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54년/ 오초칠국(呉楚七國)의 난(亂) 발발(勃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중국 전한(前漢) 기원전 154년에, 오왕(吳王) 외에, 칠국(七國)의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켰던 반란이었으며, 유 씨(劉氏) 가문의 내란(內亂)이었다.

 <경위(經緯)>

 그러자 원앙(袁盎)이 이렇게 말을 했다. <반란군은 오왕(吳王)이 큰 보상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가담한 것뿐이며, 그리고 또 오왕(吳王)의 주변에는 전부 간신들만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거병을 말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난(亂)은 곧 수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위를 모두 물리게 해달라고 하고는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반란군은 현재 조착(晁錯)의 주살(誅殺)을 명목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조착(晁錯)만 죽으면 이 문제는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경제(景帝)는 몹시 놀라면서 고민했지만, 그러나 결국 원앙(袁盎)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그 후, 경제(景帝)는 건국공신 주발(周勃)의 아들이었으며 또한 문제(文帝)가 유언을 남겼을 때 <한조(漢朝)에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그에게 군(軍)을 맡겨서 해결하라!>라고까지 조언을 했던 주아부(周亞夫)를 태위(太尉)에 임명했고, 이어서 초한전쟁(楚漢戰爭) 때 활약했던 란포(欒布)의 토벌을 명했다.

 그런데 그때, 반란군은 대군이었지만 통솔이 잘 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또 오(吳)의 장군이 기습전을 건의했어도 무시하고 정공법(正攻法)만 고집했기 때문에 도중에 양왕(梁王) 유무(劉武)의 완강한 저항을 받고 발이 묶여 있었다. 그러자 또 그 사이에 주아부(周亞夫)는 우선적으로 요충지였던 낙양(洛陽)과 형양(滎陽)으로 급히 달려가서 그곳을 확보했다. 그리고는 다음으로 양(梁)과 조(趙) 그리고 제(齊)의 중간에 있던 창읍(昌邑)으로 들어가서 유무(劉武)와 경제(景帝)로부터의 구원요청이 왔어도 그것조차도 무시하고는 방어를 견고하게 굳혔다. 그런 한편 조(趙)와 제(齊)를 견제했던 동시에, 반란군의 주력이었던 오(吳)와 초군(楚軍)에는 기동력이 뛰어난 군사들을 보내서 선착장을 파괴하는 등, 철저하게 보급선(補給線)을 차단하는 전법을 구사해서 그들을 모두 기아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러자 곧 오(吳)와 초군(楚軍)은 전의(戰意)를 상실했고, 이어서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장군들에서조차도 탈주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위기감을 느꼈던 오왕(吳王)은 급한 차에 양(梁)의 수도는 포기하고 일단 창읍(昌邑)부터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또 그때, 이미 주아부(周亞夫)는 그곳의 방비를 철저하게 해둔 상태였고, 그런데다 또 <서북(西北) 쪽을 견제하면서 동남(東南) 쪽을 치겠다>라고 계획했던 오왕(吳王)의 양동작전(陽動作戰)까지도 미리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남(東南) 쪽으로 군을 집결시킨 후, 당시 한군(漢軍)의 주특기였던 평지(平地)에서의 싸움으로 유인해서 그것을 전차(戰車)로 격퇴했다. 그러자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던 오군(吳軍)은 허둥지둥 철퇴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주아부(周亞夫)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추격했고, 이어서 오군(吳軍)은 붕괴했으며, 그러자 또 그때, 오왕(吳王)도 군을 버리고 도망쳤다.
   

 


 

 ※ 인물소개

 주아부(周亞夫-?부터 기원전 143년)는, 전한(前漢) 전기의 무장이었고, 정치가였다. 그리고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에서 반란군을 물리치는 공적을 올렸던 인물이었다. 그는 한(漢)의 건국 공신이었던 주발(周勃)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주발(周勃) 사후(死後), 문제(文帝)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맏형 주승지(周勝之)가 그 후계를 이었지만, 그러나 그 주승지(周勝之)가 살인을 저질러서 작위가 박탈되었다. 그러자 주아부(周亞夫)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이어서 조후(條侯)에 봉건 되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아버지 주발(周勃)처럼 군(軍)에서 활약했고, 흉노(匈奴)가 한(漢)의 영토를 침입했을 때는 문제(文帝)의 명을 받아서 그 방위의 일익(一翼)을 담당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정세가 안정되자, 문제(文帝)는 나라의 방비에 공을 세웠던 장병들을 위문한다는 차원에서 각 진영을 방문하고 열병(閱兵)했다. 그런데 그때, 다른 여러 진영들에서는 문제(文帝)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지만, 그러나 주아부(周亞夫)의 진영을 찾아갔을 때 주아부(周亞夫)는 문제(文帝)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폐하, 여기는 적진이므로 폐하께서도 그에 맞는 열병을 해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그런 다음, 문제(文帝)에게도 진중의 법을 지키게 했으며, 또한 진영 내에서도 하마(下馬)시킨 다음에 통행을 시키는 등, 전시체제를 유지했다. 그러자 문제(文帝)의 측근들은 그에게 <너무 무례하다>고 하면서 비난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오히려 그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야말로 진정한 장군이요!> 그 후, 문제(文帝)는 임종을 앞두고서 황태자(후의 景帝)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만약에 나라에 무슨 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주아부(周亞夫)에게 군을 맡겨서 사태를 해결하도록 하라!> 그런데 기원전 154년, 경제(景帝) 즉위 후, 당시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조착(晁錯)의 정책에 반발해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발생했다. 그러자 태위(太尉)가 된 주아부(周亞夫)는 경제(景帝)의 명을 받아서 대군을 인솔하고 창읍(昌邑)으로 들어갔다.(이하, 上述의 내용 참조) 반란진압 후, 주아부(周亞夫)는 승상이 되어서 정권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종종 경제(景帝)와 의견 대립했고, 그 때문에 경제(景帝)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또 그러던 중, 새 황후를 책봉할 일이 있어서 경제(景帝)는 자신이 총애하던 왕 씨(王氏=武帝의 생모)를 황후로 삼으려고 했는데, 그러나 그때도 주아부(周亞夫)는 그것을 반대했고, 그러자 마침내 경제(景帝)는 그를 승상의 자리에서 파면시켜버렸다. 거기다 주아부(周亞夫)의 아들이 나중에 주아부(周亞夫)의 묘(墓)에 쓸 부장품(副葬品)을 구입했던 것이 궁중에서 제작된 황제전용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아들과 함께 불경죄(不敬罪)가 적용되었다. 그러자 주아부(周亞夫)는 그 일을 책임진다는 의미로 절식사(絶食死)했다. 그리고 또, 그의 형제들 또한 모두 실각(失脚) 당했다.

