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유비(劉肥-?부터 기원전 189년)는, 전한(前漢)의 황족이었고, 제왕(齊王)이었다. 시호(諡號)는 도혜왕(悼惠王), 유방(劉邦)의 서장자(庶長子), 생모는 조(曹)씨(氏)였다. 기원전 201년, 초왕(楚王) 한신(韓信)이 모반의 죄를 짓고 멸하자, 그 영지는 한(漢)의 종실(宗室-劉氏一門)에 돌아갔다. 그리고 유비(劉肥)는 제왕(齊王)에 봉해졌으며, 역전(歷戰)의 장군이었던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을 재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196년,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劉邦)이 친정(親征)에 나섰다. 그러자 유비(劉肥)는 조참(曹參)을 부장(部將)으로 해서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종군했다. 기원전 195년, 유방(劉邦)이 사망하자 유영(劉盈)이 즉위해서 혜제(惠帝)가 되었고, 그러자 유비(劉肥)의 입장이 미묘(微妙)하게 되었다. 기원전 193년, 유비(劉肥)는 장안(長安)으로 불려가서 혜제(惠帝)와 여후(呂后)가 열었던 연석(宴席)에 참석했다. 그러자 혜제(惠帝)는 그에게 형 대접을 해주기 위해서 상석(上席)에 앉혔는데, 그러자 여후(呂后)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그에게 독을 넣은 술을 주었다. 하지만 앞서 밝혔던 대로 그것은 혜제(惠帝)의 기지(機智)로 해서 무사히 끝이 났고, 그러자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되었던 유비(劉肥)는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영지(領地) 중 성양군(城陽郡)을 여후(呂后)의 딸, 노원공주(魯元公主)에게 양도하고 싶다는 의견을 여후(呂后)와 혜제(惠帝)에게 올렸다. 그러자 여후(呂后)의 마음이 풀렸고, 그것으로 그는 무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후였던 기원전 189년에 그는 사망했으며, 그의 자식들<長子 哀王・劉襄과 次子 朱虚侯・劉章(城陽景王)>은 여치(呂雉) 사후(死後)에 여(呂)씨(氏) 일족(一族) 타도(打倒) 때, 아주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어서 계속될 기원전 154년에 일어났던 <오초칠국지난(吳楚七國之難)> 때, 모반(謀反)을 일으켰던 7명 중 4명이 그 유비(劉肥)의 자식들이었다.

 ---------------------------------------------------------------------------------------------

 소제홍(少帝弘)은, 전한(前漢)의 제4대 황제였고(그러나 歷代 황제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휘(諱)는 홍(弘)이지만, 원래는 산(山)이었고, 상산왕(常山王)으로 승격되었을 때, 의(義)로 개명했다. 그는 혜제(惠帝)와 후궁(後宮) 사이에서 태어났던 자식으로, 처음에는 양성후(襄城侯)에 봉해졌다. 그런데 그 후에 상산왕(常山王)이었던 유불의(劉不疑)가 사망하자 그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런데 또 그 후에 자신의 형이었던 소제공(少帝恭)이 여치(呂雉)에게 살해당하자 황제에 즉위했다. 그 후, 여후(呂后)가 사망하자 쿠데타가 발생했으며, 그러자 소제홍(少帝弘)도 감금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대왕(代王)이었던 유항(劉恒-文帝 후술)이 즉위하기 바로 직전에 그는 하후영(夏侯嬰)에 의해서 궁 밖으로 추방된 후, 소부(少府-九卿의 하나로 황실의 잡무 등을 처리했다)에 감금되었다. 하지만 유항(劉恒)이 즉위하기 위해서 장안(長安)으로 들어왔을 때, 같은 형제였던 상산왕(常山王) 유조(劉朝-軹侯), 회남왕(淮南王) 유무(劉武-壷関侯) 등과 함께 독살되었다. 그리고 또 그들은 원래 모두 여치(呂雉)가 비밀리에 궁으로 데려왔던 아이들이었다고 했으며, 그래서 혜제(惠帝)의 친자식들이 아니었다고 했는데, 그러나 그에 대한 진상(眞相)은 현재 불명(不明)이다.

 ------------------------------------------------------------------------------------------------


 소제공(少帝恭)은, 전한(前漢)의 제3대 황제였고(역시,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일반적으로 이름은 공(恭)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등에서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그 역시, 혜제(惠帝)와 후궁 사이에서 태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혜제(惠帝)가 죽고 난 후, 장황후(張皇后-노원공주의 딸)에게서 태어났던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여치(呂雉)의 지지를 받아서 즉위했다. 그런데 또 그때, 그는 세상에 장황후(張皇后)의 자식으로 공표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생모였던 후궁은 살해되었다. 그래서 그 후에 그가 장성했을 때, 그런 사실을 알고는 여치(呂雉)를 몹시 원망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여치(呂雉)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러자 또 여치(呂雉)는 후환을 두려워했던 나머지 그를 유폐(幽閉)시켰으며, 중병(重病)을 앓고 있다면서 폐위시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살해했다.

 -----------------------------------------------------------------------------------------------

 여산(呂産-?부터 기원전 180년)은, 전한(前漢) 때의 인물이었고, 여치(呂雉)의 일족으로, 여치(呂雉) 시대에 여왕(呂王), 상국(相國)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치(呂雉)의 오빠였던 여택(呂澤)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여택(呂澤)은 또, 유방(劉邦)과 함께 종군했으며, 그러다가 기원전 205년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패했을 때, 유방(劉邦)은 그 여택(呂澤)의 진영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201년에, 여택(呂澤)은 주여후(周呂侯)에 봉해졌으며, 그 3년 후에 사망했다. 그러자 혜제(惠帝)는 그에게 영무후(令武侯)란 시(諡)를 내렸으며, 그 후는 여산(呂産)의 형이었던 여대(呂臺)가 이었다. 그 후, 혜제(惠帝)가 죽자(기원전 188년) 여치(呂雉)는 불안해졌다. 그런데 그때, 진평(陳平) 등이 여대(呂臺), 여산(呂産), 여록(呂祿) 등에게 남북(南北)군(軍)의 군권을 가지게 하라고 여치(呂雉)에게 조언했고, 그러자 여치(呂雉)는 불안에서 벗어났다. 기원전 187년, 여후(呂后) 원년에 여산(呂産)은 문후(汶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해, 여후(呂后)는 여(呂)씨를 왕으로 만들 것을 생각했고, 그러자 먼저 여산(呂産)의 아버지 여택(呂澤)을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존(追尊)한 후, 대신들에게 여대(呂臺)를 왕으로 봉하게 하라는 진언을 하게 만들어서, 그 여대(呂臺)를 여왕(呂王)에 봉했다. 여후(呂后) 6년, 기원전 182년, 여왕(呂王) 여대(呂臺)를 이었던 여가(呂嘉)가 무슨 일로 폐위되자, 그 자리를 여산(呂産)이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해, 유방(劉邦)의 아들이었던 양왕(梁王) 유회(劉恢)를 조왕(趙王)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 자리(梁王)를 여산(呂産)에게 주었다. 그리고 또, 여산(呂産)의 딸을 유회(劉恢)에게 시집보냈다. 하지만 여산(呂産)은 양왕(梁王)이 되고나서도 봉국(封國)으로 가지 않고 장안(長安)에 있으면서, 당시의 황제였던 소제홍(少帝弘)의 스승을 맡았다. 그리고 그 후에 여후(呂后)가 죽자 그는 상국(相國)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제왕(齊王)이었던 유양(劉養)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여산(呂産)은 관영(灌嬰)에게 그것을 진압하라고 시켰는데, 그러나 관영(灌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진평(陳平) 등의 꾐에 빠졌던 여록(呂祿)이 군권을 반납하고 봉국(封國)으로 돌아가서 대신들과 제후들의 의심에서 벗어나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이미 때가 늦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산(呂産)을 급히 궁전으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여산(呂産)이 궁전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되었던 조참(曹參)의 아들 조줄(曹窋)이 그 사실을 주발(周勃)에게 전했고, 이어서 여록(呂祿)은 북군(北軍)의 지휘권을 주발(周勃)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또 그때, 여산(呂産)은 궁까지 달려왔지만, 그러나 위위(衛尉-九卿의 하나로, 宮門을 수위하던 병사들을 관할했음)에게 제지당해서 궁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그때, 유장(劉章-朱虚侯)이 약 천 명정도의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여산(呂産)의 뒤를 쫓았다. 그러자 여산(呂産)은 도망을 갔는데, 그러나 결국 낭중령부(郎中令府)의 변소에서 살해되었다. 그러자 여(呂)씨들은 한꺼번에 무너졌으며, 그 후에 유항(劉恒)이 즉위했다.

 ----------------------------------------------------------------------------------------------

