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인물 소개>

 ※ 장한(章邯) 2

 그리고 그는 오광(吳廣)을 살해했던 전장(田臧)과 이귀(李歸) 등을 토벌했으며, 등설(鄧說)을 파했고, 제(齊)왕이었던 전담(田儋)과 그 부장(部將)이었던 주시(周市)를 임제(臨濟)에서 전사(戰死)시켰으며, 위(魏)왕이었던 위구(魏咎)를 분신자살시켰고, 허(許)에 있던 오서(伍徐)마저도 격파했다. 거기다 또 2세 황제로부터 원군으로 지원받았던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와 합세해서 진승(陳勝)의 본거지였던 진(陳)을 공격해서 기원전 208년에는 진(陳)의 서쪽에 있던 장하(張賀)의 군을 격파했고, 그것으로 진승(陳勝)을 패주시켰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반란군을 이끌고 있던 항량(項梁)을 패주하는 것처럼 사지(死地)로 유인한 후 야습(夜襲)을 감행(敢行)해서 죽였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조(趙)의 반란군을 공략했을 때는 최초로 수도 한단(邯鄲)을 파괴했으며, 그 다음으로 왕이(王離)와 소각(蘇角) 그리고 섭간(涉間)에게 시켜서 조(趙)왕(王)과 장이(張耳)가 농성하고 있던 거록(鉅鹿)을 포위하게 했다. 하지만 기원전 207년, 원군으로 달려왔던 항우(項羽)에게 소각(蘇角)이 전사했으며, 이어서 섭간(涉間)도 자결했고, 왕이(王離)는 포로가 되어서 반란군의 기세는 더욱 높아져갔다. 거기다 또 항우(項羽)는 장한(章邯)의 군대 목전까지 진격하는 등, 진군(秦軍)은 연패(連敗)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장한(章邯)은 사마흔(司馬欣)을 수도로 보내서 황제의 지시를 청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역으로 궁중(宮中)의 부패와 조고(趙高)의 모함을 받아서 가족들이 모두 처형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장한(章邯)은 사마흔(司馬欣)에게 <공(功)을 세워도 죽고, 공을 세우지 않아도 죽는구나!>라고 탄식하고는 은허(殷墟)에서 군사들과 함께 항우(項羽)에게 항복을 해버렸다. 하지만 또 그때, 항우(項羽)는 장한(章邯)과 사마흔(司馬欣) 그리고 동예(董翳)를 받아주기는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그들이 데려왔던 군사가 20만을 넘었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초군(楚軍)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란을 우려했던 항우(項羽)는 거짓으로 야습(夜襲)을 받은 것처럼 하고는 그 혼란했던 틈을 타서 진군(秦軍)을 단애(斷崖)로 유인했으며, 그리고는 전부 전락사(轉落死)시켜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3명은 나중에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던 진(秦)의 백성들로부터 깊은 원망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 세 사람은 초군(楚軍)에 흡수되었고, 이어서 진(秦)이 멸망했다. 그러자 항우(項羽)의 사장(師將) 격이었던 범증(范增)은 항우(項羽)에게 <진인(秦人)의 통치는 진인에게 맡겨라!>고 조언했고,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 세 사람을 각 왕(王)으로 세웠으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 동예(董翳)에서 설명될 것이므로 참고바라며, 아무튼 또 항우(項羽)가 그렇게 했던 데는 한중(漢中)의 유방(劉邦)을 감시할 목적과 파촉(巴蜀)의 변경을 그들이 죽을 때까지 지키게 할 목적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초(楚)의 그러니까, 일종의 항우(項羽)의 꼭두각시들이었을뿐만 아니라, 그 옹립되었던 경과 또한 진(秦)의 백성들을 몰살시키고 섰던 자리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인사(人事)는 진인(秦人)들의 증오만 불렀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또 그 결과로 기원전 206년에는 유방(劉邦)의 장군 한신(韓信)이 이끌었던 부대가 관중(關中)으로 침입했을 때도, 촉(蜀)의 잔도(棧道)를 부흥한다는 명목으로 진창(陳倉)을 비밀 리에 지나갔으며(暗渡陳倉), 거기다 진인(秦人)과 함께 사전에 한신(韓信)이 미리 수배해두었던 한(漢)의 첩자가 은밀하게 그곳으로 인도해서 상대방이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던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그러자 또 장한(章邯)이 그 진창(陳倉)까지 나가서 맞섰지만 패배했으며, 다시 호치(好畤)에서도 패배, 그 다음에는 폐구(廢丘)에서 농성을 하면서 저항했지만, 하지만 기원전 205년이 되자 동생 장평(章平)이 포로로 잡혔고, 그리고 또 폐구(廢丘) 역시도 수공(水攻)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장한(章邯)은 자살했다.

 ♣ 암도진창(暗渡陳倉)이란, 36계(三十六計) 중의 제8계(第八計)를 응용했던 것으로, 그 뜻은 <비밀리에 또는 은밀하게 진창(陳倉)으로 지나간다>라고 해석할 수 있고, 여기서의 진창(陳倉)은 지명(地名)이다. 그리고 제8계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데 <示之以動, 利其静而有主. 益動而巽> 이것을 또 대충 해석을 해보면, 시위(示威)행위(行爲), 위장(僞裝)을 적(敵)에게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 아군의 주력부대를 숨긴다. 그런 다음에는 움직임을 크게 하고(誇張), 그 여세를 몰아간다. 즉, 그 전체는 풍뇌익(風雷益)의 형상이며, 그리고 또 풍뇌익(風雷益)은 천둥소리 같은 굉음의 상태, 또 즉, 바람이 위에 있어 천둥(雷)의 세력을 더해가는 상태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암도진창(暗渡陳倉)이란 말은 원래는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渡陳倉)>이었는데, 그것은 또 당시 관중(關中)에 있던 장한(章邯)을 한신(韓信)이 공격했을 때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던 말로, 대체적으로는 <촉(蜀)의 잔도(棧道)를 수리해나가면서 그 뒤편으로는 은밀하게 군사를 진창(陳倉)으로 향하게 한 후, 관중(關中)을 기습한다>라고 하는 위장공작과 기습작전을 아울러서 표현했던 전술(戰術)을 말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그 촉(蜀)의 잔도(棧道)는 현재에도 전장(全長) 200km가 넘는다고 하며, 그래서 또 일찍이 이태백(李太白)도 <촉도(蜀道)난(難)-촉으로 가는 길은 푸른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렵구나 운운. 자세한 것은 본인의 글 한시의 산책을 참고 바람>을 노래했으며, 잔도(棧道)는 험한 벼랑 같은 곳에 낸 길로, 선반처럼 달아서 낸 길을 말한다. 그리고 또 보충으로, 현재의 중국어에서 그 암도진창(暗渡陳倉)이란 말은, 남녀의 밀회(密會)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므로, 사용하실 분은 조심해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 항백(項伯-?부터 기원전 192년)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전한(前漢) 초기에 걸쳐서 활약했던 정치가였고, 무장이었다. 그리고 자(子)에 항수(項睢-劉睢)가 있었고, 항우(項羽)의 숙부였으며, 항연(項燕)의 아들이었고, 항량(項梁)과는 형제였다. 그리고 또 참고로, 한서(漢書)의 안사고(顔師古) 주(注)에 의하면, 백(伯)은 자(字)였고, 이름은 전(纏)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초(楚)의 명문(名門)이었던 항(項)가(家)에서 출생했지만, 그러나 기원전 223년에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에 의해서 초(楚)가 멸망하자(王翦에 의해서) 그 후로 그는 각지를 떠돌면서 전전(轉轉)하다가 살인을 저지르고는 옛 친구였던 장양(張良)을 찾아가서 자신의 신변을 의탁했다. 그 후, 시황제(始皇帝)가 죽었고, 그러자 항량(項梁)이 항우(項羽)와 함께 회계(會稽)에서 거병했는데, 그때 그도 참가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좌윤(左尹-춘추시대 楚의 官名으로, 右尹과 함께 令尹을 보좌했던 직이었다)이 되어서 조카였던 항우(項羽)의 행군(行軍)에 참가하면서 항우(項羽)를 보좌했다.(뒤의 본문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으므로, 中略함) 그 후,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사이가 나빠졌을 때, 항백(項伯)은 옛날에 입었던 은혜를 생각해서 장양(張良)에게 도망을 권고했지만, 그러나 장양(張良)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이어서 <홍문지회(鴻門之會)>가 열렸고, 항백(項伯)은 유방(劉邦)을 도왔다. 하지만 그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러나 또 <해하(垓下)의 싸움>으로 추측되는 싸움 후에는 유방(劉邦)에게 귀순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홍문지회(鴻門之會)에서의 공을 인정해서 인척관계를 맺었던 것과 동시에 그를 사양후(射陽侯)에 봉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유방(劉邦)은 <항(項)성(姓)은 유(劉)씨(氏)의 세상에서는 결코 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하며, 그래서 또 나중에 항백(項伯)은 유(劉)씨(氏)를 사용할 것을 허락받아서, 이름을 유전(劉纏)으로 개명했다. 그 후, 그는 기원전 192년에 사망했으며, 그러자 그의 아들이었던 수(睢)가 그의 뒤를 이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였던 기원전 186년에 그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봉지(封地)를 잃고 말았다.

 ※ 항량(項梁-?부터 기원전 208년)은 중국 진(秦)대 말기의 무장이었고, 반란군의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을 계승해서 진(秦)에 대한 반란을 획책했지만, 그러나 또 진(秦)의 장군이었던 장한(章邯)에게 져서 죽었다. 그리고 역시, 항우(項羽)의 숙부였으며, 항백(項伯)과는 형제였고,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으로 자칭했던 인물이었다. 항량(項梁)은 원래 역양(櫟陽)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런데 부(父) 항연(項燕)이 죽고 나서 초(楚)가 멸망하자, 그는 연좌(連座)제에 의해서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또 그는 당시 옥리(獄吏)였던 조구(曹咎)란 자와 그의 상관이었던 장사흔(長史欣-司馬欣)의 도움을 받아서 목숨을 구했는데, 그런데 또 그 후에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 복수를 피해서 조카였던 항우(項羽)와 함께 오(吳)로 들어갔다.

 
♣ 장사흔(長史欣=司馬欣-?부터 기원전 203년)은 진(秦)의 장군이었고, 관직은 장사(長史-警備를 하는 官廳의 總務部長정도의 직급)였기 때문에 장사흔(長史欣)이라고 불렸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태생이나 과거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는 위의 내용대로 항량(項梁)이 포로로 잡혔을 때, 부하였던 조구(曹咎)의 진언(進言)을 받아들여서 항량(項梁)을 보호해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209년에는 조고(趙高)의 명을 받아서 장한(章邯)의 부장(副將)으로 종군했으며, 그 결과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을 평정했던 등 공을 세웠지만, 그러나 그 후에 장한(章邯)의 명령으로 조고(趙高)에게 원군을 요청을 하기 위해서 수도였던 함양(咸陽)으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옛날 부하였던 자로부터 <조고(趙高)가 자신들을 처형할 것>이란 정보를 전해 듣고는 그 길로 바로 도망을 갔고, 이어서 장한(章邯)의 설득을 받아서 항우(項羽)에게 귀순해서 새왕(塞王)에 봉해졌다. 하지만 또 기원전 206년에는 유방(劉邦)에 의해서 장군이 되었던 한신(韓信)의 공격을 받아서 적왕 동예(翟王・董翳)와 함께 항복했다. 그리고 또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205년에도 수수(睢水)의 싸움에서 또 적왕 동예(翟王 董翳)와 함께 다시 초(楚)에 항복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03년에는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있었던 조구(曹咎)와 함께 성고(成皋)를 지켰지만, 그러나 또 유방(劉邦)의 군대에 패해서 조구(曹咎), 적왕 동예(翟王 董翳)와 함께 사수(汜水) 강변에서 자살했다. 하지만 또 사기(史記)의 항우(項羽)본기(本紀)에 <고조(高祖)4년(기원전 203년) 겨울에 성고(成皋)를 지키다 유방(劉邦)의 군대에 패해서 자살했던 인물로 조구(曹咎)와 사마흔(司馬欣) 그리고 장사예(長史翳)>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러나 그 장사예가 적왕 동예(翟王 董翳)였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현재 불명(不明)이다.

