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9) 孫武 계속


 ○ 손무(孫武-기원전 535년경부터 몰년불명)는 중국 고대의 무장, 군사사상가로, 병법서 손자(孫子)의 작자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논의가 많으므로, 후술하는 병법서 孫子에서 조금 더 考察할 예정임) 그리고 또 그는 병가(兵家)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춘추시대 제(齊)나라 출신이었고, 자(字)는 장경<長卿-그러나 자(字)는 신당서(新唐書)의 재상세계(宰相世系) 3하(三下)에 의한 것이며, 이름을 무(武)라고 한 것은 오월춘추(吳越春秋)에 의함이다>이었다. 그리고 후세의 병법가 손빈(孫臏)의 선조였으며, 손자(孫子)는 존칭이다. 그는 또, 군사학연구에 있어서 전략, 전술, 정보 등, 폭넓은 영역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킨다>라는 전략사상과 전투에서의 방세주의(防勢主義)와 단기(短期)결전, 첩보활동의 고찰 등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또 그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에는 리델하트(Sir Basil Henry Liddell-Hart)와 모택동(毛澤東) 등이 있었다.



 손무(孫武)에 관한 자료로서는 정사(正史) 사기(史記) 외에도, 오(吳)월(越)의 흥망에 관해서 기록했던 야사(野史-載記) 오월춘추(吳越春秋)와 손자(孫子)의 선조와 그 자손에 관해서 기술한 당(唐)의 정사(正史) 신당서(新唐書)가 주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소개하는 내용들도 모두 그것들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러나 사실성(史實性)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으므로, 단지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손무(孫武)는 제(齊)나라의 명문(名門) 전씨(田氏) 출신이었다고 한다.(그러나 吳越春秋에서는 그가 吳나라 사람이라고 했고, 그것을 현대 학자 중에서도 동조하는 사람이 있으며, 그래서 또 앞에서 소개되었던 伍子胥가 齊에 자신의 자식을 맡겼을 때, 그 친구였던 孫武도 역시 자기 자식을 伍子胥의 자식과 함께 맡겼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완(田完)의 5세(世) 손(孫)이었던 손무(孫武)의 조부(祖父)가 군공(軍功)을 세웠기 때문에 손(孫) 성(姓)을 하사받았고, 그리하여 손 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손무(孫武)는 어려서부터 병서(兵書)를 좋아했는데, 그래서 황제(黃帝)와 4제(帝)의 싸움이나, 고대(古代) 인물들(특히, 伊尹, 姜尙, 管仲 등)의 용병(用兵)과 책략 등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517년경, 일족(一族) 내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그러자 손무(孫武)는 일가(一家)를 데리고 강남(江南)의 오(吳)로 피신했다.

 참고: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孫)빙(憑)은 무(武)를 낳았고 (武의) 자(字)는 장경(長卿)이다. 전(田)・포(鮑) 4족(族)의 모(謀), 난(難)을 피해서 오(吳)로 도망쳐서 장군이 되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으니, 치(馳)와 명(明)과 적(敵)이다>라고 기록되어있고, 그 중에서 차남이었던 손명(孫明)은 오(吳)에서 부춘군(富春郡)을 하사받은 후, 손 씨(孫氏)의 선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또, 그 부춘손씨(富春孫氏)는 부춘용문손씨(富春龍門孫氏)라고도 칭해졌으며,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의하면, 삼국시대 때의 손견(孫堅), 손권(孫權) 부자(父子)도 그 계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참고로,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중국 청나라 때, 건륭제의 명에 따라서 건륭 37년(1772)에 시작하여 1782년에 완성했던 중국 최대의 총서(叢書)로, 궁중에서 소장하고 있던 서적 외에도 전국의 민간에 소장된 서적을 골라 모아서 경(經), 사(史), 자(子), 집(集) 4부문으로 나누었다고 하며, 7부(部)를 작성하여 여러 서고에 나누어 보관하였던 책이었다.

 아무튼, 그 후 손무(孫武)는 오(吳)에서 오자서(伍子胥)를 지기(知己)로 얻었으며, 그 후에는 오(吳)의 왕도(王都) 고소(姑蘇) 외곽의 어느 산속에서 칩거하면서 손자(孫子) 13편을 저작했다.

 참고: 손자(孫子) 또는 손자병법(孫子兵法) 13편의 목차소개. 단, 한글표현은 하지 않음.