 여록(呂祿-?부터 기원전 180년)은, 전한(前漢) 때의 인물로, 여치(呂雉)의 일족이었으며, 조왕(趙王), 상장군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치(呂雉)의 오빠였던 여석지(呂釋之)의 아들이었고, 그 여석지(呂釋之)는 또 유방(劉邦)과 함께 종군했다. 그리고 그 후에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풍(豊)으로 돌아가서 유태공(劉太公)을 모시라는 명을 받았다. 그 후, 여석지(呂釋之)는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지만, 그러나 그 9년 후에 사망했다. 그러자 그에게 강후(康侯)라는 시(諡)가 내려졌으며, 건성후는 그의 자식 여칙(呂則-呂祿의 형)이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 후에 여칙(呂則)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뒤는 여칙(呂則)의 동생이었던 여종(呂種)이 이어받았다. 그리고 여록(呂祿)은 자신의 딸을 제왕(齊王)이었던 유양(劉養)의 동생,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에게 시집보냈다. 그 후, 기원전 187년, 여후(呂后) 원년에 여록(呂祿)은 호릉후(胡陵侯)에 봉해졌고, 기원전 181년에는 여후(呂后)가 진평(陳平) 등의 청원을 받아서 조왕(趙王)이 되었으며, 여석지(呂釋之)는 조소왕(趙昭王)으로 추존(追尊)되었다. 그 후, 기원전 180년에 여후(呂后)의 병이 깊어지자 여록(呂祿)은 상장군이 되었고, 북군(北軍)을 장악했다. 그리고 여후(呂后)가 죽자 그는 자신의 딸을 소제홍(少帝弘)에게 시집보냈으며, 그 후에 유양(劉養)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평(陳平)의 명령을 받았던 자신의 친구(酈奇)로부터 <
군권을 반납하고 봉국(封國)으로 돌아가서 대신들과 제후들의 의심을 풀라>는 설득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제(齊)의 낭중령(郎中令-九卿의 하나로, 궁전의 掖門 수위를 담당했다)이었던 가수(賈壽)가 반대를 했고, 그 뒤의 이야기는 여산(呂産)의 내용과 같으며, 여록(呂祿)도 그때 살해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유영(劉盈=惠帝)은, 전한(前漢)의 제2대 황제였고, 생년은 기원전 210년과 기원전 213년 2가지의 설이 있으며, 몰년(沒年)은 기원전 188년, 재위기간은 기원전 195년부터 기원전 188년까지였다. 그리고 유방(劉邦)의 아들이었으며, 여치(呂雉)의 아들, 노원공주(魯元公主)의 동생이었다. 그리고 앞의 이야기는 이미 소개되었거나, 자료가 없으므로 생략하며, 그 후에 유방(乳房)이 황제에 즉위하자 그는 황태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과 달리 그는 온화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항상 유방(劉邦)의 노여움을 샀다. 그래서 유방(劉邦)은 척(戚)씨(氏)의 아들이었던 유여의(劉如意)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는데, 그러자 여치(呂雉)가 자신의 일족들과 장량(張良) 등의 도움을 받아서 그의 자리를 확고히 해주었다. 그 후, 유방(劉邦)이 죽자 그는 황제에 즉위했지만, 그러나 정치는 여치(呂雉)의 몫이었다. 그러자 여치(呂雉)는 혜제(惠帝)의 유력(有力)한 정적(政敵)이었던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와 그의 생모 척(戚)씨 등을 살해했으며, 그러자 또 그 여치(呂雉)의 잔학했던 만행에 충격을 받았던 혜제(惠帝)는 그때부터 정치를 방기(放棄)하기 시작했고, 주색(酒色)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23세(또는 26세라는 설도 있음)에 사망했다. 아무튼 그는 그렇게 온화하고 나약한 성격의 인물이었지만, 그러나 많은 중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유방(劉邦)이 자주 친정(親征)을 나갔을 때도 그는 그 자리를 잘 지켜냈던 면도 있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여치(呂雉)가 유여의(劉如意)를 죽이려고 기도했을 때, 그는 스스로 그 유여의(劉如意)와 함께 침식(寢食)을 하면서 유여의(劉如意)를 지켜내려고 노력했던 바 있었으며, 그리고 또 그에 의해서 상석(上席)을 차지했던 서장자(庶長子) 유비(劉肥)에게 여치(呂雉)가 독배(毒杯)를 내렸을 때도 그는 그 잔을 자신이 마시겠다고 했던 등(그러자 呂雉가 당황해서 그 잔을 엎질렀고, 그래서 劉肥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약 또는 좋은 의미의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사기(史記)는 기록했다. 그리고 또 한서(漢書-恵帝紀)에서는 시황제(始皇帝) 시대부터 계속해서 내려왔던 분서(焚書)를 중단시켰던 것은 유방(劉邦)이 아니라 바로 그였다고 기록했다.

 -----------------------------------------------------------------------------------------------

 척(戚)씨(氏) 또는 척부인(戚夫人-?부터 기원전 194년)은, 진(秦)말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인물로, 유방(劉邦)의 측실이었으며, 유여의(劉如意)의 생모였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의(懿)였다고 하며, 상체를 뒤로 크게 젖히는 초무(楚舞-초나라의 춤)를 잘 추었고, 유방(劉邦)이 원정 중이었을 때는 유방(劉邦)과 함께 장기(將棋-將棊)도 두었다고 한다. 그녀는 기원전 208년경 초한전쟁 중에 유방(劉邦)을 만났고, 그 후에 총애를 받아서 유여의(劉如意)를 생산했다. 그러자 그 후에 유여의(劉如意)는 대왕(代王), 이어서 조왕(趙王)에 봉해졌고, 황태자가 유력시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또 그녀가 유방(劉邦) 친정(親征) 시에 자주 그런 뜻을 유방(劉邦)에게 간청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마음이 흔들렸고, 유영(劉盈)과 달리 활발한 성격이었던 유여의(劉如意)를 주목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신들에 의해서 좌절되었고, 거기다 장량(張良)이 유영(劉盈)에게 조언을 해서, 전에 유방(劉邦)도 초빙에 실패했던 당시의 유명했던 학자들이 스스로 찾아왔던 것이 결정적이 되어서 유방(劉邦)은 그 뜻을 접게 되었으며, 그러자 유여의(劉如意)는 조왕(趙王)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은 결국 여치(呂雉)를 화나게 했다. 그래서 기원전 195년에 유방(劉邦)이 죽자, 여치(呂雉)는 그 보복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선, 여치(呂雉)는 그 척(戚) 씨를 잡아와서 영항<永巷-죄지은 여관(女官-궁녀 등)들을 가두었던 감옥>에 감금했고, 매일 콩을 찢는 벌을 내렸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이 <영항가(永巷歌)>였다고 한서(漢書)는 기록했다. 아무튼, 그 후에 여치(呂雉)는 장안(長安)으로 들어왔던 유여의(劉如意)를 독살(毒殺)했고, 그 결과를 척(戚)씨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격노했던 척(戚)씨는 재빨리 격자(格子) 사이로 손을 내밀어서 여치(呂雉)의 팔을 잡았고, 그리고는 깨물어버렸다. 그러자 여치(呂雉)가 비명을 질렀고, 그러자 또 간수(看守)가 달려와서 그 척(戚)씨를 떼어냈는데, 그런데 그 과정에서 척(戚)씨의 팔이 골절되었다. 그러자 또 그에 화가 났던 여치(呂雉)는 그녀의 양손을 자르라고 명했는데, 그러자 또 척(戚)씨는 그 상태에서 다리를 들어서 여치(呂雉)의 배를 힘껏 차버렸다. 그러자 또 여치(呂雉)는 그 고통을 못 이겨서 비틀거리다가 다시 그녀의 다리까지 잘라버리라고 명했다. 그러자 또 그녀가 여치(呂雉)를 쏘아보았는데, 그러자 또 여치(呂雉)는 그녀의 눈을 뽑아버리라고 했고, 이어서 음약(瘖藥-벙어리로 만드는 약)을 먹여서 목소리도 나오지 못하게 했으며, 그러자 나중에 그녀는 청각(聽覺)까지도 잃게 되었다. 그 후, 척(戚)씨는 변소에 넣어졌다.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소개되었으므로 생략하며, 그러자 또 그것을 직접 목격했던 혜제(惠帝)는 너무도 충격을 받아서 그 후로 정무(政務)를 방기하게 되었고, 요절(夭折)했다.

 -------------------------------------------------------------------------------------------

 
유여의(劉如意-?부터 기원전 195년)는, 전한(前漢) 초기의 인물이었고, 유방(劉邦)의 서자(庶子-第三子)였다. 그리고 생모는 척(戚)부인이었으며, 시호(諡號)는 은왕(隱王), 생년(生年)에 관해서는 기원전 207년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그의 생모 척(戚)씨는 유방(劉邦)이 패공(沛公) 시절이었을 때, 항량(項梁) 아래에서 종군(從軍)을 하다가 정도(定陶)란 곳에 들렀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녀의 미모를 보고는 한눈에 빠졌다고 하며, 그 결과 유여의(劉如意)가 태어났다. 그 후, 기원전 198년에 그는 대왕(代王)에 봉해졌으며, 그 후에 조왕(趙王)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유여의(劉如意)의 암살을 두려워했던 유방(劉邦)이, 과거 자신을 꾸짖었던 적이 있었던 주창<周昌-유방(劉邦)에게 충성을 다했다가, 나중에 항우(項羽)에게 살해되었던 주가(周苛)의 종형제(從兄弟)>을 신임해서 그를 조(趙)의 재상(宰相)으로 삼았다. 그 후, 유방(劉邦)이 사망하자 여치(呂雉)는 그를 죽이려고 몇 번이나 기도했지만,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이 주창(周昌)이 나서서 그 위기를 모면시켰는데, 그러나 기원전 195년 겨울에 여치(呂雉)가 다시 그를 장안(長安)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또 그때, 혜제(惠帝)는 여치(呂雉)의 속셈을 알고는 그를 지키려고 했지만, 그러나 또 그 혜제(惠帝)가 마침 사냥을 나갔던 날, 여치(呂雉)는 유여의(劉如意)를 독살했다. 그러자 혜제(惠帝)는 무척이나 슬퍼했다고 한다.

 -------------------------------------------------------------------------------------------

 
주가(周苛-?부터 기원전 204년)는, 전한(前漢) 초기의 부장(部將)이었고, 패(沛)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처음에 자신의 종제(從弟)였던 주창(周昌)과 함께 진(秦)의 사수(泗水)군(郡)에서 졸사(卒史)를 하고 있었지만, 유방(劉邦)이 거병하자 사수(泗水)군수(郡守) 감(監)을 격파하고 유방(劉邦) 밑으로 들어갔으며, 주가(周苛)는 식객(食客)이 되었다. 그 후,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그는 최초의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으며, 기원전 204년 여름에 유방(劉邦)이 형양(滎陽)에서 항우(項羽)에게 포위당하자, 유방(劉邦)은 기신(紀信)의 계책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그때 주가(周苛)는 위왕(魏王) 표(豹)와 한왕(韓王) 신(信) 등과 함께 형양(滎陽)을 수비했다. 하지만 바로 그 직후에 항우(項羽)가 기신(紀信)을 태워죽이고 압박해서 들어오자 주가(周苛)는 위왕(魏王) 표(豹)가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주장하고는, 나머지 사람들과 모의해서 그 표(豹)를 죽였는데, 그때가 가을 8월이었다.(史記의 秦楚之際月表에 의함) 하지만 그 형양(滎陽)은 1개월 정도밖에는 버티지를 못했고, 그러자 주가(周苛)등은 포로로 잡혔다. 그러자 항우(項羽)가 그에게 <자기 밑에 들어오면 상장군에 임명하고, 봉읍(封邑) 3만 호(戶)를 내리겠다!>라고 회유했지만, 그러자 또 주가(周苛)는 오히려 항우(項羽)에게 <당신이 하루빨리 한(漢)에 항복하지 않으면, 그때는 당신이 포로가 될 것이오! 당신 같은 사람은 유방(劉邦)의 적수가 되지 못하오!>라고 매도(罵倒)했기 때문에, 항우(項羽)는 그를 삶아서 죽여 버렸다. 그러자 그 후, 유방(劉邦)은 주창(周昌)을 그의 후임으로 삼았고, 천하통일 후에는 그 공적을 인정해서 그의 아들 주성(周成)을 고경후(高景侯)에 봉했다.