 
○ 적왕 동예(翟王 董翳-생몰불상)는 진(秦) 말기의 사람으로, 항우(項羽)에 의해서 적왕(翟王)에 봉해졌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역시, 그의 내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며, 진(秦)의 2세 황제 때, 반란을 진압했던 장한(章邯) 아래서 도위(都尉-秦, 漢 때의 官職名으로, 郡의 軍事를 담당했다)를 지냈다. 그리고 그 후에 장한(章邯)이 항우(項羽)에게 패하자, 그는 장한(章邯)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했지만, 결국 항우(項羽)와 싸워서 패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관중(關中)으로 들어가서 진(秦)를 멸했다. 그 후, 기원전 206년에 항우(項羽)는 관중(關中)을 3분(分)해서 장한(章邯)은 옹왕(雍王)에, 사마흔(司馬欣)은 새왕(塞王)에, 동예(翟王)는 적왕(翟王)에 각각 봉했고, 그리하여 그것을 삼진(三秦)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적왕 동예(翟王 董翳)는 그 중에서 상군(上郡)을 영토로 해서 고노(高奴)를 수도로 정했다. 하지만 그 해,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삼진(三秦)을 공격했고, 그 결과로 옹왕(雍王)의 땅을 평정해서 장한(章邯)을 포위했다. 그러자 새왕(塞王)과 적왕 동예(翟王 董翳)는 유방(劉邦)에게 항복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적국(翟國)을 폐(廢)하고 상군(上郡)으로 돌아갔는데, 그리고 또 그 다음해, 유방(劉邦)은 항우(項羽)를 공격해서 수도였던 팽성(彭城)을 점령했지만, 그러나 또 돌아가던 길에 항우(項羽)의 반격을 받아서 대패했다. 하지만 또, 위 장사흔(長史欣)의 내용대로 그들이 그때 자살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단, 적왕 동예(翟王 董翳)와 사마흔(司馬欣) 등은,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을 공격했을 때, 같이 따라갔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그 뒤의 행적은 또 묘연하다.

 
그 후, 항량(項梁)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신망(信望)을 얻었고, 그리하여 진(秦)의 부역(賦役)에 나갈 인부(人夫)들을 배당했다든가, 장례식 등을 주관했던 등, 점점 그 지역에서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그 사이에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인재 발굴에도 힘썼는데, 그러던 중 기원전 209년에 시황제(始皇帝)가 죽고, 진승(陳勝) 등이 군사를 일으키자 진(秦)의 지배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 당시 회계(會稽)의 군수(郡守)였던 은통(殷通)이란 사람이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선수필승(先手必勝-남보다 앞서 행하면 남을 누를 수 있다는 뜻)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도 이번 참에 진(秦)에 대한 반란에 동참하기로 결정을 했소!>라고 하면서, 당시에 또 유력자로 알려져 있던 환초(桓楚)란 사람을 찾아내서 자신과 함께 거사에 동참할 것을 항량(項梁)에게 요청했다. 그리고는 항량(項梁)에게 자신의 장군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었는데, 그러자 항량(項梁)은 <그 환초(桓楚)란 사람이 있는 곳은 자신의 조카인 항우(項羽)밖에 모른다>고 말을 하고는 항우(項羽)를 그곳으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 은통(殷通)과 초대면했던 자리에서 그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군수의 인(印)을 탈취했으며, 그리하여 항량(項梁)은 그때부터 스스로 그곳의 군수가 되었다. 덧붙여서 환초(桓楚)는 그 후에 항량(項梁)의 부하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동년(同年) 12월, 진승(陳勝)이 살해당하자 소평(召平)이란 자가 진승(陳勝)의 명이라고 속이고는 항량(項梁)에게 출병을 재촉했다. 그러자 항량(項梁)은 그 명을 받들어서 8,000여명의 정병(精兵)을 인솔해서 출발했다. 하지만 또 가던 도중에 진영(陳嬰)과 경포(黥布) 등의 군대와 합류해서 대군이 되었던 항량(項梁) 군대는 당시, 스스로 진승(陳勝)의 뒤를 이었다면서 초왕(楚王)이 되어 있었던 경구(景駒-楚王의 宗族)와 그 심복이었던 진가(秦嘉)를 공격해서 패주시켰다. 그 후, 반진(反秦) 군(軍)의 영수가 되었던 항량(項梁)은 거소(居巢)로부터 달려왔던 범증(范增)의 말을 받아들여서, 구초(舊楚) 회왕(懷王)의 손자였지만, 당시에는 양치기로 전락해 있었던 심(心=義帝)이라는 인물을 데려와서, 그의 조부와 같은 이름으로 초왕(楚王-懷王)에 옹립시켰다. 그리고 그 후에 항량(項梁)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으로 자칭하고는 북진해서 진군(秦軍)과 싸웠고 연전연승했다. 그리고 또 그는 당시 삼천군(三川郡)의 태수(太守)였던 이유(李由=李斯의 장남)마저 제압하고는 자만하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송의(宋義)란 자가 나서서 간언했지만 듣지를 않았고, 이어서 정도(定陶)에서 장한(章邯)에게 패한 후, 그곳에서 죽었다.

 ♣ 송의(宋義-?부터 기원전 207년)는, 진말(秦末)의 사람으로 진(秦)에 반대해서 초(楚)로 가서 항량(項梁)의 휘하에 있었다. 그러다가 항량(項梁)이 죽자 총대장이 되었지만, 항우(項羽)와의 갈등으로 살해당했다. 그는 항량(項梁)이 연전연승을 하고 교만해하고 있었을 때 다음과 같이 항량(項梁)에게 조언을 했다. <장수가 몇 번 승리했다고 우쭐해하는 것은 병사들을 겁타(怯惰-겁이 많고 게으른 것)하게 하는 것으로, 그러면 필시 다음에는 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소수의 병사들이 그러합니다만(怯惰), 그러나 현재 진(秦)의 병사들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단지 그것이 걱정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항량(項梁)은 그의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로부터 얼마 후에, 송의(宋義)는 사자(使者)가 되어서 제(齊)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제(齊)의 사자(使者)를 만나서 이렇게 충고를 했다. <항량(項梁)은 곧 패하게 될 것이므로, 걸음을 늦추어서 재앙을 피하십시오> 그러자 그 사자(使者)는 그의 말에 따랐는데, 그러자 또 얼마 후에 항량(項梁)은 그의 말대로 장한(章邯)과의 싸움에서 져서 전사했다. 그 후, 그 제(齊)의 사자(使者)는 그때의 일을 초(楚)의 회왕(懷王=義帝)에게 전했다. 그러자 회왕(懷王)은 그를 불러서 이야기를 나눈 후에 매우 기뻐하면서 그를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했다. 그 후, 그는 항우(項羽) 등 여러 장군들을 통솔해서 조(趙)를 구했다. 그러자 그는 그때부터 경자관군(卿子冠軍)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경자(卿子)는 듣는 이를 문어적으로 높여서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로, 따로 공자(公子)로 칭할 수 있는 말이었으며, 관군(冠軍)은 상장(上將)의 뜻이므로, 그래서 그것은 전체적으로 그 송의(宋義)를 높여서 불렀던 이름이었다. 아무튼, 하지만 송의(宋義)는 그 도중에 46일간이나 체류를 했고, 그러자 또 병사들은 그러던 중에 내렸던 큰 비 때문에 추위와 기아(飢餓)에 떨어야만 했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행군을 재촉하던 항우(項羽)와의 갈등이 있었고, 그리고는 끝내 항우(項羽)의 칼에 살해당했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 변명으로 다음과 같이 말을 했고 <송의(宋義)는 제(齊)와 함께 초(楚)에 반란을 꾀했다. 그래서 왕(王)이 비밀 리에 나에게 명을 내려서 그를 죽이라고 했고, 그래서 오늘 내가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러자 제장(諸將)들은 항우(項羽)를 따랐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의 아들이었던 송양(宋襄)도 살해당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의 죄(罪) 10개조(箇條)를 들었을 때, 그 두 번째가 <송의(宋義)를 죽였던 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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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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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3. 거병(擧兵)

 유방(劉邦)은 그렇게 모은 군단(軍團)으로 우선 주변에 있던 현(縣)들의 공략을 위해서 나섰다. 그리고는 옹치(雍齒)란 자에게 풍(豊縣)을 지키라고 맡겼는데, 그런데 그 옹치(雍齒)가 구위(舊魏)의 땅에서 할거(割據) 중이던 위구(魏咎) 측(周市라고 함)의 사람에게 협박을 받아서 항복을 하고 말았다.

 ※ 옹치(雍齒)는 人名이지만, 명사(名詞)로 쓸 때는 <늘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 또는 그런 관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 말은 유방(劉邦)이 미워하던 사람의 이름이 옹치(雍齒)였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옹치(雍齒-?부터 기원전 192년)는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 때 패(沛)의 사람이었으며, 그 이름은 군주(君主)가 원한(怨恨)에 치우치지 않고 은상(恩賞)을 내리는 것의 대명사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원래 그는 패(沛)의 호족(豪族)으로, 그 지방의 유력자(有力者)였던 왕릉(王陵)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그러나 유방(劉邦)과는 사이가 나빴다. 그리고 진(秦)의 2세 황제 원년(기원전 209년)에 유방(劉邦)이 진(秦)을 상대로 봉기해서 패공(沛公)이 되자, 옹치(雍齒)도 그에 따랐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유방(劉邦)은 풍(豊)을 그에게 맡겼지만, 그러나 위(魏)의 주시(周市)란 자가 풍(豊)으로 와서 옹치(雍齒)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원래 위(魏)가 이주해 왔던 곳이며, 위(魏)는 이미 수십 개의 성(城)을 평정했소. 그러므로 지금 당신이 항복을 한다면 이곳에서 제후로 지내게 해주겠지만, 그러나 항복하지 않는다면 바로 이곳을 멸해버릴 것이오!>라고 협박을 했다. 그러자 처음부터 유방(劉邦)과 사이가 나빴던 옹치(雍齒)는 바로 위(魏)에 항복했다. 그러자 그에 화가 났던 유방(劉邦)은 풍(豊)을 공격했지만, 결국 함락시키지 못했고,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자신을 거역했던 옹치(雍齒)와 풍(豊)의 백성들을 원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후에 풍(豊)은 조(趙)에 속하게 되었고, 옹치(雍齒)도 다시 유방(劉邦)의 휘하로 들어가서 공적을 올렸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고조(高祖) 6년(기원전 201년)에 유방(劉邦)은 공신들에게 은상으로 공적에 따라서 제후의 위(位)를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특히 공적이 컸던 20여명을 제후(諸侯)로 한 다음에는, 밤낮 서로의 공적 크기로 다툴 뿐 결론을 내리지를 못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것으로 인해서 그에 불만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살해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런데다 또 장량(張良)으로부터 들어왔던 첩보에 의하면, 그 중에는 반란의 기미까지도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답답해졌던 유방(劉邦)은 장량(張良)에게 그 방법에 대해서 자문(諮問)을 구했다. 그러자 장량(張良)은 <우선적으로 유방(劉邦)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부터 제후에 봉해버리면 다른 사람들도 안심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두말도 없이 옹치(雍齒)를 십방후(什方侯=2500戶)에 봉했다. 그러자 그때서야 제장(諸將)들은 <옹치(雍齒)조차 봉후(封侯)가 된다면, 우리는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모두 기뻐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에 유방(劉邦)은 풍(豊)도 용서해주었고, 옹치(雍齒)는 혜제(惠帝) 3년(기원전 192년)에 사망해서 숙후(肅侯)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또 참고로, 삼국시대 촉(蜀)의 선주(先主)였던 유비(劉備) 사후, 익주(益州)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옹개(雍闓)는 그 옹치(雍齒)의 후예였다고 한다.<삼국지(三國志)의 촉서여개전(蜀書呂凱傳)에서>