 <일화(逸話)>

 그가 하내(河內)란 곳에서 태수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 허부(許負)라는 유명한 점쟁이가 있었는데, 그는 과거 위표(魏豹)의 측실이었던 박 씨(薄氏)에게 <당신은 머지않아서 천자를 낳게 될 것이오!>라고 점을 쳤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허부(許負)가 주아부(周亞夫)의 관상을 보고는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3년 후에는 제후가 되겠습니다. 그런 다음, 그 8년 후에는 대장군이 되어서 군을 호령하겠지만, 그러나 또 그 9년 후에는 굶어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주아부(周亞夫)가 또 이렇게 물었다. <나의 형님은 현재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소. 그리고 만약 그 형님이 돌아가신다면 그때는 그 형님의 자식이 그 뒤를 잇게 될 것이요. 그런데 어째서 내가 제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또한, 그 뒤의 일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또 허부(許負)가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의 관상은 비교적 무난한 편이지만, 그러나 입(口)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당신의 입은 양단(兩端)에 세로로 생긴 줄이 움푹 파져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사(餓死)의 상(相)인 것입니다><사기(史記)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아무튼 그 후, 오왕(吳王)은 동월(東越)로 도망을 갔지만, 하지만 그 동월(東越)의 왕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머리는 경제(景帝)에게 헌상되었다. 그러자 또 거사가 실패했다고 느꼈던 다른 왕들 중 2명은 자살했으며, 그 외의 왕들도 일단 자신의 나라들로 귀국했지만, 그러나 그들도 나중에는 모두 다 살해당했다. 그리고 또한, 그리하여 결국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발발로부터 불과 3개월이란 짧은 시간 안에 진압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조왕(趙王)만은 그 후에도 저항을 계속했는데, 그러나 그도 결국에는 자살했고, 그리고 또 그때 임치(臨淄)를 수비했던 제효왕(齊孝王) 유장려(劉將閭)는, 처음에는 반란군에 가담했다는 것이 판명되어 자살했으며, 그러자 또 경제(景帝)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의 자식 유수(劉壽)를 제왕(齊王)에 봉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양왕(梁王)은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에서 전공을 세웠다는 핑계로 차기(次期) 황제를 노렸지만, 그러나 그것은 원앙(袁盎)의 반대로 좌절되었으며, 그러자 또 양왕(梁王)은 원앙(袁盎)을 원망해서 자객을 보내 암살했다. 그리고 아래는 그때, 반란에 참가했던 왕들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오왕(吳王) 유비(劉濞)
 초왕(楚王) 유무(劉戊=劉交의 孫)
 조왕(趙王) 유수(劉遂=劉友의 子)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劉肥의 子)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雄渠=劉肥의 子)
 치천왕(菑川王) 유현(劉賢=劉肥의 子로, 劉濞의 子와 同名異人)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劉肥의 子)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난(亂)은 진압되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제후왕(諸侯王)들에 대한 관리는 더욱 엄격해졌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제후국(諸侯國)들의 통치는 조정에서 임명하여 파견했던 관리가 대행했으며, 그에 따라서 제후왕(諸侯王)들은 실권을 잃게 되었고, 단지 조세를 받아들이는 직책으로 전락해갔다. 그리고 또 무제(武帝) 때에는 <추은(推恩)의 영(令)>이 나와서, 그때까지는 장자상속을 하던 영지를 다른 사람에게도 분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또 그 결과, 제후왕(諸侯王)들은 점점 힘을 잃게 되었고, 군국제(郡國制)도 거의 군현제(郡縣制)처럼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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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54년/ 오초칠국(呉楚七國)의 난(亂) 발발(勃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중국 전한(前漢) 기원전 154년에, 오왕(吳王) 외에, 칠국(七國)의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켰던 반란이었으며, 유 씨(劉氏) 가문의 내란(內亂)이었다.

 <경위(經緯)>

 그래서 경제(景帝)는 과거, 오(吳)의 재상(宰相)을 맡았었고, 직언(直言)을 잘하기로도 유명했으며, 그에 문제(文帝)조차도 <무슨 일이 있으면 그와 상담(相談)하라. 그는 경우(境遇)에 어긋난 말은 결코 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신뢰하고 있었던 원앙(袁盎)을 불러서 오(吳)의 정보와 조언을 구했다.

 


 

 ※ 인물소개

 원앙(袁盎-生沒未詳)은, 전한(前漢) 때의 사람으로, 자(字)는 사(絲), 안능(安陵)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초(楚)나라 사람으로 군도(群盜=떼도둑)였는데, 그러다가 안능(安陵)으로 이주했고, 그후 그는 여후(呂后)의 시대에 여록(呂祿-呂后의 조카)의 사인<舍人=주인의 우마(牛馬)를 다루던 직업으로, 일종의 하인(下人)>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러던 중 문제(文帝)가 즉위한 후에는 낭중(郎中)이 되었다. 그 후, 여 씨(呂氏)를 타도하고 승상이 되었던 주발(周勃)은 공신(功臣)에다 문제(文帝)를 황제에 추대(推戴)했던 일도 있었고 해서, 문제(文帝)는 그를 어렵게 대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원앙(袁盎)이 나서서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승상은 여후의 시대에 태위(太尉)가 되어서 병권(兵權)을 손에 쥐고서도 바로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승상은 공신일 뿐, 사직(社稷)의 신하는 못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승상이 우쭐해 하고, 폐하께서는 겸양해 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 후로부터는 황제로서의 위엄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주발(周勃)이 그에게 <나는 너의 형과 사이가 좋은데, 너는 어째서 나를 비방하는가?!>라고 꾸짖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에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 주발(周勃)은 관직을 그만두고 본토(本土)로 돌아갔는데, 그런데 그때 또 누군가가 그를 모함했다. 그래서 주발(周勃)은 반란의 혐의로 옥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그를 변호해줄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 그러자 원앙(袁盎)이 나서서 그를 변호해 주었고, 그러자 또 그 후로부터는 두 사람이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이 심식기(審食其)를 죽이는 등, 아주 교만하게 굴었다.

 심식기(審食其-?부터 기원전 177년)는, 전한(前漢) 때의 사람이며, 출신은 패(沛)였다. 그리고 유방(劉邦)이 패공(沛公)이 되었을 때, 그 전부터 유태공(劉太公)을 많이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유방(劉邦)은 자신의 형 유희(劉喜)와 함께 유태공(劉太公)을 모시게 했다. 그리고 고조(高祖) 2년(기원전 205년)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지고 도주했을 때도 그는 유태공(劉太公)과 여치(呂雉)를 돌보았다. 그 후, 유태공(劉太公)과 여치(呂雉)는 유방(劉邦)에게로 돌아갔고, 그때 그도 함께 따라갔다. 그리고 그 공으로 고조(高祖) 6년(기원전 201년)에 그는 벽양후(辟陽侯)에 봉해졌다. 그 후, 고조(高祖) 8년(기원전 199년)에 조왕(趙王)이었던 장오(張敖) 측에서 유방(劉邦=高祖)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당시, 원래는 장오(張敖)의 후궁이었지만, 그러나 장오(張敖)가 유방(劉邦)에게 헌상해서 유방(劉邦)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조미인(趙美人)도 함께 연좌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러자 또 그녀의 남동생이 심식기(審食其)를 통해서 여후(呂后)에게 잘 고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러나 여치(呂雉)의 질투로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러자 또 심식기(審食其)도 더 이상은 부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유장(劉長)을 낳고 자살했다.

