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長江) 황하(黃河) 문화>
<참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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黄河 流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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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流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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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流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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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流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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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元前8000年以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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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蟾岩遺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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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人洞・呂桶環遺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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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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彭頭山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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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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湯家崗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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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背渓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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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
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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仰韶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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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家浜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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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姆渡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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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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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渓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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崧沢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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良渚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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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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竜山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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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墩遺跡(龍馬古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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屈家嶺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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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星堆遺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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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家河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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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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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里頭文化(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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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橋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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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里頭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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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里岡文化(殷遷都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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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里岡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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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遷都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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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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呉城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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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熟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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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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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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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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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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巴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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呉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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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장강(長江) 문명(文明)은 중국의 장강(長江) 유역에서 일어났던 고대문명의 총칭이며, 황하(黃河) 문명과 함께 중국문명의 대표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기(時期)는 대충 기원전 1000년 전 정도까지가 그 범위에 들어가며(단, 문명의 추정 년대에 관해서는 100년 단위의 誤差가 있음), 나중의 초(楚)와 오(吳) 그리고 월(越) 등의 선조(先祖)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황하(黃河) 문명은 황하(黃河)의 중, 하류 유역에서 번영했던 고대문명으로, 황하의 범람원(汎濫原)에서 농업을 개시했고, 그리하여 그 황하의 치수(治水)와 관개(灌漑)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강화했으며, 그것으로 발전 등을 이루었던 문명이었다. 그리고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앙소(仰韶) 문화를 거쳐서 은(殷), 주(周)의 청동기(靑銅器)문화로 발전했으며, 그리고 또 근래 동아시아의 역사교과서에서는 그 황하 문명을 <세계4대문명> 중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많지만, 그러나 현재에는 장강(長江) 문명과 요하(遼河) 문명 등, 여러 가지의 문명들이 차례로 중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표기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장강(長江), 황하(黃河) 문명>으로 소개하고 하고 있으며, 그리고 또 이야기가 나온 차에 요하(遼河) 문명에 대해서도 간단히 기술하면, 그것은 만주(滿洲)의 남부와 중국 동북(東北)부의 요하(遼河) 유역에서 일어났던 중국의 고대문명 중 하나로, 기원전 6200년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요하 유역>

<중국을 횡단하는 장강>
1. 장강(長江) 문명
20세기 전반(前半)에 황하(黃河) 문명의 <앙소(仰韶)문화>가 발견되었던 이래(以來), 그 황하(黃河) 유역에서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던 것으로 해서, 중국의 문명은 그 <황하문명>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하지만 1973년과 1978년의 발굴조사에서 발견되었던 절강성(浙江省)의 여요시(余姚市) <하모도(河姆渡-허무두)유적>에 의해서 그러한 의견은 일축되었고, 그곳에서 대량 발굴되었던 쌀과 벼 등으로 벼농사의 흔적을 발견했으며, 주거(住居)는 고상식(高床式-다락마루 식) 그리고 시대는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5000년경으로 추정했다. 그 결과, 그때까지의 학설들은 전면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황하(黃河) 문명>과 <장강(長江) 문명>이 전혀 다른 계통이었음도 명백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발견되었던 <요하(遼河) 문명> 등으로 해서, 현재에는 요하(遼河) 주변과 황하(黃河)의 상중하 유역 그리고 장강(長江)의 상중하 유역으로 각각 그 문화들을 분류하고 있으며, 그들은 또 서로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면서, 그리고는 또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상식 주거의 예>
1) 특징
장강(長江) 문명의 특징은 초기단계에 벼농사가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밭농사(田作) 중심이었던 <황하(黃河) 문명>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양(兩) 문명은 독자적인 농경(農耕)을 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장강(長江) 문명>에서 발견되었던 그 벼들로 미루어서, 벼의 원산지는 거의 장강(長江) 유역이란 것이 확정이 된 상태이다.(그것이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說이 있으며, 하지만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과는 그 종류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하지만, 일본의 주장일 가능성이 큼)
그리고 그 문명은 중류(中流) 역(域)의 <굴가령(屈家嶺) 문화(기원전 3000년?-기원전 2500년?)>와 하류(下流) 역(域)의 <양저(良渚) 문화(기원전 3300년?-기원전 2200년?)>의 시대에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하였으며, 그 후로는 쇠퇴(衰退)하였는데, 그리하여 그때부터 중류(中流) 역(域)에서는 황하(黃河) 유역의 <이리두(二里頭)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또 결국 그곳은 황하(黃河) 유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정복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그리고 바로 앞에서 소개되었던 황제(黃帝)와 신농(神農) 그리고 치우(蚩尤)의 대립에 관한 전설들은 바로 그 문명들이 서로 다투었던 과정에서 탄생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중의 하나였던 <하모도(河姆渡) 유적>에서는 옥(玉)으로 만든 옥기(玉器)들과 칠기(漆器)들이 발견되었으며, 그리고 <오성(吳城) 문화(기원전 1400년?-기원전 1000년?)>에서는 자기(磁器-사기그릇)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또 <중국문화의 중요한 일익(一翼)을 담당했던 문물(文物)의 원류(源流)가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천분지>
그리고 그 문명은 나중의 초(楚)와 오(吳)와 월(越)로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그리고 또 지역인 사천(四川) 분지(盆地)에서는 그렇게 오래된 문명의 발견은 없었지만, 그러나 1986년에 사천성(四川省) 광한시(廣漢市)의 <삼성퇴(三星堆) 유적>에서 대량의 청동기 등이 발견되었고, 그리하여 그곳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바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타 지역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곳은 고유의 <사천(四川) 문명>으로 분류가 되었는데, 그런데 그 <삼성퇴(三星堆) 유적>에서 괴이(怪異)한 가면들이 다수 발굴되었고, 청동(靑銅) 인상(人像)에다 금을 입힌 황금가면도 발굴되었다.