 참고: 왕릉(王陵)은 첫째, 중국의 진(秦) 말기부터 전한(前漢)까지의 인물로, 초한전쟁(楚漢戰爭)에서 활약했던 장군이 있었으며, 둘째로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인물로, 진(秦)의 오대부(五大夫)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소개하는 인물은 첫째의 인물(?부터 기원전 180년)이며, 그는 패(沛) 출신 호족(豪族)으로, 겉치레 없이 직언(直言)을 하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유방(劉邦)도 대성(大成)하기 전에는 그를 형(兄)으로 모셨던 적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유방(劉邦)이 거병해서 함양(咸陽)을 떨어뜨렸을 때쯤, 그는 수천(數千)의 병력을 거느리고 남양(南陽)에서 활약했으며, 유방(劉邦)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후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싸우게 되자 그는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의 어머니를 인질로 삼고는 자신을 따를 것을 종용했는데, 그래서 왕릉(王陵)의 사자가 항우(項羽)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그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자결했다. <한왕(漢王-劉邦)을 따르도록 하라! 나 때문에 두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느니!> 그러자 항우(項羽)는 크게 노하고는 그의 어머니를 삶아버렸다고 했는데, 그러자 아무튼, 그때부터 그는 그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방(劉邦)을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또 이미 유방(劉邦)의 진영에서 서열이 거의 정해진 뒤였고, 그리고 또 유방(劉邦)의 숙적(宿敵)이라고 할 수 있었던 옹치(雍齒)와 그는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열후(列侯)에 봉해지는 것이 늦어졌고, 그것은 또 고조(高祖)6년(기원전 201년) 8월에나 이루어졌으며, 그때 그에게 내려졌던 작위는 안국후(安國侯=5000戶)였다. 아무튼 그 후, 유방(劉邦)도 죽고 혜제(惠帝)6년에 상국(相國)이었던 조참(曹參)도 죽자, 그는 우승(右丞)상에 그리고 진평(陳平)은 좌승(左丞)상에 올랐다. 그리고 또 그 혜제(惠帝) 사후, 여후(呂后)는 자신의 일족을 왕위에 올리려고 생각하고는 그에 대해서 왕릉(王陵)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고조(高祖)께서는 (劉氏 이외의 자가 왕이 되려고 한다면, 모든 백성들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를 토벌하라!)라고 말씀하시고는 白馬를 산 제물로 해서 맹세를 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呂 氏를 왕으로 한다는 것은, 그 맹세를 거역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기 때문에, 여후(呂后)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러자 또 여후(呂后)는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에게도 꼭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그러자 그들은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서 자신의 자제(子弟)들을 왕으로 삼았는데, 그러나 지금은 여후(呂后)가 천하를 다스리고 있으므로,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자 여후(呂后)는 아주 기뻐했는데,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왕릉(王陵)은 진평(陳平) 등에게 <당신들도 그때 맹세를 했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어떻게 그런 배신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도 나중에 고조(高祖)를 무슨 얼굴로 볼 것인가?!>라고 질책했다. 그러자 진평(陳平)이 이렇게 대답했다. <조정(朝廷)에 나가서 바른 말을 잘 하는 것은 당신이 나보다 나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 나라의 사직(社稷)을 지키고, 유(劉)씨(氏)의 후계자를 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나를 따라올 수가 없을 것이오!> 그러자 왕릉(王陵)은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 때문에 여후(呂后)는 왕릉(王陵)을 멀리했고, 그리하여 여후(呂后) 원년(元年-기원전 187년)에는 그의 실권(實權)마저 빼앗아버렸다. 그러자 그는 화를 내고는 병(病)을 칭하고 사직(辭職)을 해서 집거에 들어갔으며, 조정에도 나가질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여후(呂后) 8년(기원전 180년)에 사망했으며, 그러자 무후(武侯)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애후(哀侯) 왕기(王忌)가 안국후(安國侯)를 이었지만, 그러나 또 그의 현손(玄孫) 대에 주금(酎金-前漢의 朝廷에서 祭祀를 지냈을 때 據出했던 돈을 말함) 사건으로 단절되었다.

 그러자 화가 났던 유방(劉邦)은 풍(豊)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그러자 어쩔 수 없이 패(沛)로
돌아갔다. 그런데 당시 진승(陳勝)은 진(秦)의 장한(章邯)에게 패하고는 달아나다 살해 당한 뒤였기 때문에, 그래서 진승(陳勝)의 부하였던 경구(景駒)가 영군(甯君)과 진가(秦嘉)라는 자를 진승(陳勝)을 대신해서 왕위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풍(豊)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경구(景駒)에게 군사를 빌리러 갔다.

 
※ 진승(陳勝-?부터 기원전 208년)은, 이미 앞에서 소개가 되었지만, 중국 진(秦)나라 말기의 농민 반란 지도자였으며, 기원전 209년에 오광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서 초나라 왕이 되었다가, 6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진나라는 멸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진승오광(陳勝吳廣)> 역시, 명사로 쓸 때는 어떤 일에 선수를 쳐서 앞지르는 일 또는 그런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되면, 그것은 또 물론, 앞에서 이미 기술한대로, 중국 진(秦)나라 때 진승과 오광이 군사를 일으켜서 반란에 선수를 쳤다는 데서 유래했다.

 ※
위구(魏咎-?부터 기원전 208년)는, 중국의 전국시대 후기부터 진대(秦代)의 정치가였고, 위(魏) 왕실의 일족으로, 원래는 위(魏)의 영능군(甯陵君=寧陵君)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위표(魏豹)의 형 또는 사촌이었는데, 그러나 기원전 225년에 위(魏)가 진(秦)에 멸하자, 그도 서민(庶民)의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09년에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진승(陳勝)의 부하가 되었다. 그 후, 진승(陳勝)의 부하였던 주시(周市)가 위(魏)를 평정하자 사람들은 주시(周市)를 왕으로 세우려고 했지만, 그러나 주시(周市)는 위(魏)의 후예였던 위구(魏咎)를 맞이해서 왕위에 올렸다. 그러자 위구(魏咎)는 주시(周市)의 호의에 감사하며, 주시(周市)를 재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때쯤, 군사를 일으켰던 진평(陳平)이 위구(魏咎)를 찾아와서 수많은 진언을 했지만, 그러나 주변의 가신(家臣)들에 의한 중상모략으로 도망을 갔고, 그리고는 항우(項羽)의 부하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진(秦)의 장한(章邯)이 맹렬하게 반격을 해왔는데, 그러자 그것을 막기 위해 위군(魏軍)을 인솔하고 나갔던 주시(周市)가 임제(臨濟)에서 제왕(齊王) 전담(田儋)과 함께 격파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궁지에 몰렸던 위구(魏咎)는 백성들의 안전을 조건으로 항복했고, 이어서 스스로 분신자살(焚身自殺)했다. 그리고 그 위구(魏咎)
사후(死後), 초(楚)의 항량(項梁)의 도움으로 도망을 갔던 위표(魏豹)는 회왕(懷王)에게서 수천(數千)의 군사를 빌려서는 위(魏)의 성(城) 20여 곳을 함락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장한(章邯)이 항우(項羽)에게 항복하자, 스스로 위왕(魏王)에 올랐다.

 
기원 전 208년 유방(劉邦)은 영군(甯君)과 함께 진군(秦軍)과 싸웠지만 졌다. 그러자 다시 탕<碭=현재의 안휘성(安徽省) 탕산(碭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고, 그곳에 있던 5,6천 정도의 군사들을 본대(本隊)에 합류시켜서 다시 하읍<下邑=하남성(河南省) 녹읍(鹿邑)>을 함락했으며, 그 기세를 몰아서 다시 풍(豊)을 공격해서 겨우 함락했다.
 

                                           <안휘성 탕산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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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량(張良) Ⅱ



 <유방(劉邦)의 휘하(麾下)로>

 <진승 ·오광의 난>이 발생하자 장량(張良)도 군사를 모아서 그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100여 명 정도밖에는 모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당시, 진승(陳勝) 사후(死後) 초왕(楚王)에 옹립되어 있던 초(楚)의 舊 왕족 경구(景駒)가 유(留)에 있었으므로, 그래서 그와 함께하려고 그곳으로 가던 도중에 유방(劉邦)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장량(張良)은 몇 번이나 다른 대장(大將)들을 만나서는 자신의 병법(兵法)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단 한사람도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방(劉邦)을 만나서는 또 병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유방(劉邦)은 별 거부감 없이 장량(張良)의 말을 수용했고, 그것을 실전(實戰)에까지 사용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장량(張良)은 그에 감동하여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유방(劉邦)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영웅이다!> 아무튼 그 후, 유방(劉邦)은 경구(景駒)를 패주시키고 항량(項梁) 휘하에 있던 군사들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항량(項梁)은 새로운 왕으로 회(懷-뒤의 義帝)를 세웠다. 그러자 그때 장량(張良)은 한(韓)의 공자(公子)였던 횡양군(橫陽君) 성(成)을 한왕(韓王)에 세울 것을 진언했고, 그에 항량(項梁)도 그 의견을 따라서 성(成)을 한왕(韓王)에 옹립했으며, 이어서 장량(張良) 본인도 그 신도(申徒-史記集解에 의하면, 司徒를 말했던 것으로, 司徒는 또 前漢 시대에는 丞相 格이었음)에 임명되었다.

 사기집해(史記集解)에 의하면 신도(申徒)=사도(司徒)에 해당하며, 사도(司徒)는 중국의 관명(官名)으로, 서주(西周)시대에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삼공(三公) 다음의 지위, 즉 육경(六卿)에 상당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직무는 전토(田土=토지)와 재화(財貨) 그리고 교육(敎育) 등을 담당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위의 설명대로 전한 시대에는 승상 격이었음.

 ★ 의제(義帝-?부터 기원전 206년)는, 진말(秦末)의 정치가였고, 반진(反秦)세력 명목상의 맹주(盟主)였으며, 서초(西楚)의 군주였다. 그리고 진(秦)이 멸망한 후, 일시적인 중국의 황제였기도 했는데. 성(姓)은 미(羋), 이름은 심(心), 초(楚) 회왕(懷王)의 손자(일설에는 玄孫)였다. 그리고 초(楚) 멸망 후에 지방으로 피해서 목동(牧童=양치기)으로 살았지만, 진말(秦末) 동란기(動亂期)에 항량(項梁)에 의해서 초왕(楚王)에 즉위했으며, 조부(祖父)의 이름을 계승하고는 회왕(懷王)이 되었다. 하지만 정도(定陶)에서 항량(項梁)이 전사(戰死)하자 송의(宋義)와 유방(劉邦)을 이용해서 항량(項梁)의 뒤를 이었던 항우(項羽)를 견제했고, 그로써 반진(反秦)세력의 맹주가 되었다. 그리고 또 이른바 <회왕지약(懷王之約)>을 발포(發布)했으며, 팽성(彭城)에서 그 전쟁지도를 담당했다.

 ○ 懷王之約은 진(秦)의 首都 ・咸陽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에게 진(秦)의 본관(本貫)인 관중(關中)을 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말함

 그리고 그 결과, 기원전 207년에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진왕(秦王)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항우(項羽)는 그 뒤에 대군을 인솔해서 함양(咸陽)으로 들어갔는데, 그러자 회왕(懷王)은 <약속을 실행하라!>라고 여러 장군들에게 엄명했다. 하지만 항우(項羽)는 그 명령을 무시하고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었다. 그리고는 회왕(懷王)에게 하야(下野)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의제(義帝)는 어쩔 수 없이 성(城)을 나섰는데, 그런데 그 도중에 항우(項羽)가 보냈던 영포(英布)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그 살해 장소나 살해자가 영포(英布)였던가에 대해서는 제설(諸說)이 있으며, 장강(長江)에서 영포(英布)의 부하였던 오예(吳芮)와 공오(共敖)에게 살해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또, 바로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항우(項羽)는 반진(反秦)세력의 맹주, 혹은 진(秦) 멸망 후 중국의 실질적인 원수(元首)로서의 정당성을 잃게 되었고, 그러나 또 그 반사이익으로 유방(劉邦)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은 셈이 되어서, 앞으로 전개될 항우(項羽)의 멸망, 그리고 한(漢) 왕조의 성립으로 연결되어갔던 것이다.

 
한왕 성(韓王成-?부터 기원전 205년)은, 진말(秦末)에서 전한(前漢)초기의 인물로, 초한전쟁(楚漢戰爭)기의 한왕(韓王)이었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한(韓). 시호(諡號)는 성(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국시대 말기에 한왕(韓王)의 공자(公子)로 태어나서, 젊어서 횡양군(橫陽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기원전 230년에 한(韓)이 멸망하자 그 지위를 잃고 서민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진말(秦末) 동란기(動亂期)였던 기원전 209년경에 망한(亡韓)의 유신(遺臣)이었던 장량(張良)이 항량(項梁)에게 진언해서 그는 한왕(韓王)에 옹립되었다. 그러나 항우(項羽)의 장량(張良)에 대한 불만과(劉邦의 편에 붙었던 것) 범증(范增)의 조언에 의해서 그는 감금되었고, 그 후로 다시는 한(韓)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기원전 206년이 끝나갈 무렵, 벽지(僻地)의 한중왕(漢中王)에 봉해졌던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토벌하기 위해서 한신(韓信)을 대원수(大元帥)로 삼고 동진(東進)을 시작했다. 그러자 성(成)은 더욱 항우(項羽)의 눈에 가시가 되었고, 그런데다 또 범증(范增)이 나서서 <禍를 끊기 위해서라도 성(成)을 죽이라>고 조언했기 때문에, 결국 그는 살해되었다.<그 시체는 들(野)에 버려졌다고 한다> 아무튼,
그 비보(悲報)를 받은 장량(張良)은 몹시 슬퍼하며 항우(項羽)에 복수를 맹세했다. 그리고는 관직에서 물러나서 성(成)의 시체를 수습해서는 구한(舊韓)의 땅에다 성(成)을 극진하게 모셨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성(成)의 1세대 아래 친족이었던 신(信)을 옹립하고는, 정식으로 유방(劉邦)의 참모가 되었다.