 
<조미인(趙美人)은 당시, 옥에 갇혀있으면서 자신이 유방(劉邦)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치(呂雉)의 질투로 인해서 그 소원은 무시되었고, 그러자 또 조미인(趙美人)은 억울해하다 유장(劉長)을 낳고 자살했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유방(劉邦)이 그것을
알고는 그때, 자신이 그녀를 살리지 못했던 것을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아무튼, 고조(高祖) 12년(기원전 195년)에,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란을 기도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했던 유방(劉邦)은 심식기(審食其)와 어사대부였던 조요(趙堯)에게 시켜서 노관(盧綰)을 만나보라고 했지만, 그러나 미리 의심을 했던 노관(盧綰)은 병을 칭하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해, 유방(劉邦)이 죽자 여치(呂雉)가 심식기(審食其)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현재, 장군들 중에서는 일찍이 고조(高祖=劉邦)와 같이 일반 백성이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러나 현재는 고조(高祖)의 부하가 되어 있으므로, 속심은 고조(高祖)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린 주군(主君)을 제위에 세우기 위해서는, 그들을 모두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유방(劉邦)의 사망을 당분간 비밀에 붙였다. 그러자 또 심식기(審食其)가 여치(呂雉)에게 이렇게 말을 하면서 설득했다. <하지만 그 장군들을 모두 다 몰살해 버린다면 천하는 더욱 위험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현재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제장(諸將)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여치(呂雉)는 유방(劉邦)의 죽음을 세상에 공표했다. 그리고 다음, 혜제(惠帝) 7년(기원전 188년)에 그는 전객(典客=知客=寺에서, 그러나 여기서는 궁전 내에서 손님 등을 접대하는 직책)이 되었고, 그 다음해(呂后 元年)에는 좌승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낭중령(郎中令=일종의 호위대장)처럼 궁전 내를 감시한다거나, 모든 관료들의 결재를 받는 일을 자청했다. 그 후, 여후(呂后) 8년(기원전 180년)에 여후(呂后)가 죽자 그는 태부(太傅=天子의 師)가 되었다. 그리고 여 씨(呂氏)가 멸한 후, 재차 승상이 되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가 즉위할 무렵에 또 파면되었다. 문제(文帝) 3년(기원전 177년) 당시, 회남왕(淮南王)이 되어 있었던 유장(劉長)은 자신의 어머니였던 조미인(趙美人)을 적극적으로 도우지 않았던데 앙심을 품고 그를 방문해서 살해했다. 그러자 그 후, 그에게 유후(幽侯)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또, 그 후국(侯國)은 심평(審平)이 이었지만, 그러나 또
경제 2년(기원전 155년)에 모반의 죄를 받고 그는 자살했다.

 아무튼, 그 때문에 원앙(袁盎)은 문제(文帝)에게 그의 영지(領地)를 감(減)하도록 권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회남왕(淮南王)은 더욱 교만해져서 이윽고 반란까지 모의하다 그것이 결국에는 발각되었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를 촉(蜀)으로 유배 보내려고 했다.(이하, 劉長 참조) 그러나 유배를 가던 도중 유장(劉長)은 죽었고, 그러자 또 문제(文帝)는 크게 후회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원앙(袁盎)이 나서서 문제(文帝)의 좋은 점을 거론하면서 문제(文帝)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그 후에 또 어느 때에, 문제(文帝)가 패능(覇陵)에 갔다가 험한 비탈길을 내려가려 했는데, 그러자 원앙(袁盎)이 문제(文帝)를 제지했다. 그러자 또 문제(文帝)가 <왜? 두려운가?>라고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또 원앙(袁盎)이 이렇게 대답했다. <원래, 천금(千金)을 가진 자산가는 아래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자리 끝에는 앉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도 그 만일(萬一)의 경우를 생각하셔서 미리 삼가시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가려던 길을 멈추었다고 한다.

 
패능(覇陵)은 한(漢)의 5대(代) 황제 문제(文帝)가 묻혔던 곳으로, 현재 서안(西安)의 서쪽 교외(郊外)에 있다. 그리고 또 장례는 문제(文帝) 자신의 유언에 따라서 박장(薄葬-간단하고, 간소한 장례)으로 치러졌고, 그리고 전한(前漢)의 황제로서는 유일하게 자연 언덕을 이용한 능묘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또 두 황후(竇皇后)는 문제(文帝)가 죽고 20년이나 지나서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합장은 하지 않고 다른 곳에 묻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문제(文帝)가 황후와 총희(寵姬)였던 <신 부인(愼夫人)>을 동반하고 상림(上林)으로 행차했는데, 그런데 그때 황후와 신(愼) 부인이 동석(同席=같은 지위의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원앙(袁盎)이 신 부인(愼夫人)의 자리를 황후의 자리보다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신 부인(愼夫人)이 그것을 보고 화를 내며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원앙(袁盎)은 이렇게 말을 했다. <존비(尊卑)의 질서가 분명하면 상하(上下)가 화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부인은 첩(妾)의 신분인데, 어떻게 황후와 같은 자리에 앉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폐하께서도 신 부인(愼夫人)을 총애하고 계신다면, 그에 따른 포상만 내리면 되는 것이며, 이런 일을 모른 척하신다면 그것은 신 부인(愼夫人)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禍)를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디 “인돈(人豚=呂雉 참조)”의 고사(故事)를 기억해주십시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의 말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신 부인(愼夫人)에게도 그와 같은 주의를 주었다. 그러자 또 신 부인(愼夫人)도 그것을 인정하고 그에게 포상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그는 직간(直諫-윗사람에게 서슴없이 諫하는 것)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곧 조정(朝廷)에서 쫓겨나서 농서(隴西)란 곳의 도위(都尉)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또 그곳 사람들을 자애(慈愛)로 대했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은 그에게 모두 충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오래 있지는 못했고, 이어서 제(齊)로 가서 승상이 되었으며, 또 이어서 오(吳)로 가서도 승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러니까 그가 오(吳)에 갔을 때, 그의 조카 원종(袁種)이 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오왕(吳王)은 야심(野心)이 많아서 주변에는 전부 간신들뿐입니다. 그래서 오왕(吳王)은 누가(中央에서 파견되어온 관리) 와서 엄한 통치를 하려들면 금방 자객을 보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술이나 마시고 근무를 태만히 하시면, 오왕(吳王)도 의심을 버릴 것이니, 부디 저의 말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그는 원종(袁種)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그러자 또 오왕(吳王) 유비(劉濞)도 그를 후대(厚待)했다고 한다. 그 후, 원앙(袁盎)은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는데,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승상(丞相)이었던 신도가(申屠嘉)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신도가(申屠嘉)는 차(車)에 앉은 채로 그에게 인사만 하고 가버렸다. 그러자 또 그는 신도가(申屠嘉)의 집을 방문해서 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천하(天下)의 입(口)을 닫게 하는 태도(일종의 ‘할 말 없음’과 같이, 경우 없는 행동을 해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는 결국 자신을 망치게 할 것이오!> 그러자 신도가(申屠嘉)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결례를 사과하고 그를 귀빈(貴賓)으로 대했다. 하지만 그는 조착(晁錯)과는 사이가 너무도 나빠서 서로 동석(同席)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그런데 그 후,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조착(晁錯)은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고, 그러자 또 조착(晁錯)은 원앙(袁盎)이 오왕(吳王)의 재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원앙(袁盎)을 서민으로 내려버렸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오왕(吳王) 등이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을 일으켰을 때, 조착(晁錯)은 원앙(袁盎)이 그것을 미리 알고서도 숨기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원앙(袁盎)을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자 또 원앙(袁盎)은 그것을 미리 알아내고는 야간(夜間)에 두영(竇嬰)의 집을 찾아갔다.

