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39년경/ 무제(武帝)가 장건(張騫)을 대월지(大月氏)에 파견했다.(~126 경)

 

<대월지에 파견되었던 장건 사절단>


 

 ※ 장건(張騫-?부터 기원전 114년)은, 중국 전한(前漢)의 정치가였고 외교관이었다. 그리고 한중군(漢中郡=顔師古의 注에 의하면 成固) 출신이었으며, 무제(武帝)의 명을 받아서 동맹을 맺기 위해 대월지(大月氏)로 향했고,
그곳(西域)의 정보를 가져왔던 인물이었다.

 그는 건원(建元) 연간(기원전 140년-기원전 135년)에 낭(郎-정확한 직급을 알 수 없음)이 되었는데, 그런데 당시 한(漢)에서는 흉노(匈奴)를 제압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고, 그 우선으로 대월지(大月氏)와 동맹을 맺기 위해서 그곳으로 파견할 사자(使者)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때, 그는 스스로 신청해서 아주 훌륭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당시, 그 대월지(大月氏)란 나라는 처음에는 월지(月氏)로 불리면서 흉노(匈奴)와 싸웠는데, 그러나 후에 목돌선우(冒頓單于)의 공격을 받아서 대패했다. 그리고 또 이어서 그의 아들이었던 노상선우(老上單于)에게도 패했고, 그러자 그 노상선우(老上單于)는 월지(月氏) 왕의 머리를 취해서, 그 안을 파내고는 술잔으로 삼았다고 한다.

 ○ 노상선우(老上單于-?부터 기원전 161년)는, 전한(前漢) 전기 흉노의 선우(재위:기원전 174년-기원전 161년)였고, 이름은 계죽(稽粥)이었다고 하며, 老上單于는 그의 칭호였다. 그리고 목돌선우(冒頓單于)의 아들로 태어나서 목돌(冒頓單于)이 죽자 선우에 즉위했으며, 한(漢) 효문제(孝文帝)의 딸을 정비(正妃)로 맞이했다. 그 후, 그는 정비(正妃)와 함께 흉노(匈奴)로 들어가서 귀순(歸順)을 신청했던 환관(宦官) 중행설(中行說)을 중용했으며, 그의 시정(施政)에 따라서 기원전 166년에는 14만기를 인솔해서 장성(長成)을 넘었다. 그리고는 많은 민중과 재화를 약탈했고, 그 후 계속해서(年마다) 한(漢)에 침입했다. 그리고 또 특히, 운중(雲中)과 요동지방에 아주 심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기원전 162년에는 한(漢)과 강화했고, 재위 중에 월지(月氏)를 공격해서 그 나라의 왕을 살해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161년에 사망했다.

 그 후, 월지(月氏)의 일부는 북쪽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것을 당시 중국에서는 대월지(大月氏)라고 불렀다. 그러자 한(漢)은 그 대월지(大月氏)가 흉노(匈奴)를 증오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협공작전을 구상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장건(張騫)을 필두로 했던 약 100여 명 남짓의 사절단을 그곳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장건(張騫)과 일행은 당시 한(漢)의 세력권이었던 농서(隴西=지금의 甘肅省)에서 나온 직후에 흉노(匈奴)에게 잡혀서 포로가 되었다.


<ZhangQianTravel>

<간수=甘肅省>

 


 ※ 군신선우(軍臣單于-?부터 기원전 126년)는,
전한(前漢)기 흉노(匈奴)의 선우(재위:기원전 161년-기원전 126년)였고, 노상선우(老上單于)의 아들로 태어나서 노상(老上)이 죽자 즉위했다. 그는 기원전 165년에 한(漢)과의 화의를 깼으며, 이어서 상군(上郡) 운중(雲中)에 침입했지만, 경제(景帝)가 즉위한 후 다시 화해가 성립되었다. 그 후 무제(武帝) 때도 우호관계는 계속되었지만, 그러나 기원전 133년 전한(前漢)의 장군 왕회(王恢)가 계략을 내서 당시 마읍(馬邑)의 부호(富豪)였던 섭일(聶壱=張遼의 먼 조상)로 하여금 공물을 바치는 척하면서 군신(軍臣)을 속여서 토벌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었고(漢의 장군 한명이 그의 포로가 되면서 실토했다), 그러자 군신(軍臣)은 급히 철군해서 화를 피했다. 그 후, 한(漢)과 단교했던 군신(軍臣)는 다시 대립의 시대를 열게 된다. 그리고 또 그때, 계책을 냈던 왕회(王恢)는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처형되었고, 섭일(聶壱)은 “장일(張壱)”로 개명하고는 몸을 숨겼다. 그리고 또, 한(漢)이 월지(月氏)에 파견했던 사자 장건(張騫)을 억류했던 사건으로서도 그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 후, 군신(軍臣)은 장건(張騫)이 대월지(大月氏)로 파견된 사자란 것을 알게 되자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장건(張騫)을 10여년 간이나 억류했다. <월지(月氏)는 우리의 북쪽에 있다. 그런데도 어째서 한(漢)은 그곳으로 사자를 보내게 되었는가? 그리고 또 만약에 우리가 한(漢)의 남쪽에 있는 월(越)로 사자를 보내려고 한다면, 그때도 무제(武帝)는 그것을 허락할 것인가?!> 그 후, 군신(軍臣)은 장건(張騫)에게 결혼까지 시켜주었고, 아이까지 얻게 했지만, 그러나 장건(張騫)은 끝까지 부절(符節)을 버리지 않았다.

 
부절(符節)은, 옛날에 돌이나 대나무 또는 옥(玉) 등으로 만들어서 신표(信標)로 삼았던 물건이었다. 주로 사신들이 가지고 다녔으며, 둘로 갈라서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또 하나는 본인이 가지고 다니면서 신분의 증거로 사용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장건(張騫)은 그로부터 약 10여년 후에야 결국 흉노(匈奴)에서 탈출했고, 이어서 서쪽에 있었던 대완(大宛=페르가나)까지 도망을 쳤다. 그러자 그곳의 왕은 한(漢)의 배경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환대했고, 이어서 대월지(大月氏)로 가는 길까지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또 당시, 그 대월지(大月氏)는 흉노(匈奴)에게 쫓겨서 북쪽으로 도망친 후에 오손(烏孫)에게도 쫓겨나서 더욱 더 서쪽으로 옮겨가있었다.