 計篇 - 서론(序論)으로, 전쟁을 결단하기 전에 충분히 숙고해야할 것들에 관해서 기술.
 作戦篇 - 결단이 이루어지면, 전쟁준비에 관한 계획 등에 관해서 기술.
 謀攻篇 - 실전(實戰)에 임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는 방법 등에 관해서 기술.
 形篇 - 공수(攻守) 각각의 태세에 관해서 기술.
 勢篇 - 상술(上述)의 태세(態勢)로부터 생기게 되는 군세(軍勢)의 세(勢)에 관해서 기술.
 虚実篇 - 전쟁에 임해서는 어떻게 주도성(主導性)을 발휘하는가에 관해서 기술.
 軍争篇 - 적군(敵軍)의 기선(機先)을 제압하는 것에 관해서 기술.
 九変篇 - 전국(戰局)의 변화에 따른 임기응변(臨機應變)에 대응하는 9가지의 방법에 관해서 기술.
 行軍篇 - 진군(進軍) 시의 주의사항에 관해서 기술.
 地形篇 - 지형(地形)에 따른 전술(戰術)의 변경에 관해서 기술.
 九地篇 - 9종류의 지세(地勢)에 관한 설명과 그에 대응하는 전술(戰術)에 관해서 기술.
 火攻篇 - 화공(火攻)의 전술(戰術)에 관해서 기술.
 用間篇 - <간(間)>은 간첩(間諜)을 의미하며, 적정(敵情)정탐의 중요성에 관해서 기술함.

 단, 현존하는 손자(孫子)는 상기(上記)의 내용과 같지만, 그러나 그 저본(底本)에 따라서 순번은 다를 수가 있음. 그 때문에 위의 편명(篇名)과 순서는 근년에 출토되었던 죽간(竹簡)에 담겨있는 것(이하, 竹簡孫子)을 토대로 한 것이며, 그 죽간(竹簡)에서 빠져있는 것은 손본십일가주손자(宋本十一家注孫子)에서 보충한 것임. 그 이유는 죽간손자(竹簡孫子) 쪽이 좀 더 원형에 가깝다고 생각되기 때문임. 그리고 손자(孫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많지만, 그러나 이야기가 자꾸 길어지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 생략하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따로 연구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 기원전 515년에 합려(闔閭)가 즉위하자 오자서(伍子胥)는 합려(闔閭)에게 손자병법(孫子兵法)을 헌상하고는 일곱 번에 걸쳐서 손무(孫武)의 등용을 간청했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손무(孫武)를 불러서 병법에 대해서 논했는데, 그 때의 에피소드가 사기(史記)의 권(卷)65 손자오기열전(孫子呉起列伝) 제5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제목으로는 손자늑희병(孫子勒姫兵 또는 孫子勒兵)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하므로, 그래서 아래에 그 원문을 소개하니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孫子武者,齊人也。以兵法見於吳王闔廬。闔廬曰:「子之十三篇,吾盡觀之矣,可以小試勒兵乎?」對曰:「可。」闔廬曰:「可試以婦人乎?」曰:「可。」於是許之,出宮中美女,得百八十人。孫子分為二隊,以王之寵姬二人各為隊長,皆令持戟。令之曰:「汝知而心與左右手背乎?」婦人曰:「知之。」孫子曰:「前,則視心;左,視左手;右,視右手;後,即視背。」婦人曰:「諾。」約束既布,乃設鈇鉞,即三令五申之。於是鼓之右,婦人大笑。孫子曰:「約束不明,申令不熟,將之罪也。」複三令五申而鼓之左,婦人複大笑。孫子曰:「約束不明,申令不熟,將之罪也;既已明而不如法者,吏士之罪也。」乃欲斬左右隊長。吳王從臺上觀,見且斬愛姬,大駭。趣使使下令曰:「寡人已知將軍能用兵矣。寡人非此二姬,食不甘味,願勿斬也。」孫子曰:「臣既已受命為將,將在軍,君命有所不受。」遂斬隊長二人以徇。用其次為隊長,於是複鼓之。婦人左右前後跪起皆中規矩繩墨,無敢出聲。於是孫子使使報王曰:「兵既整齊,王可試下觀之,唯王所欲用之,雖赴水火猶可也。」吳王曰:「將軍甘休就舍,寡人不原下觀。」孫子曰:「王徒好其言,不能用其實。」於是闔廬知孫子能用兵,卒以為將。西破彊楚,入郢,北威齊晉,顯名諸侯,孫子與有力焉。

