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2)


 연도, 연

사건


 BC770

 春秋時代 시작

 ※ 춘추시대란 중국의 시대구분 중 하나이며, 기원전 770년 주(周)의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게 살해당하고 낙읍(洛邑=成周=洛陽-河南省)으로 도(都)를 옮겼을 때부터 시작해서, 진(晋)이 삼국(三國=韓, 魏, 趙)으로 분열했던 기원전 403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춘추(春秋)란 이름은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하나인 ‘춘추(春秋)’에 기술되었던 '시대(時代)'란 말의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하며, 그리하여 그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아울러서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거나, 또는 '동주(東周)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경계 지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가들마다 의견이 나뉘고 있다.(더욱 상세한 것은 참고 6-15부터 6-41까지 참조바람)

<춘추시대의 개념 지도>

※ 사진 설명

룽먼석굴
중국 허난 성(河南省) 뤄양(洛陽)의 남쪽에 있는 석굴 사원으로
윈강 석굴과 쌍벽을 이루는 중국의 대표적인 석굴 사원
북위 때 만들기 시작해서 수·당으로 이어졌고 송나라에서 끝났으나
그 주요 부분은 5세기 말에서 7세기 후반에 이르는
불교 미술의 전성기에 조형되었다고 함



 BC551

 공자(孔子) 탄생(~479)

 ※ 기원전 551년 9월 28일-기원전 479년 4월 11일
춘추시대 중국의 사상가이며, 유가(儒家)의 시조
세계 삼성(三聖)으로도 불린다(後述)


<孔丘>


 BC500 경

 기원전 5세기-오르도스 청동기문화(青銅器文化) 전성기

 ※ 오르도스문화(Ordos文化)

 중국 內몽골 오르도스 지방에 있었던 구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 홍적세 말기의 황토 퇴적층에서 석영(石英), 수석(燧石-부싯돌) 등을 사용해서 만든 첨두기(尖頭器-끝이 뾰족한 도구)와 칼 등이, 그리고 하이에나와 타조 그리고 낙타 등의 온난계 동물의 화석도 나왔다.

 ※ 청동기문화

 기원전 1,000년에서 200년 무렵까지 오르도스에서 장성(長城)에 걸쳐서 번영하였다.
그리고 오르도스는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중남부에 있는 고원 지역이며, 북쪽과 서쪽은 황허(黃河) 강이, 남쪽은 만리장성이 둘러싸고 있다. 예로부터 한족(漢族)과 북방 유목민족의 쟁탈지였으며, 명나라 때는 몽고의 오르도스 부(部)가 점거했던 바 있다. 높이는 1,500미터.

 ※ 오르도스청동기(Ordos靑銅器)

 오르도스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를 말하며, 그것은 또 중국의 은(殷)나라에서 남북조에 이르는 시기에
북방 유목민들이 썼던 무기들과 마구(馬具), 장신구 등으로, 사실적인 동물무늬가 특징이다.

<기원전 3-1세기의 인물상. 대영박물관 소장>


 BC453

 진(晋=春秋)이 삼국(韓・魏・趙)으로 분열되고, 전국시대가 시작됨

 ※ 진(晋-기원전1100년경부터 기원전378년)은, 현재의 중국 산서성(山西省) 지역에 주(周)대, 춘추(春秋)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국가이며, 처음에는 당(唐)이라고 불렸지만, 이후 진으로 개명했다. 국성(國姓)은 희(姬), 수도(首都)는 익(翼)에서 곡옥(曲沃) 다음 강(絳)으로 바뀌었다.

 <참고 : 아래 그림에서 3 나라의 분열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三晋지도>


 ※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春秋) 다음의 시대이며,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위(魏)·조(趙) 3개의 나라로 나뉜 후, 기원전 221년에 진(秦)에 의해 다시 통일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그 이름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해졌으며, 그리고 또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그 기간의 구분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해서는 현재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전국열국도>

 ※ 참고로 <戰國7雄>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韓 (紀元前403年 - 紀元前230年)
 趙 (紀元前403年 - 紀元前228年)
 魏 (紀元前403年 - 紀元前225年)
 楚 (? - 紀元前223年)
 燕 (紀元前1100年頃 - 紀元前222年)
 斉 (紀元前386年 - 紀元前221年)
 秦 (? - 紀元前206年)


 BC359

 상앙(商鞅)의 변법(変法-국정개혁)이 실시(実施)됨

 ※ 상앙(商鞅-?부터 기원전 338년)은, 중국(中國) 진(秦)나라의 정치가(政治家)였으며, 다른 이름은 위앙(衛鞅) 또는 공손앙(公孫鞅).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으로 법학을 공부했고, 진(秦)의 효공(孝公)을 섬겼으며, 부국강병책을 단행(斷行)해서 뒤에 진(秦)이 전국(全國)을 통일(統一)하는 기틀을 마련했다.(1,2차에 걸쳐서 단행되었으며, 더욱 상세한 참고 6-40 참조바람) 효공(孝公) 22(340 B.C.)년 상(商)에 봉함을 받았으나 효공이 죽은 뒤에는 중신들에게 원한(怨恨)을 사서 극형에 처해졌다.


<상앙 상>


 BC221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天下)를 통일함.
 전국시대 막을 내림.



                                      <진의 판도-기원전210년>


 ※ 진(秦-기원전 778년부터 기원전 206년)은, 중국의 왕조 중 하나이며, 주(周)대, 춘추(春秋)시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서 존재했었고,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후, 기원전 206년에 멸망했다. 국성(國姓)은 영(嬴), 통일 후의 수도는 함양(咸陽).

 BC210

 시황제(始皇帝) 동방순행(東方巡行) 中 사거(死去)


                           


 ※ 시황제<始皇帝-기원전 259년 정월 1월(? 또는 10월)부터 기원전 210년 9월 10일(秋7월)>는, 진조(秦朝)의 황제였으며, 성(性)은 영(嬴), 씨(氏)는 진(秦), 시호(諱)는 정(政).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고 있고, 진(秦)왕으로 기원전 246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는 또한 중국 사상 처음으로 황제로 칭해졌던 인물이었다.

 <약력(略曆)>

 1. 출생(出生)

 시황제의 아버지 자초<子楚=後의 장양왕(莊襄王)>는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인질(人質)의 처지에 있었으나, 대상(大商) 여불위(呂不韋-참고 7-1참조)의 도움을 받아서 효문왕(孝文王-)의 태자(太子)가 되었고, 나중에 진왕(秦王)에 즉위하였다.


<한단의 위치도> 

 
 그리고 그 여불위는 그 전에 자신의 애인(愛人)이었던 여인을 자초에게 양도했는데, 그 후에 태어났던 사람이 바로 시황제 정(政)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초에게로 가기 전에 회임을 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로써 여불위가 그의 親父인가 하는 의심이 강하게 일었다. 그것은 또 사기(史記)의 <여불위열전>에도 소개가 되었을 정도여서, 그래서 그때 그것이 얼마나 크게 소문이 났었던가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정작 <진시황본기>에는 기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으로 또 사마천(司馬遷)이 양론병기(兩論倂記)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사마천=후술>


<반고=후술> 

 
 그러나 그 후의 반고(班固)가 쓴 사기(史記-漢書)의 <진시황본기수록(秦始皇本紀收錄)> 상서부(上書部)에서는 政을 <여정(呂政)>이라고 표기해놓았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것으로 보아서는 한조(漢朝)가 진조(秦朝)의 혈연관계를 부정하여, 그것으로 진조(秦朝)의 정통성을 부정하려 했다는 의도가 강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또 동시대(同時代)의 <춘신군(春申君)>에게서도 그와 비슷한 고사(故事)가 전해져오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보아서는 또 <그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역사가도 있다. 그리고 또 그와 관련해서는 <그때, 자초가 여불위의 애인에게 이미 회임을 시켜버렸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불위가 자초에게 그녀를 보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역사가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소문이 나게 된 배경에는 또 <당시, 그를 아주 미워했던 육국(六國)의 유민(遺民)들이 그를 흠집 내고자 그런 풍문을 널리 퍼뜨렸던 것이 아니었겠는가>하는 의견도 있다고 해서, 그래서 그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기(史記)에서도 그의 용모와 성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두었다.

 <그는 몹시 거만하고, 눈초리는 길게 째졌으며, 그 목소리는 마치 승냥이와도 같고, 또 은애(恩愛)의 정(情)도 부족한데다, 호랑이나 이리와 같이 잔인한 마음의 소유자이다>

 2. 즉위(卽位)

 기원전 258년, 정(政)이 탄생한 직후에 진(秦)이 조(趙)를 공격해서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그러자 조(趙)는 그 보복으로 자초(子楚)를 처형시키려고 했는데, 그러자 여불위(呂不韋)가 나서서 자초(子楚)를 도망치게 도왔다. 하지만 그때, 정(政) 모자(母子)는 한단(邯鄲)에 남겨졌다. 그 후, 기원전 251년에 자초(子楚)가 귀국한 후, 소양왕(昭襄王)이 훙거(薨去)하자, 효문왕(孝文王)이 그 뒤를 이었고, 그러자 자초(子楚)는 그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또 그것을 알게 된 조(趙)나라는 정(政)의 모자(母子)를 정중하게 진(秦)나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다음 기원전 250년, 효문왕(孝文王)이 훙거하고 자초(子楚)가 즉위하자 여불위(呂不韋)는 승상(丞相)이 되어서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46년, 장양왕(莊襄王)이 훙거하자, 당시 13세였던 정(政)이 진왕(秦王)에 즉위했다. 하지만 즉위 당초 여불위(呂不韋)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정(政)은 어쩔 수 없이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 정(政)은 남동생이었던 성교(成蟜)의 모반(謀反)과 친모(親母)의 애인이었던 노애(嫪毐-참고 7-1참조바람)의 반란을 진압한 후, 기원전 238년에는 여불위(呂不韋)마저 먼 곳으로 보내버리고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그 후 정(政)은 한(韓)의 공자(公子)였던 한비(韓非)가 기술했던 <한비자(韓非子>에 감동해서 그의 사상을 도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었으며, 한비(韓非)의 동문이었던 이사(李斯-참고 7-1 참조바람)가 한비(韓非)를 자살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그래서 정(政)은 하는 수없이 이사(李斯)를 중신으로 채용했다. 그 후, 정(政)은 이사(李斯)의 주도(主導)로 법가(法家)사상을 정치에 도입했고, 이어서 군주독재(君主獨裁)와 군현제(郡縣制) 그리고 엄벌주의(嚴罰主義) 등을 추진했으며, 그로써 강력한 독재체제를 쌓았다. 그리고는 또 진군(秦軍)의 소수정예(少數精銳)화도 단행했으며, 원정(遠征)으로서는 장수(將帥)로 왕전(王翦-참고 7-2 참조)과 왕분(王賁) 부자(父子) 그리고 이신(李信-참고 7-2 참조) 등을 기용해서 한(韓)·조(趙)·위(魏)를 차례로 멸했다.


