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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왕광(王匡)> 생몰불명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자(字)는 공절(公節). 연주(兗州) 태산군(泰山郡) 출신. 그는 소위 젊었을 때 황금을 돌같이 봤던 성격으로 해서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던 협객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채옹(蔡邕)과도 친교가 있었으며, 대장군 하진(何進)의 휘하에 있다가 서주<徐州-그러나 노필(盧弼)은 三國志集解에서 연주(兗州)를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남겼다>로 부임했고, 그곳에서 군수물자의 보급 등 후방을 담담했다.
참고: 채옹(蔡邕)은 중국 후한 때의 문인, 서예가, 학자였으며, 생몰년은 133년부터 192년. 자(字)는 백개(伯喈)였고, 시문에 능했으며, 수학과 천문 그리고 서도와 음악 등에도 뛰어 났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명한 영자팔법(永字八法)을 고안했으며. 저서로는 <채중랑집(蔡中郞集)>과 <독단(獨斷)> 외에도 여러 작품이 있었다. 영제(靈帝)의 고문(顧問)을 지냈으며, 딸 채문희(蔡文姬)는 시인(詩人)이었고, 본명은 채염(蔡琰)이었다. 그리고 비백체(飛白體)의 창시자였다.
중평(中平) 6년(189년), 하진(何進)이 살해 당하자 그는 낙향해서 평민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 후, 하내(河內)군의 태수(太守)가 되었다.
초평(初平) 1년(190년), 제후들에 의한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조직되자 그도 참가해서 군을 하양진(河陽津)에 주둔시켜 두고는 동탁 군(董卓軍)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동탁 군(董卓軍)의 교묘한 협공을 받아서 거의 전멸하는 대패를 맛봤다.
그 후, 그는 태산(泰山)으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군사를 다시 모아서 진류(陳留) 태수(太守) 장막(張邈)과 합류하려고 했다. 그런데 또 그 무렵, 동탁(董卓)이 보냈던 화친(和親)의 사자가 하내(河內)로 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사위였던 집금오(執金吾=宮中의 警備를 맡았으며, 近衛長官) 호모반(胡母班)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소(袁紹)의 명을 받아서 부득이 그를 죽였다.
[191 년]
⊙ 초평(初平) 2년(191년), 흑산군(黑山軍)의 반란을 계기로 조조(曹操)는 원소(袁紹)에 의해서 동군(東郡)태수(太守)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그 시기에 많은 인재들이 조조(曹操)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바로 그 즈음에 조조(曹操)는 호모반(胡母班)의 유족(遺族)들과 손잡고 왕광(王匡)을 살해했다.
⊙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해산(解散)한 후, 원소(袁紹)는 원술(袁術)과의 대립이 깊어졌다. 그러자 각 제후들은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과 맹약들을 맺었고, 그때 원소(袁紹)와 동맹을 했던 사람들은 조조(曹操)와 유표(劉表) 그리고 한복(韓馥) 등이었고, 원술(袁術)과 동맹을 맺었던 사람들은 손견(孫堅)과 공손찬(公孫瓚) 그리고 도겸(陶謙) 등이 있었다. 그리고 또, 원소(袁紹)는 동탁(董卓)에 의해서 옹립되었던 헌제(獻帝)를 반대했고, 그래서 당시 대사마(大司馬)였던 유우(劉虞)를 다시 옹립하려고 계획했지만, 그러나 그에는 또 원술(袁術)과 공손찬(公孫瓚)이 강하게 반발했다.
191년, 원소(袁紹)는 계략으로 한복(韓馥)에게서 기주(冀州) 목(牧=州牧=刺史)의 지위를 양도(讓渡) 받았고, 그것은 또 영웅기(英雄記)에 따르면, 봉기(逢紀)가 원소(袁紹)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결과였다고 한다. <공손찬(公孫瓚)에게 한복(韓馥)을 공략하라고 명하면, 한복(韓馥)은 필시 겁을 먹을 것이므로 바로 그때에 사자를 파견해서 이해득실을 따져주면, 그는 필시 기주(冀州)를 양도하게 될 것입니다>
⊙ 손견(孫堅)이 예주(豫州) 자사(刺史)로 있었을 때, 원소(袁紹)가 주우(周喁)를 다시 예주(豫州) 자사(刺史)로 보냈다. 그러자 원술(袁術)과 원소(袁紹)의 대립은 깊어지게 되었다. 그 후, 각 제후들은 원소(袁紹)와 원술(袁術)과의 동맹을 맺었고, 그 후에 또 손견(孫堅)과 원술(袁術)은 주우(周喁) 등을 몰아냈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공손찬(公孫瓚)의 종형제(從兄弟)였던 공손월(公孫越)이 전사했다. 그리고 또 191년 또는 192년에 원술(袁術)은 손견(孫堅)에게 유표(劉表)를 공략하라고 시켰지만, 손견(孫堅)은 실패하고 죽었다.
