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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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6. 한초전쟁(漢楚戰爭)

 6-1 항우(項羽)와의 대결

 그러자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의 진언(進言)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이어서 한신(韓信)의 예언(豫言)대로 항우(項羽)에 대한 반란이 속발(續發)하기 시작했으며,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것들을 차례로 진압해가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그리고 또 그때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에게도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장량(張良)의 안(案)을 받아들여서 그곳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던 잔도(棧道)를 다 태워 없앴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자신은 밖으로 나갈 의사가 전혀 없음을 항우(項羽)에게 보였던 동시에, 문안편지 같은 순종(順從)의 뜻이 담긴 편지 같은 것도 함께 보내는 것으로 자신에게는 반항의 의사가 전혀 없음을 가장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도 그때서야 안심을 하고는 다음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서 제(齊)의 전영(田榮)으로 출발했다. 그러자 또 그때만 기다리고 있었던 유방(劉邦)은 잔도(棧道) 이전에 사용했던 옛길을 통해서 관중(關中)으로 쳐들어갔고, 그리고는 단번에 장한(章邯) 등을 치고는 관중(關中)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 후, 그곳에다 자신의 사직(社稷)을 세웠다. 그런 한편 항우(項羽)는 원정(遠征)을 갔던 제(齊)에서도 변함없이 성을 떨어뜨릴 때마다 그 주민들을 몰살하는 만행을 반복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제(齊)의 사람들은 더욱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항우(項羽)는 제(齊) 공략에 발이 묶여버렸고, 그러자 또 그 틈을 타서 유방(劉邦)은 한층 더 동쪽으로 군(軍)을 전진시켰다. 그리고는 그 도중에 만났던 왕(王)들을 공순(恭順-순순히 복종시킴)시키거나 정복해가면서 점점 더 항우(項羽)의 본거지였던 팽성(彭城)으로 향해갔다.

 6-2
대패(大敗)

 그리하여 기원전 205년, 유방(劉邦)은 자신의 군(軍)에 합류했던 제후(諸侯)들과, 그로 인해서 56만이란 대군(大軍)으로 늘어났던 연합군을 거느리고 팽성(彭城)에 입성(入城)했다. 그러자 한군(漢軍)은 승리감에 도취되어서 밤낮 성내(城內)에서 연회를 열었고, 여자(女子)들과 노닥거렸다. 그런 한편, 그 소식을 들었던 항우(項羽)는 끓어오르던 분노 속에 3만의 정예부대를 차출해서 서둘러 팽성(彭城)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방심하고 있던 한군(漢軍)을 무자비하게 도륙했고, 그래서 또 그때, 항우(項羽) 군에 의해서 죽은 사람은 10만이 넘었다고 하며, 그러자 또 그 시체들은 강을 다 막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彭城의 싸움) 그러자 유방(劉邦)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며 탈출했는데, 하지만 그때 그의 부인이었던 여치(呂雉)와 부친(父親) 유태공(劉太公)은 탈출하지 못하고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또 그 대패(大敗)로 인해서 그때까지 유방(劉邦)의 편이 되어주었던 제후(諸侯)들도 모두 초(楚)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 후 유방(劉邦)은 하후영(夏候嬰)과 유영(劉盈=惠帝) 그리고 노원공주(魯元公主)와 함께 마차를 타고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또 그때 하후영(夏候嬰)은 말을 몰고 있었는데, 그런데 중간에 적들에게 곧 따라잡힐 것 같은 위기가 찾아오자 유방(劉邦)은 차(車)의 무게를 줄일 목적으로 유영(劉盈)과 노원공주(魯元公主)를 차에서 밀어서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자 그에 놀랐던 하후영(夏候嬰)이 얼른 내려서 그 둘을 구해왔는데, 그러나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더 유방(劉邦)은 그런 짓을 했고, 그럴 때마다 또 하후영(夏候嬰)은 그 둘을 구해왔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아이는 부모에게서 태어나지만, 부모는 아이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때, 부모였던 유방(劉邦)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그 둘을 희생하려 했다는 것은 유교적(儒敎的)인 윤리(倫理)로 볼 때는 그리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 인물소개