<그림 설명: 左는 秦王, 右는 荊軻, 중앙은 秦舞陽, 아래는 번어기의 머리를 담은 상자>


 기원전 227년, 연(燕)의 태자 단(丹-참고 7-2 참조)이 이웃나라였던 조(趙)가 진(秦)에 멸해졌던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정(政)을 암살하기 위해서 형가(荊軻)를 자객으로서 보냈다. 그러자 그 형가(荊軻)는 진군(秦軍)의 개혁에 반대하다 가족이 모두 처형당하고 진(秦)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던 장군 번어기(또는 번오기-樊於期)의 머리를 진상품으로 하고, 사자(使者)의 자격으로 진(秦)의 왕 정(政)을 배알(拜謁)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했던 두루마리(지도) 속에 숨겼던 칼로 정(政)을 습격했다. 그러자 궁전 내에서는 무기소지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때 政의 신하들은 그것을 보고서도 저지하지 못했는데, 그런데다 또 그때 政 자신은 장검을 차고 있었지만, 그러나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칼을 뽑지 못하고 절명에 처할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또 그때, 마침 政의 시의(侍醫)가 임기응변을 발휘했고, 그러자 政은 그 틈을 타서 장검을 뽑아 형가(荊軻)를 살해했다. 그 후 정(政)은 그 일에 격분해서 연(燕)을 쳤고, 그로써 연(燕)도 멸했다. 하지만 기원전 225년, 진(秦)은 당시 최대의 적국이었던 초(楚)도 공격을 했지만 실패했고, 그러자 반대로 이번에는 초군(楚軍)이 진(秦)을 침공해왔다. 그러자 또 정(政)은 당시 이미 은퇴해있던 왕전(王翦)을 장군으로 해서 전권을 맡겼고, 그러자 또 왕전(王翦)은 초군(楚軍)을 격퇴한 후 그대로 초(楚)로 쳐들어가서 항연(項燕-項羽의 조부-참고 7-2 참조)이 인솔하던 초군(楚軍)을 괴멸시켜서 초(楚)를 멸망시켰다. 그리하여 기원전 221년에, 진(秦)은 전국(戰國) 육국(六國) 중 그때까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제(齊)까지 멸하고는 중국통일을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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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41)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
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그 후, 경후(敬侯)의 증손(曾孫)이었던 무령왕(武靈王)은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騎馬)전술을 도입해서 호복기사(胡服騎射)라고 명명했으며, 그 후에 조(趙)의 그 기마대(騎馬隊)는 제국(諸國)을 떨게 했고, 당시 위(魏)에 멸해졌던 후 재흥(再興)을 하고 있었던 중산국(中山國)을 다시 멸했다.

 그리고 또 당시, 진(秦)에서는 효공(孝公)을 섬기고 있던 상앙(商鞅)이 정치개혁을 단행한 후, 엄격한 법치주의에 의한 통치체제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진(秦)의 국력은 증대되었다. 그러자 또 위(魏)와 한(韓)이 그에 위협을 받았으며, 장의(張儀-6-26참조)의 책략에 의해서 초(楚)의 회왕(懷王)은 포로로 잡혔고, 진(秦)은 초(草)의 땅을 빼앗았다.

 그 후, 일시적으로 조(趙), 진(秦), 제(齊)의 정립(鼎立) 상태가 유지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무령왕(武靈王)이 내란으로 사망하자, 조(趙)는 그 정립(鼎立) 체제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에 진(秦)은 조(趙)와 한(韓) 그리고 위(魏)로부터 영토를 빼앗아서 더욱 강대해졌고, 그에 질세라 제(齊)도 북쪽의 연(燕)을 일시적으로 괴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송(宋)을 병합하는 등 강대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는 동(東)의 제(齊), 서(西)의 진(秦) 형태로 2강(强)의 시대가 만들어졌다.

 <후기(後期)>

 그런데 그 후였던 기원전 284년에 악의(樂毅)를 대장으로 했던 연(燕), 조(趙), 한(韓), 위(魏), 초(楚) 그 5개국 연합군에 제(齊)는 대패했으며, 그러자 제(齊)의 수도 임치(臨淄)도 그들에게 함락 당했다. 그리하여 제(齊)는 거(莒)와 즉묵(即墨)을 제외한 전 국토를 연합국에 점령당했으며, 그에 민왕(湣王)은 국외로 도망을 갔다가 다시 거(莒)로 돌아왔지만, 그러나 또 초(楚)의 장군으로 제(齊)의 재상이 되었던 도치(悼齒)에게 살해당했다. 그러자 제(齊)는 왕의 부재상태로 있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에 전단(田單)에 의해서 부흥되기는 했었어도, 그러나 국력의 대폭적인 소모만은 면할 수가 없었다.(참고 6-25 참조)

