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9)


 <장강(長江) 황하(黃河) 문화>


<참고도>


 


 黄河 流域


 上流域


 中流域


下流域


紀元前8000年以前


 


 


玉蟾岩遺跡


仙人洞・呂桶環遺跡


 


 


7000~6000


 


 


彭頭山文化


 


 


 


6000~5000


 


 


湯家崗文化


城背渓文化


 


 


5000~

4000


仰韶文化


 


 


馬家浜文化


河姆渡文化


4000~3000


 


大渓文化


崧沢文化


 


良渚文化


3000~2000


竜山文化


宝墩遺跡(龍馬古城)


屈家嶺文化


三星堆遺跡


石家河文化


2000~1000


二里頭文化(夏?)


馬橋文化


 


二里頭文化


 


 


二里岡文化(殷遷都前)


二里岡文化


 


 


殷遷都後




呉城文化


湖熟文化


 








 


1000以後


巴蜀


 


呉越

 

 <개요>

 장강(長江) 문명(文明)은 중국의 장강(長江) 유역에서 일어났던 고대문명의 총칭이며, 황하(黃河) 문명과 함께 중국문명의 대표적인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시기(時期)는 대충 기원전 1000년 전 정도까지가 그 범위에 들어가며(단, 문명의 추정 년대에 관해서는 100년 단위의 誤差가 있음), 나중의 초(楚)와 오(吳) 그리고 월(越) 등의 선조(先祖)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황하(黃河) 문명은 황하(黃河)의 중, 하류 유역에서 번영했던 고대문명으로, 황하의 범람원(汎濫原)에서 농업을 개시했었고, 그리하여 그 황하의 치수(治水)와 관개(灌漑)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강화했으며, 그로서 발전 등을 이루었던 문명이었다. 그리고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앙소(仰韶) 문화를 거쳐서 은(殷), 주(周)의 청동기(靑銅器)문화로 발전했으며, 그리고 또 근래 동아시아의 역사교과서에서는 그 황하 문명을 <세계4대문명> 중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많지만, 그러나 현재에는 장강(長江) 문명과 요하(遼河) 문명 등, 여러 가지의 문명들이 차례로 중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표기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장강(長江), 황하(黃河) 문명>으로 소개하고 하고 있으며, 그리고 또 이야기가 나온 차에 요하(遼河) 문명에 대해서도 간단히 기술하면, 그것은 만주(滿洲)의 남부와 중국 동북(東北)부의 요하(遼河) 유역에서 일어났던 중국의 고대문명 중 하나로, 기원전 6200년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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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황하(黃河) 문명 ※단, 개요는 앞에서 설명되었으므로 생략함.

<황하유역 참고 도>

<황하유역의 諸 문화 참고도>

 5) 앙소(仰韶) 문화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또는 기원전 4800년에서 기원전 2500년)
 유적지는 하남성(河南省) 면지(澠池=미안치-錝池라고 쓰인 곳도 있으므로, 참고바람)현 앙소촌(仰韶村)
 유물은 채도(彩陶-바탕에 彩色을 한 토기)를 특징으로 함.

 1) 전기(前期)는 기원전 4800년경으로 보고 있으며, 그때는 홍도(紅陶)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대표유적은 섬서성 서안(西安)시 반파(半坡)였고, 앙소(仰韶) 반파(半坡) 유형문화로 불린다. 그리고 또 모계(母系)제였으며, 농촌의 계층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녹노(轆轤-도르래 또는 돌림판)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앙소묘저구류형(仰韶廟底溝類型) 문화도 나타났다.

 2) 후기(後期)는 기원전 3500년 이후로 생각되고 있으며, 반파후기유형(半坡後期類型), 서왕촌(西王村)유형, 대사공(大司空)유형, 진왕새(秦王塞)유형 해서, 4종의 문화로 대별(大別)된다. 그리고 그때쯤부터는 빈부(貧富)의 격차도 생기고 있었으며, 사회의 분업과 계층화가 진행되었다.


 앙소(仰韶) 인(人)들의 자급자족(自給自足)생활은 다양했으며, 그들은 조(粟)를 주로 경작했지만, 그러나 보리나 쌀도 경작했다. 그러나 그 농업형태의 성질에 관해서는 소전(燒畑-火田)이었던가, 아니면 영속(永續)적인 집약(集約)농업이었던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의 소지가 남아있다.

 그리고 또 역시, 그들도 돼지와 소, 그 외에도 양(羊)이나 산양(山羊)까지도 사육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식육(食肉)의 대부분은 수렵(狩獵)과 어업(漁業)에 의존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들은 또 석기(石器)에서 아주 큰 발전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비록 원시적이기는 했지만
 양잠(養蠶)의 가능성도 매우 높다.

 그리고 또 그들의 채도(彩陶)는 유명하며, 그때의 장인(匠人 또는 陶工)들은 아름다운 백색과 적색 그리고 흑색의 채도(彩陶)에다 사람의 얼굴이나 동물 또는 기하학(幾何學)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었다. 하지만 그들은 후세의 용산(龍山) 문화와는 달리, 녹노(轆轤-돌림판)는 사용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또 발굴조사에 의하면, 아이들이 채문토기(彩文土器)의 항아리에 넣어져서 매장되었던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그리고 또 아래는 앙소(仰韶) 문화 중에서도 특별한 몇 시기를 소개하는 것이므로 참고바랍니다.

 반파(半坡)기(期)- 기원전 4800년에서 기원전 4200년경. 중원(中原)
 묘저구(廟底溝)기- 기원전 4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경. 반파(半坡)의 후계(後繼)
 마가요(馬家窯)기- 기원전 33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경. 감숙성(甘肅省), 청해성(靑海省) 등
 반산(半山)기- 기원전 2700년에서 기원전 2300년경. 마가요의 후계
 마창(馬廠)기- 기원전 24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경.

<일명 각화부호(一名 刻畵符號)들>


 6) 후강(後岡) 문화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4000년경.
 대표유적은 하남성(河南省) 안양 시(安陽市) 후강(後岡)
 북신(北辛) 문화를 계승해서 발전했던 문화였다.

 7) 대문구(大汶口) 문화
 



<태안 시에 있는 泰山>

 <브리태니커 인용> 다원커우<Dawenkou (웨)Tawênk'ou> 문화(Culture)중국 신석기시대 후기의 문화. 주로 산둥[山東]과 장쑤[江蘇] 북부에 분포되어 있으며, 1959년 산둥 타이안[泰安]의 다원커우[大汶口]에서 그 흔적이 처음 발굴되었다. 다원커우 문화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비교적 체격이 커서 남자의 평균신장이 173㎝나 되었으며 그들간에는 위턱의 어금니를 뽑아내는 풍습이 성행했다. 일반적으로 동이족(東夷族)의 선조로 여겨지고 있다. 그들은 대단히 정교한 석기를 만들었는데 도끼나 구멍을 파는 데 쓰이는 평날도끼·끌·자귀·정 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토기제작도 발달하여, 붉은채색토기·검은채색토기·회색토기 외에도 청회색토기와 흰색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대부분 단색(單色)에 무늬가 없는 것들이지만 구멍을 뚫거나 그림을 새긴 것, 여러 색의 무늬를 넣은 것 등도 간간이 섞여 있다. 원시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는 입이 큰 모양의 준(尊:술그릇)도 출토되었다. 공예품 제작기술도 정교하여, 상아를 깎아 만든 통이나 빗, 그리고 옥도끼나 옥구슬 등의 공예품들은 대단히 수준높은 것들로 평가되고 있다. 다원커우 문화의 유적 가운데에는 씨족의 공동묘지가 있는데 묘의 배열이 가지런하며 모두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있다. 대부분 개인묘이지만, 간혹 부부간의 합장형태도 보인다. 나무관을 사용한 예가 많고, 커다란 묘에는 부장품이 100~200점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옥기(玉器)·상아조각·귀갑(龜甲)·악어가죽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묘의 부장품에는 돼지머리가 들어 있기도 한데, 그 수가 묘 하나당 10~20여 개에 이른다. 일반적인 묘에는 몇 가지의 조잡한 토기나 석기(石器)만이 부장되어 있는 것과 비교해볼 때, 당시에 이미 명확한 빈부의 격차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화는 BC 4000년경이나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시작되어 BC 2600년경을 전후로 하는 시기에 룽산 문화[龍山文化]로 넘어갔다.

