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제갈량(諸葛亮)>



 

 181年-234年. 중국 전한(前漢) 말기에서 삼국시대의 촉한(蜀漢)까지의 정치가, 무장, 군략가(軍略家), 발명가. 자(字)는 공명(孔明). 사예교위(司隸校尉) 제갈풍(諸葛豊)의 자손. 태산군(泰山郡) 승(丞) 제갈규(諸葛珪)의 아들. 시(諡)는 충무후(忠武侯). 촉한(蜀漢)의 건국자 유비(劉備)를 도왔고, 유비(劉備)의 아들 유선(劉禪)을 보좌했다. 복룡(伏龍), 와룡(臥龍)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지금도 성도(成都)에는 그를 모시는 무후사(武侯祠)가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아내는 황부인(黃夫人)이었다. 그리고 아들(子)은 촉한(蜀漢)의 신하였다가 면죽(綿竹=成都 부근)에서 전사했던 제갈첨(諸葛瞻)이 있었다. 그리고 손(孫)에는 역시 촉한(蜀漢)의 신하였고 또한 면죽(綿竹)에서 전사했던 제갈상(諸葛尙)과 서진(西晋)의 강주(江州) 자사(刺史)를 지냈던 제갈경(諸葛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의 친족은 숙부(叔父)였던 예장(豫章) 태수(太守) 제갈현(諸葛玄), 오(吳)의 신하였던 형 제갈근(諸葛瑾), 그리고 제갈근(諸葛瑾)의 아들 제갈각(諸葛恪) 등이 있었고, 동생이면서 같은 촉한(蜀漢)의 신하였던 제갈균(諸葛均) 등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의 일족(一族)으로는 위(魏)의 신하였던 제갈탄(諸葛誕)과 그 외에 제갈장(諸葛璋), 제갈서(諸葛緖), 제갈건(諸葛虔), 제갈원(諸葛原=景春)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낭사군(琅邪郡) 양도(陽都=현재의 山東省 臨沂市 沂南縣)가 본관(本貫)이지만, 그러나 출생지는 불명(不明)이다. 그리고 키는 8척(尺)이었다고 한다.

 참고: 後漢의 경우에서는 1尺이 23cm였기 때문에 8尺은 184cm로 계산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魏와 西晋의 경우에서는 1尺이 24.1cm였으므로, 그래서 또 8尺은 192.8cm로 계산할 수 있다.

 아무튼, 그의 부(父) 제갈규(諸葛珪)는 그가 어렸을 때 사망했고, 생모 장 씨(章氏)도 역시 그가 어렸을 때 사망했다. 그리고 제갈규(諸葛珪)는 장 씨(章氏)가 죽자 송 씨(宋氏)와 재혼했다. 그리고 그가 아직 어렸을 때, 동생 제갈균(諸葛均)과 함께 그는 서주(徐州)에서 숙부(叔父) 제갈현(諸葛玄)을 따라서 남쪽으로 이주했다.

 참고: 삼국지(三國志) 본전(本傳)에서는, 그때 제갈현(諸葛玄)이 원소(袁紹)의 명령을 받아서 예장(豫章) 태수(太守)에 임명되었지만, 그러나 후한(後漢)의 조정으로부터 주호(朱皓=朱儁의 子)가 예장(豫章) 태수(太守)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제갈현(諸葛玄)은 유표(劉表)에게 의탁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또 그에 대해서 배송지(裵松之)의 <헌제춘추(獻帝春秋)>에서는, 조정이 임명했던 예장(豫章) 태수(太守) 주술(周術)이 병사(病死)하자, 유표(劉表)가 그 대신으로 제갈현(諸葛玄)을 임명했는데, 그런데 또 조정에서 주호(朱皓)를 보냈고, 그러자 또 그 주호(朱皓)는 유요(劉繇)의 힘을 빌려서 제갈현(諸葛玄)을 쫓아냈다. 그러자 제갈현(諸葛玄)은 도망을 갔지만, 그러나 건안(建安) 2년(197년)에 민중의 반란에 휩쓸려서 살해 당했으며, 그러자 그 머리는 유요(劉繇)에게 보내졌다고 되어 있다.