 --------------------------------------------------------------------------------------------

 주창(周昌-?부터 기원전 191년)은, 주가(周苛)의 종제(從弟)였고, 그 앞의 내용은 주가(周苛)와 같다. 그리고 그 후에 주가(周苛)가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을 때, 그는 중위(中尉)가 되었고, 그 후였던 기원전 204년에 주가(周苛)가 항우(項羽)에게 살해당하자 그는 주가(周苛)의 후임이 되어서 항시 유방(劉邦)을 따라다니면서 항우(項羽)와 싸웠다. 그리고 그 공으로 기원전 201년에는 소하(蕭何), 조참(曹參) 등과 함께 열후(列侯)에 봉해졌으며, 분음후(汾陰侯)가 되었다. 그는 또 직언(直言)도 마다하지 않았던 인품을 가졌었고, 그래서 또 소하(蕭何)는 물론이었고, 조참(曹參) 등도 그를 존경했다. 그리고 또 한 예로, 일찍이 유방(劉邦)이 연회(宴會)를 열었을 때, 그가 상주(上奏)할 일이 있어 찾아갔는데, 그런데 그때, 유방(劉邦)이 척(戚)씨를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보고 그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따라가서 그를 붙잡고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너는 나를 어떤 주인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걸(桀-夏 최후의 帝)이나, 주(紂-殷 30대 최후의 帝) 같은 주군(主君)이십니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웃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그를 경계하게 되었다고 한다(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함). 그리고 또 그 후에 유방(劉邦)이 유여의(劉如意)를 태자로 삼으려고 했을 때도 그는 강력하게 말렸다는데, 그런데 그는 원래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때는 너무 화가 많이 나서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지만, 어쨌든 그때 그는 그렇게 강력하게 반대를 했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웃으면서 그의 뜻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여치(呂雉)는 그 앞에서 무릎까지 꿇으면서 감사해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유방(劉邦)은 자신이 죽고난 후에 유여의(劉如意)가 어찌될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러던 하루, 어사(御史)였던 조요(趙堯)가 다음과 같이 유방(劉邦)에게 간언했다. <여후(呂后)와 대신(大臣)들도 두려워하는 인물로 조왕(趙王)의 승상(丞相)으로 삼으십시오!>

 참고: 어사(御史)는 진(秦)과 전한(前漢) 때의 관직명이었으며, 부(副)재상(宰相)이었던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소속되었고, 정원은 45명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15명은 시어사(侍御史)로 불리면서 궁전 안에서 근무했으며, 두 사람의 승(丞) 중, 한사람이었던 어사중승(御史中丞)의 통솔을 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30명은 어사대부(御史大夫)의 관청에서 근무했으며, 녹봉은 600석(石)이었고, 백관(百官)의 일을 관리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주창(周昌)을 그 자리에 앉히려고 했는데, 그러자 주창(周昌)이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항의했다. <저는 처음부터 폐하(陛下)만 모셔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인데, 그런데도 어찌하여 다른 사람들은 다 놔두고, 하필이면 저를 그곳으로 보내서 버리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이렇게 말을 했다. <나 역시도 그것이 좌천(左遷)인 줄은 알고 있으나, 그러나 조왕(趙王)을 생각하면 그 적임자가 당신밖에는 없으니, 힘들겠지만 나의 인사(人事)를 따라주게!> 그러자 그는 그것을 승낙했고, 자신의 후임으로 조요(趙堯)를 추천했다. 그 후, 유방(劉邦)이 죽자 여치(呂雉)는 유여의(劉如意)를 죽이려고 획책했다. 그러자 주창(周昌)은 유여의(劉如意)에게 칭병(稱病)하고 여치(呂雉)의 말을 따르지 말라고 간언했다. 그러자 또 여후(呂后)는 주창(周昌)을 먼저 불러올렸다. 그런 다음에 유여의(劉如意)를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유여의(劉如意)를 독살했고, 그러자 주창(周昌)은 그 후로 칭병(稱病)하면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기원전 191년에 그는 사망했고, 그러자 그에게 도후(悼侯)라는 시(諡)가 내려졌으며, 그 뒤(列侯)는 그의 아들 애후(哀侯)가 이었다. 하지만 분음후(汾陰侯)는 그 아들() 의(意) 대(代)에 죄가 있었기 때문에 몰수되었다. 그리고 또 사마천(司馬遷)은 그를 <나무와 돌 같이 실직(實直-정직하고 성실함)했던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시무(柴武-?부터 기원전 163년)는, 전한(前漢) 때의 인물이었고, 유방(劉邦) 휘하에서 활약했던 장군이었다. 성(姓) 시(柴)와 진(陳) 두 성(姓)이 전해져오고 있으며, 그래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서는 시무(柴武)와 진무(陳武) 두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그는 진(秦) 말,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설(薛)이란 곳에서 병졸 2500명을 거느리고 장군이 되었다. 그 후, 나름대로 활약을 하다가 기원전 205년에 한(漢)의 지휘 하로 들어갔고, 제(齊)와 싸워서 공적을 올렸다. 그 후, 해하(垓下)의 싸움에서는 주발(周勃)과 함께 유방(劉邦)의 후방을 지켰으며, 유방(劉邦)이 황제가 된 후였던 기원전 201년에는 열후(列侯)에 봉해져서 극포후(棘浦侯)가 되었다. 기원전 196년, 한왕(韓王) 신(信)이 흉노로 도망을 갔다가, 흉노 군을 이끌고 한(漢)으로 침범해왔을 때, 유방(乳房)은 시무(柴武)에게 신(信)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시무(柴武)는 신(信)에게 편지를 써서 다시 한(漢)에 귀순할 것을 독려했지만, 그러나 신(信)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싸우게 되었고, 그 결과 시무(柴武)는 흉노 군을 격파하고 신(信)을 처형했다. 그 다음 여후(呂后)8년이었던 기원전 180년, 드디어 여후(呂后)가 사망하고 쿠데타가 일어나서 여(呂)씨(氏)는 몰살되었다. 그러자 문제(文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때, 시무(柴武)는 대장군의 자격으로 문제(文帝)를 맞이했다. 문제(文帝) 즉위 직후, 그는 그때까지도 한(漢)을 따르지 않고 있었던 남월(南越)과 조선(朝鮮)을 토벌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하지만 문제(文帝)는 그의 뜻을 받아주지 않았고, 이어서 기원전 177년, 제북왕(濟北王)이었던 유흥거(劉興居)가 반란을 일으키자 문제(文帝)는 그에게 토벌을 명했다. 그러자 그는 대장군의 자격으로 출진해서 반란군을 격파했으며, 그러자 유흥거(劉興居)는 포로로 잡혔던 후에 자살했다. 그 후, 기원전 174년, 시무(柴武)의 아들이었던 시기(柴奇)가 유장(劉長)의 반란계획에 가담했다는 것이 발각되어서 주살(誅殺)당했다. 그 때문에 기원전 163년에 시무(柴武)가 사망했어도 극포후(棘浦侯)는 상속되지 못했고, 그래서 그 후에 단절되었다. 하지만 시무(柴武)에게는 강후(剛侯)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


