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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2)
연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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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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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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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時代 시작
※ 춘추시대란 중국의 시대구분 중 하나이며, 기원전 770년 주(周)의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게 살해당하고 낙읍(洛邑=成周=洛陽-河南省)으로 도(都)를 옮겼을 때부터 시작해서, 진(晋)이 삼국(三國=韓, 魏, 趙)으로 분열했던 기원전 403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춘추(春秋)란 이름은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하나인 ‘춘추(春秋)’에 기술되었던 '시대(時代)'란 말의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하며, 그리하여 그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아울러서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거나, 또는 '동주(東周)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경계 지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가들마다 의견이 나뉘고 있다.(더욱 상세한 것은 참고 6-15부터 6-41까지 참조바람)

<춘추시대의 개념 지도> ※ 사진 설명 룽먼석굴
중국 허난 성(河南省) 뤄양(洛陽)의 남쪽에 있는 석굴 사원으로
윈강 석굴과 쌍벽을 이루는 중국의 대표적인 석굴 사원
북위 때 만들기 시작해서 수·당으로 이어졌고 송나라에서 끝났으나
그 주요 부분은 5세기 말에서 7세기 후반에 이르는
불교 미술의 전성기에 조형되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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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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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 탄생(~479)
※ 기원전 551년 9월 28일-기원전 479년 4월 11일
춘추시대 중국의 사상가이며, 유가(儒家)의 시조
세계 삼성(三聖)으로도 불린다(後述)

<孔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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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500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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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오르도스 청동기문화(青銅器文化) 전성기
※ 오르도스문화(Ordos文化)
중국 內몽골 오르도스 지방에 있었던 구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 홍적세 말기의 황토 퇴적층에서 석영(石英), 수석(燧石-부싯돌) 등을 사용해서 만든 첨두기(尖頭器-끝이 뾰족한 도구)와 칼 등이, 그리고 하이에나와 타조 그리고 낙타 등의 온난계 동물의 화석도 나왔다.
※ 청동기문화
기원전 1,000년에서 200년 무렵까지 오르도스에서 장성(長城)에 걸쳐서 번영하였다. 그리고 오르도스는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중남부에 있는 고원 지역이며, 북쪽과 서쪽은 황허(黃河) 강이, 남쪽은 만리장성이 둘러싸고 있다. 예로부터 한족(漢族)과 북방 유목민족의 쟁탈지였으며, 명나라 때는 몽고의 오르도스 부(部)가 점거했던 바 있다. 높이는 1,500미터.
※ 오르도스청동기(Ordos靑銅器)
오르도스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를 말하며, 그것은 또 중국의 은(殷)나라에서 남북조에 이르는 시기에 북방 유목민들이 썼던 무기들과 마구(馬具), 장신구 등으로, 사실적인 동물무늬가 특징이다.

<기원전 3-1세기의 인물상. 대영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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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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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春秋)이 삼국(韓・魏・趙)으로 분열되고, 전국시대가 시작됨
※ 진(晋-기원전1100년경부터 기원전378년)은, 현재의 중국 산서성(山西省) 지역에 주(周)대, 춘추(春秋)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국가이며, 처음에는 당(唐)이라고 불렸지만, 이후 진으로 개명했다. 국성(國姓)은 희(姬), 수도(首都)는 익(翼)에서 곡옥(曲沃) 다음 강(絳)으로 바뀌었다.
<참고 : 아래 그림에서 3 나라의 분열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三晋지도>
※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春秋) 다음의 시대이며,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위(魏)·조(趙) 3개의 나라로 나뉜 후, 기원전 221년에 진(秦)에 의해 다시 통일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그 이름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해졌으며, 그리고 또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그 기간의 구분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해서는 현재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전국열국도>
※ 참고로 <戰國7雄>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韓 (紀元前403年 - 紀元前230年)
趙 (紀元前403年 - 紀元前228年)
魏 (紀元前403年 - 紀元前225年)
楚 (? - 紀元前223年)
燕 (紀元前1100年頃 - 紀元前222年)
斉 (紀元前386年 - 紀元前221年)
秦 (? - 紀元前206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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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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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商鞅)의 변법(変法-국정개혁)이 실시(実施)됨
※ 상앙(商鞅-?부터 기원전 338년)은, 중국(中國) 진(秦)나라의 정치가(政治家)였으며, 다른 이름은 위앙(衛鞅) 또는 공손앙(公孫鞅).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으로 법학을 공부했고, 진(秦)의 효공(孝公)을 섬겼으며, 부국강병책을 단행(斷行)해서 뒤에 진(秦)이 전국(全國)을 통일(統一)하는 기틀을 마련했다.(1,2차에 걸쳐서 단행되었으며, 더욱 상세한 참고 6-40 참조바람) 효공(孝公) 22(340 B.C.)년 상(商)에 봉함을 받았으나 효공이 죽은 뒤에는 중신들에게 원한(怨恨)을 사서 극형에 처해졌다.

