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194 년]

 ⊙ 曹操

 흥평(興平) 원년(194) 여름, 조조(曹操)는 다시 서주(徐州)를 침공했다. 그러면서 가던 길에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친구였던 장막(張邈)이 군사(軍師)였던 진궁(陣宮)과 모의해서 여포(呂布)를 받아들이는 반역을 했기 때문에, 영지(領地)였던 연주(兗州)의 대부분이 여포(呂布)의 손에 넘어갔다.

 그것은 또 그때, 장막(張邈)은 여포(呂布)가 원소(袁紹)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후에 만나서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것을 알게 된 원소(袁紹)는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원소(袁紹)는 조조(曹操)에게 장막(張邈)을 칠 것을 계속해서 요구했지만, 그러나 또 조조(曹操)는 그런 장막(張邈)을 계속해서 옹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막(張邈)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 오로지 원소(袁紹)의 명을 받은 조조(曹操)가 자신을 치러올 것으로만 생각했고, 그 불안감이 또 여포(呂布)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결론적으로는 조조(曹操)를 배신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그런데 그 장막(張邈)과 조조(曹操)는 아주 옛날부터 서로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고, 그것은 또 <누군가 먼저 죽는다면, 살아 남은 사람이 그 죽은 사람의 가족을 돌봐주기>로 약속까지 했던 사이였다고 한다. 그랬으므로 그 장막(張邈)의 배신은 조조(曹操)에게는 바로 충격 그 자체였고, 그래서 또 조조(曹操)는 급히 연주(兗州)로 다시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고는 여포(呂布)와 일전(一戰)을 벌였는데, 하지만 결과는 청주군(靑州軍)의 대 참패였고, 그리고 그 싸움에서 조조(曹操) 또한 큰 화상(火傷)을 입었다.

 하지만 또 그때, 다행히도 순욱(荀彧)과 정욱(程昱) 그리고 하후돈(夏候惇) 등이 본거지를 지켜냈고, 그리고 또 그때는 비황(飛蝗-메뚜기 떼 등의 피해)으로 인한 황해(蝗害)로 기근(飢饉)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병량(兵糧)이 고갈되었던 여포(呂布)가 군사를 먼저 물렸기 때문에 조조(曹操)는 겨우 귀환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원소(袁紹)가 기회를 보다가 원조(援助)를 신청해 왔는데, 그러나 정욱(程昱)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조조(曹操)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또 그해 가을, 메뚜기 떼와 한발(旱魃-가뭄)로 인해서 곡물의 가격이 치솟아서(1石에 50余万錢이나 되었다고 함) 그 일대의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인육(人肉)까지 먹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서주(徐州)에서는 도겸(陶謙)이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유비(劉備)가 그곳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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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막(張邈)> ?-195년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 동류군(東留郡)의 태수(太守). 동평군(東平郡) 수장(壽張) 출신. 자(字)는 맹탁(孟卓), 장초(張超)의 형. 삼국지에서는 여포전(呂布傳)에서 부전(付傳)되고 있다. 그리고 동탁전(董卓傳) 인용 한말명사록(漢末名士錄)과 후한서(後漢書)의 당고전(黨錮傳)에 의하면, 그는 한(漢나라)의 8준(俊=八厨) 중 한사람이었다고 한다.(그만큼 뛰어났었다는 의미임) 그리고 젊었을 때는 협객으로 불리며 기질이 아주 강했고, 어려운 사람을 잘 도와주었으며, 그리고 자신이 가졌던 것도 잘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조조(曹操)와 원소(袁紹)와도 사이좋게 잘 지냈고, 두뇌도 명석했던 데다 덕행(德行)으로도 이름이 났기 때문에, 관계(官界)에 곧 알려졌다. 그러자 그 후, 그는 삼공부(三公府)에 초빙을 받았고, 성적이 우수하다고 평가를 받아서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된 후, 동탁(董卓)에 의한 명사(名士) 우우책(優遇策-후히 대접하는 정책)의 일환(一環)으로서 진류군(陳留郡)의 태수(太守)에 임명되었다.(董卓傳)

 참고: 그는 원소(袁紹), 허유(許攸), 하옹(何顒), 오경(伍瓊)들과 함께 <분주(奔走)의 우(友)>라고 불렸던 계(契)를 만들었다.(袁紹傳)

 아무튼 그 후, 원소(袁紹)를 맹주로 했던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결성되었을 때, 그는 조조(曹操) 등과 함께 참가했다.