 
오손(烏孫)은,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남북조시대에 걸쳐서 톈산북로(天山北路) 주변에 살던 터키계열의 유목민족으로, 한(漢)나라와는 우호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였으나, 그러나 5세기 후반에 들어서 선비(鮮卑)와 유연(柔然) 등에 압박을 받아서 망하였다.


<中=오손. 下=천축. 右上=흉노. 左中=대월지. 그 위가 강거>

 

 그러자 그 후, 장건(張騫)은 강거(康居)에 들른 후

 마침내 대월지(大月氏)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
강거(康居)는, 중국 한(漢)나라 · 위(魏)나라 때, 중앙아시아에 있었던 터키계 유목민족의 나라.

 그러자 장건(張騫)은 그 월지(月氏)의 왕에게 한(漢)과의 동맹을 구했지만, 하지만 월지(月氏)의 왕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당시 월지(月氏)가 도망쳐 갔던 그 땅에서는 모든 것이 풍부했던 데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나라가 그 근처에는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었고, 거기다 또 당시 월지(月氏)는 대하<大夏=그레코· 박트리안 왕국이었다는 설과 토하라(Tokhara)인의 나라였다는 설이 있다>라는 나라를 복속시켜서 중계무역으로 큰 영광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과거 흉노(匈奴)에의 복수심은 이미 모두 다 잊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大夏=중앙 푸른 부분이 그레코· 박트리안 왕국이며, 위의 동그라미 부분이 토하라(Tokhara)>



 그러자 그에 큰 실망을 안고 귀국길에 올랐던 장건(張騫)은 귀도(歸途)를 쿤룬산맥
(崑崙山脈) 쪽으로 잡았는데, 그런데 그 길에서 또 다시 흉노(匈奴)에게 붙잡혔다.



<동그라미 부분이 쿤룬산맥이며, 아래는 히말라야산맥, 위는 천산산맥>



 ○ 쿤룬산맥은,
중국 티베트 고원과 타림 분지 사이를 동서로 뻗은 산맥으로, 최고봉의 울루무즈타그의 높이는 7,723미터이며, 길이는 2,400km.

 그러자 또 장건(張騫)은 흉노(匈奴)에서 1년을 보냈고, 그런데 또 마침 그 무렵에 군신(軍臣單于)이 사망했다.(기원전 127년 겨울) 그러자 흉노(匈奴)에서는 곧 내부에서 대립이 일어났는데, 그러자 또 장건(張騫)은 그 틈을 타서 흉노(匈奴)를 탈출했다. 그리고는 다시 천신만고(千辛萬苦)를 겪으면서 기원전 126년에 결국 한(漢)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그때, 출발 당시 100명 정도였던 사절단은 그를 포함해서 단 2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

 아무튼, 그러자 또 동맹의 실패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 장건(張騫)의 귀환과 함께 그가 가져왔던 정보는 한(漢)의 입장에서는 매우 귀중한 것이 되었고, 그래서 당시까지는 서역(西域)이란 존재에 대해서 완전한 문외한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하지만 그 후로는 대(對) 흉노(匈奴) 전략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장건(張騫)은 그 공적으로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또 기원전 123년, 드디어 무제(武帝)는 대장군 위청(衛靑)을 내새워서 흉노(匈奴)에의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자 또 그때, 장건(張騫)은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서 그 원정에 일조했고, 그 후에 또 그는 위위(衛尉)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121년의 원정 때는 기일(期日)에 늦은 죄로 죽을죄가 성립되었다. 그러자 그는 금전으로 속죄하고 서민으로 떨어졌다. 그 후에 또 장건(張騫)은 서역을 여행하던 중 촉(蜀=四川)'의 사람들이 아주 귀한 물건(대나무와 옷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는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은 그에게 신독(身毒=인도)의 상인들로부터 샀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장건(張騫)은 촉(蜀)→ 운남(雲南)→ 미얀마(Burma=미얀마의 前 이름)→ 인도(印度)라는 루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또 장건(張騫)은 급히 장안(長安)으로 돌아와서 무제(武帝)에게 그것에 대해서 몇 번이나 진언을 했다. 그리고는 운남(윈난 성=雲南)을 복속시키고, 그 루트를 장악해서 서역과 연결하는 것으로써 흉노(匈奴)에 대항할 것을 조언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오손(烏孫)과 동맹을 맺기 위해서 기원전 119년에 사자로 떠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는 기원전 114년에 사망했다. 그러자 그의 사후(死後) 그가 주장했던 계책은 서서히 결실을 보게 되었고, 그리하여 한(漢)은 서역과의 교역을 시작했으며, 이어서 흉노(匈奴)에도 유리한 입장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의 손자였던 장맹(張猛)은 흉노(匈奴)의 호한사선우(呼韓邪單于)와 동맹을 맺었고, 그리하여 한때 기원제(期元帝)에 신임(信任)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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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41년/ 무제(武帝)의 즉위(即位) (~87). 익년(翌年)을 건원원년(建元元年)으로 함.(元号가 制定됨)

 

 ※ 무제(武帝)





 무제(武帝) 기원전 156년-기원전 87년
 재위 : 기원전 141년-기원전 87년
 전한(前漢)의 제7대 황제
 시호는 철(徹). 묘호(廟號)는 세종(世宗). 정식적인 시호는 효무황제(孝武皇帝)
 유방(劉邦)의 증손(曾孫)으로, 부(父)는 경제(景帝), 생모는 왕 씨(王氏)
 황태자 전(前)의 왕호(王號)는 교동왕(膠東王)
 평양공주(平陽公主) 등 3명의 동모자(同母姉)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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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세 후반>

 그러나 전성(全盛)이란 곧 퇴폐(退廢)의 제일보(第一步)가 되는 법!

