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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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3. 거병(擧兵)

 유방(劉邦)은 그렇게 모은 군단(軍團)으로 우선 주변에 있던 현(縣)들의 공략을 위해서 나섰다. 그리고는 옹치(雍齒)란 자에게 풍(豊縣)을 지키라고 맡겼는데, 그런데 그 옹치(雍齒)가 구위(舊魏)의 땅에서 할거(割據) 중이던 위구(魏咎) 측(周市라고 함)의 사람에게 협박을 받아서 항복을 하고 말았다.

 ※ 옹치(雍齒)는 人名이지만, 명사(名詞)로 쓸 때는 <늘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 또는 그런 관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 말은 유방(劉邦)이 미워하던 사람의 이름이 옹치(雍齒)였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옹치(雍齒-?부터 기원전 192년)는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 때 패(沛)의 사람이었으며, 그 이름은 군주(君主)가 원한(怨恨)에 치우치지 않고 은상(恩賞)을 내리는 것의 대명사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원래 그는 패(沛)의 호족(豪族)으로, 그 지방의 유력자(有力者)였던 왕릉(王陵)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그러나 유방(劉邦)과는 사이가 나빴다. 그리고 진(秦)의 2세 황제 원년(기원전 209년)에 유방(劉邦)이 진(秦)을 상대로 봉기해서 패공(沛公)이 되자, 옹치(雍齒)도 그에 따랐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유방(劉邦)은 풍(豊)을 그에게 맡겼지만, 그러나 위(魏)의 주시(周市)란 자가 풍(豊)으로 와서 옹치(雍齒)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원래 위(魏)가 이주해 왔던 곳이며, 위(魏)는 이미 수십 개의 성(城)을 평정했소. 그러므로 지금 당신이 항복을 한다면 이곳에서 제후로 지내게 해주겠지만, 그러나 항복하지 않는다면 바로 이곳을 멸해버릴 것이오!>라고 협박을 했다. 그러자 처음부터 유방(劉邦)과 사이가 나빴던 옹치(雍齒)는 바로 위(魏)에 항복했다. 그러자 그에 화가 났던 유방(劉邦)은 풍(豊)을 공격했지만, 결국 함락시키지 못했고,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자신을 거역했던 옹치(雍齒)와 풍(豊)의 백성들을 원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후에 풍(豊)은 조(趙)에 속하게 되었고, 옹치(雍齒)도 다시 유방(劉邦)의 휘하로 들어가서 공적을 올렸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고조(高祖) 6년(기원전 201년)에 유방(劉邦)은 공신들에게 은상으로 공적에 따라서 제후의 위(位)를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특히 공적이 컸던 20여명을 제후(諸侯)로 한 다음에는, 밤낮 서로의 공적 크기로 다툴 뿐 결론을 내리지를 못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것으로 인해서 그에 불만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살해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런데다 또 장량(張良)으로부터 들어왔던 첩보에 의하면, 그 중에는 반란의 기미까지도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답답해졌던 유방(劉邦)은 장량(張良)에게 그 방법에 대해서 자문(諮問)을 구했다. 그러자 장량(張良)은 <우선적으로 유방(劉邦)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부터 제후에 봉해버리면 다른 사람들도 안심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두말도 없이 옹치(雍齒)를 십방후(什方侯=2500戶)에 봉했다. 그러자 그때서야 제장(諸將)들은 <옹치(雍齒)조차 봉후(封侯)가 된다면, 우리는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모두 기뻐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에 유방(劉邦)은 풍(豊)도 용서해주었고, 옹치(雍齒)는 혜제(惠帝) 3년(기원전 192년)에 사망해서 숙후(肅侯)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또 참고로, 삼국시대 촉(蜀)의 선주(先主)였던 유비(劉備) 사후, 익주(益州)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옹개(雍闓)는 그 옹치(雍齒)의 후예였다고 한다.<삼국지(三國志)의 촉서여개전(蜀書呂凱傳)에서>

