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柴武-?부터 기원전 163년)는, 전한(前漢) 때의 인물이었고, 유방(劉邦) 휘하에서 활약했던 장군이었다. 성(姓) 시(柴)와 진(陳) 두 성(姓)이 전해져오고 있으며, 그래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서는 시무(柴武)와 진무(陳武) 두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그는 진(秦) 말,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설(薛)이란 곳에서 병졸 2500명을 거느리고 장군이 되었다. 그 후, 나름대로 활약을 하다가 기원전 205년에 한(漢)의 지휘 하로 들어갔고, 제(齊)와 싸워서 공적을 올렸다. 그 후, 해하(垓下)의 싸움에서는 주발(周勃)과 함께 유방(劉邦)의 후방을 지켰으며, 유방(劉邦)이 황제가 된 후였던 기원전 201년에는 열후(列侯)에 봉해져서 극포후(棘浦侯)가 되었다. 기원전 196년, 한왕(韓王) 신(信)이 흉노로 도망을 갔다가, 흉노 군을 이끌고 한(漢)으로 침범해왔을 때, 유방(乳房)은 시무(柴武)에게 신(信)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시무(柴武)는 신(信)에게 편지를 써서 다시 한(漢)에 귀순할 것을 독려했지만, 그러나 신(信)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싸우게 되었고, 그 결과 시무(柴武)는 흉노 군을 격파하고 신(信)을 처형했다. 그 다음 여후(呂后)8년이었던 기원전 180년, 드디어 여후(呂后)가 사망하고 쿠데타가 일어나서 여(呂)씨(氏)는 몰살되었다. 그러자 문제(文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때, 시무(柴武)는 대장군의 자격으로 문제(文帝)를 맞이했다. 문제(文帝) 즉위 직후, 그는 그때까지도 한(漢)을 따르지 않고 있었던 남월(南越)과 조선(朝鮮)을 토벌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하지만 문제(文帝)는 그의 뜻을 받아주지 않았고, 이어서 기원전 177년, 제북왕(濟北王)이었던 유흥거(劉興居)가 반란을 일으키자 문제(文帝)는 그에게 토벌을 명했다. 그러자 그는 대장군의 자격으로 출진해서 반란군을 격파했으며, 그러자 유흥거(劉興居)는 포로로 잡혔던 후에 자살했다. 그 후, 기원전 174년, 시무(柴武)의 아들이었던 시기(柴奇)가 유장(劉長)의 반란계획에 가담했다는 것이 발각되어서 주살(誅殺)당했다. 그 때문에 기원전 163년에 시무(柴武)가 사망했어도 극포후(棘浦侯)는 상속되지 못했고, 그래서 그 후에 단절되었다. 하지만 시무(柴武)에게는 강후(剛侯)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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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여(藺相如-생몰불상)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조(趙) 혜문왕(惠文王)의 신하였고, <완벽(完璧)>과 <문경(刎頸)의 교(交)> 고사(故事)를 남겼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그를 평하기를 <문무지용(文武知勇)의 장(將)이었다>라고 상찬(賞讚)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염파(廉頗) 인상여(藺相如) 열전(列傳)>에 의하면, 처음에 그는 혜문왕(惠文王)의 환관(宦官)이었던 무현(繆賢-정확한 이름을 찾지 못해서 일단 무현으로 표현함. 그러나 목현, 료현, 규현 등, 다양하게 표현한 곳이 많으므로, 참고바람)이란 자의 객인(客人)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현(繆賢)은 생몰불명의 사람으로, 전국시대 조(趙)나라 사람이었고, 기원전 280년경에는 환자령(宦者令-內侍令)이라는 환관(宦官)들을 관리하는 관직에 있었다. 그리고 초(楚)나라의 보물이었던 <화씨(和氏)의 벽(璧)=和氏之璧으로, 완벽귀조(完璧歸趙-중국에서 부르는 말) 고사(故事)의 연유가 되었던 것이며, 중국 춘추시대에 있었다는 희귀한 구슬을 말함>을 조(趙)의 혜문왕(惠文王)이 손에 넣었을 때, 진(秦)의 소왕(昭襄王)이 그 말을 전해 듣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진(秦)의 15성(城)과 그것을 바꾸고 싶다...> 그러자 조왕(趙王)은 그에 대해서 군신(群臣)들과 의견을 나누었는데, 그런데 그 의견에서 <만약에 그 벽(璧)을 진(秦)에 주게 되면 진(秦)은 그 벽(璧)만 취하고 성(城)은 주지 않을 것이므로, 조(趙)는 세상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는 의견과 <하지만 그 벽(璧)을 진(秦)에 주지 않으면, 진(秦)은 그것을 구실로 해서 조(趙)를 공격해올 것이 자명하다>라는 의견 등으로 해서 그 의논은 쉽게 결정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다 또 그 답을 진(秦)에 전해줄 사자(使者)조차도 나서는 자가 없었는데, 그런데 바로 그때, 무현(繆賢)이 나서서 인상여(藺相如)를 그 사자(使者)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을 했다. 그러자 조왕(趙王)이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러자 또 무현(繆賢)이 이렇게 답을 했다. <제가 일찍이 죄를 지었을 때, 연(燕)으로 도망을 가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의 객인(客人)인 인상여(藺相如)가 그것을 반대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왜 연(燕)으로 가려는 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 내가 왕을 모시고 국경으로 가서 연왕(燕王)을 만났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연왕(燕王)이 나의 손을 잡고는 나와 교제하기를 원한다고 말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연(燕)으로 도망가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조(趙)는 강국(强國)이며, 연(燕)은 약소국입니다. 