[192 년]
⊙ 조조(曹操)가 흑산군(黑山軍)의 본거지를 공격해서 휴고(眭固)와 흉노(匈奴)의 어부라(於夫羅)에 대승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여름 4월에는 동탁(董卓)이 여포(呂布)에게 살해 당했으며, 연주(兗州) 자사(刺史)였던 유대(劉岱)도 청주(靑州)에서 왔던 황건군(黃巾軍)에게 살해되었다.
참고: 앞의 글과 중복되는 것이 많지만, 연대순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다시 소개합니다.
그리고 또 그때, 포신(鮑信) 등이 조조(曹操)를 연주(兗州) 목(牧)으로 맞이했다. 그 후, 조조(曹操)는 청주(靑州)의 황건 군(黃巾軍)을 항복시켰고, 청주병(靑州兵=靑州軍)을 결성했다.
⊙ 공손찬(公孫瓚)은 그때 원술(袁術)과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192년에 원소(袁紹)와 원술(袁術)이 대립하게 되자 그는 원술(袁術)의 요청을 받아서 유비(劉備)를 고당(高唐)에, 단경(單經)을 평원(平原)으로 그리고 또 서주(徐州) 목(牧)이었던 도겸(陶謙)을 발간(發干)에 각각 주둔시켜서 원소(袁紹)를 압박했다.
그런데 그 즈음에, 평원(平原) 출신의 유평(劉平)이 유비(劉備) 휘하에 들었던 것에 불쾌감을 느껴서 자객을 파견했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그러자 또 그에 감동했던 자객은 자신의 일을 유비(劉備)에게 전부 말해주고는 다시 돌아갔다.(魏書에서)
⊙ 원술(袁術)이 연주(兗州)에 있던 조조(曹操)에게 싸움을 걸었지만, 그러나 오히려 원소(袁紹), 조조(曹操), 유표(劉表) 연합군에 대패했다. 그런데다 또 유표(劉表)에게 배후까지 차단 당했기 때문에, 그래서 본거지였던 남양군(南陽郡)을 버리고 양주(揚州)로 도망가서 수춘(壽春)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후, 이각(李傕)이 장안(長安)으로 들어갔고, 원술(袁術)과 동맹을 맺었다. 그 결과 원술(袁術)은 좌장군(左將軍=陽翟侯)에 임명되었다.
그 후, 원술(袁術)은 손견(孫堅)의 유아(遺兒)였던 손책(孫策)에게 양주(揚州)를 공략시켜서 여강(廬江) 태수(太守)였던 육강(陸康)과 양주(揚州) 자사(刺史)였던 유요(劉繇)를 토벌했던 등, 세력을 확대했지만, 그러나 원술(袁術)은 그 획득했던 영토를 자신의 장군들에게 모두 분배시켜 버렸다. 그러자 손책(孫策)은 그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되었고, 그것은 또 나중에 원술(袁術)을 배신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바로 그 시기에 아직 어렸던 육적(陸績=陸康의 子)이 원소(袁紹)를 만났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원소(袁紹)가 그에게 밀감(蜜柑)을 주었고, 그러자 또 육적(陸績)은 그것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주려고 몸 속에 숨겼다. 그러자 또 원소(袁紹)가 그것을 알고는 그를 매우 효성이 지극한 아이라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24효(孝)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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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책(孫策)> 175年–200年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장군. 자(字)는 백부(伯符). 시(諡)는 장사환왕(長沙桓王). 오군(吳郡) 부춘(富春) 또는 오군부춘(吳郡富春-현재의 浙江省 杭州市 富陽縣) 출신. 손견(孫堅)의 장자(長子). 아우는 오(吳)의 초대황제 손권(孫權).
19세 때, 그는 아버지 손견(孫堅)이 죽자 원술(元述) 군에 흡수되어 있었던 손견(孫堅) 군 1000여명을 모아서 군(軍)을 만들었고, 그 군세로 유요(劉繇)을 제압하고 세력을 확대했다. 그 후, 그는 원술(袁術)로부터 독립해서 크게 활약했지만, 그러나 또 건안(建安) 5년(200년)에 자객의 습격을 받았고, 그때의 부상으로 인해서 향연 26세에 죽었다. 그러자 그의 후계는 동생이었던 손권(孫權)으로 정해졌고, 나중에 그 손권(孫權)에 의해서 그의 시(諡)는 장사환왕(長沙桓王)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그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그 약진(躍進)의 눈부심으로 인해서 소패왕(小覇王)으로 칭해졌다. 그리고 그의 모(母)는 오부인(吳夫人=吳景의 姉)이었고, 동생은 손권(孫權) 외에 손익(孫翊), 손광(孫匡)이 있었다. 그리고 이모매(異母妹)에 손부인(孫夫人=劉備의 妻)이 있었고, 정처(正妻)는 불명이다. 그리고 또 첩(妾) 또는 처(妻)에 대교(大橋)가 있었다.
