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중국 전한(前漢) 기원전 154년에, 오왕(吳王) 외에, 칠국(七國)의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켰던 반란이었으며, 유 씨(劉氏) 가문의 내란(內亂)이었다.
<경위(經緯)>
그러자 원앙(袁盎)이 이렇게 말을 했다. <반란군은 오왕(吳王)이 큰 보상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가담한 것뿐이며, 그리고 또 오왕(吳王)의 주변에는 전부 간신들만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거병을 말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난(亂)은 곧 수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위를 모두 물리게 해달라고 하고는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반란군은 현재 조착(晁錯)의 주살(誅殺)을 명목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조착(晁錯)만 죽으면 이 문제는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경제(景帝)는 몹시 놀라면서 고민했지만, 그러나 결국 원앙(袁盎)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그 후, 경제(景帝)는 건국공신 주발(周勃)의 아들이었으며 또한 문제(文帝)가 유언을 남겼을 때 <한조(漢朝)에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그에게 군(軍)을 맡겨서 해결하라!>라고까지 조언을 했던 주아부(周亞夫)를 태위(太尉)에 임명했고, 이어서 초한전쟁(楚漢戰爭) 때 활약했던 란포(欒布)의 토벌을 명했다.
그런데 그때, 반란군은 대군이었지만 통솔이 잘 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또 오(吳)의 장군이 기습전을 건의했어도 무시하고 정공법(正攻法)만 고집했기 때문에 도중에 양왕(梁王) 유무(劉武)의 완강한 저항을 받고 발이 묶여 있었다. 그러자 또 그 사이에 주아부(周亞夫)는 우선적으로 요충지였던 낙양(洛陽)과 형양(滎陽)으로 급히 달려가서 그곳을 확보했다. 그리고는 다음으로 양(梁)과 조(趙) 그리고 제(齊)의 중간에 있던 창읍(昌邑)으로 들어가서 유무(劉武)와 경제(景帝)로부터의 구원요청이 왔어도 그것조차도 무시하고는 방어를 견고하게 굳혔다. 그런 한편 조(趙)와 제(齊)를 견제했던 동시에, 반란군의 주력이었던 오(吳)와 초군(楚軍)에는 기동력이 뛰어난 군사들을 보내서 선착장을 파괴하는 등, 철저하게 보급선(補給線)을 차단하는 전법을 구사해서 그들을 모두 기아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러자 곧 오(吳)와 초군(楚軍)은 전의(戰意)를 상실했고, 이어서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장군들에서조차도 탈주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위기감을 느꼈던 오왕(吳王)은 급한 차에 양(梁)의 수도는 포기하고 일단 창읍(昌邑)부터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또 그때, 이미 주아부(周亞夫)는 그곳의 방비를 철저하게 해둔 상태였고, 그런데다 또 <서북(西北) 쪽을 견제하면서 동남(東南) 쪽을 치겠다>라고 계획했던 오왕(吳王)의 양동작전(陽動作戰)까지도 미리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남(東南) 쪽으로 군을 집결시킨 후, 당시 한군(漢軍)의 주특기였던 평지(平地)에서의 싸움으로 유인해서 그것을 전차(戰車)로 격퇴했다. 그러자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던 오군(吳軍)은 허둥지둥 철퇴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주아부(周亞夫)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추격했고, 이어서 오군(吳軍)은 붕괴했으며, 그러자 또 그때, 오왕(吳王)도 군을 버리고 도망쳤다.
※ 인물소개
주아부(周亞夫-?부터 기원전 143년)는, 전한(前漢) 전기의 무장이었고, 정치가였다. 그리고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에서 반란군을 물리치는 공적을 올렸던 인물이었다. 그는 한(漢)의 건국 공신이었던 주발(周勃)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주발(周勃) 사후(死後), 문제(文帝)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맏형 주승지(周勝之)가 그 후계를 이었지만, 그러나 그 주승지(周勝之)가 살인을 저질러서 작위가 박탈되었다. 그러자 주아부(周亞夫)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이어서 조후(條侯)에 봉건 되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아버지 주발(周勃)처럼 군(軍)에서 활약했고, 흉노(匈奴)가 한(漢)의 영토를 침입했을 때는 문제(文帝)의 명을 받아서 그 방위의 일익(一翼)을 담당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정세가 안정되자, 문제(文帝)는 나라의 방비에 공을 세웠던 장병들을 위문한다는 차원에서 각 진영을 방문하고 열병(閱兵)했다. 그런데 그때, 다른 여러 진영들에서는 문제(文帝)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지만, 그러나 주아부(周亞夫)의 진영을 찾아갔을 때 주아부(周亞夫)는 문제(文帝)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폐하, 여기는 적진이므로 폐하께서도 그에 맞는 열병을 해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그런 다음, 문제(文帝)에게도 진중의 법을 지키게 했으며, 또한 진영 내에서도 하마(下馬)시킨 다음에 통행을 시키는 등, 전시체제를 유지했다. 그러자 문제(文帝)의 측근들은 그에게 <너무 무례하다>고 하면서 비난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오히려 그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야말로 진정한 장군이요!