 ○ 악의(樂毅-생몰불명)는 중국 전국시대 연(燕)의 무장이었고, 연(燕) 소왕(昭王)의 도움을 받아서 제(齊)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창국군(昌國君) 또는 망제군(望諸君)으로도 불렸다. 그의 선조는 위(魏)의 문후(文侯-6-34참조)를 모셨던 악양(樂羊-6-34참조)이었고, 그에 대한 소개는 이미 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자손들은 계속해서 영수(靈壽)에서 살았는데, 그러다가 중산국(中山國)이 부흥하자 그 나라에서 벼슬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악의(樂毅) 또한 그 나라에서 벼슬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고는 있지만,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알지 못하며, 그래서 그의 전력(前歷) 또한 불명(不明)한 상태이다. 그 후, 조(趙)의 무령왕(武靈王)에 의해서 중산국(中山國)은 멸망했고, 그 후에 또 조(趙)에서는 내란이 일어나서 무령왕(武靈王)이 아사(餓死)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위(魏)로 갔다. 그리고는 위(魏) 소왕(昭王)의 신하가 되었지만, 그런데 또 그때 마침 연(燕)에서 인재를 널리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위(魏) 소왕(昭王)에게 부탁을 해서 연(燕)으로 사자(使者)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연(燕)에서 벼슬을 하면서 돌아가지 않았으며, 그러자 또 당시의 군주였던 연(燕)의 소왕(昭王)은 그가 인재(人才)임을 알아보고 상경(上卿) 아래인 아경(亞卿)에 임명했다. 그리고 또 그 얼마 전, 연(燕)은 제(齊)에 의해서 멸망 직전까지 가야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당시 태자였던 소왕(昭王)은 신산(辛酸)의 고통을 삼키면서 제(齊)에 대해서 강한 복수심을 키웠다. 그래서 자신이 즉위하자 그로부터 20수 년간 널리 인재를 모았고<그것은 곽외(郭隗-燕의 賢人)가 소왕(昭王)에게 진언했던 "먼저 외(隗)로부터 시작하십시오!"라는 말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었으며, 그 뜻은 또 손쉬운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이었고, 그러자 또 그 말은 나중에 고사(故事)가 되었다>, 그 사이에 또 그는 백성들과 더불어서 노고(勞苦)를 분담하면서 국가의 재흥에 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제(齊)는 서(西)의 진(秦)과 더불어서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국시대(戰國時代) 사군(四君) 중 한사람이었던 맹상군(孟嘗君-6-25 참조)을 재상으로 해서 중산국(中山國)과 송(宋)을 멸했으며, 이어서 초(楚)와 삼진(三晋-趙, 魏, 韓)도 파했다. 그리하여 사수(泗水) 연안에 있던 노(魯) 등은 사실상 제(齊)의 속국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한때는 진(秦)과 함께 왕(王)보다도 더 높은 제(帝)란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던 등, 날로 그 기세를 높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당시 연(燕)은 모든 면에서 제(齊)를 따라갈 수가 없었고, 하지만 또 그런 중에서도 소왕(昭王)은 복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악의(樂毅)가 연(燕)으로 왔던 것이었고, 그리고는 <다른 나라들과 연합을 해서 제(齊)를 공격하자>는 진언을 올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또 당시 제(齊)는 민왕(湣王)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민왕(湣王)이 오만한 성품에다 국력을 과신하고 주위의 소국(小國)들에 공갈적(恐喝的)인 외교를 펼쳤던 등 해서, 많은 나라들의 원한을 사고 있었다. 그래서 악의(樂毅)는 먼저 조(趙)를 설득했고, 그 다음에는 위(魏)와 초(楚)를, 그리고 또 당시 조(趙)와 우호국이었던 진(秦)까지 끌어들이는데 성공을 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84년, 그 같은 움직임을 포착했던 민왕(湣王)은 그 선수(先手)로 송(宋)을 멸하고는 그 땅을 제(齊)에 편입시켜버렸다. 그리고는 더욱 자만해서 당시 자신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던 맹상군(孟嘗君)을 멀리하고는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러자 그에 위기를 느꼈던 맹상군(孟嘗君)은 위(魏)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또 그 기회를 놓칠세라 연(燕)에서는 악의(樂毅)를 대장으로 해서 대군을 일으켰고, 그러자 또 그에 한(韓)과 위(魏) 그리고 조(趙)와 초(楚)가 합류해서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그러자 악의(樂毅)는 그 연합군의 총대장이 되어서 제(齊)로 쳐들어갔고, 그리고는 그 제군(齊軍)을 제서(濟西)에서 격파했다. 그런 다음, 악의(樂毅)은 연군(燕軍)을 이끌고 제(齊)의 수도 임치(臨淄)로 쳐들어갔으며, 그러자 민왕(湣王)은 거(莒)로 도망을 갔다. 그 후, 악의(樂毅)는 임치(臨淄)에서 전래(傳來)의 보기(寶器)들을 탈취했으며, 그 전부를 연(燕)으로 보냈다. 그러자 소왕(昭王)은 아주 크게 기뻐했고, 직접 제(齊)까지 가서 악의(樂毅)에게 포상(褒賞)을 했을 정도였으며, 창국군(昌國君)에 봉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당시, 연(燕)의 영지(領地)는 대부분이 과거의 공신들에게 다 돌아갔던 터였기 때문에, 그래서 더 내릴 영지도 없었던 형편이었지만,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소왕(昭王)은 악의(樂毅)에게 약간의 영지까지 내렸는데, 그래서 또 그것으로 봐서도 그때 소왕(昭王)이 얼마나 기뻐했던 것인지를 잘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악의(樂毅)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제(齊)를 공략해 나갔고, 그렇게 해서 제(齊)의 70여 성(城)을 차례로 무너뜨렸으며, 그러자 또 그 연동(連動)으로 <악의(樂毅)가 온다!>라는 소리만 들렸어도 그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성문(城門)을 열어주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제(齊)에서 남았던 곳은 즉묵(即墨)과 거(莒)밖에 없었고, 그래서 또 악의(樂毅)는 당시 민왕(湣王)이 머물고 있었던 그 거(莒)부터 공격했다. 그러나 또 바로 그때 민왕(湣王)은 초(楚)의 장군이었고, 제(齊)를 구원하러 왔던 도치(悼齒)에게 살해되었으며, 도치(悼齒)는 또 그 후에 그 소식을 듣고 분개(憤慨)했던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런 다음 민왕(湣王)의 아들이었던 법장(法章)을 데려와서 즉위시켰는데, 그가 바로 양왕(襄王)이었다. 그리고 또 이미 앞에서도 충분히 소개가 되었지만, 그때 전단(田單)은 그 풍전등화 상태의 제(齊)를 구하기 위해서 홀로 고군분투(孤軍奮鬪)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79년, 그러던 중에 연(燕)의 소왕(昭王)이 세상을 떠났고, 그러자 태자 혜왕(惠王)이 즉위했다. 그런데 그 혜왕(惠王)은 태자시절부터 악의(樂毅)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러자 또 그 기회를 포착했던 전단(田單)이 악의(樂毅)와 혜왕(惠王)을 이간질했는데, 그것은 또 이미 앞의 전단(田單)에서 소개가 되었으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앞의 <참고 6-25>의 전단(田單)을 참고바랍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악의(樂毅)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는 조(趙)로 망명했으며, 그러자 조(趙)에서는 그를 아주 기쁘게 맞아주었다. 그리고는 연(燕)과 제(齊)의 국경(國境)지(地)에 봉지를 내렸으며, 그것으로 망제군(望諸君)으로 칭해졌고, 그것으로 또 그 양국(燕과 齊)을 위협하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자 또 한편, 악의(樂毅)를 책략으로 몰아냈던 전단(田單)은 그 후에 빼앗겼던 영토를 전부 회복했다. 그러자 또 그때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던 혜왕(惠王)은 악의(樂毅)가 자신에게 한을 품고 다시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서 일단 자신이 장군을 바꾸게된 경위를 설명했던 것과 동시에, 악의(樂毅)가 망명했던 일에 대해서 문책하는 글을 써서 보냈다. 그러자 악의(樂毅)는 <연(燕)왕(王)에게 보고하는 글(書)>이라고 불렸던 답신을 통해서, 선왕(先王-昭王)에 대한 넘치는 경애(敬愛)와 충성(忠誠)의 정(情)을 쓴 후에, 자신이 망명을 했던 이유는 타인의 참언(讒言)으로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으로 자신을 중용(重用)해주었던 선왕(先王)의 이름에 모욕을 주는 일이 될까 두려워서였다고 썼다. 그러자 혜왕(惠王)은 자신의 오해를 풀었고, 그곳에 있었던 악의(樂毅)의 아들 악간(樂間)을 창국군(昌國君)에 봉했으며, 그것으로 악의(樂毅)와의 화해를 증거로 했다. 그리고 또 그때 악의(樂毅)가 보냈다던 그 <보유연혜왕서(報遺燕惠王書)>는 고금(古今)의 명문(名文)으로 알려졌으며,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와 함께 <읽고도 울지 않는 자는 충신(忠臣)도 아니다!>라고 말해졌을 정도로 훌륭했던 것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에 악의(樂毅)는 조(趙)와 연(燕) 양방(兩方)의 객경(客卿-다른 나라에서 와서 公卿의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이 되었으며, 그 양국을 왕래하다가 마지막에는 조(趙)에서 죽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제(齊)는 다시 부흥했지만 그러나 국력은 대폭 줄어들었고, 그 결과로 그때부터 진(秦) 1강(强)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그 후로는 진(秦)이 통일을 위한 수속(收束)을 밟아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의 아들 악간(樂間)도 혜왕(惠王)에게 총애를 받기는 했지만, 그러나 또 그 혜왕(惠王)이 죽고 나자 희(喜-武成王)가 즉위했는데, 그런데 그 희(喜)와는 사이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역시도 그 아버지의 전철을 밟아서 악의(樂毅)처럼 조(趙)로 망명했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악의(樂毅)의 자손들은 모두 조(趙)로 이주해 갔지만, 그 후에 악의(樂毅)를 숭경(崇敬)했던 유방(劉邦)에 의해서 악의(樂毅)의 자손이었던 악숙(樂叔)이 악향(樂鄕)에 봉해졌고, 그리하여 화성군(華成君)이 되었다.

 아무튼, 그 제(齊)의 조락(凋落)에 의해서 그때부터 중국은 진(秦) 1강(强)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고, 그러자 또 진(秦)은 명장이었던 백기(白起)를 앞세워서 제국(諸國)들에 가열(苛烈)한 공격을 가했으며, 그리하여 기원전 260년에는 <장평(長平)의 싸움-6-26 참조>에서 조(趙)에 대승했고, 그러자 또 백기(白起-6-26 참조)는 45만이라는 엄청난 수의 장병(將兵)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56년에는 동주(東周)마저 멸했으며, 그러던 중 기원전 247년에는 정(政-나중의 始皇帝)이 즉위를 해서 전국통일의 시동을 걸었다. 그러자 또 그 정(政)은 이사(李斯)의 정책 하에 법치주의와 권력집중에 매진했으며, 그리고 또 외정(外征) 면에서는 왕전(王翦)과 왕분(王賁) 친자(親子) 그리고 이신(李信) 등을 기용했고, 그리하여 또 기원전 230년에는 한(韓)을 멸했으며, 계속해서 기원전 228년에는 조(趙)를, 그리고 기원전 225년에는 위(魏)를, 기원전 223년에는 초(楚)를, 기원전 222년에는 연(燕)을, 기원전 221년에는 제(齊)를 멸하고는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도 막을 내렸으며, 중국 사상(史上) 처음으로 통일왕조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春秋戰國時代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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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40)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그 후, 경후(敬侯)의 증손(曾孫)이었던 무령왕(武靈王)은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騎馬)전술을 도입해서 호복기사(胡服騎射)라고 명명했으며, 그 후에 조(趙)의 그 기마대(騎馬隊)는 제국(諸國)을 떨게 했고, 당시 위(魏)에 멸해졌던 후 재흥(再興)을 하고 있었던 중산국(中山國)을 다시 멸했다.

 그리고 또 당시, 진(秦)에서는 효공(孝公)을 섬기고 있던 상앙(商鞅)이 정치개혁을 단행한 후, 엄격한 법치주의에 의한 통치체제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진(秦)의 국력은 증대되었다. 그러자 또 위(魏)와 한(韓)이 그에 위협을 받았으며, 장의(張儀-6-26참조)의 책략에 의해서 초(楚)의 회왕(懷王)은 포로로 잡혔고, 진(秦)은 초(草)의 땅을 빼앗았다.

 ○ 효공(孝公-기원전 381년부터 기원전 338년)은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제25대 군주였고, 헌공(獻公-師隰)의 적자(嫡子)였다. 그리고 또 그는 즉위와 동시에 포고(布告)를 내서 국정을 쇄신(刷新)하겠다고 포부를 밝혔고, 그 후에 위(魏)에서 왔던 상앙(商鞅)을 영입했던 것으로 발본(拔本)적인 국정개혁에 들어갔다.<상앙(商鞅)의 변법(變法)> 그리하여 목공(穆公) 사후부터 쇠퇴했던 진(秦)을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재탄생시켰으며, 수도를 역양(櫟陽)에서 함양(咸陽)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위(魏)를 격파하는 등, 부국강병에 노력했던 중흥(中興)의 시조(始祖)였다.