 그리하여 그 화려했던 원정(遠征)의 성과와 강대했던 권력은 결국 무제(武帝)에게 과도한 자신(自信)과 절대적인 권위를 안겨주었고, 그런데 그것이 또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위업을 위협하게 했던 불안을 가져다 주었다고 여겨지는데,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충신들의 직언은 멀리했고, 달콤한 감언이설과 함께 간신들의 아부를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저자였던 사마천(司馬遷)이 자신의 지인(知人)이었던 이능(李陵)을 변호했던 일로 해서 사마천(司馬遷)에게 사형의 판결을 내렸고, 하지만 또 그 후에 감형해서 궁형(宮刑=去勢)에 처했던 사건이나, 그리고 또 그 이능(李陵)의 처자를 몰살한 후에, 이능(李陵)의 무죄가 판명이 되었던 사건 등, 그의 급하고도 독단적이었던 성격에 대해서 유명한 에피소드도 많이 남기게 되었다.

 
이능(李陵-?부터 B.C.74)은, 중국 전한(前漢)의 무장이었고, 자(字)는 소경(少卿)이었다. 그는 무제(武帝) 때 흉노(匈奴)와 싸우다가 항복한 뒤에, 흉노(匈奴) 선우(單于)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우교왕(右校王)에 봉해졌고, 그리고 그 후 선우의 고문으로 활약하다가 병사했다.
 
 사마천(司馬遷-? 또는 B.C.145년부터 ? 또는 B.C.86년)
 



 그는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가였고, 기원전 104년에 공손경(公孫卿)과 함께 태초력(太初曆)을 제정하여 후세 역법의 기초를 세웠으며, 역사책 사기(史記)를 완성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성(姓)은 사마(司馬). 이름은 천(遷), 자(字)는 자장(子長)이었고, 사마 씨(司馬氏)는 주(周)대의 기록계(記錄係)의 가계(家系)였으며, 부(父)는 전한(前漢)의 태사령(太史令)이었던 사마담(司馬談)이었다.<그는 관직의 명칭에 의해서 태사공(太史公)을 자칭(自稱)했다> 그리고 사위는 양창(楊敞=昭帝의 丞相이었던 安平侯)이었고, 손자는 양운(楊惲)으로, 사기(史記)를 세상에 널리 알렸던 인물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은 부(父)의 직(職)을 승계해서 대사령(大史令)을 배명(拜命) 받았고, 그 직과 임무로, 청(淸) 시대까지 사용되었던 태초력(太初曆)의 제정을 행했다. 그리고 그 후에 궁형(宮刑)을 받았으며, 이어서 부(父)의 뜻을 계승해서 역사서인 사기(史記)를 완성시켰다.

 그는 태사령(太史令)이었을 때, 흉노(匈奴)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그 흉노(匈奴)에 투항했던 이능(李陵)을 친구의 입장에서 유일하게 변호를 했던 인물이었다
. 그러자 그는 곧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샀고, 그래서 곧 감옥으로 끌려가서 사형을 당할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그에게는 그 사형을 면할 방법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고액의 벌금을 지불하는 것, 아니면 궁형(宮刑)을 받아서 내시(內侍)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 당시 아무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수치심을 참고 궁형을 받아서 내시가 되었다. 하지만 또 그 궁형(宮刑)이란 잔학한 벌은 그에게 대단한 충격과 치욕을 안겨 주었고, 그리하여 그 일은 결국 그의 인생관까지 크게 바꾸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수치심을 참으면서 내시로 2년 동안 지낸 후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고, 이어서 사기(史記)의 집필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나머지
뒤의 이야기는 아래 연표(年表)로 대신하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
연표(年表)>

 단, 나이와 사적(事跡) 그리고 연대(年代)에 관해서는 이설이 다수 있으며
 위의 연대(年代)도 정확한 것은 아니므로, 일단 몰년(沒年)을 미상(未詳)으로 함.

 紀元前145年 1歳 - 夏陽県 龍門(룽먼=現在의 陝西省 韓城県) 出生.
 紀元前140年 5歳 - 父 司馬談이 太史令에 임명되었고, 그 후 父와 함께 長安으로 이주.
 紀元前135年 10歳 - 父로부터 古典을 배움. 그리고 董仲舒 등에게 師事함. 그리고 이후 歴史書 <春秋>는 政治 의 根本原理를 体現한 것이라고 主張하던 公羊学派의 影響을 받음.
 紀元前126年 20歳-南쪽으로 遊學을 떠남. 그때의 体験은 <史記>에서 선명하고도 강렬한 묘사에 활용됨.
 紀元前124年 22歳 - 帰京 후 郎中에 就任했고, 李陵과 사귀게 됨.
 紀元前110年 36歳 - 武帝가 封禪儀式을 거행했고, 父 司馬談이 死去하면서 그에게 <史記>의 完成을 부탁함.(元 封1年=司馬談은 封禅의 해에 죽었다고 太史公自序에 기록되어 있다고 함)
 紀元前108年 38歳 - 太史令에 就任.
 紀元前104年 42歳 - 改暦을 監督했으며, 太初暦을 制定・施行했다.
 紀元前99年 47歳 - 친구 李陵을 변호한 것으로 武帝의 노여움을 샀고, 그 벌로 投獄되었다.
 紀元前98年 48歳 - 宮刑을 받다.
 紀元前96年 50歳 - 大赦에 의해 出獄함. 이후 中書令에 就任.
 紀元前91年 55歳 - 皇太子의 反乱事件이 일어남. 친구 任安에게 편지를 씀.(소개는 생략함)
 紀元前90年 56歳 - 匈奴列伝에 李廣利 將軍에 관해서 記述함.
 (司馬遷 최후의 기술로 여겨지며, 적어도 이때까지는 살아있었다고 짐작됨)
 그 후, 고향에 매장되었다고 생각되며, 그 증거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陝西省 韓城県에 그의 祠廟와 墓가 建立되어 있다고 함.

