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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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6. 한초전쟁(漢楚戰爭)

 
6-2 대패(大敗)

 
※ 인물소개

 종리매(鐘離昧-?부터 기원전 201년)는, 진말(秦末)에서 전한(前漢)초기의 무장이었다. 그리고 매를 매(昧)나 말(昩) 등으로 쓴 곳도 있으나, 그러나 여기서는 중화서국본(中華書局本) 한서(漢書)에 따라서 매(眛)로 기술함. 그리고 또 사기(史記)에서는 항우(項羽)의 부장(部將)으로, 포 장군(蒲將軍)이란 인물의 사적(事蹟)이 산견(散見)되는데, 그래서 타케야스히코(佐竹靖彦)란 자는 <그 포 장군(蒲將軍)이 종리매(鐘離眛)와 동일인물이 아니었을까?...>라고 지적했던 바 있었으며, 그리고 또 그 이유로는 종리매(鐘離眛)는 종리(鐘離)라는 도시<수춘(壽春)에서 회수(淮水) 아래로 150킬로에 위치하며, 당시 회왕(懷王)의 초도(楚都)였던 우태(盱台)와 수춘(壽春)의 중간지점에 있었다> 출신이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또 그 리(鐘離)에서 북쪽으로 70킬로 정도에 포고피(蒲姑陂)라는 지명이 있는데, 그래서 그 지명을 따서 포 장군(蒲將軍)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덧붙여서, 그렇게 해석할 경우 <항왕(項王=項羽)의 망장(亡將) 종리매(鐘離眛)의 집은 이로(伊盧)에 있다>라고 했던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와의 정합성(整合性)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사기(史記) 권(卷)92 회음후(淮陰侯)열전과 한서(漢書)의 한신전(韓信傳)> 그리고 또, 그 이로(伊盧)의 위치가 어디였던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지만, 그러나 남조송(南朝宋) 배인(裵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그리고 당(唐)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등에 의하면, 한(漢)의 중로현<中盧縣=현재의 호북성(湖北省) 양번시(襄樊市) 부근>이라는 설(說)과 동진(東晋)의 서광(徐廣)에 의한 <동해(東海-)의 구현(朐縣)에 이로향(伊盧鄕)이란 지명이 있다>라고 하는 설(說), 그리고 또 안사고(顔師古)의 <중노(中盧)는 양양(襄陽)의 남쪽에 있다>라고 하는 설(說) 등이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도 사타케야스히코(佐竹靖彦)는 <종리매(鐘離眛)는 전혀 이로(伊盧) 출신이 아니었다>라고 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는 진말(秦末) 초(楚)의 항량(項梁)·항우(項羽)가 군사를 일으키자 그에 참가했다. 그리고 진(秦) 멸망 후 초한전쟁(楚漢戰爭)에서도 항우(項羽)의 부장(部將)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나중에 유방(劉邦)의 부하였던 진평(陳平)의 계략에 넘어가서 항우(項羽)에게 미움을 받았다. 항우(項羽) 사후(死後), 그는 옛 친구였던 한신(韓信)에게로 가서 신변을 의탁했다. 하지만 제위에 즉위했던 유방(劉邦)이 그것을 알고는 당시 초왕(楚王)이 되어 있었던 한신(韓信)에게 그를 넘겨줄 것을 명령했다. 왜냐하면, 유방(劉邦)은 그때, 과거 항우(項羽)와 함께 자신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그때 마침 한신(韓信)이 모반을 꾀한다고 중상모략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진평(陳平)의 진언(進言)을 받아들여서 한신(韓信)을 치려고 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몹시 두려워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누군가가 한신(韓信)에게 <종리매(鐘離眛)를 죽여서 용서를 받으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그것을 알았던 종리매(鐘離眛)가 이렇게 말을 했다. <유방(劉邦)이 이곳을 공격하지 않고 있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를 죽여서 유방(劉邦)에게 아첨 떨 생각이라면, 너도 조만간 나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결코 덕(德)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문(自刎-자신의 목을 스스로 잘라서 죽음)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이간계(離間計)>는 성공했지만, 그러나 한(漢)의 식량부족은 여전했다. 그러자 그때, 그 위기를 타개하고자 기신(紀信)이 나서서 유방(劉邦)에게 <금선탈각의 계(金蝉脱殻計)>를 진언(進言)했고,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그 계책을 받아들여서 간신히 서쪽으로 탈출했다. 그 후 형양(滎陽)은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주가(周苛)가 지키게 되었지만,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항우(項羽)에 의해서 그곳은 떨어졌다.

