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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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소개> ※ 장한(章邯) 2
그리고 그는 오광(吳廣)을 살해했던 전장(田臧)과 이귀(李歸) 등을 토벌했으며, 등설(鄧說)을 파했고, 제(齊)왕이었던 전담(田儋)과 그 부장(部將)이었던 주시(周市)를 임제(臨濟)에서 전사(戰死)시켰으며, 위(魏)왕이었던 위구(魏咎)를 분신자살시켰고, 허(許)에 있던 오서(伍徐)마저도 격파했다. 거기다 또 2세 황제로부터 원군으로 지원받았던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와 합세해서 진승(陳勝)의 본거지였던 진(陳)을 공격해서 기원전 208년에는 진(陳)의 서쪽에 있던 장하(張賀)의 군을 격파했고, 그것으로 진승(陳勝)을 패주시켰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반란군을 이끌고 있던 항량(項梁)을 패주하는 것처럼 사지(死地)로 유인한 후 야습(夜襲)을 감행(敢行)해서 죽였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조(趙)의 반란군을 공략했을 때는 최초로 수도 한단(邯鄲)을 파괴했으며, 그 다음으로 왕이(王離)와 소각(蘇角) 그리고 섭간(涉間)에게 시켜서 조(趙)왕(王)과 장이(張耳)가 농성하고 있던 거록(鉅鹿)을 포위하게 했다. 하지만 기원전 207년, 원군으로 달려왔던 항우(項羽)에게 소각(蘇角)이 전사했으며, 이어서 섭간(涉間)도 자결했고, 왕이(王離)는 포로가 되어서 반란군의 기세는 더욱 높아져갔다. 거기다 또 항우(項羽)는 장한(章邯)의 군대 목전까지 진격하는 등, 진군(秦軍)은 연패(連敗)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장한(章邯)은 사마흔(司馬欣)을 수도로 보내서 황제의 지시를 청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역으로 궁중(宮中)의 부패와 조고(趙高)의 모함을 받아서 가족들이 모두 처형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장한(章邯)은 사마흔(司馬欣)에게 <공(功)을 세워도 죽고, 공을 세우지 않아도 죽는구나!>라고 탄식하고는 은허(殷墟)에서 군사들과 함께 항우(項羽)에게 항복을 해버렸다. 하지만 또 그때, 항우(項羽)는 장한(章邯)과 사마흔(司馬欣) 그리고 동예(董翳)를 받아주기는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그들이 데려왔던 군사가 20만을 넘었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초군(楚軍)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란을 우려했던 항우(項羽)는 거짓으로 야습(夜襲)을 받은 것처럼 하고는 그 혼란했던 틈을 타서 진군(秦軍)을 단애(斷崖)로 유인했으며, 그리고는 전부 전락사(轉落死)시켜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3명은 나중에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던 진(秦)의 백성들로부터 깊은 원망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 세 사람은 초군(楚軍)에 흡수되었고, 이어서 진(秦)이 멸망했다. 그러자 항우(項羽)의 사장(師將) 격이었던 범증(范增)은 항우(項羽)에게 <진인(秦人)의 통치는 진인에게 맡겨라!>고 조언했고,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 세 사람을 각 왕(王)으로 세웠으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 동예(董翳)에서 설명될 것이므로 참고바라며, 아무튼 또 항우(項羽)가 그렇게 했던 데는 한중(漢中)의 유방(劉邦)을 감시할 목적과 파촉(巴蜀)의 변경을 그들이 죽을 때까지 지키게 할 목적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초(楚)의 그러니까, 일종의 항우(項羽)의 꼭두각시들이었을뿐만 아니라, 그 옹립되었던 경과 또한 진(秦)의 백성들을 몰살시키고 섰던 자리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인사(人事)는 진인(秦人)들의 증오만 불렀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또 그 결과로 기원전 206년에는 유방(劉邦)의 장군 한신(韓信)이 이끌었던 부대가 관중(關中)으로 침입했을 때도, 촉(蜀)의 잔도(棧道)를 부흥한다는 명목으로 진창(陳倉)을 비밀 리에 지나갔으며(暗渡陳倉), 거기다 진인(秦人)과 함께 사전에 한신(韓信)이 미리 수배해두었던 한(漢)의 첩자가 은밀하게 그곳으로 인도해서 상대방이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던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그러자 또 장한(章邯)이 그 진창(陳倉)까지 나가서 맞섰지만 패배했으며, 다시 호치(好畤)에서도 패배, 그 다음에는 폐구(廢丘)에서 농성을 하면서 저항했지만, 하지만 기원전 205년이 되자 동생 장평(章平)이 포로로 잡혔고, 그리고 또 폐구(廢丘) 역시도 수공(水攻)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장한(章邯)은 자살했다.
