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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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2. 태풍전야(颱風前夜)
'반진(反秦)전쟁'에 참가하기 전, 유방(劉邦)은 이른바 협객(俠客)으로 가업(家業=농사)을 싫어했으며, 주색(酒色)을 좋아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 단, 표현은 협객(俠客)이라고 하고 있으나, 흔히 알고 있는 그런 협객은 아니며, 일종의 시정잡배(市井雜輩) 정도로 볼 수 있음.
그러던 중에 그는 사수(泗水)의 정장(亭長)으로 취임했지만, 그러나 그 임무에 충실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그때, 그 패현(沛縣)의 관리(官吏)들 중에서는 나중에 유방(劉邦)을 도와서 패업을 달성하게 되는 <소하(蕭何)>와 <조참(曹參)>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 시기에는 그들도 유방(劉邦)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인덕(人德)이 아주 많았던 사람으로, 그가 무슨 일을 잘못했어도 주위에서 옹호(擁護)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며, 술집에 들어갔을 때도 항시 그가 들어가고 나면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만석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는 당시 <장이(張耳)>의 식객(食客)이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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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소개
소하(蕭何-?부터 기원전 193년)는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정치가였고, 소위 유방(劉邦)의 삼걸(三傑) 중에 한명이었다. 그는 또 유방(劉邦)과 같은 패현(沛縣) 출신이었으며, 젊었을 때부터 관리(官吏)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직책은 낮았지만 그 일하는 태도는 성실했고, 능력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이어서 소개할 조참(曹參)은 당시 그의 부하였으며, 진말(秦末)의 동란기(動亂期)에 조참(曹參) 등과 함께 패현성(沛縣城)에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진(秦) 조정(朝政)에서 파견되어 와 있던 현령(縣令)을 살해하고는 유방(劉邦)을 그 후임으로 맞이했다. 그 후, 그는 유방(劉邦)의 진영(陣營) 내에서의 내부 사무를 모두 관리했고, 그 후에는 병참(兵站)까지도 맡았다. 그리고 또 그는 유방(劉邦)이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점령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물(寶物) 등에 관심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혼자서 진(秦)의 역사서(歷史書)나 법률 또는 각국(各國)의 인구에 관한 기록 등이 보관되고 있던 문서고(文書庫)로 달려가서 항우(項羽)가 그것들을 모두 파괴하기 전에 전부 수거하는데 성공을 했으며, 그것이 또 훗날 한(漢) 왕조의 기초를 다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06년, 드디어 진(秦)이 멸망했고,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그는 승상에 임명되어서 내정(內政) 일체를 담당했다. 그런데 그때 하후영(夏候嬰)이 한신(韓信)을 추천해 왔는데, 그러자 그 재능에 감동했던 그는 한신을 유방(劉邦)에게 추천했지만, 그러나 정작 한신(韓信)은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한직(閑職)이었던 것에 불만을 품고는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그는 한신(韓信)을 곧 뒤따라가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다시 추천을 할 것이니 같이 돌아갑시다. 하지만 만약에 이번에도 당신에게 한직(閑職)이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나 또한 한(漢)을 버리겠소!> 그러자 한신(韓信)은 마음을 돌렸고, 이어서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에 의해서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 한신(韓信)은 당시 가문이나 명성 같은 것도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고, 원래는 초(楚)의 잡병(雜兵)으로, 한(漢)에서도 일개병졸에 불과했었던 인물이었다. 그랬으므로 그때의 그런 인사(人事)는 당연히 파격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또 그것으로 유방(劉邦)이 당시 소하(蕭何)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리고 또 그 후에 유방(劉邦)이 관중(關中)에 들었을 때 소하(蕭何)도 함께 관중(關中)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곳에서도 그의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어서 행정이나 병참까지도 완벽하게 처리했고, 그로써 또 그는 명 승상(名丞相)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결과로 기원전 202년에 초한전쟁(楚漢戰爭)이 유방(劉邦) 군의 승리로 끝나자 그 전공(戰功)의 제일(第一)은 당연히 그에게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고 전한(前漢)이 일어나게 되자, 그는 계속해서 승상을 맡았으며, 그때부터는 오랜 세월동안 계속된 전란으로 인해서 몹시 황폐해졌던 국토의 부흥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196년에는 한신(韓信)이 모반(謀反)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책략을 써서 그를 토벌했으며, 그러자 또 그 공이 인정되어서 그는 신하로서는 최고의 직책이었던 상국(相國)에 임명되었고, 검리상전(劍履上殿), 입조불추(入朝不趨), 알찬불명(謁讚不名) 등의 특권이 그에게 주어졌다.