 아무튼 또, 그 후에 그는 형주(荊州)에서 자신의 동생과 함께 청경우독(晴耕雨讀)하는 생활을 하면서, 즐겨 양부음(梁父吟)을 불렀다고 한다.

 참고: 晴耕雨讀은, 날이 개면 논밭을 갈고, 비가 오면 글을 읽는다는 뜻으로, 부지런히 일하면서 여가를 헛되이 보내지 않고 공부함을 이르는 말이며, 혹은 悠悠自適으로도 해석이 됨. 그리고 또 아래는 그 양부음(梁父吟)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양부음(梁父吟)


 삼국지(三國志)의 제갈량전(諸葛亮傳)에 의하면, 제갈량(諸葛亮)은 산동성(山東省) 출신이었고, 일본에서는 제갈공명(諸葛孔明)으로 더 유명하다. 그리고 그의 형 제갈근(諸葛瑾)은 7세 위였으며, 그가 9세였을 때 모(母)가 세상을 떠났고, 그리고 또 그가 12세 때는 그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제갈근(諸葛瑾)은 계모가 싫어서 오(吳)로 가서 손권(孫權)의 신하가 되었으며, 그러자 또 공명(孔明)은 동생 제갈균(諸葛均)과 함께 숙부였던 제갈현(諸葛玄)을 따라서 형주(荊州)로 이주했다.(그리고 그 동생 제갈현(諸葛玄)은 그가 16세 때, 살해 당했다)

 그 후, 그는 양양(襄陽) 북서(北西)의 융중(隆中)에서 청경우독(晴耕雨讀)의 나날들을 보내며 당시, 후한(後漢)에서는 일류(一流) 명문(名門)이었던 최주평(崔州平)과 서서(徐庶) 그리고 유학(遊學) 동무였던 석도(石韜), 맹건(孟建) 등과 교우(交友)했다.

 그러자 당시, 형주(荊州)에서는 그의 친구였던 사원(士元=龐統)과 함께 <孔明=臥龍. 士元(龐統)=鳳雛>라고 평(評)했다.


ファイル:PangTong.jpg

 



 그리고 또 당시, 그 공명(孔明)의 초로(草蘆)에서 약 7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신야(新野)에는 유비(劉備)가 살고 있었는데, 그러자 유비(劉備)는 서서(徐庶)의 추천을 받아서 그에게 <삼고(三顧)의 예(禮)>를 다했고, 그는 또 그에 감동하여 유비(劉備)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설파(說破)하게 된다...(하략)

 <梁父吟 또는 梁甫吟>

 제(齊)의 양부산(梁父山)에 가까웠던 지방(地方)의 일을 노래했던 시(詩)였으며
 무명씨(無名氏)의 원문(原文)은 다음과 같다.

 步出齊城門,遙望盪陰裡
 里中有三墳,累累正相似
 問是誰家墓,田疆古冶氏
 力能排南山,又能絕地紀
 一朝被讒言,二桃殺三士
 誰能為此謀,相國齊晏子

 그리고 또 아래는 제갈량(諸葛亮)이 즐겨 불렀다는 것으로 추정되는 시(詩)이다.