♣ 암도진창(暗渡陳倉)이란, 36계(三十六計) 중의 제8계(第八計)를 응용했던 것으로, 그 뜻은 <비밀리에 또는 은밀하게 진창(陳倉)으로 지나간다>라고 해석할 수 있고, 여기서의 진창(陳倉)은 지명(地名)이다. 그리고 제8계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데 <示之以動, 利其静而有主. 益動而巽> 이것을 또 대충 해석을 해보면, 시위(示威)행위(行爲), 위장(僞裝)을 적(敵)에게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 아군의 주력부대를 숨긴다. 그런 다음에는 움직임을 크게 하고(誇張), 그 여세를 몰아간다. 즉, 그 전체는 풍뇌익(風雷益)의 형상이며, 그리고 또 풍뇌익(風雷益)은 천둥소리 같은 굉음의 상태, 또 즉, 바람이 위에 있어 천둥(雷)의 세력을 더해가는 상태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암도진창(暗渡陳倉)이란 말은 원래는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渡陳倉)>이었는데, 그것은 또 당시 관중(關中)에 있던 장한(章邯)을 한신(韓信)이 공격했을 때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던 말로, 대체적으로는 <촉(蜀)의 잔도(棧道)를 수리해나가면서 그 뒤편으로는 은밀하게 군사를 진창(陳倉)으로 향하게 한 후, 관중(關中)을 기습한다>라고 하는 위장공작과 기습작전을 아울러서 표현했던 전술(戰術)을 말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그 촉(蜀)의 잔도(棧道)는 현재에도 전장(全長) 200km가 넘는다고 하며, 그래서 또 일찍이 이태백(李太白)도 <촉도(蜀道)난(難)-촉으로 가는 길은 푸른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렵구나 운운. 자세한 것은 본인의 글 한시의 산책을 참고 바람>을 노래했으며, 잔도(棧道)는 험한 벼랑 같은 곳에 낸 길로, 선반처럼 달아서 낸 길을 말한다. 그리고 또 보충으로, 현재의 중국어에서 그 암도진창(暗渡陳倉)이란 말은, 남녀의 밀회(密會)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므로, 사용하실 분은 조심해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 항백(項伯-?부터 기원전 192년)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전한(前漢) 초기에 걸쳐서 활약했던 정치가였고, 무장이었다. 그리고 자(子)에 항수(項睢-劉睢)가 있었고, 항우(項羽)의 숙부였으며, 항연(項燕)의 아들이었고, 항량(項梁)과는 형제였다. 그리고 또 참고로, 한서(漢書)의 안사고(顔師古) 주(注)에 의하면, 백(伯)은 자(字)였고, 이름은 전(纏)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초(楚)의 명문(名門)이었던 항(項)가(家)에서 출생했지만, 그러나 기원전 223년에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에 의해서 초(楚)가 멸망하자(王翦에 의해서) 그 후로 그는 각지를 떠돌면서 전전(轉轉)하다가 살인을 저지르고는 옛 친구였던 장양(張良)을 찾아가서 자신의 신변을 의탁했다. 그 후, 시황제(始皇帝)가 죽었고, 그러자 항량(項梁)이 항우(項羽)와 함께 회계(會稽)에서 거병했는데, 그때 그도 참가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좌윤(左尹-춘추시대 楚의 官名으로, 右尹과 함께 令尹을 보좌했던 직이었다)이 되어서 조카였던 항우(項羽)의 행군(行軍)에 참가하면서 항우(項羽)를 보좌했다.(뒤의 본문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으므로, 中略함) 그 후,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사이가 나빠졌을 때, 항백(項伯)은 옛날에 입었던 은혜를 생각해서 장양(張良)에게 도망을 권고했지만, 그러나 장양(張良)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이어서 <홍문지회(鴻門之會)>가 열렸고, 항백(項伯)은 유방(劉邦)을 도왔다. 하지만 그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러나 또 <해하(垓下)의 싸움>으로 추측되는 싸움 후에는 유방(劉邦)에게 귀순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홍문지회(鴻門之會)에서의 공을 인정해서 인척관계를 맺었던 것과 동시에 그를 사양후(射陽侯)에 봉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유방(劉邦)은 <항(項)성(姓)은 유(劉)씨(氏)의 세상에서는 결코 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하며, 그래서 또 나중에 항백(項伯)은 유(劉)씨(氏)를 사용할 것을 허락받아서, 이름을 유전(劉纏)으로 개명했다. 그 후, 그는 기원전 192년에 사망했으며, 그러자 그의 아들이었던 수(睢)가 그의 뒤를 이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였던 기원전 186년에 그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봉지(封地)를 잃고 말았다.