 ○상앙(商鞅-기원전 390년부터 기원전 338년)은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공손(公孫), 이름은 앙(鞅), 또는 위(衛)의 공족(公族)계였기 때문에 위앙(衛鞅)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또 상앙(商鞅)이란 호칭은 그가 나중에 진(秦)의 상(商)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상군앙(商君鞅)이라는 의미의 존칭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법가사상을 기초로 해서 진(秦)의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것이 또 나중에 진(秦)의 천하통일에 초석이 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주변의 원한을 사서 처형당했다. 그는 위(衛)의 공족(公族) 출신이었고, 위(魏)의 혜왕(惠王)을 모시던 재상 공숙좌(公叔座)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중서자(中庶子-公族을 담당했던 官職)를 지냈다.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이미 소개가 되었으며, 그러자 또 상앙(商鞅)은 그 길로 진(秦)으로 가서 당시 환관(宦官)이었던 경감(景監)이란 자를 만나서 당시 아직 젊었던 효공(孝公)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 만남은 이루어졌고, 그러자 상앙(商鞅)은 먼저 왕도(王道)에 대해서 자신의 주장을 열변했는데, 하지만 효공(孝公)은 그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자 또 그 얼마 후에 그 두 사람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상앙(商鞅)은 그때는 한단계정도 수준을 낮추어서 다시 왕도(王道)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그때도 효공(孝公)의 반응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또 얼마 후 세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또 상앙(商鞅)은 앞보다 더 수준을 낮추어서 패자(覇者)의 길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그러자 그때는 효공(孝公)도 열심히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상앙(商鞅) 쪽으로 다가와서 그 이야기를 경청했을 정도였다. 그 후, 그렇게 해서 신임을 얻었던 상앙(商鞅)은 국법을 변화시키려고 했지만, 그러나 정작 효공(孝公)이 비판을 두려워해서 망설였다. 그러자 또 상앙(商鞅)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격려했다. <疑行無名, 疑事無功> 즉, 여기서의 의(疑)란, 확신이 없는 애매한 태도나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며, 그래서 또 그것이 무엇이든 일단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감(自信)을 가지고 단행(斷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래서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나 마음가짐 상태로 무엇을 하려고 든다면, 그 일이 비록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확신을 가질 수 없고, 그래서 명예 또한 얻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상앙(商鞅)의 그 말은 후세에 고사성어(故事成語)로 남게 되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자 감용(甘龍)이라든가, 두지(杜摯) 같은 자들이 반대하고 나왔는데, 그러자 상앙(商鞅)은 그들의 주장을 논파(論破)했고, 그러자 효공(孝公)도 상앙(商鞅)의 편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기원전 359년, 효공(孝公)은 상앙(商鞅)을 좌서장(左庶長)에 임명했으며, 변법(變法)이라고 불렸던 국정개혁을 단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제1차 변법(變法)이라고 불렸던 것이며, 그 주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편의상 번호를 붙임)

 
참고: 좌서장(左庶長)은 진(秦)의 20등작제(二十等爵制) 중에서 제12위를 가리켰던 것이며, 한편, 상군열전(商君列伝)에서는 그 시점(時點)에 좌서장이 되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진본기(秦本紀)에서는 변법(變法) 실행 후 3년이 지났을 때부터였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며, 그리고 다음은 참고로 그 진20등작제(秦二十等爵制)에 대한 내용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단, 이 등작제는 진(秦)한(漢)시대에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그 등위는 다소 변동이 있을 수 있으며, 역시 한글표기는 하지 않습니다.

1.公士 /2.上造 /3.簪裊 /4.不更 /5.大夫 /6.官大夫 /7.公大夫 /8.公乗 /9.五大夫 /10.左庶長 /11.右庶長 /12.左更 /13.中更 /14.右更 /15.少上造 /16.大上造 /17.駟車庶長 /18.大庶長 /19.関内侯 /20.列侯

 1. 호적(戶籍)을 만들어서 백성들을 5호(戶-) 또는 10호(戶-)를 한 조(組)로 나눈다.(그것을 什伍라고 불렀음) 그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것을 의무로 할 것이며, 혹시라도 그 중에서 죄를 범한 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신고하지 않은 경우에는 십오(什伍) 전체가 연좌(連座)로 벌을 받는다.(그것을 告座라고도 불렀음) 그러나 미리 신고를 한 경우에는 전쟁에서 적의 머리를 취한 것과 같은 공적이 인정된다.

 2. 한 집에 두 명 이상의 성인 남자가 있는데도 분가하지 않은 자는, 부세(賦稅)를 배가(倍加)시킨다.

 3.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을 때는 작위(爵位)로 보상한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지 않은 자에게는 그 정도에 상응하는 과형(課刑)을 부과한다.

 4. 남자는 농업, 여자는 방적(紡績) 등, 가정 내의 수공업에 종사하고, 그 중에서 성적이 좋은 사람은 세금을 면제한다. 그러나 장사를 한다거나 게으름을 피워서 가난하게 된 자는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뜨린다.

 5. 특권 계급이라고 해도 전공(戰功)이 없는 자는 그 신분을 박탈한다.

 6. 법령(法令)을 사회규범의 요점으로 한다.

 그런 다음 그는 나라에서 법을 확실하게 집행한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 3장(丈-1丈은 10尺 그러나 秦代의 度量衡에서는 1尺이 약 27.6㎝정도였으므로, 약 8.3m)도 더 되던 나무를 수도였던 옹(雍)의 남문(南門) 앞에 박아놓고 <그 나무를 북문(北門)으로 옮기는 자에게 10금(十金)을 주겠다>고 포고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서 그 나무를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상금을 50금으로 올렸다. 그러자 어느 하루, 어떤 사람 한명이 와서 그 나무를 북문으로 옮겼다. 그러자 상앙(商鞅)은 약속대로 그 남자에게 50금을 상금으로 주었다. 그러자 그때부터 백성들은 상앙(商鞅)이 만든 변법(變法)을 믿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최초의 신법(新法)도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백성들의 불만은 높아갔지만, 그러나 상앙(商鞅)은 그것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거기다 또 상앙(商鞅)은 그 법이 훌륭하게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백성들이 그것을 반드시 지키려는 마음이 없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마침 그때, 효공(孝公)의 아들 태자 영사(嬴駟-나중의 惠文王)가 법을 어긴 일이 발생했고, 그러자 또 상앙(商鞅)은 효공(孝公)에게 그를 처벌할 것을 소원(訴願)했다. 그러자 또 효공(孝公)은 태자에게는 직접적인 벌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태자의 부(傅-후견役)였던 공자 건(虔)을 비삭(鼻削-코를 자름)형에 처했고,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던 공손가(公孫賈)에게는 이마에 글을 새겨 넣은 묵형(墨刑)에 처했으며, 거기다 또 한사람 태자의 시종(侍從)이었던 축환(祝懽)마저 태자를 잘 보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그러자 그 후, 공자 건(虔)과 공손가(公孫賈) 그 두 사람은 수치심에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고, 그러자 또 그 두 사람은 그때부터 상앙(商鞅)을 증오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백성들은 그때서야 법의 지엄함을 알고는 따르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상앙(商鞅)의 변법(變法)은 그때부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자 전답(田畓)들은 아주 멋지게 개간되었으며, 병사들의 사기도 높아졌다. 그리고 또 백성들도 그때부터는 풍족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거리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내 것이다!>하고 달려드는 사람 하나도 없을 정도가 되어갔다. 그러자 또 처음에는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던 백성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때부터는 상앙(商鞅)을 칭찬하는데 입이 마를 지경이었고, 그것으로 상앙(商鞅)의 그 변법(變法)은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352년, 그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진(秦)은 위(魏)를 침공했으며, 그리고 기원전 350년에는 수도를 옹(雍)에서 함양(咸陽)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동년(同年) 상앙(商鞅)은 다시 변법(變法)을 시행했으며, 그것은 또 법가사상에 의한 군주독재권의 확립을 기도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의 주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았다.(편의상 번호를 붙임)

 1. 부자(父子)형제(兄弟)가 한집에 사는 것을 금한다.

 2. 전국(全國)의 집락(集落)을 현(縣)으로 나누고(縣制로, 全國에 41縣을 設置함) 그곳에 각각 영(令-長官), 승(丞-補佐)을 설치하는 것으로 중앙집권화를 철저히 한다.

 3. 정전(井田)을 폐(廢)하고, 전지(田地)의 구획(區劃)정리를 행한다.

 4.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한다.

 참고: 그때, 공평(公平)하게 계량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승(升-되, 말)이 <상앙승(商鞅升)> 또는 <상앙량(商鞅量)>이라고 불렸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아무튼 당시까지 그곳에서는 부자형제가 한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중원(中原) 제국(諸國)들의 시각에서 그런 것은 야만(野蠻)의 풍습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상앙(商鞅)은 그것을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었고, 그 결과로 호수(戶數)가 늘어나서 진(秦)은 그때부터 더욱더 강대해져 갔다. 그리하여 기원전 340년, 그 전 해에 이미 제(齊)의 손빈(孫臏)에 의해서 피폐(疲弊)해져 있었던 위(魏)를 다시 침공했으며, 그때 상앙(商鞅)은 스스로 군을 인솔해서 그 토벌에 나섰다. 그리고 또 옛날부터 친구사이였고, 당시 위(魏)의 총대장이었던 공자(公子) 공(邛)을 기만해서 포로로 잡았으며, 그것으로 황하(黃河) 이서(以西)의 땅을 빼앗았다. 그러자 위기를 느꼈던 위(魏)는 수도를 안읍(安邑-현재의 山西省 安邑)에서 동쪽의 대량(大梁-현재의 開封)으로 옮겼으며, 그러자 또 그때, 혜왕(惠王)은 <내가 일찍이 공숙좌(公叔座)의 말을 듣지 않아서 지금 이런 일을 겪는구나!>라고 하면서 크게 후회했다. 아무튼, 그 공적으로 상앙(商鞅)은 상(商)과 어(於)라는 땅의 15읍(邑)을 봉지로 내려 받았고, 그때부터 상앙(商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소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최고의 절정을 맞고 있었던 상앙(商鞅)도 그 이면에는 많은 그림자들을 생산했고, 그들은 또 그를 제거할 날만을 기다리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제일로 많은 피해를 봤던 사람들은 구(舊) 귀족들이었는데, 그들은 당시 군주의 독재로 인해서 자신들의 권한이 많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상앙(商鞅)에 대한 증오가 더욱 강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어느 때, 상앙(商鞅)의 심복이었던 조양(趙良)이 상앙(商鞅)에게 <지금 당장 재상의 직을 그만두고 타국(他國)으로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엄중하게 충고를 했다. 그러자 그에 대해서 상앙(商鞅)은 <네가 나의 안전을 염려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그것을 두고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조양(趙良)은 상앙(商鞅)에게서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보고 그길로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338년, 마침내 효공(孝公)이 죽었고, 그러자 태자 사(駟)가 즉위해서 혜문왕(惠文王-그러나 그 시점에서는 惠文公)이 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만을 기다려왔던 상앙(商鞅)의 반대파(公子 虔・公孫 賈 등)들이 혜문왕(惠文王)에게 참소(讒訴)를 했고, 그것으로 상앙(商鞅)을 제거하려고 들었다.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상앙(商鞅)은 급히 도망을 갔는데, 그런데 그 도중에 어느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여관의 주인은 그가 상앙(商鞅)인줄을 몰랐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의 숙박을 거부했다. <상앙(商鞅) 님의 엄명에 의해서 여권(旅券)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숙박시키지 못하도록 법률로 정해두었습니다> 그러자 상앙(商鞅)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아! 법을 위한 폐(弊), 여기에까지 이르렀던가?!(법률을 만들어서 철저하게 시켰던 폐해(弊害)가 이런 결과를 가지고 오게 할 줄이야...)> 그 후, 그는 일단 위(魏)로 도망을 갔지만, 그러나 위(魏)에서는 그를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추방되었다. 그러자 하는 수가 없었던 상앙(商鞅)은 봉지였던 상(商)으로 가서 군사를 모았지만, 그것을 토벌하러왔던 진(秦)의 토벌군에 의해서 격퇴되었으며, 상앙(商鞅)도 그때 죽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엄명을 내려서 그 본보기로 삼기 위해 그의 유해를 면지(黽地-현재의 河南省 澠池県)에서 차열(車裂)형에 처하라고 했고, 그 결과 그의 시체는 갈기갈기 찢어진 후에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그것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또 그 진(秦)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고 끝을 내면, 그 진(秦)은 원래는 내륙의 오지(奧地)에 기원(起源)을 두었던 나라로, 그래서 당시의 중국 즉, 내륙인 중앙에 있던 제국(諸國)들과는 다소 이질(異質)적인 나라였고, 그 풍습이란 것도 거의 야만(野蠻)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상앙(商鞅)에 의해서 그 모든 것들은 개혁되었으며, 거기다 위(魏)까지 이기고는 강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상앙(商鞅) 사후, 즉 혜문왕(惠文王) 이후의 진(秦)의 역대군주들도 모두 상앙(商鞅)이 만들었던 그 법을 따랐으며(그것은 또 그 반세기전에 楚의 吳起도 그런 엄격한 법을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가 죽고 나자 그것도 함께 없어졌다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또 그 후에 진(秦)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그 원동력도 바로 그 상앙(商鞅)이 만들어두었던 그 <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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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9)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
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 경후(敬侯-?부터 기원전 375년. 재위 기원전 387년부터 기원전 375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로, 아버지는 열후(列侯)였다.