 그 후, 장량(張良)은 한왕 성(韓王成)을 따르며 천명(千名)정도의 군세(軍勢)로 구한(舊韓)의 성(城)을 공격해서 점령했지만, 하지만 곧바로 병력의 차이로 인해서 진(秦)에 졌고, 그 결과 그 성(城)을 빼앗겼다. 그러자 정면승부는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장량(張良)은 곧 이어서 유격전(遊擊戰)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그리고 또 마침 그때 유방(劉邦)이 지원을 왔으므로, 그들과 합류해서 그 성(城)을 다시 수십(數十) 번에 걸쳐서 공격해서는 결국 한(韓)을 재흥(再興)시켰다. 그 후, 장량(張良)은 한왕 성(韓王成)에게 성(城) 하나를 맡기고는 스스로 유방(劉邦)을 따라서 진(秦) 공격에 나섰다. 그리고 동남(東南)의 관문(關門)이었던 무관(武關)에 이르렀을 때, 유방(劉邦)은 곧바로 쳐들어 가려고 했지만, 그러나 장량(張良)은 그 수장이 상인(商人) 출신인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를 돈으로 매수해서 관(關)을 열게 하고는, 그리고는 또 그가 방심하고 있던 사이에 급습해서 그를 죽이고는 손쉽게 관중(關中)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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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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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3. 거병(擧兵)

 유방(劉邦)이 정장(亭長)을 맡고 있었을 때, 하루는 부역(賦役)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부역에 참가할 인부들을 데리고 함양으로 떠났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던 도중에 진(秦)의 기혹한 노동과 형벌을 잘 알고 있었던 인부들이 하나둘씩 차례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화가 났던 유방(劉邦)은 술을 진탕 마시고는 잠이 들고 말았는데, 그런데 또 그 사이에 남아 있던 인부들마저 전부 도망을 가버렸고, 그러자 낙담을 했던 유방(劉邦)은 하는 수 없이 자신도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 기원전 209년에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했다. 그러자 패(沛)의 현령(縣令)은 거취를 결정하지 못해서 망설였다. 그러자 또 그때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나서서 당시 인기가 있었던 유방(劉邦)을 내세워서 반란에 참가할 것을 그 현령에게 조언했다. 그래서 일단 유방(劉邦)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 현령은 마음을 바꾸고는 패성(沛城)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왔던 유방(劉邦)은 현령이 자신을 내쫓으려고 하는 것이란 것을 알고는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냈다. 그리고는 비단에다 다음과 같은 글(편지)을 써서 城안으로 던져 넣었다.<중국의 도시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성새(城塞)도시이기 때문에>

 <현재, 이 성(城)을 필사적으로 지키려든다면 이제 곧 머지않아 들이닥칠 반란군에 의해서 이 성은 점령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성 안의 사람들은 큰 재앙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바로 현령을 죽이고 의지가 되는 인물(劉邦 자신)을 내세워야 한다!>

 그러자 성내의 사람들은 그 현령을 죽이고 유방(劉邦)을 맞아들였다. 하지만 유방(劉邦)은 처음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서 그것을 거절했지만, 그러나 연이어서 소하(蕭何)와 조참(曹參)까지 그를 추천하고 나서자 어쩔 수 없다는 형식으로 그 현령 직을 수락했다.

 그 후 유방(劉邦)은 패공(沛公)으로 불렸다. 그리고 또 그때 유방(劉邦)이 모았던 병력은 2, 3천 정도였으며, 그 중에는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외에도 개고기장사를 하고 있었던 의제(義弟) 번쾌(樊噲)와 유방(劉邦)의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또 같은 날 태어났다던 노관(盧綰) 그리고 또 현(縣)의 마구간지기였던 하후영(夏候嬰) 그리고 또 베짜는 일을 하던 주발(周勃)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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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소개

 번쾌(樊噲)는 중국 한나라 고조 때의 공신(?~B.C.189)으로, 기원전 206년 <홍문(鴻門)의 회합>에서 위급한 처지에 놓였던 유방을 구하였고, 그 후에 유방이 왕위에 오르자 장군이 되었다. 출신은 패현(沛縣). 작위(爵位)는 무양후(舞陽侯). 시호(諡號)는 무후(武侯). 그리고 그는 아주 강하고 굳센 사람이었다고 전하며, 유방(劉邦)과 알고 지냈던 당시, 개를 취급하던 백정이었다. 하지만 유방(劉邦)이 거병하자 반진봉기(反秦蜂起)에 참여했고, 그 후 많은 공적을 올렸다. 그 후, 그는 진(秦)이 멸망하자 현성군(賢成君)에 봉해졌으며, 궐기 이전부터 여치(呂雉)의 여동생이었던 여수(呂須)와 혼인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왕실과의 신뢰는 더욱 두터워졌다. 그리고 한(漢)왕조 성립 후에는 '한왕 신'과 '한신'의 모반에 동조했던 '진희(陳豨)'를 토벌하고 공적을 올리기도 했지만, 그러나 기원전 195년, 어떤 이의 중상모략(中傷謀略)으로 체포되었고, 하지만 또 고조
(高祖)의 죽음과 함께 석방되었다. 하지만 (효)혜제<孝惠帝=전한(前漢) 2대(代) 황제> 6년(기원전 189년)에 그도 사망했으며, 그러자 그의 뒤를 적자(嫡子)였던 번항(樊伉)이 이었지만, 그러나 또 여치(呂雉)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일어났던 정변에 의해서 여 씨(呂氏) 일족이 몰살당하는 과정에서 생모(生母) 여수(呂須)와 함께 그도 살해당했다. 그리하여 그(樊噲)의 뒤는 측실(側室)에게서 태어났던 번시(樊市)가 잇게 되었다.

 
한왕 신(韓王信-?부터 기원전 196년)은,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무장, 정치가였고. 초한전쟁기의 한왕(韓王)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한신(韓信)이지만, 그러나 또 동시대에 살았던 동성동명의 한신(韓信), 즉 유방(劉邦) 휘하에 있었던 회음후(淮陰侯)와는 구분된다. 그리하여 그 한신(韓信)과 혼동되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에 위의 한신(韓信)은 <한왕 신(韓王信)>으로 호칭되는 것이 통례이다. 아무튼 그는 전국시대 한(韓)나라 양왕(襄王)의 서자(庶子)의 손(孫)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아직 어렸을 때 나라가 망해서 그는 모든 지위를 잃었다. 그리고 진말(秦末) 동란기(動亂期)에 항량(項梁)과 장량(張良)에 의해서 한왕(韓王)으로 옹립되었던 횡양군(橫陽君) 한성(韓成)은 그의 족부(族父-혈연이 아닌 같은 족의 어른, 아저씨뻘)에 해당되었지만, 그러나 그 한성(韓成)은 진(秦) 멸망 후, 항우(項羽)의 노여움을 사서 살해되었다. 어쨌든 한왕 신(韓王信)은 초한전쟁(楚漢戰爭) 초기, 장량(張良)의 추천을 받아서 유방(劉邦)으로부터 한(韓)의 태위(太尉=군사담당宰相)에 임명되었고, 그 후에는 또 한왕(韓王)으로 봉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유방(劉邦)의 휘하에서 초한전쟁(楚漢戰爭)에 참가했으며, 덧붙여서 그는 유방(劉邦)이 처음으로 봉건(封建)했던 제후왕(諸侯王)이었다. 그 후, 초한전쟁(楚漢戰爭)이 종결했고,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흉노(匈奴)를 막기 위해서 태원군(太原郡)을 한(韓)으로 개명하고는 그곳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머지않아 실제로 흉노(匈奴)가 그곳을 침공해왔는데, 그러자 그는 목돌선우(冒頓單于)와 휴전교섭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배신행위로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는 의심을 사느니 차라리 흉노(匈奴)에 투항했다. 그 후, 그는 흉노(匈奴)의 장군이 되어서 자주 한군(漢軍)과 교전했지만, 그러나 기원전 196년, 진무(陳武=紫武)와의 싸움에서 져서 죽었다. 그리고 무제(武帝)의 총신(寵臣)이었던 한언(韓嫣)과 한설(韓說)은 그의 증손(曾孫)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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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관(盧綰)>

 기원전 256 또는 기원전 247년-기원전 194년.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무장. 전한(前漢)초기의 연왕(燕王).
노관(盧綰)의 부친은 유태공(劉太公)과 친구사이였고, 그와 또 유방(劉邦)이 같은 날 태어났던 것으로 해서 두 사람은 친구로 자랐다. 그래서 훗날 유방(劉邦)이 죄를 짓고 도망갔을 때<함양에 부역을 나갔다가 인부를 다 잃고 오지(奧地)로 숨어들었을 때>도 그는 함께 했다. 그리고 또 그 관계는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고 나서도 계속되었고, 또한 유방(劉邦)은 그런 이유 등으로로 해서 그만을 자신의 침실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는 유방(劉邦)이 거병했을 때도 유방(劉邦)과 함께 각지를 전전했다. 그리고 또 초한전쟁(楚漢戰爭) 때에는 유가(劉賈=劉邦의 사촌형)와 함께 유방(劉邦)의 명(命)을 받아서 창읍(昌邑)에서 팽월(彭越)과 합류해서 초군(楚軍)의 보급기지를 습격했고, 그것을 성공시켰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식량난에 빠져서 최후까지 고전(苦戰)했다. 그 후, 기원 전 202년, 유방(劉邦)이 제위(帝位)에 오르자마자 연왕(燕王) 장도(臧筡)가 반란을 일으키고 패사(敗死)했다. 그러자 당시 태위(太尉)였던 그가 그 자리에 올라 연왕(燕王)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95년, 그는 영포(英布) 토벌 때 입었던 부상이 원인이 되어서 건강이 더욱 나빠졌고, 그런데다 또 설상가상으로 그가 모반을 획책했다는 모함까지 있어 그는 하루아침에 반역자로 전락했다. 그리고 동년(同年) 여름, 유방(劉邦)이 미앙궁(未央宮)에서 세상을 떠나자 태자 유영(劉盈=惠帝)이 즉위했다. 그러자 그는 여치(呂雉)가 곧 그의 후견(後見)으로 나설 것을 알고는 흉노(匈奴)로 망명했다. 그러자 또 목돌선우(冒頓單于)는 그를 환영했고 <동호(東胡)의 노왕(盧王)>에 봉건 했다. 하지만 그는 그 1년여 만에 병사했고, 그리고 여치(呂雉)의 시대에 그의 처자(妻子)는 한(漢)이 그리워서 기원전 180년에 비밀리에 흉노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또 그 당시 여치(呂雉)는 중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래서였던지 그들의 죄를 모두 용서해주고 사망했다. 그러나 곧 이어서 그의 처도 병사했으며, 기원전 144년에는 그의 손자였던 노타지(盧他之)가 당시, 흉노(匈奴)의 동호왕(東胡王)이었지만, 한(漢)에 귀순했다. 그러자 경제(景帝)는 그를 아곡후(亞谷侯)에 봉했다.