참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대교(大喬)라고 했고,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정처(正妻)였다고 되어 있다.
자(子)는 손소(孫紹), 그 외에 딸 세 명은 각각 고소(顧邵=顧雍의 長子), 육손(陸遜), 주기(朱紀=朱治의 次子)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그는 항상 용모단정(容貌端正=容姿端麗)했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던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소년 때는 동년(同年)의 주유(周瑜)와 사귀었고, 그 우정은 그가 죽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의 우정을 세인들은 <단금(斷金)의 교(交)>라고 부르며 칭송했다고 한다.
참고: 오서(吳書)의 손파노토역전(孫破虜討逆傳) 강표전(江表傳)에서는 <의동단금(義同斷金=金도 자를 만큼의 義理)>이라고 표현했고, 그것은 또 원래는 역경(易經)의 <二人同心 其利斷金=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금(金)도 자를 수 있는 힘이 생긴다>이란 말에서 유래했던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는, 192년에 아버지 손견(孫堅)이 죽자, 잠시 동안 강도(江都)로 이주해서 살았다. 그러나 그때는 손견(孫堅)의 군사들이 모두 원술(袁術)의 군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그의 곁에는 그 강도(江都)에서 만났던 여범(呂範)과 일족이었던 손하(孫河)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 후에 그는 원술(袁術)의 권유로 단양군(丹陽郡)의 태수(太守)였던 오경(吳景)에 의지하며 군사를 일으켰지만, 그러나 그 단양(丹陽)의 수령(首領)이었던 조랑(祖郞)에게 대패하고는 원술(袁術)에게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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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公孫瓚)> 2
그 후, 공손찬(公孫瓚)은 군웅(群雄)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는 원소(袁紹)와 대결하기 위해서 원술(袁術)과 손을 잡았지만, 그러나 그 원소(袁紹)와의 싸움에서 그는 자신의 종제(從弟)였던 공손월(公孫越)을 잃었다. 그러자 공손찬(公孫瓚)은 그에 격분했고, 그러자 또 그것이 두려웠던 원소(袁紹)는 공손찬(公孫瓚)의 또 다른 종제(從弟)였던 공손범(公孫範)을 발해(渤海) 태수(太守)에 임명한다는 인수(印綬)를 보냈다. 그리고는 또 그에게 시켜서 공손찬(公孫瓚)과의 강화를 도모했다. 하지만 그 공손범(公孫範)은 임지에서 군병(郡兵)을 손에 넣게 되자 원소(袁紹)를 배신하고는 공손찬(公孫瓚)에 가담했다. 그러자 또 공손찬(公孫瓚)은 자신의 수하들을 차례로 주(州)의 자사(刺史)로 임명하고는 계교(界橋)의 원소(袁紹)와 국의(麴義) 그리고 전풍(田豊) 등과 싸웠지만 패했고, 그러자 그는 북(北)으로 도망갔다.
그 후, 최거업(崔巨業) 등이 인솔했던 수만(數萬)의 원소 군(袁紹軍)에 의해서 고안성(故安城)이 포위되었다. 그러나 최거업(崔巨業) 등은 그 성을 끝까지 공략하지 못했고, 그러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최거업(崔巨業)은 그곳에서 철퇴했다. 그러자 또 그때, 공손찬(公孫瓚)과 전해(田楷) 등이 인솔했던 3만의 병력이 그들을 추격했고, 이어서 거마수(巨馬水)란 곳에서 그들을 크게 이겼다.
그 후, 공손찬(公孫瓚)은 그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남진(南進)했다. 그리고는 각(各) 군현(郡縣)들을 차례로 공략해 들어갔지만, 그러자 또 원소(袁紹)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수만(數萬)의 군사를 파견시켰고, 그 결과 양군(兩軍)은 약 2년간에 걸쳤던 장기전(長期戰)에 돌입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공손찬(公孫瓚)의 패배로 끝났다.
