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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중국 전한(前漢) 기원전 154년에, 오왕(吳王) 외에, 칠국(七國)의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켰던 반란이었으며, 유 씨(劉氏) 가문의 내란(內亂)이었다.
<배경(背景)>
한(漢)의 전대(前代)였던 진(秦)은 지방 전부를 군(郡)과 현(縣)으로 나누고 <직할지배>하는 체제인 <군현제(郡縣制)>를 채용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한(漢)은 진(秦)의 가혹한 법치주의의 반성과 함께, 긴 시간동안 전란으로 인해서 국토가 피폐해졌던 점을 고려해서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는 지방과, 제후왕(諸侯王)을 봉하는 반독립국을 만들어서 수습하게 하는 제도를 병립했다.(郡國制) 하지만 당시 진(秦) 이외의 <구(舊) 6국(國)> 지역의 사민(士民)들 중에서는 한(漢)의 황제를 진왕(秦王)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소속 제후왕(諸侯王)을 왕(王)으로 해서 과거 6국(國=戰國七雄=앞에서 소개되었음)의 부활을 꿈꾸는 경향이 남아있었다. 그러자 그 후, 한(漢)은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시대의 선정(善政)으로 점차 국력을 회복했고, 그에 자신을 얻었던 한(漢) 조정(朝廷)은 각지의 제후왕(諸侯王)들의 권력을 견제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당시, 각지의 제후왕(諸侯王)들은 스스로 그 영지 내에서 완전한 독립을 추구해서, 중앙(中央)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는 일이 많아져갔던 때문이었는데, 그런데다 또 그 중에서도 특히 오(吳)는 제염(製鹽-소금을 만드는 것)과 동화(銅貨=銅錢) 주조로 벌어들였던 막대한 재력(財力)의 배경과 그리고 또 과거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적자(嫡子)였던 유현(劉賢)이 황태자 시절의 경제(景帝)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살해당했던 것에 대한 원한 등으로 해서 당시, 제후왕(諸侯王)의 의무였던 장안(長安)에의 참근(參勤=出仕하여 왕을 뵙는 일)도 취소하는 등, 독립 색을 아주 강하게 띄고 있었다. 그러자 그러했던 제후왕(諸侯王)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서 경제(景帝)는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조착(晁錯)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차례로 제후들의 영지를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 인물소개
문제(文帝-기원전 202년부터 기원전 157년)는, 중국 전한의 제5대 황제로, 성은 유(劉). 이름은 항(恒).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효문 황제(孝文皇帝)였다. 그리고 여씨의 난이 평정된 후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뒷날, 무제(武帝) 때의 전성기를 구축하는 기반을 닦았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180~기원전 157년이다. 그리고 그는 혜제(惠帝)의 자식으로 여겨졌던 2명의 소제(少帝)를 제외하고, 제3대 황제로 칭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또, 그는 유방(劉邦)의 서자(庶子)였으며, 생모는 박 씨(薄氏). 아내는 두 씨(竇氏)였다.
출생(出生)
문제(文帝)의 어머니 박 씨(薄氏)는 원래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왕실 출신으로, 진말(秦末)의 동란기 때부터 초한전쟁 초기 무렵에 위왕(魏王)표(魏豹)의 후궁으로 입궁했던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때, 허부(許負)라는 관상쟁이가 그녀의 관상을 보고는 <머지않아 황제를 낳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사서(史書)에서는 전하고 있다. 아무튼, 그 박 씨(薄氏)와 유방(劉邦)과의 관계는 위표(魏豹)가 유방(劉邦)에게 붙어서 항우(項羽)와 대적했지만, 그러나 팽성(彭城)의 대패(大敗)를 계기로 반(反)유방(劉邦)의 반란을 일으켰던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후, 한(漢)의 대장군이었던 한신(韓信)에게 다시 패했던 위표(魏豹)는 신분이 서민으로 강등되었고, 이어서 유방(劉邦)에게로 끌려갔는데, 그런데 그때 그 박 씨(薄氏)도 자신의 일족들과 함께 끌려갔다. 그 후, 박 씨(薄氏)는 유방(劉邦)의 후궁이 되어서 잡무(雜務)를 담당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유방(劉邦)의 눈에 띄어서 침실에까지 들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 유방(劉邦)은 그녀를 멀리했는데, 하지만 그때 이미 그녀는 유항(劉恒)을 가졌던 상태였다.
