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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유비(劉備)> 2
161년-223년 6월 10일. 후한(後漢) 말에서 삼국시대에 활약했던 무장. 촉(蜀漢)의 초대황제. 황건(黄巾)의 난(亂) 때((靈帝) 공적을 올렸으나 그 후로는 각지로 전전했다. 그 후 제갈량(諸葛亮)을 만나면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수용(受容)했고, 촉(蜀)으로 가서 세력을 키웠다. 그 후, 후한(後漢)이 멸망하자 황제에 즉위했고, 촉한(蜀漢)을 건국했다. 자(字)는 현덕(玄德). 시호(諡號)는 소열황제(昭烈皇帝). 재위(在位)는 221-223년. 부(父)는 유홍(劉弘).

명대(明代)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는, 탁군(涿郡) 탁현(涿縣=현재의 河北省 保定市 涿州) 출신이었고, 전한(前漢)의 중산정왕 유승(中山靖王 劉勝)의 말예(末裔)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부(祖父)는 유웅(劉雄), 부(父)는 유홍(劉弘)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웅(劉雄)은 또 효렴(孝廉)에 추천된 후, 낭중(郎中)이 되었고, 최종적으로 연주(兗州) 동군(東郡) 범현(范縣)의 영(令)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부(父) 유홍(劉弘)도 주군(州郡)의 관리(官吏)를 지냈었지만, 그러나 유비(劉備)가 아직 어렸을 때 사망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후로는 토호(土豪=現地의 小豪族)의 신분은 유지했으나 궁핍해져서, 그의 어머니와 함께 돗자리를 짜서 내다 팔며 생활했다.
그리고 또, 그의 어렸을 때의 일화(逸話)로, 당시 그의 집 앞에는 아주 큰 뽕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그러자 유비(劉備)는 그것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나도 이 다음에 커서 천자(天子)가 타고 다니는 (그) 마차를 탈 것이야! 당시, 천자의 마차는 뽕나무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자 그때, 그의 숙부(叔父) 유자경(劉子敬=劉弘의 弟)이 그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그를 나무랐다고 한다. <아이야, 그런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몰살 당할지도 모르니까!>
그 다음, 그가 15세가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당시 종부(從父=叔父)였던 유원기(劉元起=劉雄의 甥)에게 도움을 청해서 그를 유덕연(劉德然=劉備의 四寸)과 함께 당시 동향(同鄕)에서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노식(盧植)의 문하(門下)에 들어가서 수학(受學)하게 했다. 그리고 또 그때의 동창(同窓)으로는 요서(遼西)의 호족(豪族) 태생이었지만 서자(庶子)였던 공손찬(公孫瓚)이 있었는데, 그러자 그 두 사람은 대단히 친하게 지냈고, 그러자 또 유비(劉備)는 그를 형(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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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식(盧植) ?-192년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 장군, 유학자. 자(字)는 자간(子幹). 자(子)는 노육(盧毓) 등, 적게 잡아도 3명은 있었다고 생각되며, 태생은 유비(劉備)와 동(同) 탁현(涿縣)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장이 8척2촌(8尺2寸=약195cm)이나 되었다고 하며, 그 목소리는 또 종소리처럼 우렁찼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렸을 때는 정현(鄭玄)과 함께 마융(馬融)에게서 유학을 배웠고, 그 후 귀향(歸鄕)해서 강학(講學)했다. 그리고 또 그는 고금(古今)의 서(書)에 통달했으며, 그 박학(博學)에다 절의(節義)까지도 높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 때문에 또 그는 영제(靈帝) 건영(建寧) 연간 중에 조정으로 불려가서 박사(博士)가 되었고, 이어서 175년(熹平 四年), 구강(九江)의 남이(南夷)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문무(文武) 겸비의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서 구강(九江)의 태수에 임명되었다.