 기원전 4300년에서 기원전 2400년경.산동(山東)성 영양현(寧陽縣) 보두촌(堡頭村)에서 처음으로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나중에는 산동성 태안 시(泰安市) 대문구(大汶口)에서도 유적이 발견되었고, 그것이 대표유적이 되었다. 전기(前期)에는 홍도(紅陶)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후기에는 흑도와 회도(灰陶)가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특히, 그 후기의 난각(卵殼-알 껍질)흑도(黑陶) 고병배(高柄杯)는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후기의 용산(龍山) 문화로 승계되었다.


<일조 시(日照市) 거현(莒県)에서 발굴된 도기>

<출토된 도기에 그려진 문양들>

 
 8) 용산(龍山) 문화

 기원전 25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경. 중국중앙연구원 역사어언(語言)연구소에 의해서 1930년, 산동성 장구(章丘)현에서 발견되었던 흑도(黑陶-흑색토기)와 회도(灰陶)를 특색으로 했던 문화였다. 그리고 그 흑도(黑陶)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흑색의 토기로, 제작 시에 녹노(轆轤)가 사용되었으며, 소성(燒成)온도는 약 1000도 이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후기에는 동기(銅器)의 주조(鑄造)도 행해졌던 것으로 보이며, 중원(中原)용산(龍山)문화<=섬서(陝西), 진남예서(晋南予西), 하남(河南), 산동(山東)용산문화>와 산동(山東)용산 문화로 구분된다. 그리고 또, 그 중원(中原)용산 문화는 앙소(仰韶) 후기 문화를 승계했으며, 회도(灰陶)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또 그때부터 동물의 뼈(肩胛骨-어깨뼈)를 태운 후에 그 균열 상태를 보고 점을 쳤던 것으로 생각되며, 산동(山東) 문화는 대문구(大汶口) 문화를 승계해서 흑도(黑陶)가 주류를 이루었다.

 

<난각도(卵殼陶)로 만든 고병배(高柄杯) 山東龍山文化出土品>

<규(鬹), 세발솥 조리기(調理器) 山東龍山文化出土品>

<하남 용산 문화 출토 도기에 그려진 그림>

<협서 문화에서 출토된 뼈로 만든 비녀(骨笄)>

<산동 문화에서 발견된 그림 문자>

 
 9) 이리두(二里頭) 문화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1600년경(또는 2100년에서 1500년). 1959년, 하남성 언사 시(偃師市) 이리두(二里頭)에서 발견되었던 유적으로, 유적지의 넓이는 사방(四方) 약 2킬로였고, 그 중심부에는 2개의 궁전(宮殿)적(跡)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유적의 사람들은 진남예서용산(晋南予西龍山) 문화와 하남(河南)용산 문화를 승계했으며, 청동(靑銅) 주조(鑄造)의 기술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궁전(宮殿)적(跡)>

<이리두 문화 圖>

 
 이리두(二里頭) 유적은 언사시(偃師市)의 서쪽에 있는 이수(伊水)와 용수(溶水) 사이에 위치하며, 초기왕조시대의 초기 도시 유적이다. 그리고 또 그곳은 하(夏)왕조의 후기도시였다는 설(說)로 인해서 주목되었으며, 그곳에는 궁전 유적 외에도 청동기를 제작했던 곳이라거나 골기(骨器)의 제작 장소도 있었고, 주거지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성벽(城壁)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출토품 중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문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청동기였고, 그것은 또 바로 그곳이 청동기문화의 발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의의는 큰 것이었다.

 1984년부터 북경대학의 역사계 고고(考古)교연실(敎硏室)에서 노서남가택지방(魯西南渮澤地方)과 예동상구지방(豫東商丘地方)을 조사 발굴했고, 1981년부터 1987년까지는 예북(豫北)의 신향(新鄕)과 안양(安陽)지방을 조사 발굴했다. 그리고 예북지방이 장하형선상 문화(漳河型先商文化)와 이리두 문화의 인접지대였다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이리두 문화 기에는 장하형선상 문화와 악석(嶽石) 문화 그리고 이리두 문화 그 3자(者)가 황하의 중하류에 정립(鼎立)했던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그리고 또 이리강(二里岡) 하층 기(下層期)에는 장하형선상 문화가 남하(南下)를 개시했으며, 그리하여 우선은 서쪽의 이리두 문화를 흡수한 다음에 동쪽의 악석(嶽石) 문화를 흡수했다.

 그런데 그 상황은 거의 은(殷=商)이 하(夏)를 멸했던 시기와 부합(符合)하기 때문에, 이리강(二里岡) 문화가 조(早=전기) 상(商)의 문화였으며, 이리두 문화는 하(夏) 문화였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증명되게 되었다고 한다.(북경대한 고고학계 부교수:劉緒・徐天進의 三代文明의探索에서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문화들이 있었으나, 그러나 문화에 대한 소개는 이것으로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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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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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8)


 <장강(長江) 황하(黃河) 문화>



<참고도>


 


 黄河 流域


 上流域


 中流域


下流域


紀元前8000年以前


 


 


玉蟾岩遺跡


仙人洞・呂桶環遺跡


 


 


7000~6000


 


 


彭頭山文化


 


 


 


6000~5000


 


 


湯家崗文化


城背渓文化


 


 


5000~

4000


仰韶文化


 


 


馬家浜文化


河姆渡文化


4000~3000


 


大渓文化


崧沢文化


 


良渚文化


3000~2000


竜山文化


宝墩遺跡(龍馬古城)


屈家嶺文化


三星堆遺跡


石家河文化


2000~1000


二里頭文化(夏?)


馬橋文化


 


二里頭文化


 


 


二里岡文化(殷遷都前)


二里岡文化


 


 


殷遷都後




呉城文化


湖熟文化


 








 


1000以後


巴蜀


 


呉越

 

 <개요>

 장강(長江) 문명(文明)은 중국의 장강(長江) 유역에서 일어났던 고대문명의 총칭이며, 황하(黃河) 문명과 함께 중국문명의 대표적인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시기(時期)는 대충 기원전 1000년 전 정도까지가 그 범위에 들어가며(단, 문명의 추정 년대에 관해서는 100년 단위의 誤差가 있음), 나중의 초(楚)와 오(吳) 그리고 월(越) 등의 선조(先祖)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황하(黃河) 문명은 황하(黃河)의 중, 하류 유역에서 번영했던 고대문명으로, 황하의 범람원(汎濫原)에서 농업을 개시했었고, 그리하여 그 황하의 치수(治水)와 관개(灌漑)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강화했으며, 그로서 발전 등을 이루었던 문명이었다. 그리고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앙소(仰韶) 문화>를 거쳐서 은(殷), 주(周)의 청동기(靑銅器)문화로 발전했으며, 그리고 또 근래 동아시아의 역사교과서에서는 그 황하 문명을 <세계4대문명> 중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많지만, 그러나 현재에는 장강(長江) 문명과 요하(遼河) 문명 등, 여러 가지의 문명들이 차례로 중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표기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장강(長江), 황하(黃河) 문명>으로 소개하고 하고 있으며, 그리고 또 이야기가 나온 차에 요하(遼河) 문명에 대해서도 간단히 기술하면, 그것은 만주(滿洲)의 남부와 중국 동북(東北)부의 요하(遼河) 유역에서 일어났던 중국의 고대문명 중 하나로, 기원전 6200년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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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황하(黃河) 문명 ※단, 개요는 앞에서 설명되었으므로 생략함.
 

<황하유역 참고 도>

<황하유역의 諸 문화 참고도>


 1) 배리강 문화(裴李崗文化-기원전 7000년?- 기원전 5000년?)의 대표 유적은 하남성(河南省) 신정 현(新鄭縣) 배리강(裴李崗-위 그림 위치 참조)에 있으며, 원형(圓形) 또는 방형(方形)의 수혈식(竪穴式-땅 표면에 수직으로 파서 지은 고대인들의 주거지) 주거생활을 했었고, 조(粟) 등의 밭농사(畑作農業)가 행해졌다. 그리고 또한 광(光)을 낸(입힌) 홍갈색(紅褐色)의 도기(陶器)와 마제석기(磨製石器) 등을 사용했던 특징이 있었으며, 인더스문명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배리강 유적지>


 그리고 또 그곳은 1977년에 발견되었으며, 주거지와 그릇을 만들었던 곳 그리고 또 묘지(여성의 묘 등) 등이 발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서, 그 규모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제법 문화생활을 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고 하며, 그리고 또 돼지(豚)와 개도 키웠으며, 고대의 피리(笛)나 미(未)해독(解讀)의 가호계각문자(賈湖契刻文字) 등도 발견되었던 것으로 해서, 고대 최고(最古)의 유적 중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고 한다.