★ 검리상전(劍履上殿), 입조불추(入朝不趨), 알찬불명(謁讚不名)은 모두 공적(功績)이 높은 신하에게 왕이 내리는 특권들이며, 차례로 검리상전(劍履上殿)은 칼을 휴대하거나, 신을 신은 채로 즉, 갖춘 복장 그대로 궁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이었으며, 입조불추(入朝不趨)는 신하가 왕을 배알할 때 종종걸음을 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특권을 받은 공신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 그리고 또 알찬불명(謁讚不名 또는 贊拜不名)이란 신하가 왕을 배알할 때, 그 관직(官職)만 부르고 성명(姓名)은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음.
그러나 그 즈음부터 유방(劉邦)은 소하(蕭何)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부하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그때부터는 일부러 악정(惡政)을 행한다거나 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평판을 실추시켰고, 또는 자신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키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해서 어떻게든 숙청만은 면했다. 그리고 유방(劉邦)이 죽자 그 2년 후에 그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남조(南朝=南北朝時代) 때, 제(齊)를 건국했던 소도성(蕭道成)은 그의 자손으로 자칭(自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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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참(曹參)> ?-190년
성(姓)은 조(曹) 씨. 시호(諡號)는 참(參), 자(字)는 경백(敬伯).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 제2代 상국(相國)이 된 정치가.
<황로(黃老)의 학(學)>을 존중했다.

<黃帝>
※ 황노사상(黄老思想)은, 중국 전국시대부터 한초(漢初)에 걸쳐서 유행했던 도가(道家) 일학파(一學派)의 사상이었으며, 그 학문을 <황로(黃老)의 학(學)>이라고 불렀다. 황제(黃帝)를 시조로 해서 노자(老子)를 대성자(大成者)로 여겼고, 황제사경(黃帝四經)과 노자(老子道德經)가 그 사상적 근거나 경전(經典)이 되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에서는 제(齊) <직하(稷下-앞에서 소개되었음)의 학자>였던 신도(愼到)・전병(田騈)・접자(接子)・환연(環淵) 등을 그 대표인물로 꼽았다.
★ 황제(黃帝) = 중국 전설상의 제왕.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 복희씨, 신농씨와 함께 삼황(三皇) 또는 오제(五帝)로 불리는데, 처음으로 곡물재배를 가르치고 문자·음악·도량형 등을 정했다고 하며, 최근까지 중국의 시조로 숭배되었다.(역시, 앞에서 충분히 소개되었음)
★ 노자(老子) =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耼)·백양(伯陽). 도가(道家)의 시조로, 상식적인 인의와 도덕에 구애되지 않고 만물의 근원인 도를 좇아서 살 것을 역설하고, 무위자연을 존중하였다. 노자도덕경.

<老子>
★ 신도(愼到) =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학자·사상가(?~?). 저서에 <신자(愼子)> 5편이 있다.
★ 신불해(申不害) = 중국 전국시대 한(韓)나라의 학자·정치가·사상가(?~B.C.337). 도가(道家) 사상을 바탕으로 형명학(刑名學)을 주장하였으며, 한나라 소후(昭侯)의 재상이 되어서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저서에 <신자(申子)> 2권이 있다.
★ 형명학(刑名學) =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학문으로, 중국 전국시대에 신불해(申不害), 상앙(商鞅), 한비자 등이 제창하였다.
★ 한비자(韓非子) =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한비가 지은 책. 형벌의 이름과 방법을 논한 것이다. 55편 20책.