그런데 그때, 공손찬(公孫瓚)의 본거지였던 유주(幽州)에는 대사마(大司馬) 유우(劉虞)가 있었는데, 그런데 그 유우(劉虞)와 공손찬(公孫瓚)은 오환(烏桓)과 선비족(鮮卑族)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그러자 유우(劉虞)는 공손찬(公孫瓚)을 치려는 계획을 세우고는 그 주위의 이민족(異民族)들과 제휴해서 수만(數萬)의 군대를 모았다. 하지만 또 그때, 유우(劉虞)의 막료(幕僚)였던 공손기(公孫紀)가 그 사실을 공손찬(公孫瓚)에게 밀고했고, 그러자 또 공손찬(公孫瓚)은 정예기병 수백(數百)을 이끌고는 유우(劉虞)의 군대를 기습했다. 그리고는 아주 철저하게 파괴한 후, 다시 집요하게 추격한 결과, 193년에 마침내 유우(劉虞)를 포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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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겸(陶謙)> 132년-194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장군. 자(字)는 공조(恭祖). 양주(揚州) 단양군(丹陽郡) 여요현(余姚縣-현재의 山東省과 河南省의 경계) 출신.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서 결국 태학(太學-지금의 大學)에 들어갔다.
참고: 도겸전(陶謙傳) 주(注) 오서(吳書)에는, 도겸(陶謙)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고, 그 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으며, 14세 이후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골목대장 짓을 했다고 되어있다.
그 후, 그는 귀향해서 군(郡)과 주(州)의 관료를 지냈으며, 결국에는 무재(茂才)의 추천을 받아서 현령(縣令)이 되었고, 그 후에는 또 유주(幽州)의 자사(刺史)로 승진했다.
184년, 황건(黃巾)의 난(亂)이 일어나자 서주(徐州)의 자사(刺史)가 되었고, 황건적(黃巾賊)을 패주시켰다. 185년, 중앙(中央)으로 다시 소환되었고, 차기장군(車騎將軍) 장온(張溫)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후, 한수(韓遂)와 변장(邊章) 등을 토벌하기 위해서 양주(凉州)로 원정을 떠났다.
참고: 그 시기에 그는 상관이었던 장온(張溫)을 모욕해서 장온(張溫)을 격노시켰다. 그리고 삼국지의 위서동탁전(魏書董卓傳)과 동(同) 오서손견전(吳書孫堅傳)에 의하면, 장온(張溫)은 우유부단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동료였던 동탁(董卓)과 손견(孫堅) 등이 불만을 품었다고 되어 있다.
190년,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결성되자 도겸(陶謙)은 서주(徐州)에서 그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으로 도망을 가자 공물(貢物)을 조정에 바치고는 안동(安東)장군, 서주(徐州) 목(牧)이 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에는 양주(揚州)에까지 손을 뻗쳐서 그는 2개의 주(州)를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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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표(劉表)> 142년-208년 8월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 유학자. 자(字)는 경승(景升). 산양군(山陽郡) 고평현(高平縣-현재의 山東省과 河南省의 경계)출신. 그의 가계(家系)는 유 씨(劉氏)였으며,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제4자(子)였던 노공왕(魯恭王) 유여(劉余)의 자손이었다. 그리고 후한(後漢)의 통제력이 상실된 후, 형주(荊州)를 할거했으며, 대장군 하진(何進)의 부하가 되었다. 그리고 영제(靈帝) 사후(死後)에는 칙서를 받아서 형주(荊州) 자사(刺史) 왕예(王叡)의 후임으로 임지로 떠났다. 그러나 당시, 장강(長江) 남안(南岸)은 토호(土豪)들이 할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주치(州治)였던 한수(漢壽)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북부의 의성(宜城)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장 채모(蔡瑁), 괴월(蒯越), 괴랑(蒯郞) 등과 힘을 합쳐서 불온분자들을 진압했고, 그 결과 형주(荊州) 북부를 지배하는데 성공했다.
참고: 그러나 나중에 주치(州治)를 의성(宜城) 근처의 양양<襄陽-현재의 湖北省 양번시(襄樊市) 北部>으로 옮겼다.
190년, 각지에서 반 동탁(董卓) 의병들이 거병하자 그도 참가했다. 192년(그러나 191년이란 설도 있다), 원술(袁術)의 명을 받았던 손견(孫堅)이 형주(荊州)를 침입했다. 그러자 유표(劉表)는 황조(黃祖)에게 시켜서 그것을 막게 했던 한편, 자신은 또 원소(袁紹)와 동맹을 맺어서 손견(孫堅)에 대항했다. 그러자 황조(黃祖)는 무척 고전했지만, 그러나 손견(孫堅)을 죽이고 형주(荊州)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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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李傕)> ?-198년 4월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정치가. 동탁(董卓)의 부하로 활약했으며, 동탁(董卓) 사후(死後)에는 장안(長安)을 강습(强襲)해서 여포(呂布)를 몰아냈고, 왕윤(王允)과 황완(黃琬) 등을 숙청시켰다. 그 후, 헌제(獻帝)를 옹립시켜서 권력을 장악했지만, 하지만 또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곽사(郭汜)와 다투었고, 끝내는 조조(曹操)에 의해서 멸망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8년 4월에 배무(裵茂), 단외(段煨)에게 토벌되었다.