 열후(列侯 또는 烈侯-?부터 기원전 400년. 재위 기원전 408년부터 기원전 400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였고,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손자였다.
그리고 그는 한(韓)의 경후(景侯)와 위(魏)의 문후(文侯)와 함께 기원전 403년에 진(晋)의 열공(烈公)으로부터 제후(諸侯)로서 인정되었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또 그때, 그에게는 영장(嬴章-나중의 敬侯)이란 아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때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동생이었던 무공(武公-武侯)에게 양위(讓位)되었다. 그리고 또 그와 관련된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그는 생전에 음악을 아주 좋아했는데, 특히 정(鄭)나라 출신의 어떤 가수(歌手)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당시 상국(相國-재상)이었던 공중연(公仲連)에게 그의 신분을 높여주라고 명을 내렸는데, 그러자 공중연(公仲連)은 <그를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괜찮겠지만, 그렇다고 신분을 높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반대했다. 그러자 열후(列侯)는 <그렇다면 그에게 밭(田) 1만 묘(畝)를 내려라!>라고 또 명을 내렸다. 그러자 공중연(公仲連)은 알았다고 말은 했지만,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내켜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열후(列侯)가 언젠가는 그 결정을 후회할 날이 있겠지'하고 기다렸다는데, 그런데 그 1개월 후에 열후(列侯)가 그 결과를 물었다. 그러자 또 공중연(公仲連)이 이렇게 말을 했다. <아직 적당한 밭을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또 얼마 후에 열후(列侯)가 그것에 대해서 또 물으려고 하자 공중연(公仲連)은 병을 핑계로 참내(參內)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또 얼마 후에 공중연(公仲連)은 우축(牛畜)과 서월(徐越) 그리고 순흔(荀欣)을 데리고 가서 열후(列侯)에게 소개하면서 추거(推擧)했다. 하지만 열후(列侯)는 그 일은 제쳐두고 끝까지 앞의 그 일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나 또 공중연(公仲連)은 그 말에는 애매하게 얼버무리고는, 자신이 데리고 갔던 자들이 모두 현자(賢者)들이라고 하면서 재차 그들을 추거했다. 그러자 열후(列侯)가 그들을 시험했는데, 그러자 우축(牛畜)은 인의(仁義)의 도에 대해서 설파했으며, 순흔(荀欣)은 현자(賢者)들을 등용시켜서 그들의 재능을 이용해야 한다고 설파했고, 이어서 서월(徐越)은 재화(財貨)를 검약(儉約)해서 공로(功勞)가 있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상을 내려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 열후(列侯)는 그때서야 언뜻 깨달았던 것이 있었고, 그래서 급히 공중연(公仲連)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잠깐,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던 것 같소! 그 악사(樂士)에게 내리려던 밭은 일단 보류시키시오!> 그 후, 우축(牛畜)은 사(師)에 그리고 서월(徐越)은 내사(內史)에, 그리고 순흔(荀欣)은 중위(中尉)에 각각 임명되었으며, 공중연(公仲連)에게도 의상(衣裳) 2벌이 내려졌다고 한다.

 아무튼, 경후(敬侯)는 기원전 400년에 열후(列侯)가 죽었을 때, 아직 나이가 어렸었기 때문에, 숙부(叔父)였던 무공(武公)이 그 대를 이었고, 열후(列侯)는 또 무공(武公)에게 <그 다음 대는 경후(敬侯)가 잇게 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지만, 그러나 또 무공(武公)은 그 다음 대를 자신의 아들이었던 영조(嬴朝)에게 물려주려고 생각해서, 그때부터 경후(敬侯)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후(敬侯)도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무공(武公)이 건재(健在)하고 있었을 동안에는 그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도록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후였던 기원전 387년에 드디어 무공(武公)이 죽자 경후(敬侯)는 자신이 마땅히 그 대를 이어야 한다면서 주변의 지지를 얻어냈고, 이어서 등극했다. 그러자 또 조조(趙朝-嬴朝)가 그에 반발해서 무력봉기를 일으켰는데, 그러자 경후(敬侯)는 중모(中牟-河南省 湯陰県 西部)에서 한단(邯鄲-河北省 邯鄲)으로 천도한 직후에, 그 한단(邯鄲)에서 조조(趙朝-嬴朝)를 진압했다. 그러자 또 조조(趙朝)는 위(魏) 무후(武侯)의 도움을 받아서 위(魏)로 도망을 갔고, 그러자 또 무후(武侯)는 오기(吳起)를 대장으로 해서 군을 조(趙)에 보냈지만, 그러나 위군(魏軍)의 작전착오로 인해서 오히려 조군(趙軍)에 졌고, 그 결과로 조조(趙朝)는 토벌되었으며, 그 후로 경후(敬侯)의 왕위는 확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375년에 그는 죽었다.

 그 후, 경후(敬侯)의 증손(曾孫)이었던 무령왕(武靈王)은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騎馬)전술을 도입해서 호복기사(胡服騎射)라고 명명했으며, 그 후에 조(趙)의 그 기마대(騎馬隊)는 제국(諸國)을 떨게 했고, 당시 위(魏)에 멸해졌던 후 재흥(再興)을 하고 있었던 중산국(中山國)을 다시 멸했다.

 ○ 무령왕(武靈王-?부터 기원전 295년. 재위: 기원전 326년부터 기원전 298년)은 중국 전국시대 조(趙)의 군주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옹(雍-사기색은에 의함)이었다. 그리고 숙후(肅侯)의 아들이었고, 호복기사(胡服騎射)를 도입해서 조(趙)를 군사대국으로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원전 326년에 숙후(肅侯)가 죽자 조후(趙侯)의 위를 이어받았지만, 그러나 그때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신하였던 비의(肥義)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기원전 319년 즈음에 제국(諸國)에서는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그는 <조(趙)는 아직 그만한 능력이 되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끝까지 군(君)의 호칭을 고집했다. 그리하여 왕호는 그의 아들이었던 혜문왕(惠文王) 때부터 사용했으며, 그러자 또 그 혜문왕(惠文王)은 무령왕(武靈王)의 시(諡)에도 왕호를 올리기도 했지만, 기원전 315년에 인접국이었던 연(燕)에서 대혼란이 발생했고, 그리하여 그 나라는 군주 부재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무령왕(武靈王)은 연(燕)의 공자였던 직(職)을 맞이해서 나중에 조(趙)의 뒤를 받쳐줄 수 있을 방패용으로 그를 옹립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 소왕(昭王)이 군주의 자리에 올라버렸다. 그리고 또 기원전 311년에 무령왕(武靈王)은 꿈속에서 한 미녀(美女)를 보았는데, 그러자 그는 그 꿈의 해석을 구했다. 그런데 그 말을 전해 듣고 오광(吳廣)이란 남자가 찾아와서 그 꿈의 미녀가 바로 자신의 딸인 맹도(孟桃)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그 맹도(孟桃)를 그에게 헌상했는데, 그러자 그는 아주 크게 기뻐하면서 그 맹도(孟桃)를 맞이했고, 그 후로 총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맹도(孟桃)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나중의 혜문왕(惠文王)이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310년에 그는 교외(郊外-국경)에 야대(野臺-들에 지은 높은 臺)를 만들라고 지시했고, 그곳에서 중산국(中山國)과 제(齊)의 동태를 살피게 했으며, 그것으로 그 나라들을 정복하려는 자신의 야망을 내비쳤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307년에 그는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준비로써 호복기사(胡服騎射)를 생각해냈는데, 그것은 또 당시, 중국에서의 귀족(貴族)전사의 전통적인 전술이란 것이, 3인의 전사(戰士) 즉, 마부(馬夫)와 궁사(弓射) 그리고 창(戈手)에 의한 백병전(白兵戰)을 분담(分擔)하는 전차(戰車)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당시 북방유목민족의 1인 특수훈련을 받은 전사가 직접적으로 1마리의 말에 올라타서 활을 쏘면서 싸우는 방법을 도입하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당시에 대부(大夫)들은 윗옷자락이 길고, 아래는 스커트 형식의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말을 타려면 상당히 불편했던 점이 많았다. 그런데다 또 유목민족의 복장들은 말을 타기에 적합한 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가 생각했을 때, 그런 복장의 도입이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에게 그것에 대해서 의견을 구하자, 비의(肥義)는 바로 찬성했지만, 그의 숙부였던 공자(公子) 성(成)은 반대를 했다. 그것은 또 당시, 중화사상이 강했던 중국의 대륙에서는 그 유목민족을 만이(蠻夷)라고 부르면서 업신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들의 그런 방식을 도입한다는 자체가 이미 말도 되지 않는 만행(蠻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때, 비의(肥義)의 태도가 그들에게서는 신기하게 보였을 정도였는데, 그래서 또 그때 성(成)이 그런 반대를 하고 나왔던 것은, 그들의 수준으로서는 오히려 당연했던 결과였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포기를 하지 않고 계속해서 성(成)과 반대파들을 설득시켰으며, 그 결과 그의 뜻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 동년(同年) 진(秦)의 무왕(武王)이 죽었고, 그러자 연(燕)에 있던 공자 직(稷)이 진군(秦君)이 되었는데, 그가 소양왕(昭襄王)이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8년에, 그는 그때까지 태자로 있었던 공자 장(章)을 폐했고, 공자 하(何)를 태자로 세운 뒤에 위(位)를 물려주었지만, 그러나 스스로 주부(主父)라고 칭하면서 실질적인 권력까지는 넘겨주지 않았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6년, 그때까지 몇 번이고 공격을 해서 반(半)정도는 정복을 하고 있었던 중산국(中山國)을 완전히 멸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5년에는 공자 장(章)에게 연민의 마음이 느껴져서 월(越)의 북쪽에 있던 대(代)의 군(君)으로 삼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공자 장(章)으로 하여금 혜문왕(惠文王)에 반란을 결의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하지만 장(章)은 반란에 실패하고는 그에게로 도망을 왔는데, 그러자 그는 장(章)을 숨겨주었다. 그러자 또 혜문왕(惠文王) 측의 이태(李兌)와 공자 성(成)이 그의 관저를 포위했으며, 그러자 또 공자 장(章)은 그 중에 사망했다. 그리하여 반란은 끝났지만, 하지만 또 그때, 감히 주부(主父)의 관저를 포위하고 병(兵)을 움직였던 것으로 해서 나중에 문책을 당할 것을 두려워했던 이태(李兌) 등은, 그래서 그 포위를 풀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그 3개월 후에 그(主父)는 아사(餓死)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것을 두고 사마천(司馬遷)은 <무령왕(武靈王)이 후계(後繼)를 망설였던 결과, 그 자신 아사하고 말았던 것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為天下笑, 豈不痛乎)>라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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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8)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
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 경후(敬侯-?부터 기원전 375년. 재위 기원전 387년부터 기원전 375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로, 아버지는 열후(列侯)였다.