 1.
노원공주(魯元公主) ?-기원전 187년

 유방(劉邦)의 장녀(長女). 생모(生母)는 여치(呂雉). 혜제(惠帝)는 남동생. 소설 등에서는 <노원(魯元)>이라고 쓴 곳도 많지만, 그러나 원래는 <노⋅원공주(魯⋅元公主)>라고 쓰는 것이 올바르며, 그 이유는 또 <노(魯)를 화장령(化粧領-시집갈 때 받은 영지)으로 받은 황제의 장녀>가 그 원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원공주(元公主)>라는 말은 나중의 <장공주(長公主=황제의 장녀)>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본명(本名)은 알 수 없으며, 장이(張耳)의 아들이었던 장오(張敖)와의 사이에 장언(張偃) 그리고 혜제(惠帝)의 황후(皇后)였던 장씨(張氏)가 있었다. 그녀는 패현(沛縣)에서 태어나서 유방(劉邦)이 동란(動亂)에 참가하기 위해서 집을 떠나자 그녀의 어머니 여치(呂雉)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 후는 위 본문에서 기술한대로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졌던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마차로 도주했을 때 갑자기 나타나서는, 또 미리 기술한대로 하후영(夏候嬰)의 도움으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후,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자 그녀는 조왕(趙王) 장오(張敖)에게 강가(降嫁-신하에게 시집감)했지만, 그러나 그 장오(張敖)가 모반의 혐의를 받고 후작(侯爵)으로 격하되자 그녀에게도 화(禍)가 닥쳐왔고, 그것은 또 흉노(匈奴)와의 평화교섭 용으로 목돌선우(冒頓單于)에게 그녀가 시집보내질 운명에 처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유방(劉邦) 또한 그럴 생각이었던 것 같았지만, 그러나 또 그때 여치(呂雉)가 나서서 그 일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유방(劉邦) 사후(死後)에 여치(呂雉)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모형(異母兄-배다른 오빠)이었던 제왕(齊王) 유비(劉肥)가 바쳤던 영토의 일부였던 성양군(城陽郡)을 헌상(獻上) 받아 제(齊)의 왕태후(王太后)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녀의 죽음에 관해서는 알 수가 없다.

 2.
여치(呂雉) ?-기원전 180년

 유방(劉邦)의 부인. 혜제(惠帝)의 어머니. 자(字)는 아후(娥姁). 시호(諡號)는
고후(高后=高皇后). 유방(劉邦) 사후(死後) 황태후(皇太后)·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었고, 여후(呂后) 또는 여태후(呂太后)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녀는 <중국 3大 악녀(惡女)> 중 한명이었다. 그녀는 단부(單父=現 山東省 單縣)의 유력자였던 여공(呂公=呂文叔平)의 딸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 후, 당시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던 유방(劉邦)에게 시집을 갔고, 슬하(膝下)에 일남일녀(나중의 惠帝와 魯元公主)를 두었다. 그리고 당시 밖으로만 나돌던 유방(劉邦)을 대신해서 시아버지 유태공(劉太公)과 함께 가업(家業)인 농업에 힘쓰며 열심히 아이들을 길렀다.(그 사이에 그녀의 여동생이었던 呂須는 樊噲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또 그녀는 바로 그때에 지나가던 노인에게서 <천하를 얻을 귀부인의 상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일설에 의하면, 시황제(始皇帝)가 <東南 쪽에 天子의 氣(運)가 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유방(劉邦)은 시황제(始皇帝)가 순행을 나왔을 때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는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고 한다.(하지만 또 이 부분에서는, 유방은 그 시황제의 말 때문이 아니라, 부역을 나갔을 때 인부들이 모두 도망을 가버려서 어쩔 수 없이 몸을 숨겼던 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방(劉邦)이 어디에 있든 여치(呂雉)는 금방 찾아냈다고 하며, 그러자 또 그것이 너무도 신기했던 유방(劉邦)이 그 이유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당신이 있는 곳에는 항상 하늘에 꿈틀거리는 구름(龍雲)이 있기 때문에 금방 찾아낼 수가 있어요!> 그러자 그 말은 금방 소문이 되어서 퍼져나갔고, 그 때문에 유방(劉邦)에게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말(秦末) 동란기(動亂期)와 초한전쟁(楚漢戰爭) 개시 직후에는 패현(沛縣)에서 유방(劉邦)의 가족들은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같았으며, 그러나 초한전쟁(楚漢戰爭)이 격화되고,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졌을 때, 역시 갑자기 등장해서는 그녀와 유태공(劉太公)은 그곳에서 포로로 잡히게 된다. 그리고 유방(劉邦)은 하후영(夏候嬰)과 자식 둘을 데리고 전격(電擊) 탈출을 감행했으며, 그 후에 초한전쟁(楚漢戰爭)이 유방(劉邦)의 승리로 돌아가고, 기원전 202년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자 그녀는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않아서 유방(劉邦)이 친정(親征)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가 많았을 만큼 어수선했고, 그런데다 또 궁중 내에서는 벌써부터 다음 후계자를 둘러싸고 암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자 그러했던 상황에서 그녀는 유방(劉邦)의 부재 시 뒤를 보좌했고, 그 사이에 또 한신(韓信)이 반란을 모의한 것을 적발해서 소하(蕭何)와 함께 처리하는 등, 여장부로서의 능력도 보여주었다.(단, 그에는 이견이 있으며, 여치가 한신을 모함해서 죽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그 여세를 몰아서 자신의 일족(一族)들과 장량(張良) 등, 중신(重臣)들의 도움을 받아서 당시 황태자의 지위에 올라 있던 유영(劉盈)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以下, 後述)

