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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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劉盈=惠帝)은, 전한(前漢)의 제2대 황제였고, 생년은 기원전 210년과 기원전 213년 2가지의 설이 있으며, 몰년(沒年)은 기원전 188년, 재위기간은 기원전 195년부터 기원전 188년까지였다. 그리고 유방(劉邦)의 아들이었으며, 여치(呂雉)의 아들, 노원공주(魯元公主)의 동생이었다. 그리고 앞의 이야기는 이미 소개되었거나, 자료가 없으므로 생략하며, 그 후에 유방(乳房)이 황제에 즉위하자 그는 황태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과 달리 그는 온화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항상 유방(劉邦)의 노여움을 샀다. 그래서 유방(劉邦)은 척(戚)씨(氏)의 아들이었던 유여의(劉如意)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는데, 그러자 여치(呂雉)가 자신의 일족들과 장량(張良) 등의 도움을 받아서 그의 자리를 확고히 해주었다. 그 후, 유방(劉邦)이 죽자 그는 황제에 즉위했지만, 그러나 정치는 여치(呂雉)의 몫이었다. 그러자 여치(呂雉)는 혜제(惠帝)의 유력(有力)한 정적(政敵)이었던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와 그의 생모 척(戚)씨 등을 살해했으며, 그러자 또 그 여치(呂雉)의 잔학했던 만행에 충격을 받았던 혜제(惠帝)는 그때부터 정치를 방기(放棄)하기 시작했고, 주색(酒色)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23세(또는 26세라는 설도 있음)에 사망했다. 아무튼 그는 그렇게 온화하고 나약한 성격의 인물이었지만, 그러나 많은 중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유방(劉邦)이 자주 친정(親征)을 나갔을 때도 그는 그 자리를 잘 지켜냈던 면도 있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여치(呂雉)가 유여의(劉如意)를 죽이려고 기도했을 때, 그는 스스로 그 유여의(劉如意)와 함께 침식(寢食)을 하면서 유여의(劉如意)를 지켜내려고 노력했던 바 있었으며, 그리고 또 그에 의해서 상석(上席)을 차지했던 서장자(庶長子) 유비(劉肥)에게 여치(呂雉)가 독배(毒杯)를 내렸을 때도 그는 그 잔을 자신이 마시겠다고 했던 등(그러자 呂雉가 당황해서 그 잔을 엎질렀고, 그래서 劉肥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약 또는 좋은 의미의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사기(史記)는 기록했다. 그리고 또 한서(漢書-恵帝紀)에서는 시황제(始皇帝) 시대부터 계속해서 내려왔던 분서(焚書)를 중단시켰던 것은 유방(劉邦)이 아니라 바로 그였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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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戚)씨(氏) 또는 척부인(戚夫人-?부터 기원전 194년)은, 진(秦)말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인물로, 유방(劉邦)의 측실이었으며, 유여의(劉如意)의 생모였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의(懿)였다고 하며, 상체를 뒤로 크게 젖히는 초무(楚舞-초나라의 춤)를 잘 추었고, 유방(劉邦)이 원정 중이었을 때는 유방(劉邦)과 함께 장기(將棋-將棊)도 두었다고 한다. 그녀는 기원전 208년경 초한전쟁 중에 유방(劉邦)을 만났고, 그 후에 총애를 받아서 유여의(劉如意)를 생산했다. 그러자 그 후에 유여의(劉如意)는 대왕(代王), 이어서 조왕(趙王)에 봉해졌고, 황태자가 유력시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또 그녀가 유방(劉邦) 친정(親征) 시에 자주 그런 뜻을 유방(劉邦)에게 간청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마음이 흔들렸고, 유영(劉盈)과 달리 활발한 성격이었던 유여의(劉如意)를 주목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신들에 의해서 좌절되었고, 거기다 장량(張良)이 유영(劉盈)에게 조언을 해서, 전에 유방(劉邦)도 초빙에 실패했던 당시의 유명했던 학자들이 스스로 찾아왔던 것이 결정적이 되어서 유방(劉邦)은 그 뜻을 접게 되었으며, 그러자 유여의(劉如意)는 조왕(趙王)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은 결국 여치(呂雉)를 화나게 했다. 그래서 기원전 195년에 유방(劉邦)이 죽자, 여치(呂雉)는 그 보복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선, 여치(呂雉)는 그 척(戚) 씨를 잡아와서 영항<永巷-죄지은 여관(女官-궁녀 등)들을 가두었던 감옥>에 감금했고, 매일 콩을 찢는 벌을 내렸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이 <영항가(永巷歌)>였다고 한서(漢書)는 기록했다. 아무튼, 그 후에 여치(呂雉)는 장안(長安)으로 들어왔던 유여의(劉如意)를 독살(毒殺)했고, 그 결과를 척(戚)씨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격노했던 척(戚)씨는 재빨리 격자(格子) 사이로 손을 내밀어서 여치(呂雉)의 팔을 잡았고, 그리고는 깨물어버렸다. 