 인상여(藺相如-생몰불상)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조(趙) 혜문왕(惠文王)의 신하였고, <완벽(完璧)>과 <문경(刎頸)의 교(交)> 고사(故事)를 남겼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그를 평하기를 <문무지용(文武知勇)의 장(將)이었다>라고 상찬(賞讚)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염파(廉頗) 인상여(藺相如) 열전(列傳)>에 의하면, 처음에 그는 혜문왕(惠文王)의 환관(宦官)이었던 무현(繆賢-정확한 이름을 찾지 못해서 일단 무현으로 표현함. 그러나 목현, 료현, 규현 등, 다양하게 표현한 곳이 많으므로, 참고바람)이란 자의 객인(客人)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현(繆賢)은 생몰불명의 사람으로, 전국시대 조(趙)나라 사람이었고, 기원전 280년경에는 환자령(宦者令-內侍令)이라는 환관(宦官)들을 관리하는 관직에 있었다. 그리고 초(楚)나라의 보물이었던 <화씨(和氏)의 벽(璧)=和氏之璧으로, 완벽귀조(完璧歸趙-중국에서 부르는 말) 고사(故事)의 연유가 되었던 것이며, 중국 춘추시대에 있었다는 희귀한 구슬을 말함>을 조(趙)의 혜문왕(惠文王)이 손에 넣었을 때, 진(秦)의 소왕(昭襄王)이 그 말을 전해 듣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진(秦)의 15성(城)과 그것을 바꾸고 싶다...> 그러자 조왕(趙王)은 그에 대해서 군신(群臣)들과 의견을 나누었는데, 그런데 그 의견에서 <만약에 그 벽(璧)을 진(秦)에 주게 되면 진(秦)은 그 벽(璧)만 취하고 성(城)은 주지 않을 것이므로, 조(趙)는 세상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는 의견과 <하지만 그 벽(璧)을 진(秦)에 주지 않으면, 진(秦)은 그것을 구실로 해서 조(趙)를 공격해올 것이 자명하다>라는 의견 등으로 해서 그 의논은 쉽게 결정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다 또 그 답을 진(秦)에 전해줄 사자(使者)조차도 나서는 자가 없었는데, 그런데 바로 그때, 무현(繆賢)이 나서서 인상여(藺相如)를 그 사자(使者)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을 했다. 그러자 조왕(趙王)이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러자 또 무현(繆賢)이 이렇게 답을 했다. <제가 일찍이 죄를 지었을 때, 연(燕)으로 도망을 가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의 객인(客人)인 인상여(藺相如)가 그것을 반대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왜 연(燕)으로 가려는 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 내가 왕을 모시고 국경으로 가서 연왕(燕王)을 만났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연왕(燕王)이 나의 손을 잡고는 나와 교제하기를 원한다고 말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연(燕)으로 도망가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
그러니까, 현재 조(趙)는 강국(强國)이며, 연(燕)은 약소국입니다. 그리고 그때, 연왕(燕王)이 당신에게 그렇게 말을 했던 것은 당신이 조왕(趙王)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금 그 연(燕)으로 도망을 간다면 연왕(燕王)은 오히려 당신을 부담스러워 할 것이고, 그것은 또, 그 일로 해서 연(燕)이 조(趙)로부터 미움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된다면 또, 당신은 오히려 그곳에서 체포되어서 조(趙)로 다시 돌려보내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연(燕)으로 도망가는 대신 자수를 하시고, 그리고는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한다면, 오히려 죄를 사함 받는 은혜를 받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말을 따랐고, 그러자 또 그 결과로 왕께서는 저의 죄를 용서하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가 용기와 함께 지모(智謀)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 그 자를 사자(使者)로 추천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인상여(藺相如)를 불러서 이렇게 물었다. <진(秦)의 왕이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해왔는데, 내가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겠는가?!> 그러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대답했다. <진(秦)은 현재 조(趙)보다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또 혜문왕(惠文王)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만약에 진(秦)이 그 벽(璧)만 취하고 성(城)을 우리에게 주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대답했다. <네, 일단 조(趙)에서 그것을 거절하게 되면, 그것은 진(秦)에 구실을 주는 것이 되고(趙에 罪가 있다는 뜻), 하지만 또 진(秦)이 그 벽(璧)을 취하고서도 성(城)을 넘기지 않는다면, 그때는 진(秦)에 무리(無理)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그때는 오히려 秦이 道理가 없게 된다는 뜻). 그러므로 일단 그 벽(璧)을 진(秦)에 넘겨주고, 진(秦)에 그 무리(無理)의 짐을 지우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자 또 혜문왕(惠文王)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사자(使者)로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는가?>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말을 했다. <만약에 적당한 사람이 없다면 저라도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진(秦)이 그 약속을 지킨다면 저는 그 벽(璧)을 진(秦)에 넘겨주고 올 것이고, 그러나 진(秦)이 그 약속을 어긴다면, 저는 그 벽(璧)을 조(趙)로 온전히(完璧) 다시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그를 사자(使者)로 결정했다.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는 그 벽(璧)을 가지고 서향(西向)해서 진(秦)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진(秦)에 도착했을 때, 진왕(秦王)은 장대<章臺-옛날, 중국의 장안(長安) 서남쪽 한편에 있었다던 누대(樓臺). 그러나 여기서는 궁전의 누대(樓臺)를 의미함> 전상(殿上)에서 그를 맞이했고,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는 그 벽(璧)을 진왕(秦王)에게 헌상했는데, 그러자 또 진왕(秦王)은 그것을 한번 살펴보고는 자기 옆에 있던 시녀(侍女)들과 시종(侍從)들에게 돌려보게 했다. 그러자 그것을 돌려봤던 시녀와 시종들이 만세(萬歲)를 부르면서 축하의 말들을 쏟아냈다. 그러자 또 그것을 지켜봤던 인상여(藺相如)는 진왕(秦王)이 그 대가로 성(城)들을 넘겨줄 마음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벽(璧)에는 흠(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것을 왕에게 가리켜 보이겠습니다> 그러자 진왕(秦王)이 시종에게 시켜서 그것을 인상여(藺相如)에게 반환하게 했다.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는 그것을 받아들고 큰 기둥 뒤로 돌아가서 진왕(秦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이 벽(璧)은 천하의 보물이기 때문에 진왕(秦王)은 5일간 재계(齋戒)한 후에 취하는 것이 마땅하며, 하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고 진왕(秦王)이 이것을 강제로 취하려든다면, 저는 이 벽(璧)과 함께 저의 머리를 기둥에 부딪혀서 깨어버릴 것입니다!> 그러자 진왕(秦王)은 그것을 강제로 취할 수는 없겠다고 판단해서 인상여(藺相如)의 뜻대로 5일간 재계(齋戒)할 것을 약속했지만, 그러나 인상여(藺相如)는 그 진왕(秦王)이 5일간 재계(齋戒)를 한 후에도 성(城)을 돌려줄 마음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그 사이에 자신이 데려왔던 종자에게 그것을 맡겼다. 그리고는 비밀리에 조(趙)로 다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자신의 용기와 지략(智略)으로 그 벽(璧)을 완전하게(完璧) 조(趙)로 다시 반환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무현(繆賢)에 대해서 더 알려진 것은 없으며, 인상여(藺相如)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고싶으신 분은, 史記列傳 二巻 廉頗・藺相如 列伝 第二十一을 참조바랍니다.

 아무튼, <화씨(和氏)의 벽(璧)>에 대한 고사(故事)와 <완벽(完璧)>에 대해서는 무현(繆賢)에서 소개한 것을 참조바라며, 하지만 또 그것과 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어쨌든 또 다른 내용이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인상여(藺相如)는 그렇게 해서 진(秦)의 수도였던 함양(咸陽)으로 들어가서 진(秦)의 소양왕(昭襄王)과 대면했다. 그리고는 그 벽(璧)을 헌상하자 소양왕(昭襄王)은 그것을 살펴보고는 자신의 총희(寵姬)들과 군신(群臣)들에게 돌려가면서 보게 했다. 하지만 그 태도로 보아서 성(城)을 조(趙)에 넘길 마음이 없다고 판단했던 인상여(藺相如)는 그 벽(璧)에는 작은 상처가 하나 있는데, 그래서 자신이 그것을 가르쳐주겠다고 하고는 벽(璧)을 다시 돌려받았다. 그런 다음에는 그 옆에 있던 기둥으로 달려가서 그 기둥에 기대고는 관(冠)이 추켜올려지고, 몹시 노(怒)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을 했다.<노발충관(怒髮衝冠)의 어원(語源)이 되었던 상황으로, 노하여 일어선 머리카락이 관을 추켜올린다는 뜻이며, 몹시 화가 난 모양을 이르는 말> <조(趙)에서는 진(秦)을 의심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그러자 조왕(趙王)은 진왕(秦王)을 믿고 저를 이곳으로 보냈소! 그리고 진왕(秦王)이 5일간 몸을 정갈히 한 후에 이것을 전하라고 했소! 그런데도 진왕(秦王)은 너무나도 무례하게 이 벽(璧)을 취급했소! 그러므로 나는 이 벽(璧)과 함께 내 머리를 이 기둥에 찧어서 깨어버릴 것이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은 당황해서 지도를 가져오라고 신하들에게 시켰다. 그리고는 그 15개 성(城)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하지만 그것은 인상여(藺相如)를 달래기 위한 수작이었을 뿐, 소양왕(昭襄王)이 여전히 성(城)을 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인상여(藺相如)는 일단 소양왕(昭襄王)이 그 벽(璧)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 또는 예의로 5일간 재계(齋戒)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이 그에 따랐는데, 그러자 그는 그 사이에 자신이 데려왔던 종자(從者)에게 그것을 들려서 비밀리에 조(趙)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고, 그 자신은 그곳에 남아서 그 종자가 조(趙)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그 5일 후, 재계(齋戒)를 마쳤던 소양왕(昭襄王)이 그에게 벽(璧)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이미 그 벽(璧)은 조(趙)로 다시 돌려 보내졌다고 말을 하고는, 그 이유는 진왕(秦王)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또, 그 15성(城)을 지금이라도 넘겨준다면 조(趙)는 그 벽(璧)을 다시 돌려줄 수도 있다고 하면서, 하지만 또 무례를 범한 자신에게는 사죄(死罪)를 내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군신(群臣)들은 인상여(藺相如)를 죽일 것을 진언했는데, 하지만 그의 강담(剛膽)에 감탄했던 소양왕(昭襄王)은 <그를 죽인들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차라리 조(趙)의 원망만 살뿐이다!>라고 말을 하고는 그를 용서했다. 그리고는 또 그 일은 없었던 일로 하기로 결정을 했으며, 인상여(藺相如)는 후한 대접을 받고 무사 귀국했다. 그리하여 그의 지혜와 용기는 세상이 칭송하게 되었고, 특히 그 막강 진(秦)을 상대하면서도 한발도 물러섬이 없었던 그의 태도와 함께, 약속했던 대로 그는 그 벽(璧)을 완벽(完璧)하게 지켜냈으며, 그에 더해서 조(趙)의 체면까지도 세워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79년에, 진(秦)으로부터 혜문왕(惠文王)에게 민지(黽池-현재의 河南省 澠池県)에서 양국의 우호를 축하하자는 뜻의 초대가 왔다. 그러나 그때, 그 민지(黽池)는 당시 진(秦)의 영토 내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만일의 경우에 왕을 구원하기 힘들다는 의미로, 왕이 직접 그곳으로 가는 것은 곤란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것은 또 그 화씨(和氏)의 벽(璧) 사건에서도 보여주었던 것처럼, 진(秦)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런데다 또 그 후에도 진(秦)은 자주 조(趙)를 침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조(趙)에서는 그에 대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때, 염파(廉頗) 등이 이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또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왕이 그 자리에 나가지 않는다면 진(秦)은 조(趙)가 약하고 비굴하다고 생각해서 더욱 거만해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또 제후들조차도 조(趙)를 깔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또 왕이 인상여(藺相如)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도 염파(廉頗) 등의 말에 동조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러시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만약에 내가 30일 안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태자를 왕위에 올리고 그에 대한 복수를 해달라!>라고 말을 했고, 그러자 신하들은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그 자리에 나갈 것을 결심했고, 그렇게 해서 일행은 민지(黽池)로 갔다. 그리고 이윽고 축연이 열리자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이 이렇게 말을 했다. <조왕(趙王)께서는 음악을 아주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양국의 우호를 축하하기 위해서 비(琵-琵琶)를 한번 연주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그 뜻을 흔쾌히 받아들여서 비(琵) 한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그 직후에 소양왕(昭襄王)이 기록관에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라고 시켰다. <진왕(秦王)이 조왕(趙王)에게 비(琵)를 연주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 들어도 진(秦)이 조(趙)를 신하 취급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나서서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진(秦)에서는 연석(宴席)에서 부(缻=缶=우리나라 타악기의 하나로, 진흙으로 구워서 화로같이 만든 것. 아홉 조각으로 쪼개진 대나무 채로 변죽을 쳐서 소리를 냄. 그러나 秦의 것도 같은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음)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관습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부(缻)를 소양왕(昭襄王)에게 주면서 이렇게 또 말을 했다. <그러므로 왕께서도 양국의 우호를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이 부(缻)를 한번 두드려주십시오!> 그리고 또 그때, 진(秦)에서는 분명히 그런 풍습이 있었지만, 그러나 또 중원(中原) 제국(諸國)에서는 그런 것을 천(賤)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 인상여(藺相如)의 그런 행위는 진왕(秦王)에게 무례를 범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소양왕(昭襄王)은 몹시 불쾌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인상여(藺相如)는 그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또 이렇게 말을 했다. <현재 저와 왕의 거리는 대충 다섯 보(步)정도! 그러므로 저의 목을 베신다면 그 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秦王이 덮어쓴다는 뜻으로, 秦王의 몸이 더럽혀진다는 의미)> 그리고는 또 넌지시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저는 여기서 왕과 함께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협박을 했다. 그러자 그 기백(氣魄)에 압도당했던 진왕(秦王)은 망설임 없이 부(缻)를 한번 두드렸다. 그러자 또 그 기회를 놓칠세라 인상여(藺相如)는 재빨리 기록관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국사(國史)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시오! 조왕(趙王), 진왕(秦王)에게 부(缻)를 두드리게 했다!> 그리고는 또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왕 덕분에 이 축연은 더욱 의미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그 후에 진(秦) 신하 한명이 혜문왕(惠文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 왕(秦王)의 장수(長壽)를 축하하는 의미로 귀국(貴國-趙)의 15성(城)을 헌상함이 어떻겠습니까?>