 그리하여 유방(劉邦)은 탕(碭)으로 가서 군사를 다시 모으고는 겨우 한숨을 돌렸지만, 하지만 그곳조차 항우(項羽)의 공격을 받게 된다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이란 것을 알고는 수하(隨何)에게 명(命)해서 영포(英布)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획책했고, 그 계책은 성공했다.

                                     


<탕산 현의 위치도>


 ※ 수하(隨何) 생몰미상(生沒未詳)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유생, 정치가, 외교관이었고, 유방(劉邦)의 휘하에서 알현(謁見-接客)을 맡았다. 기원 전 205년, 유방(劉邦)은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항우(項羽)에게 대패(大敗)했다. 그리고는 겨우 몸만 보존하고는 우(虞=河南 虞城)까지 도망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 상황을 타개하고자 당시 항우(項羽)의 수하 중 한명이었던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를 회유하기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자 수하(隨何)가 스스로 그 역(役)을 자청하고 나왔고, 이어서 20명의 종자들만 인솔해서 영포(英布)에게로 향했다. 그는 구강(九江)에 도착하자 우선 태재(太宰-외교와 국방을 담당하던 관청의 일종으로, 여기서는 사신을 접객하던 관청을 이름)의 손님 자격으로 영포(英布)와의 회담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가진 회견에서 영포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현재로는 유방(劉邦)이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 같이 보이나, 그는 덕이 있는 사람이므로 곧 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서 항우(項羽)는 포악한데다 현재 적진(敵陣) 너무 깊숙이까지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유방(劉邦)이 다시 재기하게 되면 항우(項羽)는 오도 가도 못할 처지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항우(項羽)의 편에 서실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또 만약에 이런 때에 당신이 유방(劉邦)을 도와주기만 한다면, 천하는 곧 우리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영포(英布)는 수하(隨何)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비록 결정은 그렇게 내렸지만 속으로는 갈등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마침 항우(項羽)로부터 재차 파병의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자 수하(隨何)는 영포(英布)에게 결단을 촉구했고, 마침내 영포(英布)는 항우(項羽)의 사자를 죽이고 유방(劉邦)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었던 항우(項羽)는 그 즉시 용차(龍且)와 항장(項莊)을 파견해서 수개월에 걸쳐서 구강(九江)을 공락했고, 그러자 마침내 영포(英布)는 유방(劉邦)에게로 도주했다. 그 후였던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항우(項羽)가 자살하고 천하는 유방(劉邦)의 것이 되었다. 그런데 그 축하연에서 유방(劉邦)은 제신(諸臣)들 앞에서 <수하(隨何)는 썩은 유생(儒生)으로, 아무 짝에도 쓸 모가 없는 자이다>라고 폄하(貶下)했다. 그러자 모욕감을 느꼈던 수하(隨何)는 유방(劉邦)에게 이렇게 물었다. <팽성에서 폐하가 졌을 때, 보병 5만과 기병 5천으로 회남(淮南=九江)을 공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유방(劉邦)이 <할 수 없었다!>라고 답을 했다. 그러자 또 수하(隨何)가 물었다. <그러나 저는 단지 20명의 종자들만 데리고 회남(淮南)으로 가서 영포(英布)를 설득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보병 5만과 기병 5천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제가 아무 짝에도 쓸 모가 없다니, 그것은 도대체 무슨 뜻에서입니까?> 그러자 그때서야 유방(劉邦)은 그를 인정하고 호군(護軍)중위(中尉)의 직(職)을 내렸다.