 열후(列侯 또는 烈侯-?부터 기원전 400년. 재위 기원전 408년부터 기원전 400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였고,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손자였다.(앞에서 趙
氏 계속)

 ♣ 조삭(趙朔-?부터 기원전 598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삭(朔), 시(諡)는 장(莊), 그래서 조장자(趙莊子)로도 불렸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조순(趙盾)은 생전에 은혜를 입었던 조희(趙姬)의 아들 조괄(趙括)에게 조가(趙家)의 종주(宗主)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 조괄(趙括)과 그의 형 조동(趙同)은 인덕(人德)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족(一族)의 흥망을 걸 수 있었던 사람으로, 그래서 또 평소 덕(德)이 많았던 조삭(趙朔)에게로 관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당주(當主)의 자리에 올랐던 조삭(趙朔)은 그 뒤에 경(卿)의 지위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597년 <필(怭)의 싸움> 때에는 하군(下軍)의 장이 되어서 종군하기도 했는데, 그런데 하군(下軍)의 좌(佐)였던 난서(欒書)가 전쟁의 무가치함을 주장하면서 철병(撤兵)론을 들고 나오자 그도 찬성했으며, 그러자 또 평소 그의 인기(人氣)에 질투를 느끼고 있었고, 그리고 또 숙부이기도 했던 위, 조동과 조괄 형제가 전쟁계속을 주장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도 전쟁에 참가를 했다. 하지만 또 초군(楚軍)의 맹공을 받고 중군(中軍)은 거의 붕괴되었으며, 하군(下軍)도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다. 그러자 그 후, 진(晋) 국내에서는 그 조(趙)가(家)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고, 그러자 또 그 상황을 우려했던 한궐(韓厥-춘추시대 晋의 정치가, 장군)이 조삭(趙朔)에게 망명할 것을 권하기도 했는데,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자네가 우리 조가(趙家)의 제사(祭祀)를 지켜주기만 한다면, 나는 아무런 여한이 없네!> 그리하여 기원전 598년, 사구(司寇-六卿 중 하나)였던 도안가(屠岸賈 또는 도안고라고 쓴 곳도 많으므로, 참고바람)가, 일찍이 영공(靈公)을 죽였던 조천(趙穿)의 죄를 조(趙)씨(氏) 일족(一族)에게 물어서 전부 처형했다. 하지만 당시 태아(胎兒)였던 조무(趙武)는 다행히 그 화를 면했고, 그러자 그 후에 도안가(屠岸賈)에게 복수를 했던 한편, 조가(趙家)를 부흥시켜서 진(晋)의 재상자리에까지 올랐다.

 ♠ 조무(趙武-기원전 598년부터 기원전 541년 12월 7일)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무너졌던 조(趙)씨(氏)日) 가문을 다시 일으켰던 사람이었으며, 초(楚)와 화목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소개가 되었지만, 일족이 멸망했을 때 그의 어머니 조장희(趙莊姬)는 공실(公室)에서 강가(降嫁-신하 등, 낮은 직급의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命)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궁(宮)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그녀는 임신을 하고 있었다.

 참고: 다른 것에서도 비슷하겠지만, 예를 들면, 조장희의 희(姬)는 晋室의 성(姓)이며, 그러나 趙氏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趙를 사용했고, 또 남편의 시(諡)가 장(莊)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

 아무튼, 그렇게 해서 탄생한 조무(趙武)는 도안가(屠岸賈)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당시, 조삭(趙朔)의 식객이었던 공손저구(公孫杵臼)를 희생양으로, 그리고 조삭(趙朔)의 친구였던 정영(程嬰)의 임기응변, 그리고 또 조삭(趙朔)으로부터 조가(趙家)재흥(再興)의 부탁을 받았던 한궐(韓厥)의 지원을 받아서 산속으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그 후, 성인이 되었던 조무(趙武)는 한궐(韓厥)의 주선으로 당시, 병으로 누워있던 경공(景公)을 배알했고, 그 자리에서 한궐(韓厥)이 경공(景公)을 설득해서 조가(趙家)의 부흥을 허락받았다.

 참고: 경공(景公-?부터 기원전 581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였고(在位:기원전 600년부터 기원전 581년) 성(姓)은 희(姬), 휘(諱)는 거(據), 성공(成公)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말년에 불치병을 얻어서 죽었는데, 그래서 그때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이란 뜻의 <병고황(病膏肓)에 들었다>라는 고사(故事)를 남기고 죽었다.

 그러자 그 후, 조무(趙武)는 한궐(韓厥)과 난서(欒書)의 도움을 받아서 도안가(屠岸賈)를 척살했으며, 그것으로 가문의 원수를 갚았다. 그러자 한궐(韓厥)과 난서(欒書) 그리고 지앵(智罃)과 사섭(士燮) 그리고 중행경(中行庚)으로부터 축사(祝辭)를 받았지만, 그러나 그 직후에 정영(程嬰)이 <지하에서 계신 조장자(趙荘子-趙朔)와 공손저구(公孫杵臼) 님께 이 사실을 고하고 싶다!>라고 말을 하고 자해(自害)하고 호읍(號泣)했다. 그 다음 기원전 573년, 조무(趙武)는 도공(悼公)으로부터 신군(新軍)의 장에 임명되었으며, 그것으로 비로소 경(卿)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기원전 560년에는 한궐(韓厥)의 아들이었던 한기(韓起)의 추거(推擧)를 받아서 상군(上軍)의 장으로 승격했지만, 그러나 과거 한번 멸족의 위기를 겪었던 교훈을 생각해서 교만하지 않았고, 덕을 베풀었으며, 항시 온화한 풍모를 유지했으며, 스스로 한발 물러나는 자세로 살았다.

 참고: 도공(悼公-기원전 587년부터 기원전 559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였고, 재위는 기원전 573년부터 기원전 559년까지였다. 그리고 양공(襄公)의 증손(曾孫)이었으며, 아버지는 혜백담(惠伯談)이었다. 그리고 즉위하기 전에는 주(周)의 왕도(王都)에서 학문을 쌓았기 때문에, 그래서 주자(周子) 또는 손주(孫周)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는 난서(欒書)와 순언(荀偃)의 주도에 의해서 여공(厲公-亂政으로, 자객 程滑에게 죽음)이 죽자, 진(晋)으로 와서 군주가 되었다. 그 후, 현정(賢政)을 펼쳐서 나라를 잘 이끌어갔지만,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리하여 진(晋) 최후의 명군(名君)으로 칭송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시대에 왕실의 힘은 오히려 약해져서 귀족들의 힘은 증대되었다.

 아무튼 또 그 후, 기원전 548년에는 정경(正卿), 중군(中軍)의 장이 되었으며, 차경(次卿)의 한기(韓起)와 상담역이었던 숙향(叔向)과 함께, 당시 남쪽의 대국이었던 초(楚)와의 강화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546년 7월에 미병(弭兵)에서 회맹을 개최했고, 그 결과 초(楚)와 제(齊) 그리고 정(鄭), 송(宋) 등의 주변제국과의 강화를 실현시켰으며, 그것으로 진(晋)의 명재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기원전 541년이 되자 그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그러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조무(趙武)는 동년(同年) 12월 1일에 선조(先祖)들의 합제(合祭)를 치렀으며, 그리고 그 직후였던 12월 7일에 사망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향년 57세였다. 그러자 시(諡)로 헌문(獻文)이 내려졌으며, 그래서 조문자(趙文子)로도 불렸다.