 참고: 위, 사신(使臣)의 진의(眞意)는, 진(秦)은 조(趙)의 15성(城) 정도는 쉽게 빼앗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전에 조(趙)가 미리 스스로 헌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의미와 함께, 속국(屬國)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하라는 것이었고, 그리고 15성(城)을 강조했던 것은 앞의 그 벽(璧) 건에 대한 앙금을 나타냈던 것이었다.

 그러자 또 그때도 인상여(藺相如)가 나서서 또 이렇게 말을 했다. <귀국(貴國)에서야말로 우리 왕의 장수를 축하하기 위해서 수도 함양(咸陽)을 헌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그 사신(使臣)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렇게 때마다 나서서 자신의 기백과 기치로 문제를 해결했던 인상여(藺相如)는 그 후에 조왕(趙王)과 함께 무사히 귀국했다. 그래서 결국 진왕(秦王)은 그때 조(趙)를 굴복시키지 못했으며, 인상여(藺相如) 덕분에 조(趙)는 진(秦)에 대해서 체면을 세울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에 인상여(藺相如)는 그 공적으로 해서 상경(上卿-大臣 급)이 되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그런 그의 급진적인 출세를 시기했던 사람은 또 있었는데, 그런데 그가 바로 당시에 역전(歷戰)의 용장(勇將)으로 불리고 있던 염파(廉頗)였고, 그래서 또 당시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인상여(藺相如)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한번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모욕을 주겠다!>라는 말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하지만 또 그는 당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서 장군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군인으로, 그래서 또 변설(辯舌)만으로 자기보다 위의 자리에 올랐던 인상여(藺相如)가 눈엣가시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랬는데,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염파(廉頗)와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칭병(稱病)하고 집 안에만 들어앉아있었다든가, 궁(宮)에 들어갈 때도 가능하면 염파(廉頗)가 없던 날을 골라서 입궁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인상여(藺相如)는 거리에서 우연히 그 염파(廉頗)를 목격했고,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는 재빨리 자신의 몸을 숨겨서 그와 만나는 것을 피했다. 그러자 그날 밤에 그가 부리고 있던 종자(從者)들이 인상여(藺相如)에게 이렇게 항의했다. <저희들이 일가친척들을 떠나서 당신(上卿)을 모시고 있는 이유는 당신의 고의(高義-두터운 인정과 의리)를 흠모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여주신 당신의 모습은 필부(匹夫)에도 미치지 못할 아주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하여, 우리들은 더 이상 당신을 모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말을 했다. <너희들은 진왕(秦王)과 염파(廉頗) 중에서 누가 더 무서운가?> 그러자 종자들이 이렇게 답을 했다. <물론, 진왕(秦王)이지요!>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진왕(秦王)을 꾸짖었고 그 신하들을 나무랐다. 그런데도 내가 하물며 염파(廉頗) 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리고 또 내가 알기로 현재 진(秦)이 조(趙)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나와 그 염파(廉頗) 장군이 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와 그 염파(廉頗) 장군이 싸우게 된다면 그것은 양호상토(兩虎相討)의 형국이 되어서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다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또 진(秦)이 바라는 것으로, 그래서 나는 개인의 싸움보다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러자 종자들이 모두 그의 깊은 뜻을 알고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또 그 후에 그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고, 그러자 또 그것은 자연스럽게 염파(廉頗)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서야 자신의 경솔함을 인정했던 염파(廉頗)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인상여(藺相如)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윗도리를 벗고 앉아서 스스로 가시나무로 자신의 등을 때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 비천한 자가 당신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당신에게 주었던 모욕에 비하면, 이런 나의 체벌은 오히려 부족한 것입니다!>

 
참고: 위의 고사(故事)로, 그렇게 본심(本心)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속죄(贖罪)하는 것과, 스스로 찾아가서 벌을 받는다는 의미의 육단부형<肉袒負荊-윗옷 한쪽을 벗고, 등에 형장(刑杖-예전에 죄인을 신문할 때에 쓰던 몽둥이)을 지고 간다는 뜻으로, 형장으로 맞아 사죄하겠다는 뜻을 나타냄을 이르는 말> 또는 육담부형(肉担負荊) 또는 부형(負荊)의 어원(語源)이 되었다.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말을 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군께서 계시기 때문에 바로 이 조(趙)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또 그에 감복했던 염파(廉頗)가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 목숨을 버린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맹세했다. <저 역시, 장군을 위해서라면 기쁘게 죽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날, 그 두 사람은 서로의 경(頸-)을 자른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기로 맹세를 했다. 그리고 또 바로 그것이 <문경(刎頸)의 교(交)> 또는 <문경(刎頸)의 우(友)>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아무튼 그 후에도 진(秦)은 그 두 사람 때문에 조(趙)를 공격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세월이 지나자 인상여(藺相如)는 병이 들었고, 염파(廉頗)는 늙었다. 그리고 왕도 혜문왕(惠文王)에서 효성왕(孝成王)으로 바뀌었는데, 그러자 진(秦)에서는 왕흘(王齕)이란 장군에게 조(趙)를 공격할 것을 명했다. 그러자 또 조(趙)에서는 염파(廉頗)를 대장군으로 해서 진군(秦軍)을 맞았고, 그것이 바로 <장평(長平)의 싸움>이었다.(더욱 상세한 것은 참고 6-26 참조바람) 그리고 그 후, 인상여(藺相如)는 병사했고, 염파(廉頗)는 위(魏)와 초(楚)로 망명했다.

 <염파(廉頗) 계속...>

 그 장평(長平)의 싸움 후, 조(趙)의 쇠퇴를 지켜봤던 연(燕)의 왕 희(喜)가 조(趙)를 침공했다. 그러자 염파(廉頗)는 그 노구(老軀)를 이끌고 나가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백향현(柏鄕縣) 북부에서 대승했다. 그리고는 그 기세를 몰아서 연(燕)으로 쳐들어갔으며, 이어서 수도 계(薊)를 포위했다. 그러자 연(燕)은 다섯 개의 성(城)을 조(趙)에 넘겨주고 화해했다, 그러자 진(秦)도 함부로 조(趙)를 침공하지 못했는데, 그러자 또 효성왕(孝成王)은 그 공적을 칭송해서 그에게 위문(尉文)이란 곳을 주면서 신평군(信平君)에 봉했다. 그리고 기원전 251년에 평원군(平原君)이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공석(公席)을 그에게 주면서 상국(相國) 대행에 임명했다. 기원전 245년, 염파(廉頗)는 위(魏)를 침공해서 번양(繁陽-지금의 河北省 内黄県)의 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에 효성왕(孝成王)이 사거했고, 그러자 그 자리를 도양왕(悼襄王)이 이었는데, 그러나 그 도양왕(悼襄王)은 염파(廉頗)를 장군 직에서 파면했다.(悼襄王은 태자 때부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자 염파(廉頗)는 자신의 후임이 되었던 악승(樂乘)이란 자를 공격해서 격파했으며, 그 때문에 조(趙)를 떠나서 위(魏)의 대량(大梁-지금의 河南省 開封市 西北)으로 망명했다. 그러자 그 악승(樂乘)도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 그 후, 위(魏)에서는 염파(廉頗)를 신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활약은 없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진(秦)에서는 정(政-나중의 始皇帝)이 즉위해서 강국이 되어 있었고, 그러자 또 조(趙)도 그 표적이 되었다. 그러자 또 조(趙)에서는 다급했던 나머지 염파(廉頗)에게 사자를 보내서 다시 조(趙)로 돌아올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또 평소에 조(趙)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염파(廉頗)는 그것을 받아들였는데, 그러나 또 그때, 옛날부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간신(奸臣) 곽개(郭開)란 자가 모략을 써서 그 사자(使者)를 매수했다. 그러자 그 사자(使者)는 도양왕(悼襄王)이 염파(廉頗)에 대해서 묻자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삼도유실(三度遺失)!>

