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그 후, 유방(劉邦)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했을 때, 전장(戰場)의 공(功)이 많았던 조참(曹參)이 제일(第一)이란 목소리가 많았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은 소하(蕭何)를 제일(第一)로 꼽았는데, 그것은 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계속해서 고전(苦戰)하고 있었을 때, 그 뒤에서 모든 병참(兵站)을 책임졌던 소하(蕭何)가 없었다면 현재(現在)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이어서 한신(韓信)을 초왕(楚王)에 봉하고, 팽월(彭越)을 양왕(梁王)에 봉했으며, 장량(張良)에게는 3만호의 영지를 주려고 했지만, 그러나 장량(張良)은 그것을 고사(固辭)했다.

 그 후, 또 유방(劉邦)은 소위 <옹치(雍齒)의 건(件)>을 해결하고는, 가신(家臣)들과 주연(酒宴)을 벌이고 있었을 때, 그곳에 앉았던 가신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천하를 취하고, 項羽는 천하를 잃은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보시오!> 그러자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이렇게 대답했다. <項羽는 오만하고 사람을 경시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仁慈로써 사람을 대했습니다. 하지만 또 폐하는 功績이 있는 자에게는 아낌없이 영지를 내려주는 것으로 천하의 사람들과 이익을 나눕니다. 그러나 項羽는 賢者를 시기했고, 공적이 있어도 恩賞에는 인색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項羽가 천하를 잃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이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公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策略에서는 張良을 따를 수가 없고, 兵站에 관해서는 蕭何를 따르지 못하며, 전쟁에서는 韓信을 따를 수가 없소! 하지만 나는 그 세 사람을 잘 활용했소! 하지만 項羽는 范增 한사람도 제대로 다루지를 못했소. 그것이 바로 내가 천하를 취할 수 있었던 이유요!> 그러자 그곳에 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유방(劉邦)의 말에 감복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해 7월에 연왕(燕王) 장도(臧筡)가 반란을 일으켜서 유방(劉邦)은 친정(親征)해서 그것을 제압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로 자랐던 노관(蘆管)을 앉혔다. 그런데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그때부터 유방(劉邦)은 자신의 부하들과 제후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특히, 당시 한신(韓信)과 팽월(彭越) 그리고 영포(英布) 그 세 사람은 영지(領地)도 아주 넓었고, 또 백전연마(百戰鍊磨)의 무장들이었으므로, 그래서 자신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그런데 마침 또 그때 <한신(韓信)이 반란을 기도하고 있다!>라는 정보가 자신의 귀에 들어왔다. 그러자 군신(群臣)들은 한신(韓信)에 대한 질투도 있었고 해서였던지 그를 토벌할 것을 진언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진평(陳平)이 나서서 이렇게 말을 했다. <군사(軍事)적 천재인 한신(韓信)과 맞붙는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꼭 그를 잡으려고 하신다면, 그를 유인해서 포획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 안을 받아들였고, 이어서 자신이 순행(巡行)을 나갈 것이므로, 한신(韓信)에게도 올 것을 명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걱정 반(半)하며 종리매(鐘離眛)의 머리를 가지고서 유방(劉邦)에게로 갔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를 포획하고는 초왕(楚王)의 지위를 박탈하고,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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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신(韓信) 3

 중국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무장이었고, 유방(劉邦)의 휘하에서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했으며, 결국에는 유방(劉邦)의 패권(覇權)을 결정짓게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장량(張良)·소하(蕭何)와 함께 유방(劉邦)의 삼걸(三傑) 중 1명이었으며, 세계의 군사사상(軍事史上)으로도 명장(名將)중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그리하여 제왕(齊王)이 되었던 한신(韓信)에게 항우(項羽)도 우려를 느끼기 시작해서 무섭(武涉)이란 者를 사자(使者)로 보냈다. 그러자 무섭(武涉)은 한신(韓信)에게 초(楚)로 넘어올 것을 권유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유방(劉邦)은 항우(項羽)가 홍문(鴻門)에서 일부러 살려서 보내주었는데도, 오히려 항우(項羽)를 공격한 의리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유방(劉邦)은 장군 같은 분이 따를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옛날 자신이 항우(項羽)에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가 유방(劉邦)의 도움으로 제왕(齊王)에까지 오른 것을 생각하고는 그것을 즉석에서 거절했다. 그 후, 한신(韓信)은 또 괴통(蒯通)에게 다음과 같은 진언을 받았다. <천하의 요충지인 제(齊)의 왕이 된 지금, 한(漢), 초(楚)와 천하를 3분(分)하시고, 나중에 양자(兩者=漢, 楚)가 서로 싸우다 지쳤을 때, 홀로 분연(奮然)히 일어서신다면, 이 천하는 곧 왕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많은 고민을 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그것을 포기했다. 그러자 그에 따른 후환(後患)이 두려웠던 괴통(蒯通)은 스스로 광인(狂人) 행세를 하다가 그곳에서 도망쳤다. 그 후, 초한(楚漢)의 싸움은 광무산(廣武山)에서 지구전으로 이어졌고, 그리하여 완전히 지쳐버렸던 양군은, 일단 화의하고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또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유방(劉邦)은 곧 그 약속을 깼고, 이어서 한신(韓信)도 그 전쟁에 참가했으며, 항우(項羽)도 최후를 맞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202년, 항우(項羽)가 죽자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을 제왕(齊王)에서 초왕(楚王)으로 봉했다. 그러자 그 초(楚)는 한신(韓信)의 고향이었으므로, 그래서 그에게서는 대단한 명예(名譽)였으며, 또한 영전(榮轉)이 되었지만, 그러나 전체 성(城)의 수(數)에서는 오히려 70여 성에서 50여 성으로 줄어들었다. 그 후, 한신(韓信)은 고향 회음(淮陰)으로 돌아가서 개선(凱旋)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과거 자신에게 먹을 것을 베풀어주었던 그 노녀(老女)를 찾아가서 후하게 은혜를 갚았다. 그리고는 또 과거 자신에게 '고부(股夫)'란 오명(汚名)을 안겨주었던 그 남자를 찾아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때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그것이 쓸데없는 짓이란 것을 알고는 그만두었다. 그리고 또한 내가 그때 그 모욕을 참고 너의 가랑이 사이를 기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를 중위(中尉=치안유지의 직책)에 임명했다. 그리고 또 한때 자신이 식객(食客)으로 있었던 그 정장(亭長)에게는 <사람을 도와주기로 한번 마음을 먹었다면 제대로 끝까지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라고 훈계를 하고는 백전(百錢)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01년, 과거 잘 알고 지냈던 초(楚)의 장군 종리매(鐘離眛)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에게서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다 또 마침 그때 한신(韓信)의 이례적인 대 출세에 질투를 느꼈던 어떤 者가 <한신(韓信)에게 모반의 혐의가 있다!>라고 중상모략을 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그것에 대한 변명을 할 목적으로 종리매(鐘離眛)에게 자살을 재촉했다. (이하, 인물소개 鐘離眛 참조) 그렇게 해서 종리매(鐘離眛)도 죽었고, 그러자 또 한신(韓信)은 그의 머리를 가지고 유방(劉邦)에게 변명할 목적으로 찾아갔지만, 그러나 오히려 그곳에서 유방(劉邦)에게 바로 포획되었다. 그러자 또 한신(韓信)은 그 자리에서 과거 범여(范蠡)가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교토(狡兎-교활하거나,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양구(良狗-좋은 사냥개)는 삶겨지고, 하늘 높이 날던 새(鳥)가 떨어지면 좋은 활(弓)은 창고(倉庫)신세요, 적국(敵國)이 망하면 모신(謀臣-책략을 쓰는 신하)도 망(亡)하는 법(法)! 이미 천하(天下)가 정해졌으니, 나 또한 삶기고(煮) 말 것인가?!>

  ☆ 범여(范蠡-生沒不明)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월(越)의 정치가였고, 군인이었으며, 재상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씨(氏)는 범(范), 휘(諱)는 여(蠡), 자(字)는 소백(少伯)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회계(會稽)에서 패했던 구천(句踐)을 도왔으며,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멸망시킨 후에 산둥(山東)의 도(陶)로 가서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자칭하면서 큰 부(富)를 쌓았다. 그리고 越王 구천(勾踐)을 春秋五覇에 올려놓았던 최고의 공헌자로 알려져 있다.(더욱 상세한 것은 참고 6-31 참조)

 아무튼,
그러자 유방(劉邦)은 모반(謀反)의 혐의에 대해서는 일단 보류했고, 대신 그를 병권을 가지지 않는 회음후(淮陰侯)로 격하시켰다. 그 후, 한신(韓信)은 病을 칭하며 장안(長安)의 저택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그러던 중 어느 때, 그는 무양후(舞陽侯) 번쾌(樊噲)의 집에 들렀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번쾌(樊噲)는 평소 존경하고 있었던 한신(韓信)을 예(禮)를 다해서 맞이하고는 그에게 <大王>이라고 칭했고, 또 스스로는 <臣>이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살아가다 보니 이제는 같은 처지(同格)가 되었소!>라고 말을 하고는 자조(自嘲-스스로를 비웃음)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에도 유방(劉邦)은 자주 한신(韓信)과 제장(諸將)들을 품평(品評=比較)했다. 그리고 또 어떤 때에 유방(劉邦)이 한신(韓信)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생각하기에 나는 어느 정도 수준의 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한신(韓信)이 이렇게 답을 했다. <폐하께서는 겨우 10만 兵을 이끌 수 있을 將帥십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그렇다면 그대는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또 한신(韓信)이 대답했다. <저는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째서 지금 나의 포로가 되어 있는가?> 그러자 또 한신(韓信)이 답을 했다. <폐하께서는 군사를 인솔하는 데는 부족하지만, 그러나 將에 대해서는 將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將의 將이란 의미). 그리고 그것은 하늘로부터 附與받은 것이며, 결코 사람의 人力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 후에 또 세월은 흘러서 진희(陳豨)가 거록태수(鉅鹿太守)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평소 한신(韓信)을 존경하고 있었던 거록(鉅鹿)은 그 임지(任地)로 떠나기 전에 장안(長安)에 있던 한신(韓信)에게 인사를 갔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그 진희(陳豨)에게 <자신에게 천하의 야심이 있음>을 시사(示唆)했다. 그러자 또 진희(陳豨)가 깜짝 놀라면서 물으니 한신(韓信)이 다음과 같은 계책을 알려주었다.