대왕(代王)시대
그 후, 초한전쟁이 종결되고 유방(劉邦)이 황제에 즉위하자 이성(異姓) 제후왕(諸侯王)들의 처형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그때 유항(劉恒)은 조(趙)에 봉해졌던 이모형(異母兄) 유여의(劉如意)의 후임으로 대왕(代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당시, 유항(劉恒)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유방(劉邦)의 신임을 받았던 부관(傅寬)이 재상(宰相)으로 가서 그를 후견했다. 그 후, 유항(劉恒)은 대왕(代王)태후(代王國의 태후)가 되었던 박 씨(薄氏)와 그녀의 남동생이었던 박소(薄昭)와 함께 부임지로 향해서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또 그 후, 유방(劉邦)이 죽자 여치(呂雉)가 실권을 장악했고, 그리하여 유여의(劉如意) 등 유방(劉邦)의 서자들은 차례로 살해당했지만,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유항(劉恒)만은 난을 피했다. 그리고 또 그 배경에는, 유항(劉恒)의 생모였던 박 씨(薄氏)가 유여의(劉如意)의 생모였던 척 씨(戚氏) 등과는 달리, 유방(劉邦)으로부터 총애를 적게 받았던 것이 그 한 원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그 후, 이모제(異母弟)였던 조공왕(趙共王) 유회(劉恢)의 측실이 정실이었던 여 씨(呂氏=呂后의 조카로, 呂産의 딸)에게 독살 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유회(劉恢)는 곧 그녀의 뒤를 따랐는데, 그러자 여후(呂后)는 그 후임으로 유항(劉恒)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유항(劉恒)은 여러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고는 <자신이 현재 흉노와 가까운 지역에 있으므로, 그래서 그 방위에만 전념하고 싶다>라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으로 그것을 고사(固辭)했다. 그러자 그 후임은 여치(呂雉)의 조카였던 여녹(呂祿 또는 여록)에게 주어졌다.
황제 즉위 전후
기원전 180년 여치(呂雉)가 죽자 여 씨(呂氏) 일족은 모두 숙청되었고, 그 후, 유항(劉恒)이 황위에 추대되었다. 그런데 그에는 또, 당시 정변(政變)에 참가했던 유양(劉襄)과 유장(劉章) 형제는 유방(劉邦)의 서장자(庶長子)라고 생각되었던 유비(劉肥)의 유아(遺兒)로, 여 씨(呂氏) 일족 주멸(誅滅)의 공적으로부터 유양(劉襄)이 황제에 즉위하고, 또 유장(劉章)은 제왕(齊王)에 봉해질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여 씨(呂氏) 일족이라는 강대한 외척에 의한 전횡(專橫)의 기억이 남아 있었던 당시의 시대상황과 또 일부 황족들이 강한 권력욕을 가진 외척이 있던 제왕(齊王)을 황제로 세우게 되면 또 다시 외척의 전횡이 발생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그래서 당시 생모가 몰락한 귀족의 말예(末裔)였으며, 또한 권력욕도 적은 인격자(人格者)라는 평판이 높았던 유항(劉恒)이 옹립되게 되었던 것이었다.(하지만 그에는 또 그가 당시 생존하던 劉邦의 遺兒 중 최 연장자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연령순에 의해서 즉위했을 것이란 설득력있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그러자 대국(代國)으로부터 반대의 소리가 높아졌는데, 그 이유는 또, 당시 유방(劉邦)과 함께 전란의 세월을 견뎌냈고, 이어서 여치(呂雉) 사후 정변을 일으켜서 여 씨(呂氏) 일족들뿐만이 아니라 황제까지도 폐립시키고 살해했던 그 원훈(元勳)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 후, 황제 즉위의 승낙을 받아내기 위해서 사자(使者)들이 장안(長安)과 대국(代國) 사이를 다섯 번이나 왕복하고서야 간신히 그것은 실현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래서 또 유항(劉恒)이 황제에 즉위했을 때, 그곳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황제 즉위 반대파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러자 또 그들에게는 장안으로 들어올 때, 단 몇 명의 부하들과 6기(騎)의 마차만 통과를 허락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문제(問題)는 끊임없이 일어났고, 또 어떤 때, 문제(文帝)가 법제도개혁에 대해서 중신들에게 하문했는데, 그러자 염미(厭味-아주 불쾌감을 주는 언동 또는 그로 인해 받는 혐오감과 불쾌감)한 내용의 상서(上書)가 올라왔던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또 세월은 흘러서 유방(劉邦)의 원훈(元勳)들도 하나둘씩 정치무대에서 사라져갔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때부터 서서히 정권의 주도권을 잡아갔으며, 이어서 착실하게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시정(施政)