그리고 그때, 연왕(燕王)이 당신에게 그렇게 말을 했던 것은 당신이 조왕(趙王)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금 그 연(燕)으로 도망을 간다면 연왕(燕王)은 오히려 당신을 부담스러워 할 것이고, 그것은 또, 그 일로 해서 연(燕)이 조(趙)로부터 미움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된다면 또, 당신은 오히려 그곳에서 체포되어서 조(趙)로 다시 돌려보내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연(燕)으로 도망가는 대신 자수를 하시고, 그리고는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한다면, 오히려 죄를 사함 받는 은혜를 받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말을 따랐고, 그러자 또 그 결과로 왕께서는 저의 죄를 용서하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가 용기와 함께 지모(智謀)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 그 자를 사자(使者)로 추천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인상여(藺相如)를 불러서 이렇게 물었다. <진(秦)의 왕이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해왔는데, 내가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겠는가?!> 그러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대답했다. <진(秦)은 현재 조(趙)보다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또 혜문왕(惠文王)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만약에 진(秦)이 그 벽(璧)만 취하고 성(城)을 우리에게 주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대답했다. <네, 일단 조(趙)에서 그것을 거절하게 되면, 그것은 진(秦)에 구실을 주는 것이 되고(趙에 罪가 있다는 뜻), 하지만 또 진(秦)이 그 벽(璧)을 취하고서도 성(城)을 넘기지 않는다면, 그때는 진(秦)에 무리(無理)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그때는 오히려 秦이 道理가 없게 된다는 뜻). 그러므로 일단 그 벽(璧)을 진(秦)에 넘겨주고, 진(秦)에 그 무리(無理)의 짐을 지우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자 또 혜문왕(惠文王)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사자(使者)로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는가?>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말을 했다. <만약에 적당한 사람이 없다면 저라도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진(秦)이 그 약속을 지킨다면 저는 그 벽(璧)을 진(秦)에 넘겨주고 올 것이고, 그러나 진(秦)이 그 약속을 어긴다면, 저는 그 벽(璧)을 조(趙)로 온전히(完璧) 다시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그를 사자(使者)로 결정했다.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는 그 벽(璧)을 가지고 서향(西向)해서 진(秦)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진(秦)에 도착했을 때, 진왕(秦王)은 장대<章臺-옛날, 중국의 장안(長安) 서남쪽 한편에 있었다던 누대(樓臺). 그러나 여기서는 궁전의 누대(樓臺)를 의미함> 전상(殿上)에서 그를 맞이했고,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는 그 벽(璧)을 진왕(秦王)에게 헌상했는데, 그러자 또 진왕(秦王)은 그것을 한번 살펴보고는 자기 옆에 있던 시녀(侍女)들과 시종(侍從)들에게 돌려보게 했다. 그러자 그것을 돌려봤던 시녀와 시종들이 만세(萬歲)를 부르면서 축하의 말들을 쏟아냈다. 그러자 또 그것을 지켜봤던 인상여(藺相如)는 진왕(秦王)이 그 대가로 성(城)들을 넘겨줄 마음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벽(璧)에는 흠(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것을 왕에게 가리켜 보이겠습니다> 그러자 진왕(秦王)이 시종에게 시켜서 그것을 인상여(藺相如)에게 반환하게 했다.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는 그것을 받아들고 큰 기둥 뒤로 돌아가서 진왕(秦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이 벽(璧)은 천하의 보물이기 때문에 진왕(秦王)은 5일간 재계(齋戒)한 후에 취하는 것이 마땅하며, 하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고 진왕(秦王)이 이것을 강제로 취하려든다면, 저는 이 벽(璧)과 함께 저의 머리를 기둥에 부딪혀서 깨어버릴 것입니다!> 그러자 진왕(秦王)은 그것을 강제로 취할 수는 없겠다고 판단해서 인상여(藺相如)의 뜻대로 5일간 재계(齋戒)할 것을 약속했지만, 그러나 인상여(藺相如)는 그 진왕(秦王)이 5일간 재계(齋戒)를 한 후에도 성(城)을 돌려줄 마음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그 사이에 자신이 데려왔던 종자에게 그것을 맡겼다. 그리고는 비밀리에 조(趙)로 다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자신의 용기와 지략(智略)으로 그 벽(璧)을 완전하게(完璧) 조(趙)로 다시 반환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무현(繆賢)에 대해서 더 알려진 것은 없으며, 인상여(藺相如)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고싶으신 분은, 史記列傳 二巻 廉頗・藺相如 列伝 第二十一을 참조바랍니다.