 ※ 기신(紀信-?부터 기원전 204년)은, 한(漢)의 장군으로, 기원전 207년 홍문(鴻門)의 회(會)에서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로부터 피신했을 때, 번쾌(樊噲)·하후영(夏候嬰)·근강(靳彊) 등과 함께 유방(劉邦)을 호위했다.<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따름. 그러나 한서(漢書)의 고제기(高帝記)에서는 기신(紀信)을 기성(紀成)이라고 기록하고 있음> 그리고 기원전 204년 여름, 항우(項羽)가 인솔하던 10만의 군세가 형양성(滎陽城=河南省)에 주둔하던 한군(漢軍)을 포위했다. 그러자 식량이 바닥이 나서 곧 낙성(落城)할 운명에 처했는데, 그러자 그때 기신(紀信)이 유방(劉邦)에게 <금선탈각의 계(金蝉脱殻計)>를 진언했다.

 
★ 금선탈각의 계(金蝉脱殻計)는 병법(兵法) 36계(計) 중 제(第) 21계(計)로, 여기서의 금(金)은 유방(劉邦)을 말하는 것이고, 선탈(蟬脫)은 매미가 허물을 벗는다는 의미임, 그리고 탈각(脫殼) 역시 껍질을 벗는다는 뜻이므로, 그래서 그때 기신(紀信)은 자신이 유방(劉邦)으로 변장하여 항우(項羽)에게 거짓 항복하는 사이에 유방(劉邦)을 피신시키려고 했던 계책이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 계책을 받아들여서 진평(陳平) 등 수십 명의 부하들만 데리고서 성고성(成皐城)을 탈출했다. 그러자 그때 미끼로 남았던 기신(紀信)은 항우(項羽)에 의해서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주가(周苛-?부터 기원전 204년)는, 전한(前漢)초기의 부장(部將)으로 패(沛)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때, 종제(從弟)였던 주창(周昌)과 함께 진(秦) 사수군(泗水郡)의 졸사(卒史-정확한 직책은 알 수 없으나, 최하급관리로 생각됨)로 있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이 군사를 일으키자 사수군수(泗水郡守) 감(監)을 격파하고 두 사람 다 유방(劉邦)을 따랐다. 그리고 주가(周苛)는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최초로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그리고 고조(高祖) 3년(기원전 204년) 여름, 유방(劉邦)이 형양(滎陽)에서 항우(項羽)에게 포위당하고, 이어서 기신(紀信)의 계책으로 탈출하자 주가(周苛)는 위표(魏豹), 종공(樅公), 한왕 신(韓王信) 등과 함께 형양(滎陽)을 수비했다. 그 후, 항우(項羽)가 기신(紀信)을 태워죽이고, 점점 더 압박을 가해오자 주가(周苛)는 종공(樅公)에게 <위왕표(魏王豹)가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말하고는 함께 모의해서 위왕표(魏王豹)를 살해했는데, 그때가 가을 8월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1개월 정도 후에, 형양(滎陽)은 함락되었고, 주가(周苛) 등은 포로로 잡혔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에게 <나의 장군이 되어준다면 상장군에 임명하고 봉읍(封邑) 3만 호를 내리겠다!>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는 오히려 <너야말로 빨리 한(漢)에 항복하지 않으면 한(漢)의 포로가 될 것이다. 너 따위들은 한왕(漢王)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를 삶아서 죽였다. 그리고 또 그때, 종공(樅公)도 함께 처형되었지만, 그러나 한왕 신(韓王信)은 항복을 해서 목숨을 건졌다.<그러나 후에 다시 배반하고 유방(劉邦)에게로 귀순함>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의 종제(從弟) 주창(周昌)을 그 후임으로 해서 어사대부(御史大夫)에 명했다. 그리고 또 천하통일 후에는 그의 공을 기려서 그의 아들 주성(周成)을 고경후(高景侯)에 봉했다.<사기(史記) 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에 의함>