 그리고 또, 재정(財政) 면에서도 원정이나, 자신의 불로장수 욕구 등, 사치로 악화되었던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서 염철(鹽鐵)의 전매(專賣)나, 증세(增稅), 화폐개주(貨幣改鑄)도 행했다. 그러자 그 부담으로 인해서 유랑민 화 하는 민중이 증가했고, 그것은 또 각지에서 반란을 유발시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자 재위 후반기에는 각지에서 반도(反徒)나 도적들이 횡행(橫行)했고, 그러자 또 그에 골머리를 앓았던 무제(武帝)는 이윽고 영성(寧成), 의종(義縦), 장탕(張湯), 왕온서(王温舒), 두주(杜周) 등, 이른바 혹리(酷吏)라고 일컬어졌던 <법률지상(法律至上)>의 관료들을 요직에 앉혀서 각지의 단속을 행했다. 그러자 또 그 후, 그 엄벌주의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고, 그에 또 민심은 전혀 수습이 되지가 않았다. 그러자 또 무제(武帝)는 반란이나, 도적이 발생한 지방의 장관들을 엄격하게 처벌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또 그러자 그것은 오히려 처벌을 무서워 했던 지방장관들로부터 도적의 횡행이나 반란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방치상태인, 일종의 무정부상태를 부르게 되었다. 거기다 또 왕온서 등은 자신의 직권을 남용해서 뇌물을 청구했다거나, 죄 없는 사람들을 처형했고, 거기다 죄인을 요직에 앉히거나 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또 무제(武帝)의 이모형(異母兄)이었던 조(趙)의 경숙왕(敬肅王) 유팽조(劉彭祖) 또한 혹리(酷吏) 같은 짓을 기꺼이 저질렀다고 사기(史記)에서는 전하고 있다.(五宗世家)

 그러던 중, 태자(太子)까지 반란을 일으키는 혼란이 가중되자 드디어 무제(武帝)는 자신의 노쇠함과 감정적인 불안으로 인해서 미신을 가까이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또 신선사상(神仙思想)에 심취했음과 동시에 누군가가 자신을 저주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에까지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무제(武帝)는 그 인물이 누구인지를 당시 자신이 신임하고 있었던 강충(江充)이란 자에게 시켜서 탐색하게 했다. 그런데 또 그때, 그 강충(江充)이란 자는 당시 황태자였던 려()태자<戾太子=유거(劉據)>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신이 무제(武帝) 사후(死後)에 그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려태자(戾太子)가 무제(武帝)를 저주하고 있다고 덮어씌우고는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또 궁지에 몰리게 되었던 려태자(戾太子)는 강충(江充)을 죽이고는 죄수들을 무장시켜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자 또 무제(武帝)는 당시 승상이었던 유굴(劉屈)에게 시켜서 그를 진압하게 했는데, 그 결과 려태자(戾太子)는 도망을 갔다지만, 하지만 그 후에 자살했다고 전해진다.<巫蠱의 獄> 그리고 그 후, 무제(武帝)는 강충(江充)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삼족(三族)을 멸했다.

 아무튼, 그렇게 무제(武帝)의 치세 하에서는 누군가를 저주해서 죽이려고 했다는 죄에 의해서 처형되었던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또 그 당시의 저주란 것은 <무고(巫蠱)의 술(術)>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그 방법은 또 인형에다 자신이 저주하고 싶은 상대의 이름을 써서 땅에 묻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후에 오랫동안 황태자의 자리는 비어 있게 되었다. 그러자 무제(武帝)는 만년(晩年)에 이르러서 막내였던 불능(劉弗陵=후의 昭帝)에게 황태자의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리고는 곽광(霍光)과 김일제(金日磾) 그리고 상관걸(上官桀) 그 세 사람에게 뒤를 부탁하고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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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41년/ 무제(武帝)의 즉위(即位) (~87). 익년(翌年)을 건원원년(建元元年)으로 함.(元号가 制定됨)

 


 ※ 무제(武帝)






 무제(武帝) 기원전 156년-기원전 87년
 재위 : 기원전 141년-기원전 87년
 전한(前漢)의 제7대 황제
 시호는 철(徹). 묘호(廟號)는 세종(世宗). 정식적인 시호는 효무황제(孝武皇帝)
 유방(劉邦)의 증손(曾孫)으로, 부(父)는 경제(景帝), 생모는 왕 씨(王氏)
 황태자 전(前)의 왕호(王號)는 교동왕(膠東王)
 평양공주(平陽公主) 등 3명의 동모자(同母姉)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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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정(遠征)>

 그 후, 무제(武帝)는 그러한 체제와 <문경(文景)의 치(治)>에 힘 입었던 다대(多大)한 축적을 배경으로, 당시 숙적이었던 흉노(匈奴)에의 원정을 개시했다. 그것은 또 유방(劉邦)이 목돌선우(冒頓單于)에게 패했던 이래, 한(漢)은 줄곧 흉노(匈奴)에 대해서 저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무제(武帝)에 들어서 다시 반공(反攻)을 획책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무제(武帝)는 우선, 일찍이 흉노(匈奴)에게 져서 서쪽으로 물러나 있었던 <대월지(大月氏)>에 <장건(張騫)>을 파견했다. 그리고는 그 대월지(大月氏)와 동맹을 맺어서 흉노(匈奴)에의 협공을 기도(企圖)했다. 하지만 그 동맹은 실패했고, 그래서 또 그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또 그때, 나름대로의 수확은 있었다고 할 것이었고, 그것은 또 그때 파견되었던 장건(張騫)에 의해서, 그때까지는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북서부 지방의 정세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또 그 후, 그 일은 대(對) 흉노 전(戰)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기원전 3세기의 진(秦)과 북방민족 도(圖)>
서쪽으로부터 WUSUN=烏孫, YUEZHI=月氏, XIONGNU=匈奴, DONG-HU=東胡



 ※ 월지(月氏=Yuèzhī)는, 기원전 3세기부터 1세기경에 걸쳐서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존재했던 유목민족과 그 국가 명 또는 터키계의 민족 또는 그 나라를 이름. 기원전 2세기에 흉노(匈奴)에게 져서 중앙아시아로 이동했고, 그로부터 대월지(大月氏)로 불리게 되었다. 그 시대에는 동서교역(東西交易)이 활발했다.