자식으로는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냈던 조줄(曹窋)이 있었고, 작위(爵位)는 평양후(平陽侯). 시호(諡號)는 의후(懿侯)였다. 조참(曹參)은 패현(沛縣) 사람으로, 진(秦) 시대에는 패현(沛縣)의 형무소(刑務所) 속리(屬吏=하급 공무원=구실아치)였다. <그리고 그때, 소하(蕭何)는 그의 상관이었다> 그러다가 유방(劉邦)이 군사를 일으키자 중연(中涓=侍從)으로 종군했다. 그 후 그는 유방(劉邦)과 각지를 전전했고, 남전(藍田)의 동쪽으로 진군해서 야습(夜襲)으로 진군(秦軍)을 대패시키고는 마침내 함양(咸陽)에 입성했다. 그 후 장군이 된 그는 이번에는 초군(楚軍)을 상대로 전전했으며, 고조(高祖) 2년(기원전 204년)에 좌승상(左丞相-명목상의)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그때부터 한신(韓信)의 군(軍)에 종군하면서 위(魏)·조(趙)·제(齊)를 격파했고, 이어서 유방(劉邦)과 한신(韓信) 연합군이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천하를 거의 평정했을 때. 그도 그때까지도 복종하지 않고 있었던 제(齊)를 평정했다. 그 후, 논공(論功)에서 수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분전했던 그 또한 서열에 올랐으나, 그러나 결국 제1의 공은 소하(蕭何)에게로 돌아갔다. 그 후, 유방(劉邦)이 조부인(曹夫人)이 생산했던 서장자(庶長子)·유비(劉肥=悼惠王)를 한신(韓信)으로부터 몰수했던 그 제국(齊國)의 왕으로 삼자 조참(曹參)은 그 나라의 상국(相國)이 되었다. 그리고 또 당시, 제(齊)는 70여 성(城)을 가졌던 대국(大國)이었으므로, 그것으로 유방(劉邦)의 그에 대한 신뢰를 읽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고조(高祖) 6년(기원전 201년)에 제후(諸侯)의 작위를 받았고, 그리하여 평양(平陽)의 1만6백3십 호(戶)를 영지로 받았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반란을 일으켰던 진희(陳豨) 소속의 장군 장춘(張春)을 진압하고 포로로 잡아서 처형했으며, 경포(黥布=英布)의 반란 때도 공을 세워서 재차 승상이 되었다.(惠帝 원년인 기원전 194년) 그 후에 그는 장로(長老)와 학자(學者) 등을 초빙해서 민심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모두 의견이 달랐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개공(蓋公)이란 사람에게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는 그 사상을 따라서 통치했다. 그리고 또 위발(魏勃-생몰미상. 秦末부터 前漢 初期의 무장) 등 유능한 인재를 등용했으며, 그리하여 그가 제국(齊國)의 승상으로 지낸 그 9년간 나라는 안정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현상(賢相)으로 칭해졌다. 다음, 혜제(惠帝)2년(기원전 193년)에 소하(蕭何)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상경(上京)준비를 했다. 그리하여 죽기 전에 소하(蕭何)가 추천했다는 대로 그는 한(漢)의 상국(相國)이 되었다. 그러나 혜제(惠帝)5년(기원전 190년)에 그 역시도 세상을 떠났으며, 그러자 그에게 의후(懿侯)란 시호가 내려졌고, 백성들은 그를 칭송하며 생전의 덕정(德政)에 고마워했다. 그리고 사마천(司馬遷) 또한 그가 <덕 있는 정치를 베풀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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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張耳)> ?-기원전202년(漢太祖1년)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무장(武將) 및 조왕(趙王). 출신은 위(魏)의 대량(大梁)이었고, 청년시절에 위(魏)의 공자(公子)였던 신릉군(信陵君)의 식객(食客)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 신릉군은 중국 전국 시대 위(魏)나라의 정치가(?~B.C.244)였으며, 이름은 무기(無忌)였고, 문하에 식객 3천 명을 거느렸다고 한다. 제나라의 맹상군, 초나라의 춘신군, 조(趙)나라의 평창군(平昌君)과 함께 전국(戰國) 말기의 사군(四君)으로 꼽혔다.
하지만 그 신릉군(信陵君)이 정치(政治)에서 물러나는 등 사정이 생기자 외황(外黃)으로 이주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현지 부호의 딸과 결혼한 후 처가의 도움으로 관직에 올랐고, 그곳의 현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 장남(?)과 차남 '장오(張敖)'가 태어났던 것으로 여겨지며, 그리고 또한 바로 그 시기에 동향(同鄕)의 '진여(陳余)'와 '문경(刎頸)의 교(交)'를 맺었으며, 유방(劉邦) 또한 그 시기에 그의 식객(食客)이 되었다고 한다.(下略)
★ 문경지교(刎頸之交)는 목을 쳐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사이라는 뜻으로,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사이, 또는 그런 친구를 이르는 말이며, 비슷한 말에 문경지우, 관포지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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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때, 유방(劉邦)은 함양(咸陽)으로 부역(夫役=賦役)을 나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시황제(始皇帝)의 행렬을 보고서는 <아! 남자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야!