 

<출토된 도기의 예>


 ※ 가호계각문자는 가호유적(賈湖遺跡-裴李崗文化遺跡)에서 발견되었던 선사시대의 유물에 새겨졌던 16개의 표시를 말함.

<가호계각문자>

 

 2) 노관대(老官台) 문화

 기원전 6000년?- 기원전 5000년? 또는 3000년?. 대표유적은 섬서성(陝西省) 화현(華縣)의 노관대(老官台)이며, 원형(圓形)의 수혈식(竪穴式) 주거생활을 했었고, 조(粟) 등의 전작(畑作)농업이 행해졌다. 암홍색(暗紅色)의 협사도(夾砂陶)를 특색으로 했다.

 

<섬서성 위치도>

<위남시(渭南市)의 위치도-화현은 그 안에 있음>

<협사도의 예>


 노관대(老官台) 문화는 중국 북부(華北)의 황하 유역에서 발견되었던 신석기시대의 문화로, 섬서성(陝西省)에서 발견되었던 것 중에서는 현재까지 최고(最古)의 신석기문화였다. 그리고 또 그것은 1950년대 후반에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그 위치는 화현(華縣) 서남(西南-渭河의 支流・西沙河 沿岸) 쪽에 있는 노관대(老官台) 유적이 그것이다.

 그리고 또 그곳은 문화유형유적 중에서는 최초로 발견되었던 곳이란 것에 의의가 있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출토된 문물(文物)이 비교적 적었고, 하지만 또 그보다도 나중에 감숙성(甘肅省) 태안(泰安)현의 대지만(大地灣)유적에서 대량의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 노관대(老官台)문화를 차라리 대지만(大地灣)유적에 포함시켜서, 그 전체를 <대지만(大地灣)문화>라고 부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대지만(大地灣)유적에서는 복수(複數) 시대의 문화 유물이 나왔기 때문에, 차라리 서안 시(西安市)의 임동구(臨潼區)에서 발견된 백가촌(百家村)유적에 포함시켜서, 그래서 그 전체를 백가촌(百家村) 문화라고 부르자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하지만 그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중이며, 그래서 또 그것을 총합적으로 미루어볼 때, 그 노관대(老官台) 문화는 2가지의 단계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그 전기(前期)는 대지만(大地灣) 일기(一期)를 대표하는 약 7300년 전의 것이었다는 것. 그리고 또 그 후기(後期)는 섬서성(陝西省) 보계(寶鷄)시에서 출토되었던 북수령하층(北首嶺下層)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약 7300년부터 7000년 전 사이의 것이 그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그곳은 그 후에 그곳에서 생겨났었던 채도(彩陶) 등을 특색으로 했던 신석기문명 앙소(仰韶)문화의 기원이었던 것으로 해서 깊은 의의가 있다고 하겠으며, 그리고 또 당시의 사람들은 거의가 조(粟) 등의 잡곡류를 재배했었고, 돼지나 개를 키우면서 정주(定住)하는 집락(集落)생활을 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당시의 공구(工具)는 마제석기(磨製石器)가 주류였지만, 타제석기(打製石器)나 세석기(細石器) 등도 조금씩 발견되고 있으며, 그리고 또, 그 당시에는 도기(陶器)의 제작도 시작되어서, 그 수는 많지가 않았겠지만, 그러나 비교적 저온(低溫)에서 구운 것을 사용해서 썼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고, 그리고 채도(彩色土器)는 아직 초보단계였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3) 북신(北辛) 문화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약 5000년? 경(또는 기원전 5300년?에서 기원전 4100년 경).
 대표유적은 산동(山東)성 등(滕)현 북신(北辛).
 황갈색의 도기(陶器)를 특징으로 했던 문화였다.


<산동성>

<산동성 조장시(棗荘市=滕州市=滕縣) 위치도> 


 1964년, 산동성 남부에 있는 등주시(滕州市-당시에는 滕縣)의 북신가도(北辛街道)에서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考古)연구소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대문구(大汶口) 문화 유적층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그 일부가 1978년부터 1979에 걸쳐서 발굴되었으며, 그 결과 황갈도(黃褐陶-모래를 섞은 흙을 낮은 온도에서 구운 陶器)와 홍도(紅陶-結晶이 작은 진흙을 높은 온도에서 구운 陶器)로 만든 솥 등, 조리기(調理器)가 발견되었으며, 그 일부에서는 회도(灰陶-높은 온도에서 구운 陶器)와 흑도(黑陶)도 출토되었다. 그리고 또한, 돌도끼와 돌로 만든 낫(石鐮) 등에 사용했던 마제석기와 타제석기 그리고 골각기(骨角器) 등도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시작된 연구로부터, 그 당시에 채집과 함께 수렵도 행해졌으며, 거기다 잡곡을 재배하는 원시적인 농업과 함께 돼지와 수우(水牛-물소)도 사육했음을 알게 되었다.


<북신 문화 유적지 원경>

<출토 유물의 예>

 

 4) 자산(磁山) 문화

 기원전 6000년?- 기원전 5000?(또는 기원전 5400년에서 기원전 5100년)
 대표유적은 하북성(河北省) 무안현(武安縣) 자산(磁山)
 원형과 타원형의 수혈식 주거에서 살았으며, 조(粟) 등의 밭농사가 행해졌다.
 특징은 홍갈색의 협사도

<하북성 한단시(邯鄲市=武安市) 위치도>


 자산(磁山) 문화는 남접(南接)하는 하남성(河南省)에서 발견되었던 배리강(裴李崗) 문화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자산(磁山) 문화 = 배리강(裴李崗) 문화> 또는 그 역(逆)으로도 칭해진다. 그런 한편, 동접(東接)하는 산동성에서 발견되었던 북신(北辛) 문화와도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자산(磁山) 문화유적은 8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해있으며, 정형도기(鼎形陶器)와 함께 돼지, 개, 닭 등을 사육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또 그 외에도 어로(漁勞)활동의 흔적도 발견되었으며, 저장(貯藏)목적의 구멍(窖穴)도 500곳 이상이나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곳에다 곡식을 저장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최대 규모의 것은 깊이 5미터=1000킬로 정도 저장 추측)


<출토 유물>


 5) 앙소(仰韶) 문화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또는 기원전 4800년에서 기원전 2500년)
 유적지는 하남성(河南省) 면지(澠池=미안치-錝池라고 쓰인 곳도 있으므로, 참고바람)현 앙소촌(仰韶村)
 유물은 채도(彩陶-바탕에 彩色을 한 토기)를 특징으로 함.

 1) 전기(前期)는 기원전 4800년경으로 보고 있으며, 그때는 홍도(紅陶)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대표유적은 섬서성 서안(西安)시 반파(半坡)였고, 앙소(仰韶) 반파(半坡) 유형문화로 불린다. 그리고 또 모계(母系)제였으며, 농촌의 계층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녹노(轆轤-도르래 또는 돌림판)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앙소묘저구류형(仰韶廟底溝類型) 문화도 나타났다.

 2) 후기(後期)는 기원전 3500년 이후로 생각되고 있으며, 반파후기유형(半坡後期類型), 서왕촌(西王村)유형, 대사공(大司空)유형, 진왕새(秦王塞)유형 해서, 4종의 문화로 대별(大別)된다. 그리고 그때쯤부터는 빈부(貧富)의 격차도 생기고 있었으며, 사회의 분업과 계층화가 진행되었다.


 

 
 <앙소 문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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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7)


 <장강(長江) 황하(黃河) 문화>


<참고도>


 


 黄河 流域


 上流域


 中流域


下流域


紀元前8000年以前


 


 


玉蟾岩遺跡


仙人洞・呂桶環遺跡


 


 


7000~6000


 


 


彭頭山文化


 


 


 


6000~5000


 


 


湯家崗文化


城背渓文化


 


 


5000~

4000


仰韶文化


 


 


馬家浜文化


河姆渡文化


4000~3000


 


大渓文化


崧沢文化


 


良渚文化


3000~2000


竜山文化


宝墩遺跡(龍馬古城)


屈家嶺文化


三星堆遺跡


石家河文化


2000~1000


二里頭文化(夏?)