 어쨌든, 그렇게 해서 서쪽으로 피신했던 유방(劉邦)은 관중(關中)에 남아있던 소하(蕭何)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소하(蕭何)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군사를 이끌고서 형양(滎陽)을 구원하러 가려고 했다. 그러자 또 원생(袁生-자료 없음)이란 자가 그를 말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지금의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습니다. 그러니 남쪽의 무관(武關)으로 돌아가서 항우(項羽)를 유인하는 책(策)을 쓰십시오!> 그러자 유방(劉邦)은 원생(袁生)의 말대로 움직였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도 유방(劉邦)이 있던 곳으로 군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팽성(彭城)을 책동(策動)했고(聲東擊西), 그러자 또 그에 놀랐던 항우(項羽)가 참지 못하고 서둘러서 팽월(彭越)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때 항우(項羽)와 정면 승부를 할 생각은 없었던 유방(劉邦)은 서둘러서 북쪽으로 이동해서 성고(成皋=河南省 氾水)로 들어갔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을 끝까지 추격했고, 그에 또 유방(劉邦)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서 그곳에서도 퇴각했다.
그 후 유방(劉邦)은 하후영(夏候嬰)만 데리고 한신(韓信)이 주둔하고 있던 수무(修武=河南省 獲嘉)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숙식을 하면서 한신(韓信)의 군대를 접수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한신(韓信)에게 제(齊)를 공략할 것을 명(命)했으며, 그와 동시에 조참(曹參)과 관영(灌嬰)을 그의 휘하에 넣었다. 그리고는 또 노관(盧綰)과 종형제(從兄弟) 유가(劉賈)에게는 항우(項羽)의 본거지였던 초(楚)로 파견시켜서 후방교란을 명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단번에 제(齊)를 굴복시켰고, 이어서 초(楚)에서 달려왔던 20만의 용차(龍且) 군도 격파했다. 하지만 그때 <서로 간의 착오>로 인해서 당시 제(齊)와 협상을 하러갔던 력식기(酈食其)가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 하지만 이 부분은 앞의 인물소개 '력식기(酈食其) 편'에서 소개한 것과 내용면에서 조금 차이를 보이는데, 그러나 위 본문(本文)에서 <착오(錯誤) 또는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기술했기 때문에, 그래서 전체의 내용은 본문(本文)에 따르기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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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소개

 관영(灌嬰-?부터 기원전 176년)은, 중국 진(秦)·전한(前漢)시대 유방의 무장이었으며, 수양(睢陽)의 비단상인이었다.

 ☆ 수양(睢陽)은 중국(中國)의 옛 지명(地名)이며, 춘추(春秋) 시대 송(宋)나라의 땅이었다. 옛날의 성(城)은 현재(現在)의 하남성(河南省) 상구시(商丘市)의 남쪽에 있으며,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안녹산의 난 때, 태수(太守)였던 허원(許遠)이 그곳에서 적장(賊將) 윤자기(尹子寄)를 막았으나, 성이 함락(陷落)되면서 잡혀서 죽었다고 한다.

 그는 항량(項梁)이 장한(章邯)에게 패한 후, 유방(劉邦)이 탕(碭)으로 돌아왔을 무렵부터 유방(劉邦)을 따랐다. 그리고는 진(秦)과의 싸움에서 공적을 올렸고, 무관(武關)에서 진(秦)을 토벌한 후 창문군(昌文君)이란 칭호가 주어졌다. 그 후,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낭중(郎中=近衛兵)이 되었고, 그 다음에 중알자(中謁者)가 되어서, 3진(秦)을 평정했고, 은왕(殷王) 공격 등에도 종군했다.