<상앙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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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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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天下)를 통일함.
전국시대 막을 내림.
<진의 판도-기원전210년>
※ 진(秦-기원전 778년부터 기원전 206년)은, 중국의 왕조 중 하나이며, 주(周)대, 춘추(春秋)시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서 존재했었고,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후, 기원전 206년에 멸망했다. 국성(國姓)은 영(嬴), 통일 후의 수도는 함양(咸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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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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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始皇帝) 동방순행(東方巡行) 中 사거(死去)

※ 시황제<始皇帝-기원전 259년 정월 1월(? 또는 10월)부터 기원전 210년 9월 10일(秋7월)>는, 진조(秦朝)의 황제였으며, 성(性)은 영(嬴), 씨(氏)는 진(秦), 시호(諱)는 정(政).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고 있고, 진(秦)왕으로 기원전 246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는 또한 중국 사상 처음으로 황제로 칭해졌던 인물이었다.
<약력(略曆)>
1. 출생(出生)
시황제의 아버지 자초<子楚=後의 장양왕(莊襄王)>는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인질(人質)의 처지에 있었으나, 대상(大商) 여불위(呂不韋-참고 7-1참조)의 도움을 받아서 효문왕(孝文王-秦)의 태자(太子)가 되었고, 나중에 진왕(秦王)에 즉위하였다.

<한단의 위치도>
그리고 그 여불위는 그 전에 자신의 애인(愛人)이었던 여인을 자초에게 양도했는데, 그 후에 태어났던 사람이 바로 시황제 정(政)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초에게로 가기 전에 회임을 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로써 여불위가 그의 親父인가 하는 의심이 강하게 일었다. 그것은 또 사기(史記)의 <여불위열전>에도 소개가 되었을 정도여서, 그래서 그때 그것이 얼마나 크게 소문이 났었던가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정작 <진시황본기>에는 기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으로 또 사마천(司馬遷)이 양론병기(兩論倂記)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사마천=후술>