그 후에 또 그는 시중(侍中)과 상서(尙書)로 승진했으며, 그 사이에 또 여러 가지의 저작도 행했지만, 그러나 또 <당고(黨錮)의 금(禁)> 때 귀향해서 학사(學舍)를 주재(主宰)하며 유비(劉備)나 공손찬(公孫瓚)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후,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생하자 북중랑장(北中郞將)에 임명되어 장각(張角)의 군대를 물리치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환관이었던 좌풍(左豊)이 요구했던 뇌물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모함을 당했고, 그 후에는 관직삭탈(官職削奪=削奪官職) 되었다. 하지만 또 나중에 황보숭(皇甫嵩)의 도움을 받아서 면죄되었고, 이어서 다시 상서(尙書)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원소(袁紹) 등이 주도했던 환관주살(宦官誅殺)에도 참가해서 큰 도끼를 들고는 도망가려던 환관들을 못 도망가게 지키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에 동탁(董卓)이 실권을 잡았고, 이어서 황제를 바꾸려고 했을 때 그는 반대했으며, 그러자 또 그는 동탁(董卓)에 의해서 죽을 고비도 넘겨야만 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런 동탁(董卓)의 전횡에 염증을 느끼고는 고령을 이유로 낙향해서 상곡(上谷)의 군도산(軍都山)에서 은거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그는 원소(袁紹)의 초대를 받아서 참모가 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고령으로 192년에 병사(病死)했다. 그러자 조조(曹操)는 몹시 슬퍼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리고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등에서는 황건(黃巾)의 난(亂)을 진압하던 중, 제자였던 유비(劉備)를 만나게 되자 유비(劉備)가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재회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그려냈고, 그 후에 또 노식(盧植)이 내시들의 중상모략을 받아서 호송(護送)되었을 때, 유비(劉備)가 그 모습을 보고 놀랐다든지 또는 장비(張飛)가 무력으로 그를 구하려 하자 장비(張飛)를 나무라는 것으로 그것을 멈추게 했다는 등의 명장면들이 연출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역시도 사실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또, 그의 저서로는 <상서장구(尙書章句)>와 <예기해고(禮記解詁)>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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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학생 시대의 유비(劉備)는 승마(乘馬)와 투견(鬪犬) 그리고 음악(音樂)을 무척 좋아했으며, 옷도 잘 입었던 편이어서 동료들 중에서도 눈에 띄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협객(俠客)의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호협(豪俠)들과 사귀기를 좋아했으며, 그래서 항상 그의 주변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당시, 말(馬) 장사를 하면서 제국(諸國)을 돌아다니던 중산(中山)의 호상(豪商)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은,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보고는 큰 돈으로 지원했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그 돈으로 인물들을 모으고는 그 수령이 되었다.
그 후, 황건(黄巾)의 난(亂)이 발생하자 그는 관우(關羽)와 장비(張飛) 그리고 간옹(簡擁)과 전예(田豫) 등과 함께 의용군(義勇軍)을 결성했고, 당시 교위(校尉)였던 추정(鄒靖)의 휘하로 들어가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자 그 공으로 그는 중산국 안희현(中山國 安熹縣)의 위(尉)에 임명되었다.
참고: 전략(典略)에 의하면, 187년에 장순(張純)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청주(青州) 자사(刺史)가 그것을 토벌할 것을 명했다. 그리하여 그 토벌군이 평원(平原)을 통과했을 때, 유자평(劉子平 혹은 劉平?)이 나서서 유비(劉備)가 무용(武勇)이 뛰어 나다고 말하며 그를 종사(從事)에 추천했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그들과 함께 종군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는 전야(田野)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다. 그래서 거의 사망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마침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그러자 그 공(功)으로 그는 중산국 안희현(中山國 安熹縣)의 위(尉)가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군(郡)의 독우(督郵=관할하의 縣을 감찰했던 직. 定員은 1명이었음)가 공무(公務) 차 안희(安熹)에 왔을 때, 그는 면회를 신청했지만 거절 당하자 화가 나서 그대로 쳐들어 갔다. 그리고는 그 독우(督郵)를 묶어 놓고 곤장을 200대나 친 다음 그의 목에다 자신의 인수(印綬)를 걸어 놓고는 그대로 도망쳤다.
참고: 인수(印綬)는 중국에서 신하에게 인장(印章)을 하사하는 것으로서 관직을 증명했던 제도를 말했던 것으로, 인(印)은 인장(印章), 수(綬)는 그 인장(印章)을 늘어뜨리기 위한 길고 널찍한 포(布) 또는 끈을 의미했음. 그러므로 그 인수(印綬)를 보게 되면 한눈에 어느 정도의 지위인지를 알 수 있었다고 함. 같은 말로는 인끈, 녹수 등.