아무튼, <화씨(和氏)의 벽(璧)>에 대한 고사(故事)와 <완벽(完璧)>에 대해서는 무현(繆賢)에서 소개한 것을 참조바라며, 하지만 또 그것과 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어쨌든 또 다른 내용이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인상여(藺相如)는 그렇게 해서 진(秦)의 수도였던 함양(咸陽)으로 들어가서 진(秦)의 소양왕(昭襄王)과 대면했다. 그리고는 그 벽(璧)을 헌상하자 소양왕(昭襄王)은 그것을 살펴보고는 자신의 총희(寵姬)들과 군신(群臣)들에게 돌려가면서 보게 했다. 하지만 그 태도로 보아서 성(城)을 조(趙)에 넘길 마음이 없다고 판단했던 인상여(藺相如)는 그 벽(璧)에는 작은 상처가 하나 있는데, 그래서 자신이 그것을 가르쳐주겠다고 하고는 벽(璧)을 다시 돌려받았다. 그런 다음에는 그 옆에 있던 기둥으로 달려가서 그 기둥에 기대고는 관(冠)이 추켜올려지고, 몹시 노(怒)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을 했다.<노발충관(怒髮衝冠)의 어원(語源)이 되었던 상황으로, 노하여 일어선 머리카락이 관을 추켜올린다는 뜻이며, 몹시 화가 난 모양을 이르는 말> <조(趙)에서는 진(秦)을 의심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그러자 조왕(趙王)은 진왕(秦王)을 믿고 저를 이곳으로 보냈소! 그리고 진왕(秦王)이 5일간 몸을 정갈히 한 후에 이것을 전하라고 했소! 그런데도 진왕(秦王)은 너무나도 무례하게 이 벽(璧)을 취급했소! 그러므로 나는 이 벽(璧)과 함께 내 머리를 이 기둥에 찧어서 깨어버릴 것이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은 당황해서 지도를 가져오라고 신하들에게 시켰다. 그리고는 그 15개 성(城)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하지만 그것은 인상여(藺相如)를 달래기 위한 수작이었을 뿐, 소양왕(昭襄王)이 여전히 성(城)을 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인상여(藺相如)는 일단 소양왕(昭襄王)이 그 벽(璧)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 또는 예의로 5일간 재계(齋戒)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이 그에 따랐는데, 그러자 그는 그 사이에 자신이 데려왔던 종자(從者)에게 그것을 들려서 비밀리에 조(趙)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고, 그 자신은 그곳에 남아서 그 종자가 조(趙)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그 5일 후, 재계(齋戒)를 마쳤던 소양왕(昭襄王)이 그에게 벽(璧)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이미 그 벽(璧)은 조(趙)로 다시 돌려 보내졌다고 말을 하고는, 그 이유는 진왕(秦王)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또, 그 15성(城)을 지금이라도 넘겨준다면 조(趙)는 그 벽(璧)을 다시 돌려줄 수도 있다고 하면서, 하지만 또 무례를 범한 자신에게는 사죄(死罪)를 내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군신(群臣)들은 인상여(藺相如)를 죽일 것을 진언했는데, 하지만 그의 강담(剛膽)에 감탄했던 소양왕(昭襄王)은 <그를 죽인들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차라리 조(趙)의 원망만 살뿐이다!>라고 말을 하고는 그를 용서했다. 그리고는 또 그 일은 없었던 일로 하기로 결정을 했으며, 인상여(藺相如)는 후한 대접을 받고 무사 귀국했다. 그리하여 그의 지혜와 용기는 세상이 칭송하게 되었고, 특히 그 막강 진(秦)을 상대하면서도 한발도 물러섬이 없었던 그의 태도와 함께, 약속했던 대로 그는 그 벽(璧)을 완벽(完璧)하게 지켜냈으며, 그에 더해서 조(趙)의 체면까지도 세워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79년에, 진(秦)으로부터 혜문왕(惠文王)에게 민지(黽池-현재의 河南省 澠池県)에서 양국의 우호를 축하하자는 뜻의 초대가 왔다. 그러나 그때, 그 민지(黽池)는 당시 진(秦)의 영토 내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만일의 경우에 왕을 구원하기 힘들다는 의미로, 왕이 직접 그곳으로 가는 것은 곤란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것은 또 그 화씨(和氏)의 벽(璧) 사건에서도 보여주었던 것처럼, 진(秦)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런데다 또 그 후에도 진(秦)은 자주 조(趙)를 침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조(趙)에서는 그에 대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때, 염파(廉頗) 등이 이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또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왕이 그 자리에 나가지 않는다면 진(秦)은 조(趙)가 약하고 비굴하다고 생각해서 더욱 거만해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또 제후들조차도 조(趙)를 깔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또 왕이 인상여(藺相如)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도 염파(廉頗) 등의 말에 동조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러시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만약에 내가 30일 안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태자를 왕위에 올리고 그에 대한 복수를 해달라!