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39년경/ 무제(武帝)가 장건(張騫)을 대월지(大月氏)에 파견했다.(~126 경)

 

<대월지에 파견되었던 장건 사절단>


 

 ※ 장건(張騫-?부터 기원전 114년)은, 중국 전한(前漢)의 정치가였고 외교관이었다. 그리고 한중군(漢中郡=顔師古의 注에 의하면 成固) 출신이었으며, 무제(武帝)의 명을 받아서 동맹을 맺기 위해 대월지(大月氏)로 향했고,
그곳(西域)의 정보를 가져왔던 인물이었다.

 그는 건원(建元) 연간(기원전 140년-기원전 135년)에 낭(郎-정확한 직급을 알 수 없음)이 되었는데, 그런데 당시 한(漢)에서는 흉노(匈奴)를 제압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고, 그 우선으로 대월지(大月氏)와 동맹을 맺기 위해서 그곳으로 파견할 사자(使者)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때, 그는 스스로 신청해서 아주 훌륭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당시, 그 대월지(大月氏)란 나라는 처음에는 월지(月氏)로 불리면서 흉노(匈奴)와 싸웠는데, 그러나 후에 목돌선우(冒頓單于)의 공격을 받아서 대패했다. 그리고 또 이어서 그의 아들이었던 노상선우(老上單于)에게도 패했고, 그러자 그 노상선우(老上單于)는 월지(月氏) 왕의 머리를 취해서, 그 안을 파내고는 술잔으로 삼았다고 한다.

 ○ 노상선우(老上單于-?부터 기원전 161년)는, 전한(前漢) 전기 흉노의 선우(재위:기원전 174년-기원전 161년)였고, 이름은 계죽(稽粥)이었다고 하며, 老上單于는 그의 칭호였다. 그리고 목돌선우(冒頓單于)의 아들로 태어나서 목돌(冒頓單于)이 죽자 선우에 즉위했으며, 한(漢) 효문제(孝文帝)의 딸을 정비(正妃)로 맞이했다. 그 후, 그는 정비(正妃)와 함께 흉노(匈奴)로 들어가서 귀순(歸順)을 신청했던 환관(宦官) 중행설(中行說)을 중용했으며, 그의 시정(施政)에 따라서 기원전 166년에는 14만기를 인솔해서 장성(長成)을 넘었다. 그리고는 많은 민중과 재화를 약탈했고, 그 후 계속해서(年마다) 한(漢)에 침입했다. 그리고 또 특히, 운중(雲中)과 요동지방에 아주 심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기원전 162년에는 한(漢)과 강화했고, 재위 중에 월지(月氏)를 공격해서 그 나라의 왕을 살해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161년에 사망했다.

 그 후, 월지(月氏)의 일부는 북쪽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것을 당시 중국에서는 대월지(大月氏)라고 불렀다. 그러자 한(漢)은 그 대월지(大月氏)가 흉노(匈奴)를 증오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협공작전을 구상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장건(張騫)을 필두로 했던 약 100여 명 남짓의 사절단을 그곳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장건(張騫)과 일행은 당시 한(漢)의 세력권이었던 농서(隴西=지금의 甘肅省)에서 나온 직후에 흉노(匈奴)에게 잡혀서 포로가 되었다.


<ZhangQianTravel>

<간수=甘肅省>

 


 ※ 군신선우(軍臣單于-?부터 기원전 126년)는,
전한(前漢)기 흉노(匈奴)의 선우(재위:기원전 161년-기원전 126년)였고, 노상선우(老上單于)의 아들로 태어나서 노상(老上)이 죽자 즉위했다. 그는 기원전 165년에 한(漢)과의 화의를 깼으며, 이어서 상군(上郡) 운중(雲中)에 침입했지만, 경제(景帝)가 즉위한 후 다시 화해가 성립되었다. 그 후 무제(武帝) 때도 우호관계는 계속되었지만, 그러나 기원전 133년 전한(前漢)의 장군 왕회(王恢)가 계략을 내서 당시 마읍(馬邑)의 부호(富豪)였던 섭일(聶壱=張遼의 먼 조상)로 하여금 공물을 바치는 척하면서 군신(軍臣)을 속여서 토벌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었고(漢의 장군 한명이 그의 포로가 되면서 실토했다), 그러자 군신(軍臣)은 급히 철군해서 화를 피했다. 그 후, 한(漢)과 단교했던 군신(軍臣)는 다시 대립의 시대를 열게 된다. 그리고 또 그때, 계책을 냈던 왕회(王恢)는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처형되었고, 섭일(聶壱)은 “장일(張壱)”로 개명하고는 몸을 숨겼다. 그리고 또, 한(漢)이 월지(月氏)에 파견했던 사자 장건(張騫)을 억류했던 사건으로서도 그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 후, 군신(軍臣)은 장건(張騫)이 대월지(大月氏)로 파견된 사자란 것을 알게 되자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장건(張騫)을 10여년 간이나 억류했다. <월지(月氏)는 우리의 북쪽에 있다. 그런데도 어째서 한(漢)은 그곳으로 사자를 보내게 되었는가? 그리고 또 만약에 우리가 한(漢)의 남쪽에 있는 월(越)로 사자를 보내려고 한다면, 그때도 무제(武帝)는 그것을 허락할 것인가?!> 그 후, 군신(軍臣)은 장건(張騫)에게 결혼까지 시켜주었고, 아이까지 얻게 했지만, 그러나 장건(張騫)은 끝까지 부절(符節)을 버리지 않았다.

