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제(武帝)

무제(武帝) 기원전 156년-기원전 87년.
재위 : 기원전 141년-기원전 87년
전한(前漢)의 제7대 황제.
시호는 철(徹). 묘호(廟號)는 세종(世宗). 정식적인 시호는 효무황제(孝武皇帝).
유방(劉邦)의 증손(曾孫)으로, 부(父)는 경제(景帝), 생모는 왕 씨(王氏).
황태자 전(前)의 왕호(王號)는 교동왕(膠東王).
평양공주(平陽公主) 등 3명의 동모자(同母姉)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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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卽位)>
그는 경제(景帝)의 제10子(혹은 제9子)로 태어났고, 유명(幼名=兒名)은 부정(不淨)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체(彘=돼지란 뜻)>로 지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교동왕(膠東王)에 봉해졌고, 이어서 또 당시, 먼저 황태자가 되어 있었던 율 부인(栗夫人)이 생산했던 맏형 유영(劉榮=栗太子=臨江閔王)을 밀쳐내고 왕위에 즉위했다. 그리고 또 그 즉위 때 태황태후였던 두 씨(竇氏)의 힘이 컸기 때문에, 그래서 즉위 초기에는 그 두 씨(竇氏)가 실권을 잡았다. 그리고 황후는 백모(伯母)였던 관도공주(館陶公主) 유표(劉嫖=景帝의 同母姉)가 생산했던 진황후(陳皇后=元勳 陳嬰의 孫 堂邑侯 陳午의 딸)를 맞이했다. 하지만 사촌사이였던 그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그래서 나중에 조모(祖母) 두 황후(竇皇后)가 죽자, 당시 근시(近侍)였던 장탕(張湯)의 조언을 받아서 이혼했다. 무제(武帝)는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으로 유력(有力)했던 봉왕(封王)들이 힘을 잃게 되자 중앙집권을 목표로 추진했다. 그리고 제후왕들이 자신의 영지를 자제(子弟)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열후(列侯)에 봉건 되는 것을 허락했다.
<추은(推恩)의 영(令)>
그러자 그 후, 제후왕들의 영토는 더욱 세분화 되었다. 그리고 또 무제(武帝)는 <향거리선(鄕擧里選)의 법(法)>으로 불렸던 관리임용 법을 채용했고, 그것은 또 각 지방과 향리(鄕里)의 유력자들과 그 지방의 태수들이 서로 합의하여 당지(當地)의 재능 있는 인물을 추천했던 것으로, 무제(武帝)는 특히 유교의 교양을 몸에 익힌 인물들을 많이 등용했으며, 그리고 또한 <동중서(董仲舒)>의 헌책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했고, 그리하여 유교(儒敎)를 관학(官學)으로 했다.
참고 : 그렇게 해서 유교(儒敎)가 국교화(國敎化) 되었다고 하는 것이 전통적인 이해였지만, 그러나 현재 그것은 거의 부정되고 있고, 유교(儒敎)의 국교화(國敎化)는 적어도 <왕망(王莽)>의 시대까지는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 왕망(王莽-기원전 45년부터 서기 23년)은, 중국 전한의 정치가였고, 자(字)는 거군(巨君)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옹립했던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를 빼앗아 국호를 <신(新)>으로 명명하였지만, 그러나 <적미의 난> 때 반도들에 의해서 피살되었다.(後述 또는 생략)
※ 동중서(董仲舒-기원전 176년?부터 기원전 104년?)는,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유학자였으며, 춘추(春秋)학자였다. 그리고 유가사상(儒家思想)을 국가교육과 학문으로 할 것을 헌책했던 인물이었다. 그 사상의 최대의 특징은 재이설<災異說=천재(天災)와 지이(地異)를 아울러서 이르는 말에 대한 說>이었으며, 호는 계암자(桂巖子)였고,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을 수학하여, 하늘과 사람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광천(廣川=현재의 河北省 景縣)에서 태어났고, 춘추(春秋)학의 일파였던 공양학(公羊學)을 배워서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 춘추(春秋=歷史)는, 유학(儒學)에서 오경(五經)의 하나이며, 공자에 의해서 노나라의 은공(隱公)부터 애공(哀公)에 이르기까지의 242년(B.C.722~B.C.481) 동안의 사적(事跡)을 편년체로 기록했던 책이었다. 11권.
☆ 공양학(公羊學)은, 중국의 춘추삼전 중 <공양전>에 바탕을 두고, 공자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왕조의 교체와 사회의 진화를 설명하고 정치를 비판했던 학문이었으며, 중국 한나라 때에 창시되었고, 청나라 말기에 캉유웨이(康有爲)가 학문적인 체계를 세웠다.
☆ 공양학파(公羊學派)는, 동양 철학에서 <공양전>에 바탕을 두고, 공자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파로, 장존여(莊存與)에서 시작되었고, 청나라 말기에 캉유웨이에 의해서 크게 발달되었다.