그의 이름이 사서(史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초평(初平) 2년(191년)이며, 그때 그는 손견(孫堅)에게 강화를 요청하는 사자로 등장했다.(단, 그 교섭은 결렬되었고, 강화는 무산되었다) 그 후, 손견(孫堅)이 낙양(洛陽)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동탁(董卓)의 사위였던 우보(牛輔)와 함께 협현(陜縣)에 남았다. 그 후, 먼저 동탁(董卓)의 명으로 낙양(洛陽) 방면으로 파견되었다가 원술(袁術)에게로 돌아섰던 주준(朱儁)이 형주(荊州)에서 낙양(洛陽)으로 진격해오자 그는 곽사(郭汜)와 함께 주준(朱儁)을 물리쳤다. 그러자 그들은 그 여세를 몰아서 연주(兗州) 진류군(陳留郡)과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의 제현(諸縣)으로 진격해서 남자들은 모두 죽였고, 여자들은 잡아서 모두 끌고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지난 자리에는 남아있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홍농왕(弘農王) 유변(劉弁)이 이유(李儒)에게 살해 당했다. 그러자 유변(劉弁)의 황후였던 당희(唐姬)는 고향 영천(潁川)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녀는 그곳을 공격해 왔던 이각(李傕)에게 포획되었다. 그리고는 이각(李傕)에게 결혼을 강요 받았지만, 그러나 그녀가 완강히 거절하자 이각(李傕)은 그녀를 처형했다.
그 후, 동군(東郡)의 순욱(荀彧)이 이각(李傕)의 침공을 염려해서 장로(長老)들에게 신속한 피난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순욱(荀彧)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러자 또 순욱(荀彧)은 자신의 가족들만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그 후, 실제로 이각(李傕)이 그곳으로 쳐들어왔고, 그러자 그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초평(初平) 3년(192년) 4月, 동탁(董卓)이 여포(呂布)와 왕윤(王允)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그러자 왕윤(王允)은 군(軍)이 대부분 양주(凉州) 출신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염려해서 군(軍)을 해산하기로 마음 먹고는 우선 이숙(李肅)에게 명해서 협현(陜縣)의 우보(牛輔)와 이각(李傕) 등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그 이숙(李肅)은 오히려 우보(牛輔)의 반격을 받아서 패했고, 우보(牛輔) 또한 자신의 부하였던 복호적아(攴胡赤兒)의 배신으로 살해 당했다.
그 후, 이각(李傕)은 왕윤(王允)에게 사면(赦免)을 요청했지만 거부되었고, 그러자 또 그 시기에 장안(長安)에서는 양주(凉州) 출신자들은 모두 잡아서 죽인다는 유언비어가 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각(李傕) 등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사태를 주목했다. 그러나 곧 가후(賈詡)의 진언을 받아서 곽사(郭汜) 등과 함께 십만(十萬) 대군을 모아서 장안(長安) 기습을 결의했다. 그리고 또 동시에, 자신의 군(軍)에 소속되어 있던 병주(幷州) 출신자들을 모두 살해했다.(王允과 呂布가 幷州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러자 또 그것을 미리 알아 차렸던 왕윤(王允)은 과거 동탁(董卓)의 부하였던 호진(胡軫)과 서영(徐榮) 그리고 양정(楊定) 등에게 이각(李傕)을 토벌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고, 서영(徐榮)은 이각(李傕)에게 패했으며, 호진(胡軫)과 양정(楊定)은 신풍(新豊)까지 진격해서 그곳에서 이각(李傕)에게 붙었다.
동년(同年) 6월, 장안성(長安城)이 이각(李傕) 군에 포위되었고, 8월에는 낙성(落城)되었다. 그러자 이각(李傕)은 왕윤(王允)을 잡아서 여덟 토막으로 찢어 죽였고, 여포(呂布) 일당도 장안(長安)에서 몰아냈다. 그리하여 9월, 이각(李傕)은 차기장군(車騎將軍) 개부(開府) 영사예교위(領司隸校尉) 가절(假節) 지양후(池陽侯)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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