 步出齊城門 보출제성문
 遼望蕩陰里 요망탕음리
 里中有三墳 이중유삼분
 壘壘正相似 루루정상사
 間是誰家墓 간시수가묘
 田疆古冶氏 전강고야씨
 力能排南山 역능배남산
 文能絶地紀 문능절지기
 一朝被讒言 일조피참언
 二桃殺三士 이도살삼사
 誰能爲此謀 수능위차모
 國相齊晏子 국상제안자


 <풀이 1>

 걸어서 제의 성문을 나서자
 멀리 보이는 탕음의 동네
 그곳에 무덤이 삼기(三基)가 있는데
 쌓고 또 쌓아 놓은 것이 서로들 닮아 있다
 물으매 과연 그 누구의 묘인가
 그야 당연, (公孫接) 전개강(田開彊) 고야자(古冶子)의 묘일테고
 힘 능히 남산을 넘어 뜨리고
 학문 능히 빼어났지만
 하루 아침에 중상모략을 당해
 두 개의 복숭아로 세 인사(人士)가 죽었음이라
 누가 감히 그런 짓을 저질렀던가
 제의 국상 안자 말고 그 외에 또 누가 있으리

 <풀이 2>

 제의 성문을 홀연히 나서자
 멀리서 탕음의 동네가 보인다
 흙 높이 쌓여진 것이 어딜 봐도 한 모양이다
 아하, 저것이 누구의 묘이던가
 전강 고야 씨의 것이 아니었던가
 무용(武勇)으로 말하자면 산을 무너 뜨렸고
 국사(國事)의 재능 또한 마음껏 뽐냈던 그들
 하지만 한 번의 참언을 당해서
 두 개의 복숭아로 세 용사(勇士)가 죽고 말았구나
 그 모략을 성사시켰던 자 과연 누구였던가
 제 상국(相國) 안자, 바로 그 한 사람이었다

 <해설>

 당시(기원전 500년 전), 제(齊)에는 전개강(田開疆), 고야자(古冶子-그러나 古治子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람), 공손접(公孫接)이라는 삼인(三人)의 용사(勇士)들이 있었다.(그러나 詩에서는 글자의 數를 맞추기 위해서 田疆古冶氏로 줄였음)

 그러자 그들이 권력을 휘둘러서 나라를 어지럽힐 것이라고 생각했던 안자(晏子=晏嬰)는 왕과 모의해서 그들을 모두 죽이기로 작정을 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왕 앞으로 불려왔던 그 세 사람에게 안자(晏子)는 복숭아 두 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당신들 중에서 공적이 제일로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복숭아를 드시오!"

 그러자 전개강(田開疆)과 공손접(公孫接)이 재빨리 그 두 개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러자 손이 늦었던 고야자(古冶子)가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나야말로 이 중에서 제일이다!"

 그리고는 곧 칼을 빼들었다. 그러자 전개강(田開疆)과 공손접(公孫接)은 자신들의 공적이 고야자(古冶子)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먼저 복숭아를 취했다는 수치심에 자결했다. 그러자 또 고야자(古冶子)도 자신 때문에 그들이 죽었다는 자책감에 자살했고, 그것으로 안자(晏子)의 계략은 성공했다.(하략)

 참고: 齊城은 齊都 臨淄에 있었으며, 盪陰裡는 陰陽里의 다른 이름이었고, 南山은 또 齊城의 南面에 있던 牛山이었다고 함. 그리고 또 다른 해석으로 '一朝'를 '一旦'으로 해석한 것도 있다.



 아무튼, 그 시기에 그는 스스로 관중(管仲-더욱 상세한 것은 6-15참조바람)과 낙의(樂毅-더욱 상세한 것은 6-41참조바람)에 비교했다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 그것을 인정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다만 친구였던 최주평(崔州平)과 서서(徐庶)만이 그것을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시기에 그는 현지의 명사(名士)였던 황승언(黃承彦)의 딸과 혼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또 배송지(裵松之)의 양양기(襄陽記)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으며, 황승언(黃承彦)은 거기서 <나의 딸은 얼굴이 검고 못생겼지만, 그러나 재능으로 말하자면 너와 결혼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라고 말을 했다는 것으로 그렇게 짐작해 볼 수가 있다.

 

 그러자 또 그때 주위의 사람들은 그런 공명(孔明)을 비웃으며 <신부를 고르더라도 공명(孔明)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라고 말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로는 <못 생긴 여자를 고르는 것>을 <공명(孔明)의 신부 선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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