 
그러나 영포(英布)는 초(楚)의 무장이었던 용차(龍且)와 싸워서 지고는 유방(劉邦)에게로 도주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군사를 모으면서 영양(榮陽-河南省)으로 향했고, 그곳에 도착하자 그 주변에 용도(甬道=벽으로 두른 도로)를 쌓았으며, 또한 식료 등 물자를 운반해서 농성(籠城) 준비에 들어갔다.<바로 그 시기에 진평(陳平)이 합류했다>

                                                  


<하남 성>


 그런 한편, 유방(劉邦)은 별동대로 한신(韓信)을 파견해서 위(魏)와 조(趙)를 공격하는 것으로 항우(項羽)의 배후(背後)를 견제(牽制)하게 했다. 그리고 또 도적이었던 팽월(彭越)을 이용해서 항우(項羽) 군의 배후를 급습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204년, 초군(楚軍)의 공격은 더욱 격렬해졌고, 용도(甬道) 또한 파괴되었던 데다, 생필품마저 고갈되어서 한군(漢軍)은 더욱 더 힘들어졌다. 그러자 또 그때 진평(陳平) 나서서 항우(項羽) 군에 이간의 계(離間計)를 걸었고, 그 결과 범증(范增)과 종리매(鐘離昧) 사이를 이간(離間)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또 범증(范增)은 은퇴하고 귀향하던 중,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등창으로 사망했다.

 용차(龍且) ?-기원전 203년

 초(楚)의 무장. 항우(項羽)의 부하. 기원전 206년, 유방(劉邦)이 기병해서 삼진(三秦)을 평정하자 그는 위(魏)의 항타(項他)와 함께 정도(定陶)의 남쪽에서 한(漢)의 관영(灌嬰) 군과 싸워서 패했다.<史記의 번력등관(樊酈滕灌)열전> 기원전 204년, 그는 항성(項聲)과 함께 회남(淮南)을 공격해서 경포(黥布) 군을 물리쳤다. 그러자 경포(黥布)는 한(漢)으로 도망갔다.<史記의 경포(黥布)열전> 기원전 203년 10월, 한신(韓信)이 임치(臨淄)를 평정하자 항우(項羽)는 그에게 군사 20만을 주어서 파견했다. 그리하여 동년(同年) 11월, 그는 한신(韓信)과 유수(濰水)에서 대진(對陣)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야간(夜間)동안에 유수(濰水) 상류에서 흙 부대를 쌓아 둑을 만들어서 미리 물을 막아 두었다. 다음날 한신(韓信)은 군을 인솔해서 강을 중간쯤 건너다가 용차(龍且)의 공격을 받고 도주했다. 그러자 용차(龍且)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원래부터 네가 겁쟁이인줄을 알고 있었다!>라고 외치면서 한신(韓信) 군을 추격했다. 그러자 적당한 시기에 한신(韓信)은 미리 쌓아두었던 흙 부대를 무너뜨렸고, 그에 용차(龍且)와 그 군은 대부분 수몰(水沒)했다.<史記의 회음후(淮陰侯)열전>