 ※ 장건(張騫-?부터 B.C.114)은, 중국 전한(前漢) 때의 외교가였고, 자(字)는 자문(子文)이었다. 그리고 인도 통로를 개척했던 사람이었고, 서역 정보를 가져왔으며, 동서(東西)의 교통과 문화교류의 길을 열었던 사람이었다.

 아무튼 그 후, 무제(武帝)는 위청(衛靑)과 그의 조카였던 곽거병(霍去病)을 장군으로 등용해서 흉노와 상대했고, 그 결과 몇 번이나 이겼다. 그러자 그때부터 서역(西域)은 한(漢)의 영향아래로 들어왔다.

 위청(衛靑-?부터 B.C.106)은, 중국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의 무장이었고, 자는 중경(仲卿)이었다. 그리고 흉노정벌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 공으로 대사마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후술 또는 생략)

 ※ 곽거병(霍去病-? 또는 B.C.140년부터 B.C.117)은, 중국 전한(前漢) 때의 명장(名將)이었고, 무제(武帝) 때에 위청(衛靑)과 함께 흉노토벌에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었다.(후술 또는 생략)

 그 후에 또, 무제(武帝)는 이광리(李廣利)에게 명해서, 대완(現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 지방)을 정복했고, 그곳에서 나던 한혈마(汗血之馬)를 확보(獲得)했다.

 이광리(李廣利-?부터 B.C.90)는, 중국 전한(前漢) 기의 무장이었고, 기원전 104년에 대완(大宛)에 원정하여 서역 여러 나라를 복속시켰던 공으로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뒤에 흉노토벌에 실패하고 선우(單于)에게 피살되었다.

 
※ 페르가나(Fergana)는,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 북서부, 시르다리야 강 중·상류에 있는 지방으로,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지금의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에 걸쳐있다.




<동그라미 안이 페르가나>



 ※ 한혈마(汗血之馬)는, 피땀을 흘릴 정도로 매우 빨리 달리는 말이라는 뜻으로, 아라비아에서 나는 명마를 이르는 말이며,
그리고 아래 그림은 관우(關羽)가 타던 적토마(赤兎馬)를 그린 것으로, 한혈마(汗血馬)를 이미지로 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남월국(南越國)을 원정해서 군현(郡縣)에 소속시켰으며
 조선(朝鮮)에는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이견이 있음)

 남월(南越)은, 중국 한(漢)나라 때, 지금의 광둥성(廣東省)과 광시성(廣西省)과 베트남 북부지역에 걸쳐있었던 나라였으며, 기원전 203년 한나라의 관료였던 조타(趙佗)가 독립해서 세웠던 나라였다. 그리고 뒤에 한 고조(高祖)에 의해서 왕으로 봉해진 후, 93년간이나 계속되다가, 기원전 111년에 한 무제(武帝)에 의해서 멸망했다.






 ※ 한사군(漢四郡)은, 기원전 108년, 중국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한반도에 설치했던 4개의 행정구역으로, 낙랑군과 임둔군 그리고 현도군과 진번군을 이름. 뒤에 고구려에 병합됨.

 그 결과, 한(漢)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그러자 또 무제(武帝)는 태산(泰山)에서 봉선의식(封禪儀式)을 거행했으며, 스스로 자신의 공적을 하늘에 고(告)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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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41년/ 무제(武帝)의 즉위(即位) (~87). 익년(翌年)을 건원원년(建元元年)으로 함.(元号가 制定됨)

 


 ※ 무제(武帝)




 무제(武帝) 기원전 156년-기원전 87년.
 재위 : 기원전 141년-기원전 87년
 전한(前漢)의 제7대 황제.
 시호는 철(徹). 묘호(廟號)는 세종(世宗). 정식적인 시호는 효무황제(孝武皇帝).
 유방(劉邦)의 증손(曾孫)으로, 부(父)는 경제(景帝), 생모는 왕 씨(王氏).
 황태자 전(前)의 왕호(王號)는 교동왕(膠東王).
 평양공주(平陽公主) 등 3명의 동모자(同母姉)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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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위(卽位)>

 그는 경제(景帝)의 제10子(혹은 제9子)로 태어났고, 유명(幼名=兒名)은 부정(不淨)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체(彘=돼지란 뜻)>로 지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교동왕(膠東王)에 봉해졌고, 이어서 또 당시, 먼저 황태자가 되어 있었던 율 부인(栗夫人)이 생산했던 맏형 유영(劉榮=栗太子=臨江閔王)을 밀쳐내고 왕위에 즉위했다. 그리고 또 그 즉위 때 태황태후였던 두 씨(竇氏)의 힘이 컸기 때문에, 그래서 즉위 초기에는 그 두 씨(竇氏)가 실권을 잡았다. 그리고 황후는 백모(伯母)였던 관도공주(館陶公主) 유표(劉嫖=景帝의 同母姉)가 생산했던 진황후(陳皇后=元勳 陳嬰의 孫 堂邑侯 陳午의 딸)를 맞이했다. 하지만 사촌사이였던 그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그래서 나중에 조모(祖母) 두 황후(竇皇后)가 죽자, 당시 근시(近侍)였던 장탕(張湯)의 조언을 받아서 이혼했다. 무제(武帝)는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으로 유력(有力)했던 봉왕(封王)들이 힘을 잃게 되자 중앙집권을 목표로 추진했다. 그리고 제후왕들이 자신의 영지를 자제(子弟)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열후(列侯)에 봉건 되는 것을 허락했다.