 참고: 장홍전(臧洪傳)에 의하면, 그는 거병 후에 산조(酸棗)에서 자신의 아우와 공주(孔伷) 등, 일부 제후(諸侯)들과 함께 회맹(會盟)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대부분의 제후들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참고: 당시, 동탁(董卓)의 휘하에 있었던 정태(鄭泰)의 말에 의하면 <그는 서재(書齋)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하는 인물이었다>라고 했다.

 그러자 참다 못했던 조조(曹操)가 먼저 거병했고, 그러자 또 장막(張邈)은 포신(鮑信)과 함께 조조(曹操)를 응원하며 자신의 부하였던 위자(衛玆)을 조조(曹操) 군에 합류시켜서 보냈다. 하지만 조조(曹操)는 서영(徐榮)에게 졌고, 위자(衛玆)도 그때 전사했다.
그리고 그 후, 산조(酸棗)의 연합군은 병량 고갈로 해산했다.(後漢書)

 그런데 또 그 이전, 원소(袁紹)가 연합군의 맹주가 되었을 때, 원소(袁紹)가 거드름을 피우며 사치(奢侈)를 부렸던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원소(袁紹)에게 자중할 것을 간언했지만, 그러나 오히려 원소(袁紹)의 분노를 샀다. 그래서 그는 곧 사형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조조(曹操)가 나서서 원소(袁紹)를 설득했고, 그러자 또 장막(張邈)은 그 조조(曹操)를 은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장막(帳幕)은 원소(袁紹)로부터 도망쳐 왔던 여포(呂布)와 친교를 맺게 되었고, 그 결과 원소(袁紹)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또 장막(張邈)은 여포(呂布)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조조(曹操)를 의심하게 되었다. <언젠가, 조조(曹操)가 원소(袁紹)와의 친교를 우선해서 나를 살해하러 올지도 모른다!>

 194년, 조조(曹操)는 다시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을 공격하기 위해서 자신의 본거지를 비우게 되었다. 그러자 장막(張邈)은 조조(曹操)의 부장(部將)이었던 진궁(陣宮)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조조(曹操)의 영지(領地)를 빼앗을 수 있는 호기(好機)입니다> 그러자 또 그때, 조조(曹操)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우 장초(張超)도 거들고 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장막(張邈)은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하고는 여포(呂布)를 맞이했고, 그것으로 조조(曹操)에게 반기를 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장막(張邈)과 여포(呂布)는 아주 단기간에 조조(曹操)의 본거지였던 연주(兗州)를 대부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급보를 들었던 조조(曹操)가 원정 처에서 군을 되돌려서 달려왔지만, 그러나 그것조차 물리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순욱(荀彧)과 정욱(程昱) 그리고 하후돈(夏候惇)이 지키고 있던 3성(城)의 공략에는 실패했고, 그것으로 또 조조(曹操)의 급소를 찌르는 일에도 실패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기근이 들어서 양자는 일시적으로 휴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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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劉備

 194년, 조조(曹操)가 물러난 후, 도겸(陶謙)은 유비(劉備)를 예주(豫州) 자사(刺史)에 추천했고, 그것은 인정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 도겸(陶謙)은 병이 깊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서주(徐州)를 유비(劉備)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그것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그러나 또 친교가 있었던 진등(陣登)과 공융(孔融) 등이 설득을 해오자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승낙했다. 그리고 또 그때, 유비(劉備)는 정현(鄭玄)의 추천을 받아서 북해군(北海郡) 출신의 손건(孫乾)을 종사(從事)로서 맞이했다.

 그 후, 조조(曹操)에게 패했던 여포(呂布)가 서주(徐州)로 들어왔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고는 이어서 공격을 해왔던 원술(袁術)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1개월쯤 후, 하비(下丕)의 수장(守長)이었던 조표(曹豹)란 자가 유비(劉備)를 배신하고는 여포(呂布)를 성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유비(劉備)의 처자(妻子)가 그 성내에서 인질이 되어버렸는데, 그러자 또 유비(劉備)는 서주(徐州)로 다시 돌아와서 여포(呂布)와 화의하고는 스스로 소패(小沛)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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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張飛

 194년, 유비(劉備)가 원술(袁術)과 대치하고 있었을 때, 장비(張飛)는 본거지였던 하비(下丕)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장비(張飛)는 그곳에서 도겸(陶謙)의 신하였던 조표(曹豹)와 대립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여포(呂布)까지 하비(下丕)를 공격해서 유비(劉備)의 처자(妻子)를 인질로 삼았고, 그러자 또 유비(劉備)는 여포(呂布)와 화해했다. 하지만 여포(呂布)가 다시 공격해 오자 하는 수
없이 조조(曹操)에게로 달아났다.