 
유가(劉賈-?부터 기원전 196년)는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무장으로, 유방(劉邦)의 사촌형제였고, 작위는 형왕(荊王)이었다. 그리고 초한전쟁(楚漢戰爭) 기에 노관(盧綰)과 함께 창읍(昌邑)에서 팽월(彭越)과 합류했으며, 그리고는 팽월(彭越)의 지휘 하에 초군(楚軍)의 보급기지를 습격해서 성공했다. 그리고 또, 항우(項羽)의 부하였던 대사마(大司馬)·주은(周殷)을 설득해서 한(漢)에 귀순시켰다. 기원전 201년, 한신(韓信)이 모반으로 실각하자 유방(劉邦)은 그 영토를 남북으로 분할해서 남부를 형국(荊國), 북부를 초국(楚國)으로 정했다. 그리고 유가(劉賈)는 그 형왕(荊王)에, 그리고 또 유방(劉邦)의 이모제(異母弟)였던 유교(劉交)는 초왕(楚王)에 봉했다. 기원전 196년 가을, 회남왕(淮南王)·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가(劉賈)는 정벌에 나섰지만, 그러나 그 전쟁에서 패하고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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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후영(夏候嬰)> ?-기원전 172년

 진(秦), 전한(前漢)시대의 무장. 패현(沛縣) 출신. 유방(劉邦)을 잘 따랐으며, 현(縣) 소속 마구간에서 근무했다.(마부와 書記 일도 함께 했다고 함) 그러다가 유방(劉邦)이 군사를 일으키자 동조했으며, 그 공으로 나중에 태복(太僕)에 임명되었고
, 이어서 등공(滕公)에 봉해졌다. 그 후, 계속해서 그는 태복(太僕)으로 종군했으며, 한신(韓信)이 국사(國士)로 추천되었을 때 동의했다.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유방(劉邦)이 도주를 하면서 자신의 두 자식(惠帝와 魯元公主)을 마차에서 밀어서 떨어뜨렸을 때, 그는 그 두 사람을 구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화를 내며 그마저 죽이려 했지만, 결국 도주에 성공했다. 그러자 그는 더욱 신임을 받았고, 이어서 소평후(昭平侯)에 봉해졌다. 유방(劉邦)이 천하통일을 이루자 그는 다시 여음후(汝陰侯)에 봉해졌고, 이어서 초(楚)의 장군이었던 계포(季布)를 위기에서 구출해내고는 유방(劉邦)에게 추천했다. 그러자 계포(季布)는 유방(劉邦)으로부터 낭중(郎中=근위병)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하동군(河東郡)의 태수(太守)가 되었다. 만년(晩年)에 들었던 그는 여 씨(呂氏) 멸(滅) 후 진평(陳平), 주발(周勃), 관영(灌嬰) 등과 함께 유방(劉邦)의 4子였던 유항(劉恒=太宗・文帝)을 옹립했고, 기원전 172년에 죽어서, 문후(文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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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발(周勃)> ?-기원전 169년

 유방이 어렸을 때부터 키웠던 무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위는 강후(絳侯), 시호는 무후(武侯)였다. 그리고 그의 먼 조상은 권(卷)이란 현(縣)에서 패(沛)로 이주해왔다고 하며, 원래는 베짜는 일을 했으나 부업으로 장의사도 함께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유방(劉邦)이 거병했을 때 함께 했고,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무위후(武威侯)가 되었다. 그 후에 그는 선봉을 맡아서 장평(章平) 등을 무찌르는 등 공을 세웠다. 그리고 진평(陳平)이 유방에 귀순해 왔을 때, 그의 인물됨이 나쁘다는 것을 들어서 반대했다. 그 후,
유방(劉邦)이 죽고 또 그 후(後)였던 기원전 180년에 여치(呂雉)가 죽었다. 그러자 여 씨(呂氏) 일족이 황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말이 제왕(齊王)의 동생 귀에 들어갔다. 그러자 제왕(齊王) 유양(劉襄)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러자 또 주발(周勃)은 당시 우승상(右丞相)이었던 진평(陳平)과 힘을 합쳐서 여 씨(呂氏) 일족을 정리했다. 그 후, 그는 그 공적으로 병을 핑계 삼아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문제(文帝)와 진평(陳平)의 권유로 다시 돌아와서 진평(陳平)은 우승상(右丞相), 본인은 좌승상(左丞相)이 되었다. 하지만 점점 진평(陳平)의 능력을 인정하게 된 그는 다시 사임했다. 하지만 또 진평(陳平)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다시 승상(丞相)이 되었는데, 그러나 또 그는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서 투옥되었고, 그러자 그는 옥졸에게 돈을 주고 “무실(無實=無罪=억울함 또는 誣告함)”이라고 쓴 편지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원앙(袁盎-文帝의 신하)과 문제(文帝)의 모(母) 박태후(薄太后)의 노력으로 그는 석방되었다. 그러자 그는 또 <내가 예전에는 백만의 군세를 지휘했던 적도 있었지만, 일개 옥졸에게 그렇게 큰 힘이 있는 줄은 몰랐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영지로 돌아가서 편안한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 진평(陳平)은 중국 한나라의 정치가(?~B.C.178)였고, 한고조를 도와서 천하 통일을 이루었으며, 여 씨(呂氏)의 난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처음에 그는 위구(魏咎), 항우(項羽) 등의 휘하에 있었지만, 유방(劉邦)에게 의탁(依託)하면서 초한전쟁(楚漢戰爭)을 치르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자 유방(劉邦)의 유언에 따라서 그는 결국 승상(丞相)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여치(呂雉) 사후 반란을 수습하면서 유 씨(劉氏) 정권을 지켜냈다.

  위구(魏咎-?부터 기원전 208년)는, 전국시대 후기부터 진대(秦代)의 정치가였고, 위(魏) 왕실의 일족이었다.

 
그리고
그는 양무호판(陽武戸版=현재의 河南省 原陽縣)의 사람으로, 선천적으로 키가 크고, 훌륭한 용모(容貌)를 갖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젊었을 때는 형(兄=陳伯=陳家 장남)의 농가(農家)에서 면학에 힘썼다는 데, 하지만 그의 형수가 무위도식하는 그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으므로, 그의 재능을 믿고 있었던 그의 형은 그녀와 이혼을 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이런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당시, 그곳의 유력자(有力者)들 중에서 장 씨(張氏)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손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손녀와 결혼을 했던 남자들 5명이 전부 사고나 병이 나서 죽어버렸다. 그러자 그 후로는 그녀가 무서워서 아무도 그녀에게 장가들려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말을 들었던 진평(陳平)은 그 일들을 치러냈던 장의사의 일을 도우면서 자신의 근면함을 그 장 씨(張氏)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또 그 다음으로 귀족들이 타고 다니던 마차의 차바퀴를 자신의 집 현관에다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그의 뒤를 밟았던 장 씨(張氏)가 그것을 보았고, 그리고는 그에게 높은 뜻이 있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손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그러자 그 후, 그는 막대한 지참금을 손에 넣었고, 그것으로 인맥을 넓혔다. 그리고 그는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하자 자신을 따르던 젊은이들과 함께 위구(魏咎)의 휘하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인물의 부족함을 느꼈던 데다 중상모략까지 겹쳐져서 항우(項羽)에게로 도망을 갔다. 그 후에 또 그는 모반을 일으켰던 은왕(殷王)・사마공(司馬)을 항복시킨 공으로 도위(都尉)가 되었으나, 사마공(司馬)이 다시 유방(劉邦)에게 항복을 해버렸기 때문에, 항우(項羽)의 벌이 무서워서 그는 다시 도망을 갔다.

 ○ 사마공(司馬邛-?부터 기원전205년)은, 진말(秦末)의 인물이며, 진(秦)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던 조(趙)의 부장(部將)이었다. 사마앙(司馬卬)이라고 표기된 곳도 있다.

 하지만 그 중간에서 그는 도적떼를 만나서 목숨을 잃을 뻔도 하였는데, 그러자 그는 또 자신이 입고 있던 옷과 칼 등을 그들에게 건네주고는 목숨을 겨우 건졌다. 그리고는 거의 알몸상태로 옛날에 알고 지내던 위무지<魏無知-이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魏나라 사람 누구 또는 위 씨(魏氏) 누구 정도로 해석함. 그리고 췌사로, 위무기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랍니다>를 찾아가서 그 연줄로 유방(劉邦)을 만났다. 그러자 유방(劉邦)도 마음에 들어 했고, 바로 그날로 항우(項羽)와 같이 그를 도위(都尉)에 명했다. 하지만 그때 주발(周勃)과 관영(灌嬰)이 그 인사를 반대하고 나왔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그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았는데, 그러자 그는 자신의 형수와 밀통하고 있었다든지, 뇌물을 받고 인사를 결정했다든지 하는 것들이 거론되었다. 그러자 그가 스스로 해명하기를 <보직(補職)은 받았으나 그에 따른 경비는 받지를 못했고, 나라 일과는 관계없이 가져온 것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한(漢)에서는 인재(人才)가 중요한 것이지, 그런 것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유방은 그를 더욱 마음에 들어 했고, 그의 지위를 아장(亞將-장군에 다음가는 위치)으로 격상시켜서 '한왕 신(韓王信)'에 소속시켰다. 그로부터 또 얼마 후,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에게 쫓겨서 형양성(滎陽城)에 칩거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런 불리했던 상황을 타개하고자 진평(陳平)이 나섰다. 그리고는 유방(劉邦)에게 <항우(項羽)는 원래 의심이 많은 자이므로, 그것을 이용해서 부하들과 이간시키는 계략을 써보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진언을 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그 계책을 수락했고, 진평(陳平)에게 거금(巨金) 4만금(萬金)을 주었다. 그러자 진평(陳平)은 그 돈을 이용해서 항우(項羽)의 중신들<범증(范增), 종리매(鐘離昧), 용차(龍且), 주은(周殷) 등>이 스스로 나라를 세우려는 마음(독립)을 품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흘려서 항우(項羽)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 말을 믿고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특히 범증(范增)은 당시 항우(項羽)의 부하들 중에서 제일로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더욱 치밀하게 공작을 펼쳐서, 그 진위(眞僞)를 알아보기 위해 항우(項羽)에게 화평을 신청한다는 의미로 사자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윽고 사자가 왔는데, 그러자 진평(陳平)은 그 사자가 범증의 사람(手下)인 줄 거짓으로 알아차리고는(일부러) 화려한 연석에 초대했다. 그리고는 또 범증(范增)과 자신들이 아주 사이가 좋은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그 사자가 <자신은 항우의 사신>이라는 말을 듣게 되자 태도를 갑자기 돌변시켜서는 아주 초라한 상으로 바꿔버렸다. 그리고는 또 그 사자가 들으라는 듯이 유방(劉邦)에게 <우리는 당연히 이길 수 있지만, 그러나 옛정을 생각해서 화평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아주 건방진 태도로 그 사자를 접대했다. 그러자 그 사자는 돌아가서 그대로 항우(項羽)에게 고했고, 그에 항우(項羽)는 화가 나서 범증(范增)을 쫓아내버렸다. 그러자 범증(范增)은 귀향(歸鄕) 길에서 분사(憤死)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리고 또 그 후에 한신(韓信)이 제왕(齊王)이 되겠다고 원해왔을 때, 유방(劉邦)은 분개해서 날뛰었지만, 그때도 그는 장량(張良)과 함께 유방(劉邦)을 달랬다고 한다. 그리고 또 광무산(廣武山=洛陽 근처)에서 항우(項羽)와 화해를 했을 때도, 그는 장량(張良)과 함께 그것을 깨고 쳐들어가야한다고 간언했고, 그리하여 결국 한(漢)은 승리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02년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승리해서 전한(前漢)이 성립되자, 그는 고향 호판(戶版)에 봉해져서 호판후(戶版侯)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기원전 200년, 유방(劉邦)이 흉노(匈奴)토벌에 친정했는데, 그런데 목돌선우(冒頓單于)의 작전에 휘말려서 평성(平城=현재의 山西省 大同부근)의 백등산(白登山)에서 포위되었던 적이 있었다.

 ※ <소개>

 
아래 그림은 산서성(山西省) 대동 시(大同市)에 접한 태원 시(太原市)의 위치도이며, 그 아래 그림은 <雲崗洞窟=世界遺産>임. 그리고 雲崗洞窟(윈강석굴)은 중국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서쪽에 있는 중국 최대의 불교 석굴사원으로, 북위(北魏)시대인 460년에서 494년 무렵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양식과 중국양식이 섞여있다고 함.
 