 <추은(推恩)의 영(令)>

 그러자 그 후, 제후왕들의 영토는 더욱 세분화 되었다. 그리고 또 무제(武帝)는 <향거리선(鄕擧里選)의 법(法)>으로 불렸던 관리임용 법을 채용했고, 그것은 또 각 지방과 향리(鄕里)의 유력자들과 그 지방의 태수들이 서로 합의하여 당지(當地)의 재능 있는 인물을 추천했던 것으로, 무제(武帝)는 특히 유교의 교양을 몸에 익힌 인물들을 많이 등용했으며, 그리고 또한 <동중서(董仲舒)>의 헌책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했고, 그리하여 유교(儒敎)를 관학(官學)으로 했다.

 참고 : 그렇게 해서 유교(儒敎)가 국교화(國敎化) 되었다고 하는 것이 전통적인 이해였지만, 그러나 현재 그것은 거의 부정되고 있고, 유교(儒敎)의 국교화(國敎化)는 적어도 <왕망(王莽)>의 시대까지는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 왕망(王莽-기원전 45년부터 서기 23년)은, 중국 전한의 정치가였고, 자(字)는 거군(巨君)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옹립했던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를 빼앗아 국호를 <신(新)>으로 명명하였지만, 그러나 <적미의 난> 때 반도들에 의해서 피살되었다.(後述 또는 생략)

 동중서(董仲舒-기원전 176년?부터 기원전 104년?)는,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유학자였으며, 춘추(春秋)학자였다. 그리고 유가사상(儒家思想)을 국가교육과 학문으로 할 것을 헌책했던 인물이었다. 그 사상의 최대의 특징은 재이설<災異說=천재(天災)와 지이(地異)를 아울러서 이르는 말에 대한 說>이었으며, 호는 계암자(桂巖子)였고,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을 수학하여, 하늘과 사람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광천(廣川=현재의 河北省 景縣)에서 태어났고, 춘추(春秋)학의 일파였던 공양학(公羊學)을 배워서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춘추(春秋=歷史)는, 유학(儒學)에서 오경(五經)의 하나이며, 공자에 의해서 노나라의 은공(隱公)부터 애공(哀公)에 이르기까지의 242년(B.C.722~B.C.481) 동안의 사적(事跡)을 편년체로 기록했던 책이었다. 11권.

 ☆
공양학(公羊學)은, 중국의 춘추삼전 중 <공양전>에 바탕을 두고, 공자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왕조의 교체와 사회의 진화를 설명하고 정치를 비판했던 학문이었으며, 중국 한나라 때에 창시되었고, 청나라 말기에 캉유웨이(康有爲)가 학문적인 체계를 세웠다.

 ☆ 공양학파(公羊學派)는, 동양 철학에서 <공양전>에 바탕을 두고, 공자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파로, 장존여(莊存與)에서 시작되었고, 청나라 말기에 캉유웨이에 의해서 크게 발달되었다.

 ☆ 캉유웨이(Kang Youwei=康有爲. 1858~1927)는, 중국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 초기의 정치가·학자였고, 열강들의 중국침략에 맞섰으며, 광서제를 옹립하여 개혁을 계획하였으나, 서태후를 비롯했던 보수파에 밀려서 실패하였던 인물이었다.

 
※ 그러나 위의 내용들은 모두 참고이므로, 따로 설명을 더 해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는 무제(武帝) 건원(建元) 원년(元年)에 행해졌던 현양대책(賢良對策) 때, 유가(儒家) 이외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을 배척했고, 유학을 국가교육과 학문으로 자리 잡도록 헌책해서 가납(嘉納)되었다.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춘추전국시대 때의 여러 학파를 말하는 것으로, 공자(孔子), 관자(管子), 노자(老子), 맹자(孟子), 장자(莊子), 묵자(墨子), 열자(列子), 한비자(韓非子), 윤문자(尹文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귀곡자(鬼谷子) 등의 유가(儒家)들과,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음양가(陰陽家) 등을 통틀어서 이르는 말임.

 그리하여 그 후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유학적인 교양을 몸에 익히는 것이 필수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군국(郡國)에 태학(太學)을 설치할 것을 상주했고, 그 결과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상임(常任)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박사들이 각각 전문으로 하던 경학(經學)을 교수했다고 전해진다.<하지만, 오경(五經)의 모든 전문가가 모이게 되었던 것은, 무제(武帝) 이후였다고 생각됨> 그리고 또 그는 춘추(春秋)를 아주 깊게 탐구했고, 그 결과 음양설(陰陽說)과 융합시켜서 유명한 <재이사상(災異思想)>을 전개했다.

 
☆ 음양설(陰陽說)은, 역(易)의 사상에 기초하여, 음양(陰陽)이원(二元)의 소장(消長)에 의하여 우주만물의 생성변화를 설명하는 설로, 중국 한나라 때 크게 유행하였으며, 그리하여 미신을 받드는 음양가들이 이용했으며, 후에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건원(建元) 6년에 요동고묘(遶東高廟=遶東에 있던 高祖의 祠堂으로 생각됨)와 고원편전(高園便殿=왕 등이 외출 시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마련해둔 방. 그러나 정확히 그 장소는 어딘지 알 수 없음)에서 일어났던 재이(災異)의 원인을 추리했고(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일부 화재였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것은 현재 알 수 없음), 그리고 또 미정(未定)의 상주문(上奏文) 초고(草稿)를 주부언(主父偃)이란 자에게 도둑맞은 것을 밝혀내서 무제(武帝)의 눈에 들었다. 그 후에 무제(武帝)는 유생(儒生)들을 초대해서 의견을 구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동중서(董仲舒)의 제자였던 <여보서(呂步舒)>가 스승의 글인 줄을 알지 못하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러자 동중서(董仲舒)는 나중에 그 제자를 용서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때 하마터면 죽을 죄에 처해질 뻔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후로는 재이(災異)에 관한 이야기는 두 번 다시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또 같은 춘추학자였던 공손홍(公孫弘)의 중상모략을 받아서 강도국(江都國)으로 좌천되는 등, 평생은 불우(不遇)했다. 그리하여 현재 <토불우부(土不遇賦)>란 부(賦)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공손홍(公孫弘-B.C.200부터 B.C.121)은, 중국 전한(前漢)의 학자였고, 정치가였던 사람으로, 자는 계(季). 무제 때 현량으로 추천되어서 승상에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

 ☆부(賦)는, 시경(詩經)에서 이르는 시의 육의(六義) 중 하나이며, 사물이나 그에 대한 감상을 직접 서술하는 작법을 말함.