 ☆ 두영(竇嬰) ?-기원전 131년전한(前漢)의 사람으로, 字는 王孫. 漢 文帝의 황후 두 씨(竇氏) 従兄의 子.(상세한 것은 次期 또는 생략함)

 그리고는 오(吳)가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에 대해서 소상히 말을 하고는, 경제(景帝)와의 단독 알현(謁見)을 바랐다. 그러자 두영(竇嬰)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해서 경제(景帝)와의 알현이 실현되었다. 그렇게 해서 원앙(袁盎)은 경제(景帝)와의 알현이 성사되자, 주위를 모두 물리게 하고는 이렇게 말을 했다. <오(吳)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 이유는 조착(晁錯)이 영토삭감 책(策)을 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착만 처형하게 되면 자연 반란군은 명분을 잃게 될 것이므로 그들은 곧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자 경제(景帝)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고, 이어서 원앙(袁盎)을 봉상(奉常=중국 관명의 하나로, 九卿의 하나)에, 그리고 두영(竇嬰)을 대장군에게 임명했는데, 그러자 장안(長安)의 사람들은 모두 그 두 사람을 따랐다고 한다. 그 결과 조착(晁錯)은 원앙(袁盎)의 계책에 넘어가서 처형되었고, 이어서 원앙(袁盎)은 반란군과의 화목을 추진하기 위해서 오왕(吳王)의 조카였던 유통(劉通=德頃侯)과 함께 오(吳)로 가서 교섭했지만, 그러나 당시 우세한 상황에 있었던 오왕(吳王)은 오히려 <지금부터 황제가 될 내가 왜 옛날 왕의 말을 들어주어야
하는가?!>라고 말을 하고는 원앙(袁盎)에게 자신의 장군이 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원앙(袁盎)은 그것을 거절했고, 그러자 오왕(吳王)은 그를 구금(拘禁)하고는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과거 원앙(袁盎)이 오(吳)에 있었을 때 도움을 준 적이 있었던 사람이 은혜를 갚았고, 그리하여 그는 겨우 오(吳)에서 도망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종결된 후, 그는 새로 초왕(楚王)이 되었던 유례(劉禮)에게 가서 승상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는 병을 이유로 사임했으며, 고향 안능(安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후에도 경제(景帝)는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을 시켜서 그의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후, 양왕(梁王)이었던 유무(劉武)가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에서 공적을 올렸던 것을 핑계로 황태자가 되려고 했다. 그러자 또 원앙(袁盎)이 그것을 반대했는데, 그러자 유무(劉武)는 그를 원망해서 자객을 보냈다. 그런데 그 자객(刺客)이 원앙(袁盎)을 죽이러갔다가 먼저 원앙(袁盎)에 대해서 탐문(探聞)을 했는데, 그러자 말하는 사람마다 모두 다 그를 극찬했다. 그러자 또 그 자객은 원앙(袁盎)을 만나서는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양왕(梁王)에게서 돈을 받고 당신을 죽이라는 명을 받아 여기까지 왔지만, 그런데 알고 보니 당신은 아주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마 나로서는 당신을 죽일 수가 없지만, 그러나 내가 가고 나서도 다시 많은 자객들이 또 올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 후, 원앙(袁盎)의 집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많이 생겼고, 그러자 그는 또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점을 치러갔는데,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서 양왕(梁王)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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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54년/ 오초칠국(呉楚七國)의 난(亂) 발발(勃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중국 전한(前漢) 기원전 154년에, 오왕(吳王) 외에, 칠국(七國)의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켰던 반란이었으며, 유 씨(劉氏) 가문의 내란(內亂)이었다.

 <경위(經緯)>

 그 결과,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기원전 154년에 영토삭감 명령을 받았던 것을 계기로 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어서 초(楚)와 조(趙) 등, 6왕(王)이 동조했으며, 그리하여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반란측은 <유 씨(劉氏)의 화목(和睦)을 어지럽히는 간신 조착(晁錯)을 토벌한다!>라는 명목을 내걸었다. 그리고 또 오(吳)는 남쪽의 남월(南越) 군사도 빌려서 총원 70만이란 대군을 가지게 되었고, 그에 또 조(趙)는 북쪽의 흉노(匈奴)와 결탁해서 그 난(亂)을 대규모로 몰아갔다.

 
※ 남월(南越)은, 기원전 203년부터 기원전 111년에 걸쳐서 5代 93年 동안 존재했던 나라였으며, 현재 중국의 남부에서 베트남 북부(嶺南地方)까지에 이르는 곳에서 자립했던 왕국이었다. 南粤로도 표기하기도 한다.

 



 ※조착(晁錯-?부터 기원전 154년)은, 전한(前漢)의 정치가였고, 제후왕(諸侯王)들의 세력을 감(減)하는 정책을 진행시켰지만, 결국 제후왕(諸侯王)들의 반발로 인해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일어났으며, 그 자신은 또 그 반란을 진압한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름의 원래 표기는 조착(鼂錯)이지만, 그러나 약자인 조착(晁錯)으로 표기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서도 이하 조착(晁錯)으로 표기함.

 문제기(文帝期)

 영천군(潁川郡)에서 태어났던 그는, 젊은 시절 장회(張恢)란 사람에게서 형명학(刑名學=法家)을 배웠다. 그리고 또 문제(文帝)의 명을 받아서 진(秦)나라 때,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인해서 쓸모 없게 되어있던 상서(尙書=書經)를 당시, 90여세의 복생(伏生)이란 사람에게 따로 파견되어가서 배웠다. 그 후, 그는 문제(文帝)의 신임을 얻어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흉노(匈奴)의 대책 등 많은 입안(立案)을 했다. 그리고 또 그와 동시에 태자 유계(劉啓)의 교육도 맡았다. 그 시기, 그의 정책으로서 유명했던 것이 바로 <납속수작제도(納粟受爵制度)>였다. 그것은 또 당시, 상업이 활발해져서 빈부의 차이가 격렬해지자 농민들의 몰락이 현저(顯著)하게 되었는데, 그리고 또 그 원인의 하나가 바로 전납(錢納)이었으므로, 그래서 농민들은 세금을 낼 때가 되면 자신들이 길렀던 곡물들을 모두 시장에 내다 팔아서 전(錢=)으로 바꿔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상인들의 횡포로 인해서 그들은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그가 제안했던 것이 바로 그 <납속수작제도(納粟受爵制度)>란 것이었으며, 그것은 또 곡물을 일정(一定) 이상(以上) 납입한 사람에게는 작위(爵位)를 내린다는 제도였다. 그러자 또 그 작위(爵位)를 얻고 싶어 하던 상인들은 이번에는 그 곡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농민들에게 고가(高價)로 구매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농민들은 전(前)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득을 보게 되어서 날로 형편이 나아져갔던 것이다.

 경제기(景帝期)

 그 후,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그는 더욱 깊은 신임을 받아서 내사(內史=首都長官)가 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에 대한 경제(景帝)의 신뢰가 너무도 두꺼워서, 경제(景帝)는 당시 최고 직(最高職)이었던 승상(丞相) 신도가(申屠嘉)와는 별 의논도 없었고, 오히려 조착(晁錯)의 이야기라면 무조건
받아들였을 정도였다. 그러자 그에 화가 났던 신도가(申屠嘉)는 어떻게든 그를 제거하려고 마음을 먹고는 그 구실(口實)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신도가(申屠嘉)가 찾아냈던 것은, 그리고 당시 조착(晁錯)은 관공서(官公署)의 남쪽 벽을 뚫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유방(劉邦)의 아버지 유태공(劉太公) 묘(廟)의 담(垣)이었다. 그래서 신도가(申屠嘉)는 그것이 불경죄(不敬罪)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서 경제(景帝)에게 그것을 상주(上奏)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조착(晁錯)이 이미 그 정보를 사전에 알아내고는 자신이 먼저 경제(景帝)에게로 달려가서 그 사정을 이야기하고는 <그것이 불경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보증문서를 경제(景帝)로부터 받아두었다. 그러자 조착(晁錯)을 제거하는데 실패했던 신도가(申屠嘉)는 <먼저 저 어린놈을 죽인 다음에 주상(奏上)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하고 한탄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가장 큰 정적을 제거했던 조착(晁錯)은 그 이후에도 경제(景帝)에게 더욱 신뢰를 받아서 마침내 어사대부(御史大夫=副丞相=어사의 장관 또는 副丞相의 지위)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더욱 오만해져서 많은 적들을 만들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 정적들 중에는 제(齊)와 오(吳)의 승상(丞相)을 지내고 있었던 <원앙(袁盎)>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조착(晁錯)을 너무도 싫어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두 사람은 같이 앉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자 조착(晁錯)은 자신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자 그를 탄핵해서 평민으로 만들어버렸다.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

 전한(前漢)은 당시, 군국제(郡國制-앞에서 소개되었음)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문제(文帝)가 정치를 아주 잘해서 국력이 증대되었고, 그리하여 제후국들도 많은 혜택을 입게 되어 그때부터는 점차로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제(文帝) 때, 이미 그것은 문제시 되었고, 그래서 또 <가의(賈誼)>가 그것을 지적하면서 <미리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상주까지 올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文帝)는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그것을 그냥 덮어두어버렸다.