 참고: 하지만 당시, 염파(廉頗)는 그 노령(老齡)에도 <한번 식사에 두미(斗米-쌀 한 말)와 육(肉) 10근(斤)을 먹고,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랐다>라고 했을 만큼 혈기왕성한 모습을 그 사자(使者)에게 보였다고 했는데, 그러나 그 사자(使者)는 곽개(郭開)란 자에게 매수되어서 도양왕(悼襄王)에게 염파(廉頗)가 삼도유실(三度遺失)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고, 그 뜻은 또 <사자(使者)와 회담 중에 세 번이나 소변을 보기 위해서 화장실로 갔다> 또는 <사자(使者)와 회담 중에 세 번이나 실금(失禁)을 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도양왕(悼襄王)은 크게 실망해서 그를 포기했다. 그러자 또 염파(廉頗)는 초(楚)로 다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장군에 임명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별 공도 세우지 못하고 수춘(壽春)에서 병몰(病沒)했다. 그러자 그 후, 사마천(司馬遷)은 그에 대해서 직접적인 평(評)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또 소자고사(蘇子古史)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해서 <국가(趙)의 주석(柱石)>이라고 평(評)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장오(張敖-?부터 기원전 182년)는, 진(秦)말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인물이었고, 장이(張耳)의 아들, 유방(劉邦)의 사위였다.(張耳와 중복되는 부분은 생략함) 그는 기원전 202년(高祖5年)에 장이(張耳)가 사망하자 조왕(趙王)을 승계했다. 그리고 그해, 장오(張敖)는 초왕(楚王) 한신(韓信)과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 그리고 양왕(梁王) 팽월(彭越)과 원래 형산왕(衡山王)이었던 오예(吳芮)와 함께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황제(皇帝)의 존호(尊號)를 봉(奉)했다. 그리고 이어서 노원공주(魯元公主)와 결혼했으며, 그러자 노원공주(魯元公主)는 왕후(王后)가 되었다. 기원전 200년(高祖7年) 고조(高祖)가 흉노에 져서 돌아왔을 때, 조(趙)에 잠시 들렀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장오(張敖)는 자식과 같은 사위의 태도로 유방(劉邦)을 대하면서 몹시 비굴하게 굴었는데, 그러자 유방(劉邦)이 그런 모습을 보고는 크게 질책하면서 대단히 교만하게 굴었다. 그러자 그때, 조(趙)의 승상(丞相)이었던 관고(貫高)와 조오(趙午)는 원래 장이(張耳)의 식객(食客)이었던 인물들로, 그것을 보고 화를 내면서 장오(張敖)에게 유방(劉邦)을 살해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장오(張敖)는 <현재의 자신은 모두 유방(劉邦)의 덕택이므로 그것은 불가하다>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관고(貫高)와 조오(趙午)는 장오(張敖)에게는 비밀로 하고 유방(劉邦)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유방(劉邦)이 또 조(趙)를 방문했는데, 그러자 장오(張敖)는 자신의 후궁이었던 조미인(趙美人)을 유방(劉邦)에게 헌상했다.(그리고 그 趙美人은 후에 劉邦의 아들 劉長을 낳았다) 그리고 또 그때, 관고(貫高)는 유방(劉邦)을 살해하기 위해서 백인(柏人)이란 곳에다 암살자들을 배치했다. 그런데 유방(劉邦)이 그 백인(柏人)에서 머물려고 했을 때, 그는 갑자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그곳을 그냥 지나가서 화를 면했다. <백인(柏人)이란 "사람에게 핍박()을 당한다(시달리게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머무는 것은 좋지가 않다!> 그리고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198년에, 관고(貫高) 등의 음모가 발각되었다. 그러자 그 관고(貫高)와 함께 장오(張敖)도 체포되었다. 그러자 여치(呂雉)는 장오(張敖)의 편을 들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은 여치(呂雉)의 말을 듣지를 않았다. 하지만 또 그때, 관고(貫高)는 그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에 감복했다. 그리고 또 그때, 관고(貫高)는 장오(張敖)의 결백을 계속해서 주장했기 때문에, 유방(劉邦)은 그의 증언을 받아들여서 장오(張敖)를 사면했다. 그 후, 장오(張敖)는 왕위(王位)를 잃었고, 동년(同年) 선평후(宣平侯)로 강격(降格)되었다. 그리고 유방(劉邦)은 그 관고(貫高)의 예를 통해서 장이(張耳)의 식객들이 모두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전부를 군수(郡守) 등에 임명했다. 그 다음 혜제(惠帝) 4년(기원전 191년)에 장오(張敖)와 노원공주(魯元公主) 사이에서 태어났던 딸이 혜제(惠帝)의 황후가 되었다.(張皇后). 그리고 여후(呂后-기원전 187년) 원년(元年)에는 노원공주(魯元公主)가 사망했고, 그리고 또 동년(同年), 장오(張敖)와 노원공주(魯元公主) 사이에서 태어났던 장언(張偃)이 노왕(魯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여후(呂后) 6년(기원전 182년)에는 장오(張敖)도 사망했으며, 그러자 시호(諡號)로 무후(武侯)가 내려졌다. 그 다음 여후(呂后) 8년(紀元前180年)에 노왕(魯王) 장언(張偃)을 보필하기 위해서 여후(呂后)는 장오(張敖)의 전처(前妻) 소생이었던 장치(張侈)와 장수(張受)를 열후(列侯)에 봉했다. 하지만 여후(呂后)가 죽자 쿠데타가 일어나서 여(呂)씨(氏)가 멸해졌으며, 나머지는 장이(張耳)에서 소개했던 것과 같다.


 ----------------------------------------------------------------------------------------------

 
오예(吳芮-?부터 기원전 202년)는, 진(秦) 말부터 전한(前漢)의 군웅(群雄)이었고, 초대 장사왕(長沙王)이었으며, 유방(劉邦)을 황제(皇帝)로 추천했던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그리고 장이(張耳)와 함께 천수(天壽)를 누렸으며, 자손에게 왕위도 계승했고, 그 중에서 장사왕(長沙王)은 제일 오래 지냈던 왕위였다. 그는 원래 진(秦)의 번양현(番陽縣)에서 현령(縣令)을 지냈던 사람이었는데, 장강(長江), 번양호(番陽湖) 일대(一帶)에서 백성들에게 추앙받았고, 그래서 번군(番君)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시황제(始皇帝)가 죽고 반란이 일어나자 영포(英布)가 그를 따랐으며, 그러자 또 그는 자신의 딸을 그 영포(英布)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월(越)의 백성들을 이끌고 반란에 가담했다. 그 후, 유방(劉邦)이 남양(南陽)을 공격했을 때, 오예(吳芮)의 장수(將帥)였던 매견(梅鋗-그러나 매현이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바람)을 만나서 함께 남양(南陽)을 공략했다.

 참고: 매견(梅鋗)의 조상은 원래 춘추시대 구천(句踐)의 후예였다고 하며, 월(越)이 망한 후에 단양(丹陽-현재의 江蘇省)으로 도주해서 성을 매(梅)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진(秦)이 초(楚)를 멸망시킨 후에는 다시 남해군(南海郡-현재의 廣東省)으로 도망을 갔으며, 진(秦) 말에 반란이 일어나자 매견(梅鋗)도 군사를 일으켜서 오예(吳芮)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원전 207년에 매견(梅鋗)은 오예(吳芮)의 명령을 받고 북상(北上)해서 진(秦) 토벌에 나섰는데, 그러던 중에 유방(劉邦)의 군대와 만나서 협공을 했다. 그리고 기원전 206년, 항우(項羽)에게 그 공적을 인정받아서 10만 호(戶)에 봉해져서 제후(諸侯)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고조(高祖) 원년(기원전 206년), 진(秦)이 멸망하자 오예(吳芮)는 항우(項羽)에 의해서 형산왕(衡山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후, 항우(項羽)는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와 오예(吳芮)에게 의제(義帝)를 죽일 것을 명령했다.(史記의 項羽本紀) 그 후, 시기는 불명하지만, 어쨌든 오예(吳芮)는 항우(項羽)에 의해서 형산왕(衡山王)의 지위를 박탈당했고, 그러자 그는 다시 번군(番君)으로 강격(降格)되었다. 그러자 그는 유방(劉邦)에게로 갔는데, 하지만 또 그 시기에 영포(英布)도 유방(劉邦)에게로 갔던지, 아니면 오예(吳芮)가 영포(英布)를 꾀여서 유방(劉邦)에게로 함께 귀순(歸順)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하지만, 어쨌든 그러자 유방(劉邦)은 오예(吳芮)를 높이 평가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후, 고조(高祖)5년(기원전 202년)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멸했고, 그러자 오예(吳芮)는 다른 왕들(異姓七王-楚王 韓信, 韓王 韓信, 淮南王 英布, 梁王 彭越, 趙王 張耳, 燕王 臧荼)과 함께 유방(劉邦)에게 황제(皇帝)의 존호(尊號)를 봉(奉)했다. 그리고 그해, 오예(吳芮)는 유방(劉邦)에 의해서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해에 사망했다. 그러자 그에게 문왕(文王)이란 시(諡)가 내려졌으며, 그리고 또 유방(劉邦)은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율령(律令)에 기록하도록 했다. 그 후, 장사왕(長沙王)은 그의 아들 오신(吳臣)이 계속해서 이었지만, 그러나 그 오신(吳臣)은 재위 중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고는 도주하다가 영포(英布)에게 살해되었다. 하지만 유방(劉邦)의 <유(劉)씨(氏)가 아니면 왕으로 세우지 않겠다!>라고 했던 맹세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도 오예(吳芮)의 자손들이 그 장사국(長沙國)을 승계했으며, 그것은 또 기원전 157년, 오차(吳差)가 자손없이 죽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

 장도(臧荼-?부터 기원전 202년)는, 진(秦)말에서 전한(前漢) 기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연(燕)의 장군이었는데, 후에 항우(項羽)를 따라서 진(秦)의 장한(章邯)에 의해서 포위되었던 조(趙)를 구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항우(項羽)를 따라서 관중(關中)으로 들어갔으며, 기원전 206년에 논공행상에 의해서 연왕(燕王)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원래 연왕(燕王)이었던 한광(韓廣)이란 자를 요동왕(遼東王)으로 보내버렸는데, 하지만 또 그해 안에 한광(韓廣)을 쳐서 멸하고는 요동(遼東)을 병합했고, 그 후에 연(燕) 전체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04년, 조(趙)의 진여(陳余)를 파(破)했던 한신(韓信)이 광무군(廣武君) 이좌차(李左車)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병(兵)을 휴식시켰던 것과 동시에 연(燕)으로 사자를 보냈다. 그러자 장도(臧荼)는 한신(韓信)에게 귀순했다. 그리고 기원전 202년에 그 역시도 유방(劉邦)에게 황제(皇帝)의 존호(尊號)를 봉했지만, 그러나 바로 그해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친정(親征)해서 반란을 제압했고, 그러자 또 장도(臧荼)는 포로로 잡혀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 후, 유방(劉邦)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노관(盧綰)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또 그때, 그의 아들 장연(臧衍)은 흉노로 도망을 갔다.