 
1. 현재 유방(劉邦)은 진희(陳豨)를 독실(篤實)하게 신뢰하고 있으므로, 만약 그런 진희(陳豨)가 모반(謀反)을 하게 된다면, 분명히 유방(劉邦)은 격노해서 친정(親征)을 하게 될 것이고, 만약에 또 그렇게 된다면, 그때 장안(長安)은 비게 된다.

 2. 하지만 또 거록(鉅鹿)은 정병(精兵-우수하고 강한 군사)이 있는 요충(要衝)이기 때문에, 그래서 유방(劉邦)은 쉽게 공략할 수가 없을 것이다.

 3. 그러면 또 그 틈을 타서 한신(韓信) 자신이 장안(長安)을 장악한다.

 4. 그리고 또 현재, 전국에서는 반란이 빈발하고 있고, 유방(劉邦)에 대한 불만이 소용돌이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바로
이러한 때에 한신(韓信) 자신이 거병하게 된다면, 제국(諸國)도 흔쾌히 자신을 따르게 될 것이다...

 라는 것 등이 그것이었는데, 그런데 실제로 기원전 196년의 봄, 진희(陳豨)가 거록(鉅鹿)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또 신뢰하던 진희(陳豨)의 반역에 격노했던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의 계책대로 그 진압을 위해서 무모한 친정(親征)에 나섰고, 그러자 또 한신(韓信)의 예상대로 장안(長安)은 곧 무주공산(無主空山)이나 진배 없게 되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그 기회를 잡아서 장안(長安)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리고는 죄수들을 해방시켜서 그들을 부하로 삼고는 당시, 거의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이 있었던 여후(呂后)와 황태자(皇太子) 영(盈)을 감금하고는 정권을 빼앗으려고 꾀했다. 하지만 일이 잘 되지 않으려면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생기는 법! 바로 그때, 평소 한신(韓信)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하인(下人) 한명이 그런 사실을 여후(呂后)에게 밀고했고, 그래서 그 때문에 그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러자 여후(呂后)는 상국(相國) 소하(蕭何)를 불러서 그 일에 관해서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소하(蕭何)는 여후(呂后)에게 한신(韓信)과 정면 대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을 하고는 한 가지 책(策)을 강구했다. 그 후, 소하(蕭何)는 우선 <진희(陳豨)가 토벌되었다!>라고 세상에 헛소문을 흘렸다. 그런 다음에는 한신(韓信)에게 사람을 보내서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했다. <지금 병중(病中)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러나 현재 자신(韓信)에게 걸려있는 혐의(謀反)도 풀고, 또 친정(親征) 성공도 축하하는 의미에서라도 잠시 궁(宮)에 다녀가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별 의심도 없이 그 말에 따랐고, 그러자 또 그때만 기다리고 있던 소하(蕭何) 등에게 한신(韓信)은 체포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매사에 그렇게도 용의주도했던 한신(韓信)이었지만, 그러나 상대가 자신을 대장군에까지 추대해주었던 소하(蕭何)였기 때문에, 그래서 별 의심 없이 나섰다가 그렇게 허무하게 잡히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 후,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의 귀환을 기다릴 여가도 없이 장안(長安)의 성중(城中) 미앙궁(未央宮) 내에서 처형되었고, 이어서 그의 삼족(三族)도 멸해졌다. 그리고 한신(韓信)은 그 처형 직전에 <내가 괴통(蒯通)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참으로 유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신(韓信) 사후(死後), 진희(陳豨)를 토벌하고 돌아왔던 유방(劉邦)은, 처음에는 한신(韓信)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그러나 곧 한신(韓信)이 최후에 했다는 말을 듣고는 격노해서 그 괴통(蒯通)을 잡아서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또 그 괴통(蒯通)은 유방(劉邦)에게 붙잡힌 후, 유방(劉邦)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당당하게 항변했기 때문에 생명은 건질 수가 있었다고 한다.

 


 


<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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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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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6. 한초전쟁(漢楚戰爭)

 6-4 천하통일(天下統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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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우(項羽) 4

 <垓下의 싸움>

 2. 사면초가(四面楚歌)

 
아무튼, 그 눈물의 연회(宴會)가 끝나자 항우(項羽)는 밤을 이용해서 약 8백 명 정도의 군사들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고는 곧 한군(漢軍)의 포위망을 뚫고 바람처럼 남쪽으로
내달았다. 그러자 다음날 새벽, 한군(漢軍)은 그때서야 항우(項羽)가 탈출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급히 관영(灌嬰)에게 5천기(騎)의 군사를 주어서 항우(項羽)의 뒤를 쫓게 했다. 그런 한편, 항우(項羽)의 8백여 군사들은 도주하던 중 여러 가지의 이유로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고, 그래서 나중에 항우(項羽)가 겨우 동성(東城=現 安微省 定遠縣의 東南)에 다다랐을 때는 불과 28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뒤따라 오던 한군(漢軍)을 의식하면서 남아 있던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가 지금 이런 처지에 놓인 것은 다만 하늘의 뜻일 뿐, 결코 우리가 약(弱)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부터 사력을 다해서 한군(漢軍)을 쳐부수고, 그것으로 우리들이 용맹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자!> 그리고는 남아 있던 병사들을 7기(騎)씩 나누어서 각각 한군(漢軍)을 상대하게 했다. 그러자 항우(項羽)의 부하들은 사력을 다해서 한군(漢軍)과 싸웠다. 그리고 또 그때 항우(項羽)도 한(漢)의 도위(都尉)를 베었던 것과 함께, 한군(漢軍) 약 8, 90명을 죽였지만, 그러나 다시 대오(隊伍)를 정비했을 때 남아 있던 항우(項羽)의 부하들은 단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다시 동쪽으로 달아나서 오강(烏江=中國의 貴州省을 흐르는 강으로, 現 安徽省 和縣에 있음)이라는 장강(長江)의 나루터(烏江鎭)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만 건너게 되면 바로 자신들이 처음 궐기했던 그 강동(江東) 땅이었다. 그런데 그때, 오강(烏江)의 정장<亭長==宿場=驛站=館으로, 과거 관원들이 공무로 다닐 때 숙식을 제공하고 빈객(賓客)을 접대하기 위하여 각 주(州)와 현(縣)에 마련해두었던 객사(客舍)를 의미함>이 항우(項羽)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大王에게 江東은 작은 곳입니다만, 그러나 그곳의 토지는 數 千里요, 인구도 數 十萬에 이릅니다. 그러니 그곳으로 가셔서 왕이 되소서. 그리고 이 근처에서 배를 가진 사람은 저밖에 없으므로, 漢軍이 들이닥친다고 해도 이 강을 건널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항우(項羽)는 그것을 거절하고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옛날, 내가 저 江東의 젊은이들 8천명을 인솔하고 이 강을 건넜지만, 그러나 지금은 단 한 명도 돌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만약 그곳의 사람들이 나를 왕으로 맞아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무슨 면목이 있어 그들을 만날 것인가?!> 그리고는 그 정장(亭長)에게 자신의 애마(愛馬) 추(騅)를 넘겨주고 그대로 한군(漢軍)으로 돌격해서 들어갔다. 그 후, 항우(項羽)는 혼자서 한군(漢軍) 수백(數百)을 죽였지만, 그러나 끝내 자신도 여러 군데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 한군(漢軍)에 과거 자신과 잘 알고 지냈던 여마동(呂馬童)이란 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漢은 나의 목에 千金과 一萬 邑의 領地를 내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왕 죽을 것이라면 과거 나와 잘 알고 지냈던 너에게 그 德을 베풀어주고 싶구나!> 그리고는 스스로 목을 쳐서 죽었다. 그러자 그의 목에 걸렸던 은상(恩賞) 때문에 그 주위에 있던 한군(漢軍)의 병사들은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서로 죽일 지경까지 되었다. 그래서 결국 항우(項羽)의 유체(遺體)는 다섯으로 나누어졌고, 그 결과로 여마동(呂馬童)을 포함했던 5명<양희(楊喜)・왕예(王翳)・여마동(呂馬童)・여승(呂勝)・양무(楊武)>에게 각각 영지를 5등분해서 내린 후에, 유방(劉邦)은 그의 유체를 모아서 극진하게 매장했다.<노공(魯公)의 예(禮)로써 곡성(穀城)에 매장함> 그리고 항우(項羽) 사후(死後), 항백(項伯=射陽侯)을 시작으로 했던 항 씨(項氏) 일족들은 유방(劉邦)에 의해서 전부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또 그로써 약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초한전쟁(楚漢戰爭)도 모두 종결되었고, 드디어 유방(劉邦)은 천하를 통일했음과 동시에, 전후(前後) 약 400년이나 계속되는 한 왕조(漢王朝)의 문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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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미인(虞美人-?부터 기원전 202년)은, 진말(秦末)부터 초한전쟁(楚漢戰爭)기의 여성(女性)으로, 항우(項羽)의 애인이라고 알려졌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으며, 우(虞)는 그녀의 성(姓)이라고 한다.(漢書) 그리고 사기(史記)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우(虞)라고 했으며, 미인(美人)이란 것도 후궁(後宮)의 의미이거나, 그 자태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또 소설(小說) 등에서는 그녀가 곧잘 항우(項羽)의 처(妻)로 표현되고 있으며, 또한 이름도 우희(虞姬)로 소개하는 것도 많다. 그러나 그녀가 항우(項羽)와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었는지, 또는 그 이야기의 처음에 대해서는 일절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래서 또 그녀는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유방(劉邦)에게 져서 낙담해 있던 항우(項羽)의 옆에는 언제나 우미인(虞美人)이 있었고,
항우(項羽)는 한 시(時)라도 그녀를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라고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항우(項羽)의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의 시(詩)가 소개되고 항우(項羽)는 해하(垓下)를 탈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등에서 일절 기술한 것이 없지만, 하지만 또 창작으로, 소설 등에서는 그녀가 항우(項羽)의 탈출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살한다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 그 자살설(自殺說)에 대해서도, 그것은 여성(女性)의 정절(貞節)이 강조되었던 북송(北宋)시대부터 회자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우미인(虞美人)의 전설(傳說)은 개양귀비 꽃<추앵속(雛罌粟)>의 이명(異名)으로 붙여져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 꽃을 <虞美人草>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雛罌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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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유방(劉邦)'은 그때까지도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노(魯)'을 제압했고, 이어서 '항우(項羽)'의 잔당(殘黨)들을 달래고자 '항우(項羽)'의 장례를 후(厚)하게 치러주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기원전 202년 '유방(劉邦)'은 군신(群臣)들의 추대를 받아서 마침내 황제(皇帝)에 등극(登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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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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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6. 한초전쟁(漢楚戰爭)

 6-3 다시 지다(再敗)