>라고 말을 했고, 그러자 신하들은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그 자리에 나갈 것을 결심했고, 그렇게 해서 일행은 민지(黽池)로 갔다. 그리고 이윽고 축연이 열리자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이 이렇게 말을 했다. <조왕(趙王)께서는 음악을 아주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양국의 우호를 축하하기 위해서 비(琵-琵琶)를 한번 연주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그 뜻을 흔쾌히 받아들여서 비(琵) 한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그 직후에 소양왕(昭襄王)이 기록관에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라고 시켰다. <진왕(秦王)이 조왕(趙王)에게 비(琵)를 연주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 들어도 진(秦)이 조(趙)를 신하 취급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나서서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진(秦)에서는 연석(宴席)에서 부(缻=缶=우리나라 타악기의 하나로, 진흙으로 구워서 화로같이 만든 것. 아홉 조각으로 쪼개진 대나무 채로 변죽을 쳐서 소리를 냄. 그러나 秦의 것도 같은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음)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관습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부(缻)를 소양왕(昭襄王)에게 주면서 이렇게 또 말을 했다. <그러므로 왕께서도 양국의 우호를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이 부(缻)를 한번 두드려주십시오!> 그리고 또 그때, 진(秦)에서는 분명히 그런 풍습이 있었지만, 그러나 또 중원(中原) 제국(諸國)에서는 그런 것을 천(賤)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 인상여(藺相如)의 그런 행위는 진왕(秦王)에게 무례를 범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소양왕(昭襄王)은 몹시 불쾌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인상여(藺相如)는 그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또 이렇게 말을 했다. <현재 저와 왕의 거리는 대충 다섯 보(步)정도! 그러므로 저의 목을 베신다면 그 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秦王이 덮어쓴다는 뜻으로, 秦王의 몸이 더럽혀진다는 의미)> 그리고는 또 넌지시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저는 여기서 왕과 함께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협박을 했다. 그러자 그 기백(氣魄)에 압도당했던 진왕(秦王)은 망설임 없이 부(缻)를 한번 두드렸다. 그러자 또 그 기회를 놓칠세라 인상여(藺相如)는 재빨리 기록관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국사(國史)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시오! 조왕(趙王), 진왕(秦王)에게 부(缻)를 두드리게 했다!> 그리고는 또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왕 덕분에 이 축연은 더욱 의미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그 후에 진(秦) 신하 한명이 혜문왕(惠文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 왕(秦王)의 장수(長壽)를 축하하는 의미로 귀국(貴國-趙)의 15성(城)을 헌상함이 어떻겠습니까?>
참고: 위, 사신(使臣)의 진의(眞意)는, 진(秦)은 조(趙)의 15성(城) 정도는 쉽게 빼앗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전에 조(趙)가 미리 스스로 헌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의미와 함께, 속국(屬國)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하라는 것이었고, 그리고 15성(城)을 강조했던 것은 앞의 그 벽(璧) 건에 대한 앙금을 나타냈던 것이었다.