※ 항량(項梁-?부터 기원전 208년)은 중국 진(秦)대 말기의 무장이었고, 반란군의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을 계승해서 진(秦)에 대한 반란을 획책했지만, 그러나 또 진(秦)의 장군이었던 장한(章邯)에게 져서 죽었다. 그리고 역시, 항우(項羽)의 숙부였으며, 항백(項伯)과는 형제였고,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으로 자칭했던 인물이었다. 항량(項梁)은 원래 역양(櫟陽)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런데 부(父) 항연(項燕)이 죽고 나서 초(楚)가 멸망하자, 그는 연좌(連座)제에 의해서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또 그는 당시 옥리(獄吏)였던 조구(曹咎)란 자와 그의 상관이었던 장사흔(長史欣-司馬欣)의 도움을 받아서 목숨을 구했는데, 그런데 또 그 후에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 복수를 피해서 조카였던 항우(項羽)와 함께 오(吳)로 들어갔다.
♣ 장사흔(長史欣=司馬欣-?부터 기원전 203년)은 진(秦)의 장군이었고, 관직은 장사(長史-警備를 하는 官廳의 總務部長정도의 직급)였기 때문에 장사흔(長史欣)이라고 불렸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태생이나 과거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는 위의 내용대로 항량(項梁)이 포로로 잡혔을 때, 부하였던 조구(曹咎)의 진언(進言)을 받아들여서 항량(項梁)을 보호해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209년에는 조고(趙高)의 명을 받아서 장한(章邯)의 부장(副將)으로 종군했으며, 그 결과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을 평정했던 등 공을 세웠지만, 그러나 그 후에 장한(章邯)의 명령으로 조고(趙高)에게 원군을 요청을 하기 위해서 수도였던 함양(咸陽)으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옛날 부하였던 자로부터 <조고(趙高)가 자신들을 처형할 것>이란 정보를 전해 듣고는 그 길로 바로 도망을 갔고, 이어서 장한(章邯)의 설득을 받아서 항우(項羽)에게 귀순해서 새왕(塞王)에 봉해졌다. 하지만 또 기원전 206년에는 유방(劉邦)에 의해서 장군이 되었던 한신(韓信)의 공격을 받아서 적왕 동예(翟王・董翳)와 함께 항복했다. 그리고 또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205년에도 수수(睢水)의 싸움에서 또 적왕 동예(翟王 董翳)와 함께 다시 초(楚)에 항복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03년에는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있었던 조구(曹咎)와 함께 성고(成皋)를 지켰지만, 그러나 또 유방(劉邦)의 군대에 패해서 조구(曹咎), 적왕 동예(翟王 董翳)와 함께 사수(汜水) 강변에서 자살했다. 하지만 또 사기(史記)의 항우(項羽)본기(本紀)에 <고조(高祖)4년(기원전 203년) 겨울에 성고(成皋)를 지키다 유방(劉邦)의 군대에 패해서 자살했던 인물로 조구(曹咎)와 사마흔(司馬欣) 그리고 장사예(長史翳)>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러나 그 장사예가 적왕 동예(翟王 董翳)였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현재 불명(不明)이다.