 그리고 이어서 식량도 바닥이 나버렸는데, 그런데 그때도 진평(陳平)은 기책(奇策)을 행해서 화해를 하고는 유방(劉邦)을 그 위기에서 구출해냈다. 하지만 그 기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현재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러나 굳이 말하자면 진평(陳平)은 몰돌선우(冒頓單于)의 알씨(閼氏=皇后)에게 <만약에 목돌선우가 이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면, 중국의 미녀들은 모두 목돌선우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등의 말을 해서, 그 질투심을 이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그리고 또 기원전 195년, 유방(劉邦)은 연왕(燕王) 노관(盧綰)의 토벌을 번쾌(樊噲)에게 명했다. 하지만 그때 번쾌(樊噲)는 출정은 하고도 토벌(죽이지는)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도 모반에 참여했다고 보고, 그도 함께 죽일 것을 진평(陳平)에게 명했다. 하지만 사실, 번쾌(樊噲)는 그때 노관(盧綰)이 모반을 일으켰을 확률은 낮고 또 병상의 유방(劉邦)이 했던 말이었던 데다 후환이 두려워서 노관(盧綰)을 잡아놓고도 처형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로부터 얼마 후에 유방(劉邦)이 세상을 떠나자 진평(陳平)은 급히 달려와서 울며불며 매우 슬픈 모습을 보인 것으로 여 씨(呂氏) 일족의 경계를 풀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기원전 190년에 조참(曹參)이 죽자 그는 좌승상(左丞相=副首相格)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여치(呂雉)의 전성시대에는,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배반함)의 자세로 여치(呂雉)와 대립했던 왕릉(王陵)이 실각하자 그는 또 그 자리를 이어받아서 우승상(右丞相)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름뿐이었던 자리였다. 그러자 진평(陳平)은 주색(酒色)에 빠진 것처럼 하면서 여치(呂雉)와 그리고 또 자신의 남편(樊噲)을 포획했다는 것으로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여수(呂須)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또한 그 숙청의 시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드디어 기원전 180년, 여치(呂雉)가 죽자 그는 육가(陸賈)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연회(宴會)를 가장한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大尉・周勃을 시작으로 하는 반(反) 여 씨(呂氏) 세력과 그리고 또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을 모으기(포섭) 시작했다.

 육가(陸賈-생몰불상)는, 중국 전한의 학자, 정치가였고, 초나라 사람으로 고조를 섬겨서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으며, 여씨(呂氏)의 난에 유씨(劉氏)를 도와서 한나라 왕실을 지켰다. 저서에 <신어>, <초한춘추(楚漢春秋)>가 있다.

 그러나 그때, 감시감독을 철저히 하고 있었던 여 씨(呂氏)들도 애주호색(愛酒好色)하던 그가 벌였던 연회라 그런지 별 경계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관영(灌嬰) 등을 이용해서 여치(呂雉)의 조카였던 여록(呂祿)을 설득시켜서 병권(兵權)을 반납 받았다. 그리고는 또 그 군사를 이용해서 여치(呂雉)의 다른 조카였던 여산(呂産)의 쿠데타를 진압했으며, 이어서 그 여세를 몰아서 여 씨(呂氏) 일족을 몰살하는 역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후, 그들은 유방(劉邦)의 친자(親子) 유항(劉恒=文帝)를 즉위시켰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는 곧 은퇴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와 주발(周勃)의 요청으로 다시 우승상(右丞相)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편, 그 쿠데타 진압 시에 비록 병권은 잡았지만 그러나 병사들이 자신들을 따를지 어떨지 몰랐던 그들은(周勃이었다고 한다) <만약에, 유 씨에게 가담하려는 사람들은 좌단(左袒-왼쪽 어깨 또는 소매. 그러나 여기서는 어깨로 표현함)을 벗고, 여 씨에게 가담하려는 사람들은 우단(오른쪽 어깨)를 벗어라!>라고 포고(布告)를 하자, 병사들은 모두 좌측을 벗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것이 정의의 편에 서는 것에 <찬성한다>는 뜻인 <좌단(左袒)의 고사(故事)>가 되었다고 한다.(史記의 呂后本紀) 아무튼, 기원전 179년에 그는 사망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의 작위는 그의 증손이었던 진하(陳何)에게까지 계승되었지만, 그러나 그 진하(陳何)가 다른 사람의 아내와 침취(寢取)했었다고 해서 처형됨으로 해서 작위를 빼앗겼다. 그리고 또, 같은 진평(陳平)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 또는 손자의 손자)이었다는 진장(陳掌)은 곽거병(霍去病)의 어머니와 밀통(密通)을 해서 곽거병(霍去病)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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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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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2. 태풍전야(颱風前夜)

 '반진(反秦)전쟁'에 참가하기 전, 유방(劉邦)은 이른바 협객(俠客)으로 가업(家業=농사)을 싫어했으며, 주색(酒色)을 좋아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 단, 표현은 협객(俠客)이라고 하고 있으나, 흔히 알고 있는 그런 협객은 아니며, 일종의 시정잡배(市井雜輩) 정도로 볼 수
있음.

 그러던 중에 그는 사수(泗水)의 정장(亭長)으로 취임했지만, 그러나 그 임무에 충실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그때, 그 패현(沛縣)의 관리(官吏)들 중에서는 나중에 유방(劉邦)을 도와서 패업을 달성하게 되는 <소하(蕭何)>와 <조참(曹參)>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 시기에는 그들도 유방(劉邦)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인덕(人德)이 아주 많았던 사람으로, 그가 무슨 일을 잘못했어도 주위에서 옹호(擁護)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며, 술집에 들어갔을 때도 항시 그가 들어가고 나면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만석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는 당시 <장이(張耳)>의 식객(食客)이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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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소개

 소하(蕭何-?부터 기원전 193년)는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정치가였고, 소위 유방(劉邦)의 삼걸(三傑) 중에 한명이었다. 그는 또 유방(劉邦)과 같은 패현(沛縣) 출신이었으며, 젊었을 때부터 관리(官吏)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직책은 낮았지만 그 일하는 태도는 성실했고, 능력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이어서 소개할 조참(曹參)은 당시 그의 부하였으며, 진말(秦末)의 동란기(動亂期)에 조참(曹參) 등과 함께 패현성(沛縣城)에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진(秦) 조정(朝政)에서 파견되어 와 있던 현령(縣令)을 살해하고는 유방(劉邦)을 그 후임으로 맞이했다. 그 후, 그는 유방(劉邦)의 진영(陣營) 내에서의 내부 사무를 모두 관리했고, 그 후에는 병참(兵站)까지도 맡았다. 그리고 또 그는 유방(劉邦)이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점령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물(寶物) 등에 관심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혼자서 진(秦)의 역사서(歷史書)나 법률 또는 각국(各國)의 인구에 관한 기록 등이 보관되고 있던 문서고(文書庫)로 달려가서 항우(項羽)가 그것들을 모두 파괴하기 전에 전부 수거하는데 성공을 했으며, 그것이 또 훗날 한(漢) 왕조의 기초를 다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06년, 드디어 진(秦)이 멸망했고,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그는 승상에 임명되어서 내정(內政) 일체를 담당했다. 그런데 그때 하후영(夏候嬰)이 한신(韓信)을 추천해 왔는데, 그러자 그 재능에 감동했던 그는 한신을 유방(劉邦)에게 추천했지만, 그러나 정작 한신(韓信)은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한직(閑職)이었던 것에 불만을 품고는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그는 한신(韓信)을 곧 뒤따라가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다시 추천을 할 것이니 같이 돌아갑시다. 하지만 만약에 이번에도 당신에게 한직(閑職)이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나 또한 한(漢)을 버리겠소!> 그러자 한신(韓信)은 마음을 돌렸고, 이어서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에 의해서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 한신(韓信)은 당시 가문이나 명성 같은 것도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고, 원래는 초(楚)의 잡병(雜兵)으로, 한(漢)에서도 일개병졸에 불과했었던 인물이었다. 그랬으므로 그때의 그런 인사(人事)는 당연히 파격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또 그것으로 유방(劉邦)이 당시 소하(蕭何)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리고 또 그 후에 유방(劉邦)이 관중(關中)에 들었을 때 소하(蕭何)도 함께 관중(關中)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곳에서도 그의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어서 행정이나 병참까지도 완벽하게 처리했고, 그로써 또 그는 명 승상(名丞相)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결과로 기원전 202년에 초한전쟁(楚漢戰爭)이 유방(劉邦) 군의 승리로 끝나자 그 전공(戰功)의 제일(第一)은 당연히 그에게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고 전한(前漢)이 일어나게 되자, 그는 계속해서 승상을 맡았으며, 그때부터는 오랜 세월동안 계속된 전란으로 인해서 몹시 황폐해졌던 국토의 부흥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196년에는 한신(韓信)이 모반(謀反)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책략을 써서 그를 토벌했으며, 그러자 또 그 공이 인정되어서 그는 신하로서는 최고의 직책이었던 상국(相國)에 임명되었고, 검리상전(劍履上殿), 입조불추(入朝不趨), 알찬불명(謁讚不名) 등의 특권이 그에게 주어졌다.


 ★ 검리상전(劍履上殿), 입조불추(入朝不趨), 알찬불명(謁讚不名)은 모두 공적(功績)이 높은 신하에게 왕이 내리는 특권들이며, 차례로 검리상전(劍履上殿)은 칼을 휴대하거나, 신을 신은 채로 즉, 갖춘 복장 그대로 궁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이었으며, 입조불추(入朝不趨)는 신하가 왕을 배알할 때 종종걸음을 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특권을 받은 공신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 그리고 또 알찬불명(謁讚不名 또는 贊拜不名)이란 신하가 왕을 배알할 때, 그 관직(官職)만 부르고 성명(姓名)은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음.

 
그러나 그 즈음부터 유방(劉邦)은 소하(蕭何)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부하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그때부터는 일부러 악정(惡政)을 행한다거나 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평판을 실추시켰고, 또는 자신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키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해서 어떻게든 숙청만은 면했다. 그리고 유방(劉邦)이 죽자 그 2년 후에 그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남조(南朝=南北朝時代) 때, 제(齊)를 건국했던 소도성(蕭道成)은 그의 자손으로 자칭(自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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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참(曹參)> ?-190년

 성(姓)은 조(曹) 씨. 시호(諡號)는 참(參), 자(字)는 경백(敬伯).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 제2代 상국(相國)이 된 정치가.
 <황로(黃老)의 학(學)>을 존중했다.

 

<黃帝>

 ※ 황노사상(黄老思想)은, 중국 전국시대부터 한초(漢初)에 걸쳐서 유행했던 도가(道家) 일학파(一學派)의 사상이었으며, 그 학문을 <황로(黃老)의 학(學)>이라고 불렀다. 황제(黃帝)를 시조로 해서 노자(老子)를 대성자(大成者)로 여겼고, 황제사경(黃帝四經)과 노자(老子道德經)가 그 사상적 근거나 경전(經典)이 되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에서는 제(齊) <직하(稷下-앞에서 소개되었음)의 학자>였던 신도(愼到)・전병(田騈)・접자(接子)・환연(環淵) 등을 그 대표인물로 꼽았다.

 황제(黃帝) = 중국 전설상의 제왕.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 복희씨, 신농씨와 함께 삼황(三皇) 또는 오제(五帝)로 불리는데, 처음으로 곡물재배를 가르치고 문자·음악·도량형 등을 정했다고 하며, 최근까지 중국의 시조로 숭배되었다.(역시, 앞에서 충분히 소개되었음)

 노자(老子) =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耼)·백양(伯陽). 도가(道家)의 시조로, 상식적인 인의와 도덕에 구애되지 않고 만물의 근원인 도를 좇아서 살 것을 역설하고, 무위자연을 존중하였다. 노자도덕경.


<老子>


 ★ 신도(愼到) =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학자·사상가(?~?). 저서에 <신자(愼子)> 5편이 있다.

 ★
신불해(申不害) = 중국 전국시대 한(韓)나라의 학자·정치가·사상가(?~B.C.337). 도가(道家) 사상을 바탕으로 형명학(刑名學)을 주장하였으며, 한나라 소후(昭侯)의 재상이 되어서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저서에 <신자(申子)> 2권이 있다.

 ★
형명학(刑名學) =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학문으로, 중국 전국시대에 신불해(申不害), 상앙(商鞅), 한비자 등이 제창하였다.

 ★
한비자(韓非子) =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한비가 지은 책. 형벌의 이름과 방법을 논한 것이다. 55편 20책.