 그런데 그 무렵, 한신(韓信)이 제(齊)를 완전히 제압하고는 그 진무(鎭撫-민심을 수습함)를 위해서 자신이 그곳의 가왕(假王=臨時王)이 되겠다고 유방(劉邦)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왔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격노하고는 한신(韓信)을 쳐 없애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때,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나서서 유방(劉邦)을 달래며 이렇게 말을 했다. <만약에 그랬다가 정말로 한신(韓信)이 배신해 버린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어쩔 수 없이 한신(韓信)을 제왕(齊王)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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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韓信) 2

 중국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무장. 유방(劉邦)의 휘하에서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했으며, 결국 유방(劉邦)의 패권(覇權)을 결정짓게 했던 인물이었다. 장량(張良)·소하(蕭何)와 함께 유방(劉邦)의 삼걸(三傑) 중 1명이며, 세계의 군사사상(軍事史上)으로도 명장(名將)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으로부터 좌승상(左丞相)의 지위를 얻어서 당시, 원래는 한 측(漢側)이었으나 그러나 그때는 이미 한(漢)을 배신하고 초(楚)에 붙었던 위(魏)의 위표(魏豹)를 토벌하라는 명을 받아서 별동군(別働軍)을 이끌고 그 토벌에 나섰다. 그러자 위군(魏軍)은 도하(渡河)지점을 중점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또 한신(韓信)은 그 대안(對岸)에다 배들을 늘어놓고 적군을 유인하는 전술(戰術)을 펼침과 동시에 자신은 또 군사들을 이끌고서 강의 상류로 향했다. 그리고는 나무로 만든 통을 이용해서 병사들을 도하(渡河)시켰고, 이어서 위(魏)의 수도였던 안읍(安邑=現 山西省 夏縣 近郊)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위군(魏軍)들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했고, 그 사이에 한신(韓信)은 위표(魏豹)를 포로로 잡았다. 그리하여 위(魏)는 멸했고, 위표(魏豹)는 목숨은 구걸 받았지만, 그러나 신분은 서민(庶民)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한신(韓信)은 다시 북쪽으로 진군을 해서 대(代=山西省 北部)를 점령했고, 거기서 다시 조(趙=河北省 南部)로 진군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곧바로 배수진(背水陣)을 쳤는데,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병법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았던 전술로, 자신에게 불리한 그런 전술을 일부러 쓰는 일은 결코 없었다고 했으므로, 그래서 또 그것은 가히, 그만의 아주 독창적인 전술이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북 성>

 아무튼 그런 다음, 한신(韓信)은 20만이란 조(趙)의 대군(大軍)을 맞아서 협애(狹隘)한 지형과 목숨을 건 병사들의 사투(死鬪)에 힘입어서 방어했다. 그리고 또 그 틈을 타서 별동대(別動隊)로 하여금 성채(城砦)를 점령하게 했고, 그러자 또 낙성(落城)에 조군(趙軍)들이 동요하던 사이 본대(本隊)와 협공해서 진여(陳余)와 조왕(趙王) 조헐(趙歇)을 잡아서 죽였다.<정형(井陘=河北省 井陘縣)의 싸움> 그런 다음, 한신(韓信)은 조(趙)의 장군이었던 이좌차(李左車)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연(燕=河北省部)의 장도(臧筡)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서 항복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204년, 진무(鎭撫)를 위해서 장이(張耳)를 조왕(趙王)에 봉하도록 유방(劉邦)에게 상신(上申)해서 인정받았다. 그런데 또 그 사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의 싸움에서 불리해져서, 그에 한신(韓信)은 몇 번이나 군사를 지원했다. 그러자 마침내 유방(劉邦)은 초(楚)의 포위망을 뚫고 한신(韓信)이 주둔하고 있던 수무현(修武縣=現 河南省 西北)으로 도망쳐 왔다. 그리고는 한신(韓信)의 군 지휘권을 빼앗았으며, 이어서 한신(韓信)에게 제(齊)를 평정할 것을 명했다. 그런데 또 그때,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을 제(齊)에 파견한 뒤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유생(儒生)이었던 력식기(酈食其)에게 시켜서 제(齊)와 화의(和議)할 것을 명했다. 그러자 또 기원전 203년, 한신(韓信)은 제(齊)에 쳐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이미 제(齊)가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진군을 멈추려고 했다. 그런데 또 그때, 한신(韓信)의 부하였던 변사(辯士) 괴통(蒯通)이란 자가 한신(韓信)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아직 유방(劉邦)에게서 진군의 정지명령도 내려오지 않았으니, 우리는 이대로 제(齊)를 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력식기(酈食其)는 세치 혀만으로 제(齊)를 항복시키려 하는데,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장군의 공적은 없어지게 되고(그때, 韓信은 齊의 城 70여 곳 중 이미 50 곳 이상을 떨어뜨렸던 상태였다), 또한 장군은 일개 유생(儒生)보다도 못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그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제(齊)를 공격했고, 그러자 그 후, 무방비나 다름없었던 제(齊)의 성(城)들은 차례로 한신(韓信)의 손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에 화가 났던 제왕(齊王) 전광(田廣)은 력식기(酈食其)를 삶아서 죽이고는 도주했다. 그 후, 제(齊)는 초(楚)에 구원을 요청했고, 그러자 항우(項羽)는 용차(龍且)에게 20만의 군사를 주어서 파견했다. 그러자 또 용차(龍且)는 지구전(持久戰)을 펼치는 것이 좋겠다는 진언도 받았지만, 그러나 묵살하고는 과거 한신(韓信)이 고부(股夫故事)였다는 것만 생각하고 곧바로 한신(韓信)에게 도전했다.

 참고: 고부고사(股夫故事)는 필자(筆者)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임의로 만든 말이며, 그 뜻은 韓信이 과거 다른 남자의 가랑이 아래를 기었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래서 龍且는 그때 韓信이 股夫, 즉 <가랑이 아래를 기었던 남자>라는 것만 생각하고는 한신(韓信)을 얕잡아봤다는 뜻임

 아무튼, 그러자 한신(韓信)도 용차(龍且)가 용맹하기 때문에 바로 결전에 돌입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일부러 제법 넓으면서도 그러나 수심은 얕은 곳을 선택해서 결전에 임했다. 그리고 또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그 결전 전야에 미리 유수(濰水) 상류에다 흙 부대를 쌓아서 둑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수심을 더욱 얕게 한 다음 결전에 나섰다. 그리고 당일, 한신(韓信)은 용차(龍且)와 싸우다가 힘이 달려서 도주하는 척하면서 용차(龍且) 군을 유인했다. 그러자 용차(龍且) 군은 그 기세를 몰아서 한신(韓信) 군을 추격했다. 그러자 또 한신(韓信)은 적당한 때에 둑을 무너뜨려서 용차(龍且)가 이끌던 20만의 대군을 대부분 수몰시켰다. 그리고 그 후, 용차(龍且)는 포로가 되어서 참형에 처해졌다. 그렇게 해서 제(齊)를 평정했던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에게 진무(鎭撫)를 위해서 제(齊)의 가왕(假王)이 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또 이미 기술한대로, 그 때문에 유방(劉邦)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러나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의 진언을 받아들였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것을 허락했다. <가왕(假王)이 아니라, 진왕(眞王)이 되라고 하라!>
以下 省略 또는 後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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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그렇게 해서 '한초(漢楚)' 양군(兩軍)은 오랫동안 대치상태를 계속했고, 그러자 또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던 항우(項羽)는 당시 '팽성(彭城) 싸움'에서 포로로 잡아두었던 유태공(劉太公)을 이용해서 유방(劉邦)에게 항복할 것을 강요했지만, 그러나 전술(前述)한대로 오히려 유방(劉邦)은 너스레를 떨면서 항우(項羽)의 협박을 무시했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에게 일대일(一對一) 대결을 원했지만, 그러나 그때도 유방(劉邦)은 웃기만 하고 응하지를 않았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자신의 군사 중에서 노(弩=쇠뇌=쇠로 만든 발사장치가 달린 활. 여러 개의 화살을 연달아 쏘게 되어 있는 것으로, 주로 낙랑의 무덤에서 나오고 있다고 한다. 같은 말은 石弓 등)를 잘 쓰는 군사를 골라서 유방(劉邦)을 저격하게 했다. 그래서 그때 유방(劉邦)은 그 중 한 개를 가슴에 맞고 큰 부상을 당했는데,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그 사실을 자군(自軍)이 알게 되면 큰 동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얼른 순간적으로 자신의 다리를 손으로 문지르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바보 같은 놈! 그래봤자 나의 손가락만 맞췄을 뿐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유방(劉邦)은 병상(病床)에 누워야만 했는데, 하지만 또 그때, 장량(張良)의 진언을 받고 유방(劉邦)은 무리(無理)하게 사열(査閱)을 해서 병사들의 동요를 막았다.(以上, 廣武山의 싸움) 그런 한편, 초군(楚軍)은 팽월(彭越)의 후방교란으로 인해서 식량이 거의 바닥나 있었다. 그리고 또 그때는 양군(兩軍)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은 나라를 반으로 나누자는 강화(講和)에 합의했고, 그 결과로 유태공(劉太公)과 여치(呂雉)도 '유방(劉邦)'에게로 돌아갔다.