 --------------------------------------------------------------------------------------------

 
유장(劉長-기원전 199년부터 기원전 174년)은, 전한(前漢) 때의 인물로, 유방(劉邦)의 아들이었고, 회남자(淮南子)로 유명했던 유안(劉安)의 아버지였다. 그는 고조(高祖) 8년(기원전 199년)에 유방(劉邦)이 조(趙)를 방문했을 때, 조왕(趙王) 장오(張敖)가 자신의 측실이었던 조미인(趙美人)을 유방(劉邦)에게 헌상했는데, 그래서 태어났던 아이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 전, 조왕(趙王) 장오(張敖)의 신하였던 관고(貫高) 등의 유방(劉邦) 암살 계획이 발각되었고, 그러자 장오(張敖)도 그 조(趙)씨(氏)도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자 또 그 조(趙)씨(氏)는 자기가 유방(劉邦)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고 호소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 조(趙)씨(氏)의 동생이었던 조겸(趙兼)이 심식기(審食其)란 사람을 통해서 여후(呂后)에게 구명(求命)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여후(呂后)는 오히려 질투를 해서 그 말을 유방(劉邦)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 후로 심식기(審食其)도 더 이상 여후(呂后)에게 그에 대한 말은 제대로 하지를 못했다. 그러자 그 후, 그 조(趙)씨(氏)는 화가 나서 유장(劉長)을 출산하고는 자살을 해버렸다. 그러자 그때서야 유방(劉邦)은 후회를 하고는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인정했고, 그런 다음에 여후(呂后)에게 데려가서 키우게 했다. 그 후, 고조(高祖) 11년(기원전 196년)에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러자 그 후임으로 유장(劉長)이 선택되어서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졌다. 하지만 또 그 후, 유장(劉長)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잃고 여후(呂后)와 혜제(惠帝)의 그늘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래서 유방(劉邦)의 자식들이 모두 죽어나갔던 여후(呂后)의 시대에도 화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러던 중에도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구명(救命)하지 않았던 심식기(審食其)를 늘 원망했다. 그 후, 유장(劉長)은 성장하자 정(鼎-다리가 셋 달린 아주 큰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세졌다. 그리고 문제(文帝)가 즉위하자 가장 친한 친족이라는 이유로 법을 어기는 등, 방종하게 굴기도 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기원전 177년, 그가 장안(長安)에 입조(入朝)했을 때, 그는 평소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심식기(審食其)를 찾아가서 둔기로 때려서 죽이고는 종자에게 그 목을 베게 했다. 그리고는 웃통을 벗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나의 어머니가 체포되었을 때 심식기(審食其)는 여후(呂后)에게 간청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그 첫 번째의 죄! 그리고 또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와 그 자식에게도 죄가 없었는데, 그러나 여후(呂后)는 그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그때도 심식기(審食其)는 여후(呂后)를 말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 두 번째의 죄! 그리고 또한 여후(呂后)가 여 씨(呂氏)를 왕으로 세웠을 때도 그는 말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이 또 그 세 번째의 죄가 되느니라! 하여, 나는 단지 천하의 도적을 처형한 것일 뿐이며, 또한 내 어머니의 원수를 갚았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의 심정을 이해하고, 또 같은 형제란 이유로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때부터는 문제(文帝)의 어머니였던 박(薄)태후와 황태자, 그리고 또 대신(大臣)들 모두 다 유장(劉長)과 가까이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귀국(歸國)하여 더욱 교만해졌고, 한(漢)의 법률도 무시하고 스스로 법령을 제정했으며, 또한 천자(天子)의 제도(制度)를 이용하는 등, 불손한 일을 상서(上書)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것을 강하게 꾸짖고는 외척이었던 장군 박소(薄昭)에게 시켜서 그에게 충고하는 글을 내렸다. 그러자 유장(劉長)은 몹시 불쾌해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174년, 유장(劉長)이 시무(柴武-劉邦 때의 장군)의 상속자였던 시기(柴奇) 등과 함께 반란을 계획했다는 정보가 있어서 조사가 있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그들을 처형할 것을 상주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차마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승낙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하들의 재촉이 있자 하는 수 없이 그를 왕위에서 폐하고 촉(蜀)으로 유배 보내기로 결정을 했다. 그러자 또 그때, 원앙(袁盎)이 나서서 문제(文帝)에게 이렇게 상주(上奏)했다. <유장(劉長)은 아주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그렇게 유배를 보내시게 되면 스스로를 참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폐하께서는 동생을 죽였다는 오명(汚名)을 안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또 문제(文帝)가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그에게 고통을 주어서 반성하게 하고, 그런 다음에 다시 원래대로 보내줄 생각이오!> 하지만 유장(劉長)은 유배를 떠나던 길에 이렇게 말을 했다. <나를 용사(勇士)라고 추켜세웠던 사람이 도대체 누구였던가? 나는 너무도 교만해서 남의 충고도 듣지 않았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 꼴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호송 중에 일절(一切) 곡기(穀氣)를 끊더니, 결국에는 굶어서 죽어버렸다. 하지만 옹현(雍縣)이란 곳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고, 그러자 또 그가 타고 갔던 수레를 확인하지 않았던 관리들에게 책임이 추궁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옹현(雍縣)이란 곳에는 유장(劉長)의 묘와 함께 30가(家)의 묘수(墓守)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 문제(文帝)는 자신의 일을 후회하고는 유장(劉長)에게 여왕(厲王)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기원전 172년), 그의 자식 3명에게는 회남(淮南)을 3분(分)해서 각각 왕에 봉했다.(기원전 164년)

 -----------------------------------------------------------------------------------------------


 유안(劉安-기원전179부터 기원전122)은,
중국 전한(前漢)의 학자였고, 한나라 고조의 손자로, 회남왕에 봉하여졌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많은 문사(文士)를 식객으로 맞아서 <회남자>를 편찬했지만, 그러나 현재는 그 일부인 만이 전한다.(나머지는 후술 또는 생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장이(張耳-?부터 기원전 202년)는, 진(秦) 말에서 전한(前漢) 초기까지 활약했던 무장이었고, 조왕(趙王)이었다. 그리고 출신은 위(魏)의 대량(大梁)이었으며, 청년시대에는 위(魏)의 공자(公子)였던 신능군(信陵君)의 식객(食客)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신능군(信陵君)이 정치에서 떠나는 등, 여러 가지 사정이 생겼기 때문에, 외항(外黃)이란 곳으로 이주(移住)했다. 그리고 그 후, 현지(現地)의 부호(富豪)였던 사람의 딸과 결혼을 했으며, 그 후에는 또 그 처가(妻家)의 도움을 받아서 그곳의 현령(縣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 장남(이름은 不詳)과 차남이었던 장오(張敖)가 태어났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그 후, 동향(同鄕)의 진여(陳余)가 장이(張耳) 밑에서 벼슬했을 때, 그 두 사람의 사이가 마치 부자(父子)와도 같았다고 하고, 그래서 또 그들은 일찍이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가 그랬던 것처럼 그 두 사람도 <서로의 목을 잘라도 좋다>라고 하는 <문경(刎頸)의 교(交際)>를 맺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바로 그 시기에 서민(庶民)이었던 유방(劉邦)이 장이(張耳)의 식객을 지원했었고, 그러자 장이(張耳)가 그것을 수락했었기 때문에 유방(劉邦)은 잠시나마 장이(張耳)의 그늘에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25년에 위(魏)가 진(秦)에 멸망했고, 그러자 장이(張耳)와 진여(陳余)는 이름을 바꾸고 진(陳)에 있던 어느 동네로 가서 그곳의 수위(守衛-문지기)가 되었다. 그것은 또 그때, 이미 그 두 사람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또 진(秦)에서 그들 두 사람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그때, 진여(陳余)가 그곳의 어느 말단관리와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에 몰매를 맞는 일이 생겼는데, 그러자 장이(張耳)가 진여(陳余)에게 이렇게 말을 하면서 위로했다. <장래를 위해서라도 쓸데없는 일로 목숨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 후, 진승(陳勝)이 봉기(蜂起-기원전 209년)하자 두 사람은 그 즉시 그곳으로 달려가서 봉기에 참가했다. 그러자 진승(陳勝)은 그 두 사람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또 그 무렵, 진승(陳勝)이 왕이 되어야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장이(張耳) 등은 <진(秦)에 의해서 멸망했던 각국의 왕족을 옹립하지 않고 진승(陳勝) 스스로 왕이 된다면 사람들은 진승(陳勝)에게 사심(私心)이 있어서 봉기를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반대했지만, 그러나 진승(陳勝)은 그 말들을 묵살하고 장초(張楚-진승이 세웠던 나라 이름)의 왕이 되었다. 그러자 진여(陳余)는 당시 진(秦)의 지배하에 있었던 조(趙)를 공략하자고 진승(陳勝)에게 상신(上申)했고, 그러자 진승(陳勝)도 그 의견을 받아들여서 무신(武臣)이란 자를 총대장으로 삼고 그 아래에 소소(邵騷)란 자를 부장(部將)으로 그리고 장이(張耳)와 진여(陳余)는 그들의 보좌에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趙)를 토벌하기 위해서 출정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도중에 범양(范陽-현재의 北京)을 공략하려고 했을 때, 그곳의 변사(辯士)였던 괴통(蒯通)이란 자가 진영(陣營)으로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이곳의 군수(郡守)는 나와 오랜 지기(知己)입니다. 그러니 내가 그를 설득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무신(武臣) 등은 그의 말을 믿고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겼다. 그러자 그 설득은 성공했고, 그 후에 조(趙)를 완전히 제압했다.

 그러자 그 후, 장이(張耳)와 진여(陳余) 등이 무신(武臣)에게 다음과 같은 상신(上申)을 내놓았다. <진승(陳勝) 왕은 의심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그 공적은 필시 누군가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장군(武臣)의 신변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이곳(趙)의 왕이 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무신(武臣)도 그 의견을 받아들여서 그러한 뜻을 진승(陳勝)에게 주상(奏上)했다. 그러자 진승(陳勝)은 격노(激怒)했지만, 그러나 주위의 만류가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자 그 후에 장이(張耳)는 우승(右丞)상(相)이 되었으며, 소소(邵騷)는 좌승상 그리고 진여(陳余)는 상장군(上將軍)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후, 무신(武臣)은 조왕(趙王)이 되었지만, 그러나 진승(陳勝)은 그에게 진(秦)을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무신(武臣)은 진승(陳勝)이 마지못해서 자신을 왕위에 올렸다고 생각하고는, 그래서 자신의 지반(地盤)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부하 장군들을 대(代)와 연(燕) 등, 각지로 출병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지를 더욱 넓히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또 그러던 중에 원래 진(秦)의 장군이었던 이량(李良)이 진군(秦軍)에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증병(增兵)을 무신(武臣)에게 요청하기 위해서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또 그 도중에 그들은 무신(武臣)의 누나가 지나가던 행렬(行列)을 만났고, 그러자 그들은 예를 갖추기 위해서 부복(俯伏)했다. 하지만 또 그때, 잔뜩 취해있었던 그녀는 그가 이량(李良)인 줄을 모르고 그에게 실례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에 격노했던 이량(李良)과 그의 부하들은 그 무신(武臣) 누나와 행렬을 그 즉시 도륙한 후, 그대로 군(軍)을 몰아서 한단(邯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무신(武臣)과 좌승상 소소(邵騷)를 토벌해 버렸다.