 
부절(符節)은, 옛날에 돌이나 대나무 또는 옥(玉) 등으로 만들어서 신표(信標)로 삼았던 물건이었다. 주로 사신들이 가지고 다녔으며, 둘로 갈라서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또 하나는 본인이 가지고 다니면서 신분의 증거로 사용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장건(張騫)은 그로부터 약 10여년 후에야 결국 흉노(匈奴)에서 탈출했고, 이어서 서쪽에 있었던 대완(大宛=페르가나)까지 도망을 쳤다. 그러자 그곳의 왕은 한(漢)의 배경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환대했고, 이어서 대월지(大月氏)로 가는 길까지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또 당시, 그 대월지(大月氏)는 흉노(匈奴)에게 쫓겨서 북쪽으로 도망친 후에 오손(烏孫)에게도 쫓겨나서 더욱 더 서쪽으로 옮겨가있었다.

 
오손(烏孫)은,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남북조시대에 걸쳐서 톈산북로(天山北路) 주변에 살던 터키계열의 유목민족으로, 한(漢)나라와는 우호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였으나, 그러나 5세기 후반에 들어서 선비(鮮卑)와 유연(柔然) 등에 압박을 받아서 망하였다.


<中=오손. 下=천축. 右上=흉노. 左中=대월지. 그 위가 강거>

 

 그러자 그 후, 장건(張騫)은 강거(康居)에 들른 후

 마침내 대월지(大月氏)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
강거(康居)는, 중국 한(漢)나라 · 위(魏)나라 때, 중앙아시아에 있었던 터키계 유목민족의 나라.

 그러자 장건(張騫)은 그 월지(月氏)의 왕에게 한(漢)과의 동맹을 구했지만, 하지만 월지(月氏)의 왕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당시 월지(月氏)가 도망쳐 갔던 그 땅에서는 모든 것이 풍부했던 데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나라가 그 근처에는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었고, 거기다 또 당시 월지(月氏)는 대하<大夏=그레코· 박트리안 왕국이었다는 설과 토하라(Tokhara)인의 나라였다는 설이 있다>라는 나라를 복속시켜서 중계무역으로 큰 영광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과거 흉노(匈奴)에의 복수심은 이미 모두 다 잊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大夏=중앙 푸른 부분이 그레코· 박트리안 왕국이며, 위의 동그라미 부분이 토하라(Tokhara)>



 그러자 그에 큰 실망을 안고 귀국길에 올랐던 장건(張騫)은 귀도(歸途)를 쿤룬산맥
(崑崙山脈) 쪽으로 잡았는데, 그런데 그 길에서 또 다시 흉노(匈奴)에게 붙잡혔다.



<동그라미 부분이 쿤룬산맥이며, 아래는 히말라야산맥, 위는 천산산맥>



 ○ 쿤룬산맥은,
중국 티베트 고원과 타림 분지 사이를 동서로 뻗은 산맥으로, 최고봉의 울루무즈타그의 높이는 7,723미터이며, 길이는 2,400km.

 그러자 또 장건(張騫)은 흉노(匈奴)에서 1년을 보냈고, 그런데 또 마침 그 무렵에 군신(軍臣單于)이 사망했다.(기원전 127년 겨울) 그러자 흉노(匈奴)에서는 곧 내부에서 대립이 일어났는데, 그러자 또 장건(張騫)은 그 틈을 타서 흉노(匈奴)를 탈출했다. 그리고는 다시 천신만고(千辛萬苦)를 겪으면서 기원전 126년에 결국 한(漢)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그때, 출발 당시 100명 정도였던 사절단은 그를 포함해서 단 2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

 아무튼, 그러자 또 동맹의 실패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 장건(張騫)의 귀환과 함께 그가 가져왔던 정보는 한(漢)의 입장에서는 매우 귀중한 것이 되었고, 그래서 당시까지는 서역(西域)이란 존재에 대해서 완전한 문외한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하지만 그 후로는 대(對) 흉노(匈奴) 전략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장건(張騫)은 그 공적으로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또 기원전 123년, 드디어 무제(武帝)는 대장군 위청(衛靑)을 내새워서 흉노(匈奴)에의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자 또 그때, 장건(張騫)은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서 그 원정에 일조했고, 그 후에 또 그는 위위(衛尉)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121년의 원정 때는 기일(期日)에 늦은 죄로 죽을죄가 성립되었다. 그러자 그는 금전으로 속죄하고 서민으로 떨어졌다. 그 후에 또 장건(張騫)은 서역을 여행하던 중 촉(蜀=四川)'의 사람들이 아주 귀한 물건(대나무와 옷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는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은 그에게 신독(身毒=인도)의 상인들로부터 샀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장건(張騫)은 촉(蜀)→ 운남(雲南)→ 미얀마(Burma=미얀마의 前 이름)→ 인도(印度)라는 루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또 장건(張騫)은 급히 장안(長安)으로 돌아와서 무제(武帝)에게 그것에 대해서 몇 번이나 진언을 했다. 그리고는 운남(윈난 성=雲南)을 복속시키고, 그 루트를 장악해서 서역과 연결하는 것으로써 흉노(匈奴)에 대항할 것을 조언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오손(烏孫)과 동맹을 맺기 위해서 기원전 119년에 사자로 떠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는 기원전 114년에 사망했다. 그러자 그의 사후(死後) 그가 주장했던 계책은 서서히 결실을 보게 되었고, 그리하여 한(漢)은 서역과의 교역을 시작했으며, 이어서 흉노(匈奴)에도 유리한 입장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의 손자였던 장맹(張猛)은 흉노(匈奴)의 호한사선우(呼韓邪單于)와 동맹을 맺었고, 그리하여 한때 기원제(期元帝)에 신임(信任)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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