 6-4 천하통일(天下統一)

 그렇게 해서 항우(項羽)는 동쪽으로 물러났고, 그러자 또 유방(劉邦)도 서쪽으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런데 또 그때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나서서 유방(劉邦)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퇴각하고 있던 항우(項羽)를 공격하라고 진언했다. <만약, 여기서 양군(兩軍)이 물러나버린다면, 분명 초(楚)는 다시 힘을 키워서 조만간에 한(漢)을 치러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한(漢)으로서는 초군(楚軍)을 도저히 상대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것을 받아들였고, 이어서 항우(項羽) 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그리고는 또 그와 동시에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유방(劉邦)은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러나 그 두 사람 모두 그 요청에 불응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유방(劉邦)은 장량(張良)의 진언을 받아들였고(前述), 그러자 또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이 급히 달려와서 항우(項羽)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러자 또 해하(垓下)까지 몰리게 되었던 항우(項羽)는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그 때문에 한군(漢軍)은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그 희생은 너무도 컸던 것이어서, 그에 장량(張良)과 한신(韓信)은 더 이상의 무리한 공격은 삼가고 그때부터는 그들을 포위하면서 병량(兵糧)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러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했던 초군(楚軍)은 드디어 붕괴되었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소수(小數)의 병사들만 데리고서 포위망을 돌파해보려 했지만, 하지만 한(漢)의 대군(大軍)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자결했다.(以上, 垓下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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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우(項羽) 3

 그 후, 한신(韓信)의 공격을 받았던 제(齊)를 구원하기 위해서 용차(龍且)에게 20만이란 대군을 주어서 보냈지만, 그러나 그 용차(龍且)도 한신(韓信)의 수계(水計)에 넘어가서 무참하게 괴멸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부터는 한(漢)에서 제(齊)에 이르는 초(楚)의 포위망이 점점 더 완성되어갔고, 나중에는 유방(劉邦)과 한신(韓信)의 힘이 초(楚)를 웃돌게 되었다. 그러자 또 기원전 203년, 급기야 항우(項羽)는 유태공(劉太公)과 여치(呂雉)를 반환하는 것으로 유방(劉邦)과 일단 화의를 하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화의는 금방 깨어졌고, 항우(項羽)는 유방(劉邦) 군에게 배후를 급습 당했다. 그러자 긴 전투로 지쳐있던 초군(楚軍)은 패주했다. 그러자 또 한군(漢軍)은 한신(韓信)의 병력 30만을 시작으로 해서, 제후 연합군들의 병력까지 합세해서 초군(楚軍)의 뒤를 쫓았고, 그러자 당시 10만 남짓했던 초군(楚軍)은 해하(垓下)까지 도주했다.(以下, 垓下의 싸움 참조)

 <垓下의 싸움>

 1.
경과(經過)

 기원전 203년, 광무산(廣武山)에서 장기간 대치 중이었던 초한 양군(楚漢兩軍)은 당시, 초군(楚軍)은 식량부족으로 그리고 한군(漢軍)은 유방(劉邦)의 부상과 유방(劉邦)의 부친 유태공(劉太公)과 아내 여치(呂雉)가 포로로 잡혀 있었다는 것 등으로 해서 서로가 휴전을 바라게 되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변사(辯士) 후공(侯公)을 초군(楚軍)에 사자(使者)로 보내서 천하(天下)를 양분(兩分)하자는 맹약을 맺게 했다. 그러자 초군(楚軍)은 곧 본거지였던 팽성(彭城)에로의 귀환을 시작했지만, 그러나 그때 유방(劉邦)은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맹약을 먼저 깨고 항우(項羽)의 뒤를 추격했다. 그리고는 고능(固陵=現 河南省 淮陽縣의 西北)이란 곳까지 가서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에게 군사를 인솔해서 초군(楚軍) 토벌에 합류하라고 지시했고, 이어서 자신은 양무(陽武=現 河南省 太康縣)로 향했는데,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유방(劉邦)이 은상(恩賞)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를 않았으므로 아예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런 한편, 유방(劉邦)의 배신을 알아차렸던 항우(項羽)는 한군(漢軍)에 반격을 가했고, 그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던 한군(漢軍)은 성(城) 안으로 들어가서 참호(塹壕)를 깊게 파고는 방비에 들어갔다. 그러자 그때서야 유방(劉邦)은 장량(張良)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한신(韓信)에게는 진(陣)에서부터 동쪽 바다에 이르는 전 영토를 하사하고, 그리고 팽월(彭越)에게는 수양(睢陽)에서 북(北)의 곡성(穀城)에 이르는 토지를 주며, 그에 더해서 양왕(梁王=魏王)에 봉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지체 없이 달려와서 유방(劉邦) 군에 합류했고, 그리고는 또 그 뒤를 이어서 유가(劉賈)의 군대도 팽월(彭越) 군에 합류했으며, 그리고 또 초군(楚軍)을 배신했던 주은(周殷)까지도 합류를 해서 드디어 한군(漢軍)은 대군이 되었다. 그 후,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을 호위하기 위한 병사 30만을 후방에 남겨두고 자신은 다시 30만의 병사들을 인솔해서 당시, 약 10만 정도였던 초군(楚軍)과 대치했다.(하지만 이 부분의 병사의 數에 대해서는 과장된 것이란 견해가 있다) 그리고 또 이어서 한신(韓信)은 전위(前衛)부대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전위(前衛)는 순수한 의미로 전방의 호위(護衛)를 뜻하는 말이며, 그러나 계급투쟁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선두에 서서 지도하는 집단이나 부대를 의미함. 그리고 이 말은 <레닌>에 의해서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조직 원천이 되었다고 함. 같은 말은 전위대.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전위(前衛)부대는 후퇴했고, 그러자 초군(楚軍)은 그 전위(前衛)부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신(韓信)의 계략이었고, 그렇게 해서 추격해왔던 초군(楚軍)은 곧 한군(漢軍)의 엄청났던 병력에 완전히 포위당하고 말았다.

 2. 사면초가(四面楚歌)

 그렇게 해서 패배했던 초군(楚軍)은 스스로 방루(防壘=要塞=小城)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가버렸다. 그러자 또 한군(漢軍)은 그것을 겹겹이 포위했고, 이어서 빗장을 걸어두고 도무지 나오려고 하지 않던 초군(楚軍)을 와해(瓦解), 유인해내기 위해서 초(楚)의 음악을 밤마다 울렸다. 그러자 지칠 대로 지쳐있던 초군(楚軍)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리고 또 그 노래를 들었던 항우(項羽)도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아! 한군(漢軍)은 이미 초(楚)를 점령한 것인가? 밖의 적들에게 붙들린 초인(楚人)들이 어찌 저리도 많다는 말인가?> 그리고 위 고사(故事)로부터 주위를 적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사면초가(四面楚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던 항우(項羽)는 그날 밤 이별의 연석을 마련했다. 그리고 또 그때, 항우(項羽)에게는 우미인(虞美人)이란 애첩이 있었다고 하고, 또한 그가 아끼던 추(騅=烏騅馬)라는 애마(愛馬)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또 항우(項羽)는 그 둘과의 이별을 애통해하면서 다음과 같은 비분(悲憤)의 시(詩)를 읊었다고 한다.(또는 垓下의 노래라고도 함)

 ☆ 오추마(烏騅馬)는 검은 털에 흰 털이 섞인 말이며, 항우(項羽)가 탔다는 준마.

 力拔山兮 氣蓋世
 時不利兮 騅不逝
 騅不逝兮 可奈何
 虞兮虞兮 奈若何

 역발산혜 기개세
 <힘은 산을 뽑을만하고, 기(氣)는 세상을 다 덮겠는데>

 시불리혜 추불서
 <때가 도와주지 않으니, 오추마도 더 이상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구나!>

 추불서혜 가내하
 <오추마도 움직이지 않으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우혜우혜 나약하
 <우미인(虞美人)아, 우미인아, 내 너를 어찌할꼬!>

 <筆者 譯>

 <그리고 3, 4연의 同字 '奈(내)'와 '奈(나)'는 本 筆者가 발음하기 쉽도록 임의로 구성한 것임 >

 아무튼, 그러자 또 우미인(虞美人)도 그 답으로 창화(唱和=한사람이 선창을 하면 여러 사람이 따라서 부르는 것)를 했는데, 그러자 항우(項羽)뿐만 아니라 그 옆에 있던 모든 신하들도 다 같이 울어서 그 연석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때 우미인(虞美人)이 창화(唱和)를 했던 노래라고 생각되는 것인데, 원래 본문에는 없는 것이나, 그러나 다른 곳에서 찾아서 독자들에게 소개할 생각으로 올려드리는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정확한 원문은 찾지를 못했으므로, 대충 그 내용만 소개함도 아울러 밝힙니다.

 
그에, 한군(漢軍)이 이미 세상을 다 차지하였는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楚)의 노래뿐이로구나!
 아, 장군(項羽)의 기개(氣槪) 이제 다하였으니
 이 몸 또한 살아서 무엇하리요!




 <인물소개 項羽 4,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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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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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6. 한초전쟁(漢楚戰爭)

 
6-2 대패(大敗)

 
※ 인물소개

 종리매(鐘離昧-?부터 기원전 201년)는, 진말(秦末)에서 전한(前漢)초기의 무장이었다. 그리고 매를 매(昧)나 말(昩) 등으로 쓴 곳도 있으나, 그러나 여기서는 중화서국본(中華書局本) 한서(漢書)에 따라서 매(眛)로 기술함. 그리고 또 사기(史記)에서는 항우(項羽)의 부장(部將)으로, 포 장군(蒲將軍)이란 인물의 사적(事蹟)이 산견(散見)되는데, 그래서 타케야스히코(佐竹靖彦)란 자는 <그 포 장군(蒲將軍)이 종리매(鐘離眛)와 동일인물이 아니었을까?...>라고 지적했던 바 있었으며, 그리고 또 그 이유로는 종리매(鐘離眛)는 종리(鐘離)라는 도시<수춘(壽春)에서 회수(淮水) 아래로 150킬로에 위치하며, 당시 회왕(懷王)의 초도(楚都)였던 우태(盱台)와 수춘(壽春)의 중간지점에 있었다> 출신이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또 그 리(鐘離)에서 북쪽으로 70킬로 정도에 포고피(蒲姑陂)라는 지명이 있는데, 그래서 그 지명을 따서 포 장군(蒲將軍)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덧붙여서, 그렇게 해석할 경우 <항왕(項王=項羽)의 망장(亡將) 종리매(鐘離眛)의 집은 이로(伊盧)에 있다>라고 했던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와의 정합성(整合性)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사기(史記) 권(卷)92 회음후(淮陰侯)열전과 한서(漢書)의 한신전(韓信傳)> 그리고 또, 그 이로(伊盧)의 위치가 어디였던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지만, 그러나 남조송(南朝宋) 배인(裵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그리고 당(唐)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등에 의하면, 한(漢)의 중로현<中盧縣=현재의 호북성(湖北省) 양번시(襄樊市) 부근>이라는 설(說)과 동진(東晋)의 서광(徐廣)에 의한 <동해(東海-)의 구현(朐縣)에 이로향(伊盧鄕)이란 지명이 있다>라고 하는 설(說), 그리고 또 안사고(顔師古)의 <중노(中盧)는 양양(襄陽)의 남쪽에 있다>라고 하는 설(說) 등이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도 사타케야스히코(佐竹靖彦)는 <종리매(鐘離眛)는 전혀 이로(伊盧) 출신이 아니었다>라고 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는 진말(秦末) 초(楚)의 항량(項梁)·항우(項羽)가 군사를 일으키자 그에 참가했다. 그리고 진(秦) 멸망 후 초한전쟁(楚漢戰爭)에서도 항우(項羽)의 부장(部將)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나중에 유방(劉邦)의 부하였던 진평(陳平)의 계략에 넘어가서 항우(項羽)에게 미움을 받았다. 항우(項羽) 사후(死後), 그는 옛 친구였던 한신(韓信)에게로 가서 신변을 의탁했다. 하지만 제위에 즉위했던 유방(劉邦)이 그것을 알고는 당시 초왕(楚王)이 되어 있었던 한신(韓信)에게 그를 넘겨줄 것을 명령했다. 왜냐하면, 유방(劉邦)은 그때, 과거 항우(項羽)와 함께 자신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그때 마침 한신(韓信)이 모반을 꾀한다고 중상모략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진평(陳平)의 진언(進言)을 받아들여서 한신(韓信)을 치려고 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몹시 두려워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누군가가 한신(韓信)에게 <종리매(鐘離眛)를 죽여서 용서를 받으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그것을 알았던 종리매(鐘離眛)가 이렇게 말을 했다. <유방(劉邦)이 이곳을 공격하지 않고 있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를 죽여서 유방(劉邦)에게 아첨 떨 생각이라면, 너도 조만간 나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결코 덕(德)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문(自刎-자신의 목을 스스로 잘라서 죽음)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이간계(離間計)>는 성공했지만, 그러나 한(漢)의 식량부족은 여전했다. 그러자 그때, 그 위기를 타개하고자 기신(紀信)이 나서서 유방(劉邦)에게 <금선탈각의 계(金蝉脱殻計)>를 진언(進言)했고,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그 계책을 받아들여서 간신히 서쪽으로 탈출했다. 그 후 형양(滎陽)은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주가(周苛)가 지키게 되었지만,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항우(項羽)에 의해서 그곳은 떨어졌다.