 자식으로는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냈던 조줄(曹窋)이 있었고, 작위(爵位)는 평양후(平陽侯). 시호(諡號)는 의후(懿侯)였다. 조참(曹參)은 패현(沛縣) 사람으로, 진(秦) 시대에는 패현(沛縣)의 형무소(刑務所) 속리(屬吏=하급 공무원=구실아치)였다. <그리고 그때, 소하(蕭何)는 그의 상관이었다> 그러다가 유방(劉邦)이 군사를 일으키자 중연(中涓=侍從)으로 종군했다. 그 후 그는 유방(劉邦)과 각지를 전전했고, 남전(藍田)의 동쪽으로 진군해서 야습(夜襲)으로 진군(秦軍)을 대패시키고는 마침내 함양(咸陽)에 입성했다. 그 후 장군이 된 그는 이번에는 초군(楚軍)을 상대로 전전했으며, 고조(高祖) 2년(기원전 204년)에 좌승상(左丞相-명목상의)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그때부터 한신(韓信)의 군(軍)에 종군하면서 위(魏)·조(趙)·제(齊)를 격파했고, 이어서 유방(劉邦)과 한신(韓信) 연합군이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천하를 거의 평정했을 때. 그도 그때까지도 복종하지 않고 있었던 제(齊)를 평정했다. 그 후, 논공(論功)에서 수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분전했던 그 또한 서열에 올랐으나, 그러나 결국 제1의 공은 소하(蕭何)에게로 돌아갔다. 그 후, 유방(劉邦)이 조부인(曹夫人)이 생산했던 서장자(庶長子)·유비(劉肥=悼惠王)를 한신(韓信)으로부터 몰수했던 그 제국(齊國)의 왕으로 삼자 조참(曹參)은 그 나라의 상국(相國)이 되었다. 그리고 또 당시, 제(齊)는 70여 성(城)을 가졌던 대국(大國)이었으므로, 그것으로 유방(劉邦)의 그에 대한 신뢰를 읽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고조(高祖) 6년(기원전 201년)에 제후(諸侯)의 작위를 받았고, 그리하여 평양(平陽)의 1만6백3십 호(戶)를 영지로 받았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반란을 일으켰던 진희(陳豨) 소속의 장군 장춘(張春)을 진압하고 포로로 잡아서 처형했으며, 경포(黥布=英布)의 반란 때도 공을 세워서 재차 승상이 되었다.(惠帝 원년인 기원전 194년) 그 후에 그는 장로(長老)와 학자(學者) 등을 초빙해서 민심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모두 의견이 달랐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개공(蓋公)이란 사람에게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는 그 사상을 따라서 통치했다. 그리고 또 위발(魏勃-생몰미상. 秦末부터 前漢 初期의 무장) 등 유능한 인재를 등용했으며, 그리하여 그가 제국(齊國)의 승상으로 지낸 그 9년간 나라는 안정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현상(賢相)으로 칭해졌다. 다음, 혜제(惠帝)2년(기원전 193년)에 소하(蕭何)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상경(上京)준비를 했다. 그리하여 죽기 전에 소하(蕭何)가 추천했다는 대로 그는 한(漢)의 상국(相國)이 되었다. 그러나 혜제(惠帝)5년(기원전 190년)에 그 역시도 세상을 떠났으며, 그러자 그에게 의후(懿侯)란 시호가 내려졌고, 백성들은 그를 칭송하며 생전의 덕정(德政)에 고마워했다. 그리고 사마천(司馬遷) 또한 그가 <덕 있는 정치를 베풀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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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이(張耳)> ?-기원전202년(漢太祖1년)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무장(武將) 및 조왕(趙王). 출신은 위(魏)의 대량(大梁)이었고, 청년시절에 위(魏)의 공자(公子)였던 신릉군(信陵君)의 식객(食客)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 신릉군은 중국 전국 시대 위(魏)나라의 정치가(?~B.C.244)였으며, 이름은 무기(無忌)였고, 문하에 식객 3천 명을 거느렸다고 한다. 제나라의 맹상군, 초나라의 춘신군, 조(趙)나라의 평창군(平昌君)과 함께 전국(戰國) 말기의 사군(四君)으로 꼽혔다.

 하지만 그 신릉군(信陵君)이 정치(政治)에서 물러나는 등 사정이 생기자 외황(外黃)으로 이주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현지 부호의 딸과 결혼한 후 처가의 도움으로 관직에 올랐고, 그곳의 현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 장남(?)과 차남 '장오(張敖)'가 태어났던 것으로 여겨지며, 그리고 또한 바로 그 시기에 동향(同鄕)의 '진여(陳余)'와 '문경(刎頸)의 교(交)'를 맺었으며, 유방(劉邦) 또한 그 시기에 그의 식객(食客)이 되었다고 한다.(下略)

 ★ 문경지교(刎頸之交)는 목을 쳐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사이라는 뜻으로,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사이, 또는 그런 친구를 이르는 말이며, 비슷한 말에 문경지우, 관포지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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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때, 유방(劉邦)은 함양(咸陽)으로 부역(夫役=賦役)을 나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시황제(始皇帝)의 행렬을 보고서는 <아! 남자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야!>라고 말을 했다고 하고, 그에 대해서 또 항우(項羽)는 <내가 저 자리를 꼭 취(빼앗고)하고 말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해서, 그래서 그것으로 그 두 사람의 성격차이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느 때 단부(單父=山東省)의 사람 여공(呂公)이 어떤 사람의 앙갚음을 피하기 위해서 패(沛)로 들어왔는데, 그러자 명사(名士)였던 그 여공(呂公)을 환영하기 위해서 연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자 소하(蕭何)가 그때 그 연회를 관리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패(沛)의 사람들은 각각 저마다 마련한 금전(金錢)을 지참해서 그 연회에 모여들었고,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었으므로 소하(蕭何)는 <천전(千錢) 이하로 가져온 사람은 바닥에 앉을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또 마침 그때 유방(劉邦)이 그곳에 도착을 했고, 이어서 진물(進物=進上物)을 <전(錢)! 일만(一萬)!>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 큰 금액에 놀랐던 여공(呂公)은 몹시 당황해 하며 문 앞까지 나가서 유방(劉邦)을 맞이하고는 유방(劉邦)을 상석(上席)에다 앉혔다. 그러자 소하(蕭何)는 유방(劉邦)이 돈도 없으면서 큰소리를 쳤다는 것을 알고는 <유방은 원래 통이 크고 허풍이 심한 사람이라, 실속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여공(呂公)에게 말을 했다. 하지만 여공(呂公)은 그 말을 듣고서도 개의치 않으면서 계속해서 유방(劉邦)을 환대했고, 이어서 그의 관상(觀相)을 보고는 자신의 딸까지 그에게 주었는데, 그 여인이 바로 여치(呂雉)였다. 하지만 그 후에도 유방(劉邦)은 달라지는 것이 없었고, 여치(呂雉) 또한 아이를 둘이나 기르면서 고생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런데 또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여치(呂雉)는 논에서 김을 매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노인이 여치(呂雉)의 인상(人相)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몹시 감탄했다. <부인, 아주 고귀한 상(相)을 지녔구려!> 하지만 그 노인은 곧 유방(劉邦)의 두 자녀(나중의 惠帝와 魯元公主)를 보고서는 더욱 놀라면서 또 이렇게 감탄했다. <아, 어찌 이리도 모두들 훌륭한 상(相)을 지녔습니까?> 하지만 얼마 후 유방(劉邦)이 돌아오자 그 노인은 또 관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러자 그 노인은 대경(大驚)하면서 또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아, 그러니까 이 분들이 이렇게 좋은 상(相)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분 때문이었군요! 당신의 상(相)이야 말로 진정한 최고입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몹시 기뻐하면서 그 노인을 환대했다지만, 어쨌든 사기(史記)에서는 그밖에도 몇 가지의 일화(逸話)를 더 싣고 있는데,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유방(劉邦)이 나중에 천하(天下)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을 미리 암시(약속되어 있었다 또는 기정사실화)하는 것들이었으며, 그리고 또 그 <적용(赤龍)의 전설(또는 일화)> 또한 나중에 한(漢)이 화덕(火德)의 제조(帝朝=帝國)가 되는 것과 연결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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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소개

 여공(呂公)은 생몰미상(生沒未詳)이며, 진대(秦代) 말기의 사람으로, 여치(呂雉)의 부(父)였다고 한다. 그리고 본명(本名)에는 제설(諸說)이 있으며, 사기색은(史記索隱)을 인용한 상경(相經)이란 책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여문(呂文)이었고, 자(字)는 숙평(叔平)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출신은 위(魏) 또는 여남신채(汝南新蔡)라고도 했다. 그리고 또 그는 단부(單父)에서는 명사(名士)로 지냈으며, 그곳에서 여치(呂雉)를 유방(劉邦)에게 시집보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리고 또 사기집해(史記集解)에 의하면, 그는 한(漢) 원년에 임사후(臨泗侯)가 되었고, 고후(高后) 원년에는 여선왕(呂宣王)이란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곽말약(郭沫若)에 의하면, 그는 여불위(呂不韋)의 일족이었다고 한다.

 참고: 여불위(呂不韋)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재상(宰相)(?~B.C.235)으로, 조(趙)나라에 인질이 되어있었던 진나라 장양왕(莊襄王)을 도왔고, 그 공로로 승상(丞相)이 되었다. 그 후 시황제로부터 중부(仲父)로까지 존칭되었지만, 밀통(密通)사건에 연루되어서 실각(失脚)했다. 저작으로 <여씨춘추>가 있었다.

 참고: 곽말약(郭沫若=궈-모뤄=Guo Moruo)은 중국의 문학가·정치가(1892~1978)였으며, 신문학운동에 참가했고, 중일전쟁 후에는 인민공화국정부에서 과학원원장, 부수상을 지냈다. 저서에 <중국 고대사회연구>, <갑골문자 연구>, 그리고 시집에 <여신(女神)> 등이 있다.


<郭沫若=1941년 重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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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6  秦王朝滅亡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1.출생(出生)

 그는, 패현군 풍현 중양리(沛縣郡 豊縣 中陽里=現 江蘇省 徐州市 沛縣-앞에서 소개되었음)에서 부(父) 유태공(劉太公)과 모(母) 유온(劉媼)의 삼남(三南)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형제로는 맏형에 유백(劉伯), 차형(次兄)에 유희(劉喜), 이모제(異母弟)로 유교(劉交)가 있었고, 그의 출생일화는 다음과 같다.

 유온(劉媼)은 유방(劉邦)을 출산하기 전(前) 어느 하루, 어느 연못 근처에서 잠깐 졸았는데, 그러자 '유온'은 꿈속에서 그 연못의 신(神)을 만났다. 그런데 그때 또 마침 그 근처에 있던 유태공(劉太公)이 그런 유온(劉媼)을 보았는데, 그때 용(龍) 한 마리가 유온(劉媼)을 휘감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유방(劉邦)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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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소개

 1. 부(父)

 유태공(劉太公-?부터 기원전 197년)은 유방(劉邦)의 아버지이며,
칭호(稱號)는 한(漢)의 태상황(太上皇). 성(姓)은 유(劉). 이름은 단(煓). 혹은 집가(執嘉)라고 전하는 책도 있다.(史記索隱에 의한 것이나, 그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중국 初唐의 학자인 顔師古) 그리고 또 그의 전처(前妻)는 유온(劉媼)이며, 후처(後妻)의 성명은 미상(未詳)이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태공(太公)이란 말은 연장자(年長者)를 의미했던 것으로, 우리말로는 <어르신>이라거나 <어른>처럼 친밀감을 담아서 불렀던 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원래 이름이 불릴 일도 별로 없었을 정도로, 그러니까 어르신(太公) 정도로만 불렀어도 아무 관계도 없었을 낮은 신분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또 일설(一說)에 의하면 유방(劉邦)이 패군(沛郡=沛縣)의 정장(亭長)이 되어서 단부현<單父縣=山東省 하택시(菏澤市)>'에서 이주해온 부호(富豪) 여 씨(呂氏)와 인척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해서, 패(沛)의 호농(豪農)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니까 즉, 유방(劉邦)은 소작인까지 두었던 유복한 농가출신자였다는 것이다.(혹은 沛의 地主였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그러했던 유태공(劉太公)은 패현(沛縣)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에 살았던 농부였다. 그리고 유방(劉邦)이 자신의 처지(농부의 자식)를 잊고서 건달 짓으로 세월을 보냈다거나, 유협(遊俠)들과 어울렸다거나 했기 때문에 부자(父子) 간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그랬던 유방(劉邦)이 나중에 한왕(漢王)이 되었고, 그리고는 항우(項羽)와 다투게 되자 유태공(劉太公)도 본의 아니게 그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그것은
또 유태공(劉太公)이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패하자 유방(劉邦)의 아내였던 여치(呂雉)와 함께 포로로 잡혀서 약 3년간이나 인질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 전세가 역전되어서 항우(項羽)가 불리해지자 그에 항우(項羽)는 그 두 사람을 이용해서 사태의 타개를 도모했다. 그리고는 <광무산(廣武山)의 싸움> 때, 항우(項羽)는 미리 큰 가마솥을 준비해 놓고 유방(劉邦)에게 다음과 같이 협박을 했다.

 <만약에 네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의 아버지를 이 가마솥에다 넣어서 삶아버릴 것이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진말(秦末)의 동란(動亂) 때, 두 사람이 함께 초(楚)나라의 회왕(懷王)을 모셨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그 답을 했다.