그러자 또 그때도 인상여(藺相如)가 나서서 또 이렇게 말을 했다. <귀국(貴國)에서야말로 우리 왕의 장수를 축하하기 위해서 수도 함양(咸陽)을 헌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그 사신(使臣)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렇게 때마다 나서서 자신의 기백과 기치로 문제를 해결했던 인상여(藺相如)는 그 후에 조왕(趙王)과 함께 무사히 귀국했다. 그래서 결국 진왕(秦王)은 그때 조(趙)를 굴복시키지 못했으며, 인상여(藺相如) 덕분에 조(趙)는 진(秦)에 대해서 체면을 세울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에 인상여(藺相如)는 그 공적으로 해서 상경(上卿-大臣 급)이 되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그런 그의 급진적인 출세를 시기했던 사람은 또 있었는데, 그런데 그가 바로 당시에 역전(歷戰)의 용장(勇將)으로 불리고 있던 염파(廉頗)였고, 그래서 또 당시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인상여(藺相如)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한번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모욕을 주겠다!>라는 말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하지만 또 그는 당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서 장군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군인으로, 그래서 또 변설(辯舌)만으로 자기보다 위의 자리에 올랐던 인상여(藺相如)가 눈엣가시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랬는데,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염파(廉頗)와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칭병(稱病)하고 집 안에만 들어앉아있었다든가, 궁(宮)에 들어갈 때도 가능하면 염파(廉頗)가 없던 날을 골라서 입궁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인상여(藺相如)는 거리에서 우연히 그 염파(廉頗)를 목격했고,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는 재빨리 자신의 몸을 숨겨서 그와 만나는 것을 피했다. 그러자 그날 밤에 그가 부리고 있던 종자(從者)들이 인상여(藺相如)에게 이렇게 항의했다. <저희들이 일가친척들을 떠나서 당신(上卿)을 모시고 있는 이유는 당신의 고의(高義-두터운 인정과 의리)를 흠모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여주신 당신의 모습은 필부(匹夫)에도 미치지 못할 아주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하여, 우리들은 더 이상 당신을 모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말을 했다. <너희들은 진왕(秦王)과 염파(廉頗) 중에서 누가 더 무서운가?> 그러자 종자들이 이렇게 답을 했다. <물론, 진왕(秦王)이지요!>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진왕(秦王)을 꾸짖었고 그 신하들을 나무랐다. 그런데도 내가 하물며 염파(廉頗) 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리고 또 내가 알기로 현재 진(秦)이 조(趙)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나와 그 염파(廉頗) 장군이 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와 그 염파(廉頗) 장군이 싸우게 된다면 그것은 양호상토(兩虎相討)의 형국이 되어서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다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또 진(秦)이 바라는 것으로, 그래서 나는 개인의 싸움보다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러자 종자들이 모두 그의 깊은 뜻을 알고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또 그 후에 그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고, 그러자 또 그것은 자연스럽게 염파(廉頗)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서야 자신의 경솔함을 인정했던 염파(廉頗)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인상여(藺相如)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윗도리를 벗고 앉아서 스스로 가시나무로 자신의 등을 때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 비천한 자가 당신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당신에게 주었던 모욕에 비하면, 이런 나의 체벌은 오히려 부족한 것입니다!>
참고: 위의 고사(故事)로, 그렇게 본심(本心)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속죄(贖罪)하는 것과, 스스로 찾아가서 벌을 받는다는 의미의 육단부형<肉袒負荊-윗옷 한쪽을 벗고, 등에 형장(刑杖-예전에 죄인을 신문할 때에 쓰던 몽둥이)을 지고 간다는 뜻으로, 형장으로 맞아 사죄하겠다는 뜻을 나타냄을 이르는 말> 또는 육담부형(肉担負荊) 또는 부형(負荊)의 어원(語源)이 되었다.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말을 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군께서 계시기 때문에 바로 이 조(趙)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또 그에 감복했던 염파(廉頗)가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 목숨을 버린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맹세했다. <저 역시, 장군을 위해서라면 기쁘게 죽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날, 그 두 사람은 서로의 경(頸-首)을 자른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기로 맹세를 했다. 그리고 또 바로 그것이 <문경(刎頸)의 교(交)> 또는 <문경(刎頸)의 우(友)>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아무튼 그 후에도 진(秦)은 그 두 사람 때문에 조(趙)를 공격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세월이 지나자 인상여(藺相如)는 병이 들었고, 염파(廉頗)는 늙었다. 그리고 왕도 혜문왕(惠文王)에서 효성왕(孝成王)으로 바뀌었는데, 그러자 진(秦)에서는 왕흘(王齕)이란 장군에게 조(趙)를 공격할 것을 명했다. 그러자 또 조(趙)에서는 염파(廉頗)를 대장군으로 해서 진군(秦軍)을 맞았고, 그것이 바로 <장평(長平)의 싸움>이었다.(더욱 상세한 것은 참고 6-26 참조바람) 그리고 그 후, 인상여(藺相如)는 병사했고, 염파(廉頗)는 위(魏)와 초(楚)로 망명했다.