馬橋文化


 


二里頭文化


 


 


二里岡文化(殷遷都前)


二里岡文化


 


 


殷遷都後




呉城文化


湖熟文化


 








 


1000以後


巴蜀


 


呉越

 

<중국을 횡단하는 장강>

 1. 장강(長江) 문명 

<장강 유역의 신석기시대의 중요 유적>


 * 굴가령(屈家嶺) 문화-호북성(湖北省) 경산현(京山縣) 屈家嶺 유적. 기원전 3000년?-기원전 2500년?. <대계(大溪) 문화>를 승계했으며, 녹로(轆轤-도르래. 그러나 여기서는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돌림판)를 사용한 흑도(黑陶)가 특징이었다. 그리고 하남지방(河南地方)의 황하(黃河) 문명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호북성 위치도>

<형문 시(荊門市=京山縣) 위치도>

 
 * 석가하(石家河) 문화-<굴가령 문화>로부터 발전했으며, 호북성 천문(天門) 시, 석가하에 대규모적인 도성(都城)을 축조했다. 기원전 2500년경을 경계로 해서 굴가령과 구별된다. 그리고 그 도성(都城)은 남북으로 1.3Km, 동서로 1Km나 되었던 아주 컸던 것으로, 상술(上述)의 황하(黃河) 유역 부족들 간의 항쟁 시기는 바로 그 시기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호북 성 天門 市 위치도>

<삼족토기-말기 출현>


 * 하모도(河姆渡) 문화-절강성(浙江省) 여요 시(余姚市) 河姆渡 유적. 기원전 5000년?-기원전 4000년?. 하류(下流) 역(域)에서는 최고(最古)의 도작(稻作)이 행해졌으며, 수렵(狩獵)과 어로(漁撈) 그리고 돼지의 가축화도 함께 행해졌다.

<절강 성 위치도>

<영파 시(寧波市=余姚市) 위치도>


 
 * 마자방 또는 마가병(馬家浜 또는 마가빈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더욱 정확하게는 마지아방이며, 특히 浜은 작은 하천인 小川의 의미를 가짐) 문화-절강성(浙江省) 가흥 시(嘉興市) 馬家浜. 기원전 5000년?-기원전 3800년?. 하모도(河姆渡) 문화를 승계해서 더욱 발전시켰다. 관개(灌漑)가 처음으로 행해졌고, 홍도(紅陶)가 특징이었다.


<가흥 시 위치도>

<장강 하류의 신석기시대 중요 유적 군>

  
 * 숭택(崧澤) 문화-상해 시(上海市) 청포구(靑浦區) 崧澤村.기원전 3800년?-기원전3500년?. 옥(玉)으로 팔찌 등, 장식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함.

<상해 시>

<청포구 위치도>

<1958年에 출토된 인문도편(印紋陶片)>

<옥 장식품 중 하나>

 
 * 양저(良渚) 문화-절강성(浙江省) 여항시(余杭市) 良渚鎭. 기원전3500년?-기원전2200년?. 馬家浜과 숭택(崧澤) 문화를 이어받았으며, 다수(多數)의 옥기(玉器) 외에도 견(絹)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또 분업(分業)과 계층화(階層化)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순사(殉死) 자를 동반한 묘(墓)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또한 황하(黃河) 문명의 산동용산(山東龍山) 문화와 상호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같은 시기에 함께 쇠퇴했던 것으로 보아서, 같은 공통의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항주 시(杭州市=余杭市) 위치도>

<양저 유적 군 위치도>

<生絹=silk raw의 예>

<良渚文化 時期의 玉璧>

<反山12호 묘에서 출토된 옥종왕(玉琮王) 上의 神의 문장(紋章)>

 
 * 오성(吳城) 문화-강서성(江西省) 장수 시(樟樹市) 吳城鎭.기원전 1400년?- 기원전 1000년?. 황하(黃河) 문명과는 이질적인 청동기를 특징으로 했으며, 원시적인 자기(磁器) 등도 출토되었다.

<강서 성의 위치도>

<의춘 시(宜春市=樟樹市)의 위치도> 


 3) 사천(四川) 문명(古蜀文明)

 * 보돈(寶墩) 문화-성도 시(成都市) 신진현(新津縣) 용마향(龍馬鄕)寶墩村. 기원전 2500년?-기원전 1700년?(龍山文化). 신석기시대의 성벽으로 둘러싸였던 집락(集落)이 성도(成都)평원의 민강(岷江)선상지(扇狀地)에 복수(複數)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중의 최대 유적이었던 보돈(寶墩) 유적이 1990년대에 발견되어서 계속 발굴 중에 있다.


<성도 시 위치도>

<岷江 유역과 성도의 위치도>
 

 * 삼성퇴(三星堆) 문화-사천성(四川省)의 덕양 시(德陽市) 광한 시(廣漢市) 남흥진(南興鎭) 유적으로 대표되며, 기원전 1700년?-기원전 1200년?(夏晩期에서 商後期). 대량의 청동기가 출토되었으며, 그 외에도 눈이 툭 튀어나온 가면(얼굴 상)과 종목(縱目-아래로 늘어진 눈)가면 그리고 황금지팡이 등이 출토되었고, 자안패(子安貝=紫貝-몸에 지니면 順産한다는 부적) 또는 상아(象牙) 등이 나왔던 것으로 보아서 당시, 권력 계층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또, 그 청동기에 관해서는 그 앞의 것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으로 해서, 아마도 황하(黃河) 유역으로부터 그 기술의 유입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덕양 시의 위치도>

<광한 시의 위치도>

<종목 가면>

<눈이 돌출한 얼굴 상>
 

 * 금사(金沙)・12교(十二橋) 문화- BC 1200~500년. 商 後期에서 春秋 後期, 위치는 成都市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 5km에 위치함.

<금사 유적 박물관 내부>

<백미(白眉), 태양신조금박(太陽神鳥金箔)이 출토된 곳을 표시하는 곳>


 * 만기 촉(晩期 蜀) 문화- BC 500~316년. 春秋 晩期~戰國 期

 ※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벼의 전파도-단, 해석은 하지 않음


<위의 동그라미가 표시하는 곳이 稻作의 시작점으로 본다고 함 >


그리고 참고로, 위의 그림은 어떻게든 <한반도>를 피해 보고자 하는 일본의 노력으로 보임

그것은 일본이 한반도와의 종속성에서 탈피하려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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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6)

 <장강(長江) 황하(黃河) 문화>


 <참고도>


 


 黄河 流域


 上流域


 中流域


下流域


紀元前8000年以前


 


 


玉蟾岩遺跡


仙人洞・呂桶環遺跡


 


 


7000~6000


 


 


彭頭山文化


 


 


 


6000~5000


 


 


湯家崗文化


城背渓文化


 


 


5000~

4000


仰韶文化


 


 


馬家浜文化


河姆渡文化


4000~3000


 


大渓文化


崧沢文化


 


良渚文化


3000~2000


竜山文化


宝墩遺跡(龍馬古城)


屈家嶺文化


三星堆遺跡


石家河文化


2000~1000


二里頭文化(夏?)


馬橋文化


 


二里頭文化


 


 


二里岡文化(殷遷都前)


二里岡文化


 


 


殷遷都後




呉城文化


湖熟文化


 








 


1000以後


巴蜀


 


呉越


 <개요>

 장강(長江) 문명(文明)은 중국의 장강(長江) 유역에서 일어났던 고대문명의 총칭이며, 황하(黃河) 문명과 함께 중국문명의 대표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기(時期)는 대충 기원전 1000년 전 정도까지가 그 범위에 들어가며(단, 문명의 추정 년대에 관해서는 100년 단위의 誤差가 있음), 나중의 초(楚)와 오(吳) 그리고 월(越) 등의 선조(先祖)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황하(黃河) 문명은 황하(黃河)의 중, 하류 유역에서 번영했던 고대문명으로, 황하의 범람원(汎濫原)에서 농업을 개시했고, 그리하여 그 황하의 치수(治水)와 관개(灌漑)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강화했으며, 그것으로 발전 등을 이루었던 문명이었다. 그리고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앙소(仰韶) 문화를 거쳐서 은(殷), 주(周)의 청동기(靑銅器)문화로 발전했으며, 그리고 또 근래 동아시아의 역사교과서에서는 그 황하 문명을 <세계4대문명> 중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많지만, 그러나 현재에는 장강(長江) 문명과 요하(遼河) 문명 등, 여러 가지의 문명들이 차례로 중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표기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장강(長江), 황하(黃河) 문명>으로 소개하고 하고 있으며, 그리고 또 이야기가 나온 차에 요하(遼河) 문명에 대해서도 간단히 기술하면, 그것은 만주(滿洲)의 남부와 중국 동북(東北)부의 요하(遼河) 유역에서 일어났던 중국의 고대문명 중 하나로, 기원전 6200년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요하 유역>