 <네가 벌써 잊었나본데, 우리는 과거 의형제였던 사이였다.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는 곧 너의 아버지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네가 꼭 아버지를 솥에다 삶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리고 나중에 잘 끓인 국물을 나에게도 한 그릇 나눠주길 바란다!>

 그 후, 양자(兩者) 간에 강화가 성립되었고, 그러자 유태공(劉太公)과 여치(呂雉)도 유방(劉邦)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바로 그 직후에 유방(劉邦)은 강화를 파기해 버렸고, 그리고는 <해하(垓下)・오강(烏江)의 싸움>에서 항우(項羽)를 격파하고는 황제가 되었다. 그러자 유태공(劉太公)도 태상황(太上皇)의 칭호를 받게 되었
고, 사람들의 존경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중국 역사상 생존 중에 태상황(太上皇)의 칭호를 받았던 사람은 그 유태공(劉太公)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또 정작 본인은 그것을 그렇게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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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모(母)

 유온(劉媼-生沒未詳)은 유방(劉邦)의 생모(生母)로, 시호(諡號)는 소령후(昭靈后). 성명은 미상(未詳-이유는 아래에서 설명함). 하지만 사기색은(史記索隱)과 사기정의(史記正義)의 인황보밀등(引皇甫謐等)에 의하면, 그녀의 성(姓)은 왕(王)이었으며, 이름은 함시(含始)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또 안사고(顔師古)가 이견을 보였다) 그리고 가족은 상기(上記)를 참조바라며, 그리고 또 그녀의 이름이 '유온'이었던 것에 대해서는, 그 유(劉)와 온(媼)은 위, 유태공(劉太公)의 예와 같이(太公), 연장자에 대한 친밀감을 담은 통칭이었으며, 하지만 또 굳이 표현하자면 <유가(劉家-유 씨 가문 또는 유태공)의 아내>나 <유가(劉家)의 안주인> 같은 의미였던 것으로, 그래서 또 그녀의 이름이 확실히 유온(劉媼)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고조본기(高祖本紀) 및 한서(漢書) 그리고 또한 고제기(高帝記-고대역대황제들의 기록)'를 종합했을 때, 유방(劉邦)은 유온(劉媼)이 낮잠을 자던 중에 용(龍)이 조화를 부려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그러나 또 그런 설화나 전설의 예는 얼마든지 있으며(특히 朱全忠이나 朱元璋 등), 또 실제로는 용(龍)이 아니었고 '도적이었다'거나 '도망 중이었던 무사였다'는 등의 여러 가지 설도 있으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사서(史書)에 의하면 그녀는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202년에 유방(劉邦)이 즉위하자 <소령부인(昭靈夫人)>이란 칭호를 받았고, 또 유방(劉邦) 사후에는 여치(呂雉)로부터 <소령후(昭靈后)>로 승격된 칭호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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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맏형(長兄)

 유백(劉伯-生沒未詳)의
시호(諡號)는 무애후(武哀侯-그러나 뒤에는 武哀王)였고, 자식으로 갱갈후(羹頡侯) 유신(劉信)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젊어서 사망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전해지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러나 또 일부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들 부부사이는 나빴던 것 같고, 그것은 또 어느 날 유방(劉邦)이 자기 친구들 몇 명을 집으로 데리고 왔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유백의 아내는 빈 냄비를 보이면서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유방(劉邦)이 확인을 해보니 집에 국(羹)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었고, 그래서 또 일족과 공신들에게 작위와 영지를 내렸는데, 그러나 유백(劉伯)의 자식이었던 유신(劉信)에게만은 그 어미의 고약했음을 가슴에 담고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유태공(劉太公)이 나서서 사정했고, 그때서야 유방(劉邦)은 유신(劉信)에게 작위를 내렸는데, 그 이름은 갱갈후(羹頡侯)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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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차형(次兄)

 유희(劉喜-?부터 기원전 193년)의 자(字)는 중(仲). 시호(諡號)는 대경왕(代頃王), 기원전 201년에 유방(劉邦)에 의해서 대왕(代王)에 봉건(封建) 되었다. 그러나 영내(領內)에 흉노군(匈奴軍)이 침공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을 가버렸는데, 그것은 또 물론, 평상시라면 당연히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의 배려로 왕위(王位)만 박탈시키고 합양후(郃陽侯)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196년에 그의 자식 유비(劉濞)가 오왕(吳王)에 봉건 되었으며, 그는 그 3년 후에 사망했다. 그러자 그에게 경왕(頃王)이란 시호가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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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이모제(異母弟)

 유교(劉交-?부터 기원전 179년)는 전한(前漢)의 제후왕(諸侯王)이었고, 시호(諡號)는 초원왕(楚元王), 그리고 그는 유방(劉邦)과는 달라 유학(儒學-詩經)을 배웠으며, 유방(劉邦)과 함께 종군했다. 그리고 또 노관(盧綰)과 함께 유방(劉邦)의 측근 역을 맡았으며, 유가(劉賈)와는 함께 별동대(別動隊)도 되었다. 기원전 201년, 모반죄로 실각했던 초왕(楚王)·한신(韓信)의 후임으로 그는 그 옛 영토를 남북으로 분할했던 북부(北部)의 초왕(楚王)으로 봉건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196년, 회남왕(淮南王)·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형왕(荊王)·유가(劉賈)가 영포(英布)에게 패하자 다시 영포(英布)와 싸웠지만 졌다. 그리고 또 그는 젊은 시절에 배웠던 유학(儒學)과의 연(緣)으로 유생(儒生)들을 많이 중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전한(前漢) 말기의 석학으로서 알려져 있는 유향(劉向)과 유흠(劉歆)부자(父子)는 그의 자손에 해당된다. 그리고 또 동진(東晋)의 정치가였던 유외(劉隗)와 유송(劉宋)의 유유(劉裕=高祖・武帝)도 그의 후예를 자칭했던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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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처(妻)

 여치(呂雉-?부터 기원전 180년)는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부인으로, 황후(皇后)였고, 혜제(惠帝)의 모(母)였다. 그리고 자(字)는 아후(娥姁). 시호는 고후(高后=高皇后)였으며, 유방(劉邦) 사후(死後)에는 황태후(皇太后)·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었고, 여후(呂后), 여태후(呂太后)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현재는 <중국의 3대(大) 악녀(惡女) 중 한명>으로 불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당대(唐代)의 무측천과 청대(淸代)의 서태후(西太后)가 있었다.(나머지는 후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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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휘(諱=諡號) <邦>은 사기(史記)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현재 남아있는 문헌 중에서 제일로 오래된 것인 후한(後漢)의 순열(荀悅-下述)이 지은 한기(漢記)에 그것은 기록되어 있으며,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주석(注釋)에서 그것을 인용하고 있다.

 <방(邦)>의 어의(語義)는 원래 <방(幇)=“bāng”=형(貴兄)>이란 의미의 일반명사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하는 입장이 있다.<司馬遼太郎(시바료타로) ・ 佐竹靖彦(사타케야스히코)의 說> 다만, 현재 전하는 '방(幇)'이란 글자에 <형(兄)>이란 의미는 없다.

 ※ 순열(荀悅-148년-209년)은, 중국 후한(後漢)말기의 학자로, 자(字)는 중예(仲豫)였고, 영천군<潁川郡-潁은 江 이름(yǐng). 하남성 등봉현(登封縣)에서 회수(淮水)로 흐르는 강이며, 영천군은 그 지방) 영음(潁陰) 출신이었다. 그리고 전한(前漢)의 역사를 취급했던 편년사(編年史) <한기(漢記)>의 편자(編者)였던 순욱(荀彧)의 종형(從兄-사촌형)이었으며, 조조(曹操)의 부름을 받고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된 후, 헌제(獻帝)에 강의하였다. 다른 저서에 <신감> 등이 있었다.

 ★ 신감(申鑑)은 중국 후한(後漢)
순열(荀悅)이 지은 유가서(儒家書)이며, 정치의 향방과 사물의 도리 등을 기술하여 헌제(獻帝)에게 봉정했던 것으로, 당시의 정권이 조조(曹操)에게 이행됨을 우려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순열(荀悅)은 순자(荀子)에 대해서, 소순자(小荀子)로도 불린다. 5권.

 아무튼, 그의 부(父) 순검(荀儉)은 순상(荀爽) 등 여덟 명의 형제와 함께 <8龍>으로 불렸다지만, 그러나 빨리 죽었다. 그리고 또 그 순검(荀儉)의 부(父)였던 순숙(荀淑)은 대장군 양기(梁冀)에게 미움을 받았던 줏대가 아주 강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12세에 춘추(春秋)를 읽었으나, 집이 궁핍하여 책을 빌려서 읽었고, 그러나 한번만 읽으면 대충 다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착하고 아름다운 용모에 글쓰기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영제(靈帝) 시대에는 내시(內侍)가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은거하고 있었는데, 그때 순열(荀悅)도 병(病)을 칭하며 은거했다. 그래서 당시 그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그러나 또 가까이에 있던 그의 사촌동생 순욱(荀彧)이 그를 특히 존경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후에 '순열'은 최초로 진동(鎭東)장군 조조(曹操)의 막부(幕府)에 초대되었고, 그 후에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헌제(獻帝)는 문학을 좋아했으므로, 그에 '순열'은 순욱(荀彧)과 소부(少府-관직 명) 공융(孔融)과 함께 '헌제(獻帝)'에게 강의했다.

 ★ 공융(孔融)은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153~208)로, 자는 문거(文擧). 건안칠자<建安七子-중국 후한 건안 때, 시문(詩文)에 뛰어난 일곱 사람의 유명한 문학가들을 이르던 말. 공융(孔融)·진림(陳琳)·왕찬(王粲)·서간(徐幹)·완우(阮瑀)·응창(應瑒)·유정(劉楨)을 이름>의 한 사람으로, 북해(北海)의 재상이 되어서 학교를 세웠고, 조조를 비판 · 조소하다가 일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저서에 <공북해집(孔北海集)>이 있었다.

 그 후, 순열(荀悅)은 승진을 거듭해서 비서감(秘書監)과 시중(侍中)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이 조조(曹操)에게로 옮겨가고 있었기 때문에, 헌제(獻帝)로서는 자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자 순열(荀悅)이 헌제(獻帝)를 보좌하려고 했지만, 그로서는 따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순열(荀悅)은 <申鑑 또는 申鑒 5편>을 만들어서 헌제(獻帝)에게 헌상했는데, 그러자 헌제(獻帝)는 그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헌제(獻帝)는 반고(班固)의 <한서(漢書)>가 대부분이 문장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서 그에게 <춘추좌씨전> 형식으로 <한기(漢記)>를 만들도록 명했고, 그에 순열(荀悅)은 <한기(漢記) 30편>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 <한기(漢記)>는 <춘추좌씨전>과 같은 편년체로, 전한(前漢) 406년간의 역사를 적은 것이었다. 그리고 순열(荀悅)은 또 그 외에도 <숭덕(崇德)>이나 <정론(正論)> 등 수십 편을 더 저술했고, 건안(建安) 14년(209년)에 62세로 사망했다.

 출토사료(出土史料)로부터 그의 '시호(諡號)'가 <방(邦)>인 것은 대충 올바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자(字) <계(季)>는 ‘막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 그러나 중복되지만, 부모의 이름에서도 태공(太公)은 연장자(남성)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이며, 온(媼)도 일반적으로 부르는 ‘아줌마’와 같은 호칭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맏형의 백(伯)은 장남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으므로 전술(前述)의 결과, 유방(劉邦)의 가족들에 대한 본명(本名)은 모두 불명(不明)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유방(劉邦)에 관해서 썼을 때, 과감하게 그렇게 간단하게 표현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다. 그런 한편 또 당시, 서민들은 정식적인 이름을 쓰지 않았고 <누구의 누구, 예를 들어서 유가(劉家)의 장남(長男)=유백(劉伯) 그리고 유가(劉家)의 막내=유계(劉季)> 등으로 표현해도 충분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다만, 차형(次兄)과 이모제(異母弟)의 경우에서는 희(喜)와 교(交)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가족 전체가 이름이 불명한 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또, 그에는 피휘(避諱)를 위해서 고의로 애매하게 그렇게 기술했을 것이란 설도 있다.

 
유방(劉邦)의 용모(容貌)는 콧대가 높고, 멋진 수염을 길렀으며, 이른바 용안(龍顔)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굴이 길어서 코가 돌출된 상(相)을 하고 있었으며, 또한 대퇴부(넓적다리)에는 72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고 한다.

 
☆ 그 ‘72’란 숫자는 1년 360일을 오행사상(五行思想)의 5로 나눈 수로, 당시에는 꽤 '길한 수(吉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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