 그리고 위의 내용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고 또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필자 개인적으로는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지만, 그러나 이야기가 나온 차에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합려(闔閭)가 손무(孫武)를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선생의 저작 13편을 전부 다 읽어보았는데, 군대를 통솔할 수 있겠소?>라고 묻자 손무(孫武)가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또 합려(闔閭)가 <그렇다면, 궁중의 부인들도 가능하겠소?>라고 물었는데, 그러자 손무(孫武)가 다시 가능하다고 답을 했다. 그리고는 궁중의 미녀들 180명을 한곳에 모아놓고 두 부대로 나누고는 그 각각의 부대의 장으로 합려(闔閭)가 총애하던 여성 두 명을 세웠다. 그리고는 또 극<戟-창을 닮은 무기로, 장군의 권위와 생사여탈권을 상징하는 일종의 부월(斧鉞) 같은 것. 그러나 斧鉞은 큰 도끼와 작은 도끼임>을 들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여러분들은 자신들의 가슴과 좌우(左右) 손 그리고 등을 알고 있는가?> 그러자 여인들이 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또 손무(孫武)는 <앞하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고, 좌(左)하면 왼손을 바라보고, 우(右)하면 오른손을 바라보고, 후(後)하면 뒤쪽을 봅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여인들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손무(孫武)는 <군령(君令)은 3영5신(3令5申-3번 令을 내리면, 5번 令을 따른다)이며, 그 약속을 잘 지키면(軍令에 잘 따르면) 포상이 내려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부월(鈇鉞)이 내려질 것입니다(즉, 참형에 처한다)>라고 말을 한 후에, 고수(鼓手)에게 북을 치게 하고는 그 북소리에 맞추어서 <우(右)!>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여인들은 손무(孫武)의 말을 따르지 않고 크게 웃었다. 그러자 또 손무(孫武)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약속이 불명확 하여(軍令이 명확하지 않아) 영(令)을 제대로 따르게 하지 못한 것은 장수의 죄다!> 그리고는 다시 군령을 숙지시킨 후에 북을 치게 하고 <좌(左)!>하고 군령을 내렸는데, 그런데 그때도 여인들은 군령에 따르지 않고 크게 웃기만 했다. 그러자 또 손무(孫武)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군령이 불명확 해서 영(令)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게 한 것은 장수의 죄이지만, 그러나 이제는 군령이 명확해졌는데도 따르지 않은 것은 병사들의 죄다!> 그리고는 좌우(左右)의 대장 두 여인을 불러서 참형에 처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때, 대(臺) 위에 앉아서 참관하고 있던 합려(闔閭)가 자신의 총희(寵姬)들이 죽을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서 손무(孫武)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전하게 했다. <과인(寡人)은 이미 장군의 용병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소! 그리고 과인(寡人)에게는 저 두 여인이 없으면 먹어도 단맛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이니, 제발 원컨대 참형만은 말아주시오!> 그러자 또 손무(孫武)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신(臣)은 이미 명(命)을 받아서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수가 진중(陣中)에 있을 때는 비록 왕명(王命)이라도 받들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두 여인을 참수해서 그곳에 모였던 여인들이 모두 볼 수 있게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두 여인을 내세워서 대장으로 삼았으며, 그런 다음 다시 북을 쳤다. 그러자 여인들은 마치 먹줄을 그은 듯이 정확하게 손무(孫武)의 명령을 따랐으며,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를 않았다. 그러자 손무(孫武)는 또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이제 군대는 잘 정제(整齊)가 되었으니 왕께서 내려오셔서 시험을 해보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왕께서 저 여인들을 이용하고자 하신다면, 아마도 저 여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왕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손무(孫武)가 다시 이렇게 말을 했다. <왕께서는 병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운영하는 것에는 그다지 밝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손무(孫武)의 능력을 인정하고 장군에 임명했다.(하략)