 그리고 만년(晩年)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서 학구에 전념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또 그는 청렴결백한 인품으로 덕이 높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평생을 학문을 연구하는 데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가 박사(博士)시대에는 방에 휘장을 내리고 강의를 했으며, 3년간이나 땅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 당시, 제자의 수(數)도 아주 많아서 신참 자들은 모두 그의 제자들에게서 강의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중에서는 아예 동중서(董仲舒)의 얼굴도 모르는 제자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아마도 그때, 사마천(司馬遷)도 동중서(董仲舒)에게서 배웠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아래는 그의 저서에 대한 대강이며, 참고로 소개함.

 그러나 한글 표현은 하지 않습니다.

 董仲舒百 二十三篇

<上書는 上疏와 敎義를 모은 것이며, 漢書의 董仲舒伝에 収録되어 있는 賢良対策은 아마도 董仲舒百 二十三篇의 一部인 것으로 생각됨>

 聞舉
 玉杯
 蕃露
 清明
 竹林

 複数 十篇
 <主로 春秋의 得失을 기술한 것>

 公羊董仲舒治獄 十六篇
 <公羊春秋의 精神에 근거해서,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재판했던 일종의 裁判記録集이며, 단 현재는 완전한 형태로는 전하지 않는다고 함>

 그
리고 현재 <춘추번로(春秋繁露)>라는 저작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을, 육조시대(六朝時代)에 들어서 누군가가 재편집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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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54년/ 오초칠국(呉楚七國)의 난(亂) 발발(勃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중국 전한(前漢) 기원전 154년에, 오왕(吳王) 외에, 칠국(七國)의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켰던 반란이었으며, 유 씨(劉氏) 가문의 내란(內亂)이었다.

 <경위(經緯)>

 그러자 원앙(袁盎)이 이렇게 말을 했다. <반란군은 오왕(吳王)이 큰 보상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가담한 것뿐이며, 그리고 또 오왕(吳王)의 주변에는 전부 간신들만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거병을 말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난(亂)은 곧 수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위를 모두 물리게 해달라고 하고는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반란군은 현재 조착(晁錯)의 주살(誅殺)을 명목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조착(晁錯)만 죽으면 이 문제는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경제(景帝)는 몹시 놀라면서 고민했지만, 그러나 결국 원앙(袁盎)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그 후, 경제(景帝)는 건국공신 주발(周勃)의 아들이었으며 또한 문제(文帝)가 유언을 남겼을 때 <한조(漢朝)에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그에게 군(軍)을 맡겨서 해결하라!>라고까지 조언을 했던 주아부(周亞夫)를 태위(太尉)에 임명했고, 이어서 초한전쟁(楚漢戰爭) 때 활약했던 란포(欒布)의 토벌을 명했다.

 그런데 그때, 반란군은 대군이었지만 통솔이 잘 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또 오(吳)의 장군이 기습전을 건의했어도 무시하고 정공법(正攻法)만 고집했기 때문에 도중에 양왕(梁王) 유무(劉武)의 완강한 저항을 받고 발이 묶여 있었다. 그러자 또 그 사이에 주아부(周亞夫)는 우선적으로 요충지였던 낙양(洛陽)과 형양(滎陽)으로 급히 달려가서 그곳을 확보했다. 그리고는 다음으로 양(梁)과 조(趙) 그리고 제(齊)의 중간에 있던 창읍(昌邑)으로 들어가서 유무(劉武)와 경제(景帝)로부터의 구원요청이 왔어도 그것조차도 무시하고는 방어를 견고하게 굳혔다. 그런 한편 조(趙)와 제(齊)를 견제했던 동시에, 반란군의 주력이었던 오(吳)와 초군(楚軍)에는 기동력이 뛰어난 군사들을 보내서 선착장을 파괴하는 등, 철저하게 보급선(補給線)을 차단하는 전법을 구사해서 그들을 모두 기아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러자 곧 오(吳)와 초군(楚軍)은 전의(戰意)를 상실했고, 이어서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장군들에서조차도 탈주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위기감을 느꼈던 오왕(吳王)은 급한 차에 양(梁)의 수도는 포기하고 일단 창읍(昌邑)부터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또 그때, 이미 주아부(周亞夫)는 그곳의 방비를 철저하게 해둔 상태였고, 그런데다 또 <서북(西北) 쪽을 견제하면서 동남(東南) 쪽을 치겠다>라고 계획했던 오왕(吳王)의 양동작전(陽動作戰)까지도 미리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남(東南) 쪽으로 군을 집결시킨 후, 당시 한군(漢軍)의 주특기였던 평지(平地)에서의 싸움으로 유인해서 그것을 전차(戰車)로 격퇴했다. 그러자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던 오군(吳軍)은 허둥지둥 철퇴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주아부(周亞夫)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추격했고, 이어서 오군(吳軍)은 붕괴했으며, 그러자 또 그때, 오왕(吳王)도 군을 버리고 도망쳤다.
   