 참고: 왕릉(王陵)은 첫째, 중국의 진(秦) 말기부터 전한(前漢)까지의 인물로, 초한전쟁(楚漢戰爭)에서 활약했던 장군이 있었으며, 둘째로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인물로, 진(秦)의 오대부(五大夫)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소개하는 인물은 첫째의 인물(?부터 기원전 180년)이며, 그는 패(沛) 출신 호족(豪族)으로, 겉치레 없이 직언(直言)을 하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유방(劉邦)도 대성(大成)하기 전에는 그를 형(兄)으로 모셨던 적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유방(劉邦)이 거병해서 함양(咸陽)을 떨어뜨렸을 때쯤, 그는 수천(數千)의 병력을 거느리고 남양(南陽)에서 활약했으며, 유방(劉邦)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후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싸우게 되자 그는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의 어머니를 인질로 삼고는 자신을 따를 것을 종용했는데, 그래서 왕릉(王陵)의 사자가 항우(項羽)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그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자결했다. <한왕(漢王-劉邦)을 따르도록 하라! 나 때문에 두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느니!> 그러자 항우(項羽)는 크게 노하고는 그의 어머니를 삶아버렸다고 했는데, 그러자 아무튼, 그때부터 그는 그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방(劉邦)을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또 이미 유방(劉邦)의 진영에서 서열이 거의 정해진 뒤였고, 그리고 또 유방(劉邦)의 숙적(宿敵)이라고 할 수 있었던 옹치(雍齒)와 그는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열후(列侯)에 봉해지는 것이 늦어졌고, 그것은 또 고조(高祖)6년(기원전 201년) 8월에나 이루어졌으며, 그때 그에게 내려졌던 작위는 안국후(安國侯=5000戶)였다. 아무튼 그 후, 유방(劉邦)도 죽고 혜제(惠帝)6년에 상국(相國)이었던 조참(曹參)도 죽자, 그는 우승(右丞)상에 그리고 진평(陳平)은 좌승(左丞)상에 올랐다. 그리고 또 그 혜제(惠帝) 사후, 여후(呂后)는 자신의 일족을 왕위에 올리려고 생각하고는 그에 대해서 왕릉(王陵)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고조(高祖)께서는 (劉氏 이외의 자가 왕이 되려고 한다면, 모든 백성들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를 토벌하라!)라고 말씀하시고는 白馬를 산 제물로 해서 맹세를 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呂 氏를 왕으로 한다는 것은, 그 맹세를 거역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기 때문에, 여후(呂后)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러자 또 여후(呂后)는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에게도 꼭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그러자 그들은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서 자신의 자제(子弟)들을 왕으로 삼았는데, 그러나 지금은 여후(呂后)가 천하를 다스리고 있으므로,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자 여후(呂后)는 아주 기뻐했는데,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왕릉(王陵)은 진평(陳平) 등에게 <당신들도 그때 맹세를 했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어떻게 그런 배신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도 나중에 고조(高祖)를 무슨 얼굴로 볼 것인가?!>라고 질책했다. 그러자 진평(陳平)이 이렇게 대답했다. <조정(朝廷)에 나가서 바른 말을 잘 하는 것은 당신이 나보다 나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 나라의 사직(社稷)을 지키고, 유(劉)씨(氏)의 후계자를 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나를 따라올 수가 없을 것이오!> 그러자 왕릉(王陵)은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 때문에 여후(呂后)는 왕릉(王陵)을 멀리했고, 그리하여 여후(呂后) 원년(元年-기원전 187년)에는 그의 실권(實權)마저 빼앗아버렸다. 그러자 그는 화를 내고는 병(病)을 칭하고 사직(辭職)을 해서 집거에 들어갔으며, 조정에도 나가질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여후(呂后) 8년(기원전 180년)에 사망했으며, 그러자 무후(武侯)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애후(哀侯) 왕기(王忌)가 안국후(安國侯)를 이었지만, 그러나 또 그의 현손(玄孫) 대에 주금(酎金-前漢의 朝廷에서 祭祀를 지냈을 때 據出했던 돈을 말함) 사건으로 단절되었다.

