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193 년]

 ⊙
초평(初平) 4년(193年) 경, 원술(袁術)이 조조(曹操)가 주둔하고 있던 연주(兗州)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원술(袁術)은 미리 공손찬(公孫瓚)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그러자 또 공손찬(公孫瓚)은 유비(劉備)와 서주(徐州) 목(牧)이었던 도겸(陶謙)을 파견했다. 그러자 또 조조(曹操)는 원소(袁紹)의 협력을 받아서 그들을 모두 물리쳤다. <곡정(匤亭)의 싸움-그러나 광정(匡亭)이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랍니다> 그러자 패했던 원술(袁術)은 유표(劉表)에게 배후를 차단당했고, 그러자 또 본거지였던 남양군(南陽郡)을 버리고 수춘(壽春)으로 도망갔다.

 참고: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도겸(陶謙)이 조조(曹操)의 부(父)였던 조숭(曹嵩)과 제(弟) 조덕(曹德)을 포함했던 조 씨(曹氏) 일족을 살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몇 가지의 추리가 있어 소개하면 또 다음과 같다.(편의상 번호를 붙임)

 1.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서무제기본문(魏書武帝紀本文)에 의하면, 조숭(曹嵩)은 퇴관(退官)해서 돌아갔는데, 그때 동탁(董卓)과의 싸움이 시작되자 그 전화(戰禍)를 피하기 위해서 낭야(瑯耶)로 옮겨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도겸(陶謙)이 습격해서 살해했다.

 2. 삼국지 위서무제기(魏書武帝紀) 주(注) 세어(世語)에 의하면, 조숭(曹嵩)은 그때 태산군(泰山郡)의 화현(華縣)에 있었는데, 그러자 조조(曹操)가 조숭(曹嵩)을 만나러 가려 했지만, 그러나 그보다 먼저 도겸(陶謙)이 군을 이끌고 앞질러가서 살해했다.

 3. 삼국지 위서무제기(魏書武帝紀) 주(注) 오서(吳書)에 의하면, 도겸(陶謙)은 조숭(曹嵩)이 영내(領內)를 안전하게 지나가도록 장개(張闓)를 호위로 붙였다. 그러나 그들이 태산군(泰山郡)의 화현(華縣)과 비현(費縣) 사이를 지났을 때, 갑자기 장개(張闓)가 조 씨(曹氏)의 막대한 재산에 눈이 멀어서 그들을 모두 죽이고는 재산을 전부 챙겨서 달아났다. 그래서 조조(曹操)는 도겸(陶謙)에게 책임을 묻고자 그를 공격했다.

 아무튼, 그러자 가을, 그에 한(恨)을 품었던 조조(曹操)는 복수전(復讐戰)을 결의했고, 이어서 서주(徐州)를 침공했다. 그리고는 도겸(陶謙)의 성(城) 십 수개(數箇)를 빼앗았고, 팽성(彭城)에서도 대승했다. 그러자 또 조조(曹操)는 그 성민(城民) 수만(數萬)을 죽였으며, 그 외에도 살아 있는 것은 모두다 죽여 버렸기 때문에, 그 시체들로 인해서 사수(泗水)가 막혔다고 하며, 그것으로 또 조조(曹操)의 평가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이 조조(曹操)에게 공격당하자 전해(田楷)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그러자 전해(田楷)와 유비(劉備)가 그를 도우러 달려갔고, 그 후 유비(劉備)는 도겸(陶謙)의 영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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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손찬(公孫瓚)> 3