<염파(廉頗) 계속...>
그 장평(長平)의 싸움 후, 조(趙)의 쇠퇴를 지켜봤던 연(燕)의 왕 희(喜)가 조(趙)를 침공했다. 그러자 염파(廉頗)는 그 노구(老軀)를 이끌고 나가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백향현(柏鄕縣) 북부에서 대승했다. 그리고는 그 기세를 몰아서 연(燕)으로 쳐들어갔으며, 이어서 수도 계(薊)를 포위했다. 그러자 연(燕)은 다섯 개의 성(城)을 조(趙)에 넘겨주고 화해했다, 그러자 진(秦)도 함부로 조(趙)를 침공하지 못했는데, 그러자 또 효성왕(孝成王)은 그 공적을 칭송해서 그에게 위문(尉文)이란 곳을 주면서 신평군(信平君)에 봉했다. 그리고 기원전 251년에 평원군(平原君)이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공석(公席)을 그에게 주면서 상국(相國) 대행에 임명했다. 기원전 245년, 염파(廉頗)는 위(魏)를 침공해서 번양(繁陽-지금의 河北省 内黄県)의 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에 효성왕(孝成王)이 사거했고, 그러자 그 자리를 도양왕(悼襄王)이 이었는데, 그러나 그 도양왕(悼襄王)은 염파(廉頗)를 장군 직에서 파면했다.(悼襄王은 태자 때부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자 염파(廉頗)는 자신의 후임이 되었던 악승(樂乘)이란 자를 공격해서 격파했으며, 그 때문에 조(趙)를 떠나서 위(魏)의 대량(大梁-지금의 河南省 開封市 西北)으로 망명했다. 그러자 그 악승(樂乘)도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 그 후, 위(魏)에서는 염파(廉頗)를 신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활약은 없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진(秦)에서는 정(政-나중의 始皇帝)이 즉위해서 강국이 되어 있었고, 그러자 또 조(趙)도 그 표적이 되었다. 그러자 또 조(趙)에서는 다급했던 나머지 염파(廉頗)에게 사자를 보내서 다시 조(趙)로 돌아올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또 평소에 조(趙)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염파(廉頗)는 그것을 받아들였는데, 그러나 또 그때, 옛날부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간신(奸臣) 곽개(郭開)란 자가 모략을 써서 그 사자(使者)를 매수했다. 그러자 그 사자(使者)는 도양왕(悼襄王)이 염파(廉頗)에 대해서 묻자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삼도유실(三度遺失)!>
참고: 하지만 당시, 염파(廉頗)는 그 노령(老齡)에도 <한번 식사에 두미(斗米-쌀 한 말)와 육(肉) 10근(斤)을 먹고,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랐다>라고 했을 만큼 혈기왕성한 모습을 그 사자(使者)에게 보였다고 했는데, 그러나 그 사자(使者)는 곽개(郭開)란 자에게 매수되어서 도양왕(悼襄王)에게 염파(廉頗)가 삼도유실(三度遺失)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고, 그 뜻은 또 <사자(使者)와 회담 중에 세 번이나 소변을 보기 위해서 화장실로 갔다> 또는 <사자(使者)와 회담 중에 세 번이나 실금(失禁)을 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도양왕(悼襄王)은 크게 실망해서 그를 포기했다. 그러자 또 염파(廉頗)는 초(楚)로 다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장군에 임명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별 공도 세우지 못하고 수춘(壽春)에서 병몰(病沒)했다. 그러자 그 후, 사마천(司馬遷)은 그에 대해서 직접적인 평(評)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또 소자고사(蘇子古史)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해서 <국가(趙)의 주석(柱石)>이라고 평(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