 ♠ 조성(趙成-생몰불상)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성(成), 시(諡)는 경(景)이었다. 그래서 조경자(趙景子) 또는 조경숙(趙景叔)으로도 불렸고, 조무(趙武)의 아들, 조앙(趙鞅)의 아버지였다. 그는 기원전 541년에 부(父) 조무(趙武)가 죽자 그 뒤를 이어서 당주(當主)가 되었지만, 그러나 다른 조(趙)씨(氏)들에 비해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직급은 차경(次卿) 중군(中軍)의 좌(佐)까지 올랐기 때문에, 그래서 능력은 있었던 인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기원전 533년에는 진(晋)과 주(周)의 대부(大夫)들에 의한 영지(領地) 싸움이 일어나려고 했을 때, 그가 들어가서 중개를 했으며, 결국 화해시켰던 등, 나름대로의 확약도 펼쳤던 인물이었다.

 ♠ 조앙(趙鞅-?부터 기원전 463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시(諡)는 간(簡)으로 해서 조간자(趙簡子)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조성(趙成)의 아들이었으며,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아버지였다. 조앙(趙鞅)은 6대째의 당주였고, 처음에는 직급도 무슨 좌(佐)에 머무르는 등,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떤 때, 그 진(晋)에서 제일 현자(賢者)라고 이름이 높았던 숙향(叔向)에게 이런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다. <노(魯)의 재상 중손멸(仲孫蔑)은 자신을 위해서 싸우다 죽을 수도 있을 부하가 다섯 명이나 있다는데, 저에게는 어째서 그런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는 것입니까?!> 그러자 숙향(叔向)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것은 너에게 그런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바라기만 한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주마!(그 역할을 맡겠다는 의미)>

 참고: 양설 힐(羊舌肸-생몰불상)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양설(羊舌), 휘(諱)는 힐(肸), 자(字)는 숙향(叔向), 양설 직(羊舌職)의 아들이었고, 동모형(同母兄)에 양설 적(羊舌赤-伯華)이 있었으며, 이모제(異母弟)에 양설 호(羊舌虎-叔羆)가 있었다. 그리고 평공(平公)의 스승을 맡았고, 해박(該博)한 인물로 알려졌던 현인(賢人)이었다.

 참고: 평공(平公-?부터 기원전 532년. 재위:기원전 559년부터 기원전 532년)은 도공(悼公)의 아들이었고, 위의 숙향(叔向) 등, 현신(賢臣)들의 보좌를 받아서 패권을 유지했으며, 별 큰 허물없이 진(晋)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 도공(悼公)이 태자 표(彪-平公)의 성인식을 마치고 대상(臺上)에 올라서 도시(首都)를 내려다보다가 <아아, 즐거운 곳이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여제(汝齊)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저곳이 아무리 즐거운 곳이라고 하더라도, 덕의(德義)를 행하는 즐거움보다는 못합니다> 그러자 또 도공(悼公)이 <무엇을 덕의라고 말하는 것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또 여제(汝齊)가 <제후들의 행위를 보고, 선사(善事)를 행하고, 악사(惡事)를 경계하는 것, 그것이 덕의(德義)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또 도공(悼公)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덕의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요?> 그러자 또 여제(汝齊)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답을 했다. <양설 힐(羊舌肸)이 제국(諸國)의 역사들을 전부다 꿰고 있습니다> 그러자 도공(悼公)은 숙향(叔向)을 태자의 스승에 임명했다. 하지만 그 후, 도공(悼公)은 요절했고, 그 자리를 평공(平公)이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는 슬픈 노래를 좋아했고, 여색(女色)을 밝히는 등, 군주로서의 자질에 결점을 드러냈다. 그러자 숙향(叔向)이 그를 지도해서 진(晋)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으며, 그러자 그 후로도 평공(平公)은 큰 허물없이 정치를 펼쳤다. 그러자 관인(官人) 반수(半數)가 숙향(叔向)의 덕을 기렸으며, 특히 초(楚)의 영윤(令尹)이었던 자목(子木)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진(晋)이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는 바로 숙향(叔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초(楚)에는 그런 인물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초(楚)는 진(晋)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일화로, 어느 때 정경(正卿)이었던 한기(韓起)가 자신의 곤궁(困窮)함을 탄식하자 숙향(叔向)은 그것을 축하했다. 그러자 또 한기(韓起)가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러자 또 숙향(叔向)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난(欒)씨와 극(郤)씨는 부유하게 살았지만 거만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한을 사서 결국에는 망하고 말았소! 그리고 당신은 현재 가난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덕의(德義)를 펼칠 수가 있는 것이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축하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자 또 한기(韓起)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아, 내가 그것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깨우쳐주신데 가슴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또 기원전 540년에 제(齊)의 안영(晏嬰)이 사자로 진(晋)에 왔을 때,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런데 그때 안영(晏嬰)이 이렇게 말을 했다. <지금 제(齊)의 정권은 모두 전(田)씨(氏)의 손아귀로 들어갔소!> 그러자 숙향(叔向)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 진(晋)도 말세(末世)이긴 마찬가지요! 진(晋)의 정치는 모두 경(卿)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기원전 536년에 정(鄭)의 자산(子産)이 형정(形鼎-成文法)을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숙향(叔向)은 <정(鄭)은 이제 곧 망할 것이다! 무릇, 정치란 사람을 보고 행하는 것이거늘, 그러나 법률이 만들어진다면 그때부터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법(法)만 보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나라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예언을 했다. 그렇듯, 숙향(叔向)은 비록 경(卿)의 지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평공(平公)의 측근에서 상담역을 맡으면서 진(晋) 정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조앙(趙鞅)은 그렇게 숙향(叔向)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고, 그리고 그 후였던 기원전 520년에 주(周)의 경왕(景王)이 사냥을 하다가 심장발작을 일으켜서 사망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러자 태자 맹(猛-나중의 悼王)과 왕의 서자(庶子)였고, 서형(庶兄)이었던 왕자 조(朝) 사이에 후계를 타투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주(周)의 수도는 잿더미가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조앙(趙鞅)은 태자 맹(猛)의 요청으로 진군(晋軍)을 이끌고 왕자 조(朝)의 군대를 쳤으며, 그리하여 기원전 516년에 태자 맹(猛)이 즉위했고, 조앙(趙鞅) 등은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기원전 514년에 조앙(趙鞅)은 당시, 정경(正卿)에다 중군(中軍)의 장이었던 위서(魏舒-晋의 무장, 정치가)와 다른 육경(六卿)의 꾐에 빠져서 공족(公族) 양설(羊舌-叔向의 아들 家系) 씨(氏)와 기(祁-祁奚・祁午의 子의 가계) 씨(氏)를 멸해버렸고, 그것으로 그 땅에 자식들을 대부(大夫)로 배치시켜서 세력을 공고히 했던 등, 조화를 목적으로 했던 자신의 조부(祖父) 조무(趙武)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513년에, 그는 중행인(中行寅)과 함께 범선자(范宣子-士匄)가 만들었던 법을 솥(鼎)에 새겨 넣었던 형정(形鼎)을 공개했으며, 그러자 또 그것이 진(晋)에서는 최초의 성문법이 되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501년에는 노(魯)에서 많은 악명(惡名)을 떨치고 진(晋)으로 망명해왔던 양호(陽虎)를 전 가신(家臣)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자신의 부하로 삼았는데, 그러자 양호(陽虎)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나중에 조앙(趙鞅)을 위해서 분투했다.

 참고: 양호(陽虎)는 노(魯)의 정치가였고, 한때 노(魯)의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505년에는 공자(孔子)를 초빙해서 자기 아래 벼슬시키려고 했고, 그러자 또 공자(孔子)도 그럴 의향이 있었지만, 그러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후, 권력투쟁에서 져서 노(魯)에서 추방되었으며, 진(晋)으로 가서 조앙(趙鞅)의 부하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조앙(趙鞅)을 위해서 위(衛) 공실(公室)에 개입하면서 암약(暗躍)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소식이 두절되었다.

 아무튼 또 그 후의 어느 때, 조앙(趙鞅)은 고포자경(姑布子卿)이라는 관상의 명인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자기 자식들의 관상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고포자경(姑布子卿)이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에 장군에 버금갈 관상을 가진 자식은 없습니다> 그러자 조앙(趙鞅)은 낙담했지만, 그러나 사실, 조앙(趙鞅)은 그때 자신의 막내는 보여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막내도 보여주었는데, 그러자 고포자경(姑布子卿)은 그 막내를 보았던 순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바로 이 아들이 장군에 버금갈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바로 조무휼(趙無恤)이었고, 그리고 또 조앙(趙鞅)은 당초 장자였던 백노(伯魯)에게 후계를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조무휼(趙無恤)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후계자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또 어떤 때, 조앙(趙鞅)은 큰 병에 걸려서 꼬박 이틀하고도 반나절을 수면상태에 빠진 적도 있었는데, 그러자 또 당시 명의였던 편작(扁鵲)이 그의 집으로 가서 진찰을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그는 꿈을 꾸었다고 했으며, 그 꿈속에서 그는 천제(天帝)와 함께 백신(百神)들과 놀았다고 한다.

 참고: 편작(扁鵲-생몰불상)은, 중국 전국시대의 의사로, 특히 한(漢) 이전의 반(半) 전설적인 명의로 알려져 있으며, 성(姓)은 진(秦). 이름은 월인(越人)이었고,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장상군(長桑君)으로부터 의술을 배운 후에 환자의 오장을 투시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행동과 인격, 진료, 치료에 관한 것은 한비자(韓非子)와 사기(史記) 등에 일화로 남아있으며, 그 후의 한방(漢方)의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를 편작(扁鵲) 또는 기파편작(耆婆扁鵲)으로 부르고 있으며, 그것이 이제는 명의의 대명사가 되어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의하면 <그는 발해(渤海)군(郡), 정(鄭)의 사람이라고 했고, 성(姓)은 진(秦) 이름은 월인(越人)>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고대의 역사가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이론을 제기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또 <양자법언(揚子法言)>이나 <회남자(淮南子)> 등에서는 <편작(扁鵲)은 노(盧)의 사람>이라고 했고, 청(淸) 대의 사마정(司馬貞)과 서광(徐廣)은 <하북성(河北省)의 임구(任丘)현 사람>이라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가 전적(典籍)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던 것은 전국시대 말의 한비자(韓非子-紀元前295年에서 紀元前233年)에서였지만, 그러나 또 사마천(司馬遷)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의하면, 그가 활동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것은 기원전 655년으로, 곽(郭)이라는 소국(小國)이 멸망했을 때라고 했고, 그 활동이 끝났던 것은 기원전 350년, 진(秦)이 함양(咸陽)으로 천도했을 때였다고 해서, 그것을 서술한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약 300년이나 살았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또 그의 행동범위도 아주 광대했으며, 그 햇수도 상당히 길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것은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행했던 일이었으며, 그래서 또 어떤 특정의 학파(學派)에 의한 활동이었지 않았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랬던 그가 앞의 그 조앙(趙鞅)의 진찰도 했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 상황이 진(秦)의 목공(穆公)의 상태와 흡사했었고, 그래서 또 그때 목공(穆公) 역시도 천제(天帝)를 만난 꿈을 꾸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편작(扁鵲)은 조앙(趙鞅)의 상태를 보고나서 3일 이내에 깨어날 것이라고 진단을 내렸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그러자 조앙(趙鞅)은 편작(扁鵲)에게 전지(田地)4만(萬)묘(畝 또는 무. 그리고 1묘=30평이므로 ∴ 120만평)를 내렸다고 한다.