>라고 말을 했다고 하고, 그에 대해서 또 항우(項羽)는 <내가 저 자리를 꼭 취(빼앗고)하고 말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해서, 그래서 그것으로 그 두 사람의 성격차이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느 때 단부(單父=山東省)의 사람 여공(呂公)이 어떤 사람의 앙갚음을 피하기 위해서 패(沛)로 들어왔는데, 그러자 명사(名士)였던 그 여공(呂公)을 환영하기 위해서 연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자 소하(蕭何)가 그때 그 연회를 관리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패(沛)의 사람들은 각각 저마다 마련한 금전(金錢)을 지참해서 그 연회에 모여들었고,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었으므로 소하(蕭何)는 <천전(千錢) 이하로 가져온 사람은 바닥에 앉을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또 마침 그때 유방(劉邦)이 그곳에 도착을 했고, 이어서 진물(進物=進上物)을 <전(錢)! 일만(一萬)!>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 큰 금액에 놀랐던 여공(呂公)은 몹시 당황해 하며 문 앞까지 나가서 유방(劉邦)을 맞이하고는 유방(劉邦)을 상석(上席)에다 앉혔다. 그러자 소하(蕭何)는 유방(劉邦)이 돈도 없으면서 큰소리를 쳤다는 것을 알고는 <유방은 원래 통이 크고 허풍이 심한 사람이라, 실속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여공(呂公)에게 말을 했다. 하지만 여공(呂公)은 그 말을 듣고서도 개의치 않으면서 계속해서 유방(劉邦)을 환대했고, 이어서 그의 관상(觀相)을 보고는 자신의 딸까지 그에게 주었는데, 그 여인이 바로 여치(呂雉)였다. 하지만 그 후에도 유방(劉邦)은 달라지는 것이 없었고, 여치(呂雉) 또한 아이를 둘이나 기르면서 고생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런데 또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여치(呂雉)는 논에서 김을 매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노인이 여치(呂雉)의 인상(人相)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몹시 감탄했다. <부인, 아주 고귀한 상(相)을 지녔구려!> 하지만 그 노인은 곧 유방(劉邦)의 두 자녀(나중의 惠帝와 魯元公主)를 보고서는 더욱 놀라면서 또 이렇게 감탄했다. <아, 어찌 이리도 모두들 훌륭한 상(相)을 지녔습니까?> 하지만 얼마 후 유방(劉邦)이 돌아오자 그 노인은 또 관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러자 그 노인은 대경(大驚)하면서 또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아, 그러니까 이 분들이 이렇게 좋은 상(相)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분 때문이었군요! 당신의 상(相)이야 말로 진정한 최고입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몹시 기뻐하면서 그 노인을 환대했다지만, 어쨌든 사기(史記)에서는 그밖에도 몇 가지의 일화(逸話)를 더 싣고 있는데,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유방(劉邦)이 나중에 천하(天下)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을 미리 암시(약속되어 있었다 또는 기정사실화)하는 것들이었으며, 그리고 또 그 <적용(赤龍)의 전설(또는 일화)> 또한 나중에 한(漢)이 화덕(火德)의 제조(帝朝=帝國)가 되는 것과 연결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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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소개
여공(呂公)은 생몰미상(生沒未詳)이며, 진대(秦代) 말기의 사람으로, 여치(呂雉)의 부(父)였다고 한다. 그리고 본명(本名)에는 제설(諸說)이 있으며, 사기색은(史記索隱)을 인용한 상경(相經)이란 책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여문(呂文)이었고, 자(字)는 숙평(叔平)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출신은 위(魏) 또는 여남신채(汝南新蔡)라고도 했다. 그리고 또 그는 단부(單父)에서는 명사(名士)로 지냈으며, 그곳에서 여치(呂雉)를 유방(劉邦)에게 시집보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리고 또 사기집해(史記集解)에 의하면, 그는 한(漢) 원년에 임사후(臨泗侯)가 되었고, 고후(高后) 원년에는 여선왕(呂宣王)이란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곽말약(郭沫若)에 의하면, 그는 여불위(呂不韋)의 일족이었다고 한다.
참고: 여불위(呂不韋)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재상(宰相)(?~B.C.235)으로, 조(趙)나라에 인질이 되어있었던 진나라 장양왕(莊襄王)을 도왔고, 그 공로로 승상(丞相)이 되었다. 그 후 시황제로부터 중부(仲父)로까지 존칭되었지만, 밀통(密通)사건에 연루되어서 실각(失脚)했다. 저작으로 <여씨춘추>가 있었다.
참고: 곽말약(郭沫若=궈-모뤄=Guo Moruo)은 중국의 문학가·정치가(1892~1978)였으며, 신문학운동에 참가했고, 중일전쟁 후에는 인민공화국정부에서 과학원원장, 부수상을 지냈다. 저서에 <중국 고대사회연구>, <갑골문자 연구>, 그리고 시집에 <여신(女神)> 등이 있다.

<郭沫若=1941년 重慶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