 ☆ 3진(秦)은 항우(項羽)가 진(秦)을 멸한 후, 유방(劉邦)을 견제하기 위해서 구진(舊秦) 관중(關中)을 셋으로 나눈 뒤, 장한(章邯)과 사마흔(司馬欣) 그리고 동예(董翳)에게 내렸던 땅을 말함

 
중알자(中謁者)는 한관의(漢官儀)에 따르면 <알자(謁者)는 정원 35명, 낭중(郎中) 중에 1년간 녹봉을 받은 사람을 급사(給事)라고 칭하고, 그 중에 1년을 채운 자를 관알자(灌謁者)라고 칭한다>라고 했고 또 <관영(灌嬰)은 7년을 채웠으므로 유방(劉邦)이 대알자(大謁者)라고 칭했다>라고 했으므로, 그것으로 중알자(中謁者)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방(劉邦)이 팽성(彭城) 싸움에서 진 후, 형양(滎陽)에서 초(楚)의 기병(騎兵)과 맞싸울 기병대장을 뽑으려고 했을 때, 유방(劉邦)은 당시 진인(秦人)으로 기사(騎士)였던 이필(李必)과 낙갑(駱甲)을 대장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유방(劉邦)에게 측근이면서도 승마전투에 뛰어난 사람을 선택할 것을 진언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관영(灌嬰)을 선택했고, 그 두 사람은 교위(校尉)로 따르게 했다. 그 후, 관영(灌嬰)은 중대부(中大夫)가 되었고, 낭중(郎中) 기병을 인솔해서 초(楚)의 기병을 격퇴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는 기병을 인솔하며 별동대로 활약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그리고 또 한신(韓信)의 휘하에서는 제(齊)를 정복하고, 용차(龍且)를 제압하는 등 많은 활약을 펼쳤다.(하지만 그때, 실제로 龍且를 죽인 것은 그의 부하였다고 하며, 그는 亞將이었던 周蘭을 생포했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 그는 초(楚)의 영토를 공격했고, 하비(下邳)와 팽성(彭城)을 공략했다. 그리고 그 후, 항우(項羽)가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져서 도주했을 때, 그는 유방(劉邦)의 명을 받아서 항우(項羽)를 추격했다. 그래서 그때, 항우(項羽)의 시체를 거두었던 다섯 사람(5人)은 바로 그의 부하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도 그는 오군(吳郡) 등 강남(江南), 회북(淮北)을 평정했다. 그리고 또한 연왕(燕王) 장도(臧筡)의 토벌에도 종군했으며, 초왕(楚王) 한신(韓信)을 잡을 때도 동행했다. 그리하여 고조(高祖) 6년(기원전 201년)에 그는 영음후(潁陰侯=食邑 2500戶)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후, 그는 한왕 신(韓王信)의 반란진압에도 종군했지만, 그러나 흉노(匈奴) 기병들을 물리친 후 유방(劉邦)과 함께 평성(平城)에서 포위당했던 일도 있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도 진희(陳豨)의 반란, 영포(英布)의 반란진압에도 종군했으며, 그 공으로 2500호(戶)를 가증(加增=增俸 또는 增封)받았다. 그 후, 유방(劉邦)이 죽자 그는 혜제(惠帝)와 여치(呂雉)를 따랐으며, 여치(呂雉)가 죽은 후에는 제왕(齊王)이 여 씨(呂氏) 타도를 외치며 거병하자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병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주발(周勃) 등과 모의해서 당시 형양(滎陽)에서 주둔하고 있던 제왕(齊王)에게 자신들이 여 씨(呂氏)를 타도할 것이란 암시를 주자 그에 제왕(齊王)은 싸우지 않고 군(軍)을 물렸다. 여 씨(呂氏)를 멸 후, 그는 문제(文帝) 옹립에 참여해서 다시 3000호(戶)를 가증(加增)받았고, 태위(太尉)가 되었다. 그리고 문제(文帝) 전(前) 3년(기원전 177년)에 승상 주발(周勃)이 파면되자 그는 그 후임이 되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흉노(匈奴)가 북방으로부터 침입해오자 그는 기병 8만 5천을 인솔해서 요격에 나섰지만, 그러나 그때는 이미 흉노(匈奴)가 떠난 뒤였고, 또 마침 그때 제북왕(齊北王) 유흥거(劉興居)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그에 진군(進軍)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176년 그는 사망했고, 시호(諡號)는 의후(懿侯)가 내려졌다. 그 후, 그의 아들 관하(灌何=平侯)가 그의 뒤를 이었고, 그리고 그 관하(灌何)는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의 亂)을 진압하기 위해서 종군했다.(漢書 灌夫傳) 그 후, 관하(灌何)의 아들 관강(灌彊)이 죄를 지어서 관직이 끊어졌지만, 그러나 무제(武帝)에 의해서 관영(灌嬰)의 손(孫) 관현(灌賢)이 임여후(臨汝侯)에 봉해졌다. 하지만 그 관현(灌賢)도 뇌물(賂物)을 주고받았다는 죄가 인정되어서 나라가 몰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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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다시 지다(再敗)