 ※ 기신(紀信-?부터 기원전 204년)은, 한(漢)의 장군으로, 기원전 207년 홍문(鴻門)의 회(會)에서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로부터 피신했을 때, 번쾌(樊噲)·하후영(夏候嬰)·근강(靳彊) 등과 함께 유방(劉邦)을 호위했다.<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따름. 그러나 한서(漢書)의 고제기(高帝記)에서는 기신(紀信)을 기성(紀成)이라고 기록하고 있음> 그리고 기원전 204년 여름, 항우(項羽)가 인솔하던 10만의 군세가 형양성(滎陽城=河南省)에 주둔하던 한군(漢軍)을 포위했다. 그러자 식량이 바닥이 나서 곧 낙성(落城)할 운명에 처했는데, 그러자 그때 기신(紀信)이 유방(劉邦)에게 <금선탈각의 계(金蝉脱殻計)>를 진언했다.

 
★ 금선탈각의 계(金蝉脱殻計)는 병법(兵法) 36계(計) 중 제(第) 21계(計)로, 여기서의 금(金)은 유방(劉邦)을 말하는 것이고, 선탈(蟬脫)은 매미가 허물을 벗는다는 의미임, 그리고 탈각(脫殼) 역시 껍질을 벗는다는 뜻이므로, 그래서 그때 기신(紀信)은 자신이 유방(劉邦)으로 변장하여 항우(項羽)에게 거짓 항복하는 사이에 유방(劉邦)을 피신시키려고 했던 계책이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 계책을 받아들여서 진평(陳平) 등 수십 명의 부하들만 데리고서 성고성(成皐城)을 탈출했다. 그러자 그때 미끼로 남았던 기신(紀信)은 항우(項羽)에 의해서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주가(周苛-?부터 기원전 204년)는, 전한(前漢)초기의 부장(部將)으로 패(沛)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때, 종제(從弟)였던 주창(周昌)과 함께 진(秦) 사수군(泗水郡)의 졸사(卒史-정확한 직책은 알 수 없으나, 최하급관리로 생각됨)로 있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이 군사를 일으키자 사수군수(泗水郡守) 감(監)을 격파하고 두 사람 다 유방(劉邦)을 따랐다. 그리고 주가(周苛)는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최초로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그리고 고조(高祖) 3년(기원전 204년) 여름, 유방(劉邦)이 형양(滎陽)에서 항우(項羽)에게 포위당하고, 이어서 기신(紀信)의 계책으로 탈출하자 주가(周苛)는 위표(魏豹), 종공(樅公), 한왕 신(韓王信) 등과 함께 형양(滎陽)을 수비했다. 그 후, 항우(項羽)가 기신(紀信)을 태워죽이고, 점점 더 압박을 가해오자 주가(周苛)는 종공(樅公)에게 <위왕표(魏王豹)가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말하고는 함께 모의해서 위왕표(魏王豹)를 살해했는데, 그때가 가을 8월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1개월 정도 후에, 형양(滎陽)은 함락되었고, 주가(周苛) 등은 포로로 잡혔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에게 <나의 장군이 되어준다면 상장군에 임명하고 봉읍(封邑) 3만 호를 내리겠다!>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는 오히려 <너야말로 빨리 한(漢)에 항복하지 않으면 한(漢)의 포로가 될 것이다. 너 따위들은 한왕(漢王)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를 삶아서 죽였다. 그리고 또 그때, 종공(樅公)도 함께 처형되었지만, 그러나 한왕 신(韓王信)은 항복을 해서 목숨을 건졌다.<그러나 후에 다시 배반하고 유방(劉邦)에게로 귀순함>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의 종제(從弟) 주창(周昌)을 그 후임으로 해서 어사대부(御史大夫)에 명했다. 그리고 또 천하통일 후에는 그의 공을 기려서 그의 아들 주성(周成)을 고경후(高景侯)에 봉했다.<사기(史記) 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에 의함>

 어쨌든, 그렇게 해서 서쪽으로 피신했던 유방(劉邦)은 관중(關中)에 남아있던 소하(蕭何)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소하(蕭何)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군사를 이끌고서 형양(滎陽)을 구원하러 가려고 했다. 그러자 또 원생(袁生-자료 없음)이란 자가 그를 말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지금의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습니다. 그러니 남쪽의 무관(武關)으로 돌아가서 항우(項羽)를 유인하는 책(策)을 쓰십시오!> 그러자 유방(劉邦)은 원생(袁生)의 말대로 움직였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도 유방(劉邦)이 있던 곳으로 군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팽성(彭城)을 책동(策動)했고(聲東擊西), 그러자 또 그에 놀랐던 항우(項羽)가 참지 못하고 서둘러서 팽월(彭越)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때 항우(項羽)와 정면 승부를 할 생각은 없었던 유방(劉邦)은 서둘러서 북쪽으로 이동해서 성고(成皋=河南省 氾水)로 들어갔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을 끝까지 추격했고, 그에 또 유방(劉邦)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서 그곳에서도 퇴각했다.
그 후 유방(劉邦)은 하후영(夏候嬰)만 데리고 한신(韓信)이 주둔하고 있던 수무(修武=河南省 獲嘉)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숙식을 하면서 한신(韓信)의 군대를 접수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한신(韓信)에게 제(齊)를 공략할 것을 명(命)했으며, 그와 동시에 조참(曹參)과 관영(灌嬰)을 그의 휘하에 넣었다. 그리고는 또 노관(盧綰)과 종형제(從兄弟) 유가(劉賈)에게는 항우(項羽)의 본거지였던 초(楚)로 파견시켜서 후방교란을 명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단번에 제(齊)를 굴복시켰고, 이어서 초(楚)에서 달려왔던 20만의 용차(龍且) 군도 격파했다. 하지만 그때 <서로 간의 착오>로 인해서 당시 제(齊)와 협상을 하러갔던 력식기(酈食其)가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 하지만 이 부분은 앞의 인물소개 '력식기(酈食其) 편'에서 소개한 것과 내용면에서 조금 차이를 보이는데, 그러나 위 본문(本文)에서 <착오(錯誤) 또는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기술했기 때문에, 그래서 전체의 내용은 본문(本文)에 따르기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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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소개

 관영(灌嬰-?부터 기원전 176년)은, 중국 진(秦)·전한(前漢)시대 유방의 무장이었으며, 수양(睢陽)의 비단상인이었다.

 ☆ 수양(睢陽)은 중국(中國)의 옛 지명(地名)이며, 춘추(春秋) 시대 송(宋)나라의 땅이었다. 옛날의 성(城)은 현재(現在)의 하남성(河南省) 상구시(商丘市)의 남쪽에 있으며,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안녹산의 난 때, 태수(太守)였던 허원(許遠)이 그곳에서 적장(賊將) 윤자기(尹子寄)를 막았으나, 성이 함락(陷落)되면서 잡혀서 죽었다고 한다.

 그는 항량(項梁)이 장한(章邯)에게 패한 후, 유방(劉邦)이 탕(碭)으로 돌아왔을 무렵부터 유방(劉邦)을 따랐다. 그리고는 진(秦)과의 싸움에서 공적을 올렸고, 무관(武關)에서 진(秦)을 토벌한 후 창문군(昌文君)이란 칭호가 주어졌다. 그 후,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낭중(郎中=近衛兵)이 되었고, 그 다음에 중알자(中謁者)가 되어서, 3진(秦)을 평정했고, 은왕(殷王) 공격 등에도 종군했다.

 ☆ 3진(秦)은 항우(項羽)가 진(秦)을 멸한 후, 유방(劉邦)을 견제하기 위해서 구진(舊秦) 관중(關中)을 셋으로 나눈 뒤, 장한(章邯)과 사마흔(司馬欣) 그리고 동예(董翳)에게 내렸던 땅을 말함