 그 후, 장비(張飛)는 조조의 여포(呂布) 토벌군에 유비(劉備)와 함께 종군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공을 인정받았고, 그 결과로 조조(曹操)보다 높은 직급이었던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었다.

 그 후, 유비(劉備)는 다시 조조(曹操)를 떠났고, 이어서 차례로 원소(袁紹)와 유표(劉表)에게 의탁했다. 그러자 그때도 장비(張飛)는 유비(劉備)를 호위하며 각지를 전전(轉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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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孫策

 194년, 손책(孫策)은 원술(袁術)에게 자기 아버지의 군대를 돌려달라고 요구해서, 천 명 정도의 강군(强軍)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 수(數)는 비록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 중에는 주치(朱治)와 황개(黃蓋) 그리고 한당(韓當)과 정보(程普)라고 하는 중핵(中核)의 무장들이 속해있었다. 그리고 또 그때까지도 그들은 원술(袁術) 군의 일부였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재능만으로도 원술(袁術)을 충분히 긴장시키고 남았다.

 

 그 후, 손책(孫策)은 강동(江東)에서의 자립을 모색했고, 그 사이에도 인재를 모으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그 결과, 그는 장굉(張紘)이라거나 장소(張昭) 같은 지모사(知謀士)들과 장흠(蔣欽), 주태(周泰), 진무(陳武), 능조(凌操) 같은 무용(武勇)을 뽐내던 맹자(猛者)들을 모을 수가 있었고, 그러자 또 그의 주위에는 항시 인재들이 넘쳐났다.


 그런데 그 시기에, 원술(袁術)과 양주(揚州) 자사(刺史)였던 유요(劉繇)는 그 양주(揚州)의 지배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자 손책(孫策)은 자신을 보좌하고 있었던 주치(朱治)의 권유도 있었고 해서, 스스로 원술(袁術)에게 당시, 그 유요(劉繇)와 대치하고 있었던 숙부(叔父) 오경(吳景)의 원군(援軍)으로 갈 것을 신청했다. 그러자 원술(袁術)은 손책(孫策)의 소 병력으로는 강동에서 자립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으로 그것을 허락했다. 그렇게 해서 원술(袁術)의 본거지를 떠나게 되었던 손책(孫策)은 역양(歷陽)이란 곳에서 오경(吳景)의 군과 합류했고, 그곳에서 또 주유(周瑜)와 재회했다. 그러자 또 그 주유(周瑜)는 손책(孫策)에게 병력이나 군(軍)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고, 그리하여 두 사람은 강동(江東) 제패(制覇)에 진력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또, 손책(孫策)이 그 역양(歷陽)에 도착하기 전, 많은 수의 군사들이 손책(孫策)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는 군사가 약 5천 명 정도로 불어나있었던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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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呂布

 그렇게 해서 유비(劉備)에게로 도망을 갔던 여포(呂布)는 유비(劉備)의 환대를 받으며 서주(徐州)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얼마 후에 유비(劉備)와 원술(袁術)이 싸우게 되었고, 그러자 또 원술(袁術)은 여포(呂布)에게 유비(劉備)의 배후를 급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여포(呂布)는 장비(張飛)와 조표(曹豹)가 대립하던 동안 유비(劉備)의 본거지였던 하비(下丕)를 점령했고, 그 후 서주(徐州) 자사(刺史)를 자칭했다. 그러자 또 졸지에 갈 곳이 없게 되었던 유비(劉備)는 여포(呂布)와 화해하고는 소패(小沛)에 머물게 되었다.

 그 후, 원술(袁術)은 무장(武將) 기령(紀靈) 등에게 삼천의 병력을 주어서 유비(劉備)를 다시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얼른 여포(呂布)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여포 군(呂布軍)에서는 반대의 의견이 나왔지만, 그러나 여포(呂布)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유비(劉備)를 도우기로 결정했다. <만약에, 원술(袁術)이 유비(劉備)를 이기게 된다면 원술(袁術)은 태산(泰山)의 세력들과 합류하려 할 것이다. 만약에 또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은 포위를 당하는 형국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유비(劉備)를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결과, 기령(紀靈) 등은 여포(呂布)의 출현에 공격을 중지했다. 그러자 여포(呂布)는 두 진영의 장수들을 안둔(安屯)에 모은 후에 화해를 권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유비(劉備)는 나의 아우요. 그러므로 내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소. 하지만 나는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요. 오히려 서로 화해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요!> 그리고는 창을 들어서 진영의 문 앞에다 꽂고는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화살을 쏘아서 저 창을 맞출 것이니 잘들 보시요! 그리고 내가 단 한발에 저 창을 맞춘다면 군사들을 물리시오! 그러나 내가 (저 창을 맞출 자신이 없어서) 이 활을 당기지 않는다면, 그때는 마음대로 해도 좋소!> 하지만 여포(呂布)가 쏜 화살은 보기 좋게 명중했고, 그러자 또 그에 경악했던 장군들은 곧 군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또 그 후, 여포(呂布)는 유비(劉備)를 공격했고, 그 결과 소패(小沛)는 여포(呂布)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도주했고, 그 후 조조(曹操)를 찾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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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陶謙