 기원전 203년,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 대진(對陣)하면서 견고한 수비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 한편 항우(項羽)의 배후로 팽월(彭越)을 투입시켜서 초군(楚軍)의 병참(兵站)을 공격케 하고 있었다. 그러자 참지 못했던 항우(項羽)는 부하 조구(曹咎)에게 <보름정도까지는 돌아올 것이니까, 먼저 움직이지 말고 그때까지 잘 지키고 있어라!>라는 말을 하고는 팽월(彭越)을 잡기 위해 출진(出陣)했다. 하지만 항우(項羽)가 없던 틈을 노려서 한군(漢軍)이 자꾸 도발(挑發)을 해오자, 조구(曹咎)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출진해서 대패했다. 하지만 항우(項羽)가 다시 돌아오자 한군(漢軍)은 다시 방어태세로 들어가서는 도무지 항우(項羽)와 싸우려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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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소개

 항우(項羽) 2

 1. 서초패왕(西楚覇王)

 홍문(鴻門)의 회(會) 후,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을 용서한 후, 진(秦)의 마지막 왕이었던 자영(子嬰) 일족을 참살하고 함양(咸陽)을 불태우며 재보(財寶)를 약탈했다. 그러자 그 후, 지리적인 이점(利點)이 좋았던 함양(咸陽)을 수도로 하자는 진언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을 행할 목적으로 초(楚)의 팽성(彭城=현재의 江蘇省 徐州)으로 돌아가서 그곳을 수도로 정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고 칭하며 제후들에 대한 대규모적인 봉건을 실시했지만, 그러나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그것이 공평치가 못했던 것이어서 많은 제후들로부터 불만을 샀다. 그리고 또 그는 이미 전에 항량(項梁)이 옹립했던 초(楚)의 회왕(懷王)을 <義帝>라고 부르며 격상시키는 듯했지만, 하지만 또 천도(遷都)라는 명목으로 원격지로 연행해가다가 도중에서 죽였다.