 ☆ 가의(賈誼-기원전 200년부터 기원전 168년)는, 중국 전한(前漢) 文帝 때의 학자였으며, 정치가였다. 그리고 문제(文帝)를 섬기면서 유학과 오행설에 기초했던 새로운 제도의 시행을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저서에 <좌씨전훈고(左氏傳訓詁)>와 <신서> 그리고 <복조부(鵩鳥賦)> 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 경제(景帝)는 이제 그때가 왔다고 생각해서 그 대책에 나섰다. 그리고 당시, 제후왕(諸侯王)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졌던 자는 오왕(吳王)이었는데, 그러나 그 오왕(吳王)과는 일종의 악연(惡緣)으로, 경제(景帝)는 이미 그의 아들을 죽였던 것으로 해서도 서로 사이가 그리 좋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런 배경 등으로 해서 조착(晁錯)도 단번에 손을 쓰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는 우선적으로 초(楚)와 조(趙) 등의 영지들부터 차례로 손을 썼고, 이어서 오(吳)를 점차 죄어갔
다. 그러자 또 다른 제후왕(諸侯王)들의 반감도 늘어갔는데, 그런데 그런 와중에 오(吳)에도 영지를 삭감하겠다는 통보가 도달하자 오왕(吳王)은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불명예(不名譽)스런 죽음

 그러자 반란군은 그 즉시 <간신 조착(晁錯)을 제거해서 조정(朝廷)을 바로 세우겠다!>라는 기치를 걸고 거병했다. 그리고 또 그때, 원앙(袁盎)은 직접 경제(景帝)와 단 둘이 만나서는 <반란군을 억제할 방책(方策)이 자신에게 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경제(景帝)가 그 방법에 대해서 묻자 원앙(袁盎)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 <그 방법은 조착(晁錯)을 죽이는 것뿐입니다. 조착(晁錯)만 죽으면 반란군은 명분이 없어지게 되니 자연적으로 물러날 것입니다> 그러자 잠시 망설였던 경제(景帝)는 별 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또 당시, 중국에서는 <형불상대부(刑不上大夫)>란 말이 통용되고 있었는데(禮記), 그래서 당시에는 사대부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형벌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또 물론, 그것이 무제한적으로 인정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어쨌든 그 누군가가 어떤 형(刑)에 상당(相當)하는 죄를 범했을 경우, 그러면 일단 <관공서로 출두하시오!>라는 연락이 먼저 그 사람에게로 가게 되고, 그러면 또 그 명령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 알아서 자진(自盡=自殺)한다고 하는 것이 그 시대의 통례였던 것이다. 그래서 또 사대부들은 형장에서 살해당하는 불명예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지만, 그러나 그때 조착(晁錯)에게는 그것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장안(長安)의 중위(中尉)였던 <진가(陣嘉)>란 자에게 속아서 시장(市場)에 나갔다가 그 자리에서 요참(腰斬-허리를 잘라서 죽이는 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일족들도 모두 몰살되었지만, 아무튼 또 덧붙여서, 그는 그 처형이 있기 수개월 전에. 자신의 부친에게서 많은 충고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그때, 그는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不如此,天子不尊,宗廟不安> 그래서 또 풀이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가 만약에 그 일(諸侯王들의 세력을 줄이는 일=減領)을 하지 않으면, 황제(皇帝)는 존경을 받지 못하며, 더불어서 종묘(宗廟) 또한 보장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자 또 그의 부친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劉氏安矣,而晁氏危矣、吾去公归矣> 그리고 그 해석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유 씨(劉氏)는 안전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조 씨(晁氏)는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먼저 가려 하니, 너는 뒤에 남아서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라!>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둔 독(毒)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한다.(遂飮藥死)

 



 아무튼, 그러자 또 제(齊)에서는 교서(膠西), 교동(膠東), 치천(菑川), 제남(濟南) 등, 당시 분할되어 있었던 대부분의 나라들이 참가했지만, 그러나 제북왕(濟北王) 유지(劉志)는 성벽을 복구한다는 핑계로 참가하지 않았고, 거기다 또 옛날의 제도림(임)치(齊都臨淄=山東省 淄博市)에 있었던 제효왕(齊孝王) 유장려(劉將閭)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교서왕(膠西王) 등은 그들을 공격했지만, 하지만 그 임치(臨淄)를 제압하지 못해서 그곳에서 발이 묶여버렸다. 그러자 또 하는 수 없이 오(吳)와 초(楚) 군만이 장안(長安)으로 진군해서 들어갔는데, 하지만 또 그때, 앞에서 설명한대로 오군(吳軍)은 14세부터 62세까지의 남자들을 전부 징병한 때문으로, 그 수에서는 정부군에 비해서 월등히 많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오합지졸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군사의 질은 상당히 낮았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는 했어도 오(吳) 본국에서부터 지원해 왔던 막대한 부(富)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때, 경제(景帝)로서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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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54년/ 오초칠국(呉楚七國)의 난(亂) 발발(勃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중국 전한(前漢) 기원전 154년에, 오왕(吳王) 외에, 칠국(七國)의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켰던 반란이었으며, 유 씨(劉氏) 가문의 내란(內亂)이었다.

 <배경(背景)>

 한(漢)의 전대(前代)였던 <진(秦)>은 지방 전부를 군(郡)과 현(縣)으로 나누고 직할지배하는 체제인 군현제(郡縣制)를 채용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한(漢)은 진(秦)의 가혹한 법치주의의 반성과 함께, 긴 시간동안 전란으로 인해서 국토가 피폐해졌던 점을 고려해서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는 지방과 제후왕(諸侯王)을 봉하는 반독립국을 만들어서 수습하게 하는 제도를 병립했다.(郡國制) 하지만 당시 진(秦) 이외의 <구(舊) 6국(國)> 지역의 사민(士民)들 중에서는 한(漢)의 황제를 진왕(秦王)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소속 제후왕(諸侯王)을 왕(王)으로 해서 과거 6국(國=戰國七雄=앞에서 소개되었음)의 부활을 꿈꾸는 경향이 남아있었다. 그러자 그 후, 한(漢)은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시대의 선정(善政)으로 점차 국력을 회복했고, 그에 자신을 얻었던 한(漢) 조정(朝廷)은 각지의 제후왕(諸侯王)들의 권력을 견제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당시, 각지의 제후왕(諸侯王)들은 스스로 그 영지 내에서 완전한 독립을 추구해서, 중앙(中央)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는 일이 많아져갔던 때문이었는데, 그런데다 또 그 중에서도 특히 오(吳)는 제염(製鹽-소금을 만드는 것)과 동화(銅貨=銅錢) 주조로 벌어들였던 막대한 재력(財力)의 배경과 그리고 또 과거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적자(嫡子)였던 유현(劉賢)이 황태자 시절의 경제(景帝)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살해당했던 것에 대한 원한 등으로 해서 당시, 제후왕(諸侯王)의 의무였던 장안(長安)에의 참근(參勤=出仕하여 왕을 뵙는 일)도 취소하는 등, 독립 색을 아주 강하게 띄고 있었다. 그러자 그러했던 제후왕(諸侯王)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서 경제(景帝)는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조착(晁錯)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차례로 제후들의 영지를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 인물소개