그러자 여치(呂雉)가 비명을 질렀고, 그러자 또 간수(看守)가 달려와서 그 척(戚)씨를 떼어냈는데, 그런데 그 과정에서 척(戚)씨의 팔이 골절되었다. 그러자 또 그에 화가 났던 여치(呂雉)는 그녀의 양손을 자르라고 명했는데, 그러자 또 척(戚)씨는 그 상태에서 다리를 들어서 여치(呂雉)의 배를 힘껏 차버렸다. 그러자 또 여치(呂雉)는 그 고통을 못 이겨서 비틀거리다가 다시 그녀의 다리까지 잘라버리라고 명했다. 그러자 또 그녀가 여치(呂雉)를 쏘아보았는데, 그러자 또 여치(呂雉)는 그녀의 눈을 뽑아버리라고 했고, 이어서 음약(瘖藥-벙어리로 만드는 약)을 먹여서 목소리도 나오지 못하게 했으며, 그러자 나중에 그녀는 청각(聽覺)까지도 잃게 되었다. 그 후, 척(戚)씨는 변소에 넣어졌다.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소개되었으므로 생략하며, 그러자 또 그것을 직접 목격했던 혜제(惠帝)는 너무도 충격을 받아서 그 후로 정무(政務)를 방기하게 되었고, 요절(夭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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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여의(劉如意-?부터 기원전 195년)는, 전한(前漢) 초기의 인물이었고, 유방(劉邦)의 서자(庶子-第三子)였다. 그리고 생모는 척(戚)부인이었으며, 시호(諡號)는 은왕(隱王), 생년(生年)에 관해서는 기원전 207년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그의 생모 척(戚)씨는 유방(劉邦)이 패공(沛公) 시절이었을 때, 항량(項梁) 아래에서 종군(從軍)을 하다가 정도(定陶)란 곳에 들렀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녀의 미모를 보고는 한눈에 빠졌다고 하며, 그 결과 유여의(劉如意)가 태어났다. 그 후, 기원전 198년에 그는 대왕(代王)에 봉해졌으며, 그 후에 조왕(趙王)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유여의(劉如意)의 암살을 두려워했던 유방(劉邦)이, 과거 자신을 꾸짖었던 적이 있었던 주창<周昌-유방(劉邦)에게 충성을 다했다가, 나중에 항우(項羽)에게 살해되었던 주가(周苛)의 종형제(從兄弟)>을 신임해서 그를 조(趙)의 재상(宰相)으로 삼았다. 그 후, 유방(劉邦)이 사망하자 여치(呂雉)는 그를 죽이려고 몇 번이나 기도했지만,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이 주창(周昌)이 나서서 그 위기를 모면시켰는데, 그러나 기원전 195년 겨울에 여치(呂雉)가 다시 그를 장안(長安)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또 그때, 혜제(惠帝)는 여치(呂雉)의 속셈을 알고는 그를 지키려고 했지만, 그러나 또 그 혜제(惠帝)가 마침 사냥을 나갔던 날, 여치(呂雉)는 유여의(劉如意)를 독살했다. 그러자 혜제(惠帝)는 무척이나 슬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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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周苛-?부터 기원전 204년)는, 전한(前漢) 초기의 부장(部將)이었고, 패(沛)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처음에 자신의 종제(從弟)였던 주창(周昌)과 함께 진(秦)의 사수(泗水)군(郡)에서 졸사(卒史)를 하고 있었지만, 유방(劉邦)이 거병하자 사수(泗水)군수(郡守) 감(監)을 격파하고 유방(劉邦) 밑으로 들어갔으며, 주가(周苛)는 식객(食客)이 되었다. 그 후,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그는 최초의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으며, 기원전 204년 여름에 유방(劉邦)이 형양(滎陽)에서 항우(項羽)에게 포위당하자, 유방(劉邦)은 기신(紀信)의 계책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그때 주가(周苛)는 위왕(魏王) 표(豹)와 한왕(韓王) 신(信) 등과 함께 형양(滎陽)을 수비했다. 하지만 바로 그 직후에 항우(項羽)가 기신(紀信)을 태워죽이고 압박해서 들어오자 주가(周苛)는 위왕(魏王) 표(豹)가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주장하고는, 나머지 사람들과 모의해서 그 표(豹)를 죽였는데, 그때가 가을 8월이었다.(史記의 秦楚之際月表에 의함) 하지만 그 형양(滎陽)은 1개월 정도밖에는 버티지를 못했고, 그러자 주가(周苛)등은 포로로 잡혔다. 그러자 항우(項羽)가 그에게 <자기 밑에 들어오면 상장군에 임명하고, 봉읍(封邑) 3만 호(戶)를 내리겠다!>라고 회유했지만, 그러자 또 주가(周苛)는 오히려 항우(項羽)에게 <당신이 하루빨리 한(漢)에 항복하지 않으면, 그때는 당신이 포로가 될 것이오! 당신 같은 사람은 유방(劉邦)의 적수가 되지 못하오!>라고 매도(罵倒)했기 때문에, 항우(項羽)는 그를 삶아서 죽여 버렸다. 그러자 그 후, 유방(劉邦)은 주창(周昌)을 그의 후임으로 삼았고, 천하통일 후에는 그 공적을 인정해서 그의 아들 주성(周成)을 고경후(高景侯)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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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창(周昌-?