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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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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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그 후, 춘신군(春申君)의 주도 하에 항연(項燕-項羽의 祖父) 장군의 활약으로 진(秦)에 잠시 대항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춘신군(春申君)마저 죽어버리자 초(楚)에서는 더 이상 국정(國政)을 장악할 자가 없게 되었고, 그러자 또 이어서 항연(項燕)이 진(秦)의 왕전(王翦) 장군에게 패하고 말았으며, 그 결과로 초(楚) 최후의 왕이었던 부추(負芻)는 진(秦)에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또 당시, 진(秦)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 창평군(昌平君)이 항연(項燕) 등의 추대를 받아서 잠시 초왕(楚王)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역시도 얼마 가지 않아서 진군(秦軍)에게 진압 당했고, 그리하여 기원전 223년에 초(楚)는 완전히 멸망했다.
○ 춘신군(春申君-?부터 기원전 238년)은 중국 전국시대 초(楚)의 정치가로, 성(姓)은 황(黃), 휘(諱)은 알(歇-또는 헐로 읽는 곳도 많으므로 참고바라며, 알로 읽는 근거는 史記九 列伝二에 의함), 전국(戰國) 사군(四君)의 한명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고열왕(考烈王)을 옹립함으로 해서 당시, 기울어가던 초(楚)의 국세(國勢)를 바로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국정(國政)에 최초로 등장했던 것은 기원전 274년이었고, 경양왕(頃襄王)의 명을 받고 진(秦)에 사자로 갔던 때였다. 그리고 또 그 무렵에는 진(秦)이 한(韓)과 위(魏)를 거느리고 초(楚)를 공략하려고 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러자 그는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현재, 천하에 진(秦)과 초(楚)보다 더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초(楚)와 진(秦)이 싸우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양호상타(兩虎相打=兩虎相鬪)가 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두 나라는 함께 상처를 입게 될 것이고, 그것은 또 바로 약한 개(韓・魏)들만 이롭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은 그의 말을 인정해서 초(楚)와 화평을 도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 해, 진(秦)이 초(楚)와의 화평을 증거로 태자 완(完-나중의 考烈王)을 인질로 요구하게 되자, 그는 태자 완(完)을 따라서 진(秦)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원전 264년에 경양왕(頃襄王)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대로 있다가는 다른 사람이 왕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그는 당시 진(秦)의 재상이었던 범저(范雎)에게 완(完)을 귀국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범저(范雎)는 소양왕(昭襄王)에게 그의 그런 뜻을 전했는데, 그러자 또 소양왕(昭襄王)은 그에게 먼저 초(楚)로 가서 그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오게 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완(完)만 비밀리에 초(楚)로 보냈고, 자신은 진(秦)에 남았다. 그러자 그 사실을 알게 된 소양왕(昭襄王)은 대노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러자 또 그때, 범저(范雎)가 나서서 중재를 했고, 그 결과 그도 초(楚)로 귀국했다. 그러자 그 3개월 후, 완(完)은 즉위했고, 초왕(楚王)이 되었다. 그 후, 그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서 영윤(令尹)에 임명되었고, 회북(淮北-淮河의 북쪽) 12현(縣)을 영지로 받았으며, 춘신군(春申君)에 봉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기원전 258년에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이 진(秦)에 포위되었는데, 그러자 평원군(平原君)이 구원을 구하는 사자를 보냈다. 그러자 춘신군(春申君)은 그에 응해서 출병했고, 그러자 진(秦)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그 후, 기원전 248년 그는 왕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회북(淮北)은 제(齊)와 접하는 중요지이기 때문에, 직할 군(郡)인 방(方)이 더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에게는 회북(淮北) 대신 강동(江東)이 주어졌고, 그러자 또 그는 과거 오(吳)의 성(城)이었던 곳을 자신의 거성(居城)으로 삼았다. 그리고 또 그 후, 그는 그곳에서 군을 출병해서 노(魯)를 멸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그의 거성(居城)에는 식객이 3천 명이나 있었는데, 그 중에서 상객(上客)은 전부 구슬로 장식한 신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객 중에는 순자(荀子)도 있었다고 하며, 그러자 또 춘신군(春申君)은 그 순자(荀子)를 난능(蘭陵)이란 현(縣)의 영(令-長官 격)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기원전 240년에 그는 제후(諸侯) 연합군을 통솔해서 진(秦)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그 때문에 그는 고열왕(考烈王)에게 외면당했다. 그리고 또 동년, 초(楚)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수춘(壽春)으로 천도했다. 그런데 또 그 즈음, 그의 식객 중에는 이원(李園)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 이원(李園)의 여동생이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래서 이원(李園)은 언젠가는 그 여동생을 고열왕(考烈王)에게 보내서 출세할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또 그때, 춘신군(春申君)이 그녀를 총애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또 그로부터 머지 않아서 그녀는 춘신군(春申君)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것을 알게된 이원(李園)은 고열왕(考烈王)에게 자손이 없다는 점을 착안해서 춘신군(春申君)에게 다음과 같은 계책을 이야기했다. <제 여동생을 왕에게 헌상하면 그 복중의 아이는 당연히 왕의 아이가 될 것이고, 만약에 그렇게만 된다면 그 아이는 다음의 왕이 될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초(楚)는 춘신군(春申君)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참고: 하지만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의하면, 고열왕(考烈王)에게는 유왕(幽王) 이외에도 다른 아들 즉, 초(楚)의 마지막 왕이었던 부추(負芻) 등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함.