 
중알자(中謁者)는 한관의(漢官儀)에 따르면 <알자(謁者)는 정원 35명, 낭중(郎中) 중에 1년간 녹봉을 받은 사람을 급사(給事)라고 칭하고, 그 중에 1년을 채운 자를 관알자(灌謁者)라고 칭한다>라고 했고 또 <관영(灌嬰)은 7년을 채웠으므로 유방(劉邦)이 대알자(大謁者)라고 칭했다>라고 했으므로, 그것으로 중알자(中謁者)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방(劉邦)이 팽성(彭城) 싸움에서 진 후, 형양(滎陽)에서 초(楚)의 기병(騎兵)과 맞싸울 기병대장을 뽑으려고 했을 때, 유방(劉邦)은 당시 진인(秦人)으로 기사(騎士)였던 이필(李必)과 낙갑(駱甲)을 대장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유방(劉邦)에게 측근이면서도 승마전투에 뛰어난 사람을 선택할 것을 진언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관영(灌嬰)을 선택했고, 그 두 사람은 교위(校尉)로 따르게 했다. 그 후, 관영(灌嬰)은 중대부(中大夫)가 되었고, 낭중(郎中) 기병을 인솔해서 초(楚)의 기병을 격퇴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는 기병을 인솔하며 별동대로 활약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그리고 또 한신(韓信)의 휘하에서는 제(齊)를 정복하고, 용차(龍且)를 제압하는 등 많은 활약을 펼쳤다.(하지만 그때, 실제로 龍且를 죽인 것은 그의 부하였다고 하며, 그는 亞將이었던 周蘭을 생포했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 그는 초(楚)의 영토를 공격했고, 하비(下邳)와 팽성(彭城)을 공략했다. 그리고 그 후, 항우(項羽)가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져서 도주했을 때, 그는 유방(劉邦)의 명을 받아서 항우(項羽)를 추격했다. 그래서 그때, 항우(項羽)의 시체를 거두었던 다섯 사람(5人)은 바로 그의 부하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도 그는 오군(吳郡) 등 강남(江南), 회북(淮北)을 평정했다. 그리고 또한 연왕(燕王) 장도(臧筡)의 토벌에도 종군했으며, 초왕(楚王) 한신(韓信)을 잡을 때도 동행했다. 그리하여 고조(高祖) 6년(기원전 201년)에 그는 영음후(潁陰侯=食邑 2500戶)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후, 그는 한왕 신(韓王信)의 반란진압에도 종군했지만, 그러나 흉노(匈奴) 기병들을 물리친 후 유방(劉邦)과 함께 평성(平城)에서 포위당했던 일도 있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도 진희(陳豨)의 반란, 영포(英布)의 반란진압에도 종군했으며, 그 공으로 2500호(戶)를 가증(加增=增俸 또는 增封)받았다. 그 후, 유방(劉邦)이 죽자 그는 혜제(惠帝)와 여치(呂雉)를 따랐으며, 여치(呂雉)가 죽은 후에는 제왕(齊王)이 여 씨(呂氏) 타도를 외치며 거병하자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병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주발(周勃) 등과 모의해서 당시 형양(滎陽)에서 주둔하고 있던 제왕(齊王)에게 자신들이 여 씨(呂氏)를 타도할 것이란 암시를 주자 그에 제왕(齊王)은 싸우지 않고 군(軍)을 물렸다. 여 씨(呂氏)를 멸 후, 그는 문제(文帝) 옹립에 참여해서 다시 3000호(戶)를 가증(加增)받았고, 태위(太尉)가 되었다. 그리고 문제(文帝) 전(前) 3년(기원전 177년)에 승상 주발(周勃)이 파면되자 그는 그 후임이 되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흉노(匈奴)가 북방으로부터 침입해오자 그는 기병 8만 5천을 인솔해서 요격에 나섰지만, 그러나 그때는 이미 흉노(匈奴)가 떠난 뒤였고, 또 마침 그때 제북왕(齊北王) 유흥거(劉興居)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그에 진군(進軍)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176년 그는 사망했고, 시호(諡號)는 의후(懿侯)가 내려졌다. 그 후, 그의 아들 관하(灌何=平侯)가 그의 뒤를 이었고, 그리고 그 관하(灌何)는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의 亂)을 진압하기 위해서 종군했다.(漢書 灌夫傳) 그 후, 관하(灌何)의 아들 관강(灌彊)이 죄를 지어서 관직이 끊어졌지만, 그러나 무제(武帝)에 의해서 관영(灌嬰)의 손(孫) 관현(灌賢)이 임여후(臨汝侯)에 봉해졌다. 하지만 그 관현(灌賢)도 뇌물(賂物)을 주고받았다는 죄가 인정되어서 나라가 몰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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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다시 지다(再敗)

 기원전 203년,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 대진(對陣)하면서 견고한 수비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 한편 항우(項羽)의 배후로 팽월(彭越)을 투입시켜서 초군(楚軍)의 병참(兵站)을 공격케 하고 있었다. 그러자 참지 못했던 항우(項羽)는 부하 조구(曹咎)에게 <보름정도까지는 돌아올 것이니까, 먼저 움직이지 말고 그때까지 잘 지키고 있어라!>라는 말을 하고는 팽월(彭越)을 잡기 위해 출진(出陣)했다. 하지만 항우(項羽)가 없던 틈을 노려서 한군(漢軍)이 자꾸 도발(挑發)을 해오자, 조구(曹咎)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출진해서 대패했다. 하지만 항우(項羽)가 다시 돌아오자 한군(漢軍)은 다시 방어태세로 들어가서는 도무지 항우(項羽)와 싸우려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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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소개

 항우(項羽) 2

 1. 서초패왕(西楚覇王)

 홍문(鴻門)의 회(會) 후,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을 용서한 후, 진(秦)의 마지막 왕이었던 자영(子嬰) 일족을 참살하고 함양(咸陽)을 불태우며 재보(財寶)를 약탈했다. 그러자 그 후, 지리적인 이점(利點)이 좋았던 함양(咸陽)을 수도로 하자는 진언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을 행할 목적으로 초(楚)의 팽성(彭城=현재의 江蘇省 徐州)으로 돌아가서 그곳을 수도로 정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고 칭하며 제후들에 대한 대규모적인 봉건을 실시했지만, 그러나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그것이 공평치가 못했던 것이어서 많은 제후들로부터 불만을 샀다. 그리고 또 그는 이미 전에 항량(項梁)이 옹립했던 초(楚)의 회왕(懷王)을 <義帝>라고 부르며 격상시키는 듯했지만, 하지만 또 천도(遷都)라는 명목으로 원격지로 연행해가다가 도중에서 죽였다.

 2. 초한전쟁(楚漢戰爭)

 기원전 206년, 제(齊)의 왕족이었던 전영(田榮)이 항우(項羽)를 상대로 군사를 일으키자 그것을 계기로 그때까지 항우(項羽)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제후들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또 의제(義帝)의 처참한 죽음을 알게 된 유방(劉邦)도 그 명분으로 봉기하며 제후들에게 함께 봉기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그 초한전쟁(楚漢戰爭)의 시발점이었으며, 그 발발의 원인이었다. 그리고 아래는 그때 유방(劉邦)이 제후들에게 돌렸던 격문의 내용이라고 하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단, 해석은 본인이 했으므로, 그에 부족함을 느끼시는 분은 따로 연구해주시길 바랍니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여 옹립한 우리들의 지주(支柱)이셨던 의제(義帝)를 대역무도한 항우(項羽)가 참살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 스스로 상주(喪主)가 되려고 하니, 모든 제후들께서도 흰 상복(喪服)을 입고 애도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관내(關內)의 병사들과 이 땅의 백성들이여, 원컨대 의제(義帝)를 죽인 저 초(楚)의 살인자를 응징함에 동참하라!>

 天下共立義帝,北面事之.今項羽放殺義帝於江南,大逆無道.寡人親為發喪,
 諸侯皆縞素.悉發關内兵,收三河士,南浮江漢以下,願從諸侯王擊楚之殺義帝者.

 
그러자 항우(項羽)는 스스로 토벌군을 인솔하며 각지를 전전했다. 하지만 항우(項羽)가 나타나면 반란은 곧 사그라졌지만, 그러나 항우(項羽)가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반란은 격화되어서 상황은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전개되어갔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 복수(復讐)로 반란군이 항복을 해도 받아주지 않았으며, 반란을 일으킨 나라의 병사들은 전원 생매장시켜 버렸다. 그리고 또한 그곳의 주민들에게도 인정사정 봐주는 것 없이 처참하게 도륙해버려서 항우(項羽)는 가는 곳마다 원성(怨聲)을 사게 되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던 사람들은 병민(兵民)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는 필사적으로 항우(項羽)에게 저항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전쟁은 점점 더 진흙탕싸움처럼 변해갔다. 그리고 또 그때, 특히 제(齊)에는 70여 곳의 성(城)이 있었는데, 그래서 항우(項羽)는 그 때문에 더욱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고, 거기다 또 구강왕(九江王)에 봉했던 영포(英布)마저 몇 번이나 구원을 요청했지만 병을 핑계로 달려 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항우(項羽)는 전술에서는 매우 우수했지만, 하지만 전략과 정략(政略) 그리고 인망(人望=德望)이 부족했으며, 또한 직정경행형(直情径行型=直行=생각한 것을 꾸밈없이 그대로 행동으로 나타낸다거나, 예법 같은 것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함는 것을 말함)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 쉬웠다. 그리고 또 당시 3진(秦=關中=앞에서 설명되었음)을 평정했던 유방(劉邦)은 위(魏)·조(趙) 등과 연합해서 50만이 넘는 대군으로 초(楚)의 팽성(彭城)을 점령했다. 하지만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팽성(彭城)의 싸움으로 그곳은 다시 항우(項羽)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또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그 결과 유방(劉邦)은 패주했고, 그의 아버지와 아내는 포로가 되었다. 그 후, 항우(項羽)는 형양(滎陽) 일대(一帶)까지 유방(劉邦)을 몰아붙여서(滎陽의 싸움), 기선(機先)을 잡는 듯 했지만, 하지만 또 이어서 행해졌던 한신(韓信)의 위(魏)·조(趙)·연(燕)·제(齊)의 원정(遠征) 그리고 항우에게 불만을 가졌던 팽월(彭越), 그리고 또한 이미 배신했던 영포(英布) 등과 또 타(他) 제후들에 의한 후방교란작전 등으로 항우는 많은 골치를 앓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런 이유들로 해서 몇 번이나 유방(劉邦)을 잡을 수는 있었지만, 하지만 또 꼭 마지막 순간에 놓치고 말았고, 그리고는 소하(蕭何)에게로 도망갔던 유방(劉邦)과 다시 대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틈을 노려서 행해졌던 진평(陳平)에 의한 내부분열 때문에 항우(項羽)는 결국 범증(范增)까지 잃게 되었고, 그로써 그는 점점 더 힘든 형국으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以下, 後述 또는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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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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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6. 한초전쟁(漢楚戰爭)

 6-1 항우(項羽)와의 대결

 그러자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의 진언(進言)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이어서 한신(韓信)의 예언(豫言)대로 항우(項羽)에 대한 반란이 속발(續發)하기 시작했으며,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것들을 차례로 진압해가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그리고 또 그때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에게도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장량(張良)의 안(案)을 받아들여서 그곳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던 잔도(棧道)를 다 태워 없앴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자신은 밖으로 나갈 의사가 전혀 없음을 항우(項羽)에게 보였던 동시에, 문안편지 같은 순종(順從)의 뜻이 담긴 편지 같은 것도 함께 보내는 것으로 자신에게는 반항의 의사가 전혀 없음을 가장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도 그때서야 안심을 하고는 다음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서 제(齊)의 전영(田榮)으로 출발했다. 그러자 또 그때만 기다리고 있었던 유방(劉邦)은 잔도(棧道) 이전에 사용했던 옛길을 통해서 관중(關中)으로 쳐들어갔고, 그리고는 단번에 장한(章邯) 등을 치고는 관중(關中)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 후, 그곳에다 자신의 사직(社稷)을 세웠다. 그런 한편 항우(項羽)는 원정(遠征)을 갔던 제(齊)에서도 변함없이 성을 떨어뜨릴 때마다 그 주민들을 몰살하는 만행을 반복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제(齊)의 사람들은 더욱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항우(項羽)는 제(齊) 공략에 발이 묶여버렸고, 그러자 또 그 틈을 타서 유방(劉邦)은 한층 더 동쪽으로 군(軍)을 전진시켰다. 그리고는 그 도중에 만났던 왕(王)들을 공순(恭順-순순히 복종시킴)시키거나 정복해가면서 점점 더 항우(項羽)의 본거지였던 팽성(彭城)으로 향해갔다.