아무튼 그 후, 대장군 하진(何進)이 도위(都尉)였던 관구의(毌丘毅)를 단양군(丹陽郡)에 파견했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관구의(毌丘毅)의 휘하로 들어가서 하비(下邳)로 종군했다. 그리고 하비(下邳)에서 공적을 올려서 하밀현(下密縣)의 승(丞)에 임명되었지만, 그러나 오래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후에 또 그는 고당현(高唐縣)의 위(尉)가 되었고, 그 후에 또 승진해서 현령(縣令)이 되었다.
참고: 영웅기(英雄記)에 의하면, 영제(靈帝) 말년(末年)에 유비(劉備)는 낙양(洛陽)에 있었다. 그 후에 조조(曹操)와 함께 패(沛)로 들어가서 의병을 모집했고, 그 후 조조(曹操)와 함께 동탁(董卓) 토벌에 나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년, 싸움에서 졌던 그는 옛날 동문수학(同門受學)했던 공손찬(公孫瓚)을 찾아가서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청주(靑州) 자사(刺史)였던 전해(田楷)를 도와서 원소 군(袁紹軍)과 싸웠다. 그러자 그 후, 그는 그때의 전공으로 공손찬(公孫瓚)의 추천을 받아서 평원현(平原縣)의 가령(假令)이란 지위를 얻었고, 그 후에는 또 그곳의 상(相)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또 그는 침략해 왔던 도적을 물리쳤으며, 백성들에게도 경제적으로 많은 혜택을 주었다든지, 그리고 또 신분이 낮은 군사들을 차별하지 않았다든가 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이하,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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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關羽)> 1

?-219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유비(劉備)와 함께 싸웠던 무장. 자(字)는 운장(雲長). 그러나 원래의 자(字)는 장생(長生). 사예(司隸)의 하동군해(河東郡解-현재의 山西省 運城市 常平鄕 常平村) 출신. 봉호(封號)는 한수정후(漢壽亭侯). 시(諡)는 역대 왕조로부터 많이 하사 받았기 때문에 일단 생략 또는 후술함. 그는 훌륭한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미염공(美髥公)으로도 불렸다. 자(子)로는 관평(關平)과 관흥(關興)이 있었다.
그는 비범한 무용(武勇)과 함께 조조(曹操)가 의리(義理)의 표상(表象)으로 격상시켰던 후부터, 후세(後世)의 사람들에 의해 신격화(神格化)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관제(關帝=關聖帝君=關帝聖君)로서 47번째의 신(神)이 되었고, 그리고 또 신의(信義)가 두터웠던 것으로 해서 <장사(商業)의 신(神)>도 되었다. 그래서 현재,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중화가(中華街=Chinatown)에서 지금도 그를 위한 제사가 모셔지고 있다.

< 사진은 요코하마(横浜)의 善隣門 >
그리고 또 그는 주판(珠板)을 발명했던 사람이란 전설이 있으며, 그리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그는) 운장(雲長) 또는 관운장(關雲長) 혹은 관공(關公), 관모(關某)라고 불렸고, 일관된 시(諡)를 명지(名指)하지 않았다>라고 했고, 그리고 또 <대 활약하는 장면이 장려(壯麗)하게 그려져 있(다)>는 등, 그를 특별하게 취급했다.
아무튼, 그는 출신지(河東郡解)가 중국 최대의 염호(鹽湖)인 해지(解池) 근처였기 때문에, 소금의 밀매매(密賣買)에 관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또 그 과정에서 소금으로 폭리를 취했던 상인을 죽인 적도 있었다고 하며, 그 때문에 또 관리들에게 쫓겨서 유주(幽州)로 도망가서는 관우(關羽)로 개명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장비(張飛)와 유비(劉備)를 만났고, 또한 그때부터 평생 유비(劉備)에게 충성했다.
그 후, 유비(劉備)가 자신의 고향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그는 장비(張飛)와 함께 유비(劉備)의 호위관(護衛官)이 되었다. 그러자 또 유비(劉備)는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에게 형제의 예를 다했고, 그리고 또한 관우(關羽)는 당시 유비(劉備)보다 연상이었지만, 그러나 유비(劉備)를 형으로 모셨다고 전해진다.