그러자 또 아무튼, 춘신군(春申君)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고, 이어서 고열왕(考烈王)에게 말을 해서 그 이원(李園)의 여동생을 헌상까지 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 후에 그녀는 왕후가 되었는데, 그 결과로 이원(李園) 역시도 고위직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이원(李園)은 그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해서 춘신군(春申君)을 제거하려고 생각했고, 그러자 또 그에 위기감을 느꼈던 춘신군(春申君)은 식객 중 한사람이었던 주영(朱英)이란 사람과 그 일에 대해서 의논을 했는데, 그러자 또 그 주영(朱英)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러시다면 제가 그 이원(李園)을 없애버리겠으니 명만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당시, 춘신군(春申君)은 이원(李園)을 대수롭게 여기고 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 주영(朱英)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 주영(朱英)은 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 일로 해서 자신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해서 도망을 가버렸다. 그리고 기원전 238년, 결국 고열왕(考烈王)은 병사했고, 그러자 그 장례식에 참석을 했던 춘신군(春申君)은 극문(棘門-城門의 한 이름)에서 매복하고 있던 이원(李園)의 자객에게 자신의 종자(從者)와 함께 살해되었으며, 그 후에 그의 머리는 성 밖으로 버려졌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의 일족(一族)과 식솔(食率-家臣 등과 집에서 일을 하는 노비나 종 등)들은 모두 참살되었으며, 이원(李園)의 여동생이 낳은 그의 아들은 나중에 즉위해서 유왕(幽王)이 되었다. 하지만 그 유왕(幽王)도 재위 10년째였던 기원전 228년에 사망했으며, 그러자 그 뒤를 이어서 동모제(同母弟) 애왕(哀王)이 등극했지만, 그러나 그도 재위 2개월 때에 서형(庶兄)이었던 부추(負芻)의 습격을 받아서 살해되었다.
그리고 다음은 초(楚)의 역대 군주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단, 한글 표기는 하지 않음.
1. 熊繹
2. 熊艾
3. 熊黵(또는 黒+旦)
4. 熊勝
5. 熊楊
6. 熊渠
7. 熊毋康
8. 熊摯紅
9. 熊延(執疵?-재위-紀元前848年頃)
10. 熊勇(在位-紀元前847年頃-紀元前838年頃)
11. 熊厳(在位-紀元前837年頃-紀元前828年頃)
12. 熊霜(在位-紀元前827年頃-紀元前822年頃)
13. 熊徇(在位-紀元前821年頃-紀元前800年頃)
14. 熊咢(在位-紀元前799年頃-紀元前791年頃)
15. 若敖(熊儀, 在位-紀元前790年頃-紀元前764年頃)
16. 霄敖(熊坎, 在位-紀元前763年頃-紀元前758年頃)
17. 蚡冒(熊眴, 在位-紀元前757年頃-紀元前741年)
18. 武王(熊通, 在位-紀元前740年-紀元前690年) 처음으로 왕호(王號)를 사용함
19. 文王(熊貲, 在位-紀元前689年-紀元前675年)
20. 荘敖(熊囏, 在位-紀元前674年-紀元前672年)
21. 成王(熊惲, 在位-紀元前671年-紀元前626年)
22. 穆王(熊商臣, 在位-紀元前625年-紀元前614年)
23. 荘王(熊侶, 在位-紀元前613年-紀元前591年)
24. 共王(熊審, 在位-紀元前590年-紀元前560年)
25. 康王(熊招, 在位-紀元前559年-紀元前545年)
26. 郟敖(熊員, 在位-紀元前544年-紀元前541年)
27. 霊王(熊囲, 在位-紀元前540年-紀元前529年)
28. 王比(熊比, 在位-紀元前529年)
29. 平王(熊弃疾, 在位-紀元前528年-紀元前516年)
30. 昭王(熊珍, 在位-紀元前515年-紀元前489年)
31. 恵王(熊章, 在位-紀元前488年-紀元前432年)
32. 簡王(熊中, 在位-紀元前431年-紀元前408年)
33. 声王(熊当, 在位-紀元前407年-紀元前402年)
34. 悼王(熊疑, 在位-紀元前401年-紀元前381年)
35. 粛王(熊臧, 在位-紀元前380年-紀元前370年)
36. 宣王(熊良夫, 在位-紀元前369年-紀元前340年)
37. 威王(熊商, 在位-紀元前339年-紀元前329年)
38. 懐王(熊槐, 在位-紀元前328年-紀元前299年)
39. 頃襄王(熊横, 在位-紀元前298年-紀元前263年)
40. 考烈王(熊完, 在位-紀元前262年-紀元前238年)
41. 幽王(熊悍, 在位-紀元前237年-紀元前229年)
42. 哀王(熊猶, 在位-紀元前228年)
43. 負芻(熊負芻, 在位-紀元前227年-紀元前223年)
44. (昌平君) (在位-紀元前223年)
45. (空位)
46. (義帝) (熊心, 在位-紀元前208年頃-紀元前206年)
※ 단, 46의 의제는 진(秦) 멸망 후의 난국(亂國) 때, 항량(項梁)에 의해서 옹립되었던 회왕(懷王)의 손자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 소개하고 있는 춘추전국시대와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지만, 일단 소개는 함.
<초(楚)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