<중국을 횡단하는 장강>

 
 1. 장강(長江) 문명

 
20세기 전반(前半)에 황하(黃河) 문명의 <앙소(仰韶)문화>가 발견되었던 이래(以來), 그 황하(黃河) 유역에서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던 것으로 해서, 중국의 문명은 그 <황하문명>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하지만 1973년과 1978년의 발굴조사에서 발견되었던 절강성(浙江省)의 여요시(余姚市) <하모도(河姆渡-허무두)유적>에 의해서 그러한 의견은 일축되었고, 그곳에서 대량 발굴되었던 쌀과 벼 등으로 벼농사의 흔적을 발견했으며, 주거(住居)는 고상식(高床式-다락마루 식) 그리고 시대는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5000년경으로 추정했다. 그 결과, 그때까지의 학설들은 전면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황하(黃河) 문명>과 <장강(長江) 문명>이 전혀 다른 계통이었음도 명백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발견되었던 <요하(遼河) 문명> 등으로 해서, 현재에는 요하(遼河) 주변과 황하(黃河)의 상중하 유역 그리고 장강(長江)의 상중하 유역으로 각각 그 문화들을 분류하고 있으며, 그들은 또 서로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면서, 그리고는 또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상식 주거의 예> 

 
 1) 특징

 장강(長江) 문명의 특징은 초기단계에 벼농사가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밭농사(田作) 중심이었던 <황하(黃河) 문명>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양(兩) 문명은 독자적인 농경(農耕)을 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장강(長江) 문명>에서 발견되었던 그 벼들로 미루어서, 벼의 원산지는 거의 장강(長江) 유역이란 것이 확정이 된 상태이다.(그것이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說이 있으며, 하지만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과는 그 종류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하지만, 일본의 주장일 가능성이 큼)

 그리고 그 문명은 중류(中流) 역(域)의 <굴가령(屈家嶺) 문화(기원전 3000년?-기원전 2500년?)>와 하류(下流) 역(域)의 <양저(良渚) 문화(기원전 3300년?-기원전 2200년?)>의 시대에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하였으며, 그 후로는 쇠퇴(衰退)하였는데, 그리하여 그때부터 중류(中流) 역(域)에서는 황하(黃河) 유역의 <이리두(二里頭)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또 결국 그곳은 황하(黃河) 유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정복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그리고 바로 앞에서 소개되었던 황제(黃帝)와 신농(神農) 그리고 치우(蚩尤)의 대립에 관한 전설들은 바로 그 문명들이 서로 다투었던 과정에서 탄생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중의 하나였던 <하모도(河姆渡) 유적>에서는 옥(玉)으로 만든 옥기(玉器)들과 칠기(漆器)들이 발견되었으며, 그리고 <오성(吳城) 문화(기원전 1400년?-기원전 1000년?)>에서는 자기(磁器-사기그릇)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또 <중국문화의 중요한 일익(一翼)을 담당했던 문물(文物)의 원류(源流)가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천분지>

 
 그리고 그 문명은 나중의 초(楚)와 오(吳)와 월(越)로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그리고 또 지역인 사천(四川) 분지(盆地)에서는 그렇게 오래된 문명의 발견은 없었지만, 그러나 1986년에 사천성(四川省) 광한시(廣漢市)의 <삼성퇴(三星堆) 유적>에서 대량의 청동기 등이 발견되었고, 그리하여 그곳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바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타 지역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곳은 고유의 <사천(四川) 문명>으로 분류가 되었는데, 그런데 그 <삼성퇴(三星堆) 유적>에서 괴이(怪異)한 가면들이 다수 발굴되었고, 청동(靑銅) 인상(人像)에다 금을 입힌 황금가면도 발굴되었다.

<사천성 위치도>

 
 그리하여 또 그곳은 고대 촉(蜀)의 자리였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하지만 그 촉(蜀)은 또 사기(史記)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곳은 중화(中華)문명의 시야(視野)에서 제외된 지역으로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또 유일(唯一)한 기록으로는 <진(秦)의 혜문왕(惠文王) 때였던 기원전 316년에 사마착(司馬錯)에 의해서 멸해졌고, 그때부터 진(秦)의 판도(版圖)에 들어갔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한편, 그 촉(蜀) 지역의 지역(地域)사서(史書)였던 <화양국지(華陽國志)>란 책에서 그 고대 촉에 관한 상세한 기술이 있었다지만, 그러나 그것은 상상(想像)의 산물(産物)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그랬던 것이 그 후에 그 <삼성퇴(三星堆) 유적>이 발견이 되자, 그것도 일약(一躍)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2) 그리고 아래는 그 장강(長江) 문명에 속했던 문화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이다.

 * 옥섬암(玉蟾岩) 유적(遺跡)-호남성(湖南省) 도현(道縣). 기원전 14000년?-기원전 12000년?으로 추정. 벼 또는 볍씨가 발견되었지만, 그러나 재배를 했던 것인가에 대해서는 현재 불명(不明).

<호남성 위치도>

<永州 市 위치도=道縣>

<옥섬암 유적 당시 모습>
 

 * 선인동(仙人洞-위의 그림 참조)・여통환(呂桶環) 유적-강서성(江西省) 만년현(萬年縣). 기원전 1200년경?. 재배했던 벼가 발견되었고, 그것으로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독자적인 농경(農耕)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생각함.
  

<강서성 위치도>

<만년 현 위치도>

 

 
 * 팽두산(彭頭山) 문화-호남성(湖南省) 예현(澧縣) 彭頭山 유적을 대표로 하며, 시기는 기원전 7000년?부터 기원전 5000년? 정도. 산파농법(散播農法='노가리'는 씨를 흩뿌려서 경작하는 농법)이 행해졌던 것으로 해서, 중국 최고(最古)의 수도(水稻-무논에 짓는 벼농사)가 이루어짐.


<湖南省 澧縣 위치도>

<彭頭山 遺跡의 後期層에서 発見된 丸底(底土)土器>  


 * 대계(大溪) 문화-중경 시(重慶市) 무산(巫山) 현(縣) 대계(大溪) 유적을 대표로 함. 기원전 4500년?-기원전 3300년?. 채문홍도(彩文紅陶-무늬를 넣은 붉은색 토기)가 특징이었으며, 후기(後期)에는 흑도(黑陶)와 회도(灰陶)도 등장함. 관개(灌漑)농법이 확립되었으며, 주거지(住居地)가 물이 풍부했던 강변에서 대규모 농경(農耕)을 위해서 평야지대로 이동함.

<중경 시 위치도>

<무산 현 위치도>

<대계 유적이 발견되었던 구당협(瞿塘峡)의 기문(夔門 또는 峡)>  

  

  <내용이 조금 길어서 不得已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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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5)


  4.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의 시대

 중국의 신화(神話)는 주로 한민족(漢民族)에 의해서 전해졌던 것이었지만
 그러나 다른 소수민족들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3) 요순(堯舜)의 시대

 
(3) 순(舜)

 순(舜)은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군주(君主)로, 오제(五帝) 중 한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성(姓)은 요(姚)였으며, 이름은 중화(重華)였고, 우(虞) 씨(氏)로도 불렸다.

 ※ 단, 요사(姚姒)는 순(舜)과 우(虞)를 아울러서 이르는 말이고, 요(姚)는 순(舜)의 성(姓)이며, 사(姒)는 우(虞)의 성이므로, 참고바람.

 순(舜)은 유가(儒家)에 의해서 신성시(神聖視)되었고, 요(堯)와 함께 요순(堯舜)으로 불리면서 성인(聖人)으로 숭배되었다. 그리고 또 순(舜)은 24효(孝) 중 한사람으로도 손꼽혔다.