<사천성 위치도>
그리하여 또 그곳은 고대 촉(蜀)의 자리였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하지만 그 촉(蜀)은 또 사기(史記)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곳은 중화(中華)문명의 시야(視野)에서 제외된 지역으로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또 유일(唯一)한 기록으로는 <진(秦)의 혜문왕(惠文王) 때였던 기원전 316년에 사마착(司馬錯)에 의해서 멸해졌고, 그때부터 진(秦)의 판도(版圖)에 들어갔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한편, 그 촉(蜀) 지역의 지역(地域)사서(史書)였던 <화양국지(華陽國志)>란 책에서 그 고대 촉에 관한 상세한 기술이 있었다지만, 그러나 그것은 상상(想像)의 산물(産物)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그랬던 것이 그 후에 그 <삼성퇴(三星堆) 유적>이 발견이 되자, 그것도 일약(一躍)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2) 그리고 아래는 그 장강(長江) 문명에 속했던 문화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이다.
* 옥섬암(玉蟾岩) 유적(遺跡)-호남성(湖南省) 도현(道縣). 기원전 14000년?-기원전 12000년?으로 추정. 벼 또는 볍씨가 발견되었지만, 그러나 재배를 했던 것인가에 대해서는 현재 불명(不明).

<호남성 위치도>

<永州 市 위치도=道縣>


<옥섬암 유적 당시 모습>
* 선인동(仙人洞-위의 그림 참조)・여통환(呂桶環) 유적-강서성(江西省) 만년현(萬年縣). 기원전 1200년경?. 재배했던 벼가 발견되었고, 그것으로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독자적인 농경(農耕)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생각함.

<강서성 위치도>

<만년 현 위치도>
* 팽두산(彭頭山) 문화-호남성(湖南省) 예현(澧縣) 彭頭山 유적을 대표로 하며, 시기는 기원전 7000년?부터 기원전 5000년? 정도. 산파농법(散播農法='노가리'는 씨를 흩뿌려서 경작하는 농법)이 행해졌던 것으로 해서, 중국 최고(最古)의 수도(水稻-무논에 짓는 벼농사)가 이루어짐.

<湖南省 澧縣 위치도>



<彭頭山 遺跡의 後期層에서 発見된 丸底(底土)土器>
* 대계(大溪) 문화-중경 시(重慶市) 무산(巫山) 현(縣) 대계(大溪) 유적을 대표로 함. 기원전 4500년?-기원전 3300년?. 채문홍도(彩文紅陶-무늬를 넣은 붉은색 토기)가 특징이었으며, 후기(後期)에는 흑도(黑陶)와 회도(灰陶)도 등장함. 관개(灌漑)농법이 확립되었으며, 주거지(住居地)가 물이 풍부했던 강변에서 대규모 농경(農耕)을 위해서 평야지대로 이동함.

<중경 시 위치도>

<무산 현 위치도>

<대계 유적이 발견되었던 구당협(瞿塘峡)의 기문(夔門 또는 峡)>
<내용이 조금 길어서 不得已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