 그러자 화가 났던 유방(劉邦)은 풍(豊)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그러자 어쩔 수 없이 패(沛)로
돌아갔다. 그런데 당시 진승(陳勝)은 진(秦)의 장한(章邯)에게 패하고는 달아나다 살해 당한 뒤였기 때문에, 그래서 진승(陳勝)의 부하였던 경구(景駒)가 영군(甯君)과 진가(秦嘉)라는 자를 진승(陳勝)을 대신해서 왕위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풍(豊)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경구(景駒)에게 군사를 빌리러 갔다.

 
※ 진승(陳勝-?부터 기원전 208년)은, 이미 앞에서 소개가 되었지만, 중국 진(秦)나라 말기의 농민 반란 지도자였으며, 기원전 209년에 오광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서 초나라 왕이 되었다가, 6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진나라는 멸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진승오광(陳勝吳廣)> 역시, 명사로 쓸 때는 어떤 일에 선수를 쳐서 앞지르는 일 또는 그런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되면, 그것은 또 물론, 앞에서 이미 기술한대로, 중국 진(秦)나라 때 진승과 오광이 군사를 일으켜서 반란에 선수를 쳤다는 데서 유래했다.

 ※
위구(魏咎-?부터 기원전 208년)는, 중국의 전국시대 후기부터 진대(秦代)의 정치가였고, 위(魏) 왕실의 일족으로, 원래는 위(魏)의 영능군(甯陵君=寧陵君)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위표(魏豹)의 형 또는 사촌이었는데, 그러나 기원전 225년에 위(魏)가 진(秦)에 멸하자, 그도 서민(庶民)의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09년에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진승(陳勝)의 부하가 되었다. 그 후, 진승(陳勝)의 부하였던 주시(周市)가 위(魏)를 평정하자 사람들은 주시(周市)를 왕으로 세우려고 했지만, 그러나 주시(周市)는 위(魏)의 후예였던 위구(魏咎)를 맞이해서 왕위에 올렸다. 그러자 위구(魏咎)는 주시(周市)의 호의에 감사하며, 주시(周市)를 재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때쯤, 군사를 일으켰던 진평(陳平)이 위구(魏咎)를 찾아와서 수많은 진언을 했지만, 그러나 주변의 가신(家臣)들에 의한 중상모략으로 도망을 갔고, 그리고는 항우(項羽)의 부하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진(秦)의 장한(章邯)이 맹렬하게 반격을 해왔는데, 그러자 그것을 막기 위해 위군(魏軍)을 인솔하고 나갔던 주시(周市)가 임제(臨濟)에서 제왕(齊王) 전담(田儋)과 함께 격파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궁지에 몰렸던 위구(魏咎)는 백성들의 안전을 조건으로 항복했고, 이어서 스스로 분신자살(焚身自殺)했다. 그리고 그 위구(魏咎)
사후(死後), 초(楚)의 항량(項梁)의 도움으로 도망을 갔던 위표(魏豹)는 회왕(懷王)에게서 수천(數千)의 군사를 빌려서는 위(魏)의 성(城) 20여 곳을 함락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장한(章邯)이 항우(項羽)에게 항복하자, 스스로 위왕(魏王)에 올랐다.

 
기원 전 208년 유방(劉邦)은 영군(甯君)과 함께 진군(秦軍)과 싸웠지만 졌다. 그러자 다시 탕<碭=현재의 안휘성(安徽省) 탕산(碭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고, 그곳에 있던 5,6천 정도의 군사들을 본대(本隊)에 합류시켜서 다시 하읍<下邑=하남성(河南省) 녹읍(鹿邑)>을 함락했으며, 그 기세를 몰아서 다시 풍(豊)을 공격해서 겨우 함락했다.
 