 아무튼, 조앙(趙鞅)은 그 꿈속에서 두 마리의 곰을 죽였는데, 그러자 천제(天帝)가 기뻐했으며, 그래서 그에게 두 개의 상자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천제(天帝) 옆에는 1명의 남자아이가 서 있었는데, 그러자 또 천제(天帝)는 적(狄-오랑캐)의 개 한 마리를 그에게 맡기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아이가 장년(壯年)이 되면 돌려주도록 하라> 하지만 조앙(趙鞅)은 그 말의 의미를 잘 알 수가 없었는데, 그러자 또 천제(天帝)가 한 남자를 자신에게 보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게 해주었다. <첫째, 진(晋) 내에 있는 경(卿)들 중에서 두 집을 토벌할 것. 그리고 둘째는 조앙(趙鞅)의 아들이 적(狄)의 땅에서 두 나라와 싸워서 이기게 됨. 그리고 천제(天帝) 옆에 서있던 아이는 바로 당신(趙鞅)의 아들이며, 적(狄)의 개는 북방(北方)의 대(代)라는 지역을 통치할 군주, 그러나 나중에 당신의 아들이 그곳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조앙(趙鞅)과 조무휼(趙無恤)의 장래를 예견했던 것이었고, 그리고 또 그 두 집을 토벌하라고 했던 것은 중행(中行)씨(氏-荀氏 本家)와 범(范)씨(氏-士氏 分家)를 멸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조무휼(趙無恤)이 적(狄)에서 두 나라와 싸워서 이기게 될 것이라고 했던 것은 조무휼(趙無恤)이 대(代)를 공격해서 멸한 후 진(晋)의 경(卿) 중 하나였던 지(知)씨(氏-荀氏 分家)를 멸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후, 진(晋)에서도 그때까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육경(六卿)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으며, 그러자 조앙(趙鞅)은 중행(中行)가(家)의 당주였던 중행인(中行寅)과 중행인(中行寅)의 처가였던 사(士)가(家)의 당주 사길사(士吉射-范吉射)와 적대관계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晋) 공실(公室)을 명목상의 후견인으로 하고, 조가(趙家), 위가(魏家-魏侈), 지가(智家-智轢), 한가(韓家-韓不信) 그 4가(家)가 합동해서 그 두 가문을 멸했으며, 그리하여 그때부터 진(晋)에서는 제후(諸侯)에 필적할만한 광대한 토지를 소유했던 그 네 가문이 대두(擡頭)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한편, 공자(孔子)는 그 일과 함께 상기(上記)의 법을 공개했던 일 등에 반감을 품고는 자신의 저서 춘추(春秋)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다. <조앙(趙鞅), 진양(晋陽)에서 모반(謀反)하다> 아무튼 그 후, 조앙(趙鞅)은 조무휼(趙無恤)에게 자신의 뒤를 맡기고 죽었다. 그러자 그에게 시(諡)로 간(簡)이 내려졌으며, 그 후로 조간자(趙簡子)라고 부르게 되었다.

 ♠ 조무휼(趙無恤-?부터 기원전 425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무휼(無恤), 시(諡)는 양(襄), 그래서 조양자(趙襄子)로도 불렸으며, 조앙(趙鞅)의 말자(末子)였다. 그리고 고포자경(姑布子卿)으로부터 대성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을 후에 조앙(趙鞅)의 후계자로 점 찍혀졌지만, 그러나 그때 그의 어머니는 적족(翟族=)출신으로, 신분도 낮았던 데다가 그는 말자(末子)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은 곧 잊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조앙(趙鞅)이 자신의 자식들을 모두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내가 보물(符) 하나를 상산(常山)의 정상에 숨겨놓았다. 그것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포상을 내리겠다!>

 참고: 상산(常山)은 항산(恒山)을 의미하며, 중국의 도교(道敎) 오악(五嶽) 중 하나로, 북악(北岳) 즉, 북쪽에 있는 산이다. 그리고 그 위치는 산서성(山西省) 대동시(大同市)에 있으며, 최고(最高)표고(標高)는 2,016m이다. 그리고 그 산은 중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최고로 높은 산이며,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 장과로(張果老)가 살고 있는 산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참고로, 오악(五嶽)은 다음과 같다. 北岳 恒山 / 西岳 華山 / 中岳 嵩山 / 東岳 泰山 / 南岳 衡山

 아무튼, 그러나 그것을 발견한 자식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조무휼(趙無恤)만 다시 돌아와서 그것을 찾았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조앙(趙鞅)이 그것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또 조무휼(趙無恤)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 산의 정상에 오르니 그 아래에 대(代)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러자 저는 그것을 보고 내가 저곳을 가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던 조앙(趙鞅)은 자신의 후계자로 조무휼(趙無恤)을 결정했다. 그러자 장형(長兄)이었던 백노(伯魯)는 조앙(趙鞅)의 결정에 따랐으며, 그 후로도 조무휼(趙無恤)을 따뜻하게 대하면서 보좌했다. 그러자 또 조무휼(趙無恤)은 어렸을 때부터 잘 따랐던 백노(伯魯)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후에 백노(伯魯)는 병이 나서 죽어버렸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조앙(趙鞅)마저 죽어버렸고, 그러자 조앙(趙鞅)의 뒤를 이었던 조무휼(趙無恤)은 상복(喪服)을 입은 채로 대(代)의 왕<당시, 조무휼의 매형(妹兄=姊兄)>을 위한 연회를 열고는 그를 초대했다. 그러자 대왕(代王)이 그 연회에 참석을 했는데, 그러자 조무휼(趙無恤)은 그들을 토벌하고는 그 대(代)를 찬탈(簒奪)해서 손에 넣었다. 그러자 또 자기 남편이 조무휼(趙無恤)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의 누나는 조무휼(趙無恤)을 실컷 매도(罵倒)하고는 자살을 해버렸다. 그러자 그 후, 조무휼(趙無恤)은 그 땅에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장형(長兄) 백노(伯魯)의 아들 조주(趙周-成君)에게 맡겨서 다스리게 했고, 그것으로 백노(伯魯)에 대한 은혜를 갚았다. 그리고 그 후, 진(晋)의 육경(六卿) 중에서 최대의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지(智)씨(氏)의 당주 지요(智瑤-智伯・智襄子)가 위(魏)씨(氏)의 당주 위구(魏駒-魏桓子)와 한(韓)씨(氏)의 당주 한호(韓虎-韓康子)의 세력을 인솔하고는 조무휼(趙無恤)의 본거지였던 진양(晋陽)으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조무휼(趙無恤)은 한때 지요(智瑤)의 수공(水攻-강물을 막아서 고립시키는 것)에 낙성(落城)의 위기까지 겪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때 조무휼(趙無恤)은 위구(魏駒)와 한호(韓虎)에게 <지요(智瑤)는 욕심이 아주 많은 자이기 때문에, 내가 죽고나면 그 다음은 바로 당신들 차례가 될 것이요!>라고 말을 하면서 그들을 회유했고, 그러자 그 후에 전세는 대역전되어서 지요(智瑤)는 패사(敗死)했다. 그러자 또 기원전 453년, 그때부터 진(晋)은 사실상 조(趙)와 위(魏) 그리고 한(韓)으로 3분(分)되었고, 그리하여 바로 그때부터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아무튼 그리고 또 덧붙여서, 조무휼(趙無恤)은 그 후에 지요(智瑤)의 구신(舊臣)이었던 예양(豫讓)에게 두 번이나 암살기도를 당했지만, 그러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그러자 예양(豫讓)은 조무휼(趙無恤) 앞에서 자결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기(史記)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기록이 되어 있으며, 하지만 여기서는 이야기가 자꾸 길어지는 관계로 소개는 생략하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따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어쨌든 또 그 후, 조무휼(趙無恤)은 장자(長子) 백노(伯魯)의 은혜를 다시 갚기 위해서 조주(趙周)를 당주에 추대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조주(趙周)도 빨리 세상을 떴기 때문에,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이었던 대군(代君) 조완(趙浣)을 차기 당주로 세웠다. 그리고 기원전 425년에 그는 사망했으며, 그 후에 양(襄)이란 시(諡)가 내려졌다. 하지만 또 그 후, 사기(史記)의 조세가(趙世家)에 의하면, 조무휼(趙無恤)은 공동 씨(空同氏-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戎의 一派)의 딸과의 사이에서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런데 조무휼(趙無恤)이 나중에 형(兄)의 손자였던 조완(趙浣-献侯)을 후계자로 삼고는 자기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일족(一族)으로서 군주를 모시도록!> 그러자 그에 불만을 가졌던 그의 아들들은 그가 죽자 조완(趙浣)을 쫓아냈으며, 그 중에서 장형(長兄)을 내세워서 당주로 삼고는 조(趙)를 다스렸다. 그러자 또 조무휼(趙無恤)의 유지(遺志)를 받들지 않았던 그 불효행위에 대해서 백성들은 비난했고, 그 결과로 그 5명의 자식들을 모두 처형되었으며, 조완(趙浣)은 다시 당주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조무휼(趙無恤)의 유지(遺志)를 지켜졌다고 한다.





  <趙 氏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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