<손자병법서>

<孫武가 활약했던 당시, 諸国들의 위치 관계>>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512년에 손무(孫武)는 장군에 임명되어서 당시, 초(楚)의 위성국(衛星國)이었던 종오국(鐘吾國)과 서국(徐國)을 공략했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그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초(楚)로 바로 진격해서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러나 손무(孫武)가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합려(闔閭)를 말렸다. <초(楚)는 비록 지금은 많이 쇠퇴(衰退)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강국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현재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서 병사들이 많이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초(楚)를 공격한다는 것은 상책(上策)이 아닙니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손무(孫武)의 말을 인정했고, 이어서 오자서(伍子胥)의 의견을 따라서 소(小)부대를 초(楚)의 국경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도발을 감행했는데, 그러자 또 초(楚)는 그에 위기를 느끼고는 대군(大軍)을 그 국경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그래서 초(楚)의 국력은 나날이 소모(消耗)되어갔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6년 후였던 기원전 506년, 초(楚)는 오(吳)의 보호 하에 있던 지방 영주(領主) 당백(唐伯)과 채후(蔡侯)를 공격했고, 그러자 또 그 두 사람은 오(吳)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이제 때가 성숙했다고 생각했던 합려(闔閭)는 손무(孫武)와 오자서(伍子胥)를 좌우 대장으로 세우고는 군을 일으켰다. 그러자 오(吳)와 초(楚)는 한수(漢水)에서 만났고<백거(柏擧)의 싸움>, 손무(孫武)는 양동작전(陽動作戰)을 펼쳐서 초군(楚軍)의 주력을 다른 지역으로 꾀어냈다. 그러자 그 후, 오군(吳軍)의 본대(本隊)가 초(楚)의 수도를 향해서 쳐들어가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던 초(楚)의 주력은 그 즉시 오(吳)의 본대가 있던 전장(戰場)으로 달려왔지만, 그러나 강행군을 했던 탓으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러자 또 오군(吳軍)은 3만의 군세(軍勢)로 당시 20만을 헤아렸던 초군(楚軍)을 대파했으며, 그러자 또 그 여세를 몰아서 초(楚)로 진군해서 10일 만에 초(楚) 수도였던 영(郢)성(城)까지 함락시켰다. 그러자 초(楚)의 소왕(昭王)은 도망을 갔으며, 그것으로 당시의 강국이었던 초(楚)의 대군을 과병(寡兵-적은 병력)으로 무찔렀다는 전과(戰果)로 인해서 손무(孫武)의 명성은 중원(中原)을 울리게 했다. 그러자 또 그 후, 초(楚)의 신하였던 신포서(申包胥-6-22참조)가 진(秦)으로 도망을 갔으며, 그러자 또 진(秦)은 신포서(申包胥)의 책략을 받아들여서 오(吳)를 치러왔기 때문에, 그래서 오군(吳軍)은 하는 수 없이 초(楚)에서 물러났다. 그 후, 오(吳)는 북방(北方)의 제(齊)와 진(晋)을 위압(威壓)해서 제후들 간에 그 이름을 알렸지만, 하지만 그 공적은 모두 손무(孫武)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496년, 합려(闔閭)는 손무(孫武)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월(越)을 공략했지만 고전(苦戰)했고, 그런데다 또 합려(闔閭)는 그 전장에서 화살을 맞은 부상이 악화되어서 사망했다. 그러자 손무(孫武)는 오자서(伍子胥)와 함께 태자 부차(夫差)를 왕으로 옹립하고는 국력을 신장시켰으며, 그런 다음에 부초(夫椒)에서 월(越)을 다시 만나서 대파하고는 앞의 일에 대한 설욕을 했다. 하지만 그 후의 손무(孫武)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후한(後漢)의 재기(載記=중국 역사서의 한 형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本紀・列伝・世家・志 등과 함께 쓰이고 있는 것임)의 오월춘추(吳越春秋) 부차(夫差)내전(內傳)에 의하면, 손무(孫武)는 참언(讒言)을 받아서 사직원(辭職願)을 냈다고 하고, 그 후의 오(吳)에 관한 사서(史書)에서는 손무(孫武)에 관한 기록이 도절(途絶)되었다고 했고, 부차(夫差)는 그 후로부터 더욱 교만해져서 오자서(伍子胥)를 자살로 몰고 갔다고 했으며(伍子胥 참조), 그리고 또 손무(孫武)도 살해당했다거나, 혹은 은거하면서 실전경험을 접목한 손자병법(孫子兵法)을 개량했다는 등, 여러 가지 소문이 난무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묘(墓)도 확실히 알 수 없으며, 혹은 소주(蘇州)의 북쪽에 있는 능묘(陵墓)가 그의 묘라는 설도 있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다 또 사실, 그가 과연 실존인물이었던가에 대한 논쟁이 과거부터 내려왔는데, 그 이유는 사기(史記) 이전, 그러니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 유력한 고적(古籍) 등에 그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하여 또 그것을 의심하는 자들은 사기(史記) 등, 고문서(古文書)들의 진실성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가졌다고 하며, 그리하여 또 그 손무(孫武)가 가공의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청조(淸朝) 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력한 설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랬던 것이 1972년에 산동(山東)성(省-臨沂県銀雀山漢墓)에서 손빈(孫臏)의 병법서(孫臏兵法)인 죽간(竹簡)이 발견됨에 따라서 손무(孫武)의 손자(孫子 또는 孫子兵法)와는 구별된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것으로 다시 손무(孫武)가 실재인물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앞에서도 밝혔듯이 그의 사적(事績)에 관한 사실성(史實性)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므로, 다만 참고만 바랍니다.









 <孫武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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