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劉肥-?부터 기원전 189년)는, 전한(前漢)의 황족이었고, 제왕(齊王)이었다. 시호(諡號)는 도혜왕(悼惠王), 유방(劉邦)의 서장자(庶長子), 생모는 조(曹)씨(氏)였다. 기원전 201년, 초왕(楚王) 한신(韓信)이 모반의 죄를 짓고 멸하자, 그 영지는 한(漢)의 종실(宗室-劉氏一門)에 돌아갔다. 그리고 유비(劉肥)는 제왕(齊王)에 봉해졌으며, 역전(歷戰)의 장군이었던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을 재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196년,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劉邦)이 친정(親征)에 나섰다. 그러자 유비(劉肥)는 조참(曹參)을 부장(部將)으로 해서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종군했다. 기원전 195년, 유방(劉邦)이 사망하자 유영(劉盈)이 즉위해서 혜제(惠帝)가 되었고, 그러자 유비(劉肥)의 입장이 미묘(微妙)하게 되었다. 기원전 193년, 유비(劉肥)는 장안(長安)으로 불려가서 혜제(惠帝)와 여후(呂后)가 열었던 연석(宴席)에 참석했다. 그러자 혜제(惠帝)는 그에게 형 대접을 해주기 위해서 상석(上席)에 앉혔는데, 그러자 여후(呂后)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그에게 독을 넣은 술을 주었다. 하지만 앞서 밝혔던 대로 그것은 혜제(惠帝)의 기지(機智)로 해서 무사히 끝이 났고, 그러자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되었던 유비(劉肥)는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영지(領地) 중 성양군(城陽郡)을 여후(呂后)의 딸, 노원공주(魯元公主)에게 양도하고 싶다는 의견을 여후(呂后)와 혜제(惠帝)에게 올렸다. 그러자 여후(呂后)의 마음이 풀렸고, 그것으로 그는 무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후였던 기원전 189년에 그는 사망했으며, 그의 자식들<長子 哀王・劉襄과 次子 朱虚侯・劉章(城陽景王)>은 여치(呂雉) 사후(死後)에 여(呂)씨(氏) 일족(一族) 타도(打倒) 때, 아주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어서 계속될 기원전 154년에 일어났던 <오초칠국지난(吳楚七國之難)> 때, 모반(謀反)을 일으켰던 7명 중 4명이 그 유비(劉肥)의 자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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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홍(少帝弘)은, 전한(前漢)의 제4대 황제였고(그러나 歷代 황제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휘(諱)는 홍(弘)이지만, 원래는 산(山)이었고, 상산왕(常山王)으로 승격되었을 때, 의(義)로 개명했다. 그는 혜제(惠帝)와 후궁(後宮) 사이에서 태어났던 자식으로, 처음에는 양성후(襄城侯)에 봉해졌다. 그런데 그 후에 상산왕(常山王)이었던 유불의(劉不疑)가 사망하자 그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런데 또 그 후에 자신의 형이었던 소제공(少帝恭)이 여치(呂雉)에게 살해당하자 황제에 즉위했다. 그 후, 여후(呂后)가 사망하자 쿠데타가 발생했으며, 그러자 소제홍(少帝弘)도 감금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대왕(代王)이었던 유항(劉恒-文帝 후술)이 즉위하기 바로 직전에 그는 하후영(夏侯嬰)에 의해서 궁 밖으로 추방된 후, 소부(少府-九卿의 하나로 황실의 잡무 등을 처리했다)에 감금되었다. 하지만 유항(劉恒)이 즉위하기 위해서 장안(長安)으로 들어왔을 때, 같은 형제였던 상산왕(常山王) 유조(劉朝-軹侯), 회남왕(淮南王) 유무(劉武-壷関侯) 등과 함께 독살되었다. 그리고 또 그들은 원래 모두 여치(呂雉)가 비밀리에 궁으로 데려왔던 아이들이었다고 했으며, 그래서 혜제(惠帝)의 친자식들이 아니었다고 했는데, 그러나 그에 대한 진상(眞相)은 현재 불명(不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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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공(少帝恭)은, 전한(前漢)의 제3대 황제였고(역시,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일반적으로 이름은 공(恭)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등에서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그 역시, 혜제(惠帝)와 후궁 사이에서 태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혜제(惠帝)가 죽고 난 후, 장황후(張皇后-노원공주의 딸)에게서 태어났던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여치(呂雉)의 지지를 받아서 즉위했다. 그런데 또 그때, 그는 세상에 장황후(張皇后)의 자식으로 공표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생모였던 후궁은 살해되었다. 그래서 그 후에 그가 장성했을 때, 그런 사실을 알고는 여치(呂雉)를 몹시 원망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여치(呂雉)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러자 또 여치(呂雉)는 후환을 두려워했던 나머지 그를 유폐(幽閉)시켰으며, 중병(重病)을 앓고 있다면서 폐위시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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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呂産-?