 순(舜)은 전욱(顓頊)의 7대손(代孫)이었다고 하며,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계모(繼母)와 그의 자식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그들은 계모(繼母)가 데려왔던 그 아들에게 후계를 물려주려고 획책했고, 그래서 틈만 나면 순(舜)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순(舜)은 그것을 알고서도 자기 아버지에 대한 효(孝)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러자 또 그 명성이 높아져서 결국 요(堯)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요(堯)는 순(舜)의 인격을 알기 위해서 행동거지를 죽 지켜보다가 자신의 딸이었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순(舜)에게 강가(降嫁)시켰는데, 그러자 순(舜)은 그 두 여인에게 지극정성을 다했으며, 그 결과로 또 그 두 여인 또한 순(舜)을 정성으로 받들게 되어서, 그 후에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순(舜)의 주위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3년 후에는 순(舜)이 살던 곳이 도시(都市)가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 아황(娥皇)은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여성이며, 요(堯)의 딸이었고, 여동생 여영(女英)과 함께 순(舜)에게로 강가(降嫁)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아황(娥肓), 아황(倪皇), 후육(後育), 아맹(娥盲), 아형(娥娙)으로도 불렸으며, 성(姓)은 이기(伊祁) 씨였다. 그녀는 순(舜)이 자신의 가족들로부터 계속해서 살해 위협을 받는 것을 보고 여영(女英)과 함께 재치로서 순(舜)을 도왔다고 하며, 순(舜)이 즉위하여 천자(天子)가 되자 그녀는 후(后)가 되었으며, 여영(女英)은 비(妃)가 되었다. 그녀는 총명하고 바르기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순(舜)이 창오(蒼梧)에서 사거(死去)하자, 그녀와 여영(女英)은 상강(湘江)에서 자살했다. 그러자 그 후, 세상에는 그녀들이 상군(湘君-상강의 물귀신 또는 상강의 神)이 되었다고 전해졌다.(女英도 上記와 같음)

 하지만 그러던 중에서도 그의 원 가족들은 변함없이 그를 죽이려고 그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하루, 순(舜)이 지붕을 수리할 것이란 말을 들었던 그들은, 순(舜)이 지붕으로 올라간 사이에 아래에서 불을 질러서 순(舜)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순(舜)은 두 개의 우산(雨傘)을 새의 날개처럼 펼쳐서 그곳을 탈출했는데, 그러자 또 그들은 그에도 단념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또 그 다음에는 순(舜)이 우물 안을 청소한다고 했을 때, 그 위에다 흙을 덮어서 그를 생매장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또 순(舜)은 그 우물 벽에다 굴을 파서 그곳에서 탈출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순(舜)은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변함없이 부친(父親)에 대해서 지극한 효(孝)를 다했다고 한다.

 그러자 요(堯)가 그것을 알고 몹시 기뻐했다. 그래서 요(堯)는 순(舜)을 등용시켰고, 천하(天下)를 섭정(攝政)하게 했다. 그러자 또 그 후로 조정(朝廷)에서 간신(奸臣)들은 모두 추방되었으며, 백관(百官)들은 훌륭한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

 그로부터 20년 후, 요(堯)는 순(舜)에게 선양(禪讓)했다. 그러자 순(舜)은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서 우(禹)를 채용했고, 그러자 또 그 우(禹)는 그 일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그 후, 39년 간 제위(帝位)에 있었던 순(舜)은 결국 우(禹)에게 선양(禪讓)하고 사거(死去)했다. 그러자 순(舜)의 자손들은 주대(周代)에 우(虞)로 봉(封)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또 순(舜)은 생전에 남풍가(南風歌)라는 노래도 지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 후의 진(陳)나라 진(陣) 씨(氏)의 조상으로 알려졌고, 그리고 그 진(陳)나라로부터 나뉘어졌던 전제(田齊)의 조상으로도 알려져 있다.

 ※ 전제(田齊)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386년에 전(田) 씨(氏)가 강성여씨(姜姓呂氏)의 제(齊)를 멸하고 새롭게 세웠던 나라로, 국호(國號)는 간단하게 제(齊)로 표기하지만, 그러나 서주(西周)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여 씨(呂氏)의 제(齊)와 특히 구별하는 경우에는 전제(田齊)라고 표현함.(후술 또는 생략)

 4) 예우(羿禹)의 시대

 (1) 예(羿)는 앞에서 설명이 되었음.

 (2) 우(禹)

 



 우(禹)는 중국고대의 전설적인 제왕(帝王)으로, 하조(夏朝)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禹)의 이름은 문명(文命) 또는 대우(大禹), 하우(夏禹), 융우(戎禹) 등으로 불렸다고 하며, 성(姓)은 사(姒), 하(夏)왕조 창시 후의 씨(氏)는 하후(夏后)였다고 한다.

 그리고 우(禹)의 부(父)는 곤(鯀)이었고, 그 곤(鯀)의 부(父)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오제(五帝)의 일인(一人)이었던 전욱(顓頊)이었다고 했으므로, 우(禹)는 전욱(顓頊)의 손자였다. 그리고 또 그 전욱(顓頊)과 함께 오제(五帝) 중 한명이었던 황제(黃帝)의 후손이기도 했기 때문에, 우(禹)는 황제(黃帝)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高孫)에 해당한다.

 참고: 곤(鯀)은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로, 사기(史記)에 의하면 전욱(顓頊)이 그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스스로 포기하고 신하의 신분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요(堯)의 시대에 황하(黃河)의 범람이 잦자 그 치수(治水)를 할 사람을 구했는데, 요(堯)의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곤(鯀)을 추천했다. 하지만 9년이 지나도록 성과를 보지 못하자 요(堯)는 그 대신으로 순(舜)을 등용했다. 그러자 순(舜)이 황하(黃河)를 시찰(視察)했는데, 그때 곤(鯀)은 우산(羽山)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사람들은 순(舜)이 그 곤(鯀)을 살해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의심을 했다는데, 하지만 그 순(舜)은 곤(鯀)의 아들이었던 우(禹)에게 그 사업을 계속하도록 인계했다. 그리고 또 전설에 의하면 곤(鯀)이 처형되었던 그 우산(羽山)에서 황웅(黃熊)이 났다고 전해졌다.

 우(禹)는 후에 도산(塗山) 씨(氏)의 후손을 아내로 맞았으며, 그 사이에 계(啓)라는 아들을 두었다.

 참고1: 계(啓)는 하조(夏朝) 제2대 제(帝)로, 아들에 제(帝) 태강(太康)과 제(帝) 중강(中康)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적어도 다섯 명의 아들이 더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그는 39년간 제위에 있었고, 78세에 몰(沒)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처음에 우(禹)는 제위를 익(益)에게 물려주려고 했지만, 그러나 우(禹)가 죽자 익(益)이 제위를 포기했고, 그러자 계(啓)가 제위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러자 제후(諸侯)들도 익(益)을 떠나서 계(啓)에게로 갔고, 그리하여 계(啓)가 제위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에는 익(益)이 실제로는 제위에 올랐지만, 그러나 계(啓)가 익(益)을 죽이고 제위를 취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계(啓)는 재위(在位) 중에 제후(諸侯)였던 유호(有扈) 씨(氏)가 그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감(甘-현재의 陝西省 戶県 甘亭鎭에 해당)에서 싸워서 승리했다. 그리고 또 그 싸움 전에 계(啓)는 육경(六卿)들 앞에서 감서(甘誓)를 피로(披露)했다고 하며, 그 감서(甘誓)는 또 서경(書經)에 기록되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계(啓)가 지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있다고 하고, 그리고 또 그 유호(有扈) 씨는 바로 익(益)의 지지자였다는 설이 있다.

 참고2: 익(益)은 중국 고대 전설상의 인물로, 순(舜)과 우(禹)를 섬겼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순(舜)의 시대에서는 우<虞=山澤=山林川澤을 맡은 관리>의 직무를 맡았고, 우(禹)와 함께 치수(治水) 등의 정치를 행했다. 그리고 그 후, 우(禹)가 제위(帝位)에 오르자 그는 우(禹)를 섬겼으며, 그리고 또 그 후에 우(禹)와 함께 정치를 도맡아서 하던 고도(皋陶)가 죽자, 그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하(夏) 본기(本紀)에 의하면, 우(禹)가 죽을 때 그 제위(帝位)를 익(益)에게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익(益)은 우(禹)의 삼년 상(喪)을 마친 후, 계(啓)에게 제위를 물려주고는 기산(箕山)으로 들어가서 은거(隱居)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에는 익(益)이 정치를 잘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제후들이 계(啓)를 추대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또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그 익(益)은 제위를 물려받았지만, 그러나 계(啓)가 그를 살해하고 제위에 올랐다고도 한다.