 2. 초한전쟁(楚漢戰爭)

 기원전 206년, 제(齊)의 왕족이었던 전영(田榮)이 항우(項羽)를 상대로 군사를 일으키자 그것을 계기로 그때까지 항우(項羽)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제후들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또 의제(義帝)의 처참한 죽음을 알게 된 유방(劉邦)도 그 명분으로 봉기하며 제후들에게 함께 봉기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그 초한전쟁(楚漢戰爭)의 시발점이었으며, 그 발발의 원인이었다. 그리고 아래는 그때 유방(劉邦)이 제후들에게 돌렸던 격문의 내용이라고 하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단, 해석은 본인이 했으므로, 그에 부족함을 느끼시는 분은 따로 연구해주시길 바랍니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여 옹립한 우리들의 지주(支柱)이셨던 의제(義帝)를 대역무도한 항우(項羽)가 참살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 스스로 상주(喪主)가 되려고 하니, 모든 제후들께서도 흰 상복(喪服)을 입고 애도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관내(關內)의 병사들과 이 땅의 백성들이여, 원컨대 의제(義帝)를 죽인 저 초(楚)의 살인자를 응징함에 동참하라!>

 天下共立義帝,北面事之.今項羽放殺義帝於江南,大逆無道.寡人親為發喪,
 諸侯皆縞素.悉發關内兵,收三河士,南浮江漢以下,願從諸侯王擊楚之殺義帝者.

 
그러자 항우(項羽)는 스스로 토벌군을 인솔하며 각지를 전전했다. 하지만 항우(項羽)가 나타나면 반란은 곧 사그라졌지만, 그러나 항우(項羽)가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반란은 격화되어서 상황은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전개되어갔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 복수(復讐)로 반란군이 항복을 해도 받아주지 않았으며, 반란을 일으킨 나라의 병사들은 전원 생매장시켜 버렸다. 그리고 또한 그곳의 주민들에게도 인정사정 봐주는 것 없이 처참하게 도륙해버려서 항우(項羽)는 가는 곳마다 원성(怨聲)을 사게 되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던 사람들은 병민(兵民)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는 필사적으로 항우(項羽)에게 저항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전쟁은 점점 더 진흙탕싸움처럼 변해갔다. 그리고 또 그때, 특히 제(齊)에는 70여 곳의 성(城)이 있었는데, 그래서 항우(項羽)는 그 때문에 더욱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고, 거기다 또 구강왕(九江王)에 봉했던 영포(英布)마저 몇 번이나 구원을 요청했지만 병을 핑계로 달려 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항우(項羽)는 전술에서는 매우 우수했지만, 하지만 전략과 정략(政略) 그리고 인망(人望=德望)이 부족했으며, 또한 직정경행형(直情径行型=直行=생각한 것을 꾸밈없이 그대로 행동으로 나타낸다거나, 예법 같은 것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함는 것을 말함)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 쉬웠다. 그리고 또 당시 3진(秦=關中=앞에서 설명되었음)을 평정했던 유방(劉邦)은 위(魏)·조(趙) 등과 연합해서 50만이 넘는 대군으로 초(楚)의 팽성(彭城)을 점령했다. 하지만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팽성(彭城)의 싸움으로 그곳은 다시 항우(項羽)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또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그 결과 유방(劉邦)은 패주했고, 그의 아버지와 아내는 포로가 되었다. 그 후, 항우(項羽)는 형양(滎陽) 일대(一帶)까지 유방(劉邦)을 몰아붙여서(滎陽의 싸움), 기선(機先)을 잡는 듯 했지만, 하지만 또 이어서 행해졌던 한신(韓信)의 위(魏)·조(趙)·연(燕)·제(齊)의 원정(遠征) 그리고 항우에게 불만을 가졌던 팽월(彭越), 그리고 또한 이미 배신했던 영포(英布) 등과 또 타(他) 제후들에 의한 후방교란작전 등으로 항우는 많은 골치를 앓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런 이유들로 해서 몇 번이나 유방(劉邦)을 잡을 수는 있었지만, 하지만 또 꼭 마지막 순간에 놓치고 말았고, 그리고는 소하(蕭何)에게로 도망갔던 유방(劉邦)과 다시 대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틈을 노려서 행해졌던 진평(陳平)에 의한 내부분열 때문에 항우(項羽)는 결국 범증(范增)까지 잃게 되었고, 그로써 그는 점점 더 힘든 형국으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以下, 後述 또는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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