 6-2
대패(大敗)

 그리하여 기원전 205년, 유방(劉邦)은 자신의 군(軍)에 합류했던 제후(諸侯)들과, 그로 인해서 56만이란 대군(大軍)으로 늘어났던 연합군을 거느리고 팽성(彭城)에 입성(入城)했다. 그러자 한군(漢軍)은 승리감에 도취되어서 밤낮 성내(城內)에서 연회를 열었고, 여자(女子)들과 노닥거렸다. 그런 한편, 그 소식을 들었던 항우(項羽)는 끓어오르던 분노 속에 3만의 정예부대를 차출해서 서둘러 팽성(彭城)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방심하고 있던 한군(漢軍)을 무자비하게 도륙했고, 그래서 또 그때, 항우(項羽) 군에 의해서 죽은 사람은 10만이 넘었다고 하며, 그러자 또 그 시체들은 강을 다 막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彭城의 싸움) 그러자 유방(劉邦)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며 탈출했는데, 하지만 그때 그의 부인이었던 여치(呂雉)와 부친(父親) 유태공(劉太公)은 탈출하지 못하고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또 그 대패(大敗)로 인해서 그때까지 유방(劉邦)의 편이 되어주었던 제후(諸侯)들도 모두 초(楚)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 후 유방(劉邦)은 하후영(夏候嬰)과 유영(劉盈=惠帝) 그리고 노원공주(魯元公主)와 함께 마차를 타고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또 그때 하후영(夏候嬰)은 말을 몰고 있었는데, 그런데 중간에 적들에게 곧 따라잡힐 것 같은 위기가 찾아오자 유방(劉邦)은 차(車)의 무게를 줄일 목적으로 유영(劉盈)과 노원공주(魯元公主)를 차에서 밀어서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자 그에 놀랐던 하후영(夏候嬰)이 얼른 내려서 그 둘을 구해왔는데, 그러나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더 유방(劉邦)은 그런 짓을 했고, 그럴 때마다 또 하후영(夏候嬰)은 그 둘을 구해왔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아이는 부모에게서 태어나지만, 부모는 아이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때, 부모였던 유방(劉邦)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그 둘을 희생하려 했다는 것은 유교적(儒敎的)인 윤리(倫理)로 볼 때는 그리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 인물소개

 1.
노원공주(魯元公主) ?-기원전 187년

 유방(劉邦)의 장녀(長女). 생모(生母)는 여치(呂雉). 혜제(惠帝)는 남동생. 소설 등에서는 <노원(魯元)>이라고 쓴 곳도 많지만, 그러나 원래는 <노⋅원공주(魯⋅元公主)>라고 쓰는 것이 올바르며, 그 이유는 또 <노(魯)를 화장령(化粧領-시집갈 때 받은 영지)으로 받은 황제의 장녀>가 그 원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원공주(元公主)>라는 말은 나중의 <장공주(長公主=황제의 장녀)>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본명(本名)은 알 수 없으며, 장이(張耳)의 아들이었던 장오(張敖)와의 사이에 장언(張偃) 그리고 혜제(惠帝)의 황후(皇后)였던 장씨(張氏)가 있었다. 그녀는 패현(沛縣)에서 태어나서 유방(劉邦)이 동란(動亂)에 참가하기 위해서 집을 떠나자 그녀의 어머니 여치(呂雉)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 후는 위 본문에서 기술한대로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졌던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마차로 도주했을 때 갑자기 나타나서는, 또 미리 기술한대로 하후영(夏候嬰)의 도움으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후,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자 그녀는 조왕(趙王) 장오(張敖)에게 강가(降嫁-신하에게 시집감)했지만, 그러나 그 장오(張敖)가 모반의 혐의를 받고 후작(侯爵)으로 격하되자 그녀에게도 화(禍)가 닥쳐왔고, 그것은 또 흉노(匈奴)와의 평화교섭 용으로 목돌선우(冒頓單于)에게 그녀가 시집보내질 운명에 처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유방(劉邦) 또한 그럴 생각이었던 것 같았지만, 그러나 또 그때 여치(呂雉)가 나서서 그 일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유방(劉邦) 사후(死後)에 여치(呂雉)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모형(異母兄-배다른 오빠)이었던 제왕(齊王) 유비(劉肥)가 바쳤던 영토의 일부였던 성양군(城陽郡)을 헌상(獻上) 받아 제(齊)의 왕태후(王太后)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녀의 죽음에 관해서는 알 수가 없다.

 2.
여치(呂雉) ?-기원전 180년

 유방(劉邦)의 부인. 혜제(惠帝)의 어머니. 자(字)는 아후(娥姁). 시호(諡號)는
고후(高后=高皇后). 유방(劉邦) 사후(死後) 황태후(皇太后)·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었고, 여후(呂后) 또는 여태후(呂太后)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녀는 <중국 3大 악녀(惡女)> 중 한명이었다. 그녀는 단부(單父=現 山東省 單縣)의 유력자였던 여공(呂公=呂文叔平)의 딸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 후, 당시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던 유방(劉邦)에게 시집을 갔고, 슬하(膝下)에 일남일녀(나중의 惠帝와 魯元公主)를 두었다. 그리고 당시 밖으로만 나돌던 유방(劉邦)을 대신해서 시아버지 유태공(劉太公)과 함께 가업(家業)인 농업에 힘쓰며 열심히 아이들을 길렀다.(그 사이에 그녀의 여동생이었던 呂須는 樊噲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또 그녀는 바로 그때에 지나가던 노인에게서 <천하를 얻을 귀부인의 상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일설에 의하면, 시황제(始皇帝)가 <東南 쪽에 天子의 氣(運)가 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유방(劉邦)은 시황제(始皇帝)가 순행을 나왔을 때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는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고 한다.(하지만 또 이 부분에서는, 유방은 그 시황제의 말 때문이 아니라, 부역을 나갔을 때 인부들이 모두 도망을 가버려서 어쩔 수 없이 몸을 숨겼던 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방(劉邦)이 어디에 있든 여치(呂雉)는 금방 찾아냈다고 하며, 그러자 또 그것이 너무도 신기했던 유방(劉邦)이 그 이유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당신이 있는 곳에는 항상 하늘에 꿈틀거리는 구름(龍雲)이 있기 때문에 금방 찾아낼 수가 있어요!> 그러자 그 말은 금방 소문이 되어서 퍼져나갔고, 그 때문에 유방(劉邦)에게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말(秦末) 동란기(動亂期)와 초한전쟁(楚漢戰爭) 개시 직후에는 패현(沛縣)에서 유방(劉邦)의 가족들은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같았으며, 그러나 초한전쟁(楚漢戰爭)이 격화되고,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졌을 때, 역시 갑자기 등장해서는 그녀와 유태공(劉太公)은 그곳에서 포로로 잡히게 된다. 그리고 유방(劉邦)은 하후영(夏候嬰)과 자식 둘을 데리고 전격(電擊) 탈출을 감행했으며, 그 후에 초한전쟁(楚漢戰爭)이 유방(劉邦)의 승리로 돌아가고, 기원전 202년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자 그녀는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않아서 유방(劉邦)이 친정(親征)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가 많았을 만큼 어수선했고, 그런데다 또 궁중 내에서는 벌써부터 다음 후계자를 둘러싸고 암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자 그러했던 상황에서 그녀는 유방(劉邦)의 부재 시 뒤를 보좌했고, 그 사이에 또 한신(韓信)이 반란을 모의한 것을 적발해서 소하(蕭何)와 함께 처리하는 등, 여장부로서의 능력도 보여주었다.(단, 그에는 이견이 있으며, 여치가 한신을 모함해서 죽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그 여세를 몰아서 자신의 일족(一族)들과 장량(張良) 등, 중신(重臣)들의 도움을 받아서 당시 황태자의 지위에 올라 있던 유영(劉盈)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以下, 後述)

 그리하여 유방(劉邦)은 탕(碭)으로 가서 군사를 다시 모으고는 겨우 한숨을 돌렸지만, 하지만 그곳조차 항우(項羽)의 공격을 받게 된다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이란 것을 알고는 수하(隨何)에게 명(命)해서 영포(英布)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획책했고, 그 계책은 성공했다.

                                     


<탕산 현의 위치도>


 ※ 수하(隨何) 생몰미상(生沒未詳)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유생, 정치가, 외교관이었고, 유방(劉邦)의 휘하에서 알현(謁見-接客)을 맡았다. 기원 전 205년, 유방(劉邦)은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항우(項羽)에게 대패(大敗)했다. 그리고는 겨우 몸만 보존하고는 우(虞=河南 虞城)까지 도망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 상황을 타개하고자 당시 항우(項羽)의 수하 중 한명이었던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를 회유하기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자 수하(隨何)가 스스로 그 역(役)을 자청하고 나왔고, 이어서 20명의 종자들만 인솔해서 영포(英布)에게로 향했다. 그는 구강(九江)에 도착하자 우선 태재(太宰-외교와 국방을 담당하던 관청의 일종으로, 여기서는 사신을 접객하던 관청을 이름)의 손님 자격으로 영포(英布)와의 회담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가진 회견에서 영포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현재로는 유방(劉邦)이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 같이 보이나, 그는 덕이 있는 사람이므로 곧 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서 항우(項羽)는 포악한데다 현재 적진(敵陣) 너무 깊숙이까지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유방(劉邦)이 다시 재기하게 되면 항우(項羽)는 오도 가도 못할 처지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항우(項羽)의 편에 서실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또 만약에 이런 때에 당신이 유방(劉邦)을 도와주기만 한다면, 천하는 곧 우리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영포(英布)는 수하(隨何)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비록 결정은 그렇게 내렸지만 속으로는 갈등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마침 항우(項羽)로부터 재차 파병의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자 수하(隨何)는 영포(英布)에게 결단을 촉구했고, 마침내 영포(英布)는 항우(項羽)의 사자를 죽이고 유방(劉邦)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었던 항우(項羽)는 그 즉시 용차(龍且)와 항장(項莊)을 파견해서 수개월에 걸쳐서 구강(九江)을 공락했고, 그러자 마침내 영포(英布)는 유방(劉邦)에게로 도주했다. 그 후였던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항우(項羽)가 자살하고 천하는 유방(劉邦)의 것이 되었다. 그런데 그 축하연에서 유방(劉邦)은 제신(諸臣)들 앞에서 <수하(隨何)는 썩은 유생(儒生)으로, 아무 짝에도 쓸 모가 없는 자이다>라고 폄하(貶下)했다. 그러자 모욕감을 느꼈던 수하(隨何)는 유방(劉邦)에게 이렇게 물었다. <팽성에서 폐하가 졌을 때, 보병 5만과 기병 5천으로 회남(淮南=九江)을 공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유방(劉邦)이 <할 수 없었다!>라고 답을 했다. 그러자 또 수하(隨何)가 물었다. <그러나 저는 단지 20명의 종자들만 데리고 회남(淮南)으로 가서 영포(英布)를 설득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보병 5만과 기병 5천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제가 아무 짝에도 쓸 모가 없다니, 그것은 도대체 무슨 뜻에서입니까?> 그러자 그때서야 유방(劉邦)은 그를 인정하고 호군(護軍)중위(中尉)의 직(職)을 내렸다.