○ 적왕 동예(翟王 董翳-생몰불상)는 진(秦) 말기의 사람으로, 항우(項羽)에 의해서 적왕(翟王)에 봉해졌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역시, 그의 내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며, 진(秦)의 2세 황제 때, 반란을 진압했던 장한(章邯) 아래서 도위(都尉-秦, 漢 때의 官職名으로, 郡의 軍事를 담당했다)를 지냈다. 그리고 그 후에 장한(章邯)이 항우(項羽)에게 패하자, 그는 장한(章邯)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했지만, 결국 항우(項羽)와 싸워서 패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관중(關中)으로 들어가서 진(秦)를 멸했다. 그 후, 기원전 206년에 항우(項羽)는 관중(關中)을 3분(分)해서 장한(章邯)은 옹왕(雍王)에, 사마흔(司馬欣)은 새왕(塞王)에, 동예(翟王)는 적왕(翟王)에 각각 봉했고, 그리하여 그것을 삼진(三秦)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적왕 동예(翟王 董翳)는 그 중에서 상군(上郡)을 영토로 해서 고노(高奴)를 수도로 정했다. 하지만 그 해,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삼진(三秦)을 공격했고, 그 결과로 옹왕(雍王)의 땅을 평정해서 장한(章邯)을 포위했다. 그러자 새왕(塞王)과 적왕 동예(翟王 董翳)는 유방(劉邦)에게 항복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적국(翟國)을 폐(廢)하고 상군(上郡)으로 돌아갔는데, 그리고 또 그 다음해, 유방(劉邦)은 항우(項羽)를 공격해서 수도였던 팽성(彭城)을 점령했지만, 그러나 또 돌아가던 길에 항우(項羽)의 반격을 받아서 대패했다. 하지만 또, 위 장사흔(長史欣)의 내용대로 그들이 그때 자살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단, 적왕 동예(翟王 董翳)와 사마흔(司馬欣) 등은,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을 공격했을 때, 같이 따라갔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그 뒤의 행적은 또 묘연하다.
그 후, 항량(項梁)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신망(信望)을 얻었고, 그리하여 진(秦)의 부역(賦役)에 나갈 인부(人夫)들을 배당했다든가, 장례식 등을 주관했던 등, 점점 그 지역에서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그 사이에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인재 발굴에도 힘썼는데, 그러던 중 기원전 209년에 시황제(始皇帝)가 죽고, 진승(陳勝) 등이 군사를 일으키자 진(秦)의 지배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 당시 회계(會稽)의 군수(郡守)였던 은통(殷通)이란 사람이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선수필승(先手必勝-남보다 앞서 행하면 남을 누를 수 있다는 뜻)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도 이번 참에 진(秦)에 대한 반란에 동참하기로 결정을 했소!>라고 하면서, 당시에 또 유력자로 알려져 있던 환초(桓楚)란 사람을 찾아내서 자신과 함께 거사에 동참할 것을 항량(項梁)에게 요청했다. 그리고는 항량(項梁)에게 자신의 장군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었는데, 그러자 항량(項梁)은 <그 환초(桓楚)란 사람이 있는 곳은 자신의 조카인 항우(項羽)밖에 모른다>고 말을 하고는 항우(項羽)를 그곳으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 은통(殷通)과 초대면했던 자리에서 그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군수의 인(印)을 탈취했으며, 그리하여 항량(項梁)은 그때부터 스스로 그곳의 군수가 되었다. 덧붙여서 환초(桓楚)는 그 후에 항량(項梁)의 부하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동년(同年) 12월, 진승(陳勝)이 살해당하자 소평(召平)이란 자가 진승(陳勝)의 명이라고 속이고는 항량(項梁)에게 출병을 재촉했다. 그러자 항량(項梁)은 그 명을 받들어서 8,000여명의 정병(精兵)을 인솔해서 출발했다. 하지만 또 가던 도중에 진영(陳嬰)과 경포(黥布) 등의 군대와 합류해서 대군이 되었던 항량(項梁) 군대는 당시, 스스로 진승(陳勝)의 뒤를 이었다면서 초왕(楚王)이 되어 있었던 경구(景駒-楚王의 宗族)와 그 심복이었던 진가(秦嘉)를 공격해서 패주시켰다. 그 후, 반진(反秦) 군(軍)의 영수가 되었던 항량(項梁)은 거소(居巢)로부터 달려왔던 범증(范增)의 말을 받아들여서, 구초(舊楚) 회왕(懷王)의 손자였지만, 당시에는 양치기로 전락해 있었던 심(心=義帝)이라는 인물을 데려와서, 그의 조부와 같은 이름으로 초왕(楚王-懷王)에 옹립시켰다. 그리고 그 후에 항량(項梁)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으로 자칭하고는 북진해서 진군(秦軍)과 싸웠고 연전연승했다. 그리고 또 그는 당시 삼천군(三川郡)의 태수(太守)였던 이유(李由=李斯의 장남)마저 제압하고는 자만하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송의(宋義)란 자가 나서서 간언했지만 듣지를 않았고, 이어서 정도(定陶)에서 장한(章邯)에게 패한 후, 그곳에서 죽었다.
