보내졌던 것으로 생각됨) 그리고 기원전 210년, 드디어 시황제(始皇帝)가 순행 중에 사망했고, 그러자 호해(胡亥), 조고(趙高), 이사(李斯)가 공모(共謀)를 해서 호해(胡亥)를 왕위에 올렸으며, 이어서 조서(詔書)를 위조해서 부소(扶蘇)와 몽염(蒙恬)에게 자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몽염(蒙恬)은 그에 의심을 품고 그 진상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부소(扶蘇)는 저항 없이 자살했다. 그러자 또 몽염(蒙恬)은 더욱 저항했지만, 그러나 그도 결국에는 자살했다. 그리고 또 그 몽염(蒙恬) 사후에는 조고(趙高)에 의해서 몽의(蒙毅)와 함께 그 일족도 모두 멸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어 소개하면, 그는 생전에 동물들의 털을 모아서 만든 붓(筆)을 시황제에게 헌상했는데, 그래서 그것이 붓 사용의 시작이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또 1928년에 전국시대의 유적에서 필(筆)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현재에는 갑골문자에서도 필(筆)을 표현한 문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필(筆)의 사용 또는 발명은 아마도 은(殷)대까지는 올라갔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또 몽염(蒙恬)은 아마도 그것을 개량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고 있다.
참고 6: 항연(項燕-?부터 기원전 223년)은 전국시대 말기 초(楚)의 대장군이었고, 하상(下相-현재의 江蘇省 宿遷市 宿城区)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는 항우(項羽)와 항장(項莊)의 조부(祖父)였고, 항량(項梁)과 항백(項伯)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또 진(秦)의 무장 이신(李信)을 대파했지만, 그러나 또 나중에 초(楚)가 멸하면서 자살했다. 그리고 또 그 항(項)씨(氏)에 관해서 사기(史記)는, 항(項)씨는 대대로 초(楚)의 무장 집안이었으며, 항(項)이라는 읍(邑)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항(項)이라는 성(姓)의 선조(先祖)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기원전 225년에 진(秦)의 장군 이신(李信)이 쳐들어왔을 때, 그것을 대파해서 물리쳤으며, 기원전 224년에는 진(秦)의 장군 왕전(王翦)이 쳐들어와서 견수(堅守), 불출(不出)의 전술을 구사해서 항연(項燕)을 괴롭혔다. 그러자 항연(項燕)의 방비에 틈이 생겼고, 그러자 또 왕전(王翦)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습작전을 펼쳐서 항연(項燕)의 군대를 대파했다. 그러자 또 그 결과 초왕(楚王)이었던 부추(負芻)가 포로로 잡혔는데, 그러자 항연(項燕)은 회수(淮水) 이남(以南)으로 내려가서 초(楚)의 공자였던 창평군(昌平君)을 초왕(楚王)에 올리고는 반항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 다음해 왕전(王翦)이 다시 쳐들어왔고, 그러던 중에 창평군과 항연(項燕)은 사망했으며, 그것으로 초(楚)도 완전히 멸해졌다. <『史記』의 秦始皇本紀에 의함. 그러나 또『史記』의 楚世家에서는 項燕 死後에 負芻가 포로가 되었다고 함.>
그리고 기원전 222년, 정(政) 25년에 진(秦)은 대병(大兵)을 일으켜서 왕전(王翦)과 몽무(蒙武)에게 초(楚)의 강남(江南)을 평정시켰으며, 이어서 동(東)월(越)의 왕을 항복시켰던 동시에, 그곳에다 회계(會稽)군(郡)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진(秦)은 제(齊)를 멸망시켰고, 그것으로 천하통일의 업은 완수되었다. 그리고 그 후, 왕전(王翦)은 별 탈 없이 천수(天壽)를 누렸으며, 그 후에도 그의 자손들은 번창 했다고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