<장비(張飛)>

?-221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부터 삼국시대에 유비(劉備)와 함께 싸웠던 무장. 삼국지(三國志-正史)에서는 그의 성(姓)은 장(張), 휘(諱)는 비(飛), 자(字)는 익덕(益德)으로 해서 장익덕(張益德)이라고 했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익덕(翼德)>으로 해서 장익덕(張翼德)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봉호(封號)는 신정후(新亭侯)였으며, 시(諡)는 환후(桓侯)였다. 그리고 또, 자(子)로는 장포(張苞)와 장소(張紹) 그리고 경애황후(敬哀皇后)와 장황후(張皇后)가 있었다.
그는 유비(劉備)가 군사를 일으키자 처음부터 따랐으며, 비범한 용맹(勇猛)으로 그 이름을 만천하(中國 또는 中華)에 떨쳤다. 그리고 또 그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많은 활약상을 보여주었고, 그로 인해서 현재까지도 세인(世人)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출신은 탁군(涿郡)이며, 동향(同鄕)의 유비(劉備)가 거병했을 때, 관우(關羽)와 함께 참가했다. 그 후, 관우(關羽)와 함께 유비(劉備)의 경호를 담당하며 함께 싸웠고, 평생 관우(關羽)와 함께 유비(劉備)를 형으로 모셨다. 그리고 또 관우(關羽)가 수년 연장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관우(關羽)도 형으로 모셨다. 그리고 유비(劉備)가 공손찬(公孫瓚)에 의해서 평원군(平原君)의 상(相)이 되자, 관우(關羽)와 함께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되었고, 그리고는 각각 일군(一軍)을 인솔하는 장(將)이 되었다.
<공손찬(公孫瓚)>
?-199년.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자(字)는 백규(伯珪). 대사마(大司馬) 유우(劉虞)를 멸하고 군웅(群雄)으로 할거했다. 그러나 후에 하북(河北)의 지배권을 놓고 원소(袁紹)와 싸웠지만 패하고 자결했다. 종제(從弟)에 공손범(公孫範)과 공손월(公孫越)이 있었고, 자(子)로는 공손속(公孫續) 등이 있었다.
그는 북방(北方)의 용장(勇將)으로 알려졌으며, 유주(幽州)의 요서군(遼西郡) 영지현(令支縣-현재의 遼寧省 朝陽市 令支縣) 출신이었고,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2천석(二千石-郡太守 級) 정도의 유력(有力) 호족(豪族)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모(生母)가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별 혜택은 받지 못했다.
젊었던 시절, 그는 요서군(遼西郡)에서 문하서좌(門下書佐)를 지냈는데, 그런데 그때, 그는 총명했던 데다 목소리도 컸고, 용모도 우수했기 때문에, 당시 태수(太守)였던 후 씨(侯氏)의 눈에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씨(侯氏)의 원조를 받아서 유비(劉備)와 함께 노식(盧植) 문하에서 병학(兵學)을 배웠다.
그 후, 그는 효렴(孝廉)에 추천되었고, 이어서 요동(遼東) 속국(屬國) 장사(長史)가 되었다. 그리고는 선비족(鮮卑族)을 격퇴하고 탁군(涿郡)의 영(令)이 되었다.
186년, 그는 장온(張溫)으로부터 양주(凉州) 토벌의 명을 받았다. 그러자 그때, 그 장온(張溫)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던 장순(張純)과 장거(張擧) 그리고 오환족(烏桓族)의 구력거(丘力居) 등을 물리치고 기도위(騎都尉)가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해서 반란을 획책했던 장순(張純)을 공격했고, 그 결과로 요동(遼東) 부근에서 그들을 격퇴했다. 그리고는 포로들을 재빨리 구출하고는 다시 장성(長城)을 넘어서 반란군을 추격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너무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역공(逆攻)을 당했다. 그리고는 수백 일 동안의 격투 끝에 양군 모두 병량(兵糧)이 고갈되어서 후퇴했다.
그 후, 오환족(烏桓族)의 탐지왕(貪至王)이 기마부대를 인솔해서 항복해 왔다. 그러자 그는 그 부대를 자대(自隊)에 편입시켰고, 그 공으로 또 중랑장(中郞將) 도정후(都亭侯)가 되었다.
191년, 황건적(黃巾賊)의 잔당 30만이 발해군(勃海郡)의 군경(郡境) 부근에서 침입해 왔다. 그러자 그는 2만의 병력을 인솔해서 그것을 격파했고 또한 많은 포로와 군사 장비를 획득했다. 그러자 동탁(董卓)의 추천을 받아서 분무장군(奮武將軍) 계후(薊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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