♣ 송의(宋義-?부터 기원전 207년)는, 진말(秦末)의 사람으로 진(秦)에 반대해서 초(楚)로 가서 항량(項梁)의 휘하에 있었다. 그러다가 항량(項梁)이 죽자 총대장이 되었지만, 항우(項羽)와의 갈등으로 살해당했다. 그는 항량(項梁)이 연전연승을 하고 교만해하고 있었을 때 다음과 같이 항량(項梁)에게 조언을 했다. <장수가 몇 번 승리했다고 우쭐해하는 것은 병사들을 겁타(怯惰-겁이 많고 게으른 것)하게 하는 것으로, 그러면 필시 다음에는 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소수의 병사들이 그러합니다만(怯惰), 그러나 현재 진(秦)의 병사들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단지 그것이 걱정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항량(項梁)은 그의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로부터 얼마 후에, 송의(宋義)는 사자(使者)가 되어서 제(齊)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제(齊)의 사자(使者)를 만나서 이렇게 충고를 했다. <항량(項梁)은 곧 패하게 될 것이므로, 걸음을 늦추어서 재앙을 피하십시오> 그러자 그 사자(使者)는 그의 말에 따랐는데, 그러자 또 얼마 후에 항량(項梁)은 그의 말대로 장한(章邯)과의 싸움에서 져서 전사했다. 그 후, 그 제(齊)의 사자(使者)는 그때의 일을 초(楚)의 회왕(懷王=義帝)에게 전했다. 그러자 회왕(懷王)은 그를 불러서 이야기를 나눈 후에 매우 기뻐하면서 그를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했다. 그 후, 그는 항우(項羽) 등 여러 장군들을 통솔해서 조(趙)를 구했다. 그러자 그는 그때부터 경자관군(卿子冠軍)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경자(卿子)는 듣는 이를 문어적으로 높여서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로, 따로 공자(公子)로 칭할 수 있는 말이었으며, 관군(冠軍)은 상장(上將)의 뜻이므로, 그래서 그것은 전체적으로 그 송의(宋義)를 높여서 불렀던 이름이었다. 아무튼, 하지만 송의(宋義)는 그 도중에 46일간이나 체류를 했고, 그러자 또 병사들은 그러던 중에 내렸던 큰 비 때문에 추위와 기아(飢餓)에 떨어야만 했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행군을 재촉하던 항우(項羽)와의 갈등이 있었고, 그리고는 끝내 항우(項羽)의 칼에 살해당했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 변명으로 다음과 같이 말을 했고 <송의(宋義)는 제(齊)와 함께 초(楚)에 반란을 꾀했다. 그래서 왕(王)이 비밀 리에 나에게 명을 내려서 그를 죽이라고 했고, 그래서 오늘 내가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러자 제장(諸將)들은 항우(項羽)를 따랐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의 아들이었던 송양(宋襄)도 살해당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의 죄(罪) 10개조(箇條)를 들었을 때, 그 두 번째가 <송의(宋義)를 죽였던 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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