 그 즈음, 조정에서는 공손찬(公孫瓚)을 전장군(前將軍) 역후(易侯)에 봉한다는 뜻을 사자(使者) 단훈(段訓)을 파견해서 알려주었다. 그러나 공손찬(公孫瓚)은 그 단훈(段訓)을 협박해서 유우(劉虞)와 함께 그 일족을 처형해버렸다.(그러나 단, 劉虞의 長子였던 劉和만은 그때 袁紹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
유우(劉虞-?부터 193년)는, 후한(後漢)의 황족(皇族-家系는 劉氏)이었고, 자(字)는 백안(伯安),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후한(後漢)의 종실(宗室)이었던 동해공왕(東海恭王) 유강(劉彊=光武帝의 長男)의 말예(末裔)였고, 조부 유가(劉嘉)는 광록훈(光祿勳)을 지냈던 사람이었으며, 부(父) 유서(劉舒)는 단양(丹陽) 태수(太守)를 지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위(魏)의 중신(重臣)이었던 유엽(劉曄)은 그의 먼 친척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그는 명족(名族)의 혈통뿐만이 아니라 스스로도 공정청렴(公正淸廉)했던 명군(名君)이었기 때문에, 천하의 명사(名士)들과 백성들의 인망(人望)을 한 몸에 모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일례(一例)로, 중산(中山) 태수(太守)였던 장순(張純)이 오환(烏桓)의 구력거(丘力居)와 제휴해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정은 그를 유주(幽州) 목(牧)에 임명하고는 그 진압을 맡겼다. 그러자 그때, 이미 그의 인망(人望)을 듣고 있었던 구력거(丘力居)는 싸우지도 않고 귀순했고, 그러자 또 장순(張純)은 선비족(鮮卑族)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 선비족(鮮卑族)에서도 그의 인망(人望)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장순(張純)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그래서 그때, 유우(劉虞)는 칼 한번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인망(人望)으로만 그 반란을 진압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자 그는 원소(袁紹)와 한복(韓馥)의 추천으로 황제 즉위를 권유받았던 적도 있었는데, 그러자 또 그는 자신의 야심 없음을 이유로 그것을 거절했고, 오히려 한조(漢朝)의 영광을 빌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유주(幽州)에서 세력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공손찬(公孫瓚)에게는 방해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 또한 공손찬(公孫瓚)의 세력 증대를 몹시 위구(危懼)했는데, 그러자 또 그 결과, 그는 193년에 공손찬(公孫瓚)을 토벌하기로 마음을 먹고는 이민족(異民族)들을 규합해서 10만의 병력을
모았다. 그런데 바로 그 공손찬(公孫瓚)과의 결전을 바로 목전에 두었을 때, 그의 종사(從事)였던 정서(程緖)가 다음과 같이 진언을 했다. <공손찬(公孫瓚)의 악행(惡行)과 과실은 명백하지만, 그러나 처벌의 명목(名目)이 없고, 그리고 전쟁의 승산 또한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공격을 중지하시고 무위(武威)만 나타내신다면 공손찬(公孫瓚)은 저절로 항복을 할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군(軍)의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이유로 정서(程緖)를 참수했다. 그러자 유우(劉虞) 군은 곧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 사이에 또 그 작전은 공손찬(公孫瓚)에게 노출되고 말았다. 그러자 또 공손찬(公孫瓚)은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불러 모아 성 주위에 둘러 세우는 것으로 방패를 삼았다. 그러자 또 유우(劉虞)는 <죽일 사람은 오직 백규(伯珪-公孫瓚의 字) 한명!>이라고 지시했고, 그에 군사들은 성을 공략하다가 모두다 지쳐버렸다. 그러자 또 그 틈을 타서 공손찬(公孫瓚)은 유우(劉虞)의 진영에 화공(火攻)을 걸었고, 그러자 유우(劉虞) 군은 공손찬(公孫瓚)의 군대에 의해서 철저하게 괴멸되었다.

 그 후, 유우(劉虞)는 결국 공손찬(公孫瓚)에게 붙잡혔고, 그러자 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구명(救命)에 나섰지만, 그러나 공손찬(公孫瓚)은 그를 시장(市場)에다 내놓고 끌고 다닌 후에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자가 만약에 정말로 황제가 될 몸이라면 지금 당장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때 비는 내리지 않았고, 유우(劉虞)는 끝내 처형되었다. 그러자 그 일로 유주(幽州) 사람들은 공손찬(公孫瓚)에게서 등을 돌렸으며, 그리고 또 그때까지 유우(劉虞)를 믿고 있었던 북방의 오환(烏桓)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무튼, 그 침공의 획책을 먼저 했던 것은 명백히 유우(劉虞)였기 때문에, 그래서 공손찬(公孫瓚)의 공격은 예방전쟁(豫防戰爭)의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 일로 해서 원소(袁紹)와의 대립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유우(劉虞)의 신하들과 유화(劉和) 그리고 원소(袁紹)의 부하였던 국의(麴義)가 연합해서 공격을 걸어왔고, 그러자 공손찬(公孫瓚)은 <포구(鮑丘)의 싸움>에서 패했다. 그러자 또 그때부터 공손찬(公孫瓚)은 역경성(易京城)으로 들어가서 농성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성에는 이미 10년분의 병량(兵糧)이 확보되어 있었던 데다 아주 튼튼했던 견성(堅城)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후 1년 정도의 대치 끝에 병량(兵糧)이 고갈되었던 국의(麴義)와 유화(劉和)가 먼저 철수하려고 했다. 그러자 공손찬(公孫瓚)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을 추격해서 대파했다.