 <경제(景帝)>

 전한(前漢)의 제6대 황제로, 5代 文帝의 子. 부제(父帝)와 같이 한(漢)의 기반을 공고히 했고, 선정(善政)을 베풀어서 그 치대(治世)는 <문경(文景)의 치(治)>라고 상찬(賞賛)되었다. 사기(史記)와 외척세가(外戚世家-不明)에 의하면, 경제(景帝)는 문제(文帝)의 제5자로 태어났고, 위로 4명의 형이 요절했으며, 이어서 생모 두씨(竇氏)가 정실로 승격됨에 따라서 문제(文帝)의 적자(嫡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황태자 시대에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태자 유현(劉賢)과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다 죽인 일이 있었는데, 그러자 오왕(吳王)과의 사이가 나빠졌다. 하지만 그 일은 문제(文帝)의 정치적인 배려로 수습이 되었는데, 그러나 그 일은 또 나중의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기원전 157년에 황제에 즉위했고, 정치는 기본적으로 문제(文帝)의 정책을 계승했는데, 그것은 또 소극적인 외교정책과 검약(儉約)의 노력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중농정책(重農政策)을 내새웠고, 감세(減稅)를 실시해서 사회의 안정을 실현했다.(당시의 기록에는 인구 9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세에 그 시대를 문제(文帝)의 시대와 합쳐서 <文景의 治>라고 칭해졌다.


 ☆ 문경의 치(기원전 180년부터 기원전 141년)

 한초(漢初)에는 진말(秦末) 이래 전란(戰亂)으로 사회경제가 쇠퇴했고, 그래서 조정은 국력의 충실을 도모하기 위해서 황로치술(黃老治術-黃老思想)을 채용했다. 그리고는 국민 경제력의 휴양(休養=조세를 가볍게 하며 民力을 기르는 일)과 부역(賦役)의 경감(輕減)을 그 목적으로 한 정책을 실행했다. 그리고 문제(文帝)는 농업을 중시해서 몇 차례에 걸쳐서 농상(農桑)진흥을 명했다. 그리고 또 일정한 호수(戶數)에 삼로(三老), 효제(孝悌), 역전(力田)을 선발해서 그들에게 상(賞)을 내리는 것으로 보람을 갖게 하여 농업생산의 향상을 도모했다.

 ○ 漢文帝詔曰: 孝悌, 天下之大順也. 力田, 爲生之本也. 三老, 衆民之師也 라고 하였으니, 차례로 해석하면, 한(漢)의 문제(文帝)가 이르기를, 효제(孝悌)는 천하의 이치에 아주 크게 순응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해석은 효우(孝友) 즉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했던 자를 의미했으며, 역전(力田)은 만물을 살리는 것(生育)이 인간의 근본이란 의미로, 역시 힘써서 농사를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당시 그 해 농사를 특별히 잘 지었던 사람이나, 평소 그렇게 이름이 났던 사람을 의미 했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삼로(三老)는 민중의 스승이 되는 사람을 말했던 것으로, 옛날 한(漢)나라 때, 한 고을의 교화(敎化)를 맡아보았던 쉰 살 이상의 노인을 의미했다는 해석과, 또는 노인(老人)을 나이에 따라서 나눈 세 등급으로, 상수(上壽:100살), 중수(中壽:80살), 하수(下壽:60살)로 나눈 것의 총칭(總稱)이 그것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문제(文帝)의 말을 쫓아서, 앞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생각됨.

 아무튼, 다음에 또 문제 2년(기원전 179년)과 12년(기원전 169년)에는 전조(田租-논밭에 부과했던 조세)의 반감(半減)을 실시했고, 그 다음 또 문제 13년(기원전 168년)에는 전조(田租)의 전면(全免-전부 면제)을 실시했다. 그리고 또 그와 아울러서 주변의 소수민족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억제하기 위한 평화정책도 실시했다. 그리고 문제(文帝) 역시도, 그 자신 스스로 상당히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그래서 궁실 내의 차기의복(車騎衣服-차량과 기마, 의복 등 궁정 내의 경비나 운영에 들어가는 일반적인 물품들) 또한 최저한의 것으로 했고, 그 중에 의복도 과도하게 긴 것은 금지했으며, 유장(帷帳-휘장과 장막)도 자수(刺繡)를 넣지 않는 등, 철저한 검약을 실시했다. 그리고 또한 제국(諸國)에 대한 헌상(獻上)품도 억제를 명했다. 그러자 그 결과, 귀족관료들의 사치는 행해지지 않았으며, 그 말년에는 민중들의 생활은 날로 향상되었고, 그것으로 전한(前漢) 최성기의 기초를 쌓아올렸음과 동시에 또, 그 다음 시대가 되는 무제(武帝)의 흉노원정 때를 위한 물질적인 기초까지 쌓아올리게 되었다.