 194년, 조조가 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도겸(陶謙)은 조표(曹豹)와 유비(劉備)를 내보냈지만 졌다. 하지만 그때, 조조(曹操)의 본거지에서는 장막(張邈)과 장초(張超) 형제가 여포(呂布)와 진궁(陣宮)과 손을 잡고는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조조(曹操)는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철수했다.

 그 결과, 도겸(陶謙)은 구사일생으로 살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때는 이미 병이 깊어져 있었던 상태였고, 또 아들이었던 도상(陶商)과 도응(陶應)의 자질도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서주(徐州)를 유비(劉備)에게 물러주고는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가 향연 6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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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傕

 흥평(興平) 원년(194년)에 정서장군(征西將軍) 마등(馬騰)이 이각(李傕)과의 관계를 모색했지만, 이각(李傕)이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러자 마등(馬騰)은 쌍방을 중재하러 왔던 한수(韓遂)와 공모해서 장안(長安) 공격을 감행했지만, 이각(李傕)은 그것을 물리쳤다. 그러자 또 그 마등(馬騰)을 지원하기 위해서 익주(益州)에서 공격해왔던 유언(劉焉) 군도 이각(李傕)은 물리쳤고, 그 중에서 또 이각(李傕)을 암살하려고 했던 유언(劉焉)의 장남 유범(劉範)이 도망을 가자 추격해서 살해했다. 그리고 또, 그에 공모했던 유언(劉焉)의 차남 유탄(劉誕)도 처형했으며, 4남(男)이었던 유장(劉璋)도 붙잡아서 죽였다.

 그런데 이각(李傕)이 마등(馬騰) 등과 싸우고 있었을 때, 동쪽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조조(曹操)와 원소(袁紹)에게 이각(李傕)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자 이각(李傕)은 헌제(獻帝)의 이름으로 당시, 조조(曹操), 원소(袁紹)와 대립하고 있었던 원술(袁術)과 공손찬(公孫瓚) 그리고 도겸(陶謙) 등에게 각각 작위를 내려서 제휴를 도모한 다음에, 조조(曹操)와 원소(袁紹)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려고 했다.

 그런데 또 당시,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는 성내(城內)를 분할해서 따로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말뿐인 통치였고, 그래서 그들은 도둑조차도 잡지 못했으며, 기강이 문란해져서 병사들은 자기 마음대로 할거하면서 백성들을 마구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서 또 그런 이유 등으로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으며, 그러자 또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어져서 아버지가 자식을 먹고, 아들이 아버지를 먹는 일까지 생겼다. 그런데다 또 거리에는 온통 사람들의 뼈와 부패한 시체들로 가득 찼고, 도로에서는 악취가 진동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곳을 떠나가서 얼마 후에는 삼보(三輔-長安 부근 關中)의 인구가 격감했다.

 그런데다 또 이각(李傕)은 동료였던 번조(樊稠-韓遂와는 동향의 친구)를, 마등(馬騰) 등과 싸웠을 때, 포획했던 한수(韓遂)를 놓쳤다(또는 놓아줬다)는 이유로 살해했다. 그러자 서량(西涼)에 대항할 수 있었던 강력한 인재를 잃게 되어 군(軍)도 약체화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는 서로 오가면서 주연을 연다든가 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또 그러던 어느 날, 곽사(郭汜)가 자주 이각(李傕)의 집에서 잤기
때문에, 그래서 곽사(郭汜)의 처가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를 서로 떼놓기 위해서 이각(李傕)을 중상모략 했고, 그러자 또 그때부터 곽사(郭汜)는 이각(李傕)을 의심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는 서로 싸우게 되었다.