☆ 캉유웨이(Kang Youwei=康有爲. 1858~1927)는, 중국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 초기의 정치가·학자였고, 열강들의 중국침략에 맞섰으며, 광서제를 옹립하여 개혁을 계획하였으나, 서태후를 비롯했던 보수파에 밀려서 실패하였던 인물이었다.
※ 그러나 위의 내용들은 모두 참고이므로, 따로 설명을 더 해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는 무제(武帝) 건원(建元) 원년(元年)에 행해졌던 현양대책(賢良對策) 때, 유가(儒家) 이외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을 배척했고, 유학을 국가교육과 학문으로 자리 잡도록 헌책해서 가납(嘉納)되었다.
☆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춘추전국시대 때의 여러 학파를 말하는 것으로, 공자(孔子), 관자(管子), 노자(老子), 맹자(孟子), 장자(莊子), 묵자(墨子), 열자(列子), 한비자(韓非子), 윤문자(尹文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귀곡자(鬼谷子) 등의 유가(儒家)들과,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음양가(陰陽家) 등을 통틀어서 이르는 말임.
그리하여 그 후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유학적인 교양을 몸에 익히는 것이 필수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군국(郡國)에 태학(太學)을 설치할 것을 상주했고, 그 결과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상임(常任)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박사들이 각각 전문으로 하던 경학(經學)을 교수했다고 전해진다.<하지만, 오경(五經)의 모든 전문가가 모이게 되었던 것은, 무제(武帝) 이후였다고 생각됨> 그리고 또 그는 춘추(春秋)를 아주 깊게 탐구했고, 그 결과 음양설(陰陽說)과 융합시켜서 유명한 <재이사상(災異思想)>을 전개했다.
☆ 음양설(陰陽說)은, 역(易)의 사상에 기초하여, 음양(陰陽)이원(二元)의 소장(消長)에 의하여 우주만물의 생성변화를 설명하는 설로, 중국 한나라 때 크게 유행하였으며, 그리하여 미신을 받드는 음양가들이 이용했으며, 후에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건원(建元) 6년에 요동고묘(遶東高廟=遶東에 있던 高祖의 祠堂으로 생각됨)와 고원편전(高園便殿=왕 등이 외출 시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마련해둔 방. 그러나 정확히 그 장소는 어딘지 알 수 없음)에서 일어났던 재이(災異)의 원인을 추리했고(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일부 화재였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것은 현재 알 수 없음), 그리고 또 미정(未定)의 상주문(上奏文) 초고(草稿)를 주부언(主父偃)이란 자에게 도둑맞은 것을 밝혀내서 무제(武帝)의 눈에 들었다. 그 후에 무제(武帝)는 유생(儒生)들을 초대해서 의견을 구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동중서(董仲舒)의 제자였던 <여보서(呂步舒)>가 스승의 글인 줄을 알지 못하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러자 동중서(董仲舒)는 나중에 그 제자를 용서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때 하마터면 죽을 죄에 처해질 뻔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후로는 재이(災異)에 관한 이야기는 두 번 다시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또 같은 춘추학자였던 공손홍(公孫弘)의 중상모략을 받아서 강도국(江都國)으로 좌천되는 등, 평생은 불우(不遇)했다. 그리하여 현재 <토불우부(土不遇賦)>란 부(賦)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공손홍(公孫弘-B.C.200부터 B.C.121)은, 중국 전한(前漢)의 학자였고, 정치가였던 사람으로, 자는 계(季). 무제 때 현량으로 추천되어서 승상에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
☆부(賦)는, 시경(詩經)에서 이르는 시의 육의(六義) 중 하나이며, 사물이나 그에 대한 감상을 직접 서술하는 작법을 말함.
그리고 만년(晩年)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서 학구에 전념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또 그는 청렴결백한 인품으로 덕이 높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평생을 학문을 연구하는 데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가 박사(博士)시대에는 방에 휘장을 내리고 강의를 했으며, 3년간이나 땅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 당시, 제자의 수(數)도 아주 많아서 신참 자들은 모두 그의 제자들에게서 강의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중에서는 아예 동중서(董仲舒)의 얼굴도 모르는 제자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아마도 그때, 사마천(司馬遷)도 동중서(董仲舒)에게서 배웠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아래는 그의 저서에 대한 대강이며, 참고로 소개함.
그러나 한글 표현은 하지 않습니다.
董仲舒百 二十三篇
<上書는 上疏와 敎義를 모은 것이며, 漢書의 董仲舒伝에 収録되어 있는 賢良対策은 아마도 董仲舒百 二十三篇의 一部인 것으로 생각됨>
聞舉
玉杯
蕃露
清明
竹林
複数 十篇
<主로 春秋의 得失을 기술한 것>
公羊董仲舒治獄 十六篇
<公羊春秋의 精神에 근거해서,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재판했던 일종의 裁判記録集이며, 단 현재는 완전한 형태로는 전하지 않는다고 함>
그리고 현재 <춘추번로(春秋繁露)>라는 저작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을, 육조시대(六朝時代)에 들어서 누군가가 재편집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