 <
유비(劉濞) 기원전 215년부터 기원전 154년>

 그는 전한(前漢) 전기의 황족으로, 패현(沛縣) 출신이었고, 오초칠국의 난 수모자(首謀者)였다. 그리고 그는 유희(劉喜=劉邦의 兄)의 장자(長子)로 태어났으며, 아우에 유광(劉廣=德哀侯)이 있었다. 그는 대왕(代王)에 봉건 되었던 부(父)가 대(代)를 공격했던 흉노(匈奴)로부터 도망을 가서 합양후(郃陽侯)로 격하된 후, 패후(沛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기원전 196년에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유방(劉邦)의 친정(親征) 군에 참가해서 장군으로 종군했다. 그리고는 기병(騎兵)을 인솔하면서 활약했다. 그러자 그 공적으로 그는 당시 전사했던 형왕(荊王) 유가(劉賈)의 후임으로서 오왕(吳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직후, 그가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서 유방(劉邦)에게 갔을 때의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유방(劉邦)은 이미 그를 왕으로 봉했지만, 그러나 그의 인상에서 모반(謀反)의 느낌을 받고는 그에 불안을 느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예언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50년 후에 東南(帝都 長安에서 봤을 때)의 땅(吳의 영역)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너나 나나 다 같은 혈통인데, 그러므로 무슨 잘못이 있더라도 반란 같은 것을 일으킨다든지 하는 바보 같은 행동은 하지 말라!>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네,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방(劉邦)도 그의 말을 인정했고, 그 역시 다시 오(吳)로 돌아갔지만, 하지만 그 후에 여치(呂雉)와 여 씨(呂氏)의 전횡(專橫)으로 장안(長安)은 피로 얼룩졌다. 그러나 당시, 그는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에 휘말리는 일 없이 나라 일에만 신경을 썼고, 더불어서 날이 갈수록 나라는 살찌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오(吳)에서는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동(銅)과 소금으로 인해서 엄청난 부를 쌓게 되었고, 그리하여 국민들에게 내리던 조세까지도 모두 면제했으며, 오히려 나라 일에 동원되었던 국민들에게는 품삯까지 지불했다는, 당시의 시대상황으로서는 가히 별천지 같은 일이 그곳에서는 벌어졌다. 그러자 그 소문을 듣고 몰려왔던 타국(他國)의 사람들까지 받아들여서 전(錢)을 주조시키는 등, 나라는 점점 더 부강하게 되었고, 이윽고는 중앙(中央)에서조차도 손을 쓰지 못할 만큼 되어갔다. 하지만 그 후, 여 씨(呂氏) 일족이 멸해지고, 문제(文帝)가 즉위했다. 그러자 양상은 점점 바뀌어가서 문제(文帝)는 측근들이 진언했던 제후왕(諸侯王)들의 약체화(弱體化)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주로 문제(文帝)와 제위를 다투었던 제(齊) 왕가(王家)를 대상으로 그 정책은 실행되어갔다. 그런데 또 그러던 중, 장안(長安)으로 부(父) 유비(劉濞) 대신(代理人)으로 왕세자 유현(劉賢)이 참내(參內)를 갔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유현(劉賢)을 위한 연회가 벌어졌는데, 그런데 그 연회의 여흥(餘興-博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일종의 보드게임) 중에 유현(劉賢)과 유계(劉啓-後의 景帝)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났다. 그러자 유계(劉啓)가 그 박판(博板)에서 유현(劉賢)을 박살(撲殺-때려죽임)했던 일이 발생했다. 그 후, 자식의 억울한 죽음과 그 이후에 행해졌던 한(漢) 왕조 측의 부족한 대응에 불만을 품었던 유비(劉濞)는, 당시 제후들의 의무였던 장안(長安) 입조(入朝)를 취소했다. 그러자 또 그 일은 조정(朝廷) 내에서 문제가 되었는데, 그러나 그 일은 문제(文帝)의 중재(仲裁)로 불문(不問)에 붙여졌다. 그리고 그때, 문제(文帝)는 오히려 유비(劉濞)가 고령이었던 점을 참작해서 참근(參勤)을 면제해 주었고, 지팡이와 사방침(四方枕-팔꿈치를 괴고 비스듬히 기대서 앉을 수 있게 만든 네모난 베개)까지 내리면서 불문(不問)에 붙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해서 안정을 확보했던 오(吳)와 한(漢) 왕조였지만, 그러나 기원전 157년에 문제(文帝)가 죽자 사태는 급변했다. 그것은 또 문제(文帝)의 뒤를 이었던 그 경제(景帝)는 유현(劉賢)을 죽였던 바로 그 장본인이었으며, 그에 더해서 경제(景帝)는 측근이었던 조착(晁錯)의 적극적인 진언을 받아들여서 제후들의 삭감(削減) 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에 위기감을 느꼈던 유비(劉濞)는 초(楚)와 제(齊)를 끌여 들였고, 그리고는 이윽고 기원전 154년에 <나는 62세에 군사를 일으켰고, 나의 막내는 불과 14세이지만 종군에 동참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62세 이하 14세 이상의 남자들에게는 모두 병역의 의무를 부과한다!>라고 외치고는 20만의 병사들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바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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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54년/ 오초칠국(呉楚七國)의 난(亂) 발발(勃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중국 전한(前漢) 기원전 154년에, 오왕(吳王) 외에, 칠국(七國)의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켰던 반란이었으며, 유 씨(劉氏) 가문의 내란(內亂)이었다.

 <배경(背景)>

 한(漢)의 전대(前代)였던 진(秦)은 지방 전부를 군(郡)과 현(縣)으로 나누고 <직할지배>하는 체제인 <군현제(郡縣制)>를 채용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한(漢)은 진(秦)의 가혹한 법치주의의 반성과 함께, 긴 시간동안 전란으로 인해서 국토가 피폐해졌던 점을 고려해서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는 지방과, 제후왕(諸侯王)을 봉하는 반독립국을 만들어서 수습하게 하는 제도를 병립했다.(郡國制) 하지만 당시 진(秦) 이외의 <구(舊) 6국(國)> 지역의 사민(士民)들 중에서는 한(漢)의 황제를 진왕(秦王)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소속 제후왕(諸侯王)을 왕(王)으로 해서 과거 6국(國=戰國七雄=앞에서 소개되었음)의 부활을 꿈꾸는 경향이 남아있었다. 그러자 그 후, 한(漢)은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시대의 선정(善政)으로 점차 국력을 회복했고, 그에 자신을 얻었던 한(漢) 조정(朝廷)은 각지의 제후왕(諸侯王)들의 권력을 견제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당시, 각지의 제후왕(諸侯王)들은 스스로 그 영지 내에서 완전한 독립을 추구해서, 중앙(中央)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는 일이 많아져갔던 때문이었는데, 그런데다 또 그 중에서도 특히 오(吳)는 제염(製鹽-소금을 만드는 것)과 동화(銅貨=銅錢) 주조로 벌어들였던 막대한 재력(財力)의 배경과 그리고 또 과거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적자(嫡子)였던 유현(劉賢)이 황태자 시절의 경제(景帝)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살해당했던 것에 대한 원한 등으로 해서 당시, 제후왕(諸侯王)의 의무였던 장안(長安)에의 참근(參勤=出仕하여 왕을 뵙는 일)도 취소하는 등, 독립 색을 아주 강하게 띄고 있었다. 그러자 그러했던 제후왕(諸侯王)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서 경제(景帝)는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조착(晁錯)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차례로 제후들의 영지를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 인물소개

 
문제(文帝-기원전 202년부터 기원전 157년)는, 중국 전한의 제5대 황제로, 성은 유(劉). 이름은 항(恒).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효문 황제(孝文皇帝)였다. 그리고 여씨의 난이 평정된 후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뒷날, 무제(武帝) 때의 전성기를 구축하는 기반을 닦았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180~기원전 157년이다. 그리고 그는 혜제(惠帝)의 자식으로 여겨졌던 2명의 소제(少帝)를 제외하고, 제3대 황제로 칭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또, 그는 유방(劉邦)의 서자(庶子)였으며, 생모는 박 씨(薄氏). 아내는 두 씨(竇氏)였다.

 출생(出
生)

 문제(文帝)의 어머니 박 씨(薄氏)는 원래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왕실 출신으로, 진말(秦末)의 동란기 때부터 초한전쟁 초기 무렵에 위왕(魏王)표(魏豹)의 후궁으로 입궁했던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때, 허부(許負)라는 관상쟁이가 그녀의 관상을 보고는 <머지않아 황제를 낳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사서(史書)에서는 전하고 있다. 아무튼, 그 박 씨(薄氏)와 유방(劉邦)과의 관계는 위표(魏豹)가 유방(劉邦)에게 붙어서 항우(項羽)와 대적했지만, 그러나 팽성(彭城)의 대패(大敗)를 계기로 반(反)유방(劉邦)의 반란을 일으켰던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후, 한(漢)의 대장군이었던 한신(韓信)에게 다시 패했던 위표(魏豹)는 신분이 서민으로 강등되었고, 이어서 유방(劉邦)에게로 끌려갔는데, 그런데 그때 그 박 씨(薄氏)도 자신의 일족들과 함께 끌려갔다. 그 후, 박 씨(薄氏)는 유방(劉邦)의 후궁이 되어서 잡무(雜務)를 담당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유방(劉邦)의 눈에 띄어서 침실에까지 들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 유방(劉邦)은 그녀를 멀리했는데, 하지만 그때 이미 그녀는 유항(劉恒)을 가졌던 상태였다.