 우(禹)는 인덕(人德)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우(禹)는 탁월한 정치능력의 소유자였다고는 했지만, 그러나 결코 스스로 교만해하거나 과시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열자(列子) 양주(楊朱) 第七>에 의하면, 그가 아버지 곤(鯀) 대신으로 치수(治水)에 임했을 때, 그 일에 빠져서 자식이나 가정도 돌보지 않았으며, 몸은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될 정도로 그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온 손발이 다 엉망이 되었던 모양이었는데, 하지만 또 그에는 [원래부터 전해져오던 <우(禹)는 반신불수(半身不隨)...>라고 묘사했던 말을, 후세인들이 합리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결과에서 지어졌던 이야기였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리고 또 시라카와(白川靜)는 산해경(山海經)에 보이는 물고기(魚)에 편고(偏枯)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에 주목해서, 우(禹)은 당초(當初) 물고기의 모습을 했던 신격(神格)이었다는 가설(假說)을 세웠으며, 그리고 또 실제로 우(禹)란 글자는 본래(本來) 석척(蜥蜴-도마뱀)과 악(鰐-악어) 그리고 용(龍)의 모습을 묘사했던 상형문자(象形文字)였
기 때문에, 그래서 그 우(禹)의 기원(起源)은 황하(黃河)에 살던 수신(水神)이었을 것이라고도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 그 편고(偏枯)라고 하는 특징을 닮은 보행(步行)방법이 바로 우보(禹步)라고 하며, 그것은 또 반신불수(半身不隨)로 인해서 비틀거린다거나, 또는 편각(片脚-외다리)으로 뜀뛰듯이 걷는 신체(身體) 기법(技法)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또 그 우보(禹步)는 도교(道敎)와 중국의 민간신앙의 의식(儀式)에서 무자(巫子-무당)가 실제로 행했다고 하며, 그것으로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했었다든지, 또는 바위를 움직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아무튼, 그랬던 우(禹)는 즉위 바로 후에 무기(武器)의 생산을 중지시켰고,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궁전의 대 증축을 보류시켰으며, 관소(關所-關門)와 시장(市場)에 이르는 제세(諸稅)를 면제했다. 그리고 또 지방에 도시를 건설했고, 번잡한 제도들을 폐지해서 행정의 간략화를 도모했다. 그러자 또 그 결과, 중국 내는 물론이었고, 외부에서까지도 조공(朝貢)을 자진해서 바쳐올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거기다 또 우(禹)는 물길(水路)을 의도적으로 바꾸는 등, 여러 하천을 정비했고, 주변의 토지를 경작해서 초목의 육성(育成)을 도모했으며, 중앙과 동서남북의 구별을 기(旗)로써 표시해서 모든 사람들이 알게 했다. 그리고 또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방식들을 답습(踏襲)해서 전국을 아홉으로 나눈 구주(九州)를 두었다고 한다.

 참고: 구주(九州)는 중국 고대에 전국을 나눈 9개의 주를 의미하며, 요순시대(堯舜時代)와 하(夏)나라 때에는 기(冀)·연(兗)·청(靑)·서(徐)·형(荊)·양(揚)·예(豫)·양(梁 )·옹(雍)이었으며, 은(殷)나라 때에는 기·예·옹·양·형·연·서·유(幽)·영(營)이었고, 주(周)나라 때에는 양·형·예·청·연·옹·유·기·병(幷)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우(禹)는 검약(儉約)정책을 폈으며, 스스로도 솔선해서 행동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우(禹)는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45년간 제위에 있었다고 하며, 절강 성(浙江省) 소흥 시(紹興市)에 있는 회계산(會稽山)에 그의 무덤 대우능(大禹陵)이 있다고 한다.

<절강성 위치도>

 
 3) 탕(湯)                              


 탕(湯)은 은조(殷朝)의 창시자로, 기원전 1600년 경의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이(履) 또는 대을(大乙) 또는 태을(太乙) 또는 성탕(成湯) 또는 성당(成唐)으로 불렸으며. 초대(初代)제(帝)였고, 하(夏) 최후의 제(帝) 걸(桀)을 추방하고 하(夏) 왕조를 멸(滅)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 걸(桀)은 폭학(暴虐)한 정치를 폈기 때문에 인심(人心)이 하(夏)를 떠났다고 하며, 그러자 또 당시 하(夏)의 신하였던 천을(天乙=湯)은 같은 명신(名臣)이었던 이윤(伊尹)의 도움을 받아서 걸(桀)을 쳤고, 이어서 멸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서경(書經)에는 그가 걸(桀)을 멸하려 했을 때, 제후(諸侯)들을 향해서 연설을 했다고 하는 <탕서(湯誓)>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며, 그 후에 천을(天乙)은 하(夏)의 우(禹), 주(周)의 문왕(文王), 무왕(武王)과 함께 성왕(聖王)으로 존경받았고, 후세에 숭배되었다.

 참고1: 걸(桀)은 하조(夏朝) 최후의 왕이었으며, 이름은 이계(履癸)였고, 일설(一說)에는 제(帝) 고(皐-夏朝의 第15代帝)의 아들<사기(史記) 등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걸(桀)의 부(父)는 제(帝) 발(發-夏朝의 第16代帝로, 桀의 父라고 하지만, 일설에는 桀의 兄이었다고 하고, 그가 즉위 했을 때, 변방의 많은 오랑캐들이 찾아와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이라고 되어있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짐심(斟尋)이란 곳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며, 공갑(孔甲) 이래(以來) 하후(夏后=)로부터 제후(諸侯)들의 배반이 계속되었는데, 그러나 걸(桀)은 덕(德)으로 정치를 하지 않고 무력으로 그 제후(諸侯)들과 민중들을 억누르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제후들과 민중들은 걸(桀)을 증오했다. 그러던 중 걸(桀)이 유시(有施) 씨(氏)를 토벌했을 때, 말희(末喜)라는 미녀(美女)를 포획해서 자신의 아내로 삼았고, 그러자 걸(桀)은 그 말희(末喜)에게 빠져서 정치를 게을리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술의 호수(酒池)에 배를 띄우고 육산포림(肉山脯林-殷 紂王의 酒池肉林과 함께 亡國의 宴會)이라고 했을 정도로 고기(肉)를 산 같이 쌓아올려서 호화로운 연회를 개최했으며, 그로써 국력을 탕진했다. 거기다 또 충신들을 멸시하고 탕(湯)을 불러들여서 감옥에다 가두어버리니, 그러자 탕(湯)은 용서를 구하고서야 풀려났다. 그러자 보다 못했던 제후들이 모두 탕(湯)에게로 몰려들었고, 결국 탕(湯)은 걸(桀)을 무너뜨렸다. 그러자 걸(桀)은 명조(鳴條-현재의 山西省 安邑)로 도망을 갔는데, 그런데 그곳에서

 <吾悔不遂殺湯於夏台使至此>

 해석해보면

 <(나는) 탕(湯)을 감옥에 가둔 후에 죽이지만 않았던 것뿐이었는데, (내가) 이런 처지에까지 몰리고 말았다는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라고 말을 하고는 죽었다고 한다.

 단, 일설(一說)에 의하면, 걸(桀)은 말희(末喜)와 함께 남방(南方)으로 도망을 가서 죽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그는 죽었다지만, 그러나 그는 후세에 상(商)의 주(紂), 주(周)의 여왕(厲王)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가 민산(岷山)을 토벌했을 때, 완(琓)과 염(琰)이라는 두 명의 여성을 포획해서 열애(熱愛)를 했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소화(笤華)라는 옥(玉)에다 그 두 명의 여성 이름을 새겼으며, 그리고 소(笤)에는 완(琓)을, 그리고 화(華)에는 염(琰)을 새겼다고 한다.

 참고2: 이윤(伊尹)은 하(夏) 말기(末期)에서 상(商=) 초기의 정치가였으며, 상(商) 성립에 큰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지(摯)였다고 하며, 전설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대홍수에 휩쓸려서 떠내려간 후 큰 뽕나무(巨桑木)가 되었는데, 그런데 그 가지에서 이윤(伊尹)이 탄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런 연유로 해서 그가 홍수(洪水)의 신(神)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성인이 된 후, 요리사(料理師)였다거나 또는 귀족(貴族)의 집에서 일을 했던 사람으로, 그 주인의 딸이 자리(子履-나중의 湯王)에게 시집을 갔을 때, 그 시중꾼으로 따라갔다가 자리(子履)를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재능이 자리(子履)에게 인정되었고, 그리하여 상(商)의 국정에도 참여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상(商)이 하(夏)를 멸했을 때도 그는 활약했으며, 그 후에도 탕왕(湯王)을 보좌했고, 그 후로도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던 상(商) 왕조의 기초를 다졌다. 그리고 또 그는 탕왕(湯王)이 사거(死去)한 후에도 그 자식이었던 외병(外丙)과 중임(仲壬) 두 왕을 보좌했으며, 그 후에 탕왕(湯王)의 손(孫) 태갑(太甲)이 즉위하자 그 역시도 보좌했다. 하지만 그 태갑(太甲)이 방탕을 일삼으며 국정을 교란시켰기 때문에, 이윤(伊尹)은 그를 동(桐)으로 추방했고, 그 후에 스스로 섭정(攝政)했다. 그 3년 후, 태갑(太甲)이 후회를 하고 개과천선(改過遷善)했던 것을 확인했던 이윤(伊尹)은 다시 태갑(太甲)을 왕좌에 앉히고는 신하의 임무를 다했다. 그리고는 그 태갑(太甲)의 아들 옥정(沃丁) 시대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후세(後世)에 그는 명신(名臣)으로 평가받았지만, 그러나 태갑(太甲)을 추방했던 일로 해서 다소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또, 그 일은 전한(前漢) 때의 곽광(霍光)의 예처럼, 유력자(有力者)가 나쁜 군주(君主=主君)를 추방하는데 구실을 주는 선례도 남겼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는 <그가 태갑(太甲)을 추방한 후,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그 7년 후에 태갑(太甲)에게 토벌되었다>라고 했다.