 하지만 그때, 장이(張耳)와 진여(陳余)는 간일발의 차이로 그곳을 탈출해서 과거, 조(趙)의 공자(公子)였던 조헐(趙歇)을 왕에 옹립하고는 현인(賢人)들의 권유를 받아서 신도(信都)란 곳을 도읍으로 정했다. 그러자 그 사실을 전해들었던 이량(李良)이 곧 신도(信都)를 공격했지만, 그러나 진여(陳余)에게 패해서 진(秦)의 장한(章邯)에게로 도주했다. 그러자 또 장한(章邯)은 그 즉시 왕이(王離)를 신도(信都)로 보냈으며, 그 자신은 한단(邯鄲)의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이주시켰고, 그 성곽을 파괴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전해들었던 장이(張耳)는 조왕(趙王)과 함게 거록(鉅鹿)에서 농성에 들어갔으며, 진여(陳余)에게는 상산(常山)으로 가서 병사들을 모집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장한(章邯)에 의해서 양도(糧道)를 빼앗겼던 조군(趙軍)은 그때부터 굶주리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장이(張耳)는 진여(陳余)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자 결국 진여(陳余)가 원군을 데리고 왔지만, 그러나 그 원군들은 또 진(秦)의 대군을 보고는 기가 죽어서 추이를 관망만 하고있었고, 그것은 또 함께 원군으로 왔던 장이(張耳)의 차남 장오(張敖)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또 그런 모습에 격노했던 장이(張耳)는 진여(陳余)의 진영에 자신의 친족이었던 장염(張黶)과 진여(陳余)의 친족이었던 진택(陳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들려서 사자로 보냈다. <우리는 일찍이 문경(刎頸)의 교(交)를 나누었던 사이인데, 어째서 수만(數萬)의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가?! 싸우는 것도 함께 싸우고, 죽는 것도 함께 죽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진여(陳余)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도무지 움직이려 들려 하지 않았다. <여기서 함께 죽는다면 진(秦)만 이롭게 할뿐입니다! 그러니 조(趙)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또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이 진여(陳余)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매달렸다. <그렇다면 우리들을 여기서 함께 죽여서 조왕(趙王)과 장이(張耳)에게 신용(信用)을 세울 수 있도록 해주시오! 그 뒤의 일이야 우리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그러자 하는 수가 없었던 진여(陳余)가 그 두 사람에게 5천의 군사를 내주었다. 그러자 또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은 그 군사들을 이끌고 나갔지만, 그러나 진(秦)의 대군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병력이었고, 그래서 또 그들은 결국 전멸했다. 그러자 또 그런 상황을 지켜봤던 원군들은 더욱 움직이려들지 않았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즉 바로 낙성(落城) 직전에 항우(項羽)가 원군으로 달려왔고, 이어서 진군(秦軍)은 패퇴했다.

 그 후, 진여(陳余)가 거록(鉅鹿)에 입성(入城)했을 때, 장이(張耳)가 진여(陳余)에게 조왕(趙王)을 도우지 않았던 일을 책(責)하면서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의 행방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진여(陳余)는 앞에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고했다. 하지만 장이(張耳)는 진여(陳余)의 말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진여(陳余)가 그들을 죽였다고 생각하고는 진여(陳余)를 추궁했다. 그러자 또 진여(陳余)가 격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렇게까지 저를 믿지 못하신다면 사직(辭職)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군의 인수(印綬)를 내놓고 바로 화장실로 가버렸다. 그러자 또 장이(張耳)는 처음에는 그것을 거둬들일 마음이 없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식객(食客) 중 한명이 그에게 조언을 했고, 그러자 장이(張耳)는 그 조언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장군을 겸하려고 했다. 그런데 또 그때, 마침 화장실에 갔던 진여(陳余)가 돌아왔는데, 그런 사정을 알고는 장이(張耳)를 원망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수백(數百)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황하(黃河) 근처로 가서 어부(漁夫)가 되었다.

 그 후, 진여(陳余)의 군세(軍勢)를 자신의 지배하에 넣었던 장이(張耳)는 조왕(趙王) 헐(歇)을 신도(信都)에 남겨두고 제후들과 함께 함양(咸陽)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그 후였던 진(秦) 멸망 후, 항우(項羽)는 제후들을 대상으로 대규모적인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행했는데, 그러자 장이(張耳)의 명성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던 항우(項羽)는 그를 높이 평가해서 조(趙)를 이분(二分)하고는 그 한곳에 헐(歇)을 대왕(代王)으로, 장이(張耳)를 상산왕(常山王)에 봉했다.

 그러나 그때, 진여(陳余)는 진(秦) 공격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남피(南皮) 부근의 3현(縣)만 그에게 맡겨졌다. 그러자 진여(陳余)는 격노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 처우에 불복했다. <나와 장이(張耳)는 공적이 같은데, 어째서 나만 왕보다 아래인 후(侯)의 직을 주는가?!> 그리고는 당시, 항우(項羽)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제왕(齊王) 전영(田榮)을 찾아가서 군사를 빌렸다. 그리고는 거병해서 장이(張耳)를 공격했고, 그러자 장이(張耳)는 패주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때 대왕(代王)이 되어 있었던 헐(歇)을 영입해서 다시 조왕(趙王)에 옹립했다.

 그런 한편, 당시 도주를 계속하고 있었던 장이(張耳)는 자신을 왕의 자리에까지 올려주었던 항우(項羽)를 믿고 있었지만,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부하였던 점성술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조언을 들었다. <이제 머지 않아서 한왕(漢王) 유방(劉邦)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우(項羽)보다는 유방(劉邦)에게 의지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자 장이(張耳)는 옛날부터 잘 알고있었던 유방(劉邦)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조언을 받아들여서 유방(劉邦)이 있던 한중(漢中)으로 달려갔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장이(張耳)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자 그 후, 장이(張耳)는 한(漢)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드디어 초한전쟁(楚漢戰爭)이 시작되었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항우(項羽)를 견제하기 위해서 각국과 동맹을 맺어갔는데, 그런데 조(趙)와 동맹을 맺기 위해서는 그곳의 실력자였던 진여(陳余)의 승낙이 필수가 되었다. 그러자 또 아니나 다를까, 진여(陳余)는 그 동맹의 조건으로 장이(張耳)의 수급(首級)을 요구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기책을 써서 장이(張耳)와 닮은 죄수 한명의 목을 쳐서 그 머리를 진여(陳余)에게로 보냈다. 그러자 진여(陳余)는 그것을 받아보고 그 동맹을 승낙했는데, 그러나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05년 <팽성(彭城)의 싸움> 때 진여(陳余)는 장이(張耳)가 그때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러자 격노했던 진여(陳余)는 그 동맹을 다시 파기시켜 버렸다.

 그 후,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 대치하면서 한신(韓信)에게 별동대(別動隊)를 주어서 제국(諸國)을 평정한다는 작전을 채용했고, 장이(張耳)를 그 부장(部將)으로 따르게 했으며, 그 결과 위(魏)와 대(代)가 멸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조(趙) 공략에 나섰던 한군(漢軍)들은 이윽고 20만의 군세를 이끌고 나왔던 진여(陳余)의 부대와 대치하게 되었다.(井陘의 싸움) 그 결과, 한신(韓信)의 배수진(背水陣)에 의해서 한군(漢軍)이 승리했고, 그러자 진여(陳余)는 그곳에서 전사했으며, 이어서 조왕(趙王) 헐(歇)은 포로로 잡혀서 처형되었다.

 그 후였던 기원전 204년, 한신(韓信)은 진무(鎭撫)를 위해서 장이(張耳)를 조왕(趙王)에 봉하자는 건의를 유방(劉邦)에게 냈고, 그러자 그것은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2년 후였던 기원전 202년에 장이(張耳)는 사망했으며, 그러자 경왕(景王)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그 후, 차남 장오(張敖)가 그의 뒤를 이었는데, 그런데 그때, 장오(張敖)에게는 이미 처(妻)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서 태어났던 자식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유방(劉邦)의 딸이었던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다시 정실(正室)로 맞아들여야 했으며, 그 사이에 또 장언(張偃)이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그 장언(張偃)을 적자(嫡子)로 했다.

 하지만 기원전 198년, 조(趙)의 정위(廷尉-고대중국의 관명 중 하나로, 九卿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시대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함)였던 관고(貫高) 등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러자 장오(張敖)는 그 벌로 왕위를 박탈당했으며, 선평후(宣平侯)로 강격(降格)되었다.

 그 후였던 기원전 189년, 장오(張敖)도 사망했고, 그러자 적자였던 장언(張偃)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또 기원전 180년에 여치(呂雉)가 죽자 진평(陳平), 주발(周勃) 등의 원훈(元勳)들과 유방(劉邦)의 손자들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 결과 여치(呂雉)의 혈족들은 모두 처형당했고, 그러자 또 장언(張偃) 등도 숙청대상이 되었지만, 그러나 장언(張偃)은 노원공주(魯元公主)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작위(爵位)만 박탈하는 것으로 구명(求命)되었다. 하지만 또 그 대신으로, 장언(張偃)의 이모형(異母兄)이었던 장수(張壽)는 학창후<學昌侯-하지만 後漢書의 장포전(張酺傳)에 의하면, 지양후(池陽侯-汝南郡 蔡陽県)에 봉해졌다고 한다>에, 그리고 또 한사람이었던 이모형 장치(張侈)는 신도후(信都侯)에 봉해졌는데, 그들은 모두 장오(張敖)의 선처(先妻)가 생산했던 아들들이었다.

 아무튼, 그 후에 문제(文帝)가 즉위하자 장언(張偃)은 다시 작위를 받았는데, 그것은 남궁후(南宮侯)였다. 그리고 또 그 후, 번영을 누렸던 전한(前漢) 중기에 그 장(張)씨(氏)는 명가<名家-汝南郡 蔡陽県(細陽県)>가 되었으며, 그 후로도 그 장(張)씨(氏)의 번영은 계속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