 그 후, 이각(李傕)은 재빨리 헌제(獻帝)를 확보하고는 곽사(郭汜)와 싸웠고, 그리하여 서로 간에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거리에는 시체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는데, 그러자 또 그것을 보다 못했던
동료 장제(張濟)가 두 사람을 중재해서 화의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헌제(獻帝)를 동쪽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그에 동의했고, 이어서 헌제(獻帝)는 곽사(郭汜)와 양정(楊定) 그리고 양봉(楊奉) 동승(董承) 등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되었다지만, 그런데 또 그 도중에 곽사(郭汜)의 마음이 변해서 헌제(獻帝)를 장안(長安)으로 다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이각(李傕)은 장제(張濟)와 함께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해서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는 다시 홍농(弘農)에서 싸우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때, 곽사(郭汜)는 헌제(獻帝)를 확보하지 못해서 물러났고, 그 결과로 헌제(獻帝)는 황하(黃河)를 건너서 낙양(洛陽)으로 다시 귀환했다.

 하지만 그 후, 군세(軍勢)를 잃은 헌제(獻帝)와 이각(李傕)은 쇠퇴(衰退)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어서 198년 4월에 배무(裵茂), 단외(段煨)에게 토벌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이각(李傕)의 삼족(三族)이 멸해졌으며, 그리고 또 에피소드로, 그는 사교(邪敎)에 빠져서 언제나 무녀(巫女)들과 함께 사신(邪神)의 제사를 올렸고,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리고 또 자신이 대사마(大司馬)에 올랐을 때도 그는 무녀들에게 포상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곽사(郭汜)도 그 후로는 쇠퇴했고, 그리고는 197년에 조조(曹操)가 보냈던 배무(裵茂)에게 추격을 당했다. 그런데 또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하였던 오습(伍習)이 배신함에
따라서 미(郿)에서 살해당했다. 그러자 그 후, 그의 머리는 조조(曹操)에게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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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외(
段煨)> ?-209년

 후한(後漢) 시대의 무장. 정치가. 양주(凉州) 무위군(武威郡) 출신. 동탁(董卓)의 부장(部將).

 초평(初平) 2년(191년)에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의 손견(孫堅)에게 호진(胡軫)과 여포(呂布) 등은 패했고, 엽웅(葉雄=華雄)은 전사했다. 그러자 그 손견(孫堅)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단외(段煨)는 동탁(董卓)의 명을 받아서 중랑장(中郞將)이 되었고, 이어서 화음(華陰)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단외(段煨)는 그곳에서 농업을 장려하고 약탈을 삼가는 등, 통치를 잘했기 때문에, 그래서 동탁(董卓)이 죽고 나서도 그는 그곳에서 몇 년은 더 지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흥평(興平) 2년(195년) 겨울, 이각(李傕)과 곽사(郭汜)의 난(亂)을 피해서 헌제(獻帝)가 그곳 화음(華陰)으로 피난을 왔다. 그러자 그때 영집장군(寧輯將軍)이 되어 있었던 단외(段煨)는 헌제(獻帝)에게 의복 등을 제공하며 정중히 맞이하려고 했다. 하지만 또 그때 그 헌제(獻帝)를 호위하고 있었던 후장군(後將軍) 양정(楊定)과 그는 사이가 나빴는데, 그러자 결국 그 양정(楊定)이 공격해옴에 따라서 그것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그는 헌제(獻帝)에게 사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헌제(獻帝)와 백관(百官)들에 대한 봉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후, 이각(李傕)과 곽사(郭汜)가 단외(段煨)를 구원(救援)하고자 양정(楊定)을 협공했기 때문에, 양정(楊定)은 형주(荊州)로 도주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이각(李傕)의 부하였던 가후(賈詡)가 동향(同鄕) 출신이란 연고로 그에게 의지해왔다. 그러자 단외(段煨)는 그를 우대했고, 얼마 후 가후(家後)는 장수(張繡)에게로 떠났다. 그러자 또 단외(段煨)는 가후(賈詡)의 남은 식솔들을 정중하게 대접했다.

 건안(建安) 3년(198년), 알자복사(謁者僕射-관직명 중 하나이며 光祿勳=九卿) 배무(裵茂)가 이각(李傕) 토벌에 나서자 그도 참가해서 이각(李傕)을 주멸(誅滅)했다. 그런 다음 입조(入朝)해서 대홍려(大鴻臚)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었지만, 그러나 건안(建安) 14년(209년)에 그는 사망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의 단외(段煨)는 사실(史實)과 같게 낙양(洛陽)으로 가려던 헌제(獻帝)를 화음(華陰)에서 모셨다. 그 후, 조조(曹操)에게 져서 도망을 갔던 이각(李傕)을 토벌해서 그 머리를 취했으며, 아울러서 이각(李傕)의 일족 노유(老幼) 200명도 포획해서 허도(許都)에 있던 조조(曹操)에게 헌상했다. 그러자 그는 그 공으로 탕구장군(盪寇將軍)에 임명되었지만, 그 후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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