 
그러나 영포(英布)는 초(楚)의 무장이었던 용차(龍且)와 싸워서 지고는 유방(劉邦)에게로 도주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군사를 모으면서 영양(榮陽-河南省)으로 향했고, 그곳에 도착하자 그 주변에 용도(甬道=벽으로 두른 도로)를 쌓았으며, 또한 식료 등 물자를 운반해서 농성(籠城) 준비에 들어갔다.<바로 그 시기에 진평(陳平)이 합류했다>

                                                  


<하남 성>


 그런 한편, 유방(劉邦)은 별동대로 한신(韓信)을 파견해서 위(魏)와 조(趙)를 공격하는 것으로 항우(項羽)의 배후(背後)를 견제(牽制)하게 했다. 그리고 또 도적이었던 팽월(彭越)을 이용해서 항우(項羽) 군의 배후를 급습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204년, 초군(楚軍)의 공격은 더욱 격렬해졌고, 용도(甬道) 또한 파괴되었던 데다, 생필품마저 고갈되어서 한군(漢軍)은 더욱 더 힘들어졌다. 그러자 또 그때 진평(陳平) 나서서 항우(項羽) 군에 이간의 계(離間計)를 걸었고, 그 결과 범증(范增)과 종리매(鐘離昧) 사이를 이간(離間)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또 범증(范增)은 은퇴하고 귀향하던 중,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등창으로 사망했다.

 용차(龍且) ?-기원전 203년

 초(楚)의 무장. 항우(項羽)의 부하. 기원전 206년, 유방(劉邦)이 기병해서 삼진(三秦)을 평정하자 그는 위(魏)의 항타(項他)와 함께 정도(定陶)의 남쪽에서 한(漢)의 관영(灌嬰) 군과 싸워서 패했다.<史記의 번력등관(樊酈滕灌)열전> 기원전 204년, 그는 항성(項聲)과 함께 회남(淮南)을 공격해서 경포(黥布) 군을 물리쳤다. 그러자 경포(黥布)는 한(漢)으로 도망갔다.<史記의 경포(黥布)열전> 기원전 203년 10월, 한신(韓信)이 임치(臨淄)를 평정하자 항우(項羽)는 그에게 군사 20만을 주어서 파견했다. 그리하여 동년(同年) 11월, 그는 한신(韓信)과 유수(濰水)에서 대진(對陣)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야간(夜間)동안에 유수(濰水) 상류에서 흙 부대를 쌓아 둑을 만들어서 미리 물을 막아 두었다. 다음날 한신(韓信)은 군을 인솔해서 강을 중간쯤 건너다가 용차(龍且)의 공격을 받고 도주했다. 그러자 용차(龍且)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원래부터 네가 겁쟁이인줄을 알고 있었다!>라고 외치면서 한신(韓信) 군을 추격했다. 그러자 적당한 시기에 한신(韓信)은 미리 쌓아두었던 흙 부대를 무너뜨렸고, 그에 용차(龍且)와 그 군은 대부분 수몰(水沒)했다.<史記의 회음후(淮陰侯)열전>

 
팽월(彭越) ?-기원전 196년

 중국 진말(秦末)기부터 초한전쟁(楚漢戰爭)기의 무장. 자(字)는 중(仲). 진말(秦末) 전란(戰亂) 중에 대도적(大盜賊)으로 활약했고, 유방(劉邦) 휘하에 들어간 후에는 후방교란 등 전공을 올렸다. 그는 창읍(昌邑=現在의 山東省 金鄕縣) 사람으로, 젊었을 때는 거야(鉅野)의 소택(沼澤-늪과 못 지역으로, 나중의 梁山泊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에서 어부를 하면서 도적질을 했다. 그러다가 진(秦)의 악정(惡政) 때문에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몇 번에 걸친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서 수령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그 첫 명령으로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수령이 된 기념으로 내일 아침에 출진할 것이다. 하지만 제일 늦게 오는 사람은 그 본보기로 처형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오합지졸로, 아침은커녕 아예 오후에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약속대로 제일로 지각한 사람을 처형했다. 그러자 그 후로는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무렵, 세상은 진승(陳勝)과 항량(項梁) 등의 봉기로 소란스러웠고, 이어서 유방(劉邦)이 초(楚) 회왕(懷王)의 명령을 받아서 함양(咸陽)을 공략하러 가던 중, 위(魏)의 창읍(昌邑)을 공략하게 되자, 그도 유방(劉邦)을 도와서 함께 공략했다. 그 후, 진(秦)은 항우(項羽)에 의해 멸해졌고, 이어서 항우(項羽)는 거성(居城)으로 돌아와서 대진(對秦)전쟁에서 공을 세웠던 사람들에게 영토를 분배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화가 난 팽월(彭越)은 같은 불만을 가지고 있던 구제(舊齊)의 왕족 전영(田榮) 등과 함께 양(梁=舊魏의 땅으로, 開封 주변)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그때 彭越은 田榮에게서 장군의 印을 받았으므로, 장군의 자격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또 그때, 유방(劉邦)도 관중(關中)을 공격해서 구진(舊秦)의 영토를 모두 손에 넣고 항우(項羽)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 후, 팽월(彭越)은 양(梁)을 누비며 몇 곳의 도(都)를 공략했다. 그러자 그에 화가 난 항우(項羽)가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그러나 팽월(彭越)은 그것조차도 격퇴했다. 그 후, 유방(劉邦)이 동쪽으로 진군해서 구위(舊魏)의 왕족이었던 위표(魏豹)를 위왕(魏王)에 앉히자 그때 팽월(彭越)도 재상(宰相)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또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져서 도망을 갔으므로, 그도 그곳에서 도망을 가서 그때부터는 게릴라작전으로 들어갔다. 그 후, 그는 게릴라작전을 펼치면서 계속해서 초군(楚軍)의 식량을 불태우는 식으로 괴롭혔고, 그러자 그 효과로 항우(項羽) 군은 늘 식량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때문에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에게까지 힘을 뻗칠 여력이 없었고, 그래서 유방(劉邦)은 그 덕분에 몇 번이고 목숨을 건졌다. 그 후,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싸움은 최절정에 도달했고, 마침내 광무산(廣武山)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보급이 끊어져버렸기 때문에 서로는 화해하고 일단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때, 장량(張良)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방(劉邦)에게 항우(項羽) 군의 배후를 덮치게 하고, 그리고 팽월(彭越)과 한신(韓信)에게는 두 사람이 공동작전을 펴서 항우(項羽)를 공략하라고 조언했지만, 그러나 팽월(彭越)도 한신(韓信)도 그의 말에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그때는 劉邦이 그에 대해서 아무런 포상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자 유방(劉邦)은 단독으로 항우(項羽) 군을 상대했지만, 오히려 져버렸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하는 수 없이 한신(韓信)에게는 막대한 포상을 약속했고, 팽월(彭越)에게는 양왕(梁王)에 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그때서야 두 사람은 전장으로 향했고, 이어서 원군을 얻었던 유방(劉邦)은 해하(垓下)까지 항우(項羽)를 추적해서 멸했다. 그 후, 약속대로 양왕(梁王)이 된 팽월(彭越)은 갖은 영화(榮華)를 다 누렸다. 하지만 그 후로 유방(劉邦)은 점점 더 의심이 많아졌고, 마침 그러했던 때에 북쪽의 대(代)에서 진희(陳豨)가 유방(劉邦)을 배신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친정(親征)을 나서며 팽월(彭越)에게도 출진할 것을 명했지만, 그러나 팽월(彭越)은 병을 핑계로 자신은 나서지 않고 군사만 보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화가 나서 그를 문책했다. 그러자 또 팽월(彭越)은 그 일로 해서 자신이 숙청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며 몹시 두려워했다. 그러자 또 그때 팽월(彭越)의 부하였던 호첩(扈輒)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팽월(彭越)에게 조언했지만, 그러나 팽월(彭越)은 그말도 듣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하지만 또 그러던 중에 그의 부하 중 누군가가 <彭越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라는 중상모략을 유방(劉邦)에게 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를 속여서 잡아들이고는 양왕(梁王)의 지위를 빼앗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를 죽일 생각이었던 유방(劉邦)도 그러나 막상 그를 대하자 동정심이 생겨서 죽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방(劉邦)은 그를 죽이지는 않고 일단 서민(庶民)으로 강등시킨 후, 촉(蜀)으로 보내는 것(일종의 流配)으로 그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촉(蜀)은 너무 먼 변경(邊境)이므로, 자신의 고향인 창읍(昌邑)으로 돌아가서 은둔하게 해달라>고 여치(呂雉)에게 울면서 매달렸다. 그러자 또 그 앞에서는 유방(劉邦)에게 그렇게 말해주겠다고 한 여치(呂雉)였지만, 그러나 여치(呂雉)는 유방(劉邦)을 대하자 <그는 위험한 인물이므로 살려두면 필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했고, 그 결과로 그는 처형되었다. 그 후, 그의 사체는 여치(呂雉)에 의해서 방부처리로 소금에 절여졌고, 제후들에게 보내졌다.

 참고: 그러나 소금에 절인다는 것은 食肉은 물론 뼈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하지만 彭越의 경우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또 그 일은 한신(韓信)의 예와 함께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예가 되었고, 나중에 영포(英布)의 반란을 부르는 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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