                                           <안휘성 탕산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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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량(張良) Ⅱ



 <유방(劉邦)의 휘하(麾下)로>

 <진승 ·오광의 난>이 발생하자 장량(張良)도 군사를 모아서 그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100여 명 정도밖에는 모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당시, 진승(陳勝) 사후(死後) 초왕(楚王)에 옹립되어 있던 초(楚)의 舊 왕족 경구(景駒)가 유(留)에 있었으므로, 그래서 그와 함께하려고 그곳으로 가던 도중에 유방(劉邦)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장량(張良)은 몇 번이나 다른 대장(大將)들을 만나서는 자신의 병법(兵法)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단 한사람도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방(劉邦)을 만나서는 또 병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유방(劉邦)은 별 거부감 없이 장량(張良)의 말을 수용했고, 그것을 실전(實戰)에까지 사용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장량(張良)은 그에 감동하여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유방(劉邦)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영웅이다!> 아무튼 그 후, 유방(劉邦)은 경구(景駒)를 패주시키고 항량(項梁) 휘하에 있던 군사들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항량(項梁)은 새로운 왕으로 회(懷-뒤의 義帝)를 세웠다. 그러자 그때 장량(張良)은 한(韓)의 공자(公子)였던 횡양군(橫陽君) 성(成)을 한왕(韓王)에 세울 것을 진언했고, 그에 항량(項梁)도 그 의견을 따라서 성(成)을 한왕(韓王)에 옹립했으며, 이어서 장량(張良) 본인도 그 신도(申徒-史記集解에 의하면, 司徒를 말했던 것으로, 司徒는 또 前漢 시대에는 丞相 格이었음)에 임명되었다.

 사기집해(史記集解)에 의하면 신도(申徒)=사도(司徒)에 해당하며, 사도(司徒)는 중국의 관명(官名)으로, 서주(西周)시대에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삼공(三公) 다음의 지위, 즉 육경(六卿)에 상당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직무는 전토(田土=토지)와 재화(財貨) 그리고 교육(敎育) 등을 담당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위의 설명대로 전한 시대에는 승상 격이었음.

 ★ 의제(義帝-?부터 기원전 206년)는, 진말(秦末)의 정치가였고, 반진(反秦)세력 명목상의 맹주(盟主)였으며, 서초(西楚)의 군주였다. 그리고 진(秦)이 멸망한 후, 일시적인 중국의 황제였기도 했는데. 성(姓)은 미(羋), 이름은 심(心), 초(楚) 회왕(懷王)의 손자(일설에는 玄孫)였다. 그리고 초(楚) 멸망 후에 지방으로 피해서 목동(牧童=양치기)으로 살았지만, 진말(秦末) 동란기(動亂期)에 항량(項梁)에 의해서 초왕(楚王)에 즉위했으며, 조부(祖父)의 이름을 계승하고는 회왕(懷王)이 되었다. 하지만 정도(定陶)에서 항량(項梁)이 전사(戰死)하자 송의(宋義)와 유방(劉邦)을 이용해서 항량(項梁)의 뒤를 이었던 항우(項羽)를 견제했고, 그로써 반진(反秦)세력의 맹주가 되었다. 그리고 또 이른바 <회왕지약(懷王之約)>을 발포(發布)했으며, 팽성(彭城)에서 그 전쟁지도를 담당했다.

 ○ 懷王之約은 진(秦)의 首都 ・咸陽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에게 진(秦)의 본관(本貫)인 관중(關中)을 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말함