 그러자 또 이번에는 원소(袁紹)가 직접 대군을 인솔해서 공격을 해왔고, 그에 또 공손찬(公孫瓚)은 성외(城外)에 있던 장연(張燕)과 공손속(公孫續)과 힘을 합쳐서 원소 군(袁紹軍)을 물리치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그런데 또 그 밀서를 가지고 성을 나갔던 밀사(密使)가 원소(袁紹)에게 포획됨으로 해서 그 작전은 누설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공손찬(公孫瓚)은 출격을 개시했고, 이어서 참담한 패배를 맛봐야만 했다.

 그 후, 원소(袁紹)는 전풍(田豊)과 저수(沮授) 등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지하에 땅굴을 팠다. 그리고는 그 길을 따라서 군사를 투입시켰고, 이어서 역경(易京)을 공략했다. 그러자 최후를 예감했던 공손찬(公孫瓚)은 성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자신의 처(妻)와 막내 등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는 스스로도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그때가 건안(建安) 4년(199년) 3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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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겸(陶謙)이 궐선(闕宣)과 결탁해서 태산군(泰山郡)의 비현(費縣)과 화현(華縣)을 약탈했다.

 참고: 궐선(闕宣)은 황제를 자칭했던 종교지도자였으며, 삼국지의 위서무제기(魏書武帝紀)에 의하면, 조정으로부터 조조(曹操)에게 그를 토벌하라는 명이 내려왔고, 그 후 도겸(陶謙)과 함께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 후, 조조(曹操)의 공격을 받았던 도겸(陶謙)은 수십(數十) 개의 성을 빼앗겼고, 팽성(彭城)에서도 싸워서 패했다. 그러자 그때, 수만(數萬)의 사망자가 났으며, 그 시체들로 인해서 사수(泗水)가 막혔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후한서(後漢書)의 도겸전(陶謙傳)에 의하면, 조조(曹操)는 그때 남녀 수십(數十) 만 명을 살해했고, 심지어는 개나 닭 등, 살아 있는 것들은 모조리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결과로 사수(泗水)의 물이 막혔다고 했다. 하지만 그 후, 병량(兵糧) 부족으로 조조(曹操)는 그곳에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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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李傕) 등이 실권을 장악했던 조정으로부터 유표(劉表)는 가절(假節) 진남장군(鎭南將軍) 형주(荊州) 목(牧)에 임명되었고, 성무후(成武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후, 원술(袁術)과 조조(曹操)가 싸우게 되자 유표(劉表)는 원술(袁術)의 양도(糧道)를 차단했고, 조조(曹操)를 지원했다.

 그 후, 장제(張濟)가 식량부족으로 형주(荊州)의 양성(穰城)을 공격했지만, 날아 왔던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 그러자 유표(劉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장제(張濟)는 식량이 부족해서 형주(荊州)에 왔는데, 그런데도 내가 예(禮)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제(張濟)는 하는 수 없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본의(本意)가 아니었다> 그리고는 그때, 주인을 잃었던 장제(張濟) 군을 받아 들였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장제(張濟) 군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유표(劉表)에게 복종했다고 한다.

 그 후, 조조(曹操)와 원소(袁紹)는 서로 적(敵)이 되었고, 유표(劉表)는 계속해서 원소(袁紹)를 도왔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장제(張濟)군의 장수(張繡)와 힘을 합쳐서 조조(曹操)와 싸우게 된다.<삼국지(三國志)의 무제기(武帝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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