그때, 문제(文帝)의 기본적인 정치태도는 유방(劉邦)의 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유방(劉邦)의 정책을 계승해서 국민 경제력의 휴양(休養)과 농촌의 활성화에 힘썼고, 또 그런 이유로 해서 대규모의 공사는 가급적 자제(自制)하게 했다. 그리고 또, 그는 궁중에서 누각(樓閣)을 마련하려는 계획이 나왔을 때도 그 경비가 중류(中流) 가정(家庭) 10호(戶)의 자산에 상당하게 되면 알아서 중지할 것을 명했다든지, 그리고 또 자신의 능묘(陵墓) 또한 다른 사람들(父, 兄)의 것에 비해서 소규모로 할 것도 지시했다. 그리고 또한 그 시기에 몇 차례나 감세가 실시되었고, 그리고 또 어떤 해(年)에는 아예 면제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른 稅와 勞役은 제외) 그리고 법제도의 개혁에서는 참수(斬首)와 거세(去勢)를 제외한 육형(肉刑)의 폐지를 실시했다. 그는 또 생모 박 씨(薄氏)에게 효행을 다했으며, 어떤 때는 스스로 음식의 맛보기(毒味=毒見 또는 始味=궁중 등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독이 들었는지를 먼저 확인 하는 일) 역(役)을 맡는다거나 해서 <효행의 황제>라고 칭해졌고, 그것은 또 나중에 <24효(二十四孝)>에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 24효(二十四孝)란 중국 원나라 곽거경(郭居敬)이 선정했던 스물네 명의 효행자(孝行者)를 말함.(상세한 것은 차후에 소개하거나 생략함) 우순(虞舜), 전한(前漢)의 문제(文帝), 증참(曾參), 민손(閔損), 중유(仲由), 동영(董永), 염자(剡子), 강혁(江革), 육적(陸績), 당부인(唐夫人), 오맹(吳猛), 왕상(王祥), 곽거(郭巨), 양향(楊香), 주수창(朱壽昌), 유검루(庾黔婁), 노래자(老萊子), 채순(蔡順), 황향(黃香), 강시(姜詩), 왕포(王褒), 정란(丁蘭), 맹종(孟宗), 황정견(黃庭堅)
아무튼, 문제(文帝)는 박 씨(薄氏)를 존중해서 무고죄로 주발(周勃)이 체포되었을 때도 박 씨(薄氏)에게 질책을 받고 주발(周勃)을 석방해 주었으며, 흉노 친정에 대해서도 신하의 간언을 수용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박 씨(薄氏)의 설득으로 원정을 중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이후, 그는 정적(政敵)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제후왕(諸侯王)들과도 원만하게 지냈으며, 그 예로는 또, 원래대로라면 무사(無嗣-후사가 없음) 단절되는 경우나, 모반을 일으키면 폐립(廢立)시키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오히려 <황제의 혜택>이란 명목으로, 굳이 그 혈연 자(血緣者)들까지 구해 와서 그 영지를 분할시켜서는 그 제후의 지위를 보전시키는 노력까지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나중에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의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하지만 또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때 반란을 일으켰던 제후왕가들이 의사통일에 곤란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또 조기진압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그러했던 문제(文帝)의 정책은 유방(劉邦)이나 여치(呂雉)에 비해서는 다소 뒤떨어졌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만 또 그 시대에는 민중과 사회가 모두 안정되었으며, 그래서 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창고에는 다 먹지 못해서 부패한 식료품들이 넘쳐났다>거나 <엽전(葉錢)을 묶는 끈이 다 썩어서 계산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는 등의 일화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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