 그리고 그 결과, 기원전 207년에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진왕(秦王)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항우(項羽)는 그 뒤에 대군을 인솔해서 함양(咸陽)으로 들어갔는데, 그러자 회왕(懷王)은 <약속을 실행하라!>라고 여러 장군들에게 엄명했다. 하지만 항우(項羽)는 그 명령을 무시하고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었다. 그리고는 회왕(懷王)에게 하야(下野)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의제(義帝)는 어쩔 수 없이 성(城)을 나섰는데, 그런데 그 도중에 항우(項羽)가 보냈던 영포(英布)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그 살해 장소나 살해자가 영포(英布)였던가에 대해서는 제설(諸說)이 있으며, 장강(長江)에서 영포(英布)의 부하였던 오예(吳芮)와 공오(共敖)에게 살해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또, 바로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항우(項羽)는 반진(反秦)세력의 맹주, 혹은 진(秦) 멸망 후 중국의 실질적인 원수(元首)로서의 정당성을 잃게 되었고, 그러나 또 그 반사이익으로 유방(劉邦)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은 셈이 되어서, 앞으로 전개될 항우(項羽)의 멸망, 그리고 한(漢) 왕조의 성립으로 연결되어갔던 것이다.

 
한왕 성(韓王成-?부터 기원전 205년)은, 진말(秦末)에서 전한(前漢)초기의 인물로, 초한전쟁(楚漢戰爭)기의 한왕(韓王)이었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한(韓). 시호(諡號)는 성(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국시대 말기에 한왕(韓王)의 공자(公子)로 태어나서, 젊어서 횡양군(橫陽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기원전 230년에 한(韓)이 멸망하자 그 지위를 잃고 서민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진말(秦末) 동란기(動亂期)였던 기원전 209년경에 망한(亡韓)의 유신(遺臣)이었던 장량(張良)이 항량(項梁)에게 진언해서 그는 한왕(韓王)에 옹립되었다. 그러나 항우(項羽)의 장량(張良)에 대한 불만과(劉邦의 편에 붙었던 것) 범증(范增)의 조언에 의해서 그는 감금되었고, 그 후로 다시는 한(韓)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기원전 206년이 끝나갈 무렵, 벽지(僻地)의 한중왕(漢中王)에 봉해졌던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토벌하기 위해서 한신(韓信)을 대원수(大元帥)로 삼고 동진(東進)을 시작했다. 그러자 성(成)은 더욱 항우(項羽)의 눈에 가시가 되었고, 그런데다 또 범증(范增)이 나서서 <禍를 끊기 위해서라도 성(成)을 죽이라>고 조언했기 때문에, 결국 그는 살해되었다.<그 시체는 들(野)에 버려졌다고 한다> 아무튼,
그 비보(悲報)를 받은 장량(張良)은 몹시 슬퍼하며 항우(項羽)에 복수를 맹세했다. 그리고는 관직에서 물러나서 성(成)의 시체를 수습해서는 구한(舊韓)의 땅에다 성(成)을 극진하게 모셨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성(成)의 1세대 아래 친족이었던 신(信)을 옹립하고는, 정식으로 유방(劉邦)의 참모가 되었다.

 그 후, 장량(張良)은 한왕 성(韓王成)을 따르며 천명(千名)정도의 군세(軍勢)로 구한(舊韓)의 성(城)을 공격해서 점령했지만, 하지만 곧바로 병력의 차이로 인해서 진(秦)에 졌고, 그 결과 그 성(城)을 빼앗겼다. 그러자 정면승부는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장량(張良)은 곧 이어서 유격전(遊擊戰)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그리고 또 마침 그때 유방(劉邦)이 지원을 왔으므로, 그들과 합류해서 그 성(城)을 다시 수십(數十) 번에 걸쳐서 공격해서는 결국 한(韓)을 재흥(再興)시켰다. 그 후, 장량(張良)은 한왕 성(韓王成)에게 성(城) 하나를 맡기고는 스스로 유방(劉邦)을 따라서 진(秦) 공격에 나섰다. 그리고 동남(東南)의 관문(關門)이었던 무관(武關)에 이르렀을 때, 유방(劉邦)은 곧바로 쳐들어 가려고 했지만, 그러나 장량(張良)은 그 수장이 상인(商人) 출신인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를 돈으로 매수해서 관(關)을 열게 하고는, 그리고는 또 그가 방심하고 있던 사이에 급습해서 그를 죽이고는 손쉽게 관중(關中)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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