부터 기원전 180년)은, 전한(前漢) 때의 인물이었고, 여치(呂雉)의 일족으로, 여치(呂雉) 시대에 여왕(呂王), 상국(相國)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치(呂雉)의 오빠였던 여택(呂澤)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여택(呂澤)은 또, 유방(劉邦)과 함께 종군했으며, 그러다가 기원전 205년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패했을 때, 유방(劉邦)은 그 여택(呂澤)의 진영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201년에, 여택(呂澤)은 주여후(周呂侯)에 봉해졌으며, 그 3년 후에 사망했다. 그러자 혜제(惠帝)는 그에게 영무후(令武侯)란 시(諡)를 내렸으며, 그 후는 여산(呂産)의 형이었던 여대(呂臺)가 이었다. 그 후, 혜제(惠帝)가 죽자(기원전 188년) 여치(呂雉)는 불안해졌다. 그런데 그때, 진평(陳平) 등이 여대(呂臺), 여산(呂産), 여록(呂祿) 등에게 남북(南北)군(軍)의 군권을 가지게 하라고 여치(呂雉)에게 조언했고, 그러자 여치(呂雉)는 불안에서 벗어났다. 기원전 187년, 여후(呂后) 원년에 여산(呂産)은 문후(汶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해, 여후(呂后)는 여(呂)씨를 왕으로 만들 것을 생각했고, 그러자 먼저 여산(呂産)의 아버지 여택(呂澤)을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존(追尊)한 후, 대신들에게 여대(呂臺)를 왕으로 봉하게 하라는 진언을 하게 만들어서, 그 여대(呂臺)를 여왕(呂王)에 봉했다. 여후(呂后) 6년, 기원전 182년, 여왕(呂王) 여대(呂臺)를 이었던 여가(呂嘉)가 무슨 일로 폐위되자, 그 자리를 여산(呂産)이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해, 유방(劉邦)의 아들이었던 양왕(梁王) 유회(劉恢)를 조왕(趙王)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 자리(梁王)를 여산(呂産)에게 주었다. 그리고 또, 여산(呂産)의 딸을 유회(劉恢)에게 시집보냈다. 하지만 여산(呂産)은 양왕(梁王)이 되고나서도 봉국(封國)으로 가지 않고 장안(長安)에 있으면서, 당시의 황제였던 소제홍(少帝弘)의 스승을 맡았다. 그리고 그 후에 여후(呂后)가 죽자 그는 상국(相國)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제왕(齊王)이었던 유양(劉養)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여산(呂産)은 관영(灌嬰)에게 그것을 진압하라고 시켰는데, 그러나 관영(灌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진평(陳平) 등의 꾐에 빠졌던 여록(呂祿)이 군권을 반납하고 봉국(封國)으로 돌아가서 대신들과 제후들의 의심에서 벗어나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이미 때가 늦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산(呂産)을 급히 궁전으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여산(呂産)이 궁전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되었던 조참(曹參)의 아들 조줄(曹窋)이 그 사실을 주발(周勃)에게 전했고, 이어서 여록(呂祿)은 북군(北軍)의 지휘권을 주발(周勃)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또 그때, 여산(呂産)은 궁까지 달려왔지만, 그러나 위위(衛尉-九卿의 하나로, 宮門을 수위하던 병사들을 관할했음)에게 제지당해서 궁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그때, 유장(劉章-朱虚侯)이 약 천 명정도의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여산(呂産)의 뒤를 쫓았다. 그러자 여산(呂産)은 도망을 갔는데, 그러나 결국 낭중령부(郎中令府)의 변소에서 살해되었다. 그러자 여(呂)씨들은 한꺼번에 무너졌으며, 그 후에 유항(劉恒)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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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록(呂祿-?부터 기원전 180년)은, 전한(前漢) 때의 인물로, 여치(呂雉)의 일족이었으며, 조왕(趙王), 상장군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치(呂雉)의 오빠였던 여석지(呂釋之)의 아들이었고, 그 여석지(呂釋之)는 또 유방(劉邦)과 함께 종군했다. 그리고 그 후에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풍(豊)으로 돌아가서 유태공(劉太公)을 모시라는 명을 받았다. 그 후, 여석지(呂釋之)는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지만, 그러나 그 9년 후에 사망했다. 그러자 그에게 강후(康侯)라는 시(諡)가 내려졌으며, 건성후는 그의 자식 여칙(呂則-呂祿의 형)이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 후에 여칙(呂則)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뒤는 여칙(呂則)의 동생이었던 여종(呂種)이 이어받았다. 그리고 여록(呂祿)은 자신의 딸을 제왕(齊王)이었던 유양(劉養)의 동생,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에게 시집보냈다. 그 후, 기원전 187년, 여후(呂后) 원년에 여록(呂祿)은 호릉후(胡陵侯)에 봉해졌고, 기원전 181년에는 여후(呂后)가 진평(陳平) 등의 청원을 받아서 조왕(趙王)이 되었으며, 여석지(呂釋之)는 조소왕(趙昭王)으로 추존(追尊)되었다. 그 후, 기원전 180년에 여후(呂后)의 병이 깊어지자 여록(呂祿)은 상장군이 되었고, 북군(北軍)을 장악했다. 그리고 여후(呂后)가 죽자 그는 자신의 딸을 소제홍(少帝弘)에게 시집보냈으며, 그 후에 유양(劉養)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평(陳平)의 명령을 받았던 자신의 친구(酈奇)로부터 <군권을 반납하고 봉국(封國)으로 돌아가서 대신들과 제후들의 의심을 풀라>는 설득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제(齊)의 낭중령(郎中令-九卿의 하나로, 궁전의 掖門 수위를 담당했다)이었던 가수(賈壽)가 반대를 했고, 그 뒤의 이야기는 여산(呂産)의 내용과 같으며, 여록(呂祿)도 그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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