> 그 후, 문제(文帝)는 임종을 앞두고서 황태자(후의 景帝)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만약에 나라에 무슨 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주아부(周亞夫)에게 군을 맡겨서 사태를 해결하도록 하라!> 그런데 기원전 154년, 경제(景帝) 즉위 후, 당시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조착(晁錯)의 정책에 반발해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발생했다. 그러자 태위(太尉)가 된 주아부(周亞夫)는 경제(景帝)의 명을 받아서 대군을 인솔하고 창읍(昌邑)으로 들어갔다.(이하, 上述의 내용 참조) 반란진압 후, 주아부(周亞夫)는 승상이 되어서 정권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종종 경제(景帝)와 의견 대립했고, 그 때문에 경제(景帝)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또 그러던 중, 새 황후를 책봉할 일이 있어서 경제(景帝)는 자신이 총애하던 왕 씨(王氏=武帝의 생모)를 황후로 삼으려고 했는데, 그러나 그때도 주아부(周亞夫)는 그것을 반대했고, 그러자 마침내 경제(景帝)는 그를 승상의 자리에서 파면시켜버렸다. 거기다 주아부(周亞夫)의 아들이 나중에 주아부(周亞夫)의 묘(墓)에 쓸 부장품(副葬品)을 구입했던 것이 궁중에서 제작된 황제전용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아들과 함께 불경죄(不敬罪)가 적용되었다. 그러자 주아부(周亞夫)는 그 일을 책임진다는 의미로 절식사(絶食死)했다. 그리고 또, 그의 형제들 또한 모두 실각(失脚) 당했다.
<일화(逸話)>
그가 하내(河內)란 곳에서 태수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 허부(許負)라는 유명한 점쟁이가 있었는데, 그는 과거 위표(魏豹)의 측실이었던 박 씨(薄氏)에게 <당신은 머지않아서 천자를 낳게 될 것이오!>라고 점을 쳤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허부(許負)가 주아부(周亞夫)의 관상을 보고는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3년 후에는 제후가 되겠습니다. 그런 다음, 그 8년 후에는 대장군이 되어서 군을 호령하겠지만, 그러나 또 그 9년 후에는 굶어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주아부(周亞夫)가 또 이렇게 물었다. <나의 형님은 현재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소. 그리고 만약 그 형님이 돌아가신다면 그때는 그 형님의 자식이 그 뒤를 잇게 될 것이요. 그런데 어째서 내가 제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또한, 그 뒤의 일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또 허부(許負)가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의 관상은 비교적 무난한 편이지만, 그러나 입(口)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당신의 입은 양단(兩端)에 세로로 생긴 줄이 움푹 파져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사(餓死)의 상(相)인 것입니다><사기(史記)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아무튼 그 후, 오왕(吳王)은 동월(東越)로 도망을 갔지만, 하지만 그 동월(東越)의 왕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머리는 경제(景帝)에게 헌상되었다. 그러자 또 거사가 실패했다고 느꼈던 다른 왕들 중 2명은 자살했으며, 그 외의 왕들도 일단 자신의 나라들로 귀국했지만, 그러나 그들도 나중에는 모두 다 살해당했다. 그리고 또한, 그리하여 결국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발발로부터 불과 3개월이란 짧은 시간 안에 진압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조왕(趙王)만은 그 후에도 저항을 계속했는데, 그러나 그도 결국에는 자살했고, 그리고 또 그때 임치(臨淄)를 수비했던 제효왕(齊孝王) 유장려(劉將閭)는, 처음에는 반란군에 가담했다는 것이 판명되어 자살했으며, 그러자 또 경제(景帝)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의 자식 유수(劉壽)를 제왕(齊王)에 봉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양왕(梁王)은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에서 전공을 세웠다는 핑계로 차기(次期) 황제를 노렸지만, 그러나 그것은 원앙(袁盎)의 반대로 좌절되었으며, 그러자 또 양왕(梁王)은 원앙(袁盎)을 원망해서 자객을 보내 암살했다. 그리고 아래는 그때, 반란에 참가했던 왕들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오왕(吳王) 유비(劉濞)
초왕(楚王) 유무(劉戊=劉交의 孫)
조왕(趙王) 유수(劉遂=劉友의 子)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劉肥의 子)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雄渠=劉肥의 子)
치천왕(菑川王) 유현(劉賢=劉肥의 子로, 劉濞의 子와 同名異人)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劉肥의 子)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난(亂)은 진압되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제후왕(諸侯王)들에 대한 관리는 더욱 엄격해졌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제후국(諸侯國)들의 통치는 조정에서 임명하여 파견했던 관리가 대행했으며, 그에 따라서 제후왕(諸侯王)들은 실권을 잃게 되었고, 단지 조세를 받아들이는 직책으로 전락해갔다. 그리고 또 무제(武帝) 때에는 <추은(推恩)의 영(令)>이 나와서, 그때까지는 장자상속을 하던 영지를 다른 사람에게도 분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또 그 결과, 제후왕(諸侯王)들은 점점 힘을 잃게 되었고, 군국제(郡國制)도 거의 군현제(郡縣制)처럼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