 대왕(代王)시대

 그 후, 초한전쟁이 종결되고 유방(劉邦)이 황제에 즉위하자 이성(異姓) 제후왕(諸侯王)들의 처형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그때 유항(劉恒)은 조(趙)에 봉해졌던 이모형(異母兄) 유여의(劉如意)의 후임으로 대왕(代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당시, 유항(劉恒)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유방(劉邦)의 신임을 받았던 부관(傅寬)이 재상(宰相)으로 가서 그를 후견했다.
그 후, 유항(劉恒)은 대왕(代王)태후(代王國의 태후)가 되었던 박 씨(薄氏)와 그녀의 남동생이었던 박소(薄昭)와 함께 부임지로 향해서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또 그 후, 유방(劉邦)이 죽자 여치(呂雉)가 실권을 장악했고, 그리하여 유여의(劉如意) 등 유방(劉邦)의 서자들은 차례로 살해당했지만,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유항(劉恒)만은 난을 피했다. 그리고 또 그 배경에는, 유항(劉恒)의 생모였던 박 씨(薄氏)가 유여의(劉如意)의 생모였던 척 씨(戚氏) 등과는 달리, 유방(劉邦)으로부터 총애를 적게 받았던 것이 그 한 원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그 후, 이모제(異母弟)였던 조공왕(趙共王) 유회(劉恢)의 측실이 정실이었던 여 씨(呂氏=呂后의 조카로, 呂産의 딸)에게 독살 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유회(劉恢)는 곧 그녀의 뒤를 따랐는데, 그러자 여후(呂后)는 그 후임으로 유항(劉恒)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유항(劉恒)은 여러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고는 <자신이 현재 흉노와 가까운 지역에 있으므로, 그래서 그 방위에만 전념하고 싶다>라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으로 그것을 고사(固辭)했다. 그러자 그 후임은 여치(呂雉)의 조카였던 여녹(呂祿 또는 여록)에게 주어졌다.

 황제 즉위 전후

 기원전 180년 여치(呂雉)가 죽자 여 씨(呂氏) 일족은 모두 숙청되었고, 그 후, 유항(劉恒)이 황위에 추대되었다. 그런데 그에는 또, 당시 정변(政變)에 참가했던 유양(劉襄)과 유장(劉章) 형제는 유방(劉邦)의 서장자(庶長子)라고 생각되었던 유비(劉肥)의 유아(遺兒)로, 여 씨(呂氏) 일족 주멸(誅滅)의 공적으로부터 유양(劉襄)이 황제에 즉위하고, 또 유장(劉章)은 제왕(齊王)에 봉해질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여 씨(呂氏) 일족이라는 강대한 외척에 의한 전횡(專橫)의 기억이 남아 있었던 당시의 시대상황과 또 일부 황족들이 강한 권력욕을 가진 외척이 있던 제왕(齊王)을 황제로 세우게 되면 또 다시 외척의 전횡이 발생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그래서 당시 생모가 몰락한 귀족의 말예(末裔)였으며, 또한 권력욕도 적은 인격자(人格者)라는 평판이 높았던 유항(劉恒)이 옹립되게 되었던 것이었다.(하지만 그에는 또 그가 당시 생존하던 劉邦의 遺兒 중 최 연장자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연령순에 의해서 즉위했을 것이란 설득력있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그러자 대국(代國)으로부터 반대의 소리가 높아졌는데,
그 이유는 또, 당시 유방(劉邦)과 함께 전란의 세월을 견뎌냈고, 이어서 여치(呂雉) 사후 정변을 일으켜서 여 씨(呂氏) 일족들뿐만이 아니라 황제까지도 폐립시키고 살해했던 그 원훈(元勳)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 후, 황제 즉위의 승낙을 받아내기 위해서 사자(使者)들이 장안(長安)과 대국(代國) 사이를 다섯 번이나 왕복하고서야 간신히 그것은 실현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래서 또 유항(劉恒)이 황제에 즉위했을 때, 그곳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황제 즉위 반대파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러자 또 그들에게는 장안으로 들어올 때, 단 몇 명의 부하들과 6기(騎)의 마차만 통과를 허락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문제(問題)는 끊임없이 일어났고, 또 어떤 때, 문제(文帝)가 법제도개혁에 대해서 중신들에게 하문했는데, 그러자 염미(厭味-아주 불쾌감을 주는 언동 또는 그로 인해 받는 혐오감과 불쾌감)한 내용의 상서(上書)가 올라왔던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또 세월은 흘러서 유방(劉邦)의 원훈(元勳)들도 하나둘씩 정치무대에서 사라져갔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때부터 서서히 정권의 주도권을 잡아갔으며, 이어서 착실하게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시정(施政)

 그때, 문제(文帝)의 기본적인 정치태도는 유방(劉邦)의 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유방(劉邦)의 정책을 계승해서 국민 경제력의 휴양(休養)과 농촌의 활성화에
힘썼고, 또 그런 이유로 해서 대규모의 공사는 가급적 자제(自制)하게 했다. 그리고 또, 그는 궁중에서 누각(樓閣)을 마련하려는 계획이 나왔을 때도 그 경비가 중류(中流) 가정(家庭) 10호(戶)의 자산에 상당하게 되면 알아서 중지할 것을 명했다든지, 그리고 또 자신의 능묘(陵墓) 또한 다른 사람들(父, 兄)의 것에 비해서 소규모로 할 것도 지시했다. 그리고 또한 그 시기에 몇 차례나 감세가 실시되었고, 그리고 또 어떤 해(年)에는 아예 면제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른 稅와 勞役은 제외) 그리고 법제도의 개혁에서는 참수(斬首)와 거세(去勢)를 제외한 육형(肉刑)의 폐지를 실시했다. 그는 또 생모 박 씨(薄氏)에게 효행을 다했으며, 어떤 때는 스스로 음식의 맛보기(毒味=毒見 또는 始味=궁중 등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독이 들었는지를 먼저 확인 하는 일) 역(役)을 맡는다거나 해서 <효행의 황제>라고 칭해졌고, 그것은 또 나중에 <24효(二十四孝)>에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
24효(二十四孝)란 중국 원나라 곽거경(郭居敬)이 선정했던 스물네 명의 효행자(孝行者)를 말함.(상세한 것은 차후에 소개하거나 생략함) 우순(虞舜), 전한(前漢)의 문제(文帝), 증참(曾參), 민손(閔損), 중유(仲由), 동영(董永), 염자(剡子), 강혁(江革), 육적(陸績), 당부인(唐夫人), 오맹(吳猛), 왕상(王祥), 곽거(郭巨), 양향(楊香), 주수창(朱壽昌), 유검루(庾黔婁), 노래자(老萊子), 채순(蔡順), 황향(黃香), 강시(姜詩), 왕포(王褒), 정란(丁蘭), 맹종(孟宗), 황정견(黃庭堅)

 아무튼, 문제(文帝)는 박 씨(薄氏)를 존중해서 무고죄로 주발(周勃)이 체포되었을 때도 박 씨(薄氏)에게 질책을 받고 주발(周勃)을 석방해 주었으며, 흉노 친정에 대해서도 신하의 간언을 수용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박 씨(薄氏)의 설득으로 원정을 중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이후, 그는 정적(政敵)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제후왕(諸侯王)들과도 원만하게 지냈으며, 그 예로는 또, 원래대로라면 무사(無嗣-후사가 없음) 단절되는 경우나, 모반을 일으키면 폐립(廢立)시키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오히려 <황제의 혜택>이란 명목으로, 굳이 그 혈연 자(血緣者)들까지 구해 와서 그 영지를 분할시켜서는 그 제후의 지위를 보전시키는 노력까지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나중에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의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하지만 또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때 반란을 일으켰던 제후왕가들이 의사통일에 곤란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또 조기진압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그러했던 문제(文帝)의 정책은 유방(劉邦)이나 여치(呂雉)에 비해서는 다소 뒤떨어졌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만 또 그 시대에는 민중과 사회가 모두 안정되었으며, 그래서 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창고에는 다 먹지 못해서 부패한 식료품들이 넘쳐났다>거나 <엽전(葉錢)을 묶는 끈이 다 썩어서 계산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는 등의 일화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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