<반고=후술>
그러나 그 후의 반고(班固)가 쓴 사기(史記-漢書)의 <진시황본기수록(秦始皇本紀收錄)> 상서부(上書部)에서는 政을 <여정(呂政)>이라고 표기해놓았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것으로 보아서는 한조(漢朝)가 진조(秦朝)의 혈연관계를 부정하여, 그것으로 진조(秦朝)의 정통성을 부정하려 했다는 의도가 강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또 동시대(同時代)의 <춘신군(春申君)>에게서도 그와 비슷한 고사(故事)가 전해져오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보아서는 또 <그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역사가도 있다. 그리고 또 그와 관련해서는 <그때, 자초가 여불위의 애인에게 이미 회임을 시켜버렸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불위가 자초에게 그녀를 보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역사가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소문이 나게 된 배경에는 또 <당시, 그를 아주 미워했던 육국(六國)의 유민(遺民)들이 그를 흠집 내고자 그런 풍문을 널리 퍼뜨렸던 것이 아니었겠는가>하는 의견도 있다고 해서, 그래서 그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기(史記)에서도 그의 용모와 성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두었다.
<그는 몹시 거만하고, 눈초리는 길게 째졌으며, 그 목소리는 마치 승냥이와도 같고, 또 은애(恩愛)의 정(情)도 부족한데다, 호랑이나 이리와 같이 잔인한 마음의 소유자이다>
2. 즉위(卽位)
기원전 258년, 정(政)이 탄생한 직후에 진(秦)이 조(趙)를 공격해서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그러자 조(趙)는 그 보복으로 자초(子楚)를 처형시키려고 했는데, 그러자 여불위(呂不韋)가 나서서 자초(子楚)를 도망치게 도왔다. 하지만 그때, 정(政) 모자(母子)는 한단(邯鄲)에 남겨졌다. 그 후, 기원전 251년에 자초(子楚)가 귀국한 후, 소양왕(昭襄王)이 훙거(薨去)하자, 효문왕(孝文王)이 그 뒤를 이었고, 그러자 자초(子楚)는 그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또 그것을 알게 된 조(趙)나라는 정(政)의 모자(母子)를 정중하게 진(秦)나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다음 기원전 250년, 효문왕(孝文王)이 훙거하고 자초(子楚)가 즉위하자 여불위(呂不韋)는 승상(丞相)이 되어서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46년, 장양왕(莊襄王)이 훙거하자, 당시 13세였던 정(政)이 진왕(秦王)에 즉위했다. 하지만 즉위 당초 여불위(呂不韋)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정(政)은 어쩔 수 없이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 정(政)은 남동생이었던 성교(成蟜)의 모반(謀反)과 친모(親母)의 애인이었던 노애(嫪毐-참고 7-1참조바람)의 반란을 진압한 후, 기원전 238년에는 여불위(呂不韋)마저 먼 곳으로 보내버리고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그 후 정(政)은 한(韓)의 공자(公子)였던 한비(韓非)가 기술했던 <한비자(韓非子>에 감동해서 그의 사상을 도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었으며, 한비(韓非)의 동문이었던 이사(李斯-참고 7-1 참조바람)가 한비(韓非)를 자살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그래서 정(政)은 하는 수없이 이사(李斯)를 중신으로 채용했다. 그 후, 정(政)은 이사(李斯)의 주도(主導)로 법가(法家)사상을 정치에 도입했고, 이어서 군주독재(君主獨裁)와 군현제(郡縣制) 그리고 엄벌주의(嚴罰主義) 등을 추진했으며, 그로써 강력한 독재체제를 쌓았다. 그리고는 또 진군(秦軍)의 소수정예(少數精銳)화도 단행했으며, 원정(遠征)으로서는 장수(將帥)로 왕전(王翦-참고 7-2 참조)과 왕분(王賁) 부자(父子) 그리고 이신(李信-참고 7-2 참조) 등을 기용해서 한(韓)·조(趙)·위(魏)를 차례로 멸했다.

<그림 설명: 左는 秦王, 右는 荊軻, 중앙은 秦舞陽, 아래는 번어기의 머리를 담은 상자>
기원전 227년, 연(燕)의 태자 단(丹-참고 7-2 참조)이 이웃나라였던 조(趙)가 진(秦)에 멸해졌던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정(政)을 암살하기 위해서 형가(荊軻)를 자객으로서 보냈다. 그러자 그 형가(荊軻)는 진군(秦軍)의 개혁에 반대하다 가족이 모두 처형당하고 진(秦)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던 장군 번어기(또는 번오기-樊於期)의 머리를 진상품으로 하고, 사자(使者)의 자격으로 진(秦)의 왕 정(政)을 배알(拜謁)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했던 두루마리(지도) 속에 숨겼던 칼로 정(政)을 습격했다. 그러자 궁전 내에서는 무기소지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때 政의 신하들은 그것을 보고서도 저지하지 못했는데, 그런데다 또 그때 政 자신은 장검을 차고 있었지만, 그러나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칼을 뽑지 못하고 절명에 처할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또 그때, 마침 政의 시의(侍醫)가 임기응변을 발휘했고, 그러자 政은 그 틈을 타서 장검을 뽑아 형가(荊軻)를 살해했다. 그 후 정(政)은 그 일에 격분해서 연(燕)을 쳤고, 그로써 연(燕)도 멸했다. 하지만 기원전 225년, 진(秦)은 당시 최대의 적국이었던 초(楚)도 공격을 했지만 실패했고, 그러자 반대로 이번에는 초군(楚軍)이 진(秦)을 침공해왔다. 그러자 또 정(政)은 당시 이미 은퇴해있던 왕전(王翦)을 장군으로 해서 전권을 맡겼고, 그러자 또 왕전(王翦)은 초군(楚軍)을 격퇴한 후 그대로 초(楚)로 쳐들어가서 항연(項燕-項羽의 조부-참고 7-2 참조)이 인솔하던 초군(楚軍)을 괴멸시켜서 초(楚)를 멸망시켰다. 그리하여 기원전 221년에, 진(秦)은 전국(戰國) 육국(六國) 중 그때까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제(齊)까지 멸하고는 중국통일을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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