 


 

 ※ 인물소개

 주아부(周亞夫-?부터 기원전 143년)는, 전한(前漢) 전기의 무장이었고, 정치가였다. 그리고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에서 반란군을 물리치는 공적을 올렸던 인물이었다. 그는 한(漢)의 건국 공신이었던 주발(周勃)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주발(周勃) 사후(死後), 문제(文帝)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맏형 주승지(周勝之)가 그 후계를 이었지만, 그러나 그 주승지(周勝之)가 살인을 저질러서 작위가 박탈되었다. 그러자 주아부(周亞夫)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이어서 조후(條侯)에 봉건 되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아버지 주발(周勃)처럼 군(軍)에서 활약했고, 흉노(匈奴)가 한(漢)의 영토를 침입했을 때는 문제(文帝)의 명을 받아서 그 방위의 일익(一翼)을 담당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정세가 안정되자, 문제(文帝)는 나라의 방비에 공을 세웠던 장병들을 위문한다는 차원에서 각 진영을 방문하고 열병(閱兵)했다. 그런데 그때, 다른 여러 진영들에서는 문제(文帝)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지만, 그러나 주아부(周亞夫)의 진영을 찾아갔을 때 주아부(周亞夫)는 문제(文帝)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폐하, 여기는 적진이므로 폐하께서도 그에 맞는 열병을 해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그런 다음, 문제(文帝)에게도 진중의 법을 지키게 했으며, 또한 진영 내에서도 하마(下馬)시킨 다음에 통행을 시키는 등, 전시체제를 유지했다. 그러자 문제(文帝)의 측근들은 그에게 <너무 무례하다>고 하면서 비난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오히려 그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야말로 진정한 장군이요!> 그 후, 문제(文帝)는 임종을 앞두고서 황태자(후의 景帝)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만약에 나라에 무슨 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주아부(周亞夫)에게 군을 맡겨서 사태를 해결하도록 하라!> 그런데 기원전 154년, 경제(景帝) 즉위 후, 당시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조착(晁錯)의 정책에 반발해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발생했다. 그러자 태위(太尉)가 된 주아부(周亞夫)는 경제(景帝)의 명을 받아서 대군을 인솔하고 창읍(昌邑)으로 들어갔다.(이하, 上述의 내용 참조) 반란진압 후, 주아부(周亞夫)는 승상이 되어서 정권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종종 경제(景帝)와 의견 대립했고, 그 때문에 경제(景帝)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또 그러던 중, 새 황후를 책봉할 일이 있어서 경제(景帝)는 자신이 총애하던 왕 씨(王氏=武帝의 생모)를 황후로 삼으려고 했는데, 그러나 그때도 주아부(周亞夫)는 그것을 반대했고, 그러자 마침내 경제(景帝)는 그를 승상의 자리에서 파면시켜버렸다. 거기다 주아부(周亞夫)의 아들이 나중에 주아부(周亞夫)의 묘(墓)에 쓸 부장품(副葬品)을 구입했던 것이 궁중에서 제작된 황제전용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아들과 함께 불경죄(不敬罪)가 적용되었다. 그러자 주아부(周亞夫)는 그 일을 책임진다는 의미로 절식사(絶食死)했다. 그리고 또, 그의 형제들 또한 모두 실각(失脚) 당했다.

 <일화(逸話)>

 그가 하내(河內)란 곳에서 태수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 허부(許負)라는 유명한 점쟁이가 있었는데, 그는 과거 위표(魏豹)의 측실이었던 박 씨(薄氏)에게 <당신은 머지않아서 천자를 낳게 될 것이오!>라고 점을 쳤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허부(許負)가 주아부(周亞夫)의 관상을 보고는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3년 후에는 제후가 되겠습니다. 그런 다음, 그 8년 후에는 대장군이 되어서 군을 호령하겠지만, 그러나 또 그 9년 후에는 굶어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주아부(周亞夫)가 또 이렇게 물었다. <나의 형님은 현재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소. 그리고 만약 그 형님이 돌아가신다면 그때는 그 형님의 자식이 그 뒤를 잇게 될 것이요. 그런데 어째서 내가 제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또한, 그 뒤의 일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또 허부(許負)가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의 관상은 비교적 무난한 편이지만, 그러나 입(口)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당신의 입은 양단(兩端)에 세로로 생긴 줄이 움푹 파져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사(餓死)의 상(相)인 것입니다><사기(史記)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아무튼 그 후, 오왕(吳王)은 동월(東越)로 도망을 갔지만, 하지만 그 동월(東越)의 왕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머리는 경제(景帝)에게 헌상되었다. 그러자 또 거사가 실패했다고 느꼈던 다른 왕들 중 2명은 자살했으며, 그 외의 왕들도 일단 자신의 나라들로 귀국했지만, 그러나 그들도 나중에는 모두 다 살해당했다. 그리고 또한, 그리하여 결국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발발로부터 불과 3개월이란 짧은 시간 안에 진압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조왕(趙王)만은 그 후에도 저항을 계속했는데, 그러나 그도 결국에는 자살했고, 그리고 또 그때 임치(臨淄)를 수비했던 제효왕(齊孝王) 유장려(劉將閭)는, 처음에는 반란군에 가담했다는 것이 판명되어 자살했으며, 그러자 또 경제(景帝)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의 자식 유수(劉壽)를 제왕(齊王)에 봉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양왕(梁王)은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에서 전공을 세웠다는 핑계로 차기(次期) 황제를 노렸지만, 그러나 그것은 원앙(袁盎)의 반대로 좌절되었으며, 그러자 또 양왕(梁王)은 원앙(袁盎)을 원망해서 자객을 보내 암살했다. 그리고 아래는 그때, 반란에 참가했던 왕들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오왕(吳王) 유비(劉濞)
 초왕(楚王) 유무(劉戊=劉交의 孫)
 조왕(趙王) 유수(劉遂=劉友의 子)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劉肥의 子)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雄渠=劉肥의 子)
 치천왕(菑川王) 유현(劉賢=劉肥의 子로, 劉濞의 子와 同名異人)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劉肥의 子)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난(亂)은 진압되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제후왕(諸侯王)들에 대한 관리는 더욱 엄격해졌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제후국(諸侯國)들의 통치는 조정에서 임명하여 파견했던 관리가 대행했으며, 그에 따라서 제후왕(諸侯王)들은 실권을 잃게 되었고, 단지 조세를 받아들이는 직책으로 전락해갔다. 그리고 또 무제(武帝) 때에는 <추은(推恩)의 영(令)>이 나와서, 그때까지는 장자상속을 하던 영지를 다른 사람에게도 분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또 그 결과, 제후왕(諸侯王)들은 점점 힘을 잃게 되었고, 군국제(郡國制)도 거의 군현제(郡縣制)처럼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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