 
팽월(彭越) ?-기원전 196년

 중국 진말(秦末)기부터 초한전쟁(楚漢戰爭)기의 무장. 자(字)는 중(仲). 진말(秦末) 전란(戰亂) 중에 대도적(大盜賊)으로 활약했고, 유방(劉邦) 휘하에 들어간 후에는 후방교란 등 전공을 올렸다. 그는 창읍(昌邑=現在의 山東省 金鄕縣) 사람으로, 젊었을 때는 거야(鉅野)의 소택(沼澤-늪과 못 지역으로, 나중의 梁山泊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에서 어부를 하면서 도적질을 했다. 그러다가 진(秦)의 악정(惡政) 때문에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몇 번에 걸친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서 수령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그 첫 명령으로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수령이 된 기념으로 내일 아침에 출진할 것이다. 하지만 제일 늦게 오는 사람은 그 본보기로 처형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오합지졸로, 아침은커녕 아예 오후에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약속대로 제일로 지각한 사람을 처형했다. 그러자 그 후로는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무렵, 세상은 진승(陳勝)과 항량(項梁) 등의 봉기로 소란스러웠고, 이어서 유방(劉邦)이 초(楚) 회왕(懷王)의 명령을 받아서 함양(咸陽)을 공략하러 가던 중, 위(魏)의 창읍(昌邑)을 공략하게 되자, 그도 유방(劉邦)을 도와서 함께 공략했다. 그 후, 진(秦)은 항우(項羽)에 의해 멸해졌고, 이어서 항우(項羽)는 거성(居城)으로 돌아와서 대진(對秦)전쟁에서 공을 세웠던 사람들에게 영토를 분배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화가 난 팽월(彭越)은 같은 불만을 가지고 있던 구제(舊齊)의 왕족 전영(田榮) 등과 함께 양(梁=舊魏의 땅으로, 開封 주변)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그때 彭越은 田榮에게서 장군의 印을 받았으므로, 장군의 자격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또 그때, 유방(劉邦)도 관중(關中)을 공격해서 구진(舊秦)의 영토를 모두 손에 넣고 항우(項羽)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 후, 팽월(彭越)은 양(梁)을 누비며 몇 곳의 도(都)를 공략했다. 그러자 그에 화가 난 항우(項羽)가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그러나 팽월(彭越)은 그것조차도 격퇴했다. 그 후, 유방(劉邦)이 동쪽으로 진군해서 구위(舊魏)의 왕족이었던 위표(魏豹)를 위왕(魏王)에 앉히자 그때 팽월(彭越)도 재상(宰相)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또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져서 도망을 갔으므로, 그도 그곳에서 도망을 가서 그때부터는 게릴라작전으로 들어갔다. 그 후, 그는 게릴라작전을 펼치면서 계속해서 초군(楚軍)의 식량을 불태우는 식으로 괴롭혔고, 그러자 그 효과로 항우(項羽) 군은 늘 식량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때문에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에게까지 힘을 뻗칠 여력이 없었고, 그래서 유방(劉邦)은 그 덕분에 몇 번이고 목숨을 건졌다. 그 후,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싸움은 최절정에 도달했고, 마침내 광무산(廣武山)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보급이 끊어져버렸기 때문에 서로는 화해하고 일단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때, 장량(張良)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방(劉邦)에게 항우(項羽) 군의 배후를 덮치게 하고, 그리고 팽월(彭越)과 한신(韓信)에게는 두 사람이 공동작전을 펴서 항우(項羽)를 공략하라고 조언했지만, 그러나 팽월(彭越)도 한신(韓信)도 그의 말에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그때는 劉邦이 그에 대해서 아무런 포상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자 유방(劉邦)은 단독으로 항우(項羽) 군을 상대했지만, 오히려 져버렸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하는 수 없이 한신(韓信)에게는 막대한 포상을 약속했고, 팽월(彭越)에게는 양왕(梁王)에 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그때서야 두 사람은 전장으로 향했고, 이어서 원군을 얻었던 유방(劉邦)은 해하(垓下)까지 항우(項羽)를 추적해서 멸했다. 그 후, 약속대로 양왕(梁王)이 된 팽월(彭越)은 갖은 영화(榮華)를 다 누렸다. 하지만 그 후로 유방(劉邦)은 점점 더 의심이 많아졌고, 마침 그러했던 때에 북쪽의 대(代)에서 진희(陳豨)가 유방(劉邦)을 배신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친정(親征)을 나서며 팽월(彭越)에게도 출진할 것을 명했지만, 그러나 팽월(彭越)은 병을 핑계로 자신은 나서지 않고 군사만 보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화가 나서 그를 문책했다. 그러자 또 팽월(彭越)은 그 일로 해서 자신이 숙청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며 몹시 두려워했다. 그러자 또 그때 팽월(彭越)의 부하였던 호첩(扈輒)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팽월(彭越)에게 조언했지만, 그러나 팽월(彭越)은 그말도 듣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하지만 또 그러던 중에 그의 부하 중 누군가가 <彭越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라는 중상모략을 유방(劉邦)에게 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를 속여서 잡아들이고는 양왕(梁王)의 지위를 빼앗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를 죽일 생각이었던 유방(劉邦)도 그러나 막상 그를 대하자 동정심이 생겨서 죽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방(劉邦)은 그를 죽이지는 않고 일단 서민(庶民)으로 강등시킨 후, 촉(蜀)으로 보내는 것(일종의 流配)으로 그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촉(蜀)은 너무 먼 변경(邊境)이므로, 자신의 고향인 창읍(昌邑)으로 돌아가서 은둔하게 해달라>고 여치(呂雉)에게 울면서 매달렸다. 그러자 또 그 앞에서는 유방(劉邦)에게 그렇게 말해주겠다고 한 여치(呂雉)였지만, 그러나 여치(呂雉)는 유방(劉邦)을 대하자 <그는 위험한 인물이므로 살려두면 필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했고, 그 결과로 그는 처형되었다. 그 후, 그의 사체는 여치(呂雉)에 의해서 방부처리로 소금에 절여졌고, 제후들에게 보내졌다.

 참고: 그러나 소금에 절인다는 것은 食肉은 물론 뼈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하지만 彭越의 경우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또 그 일은 한신(韓信)의 예와 함께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예가 되었고, 나중에 영포(英布)의 반란을 부르는 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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