 참고3: 공갑(孔甲)은 하조(夏朝)의 제14대 제(帝)였으며, 소위 폭군(暴君)이었고, 성격이 음란(淫亂)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귀신(鬼神)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러자 제후(諸侯)들이 하(夏)를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재위(在位) 중에 자웅(雌雄) 한 쌍의 용(龍)이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런데 그때 마침 환용 씨(豢龍氏-龍의 飼育을 맡았던 氏族)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돌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당시 용(龍)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길조(吉兆)였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에 대한 합당한 처우를 하지 않으면 곧 하(夏)의 덕(德)이 쇠(衰)함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루(劉累)란 자에게 시켜서 그 용(龍)들을 관리하게 했는데, 그런데 그 중에 암컷이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유루(劉累)는 그 고기를 공갑(孔甲)에게 헌상했다. 그러자 또 공갑(孔甲)은 그 고기가 너무 맛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유루(劉累)에게 명해서 그 고기를 더 가져오라고 했지만, 그러나 유루(劉累)는 그것을 더 구할 수가 없어서 도망을 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와 관련된 사기(史記)의 내용을 보게 되면(周本紀), 하(夏)왕조 때 용(龍) 두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러자 점(占)을 쳐보니 <그 용(龍)의 입에서 나오는 거품(泡)을 얻을 수 있으면(받아두면) 길(吉)하다>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래서 그 용(龍)들에게서 거품을 받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상(商)과 주(周)까지 물려졌고, 그러자 또 그 주대(周代)에 그 거품으로부터 포사(褒姒-後述)가 탄생했다고 한다.

 참고4: 유루(劉累)는 기원전 1734년부터 기원전 1692년까지 살았던 사람으로, 하(夏) 왕조의 중신(重臣)이었으며, 요(堯)의 자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漢) 유방(劉邦)의 123대 선조였고, 그리하여 그 유(劉) 씨의 시조로 되어있다. 그리고 또 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기(祁) 씨(氏)와 두(杜) 씨도 그의 자손이었다고 한다. 그는 환용 씨(豢龍氏)라는 일족에게서 용(龍)을 사육하는 방법을 배운 후, 공갑(孔甲)의 명을 받아서 용(龍)들을 사육했지만 실패하자 도망쳤다고 하며, 그 전에 공갑(孔甲)으로부터 어용(御龍) 씨라는 성(姓)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참고5: 말희(末喜)는 하(夏) 최후의 제(帝) 걸(桀) 비(妃)들 중 하나였으며, 말희(妺喜) 또는 말희(末嬉) 또는 말희(妺嬉)라고도 쓰지만, 그러나 간혹 말(妺)을 매(妹)로 혼동하여 표기한 곳도 다수 있으므로 참고 바람. 아무튼, 그 말희(末喜)는 당시, 산동(山東) 유시(有施) 씨의 딸이었다고 하며, 걸(桀)이 그 유시(有施) 씨를 토벌했을 때, 항복의 의미로 걸(桀)에게 헌상되었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또 일설(一說)에 의하면, 걸(桀)이 항복의 의미로 그녀를 헌상 받았던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걸(桀)이 그녀를 요구했던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당시 절세(絶世)의 미녀였던 그 말희(末喜)는 걸(桀)의 마음에 들었고, 그러자 비(妃)가 되어서 사랑을 받았다. 그러자 말희(末喜)는 걸(桀)에게 궁전을 지어달라고 요구했는데, 그러자 걸(桀)은 경궁(傾宮)이란 거대한 궁전을 짓고는, 그 낙성(落城-竣工) 축하 때에 일찍이 그 예가 없었던 대규모의 연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축연(祝宴)에서는 연못에다 술을 채우고, 나무(木)마다에 고기(肉)를 걸어둔 육산포림(肉山脯林)이 행해졌다고 하며, 그리고 또 말희(末喜)가 견(絹-명주)을 찢는 소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나라 안에 있던 견(絹)을 고가(高價)로 긁어모았다고 했는데, 그러자 그런 난행(亂行)을 나중에 사람들은 <열백(裂帛-비단을 찢는 소리)의 소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포사(褒姒)의 고사(故事)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으며, 포사(褒姒)는 후술(後述)함> 아무튼 그 후, 걸(桀)은 충언을 간(諫)하던 현신(賢臣) 관용봉(關龍逢)을 죽였고, 그러자 탕(湯)이 군사를 일으켜서 하(夏)를 멸했다. 그러자 걸(桀)과 말희(末喜)는 탕(湯)에게 붙잡혀서 남소(南巢-양쯔 강 유역에 있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음)의 어떤 산으로 추방되었고, 그러자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바로 그것을 하상혁명(夏商革命) 또는 은혁명(殷革命)이라고 하며, 그리고 또 여자에 약했던 그 걸(桀)은 후세에 악왕(惡王)으로 불렸을 뿐만 아니라, 하걸은주(夏桀殷紂)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후세의 역사서 국어(國語)에서도 위와 같은 내용이 실렸다고 하며, 그리고 또 열녀전(烈女傳)에도 하걸말희(夏桀末喜)를 은주달기(殷紂妲己)와 주유포사(周幽褒姒)와 함께 나란히 세우고는 <말희(末喜)는 하(夏) 걸(桀)의 비(妃)가 되었는데, 아름답기는 했지만, 덕(德)이 부족했고, 도(道)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마음이 대장부 같았기 때문에, 허리에는 검(劍)을 찼으며, 머리에는 관(冠)을 썼다. 그리고 또 음란(淫亂)하고 사치스러운 여자였으며, 걸(桀)로 하여금 도(道)를 잃게 만들었다>라고 비판했다.

 
참고: 그러나 일설(一說)에는, 그녀가 걸(桀)에게 망했던 자신의 부족(部族-또는 氏族)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했었다고 하는 설(說)도 있다.

 그리고 또 황보밀(皇甫謐)의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도 <말희(妺喜)는 매일 궁녀(宮女)들에게 술을 마시게 했다. 걸(桀)은 말희(妺喜)를 항상 무릎 위에 앉혔다. 말희(妺喜)는 견(絹)을 찢는 소리를 듣고 웃었다. 그리하여 걸(桀)은 견(絹)을 모았다. 걸(桀)은 말희(妺喜)가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라는글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그 末喜의 에피소드는 은(殷) 주왕(紂王)의 비(妃)였던 달기(妲己)와 서주(西周) 유왕(幽王)의 비였던 포사(褒姒)의 에피소드와 거의 닮은 점이 많은데, 그것은 또 걸(桀)의 전설을 후세에서 유용(流用)했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또 그러한 구성(構成) 또는 구조(構造) 즉, 미녀에게 빠졌던 왕이 간언(諫言)을 한 충신을 죽였다든지, 그리하여 명신(名臣)의 도움을 받았던 한 영웅이 그런 왕을 멸했다든지 하는 등의 이야기구조는 중국사(中國史)에 있어서 신화의 한 전형(典型)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또 <부권제(父權制)사회>의 한 특징으로, 실제로 그런 여성들에 의해서 나라가 망했다기보다는, 혁명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서 그 여성들을 이용하려 했던 측면이 강했던 결과에서였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은 또 근래 모택동(毛澤東)이 죽자 강청(江靑)이 비판받았던 예에서도 잘 알 수 있었던 것이었으며, 그것으로 또 아직도 중국에서는 그런 고질병이 만연해서 내려오고 있다고 이해할 수가 있다.

 

 
 <참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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