부터 기원전 191년)은, 주가(周苛)의 종제(從弟)였고, 그 앞의 내용은 주가(周苛)와 같다. 그리고 그 후에 주가(周苛)가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을 때, 그는 중위(中尉)가 되었고, 그 후였던 기원전 204년에 주가(周苛)가 항우(項羽)에게 살해당하자 그는 주가(周苛)의 후임이 되어서 항시 유방(劉邦)을 따라다니면서 항우(項羽)와 싸웠다. 그리고 그 공으로 기원전 201년에는 소하(蕭何), 조참(曹參) 등과 함께 열후(列侯)에 봉해졌으며, 분음후(汾陰侯)가 되었다. 그는 또 직언(直言)도 마다하지 않았던 인품을 가졌었고, 그래서 또 소하(蕭何)는 물론이었고, 조참(曹參) 등도 그를 존경했다. 그리고 또 한 예로, 일찍이 유방(劉邦)이 연회(宴會)를 열었을 때, 그가 상주(上奏)할 일이 있어 찾아갔는데, 그런데 그때, 유방(劉邦)이 척(戚)씨를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보고 그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따라가서 그를 붙잡고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너는 나를 어떤 주인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걸(桀-夏 최후의 帝)이나, 주(紂-殷 30대 최후의 帝) 같은 주군(主君)이십니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웃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그를 경계하게 되었다고 한다(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함). 그리고 또 그 후에 유방(劉邦)이 유여의(劉如意)를 태자로 삼으려고 했을 때도 그는 강력하게 말렸다는데, 그런데 그는 원래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때는 너무 화가 많이 나서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지만, 어쨌든 그때 그는 그렇게 강력하게 반대를 했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웃으면서 그의 뜻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여치(呂雉)는 그 앞에서 무릎까지 꿇으면서 감사해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유방(劉邦)은 자신이 죽고난 후에 유여의(劉如意)가 어찌될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러던 하루, 어사(御史)였던 조요(趙堯)가 다음과 같이 유방(劉邦)에게 간언했다. <여후(呂后)와 대신(大臣)들도 두려워하는 인물로 조왕(趙王)의 승상(丞相)으로 삼으십시오!>
참고: 어사(御史)는 진(秦)과 전한(前漢) 때의 관직명이었으며, 부(副)재상(宰相)이었던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소속되었고, 정원은 45명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15명은 시어사(侍御史)로 불리면서 궁전 안에서 근무했으며, 두 사람의 승(丞) 중, 한사람이었던 어사중승(御史中丞)의 통솔을 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30명은 어사대부(御史大夫)의 관청에서 근무했으며, 녹봉은 600석(石)이었고, 백관(百官)의 일을 관리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주창(周昌)을 그 자리에 앉히려고 했는데, 그러자 주창(周昌)이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항의했다. <저는 처음부터 폐하(陛下)만 모셔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인데, 그런데도 어찌하여 다른 사람들은 다 놔두고, 하필이면 저를 그곳으로 보내서 버리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이렇게 말을 했다. <나 역시도 그것이 좌천(左遷)인 줄은 알고 있으나, 그러나 조왕(趙王)을 생각하면 그 적임자가 당신밖에는 없으니, 힘들겠지만 나의 인사(人事)를 따라주게!> 그러자 그는 그것을 승낙했고, 자신의 후임으로 조요(趙堯)를 추천했다. 그 후, 유방(劉邦)이 죽자 여치(呂雉)는 유여의(劉如意)를 죽이려고 획책했다. 그러자 주창(周昌)은 유여의(劉如意)에게 칭병(稱病)하고 여치(呂雉)의 말을 따르지 말라고 간언했다. 그러자 또 여후(呂后)는 주창(周昌)을 먼저 불러올렸다. 그런 다음에 유여의(劉如意)를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유여의(劉如意)를 독살했고, 그러자 주창(周昌)은 그 후로 칭병(稱病)하면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기원전 191년에 그는 사망했고, 그러자 그에게 도후(悼侯)라는 시(諡)가 내려졌으며, 그 뒤(列侯)는 그의 아들 애후(哀侯)가 이었다. 하지만 분음후(汾陰侯)는 그 아들(孫) 의(意) 대(代)에 죄가 있었기 때문에 몰수되었다. 그리고 또 사마천(司馬遷)은 그를 <나무와 돌 같이 실직(實直-정직하고 성실함)했던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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