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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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연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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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29년 |
흉노전쟁(匈奴戰爭) 시작(始作)되다,(~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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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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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청(衛靑)이 흉노(匈奴)를 대파(大破)하고, 오르도스지방의 흉노(匈奴)를 구축(驅逐)했다. 그곳에 삭방(朔方), 오원(五原) 이군(二郡)을 신설(新設)했다
※ 위청<衛靑 -?부터 원봉(元封) 5년(기원전 106년)>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의 무장. 하동평양(河東平陽=山西省 臨汾) 출신. 자(字)는 중경(仲卿). 작위는 장평후(長平侯). 모(母)는 하녀(下女)였던 위온(衛媼). 그는 유년기에 하급관리였던 정계(鄭季)가 거두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父)는 정계(鄭季)로 여겨짐.
그는 어렸을 때부터 흉노(匈奴)와 경계를 이루었던 북방(北方)에서 양치기를 했기 때문에, 흉노(匈奴)의 생활이나 문화를 잘 알았다. 하지만 노예와 같이 다루어져서 가족들로부터 학대를 받고 자랐다. 그리고 그때의 일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니까 한때, 그는 누구를 따라서 감천궁(甘泉宮)이란 곳을 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곳에서 또 어떤 사람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너에게는 귀인(貴人)의 상(相)이 있으니, 나중에는 꼭 출세를 할 것이다!> 그러자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고 한다. <출세는 고사하고, 매일 채찍 맞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위의 일화(逸話)로부터 그가 상당히 낮은 신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하지만 그 점쟁이의 말이 맞았던 것인지, 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의 누나였던 위자부(衛子夫)가 무제(武帝)의 총희(寵姬)가 되었다거나 또한 그가 기사(騎射)의 명수(名手)가 되었다거나 하는 등 해서 그때부터 그의 신분도 상승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위자부(衛子夫)를 미워했던 진황후(陳皇后) 일족에 의해서 납치·감금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친구였던 공손오(公孫敖)의 도움을 받아서 구출되었다. 그 후, 그는 흉노(匈奴)정벌 즈음에는 차기(車騎)장군에 임명되었고, 그러자 그때부터 흉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연전연승했다. 그러자 그 공적으로 그는 대사마(大司馬), 대장군으로까지 승진해서 출세했지만, 그러나 정치(政治)에서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아무튼 그는 대장군으로 출세한 후, 자신이 모시던 평양공주(平陽公主)를 아내로 맞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조카였던 곽거병(霍去病)이 대두(擡頭)하자 그의 인기와 군공은 모두 곽거병(霍去病)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또 그 곽거병(霍去病)이 24세의 젊은 나이로 조서(早逝)했기 때문에, 그는 군의 제일인자로 계속해서 남게 되었다. 그는 또 유년기에 고생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었던지, 나중에 장군이 되어서도 잘난 체 하는 일도 없이 부하들에게도 잘 대해주어서 서로들 관계가 좋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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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26년 |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여행에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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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21년 |
곽거병(霍去病)이 흉노(匈奴)를 토벌했고 흉노(匈奴) 서부(西部)의 혼사왕(渾邪王)이 한(漢)에 항복했다
※ 곽거병(霍去病-기원전 140년부터 기원전 117년)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의 무장. 부(父)는 곽중유(霍仲孺). 이모제(異母弟)는 대사마(大司馬) 대장군으로, 무제(武帝) 후의 정치를 장악했던 곽광(霍光=衛靑의 姉 衛小兒의 子).
참고: 곽광(霍光-?부터 B.C.68)은, 중국 전한(前漢)의 장군으로, 무제(武帝)를 섬기다 무제(武帝)가 죽자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어린 소제(昭帝)를 보좌하여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었고, 소제(昭帝)가 죽은 뒤에는 선제(宣帝)를 즉위시켜서 20여 년 동안이나 권력을 누렸다.(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
같은 위청(衛靑)의 누나였던 위자부(衛子夫)가 무제(武帝)의 총애를 받아서 려태자(戾太子)를 낳고 황후의 자리에 오르자, 친족이었던 곽거병(霍去病)도 무제(武帝)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참고: 위자부(衛子夫-?부터 기원전 91년)는, 전한(前漢) 무제(武帝)의 황후였고, 母는 노비 또는 하녀였던 위온(衛媼)이었다. 그리고 子에 劉拠(戻太子), 妹에 위자녀(衛子女), 弟에 大将軍 衛青이 있었다. 그리고 父는 위청(衛靑)이 정계(鄭季)에게 거두어졌으므로, 衛子夫의 父도 鄭季로 여겨지며, 武帝의 姉였던 平陽公主에 의해서 武帝의 寵姫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배경(背景)으로는 陳皇后와 平陽公主의 대립이 있었고, 아들 려태자(戻太子)가 皇太子에 옹립된 후였던 기원전 128년에 寵姫로부터 皇后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무고(巫蠱)의 난(亂) 때, 죄를 받고 자살을 강요당했다.
그는 또 기사(騎射-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에 뛰어나서 이미 18세에 위청(衛靑)을 따라서 흉노정벌에 나섰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는 몇 번이나 흉노정벌에 공적을 올렸고, 그 공적으로 기원전 121년에 표기(驃騎)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또 그 다음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의 본거지를 격파해서 위청(衛靑)과 함께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공적과 무제(武帝)의 총애로 인해서 당시, 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는 기원전 117년에 병을 얻어서 불과 24세에 요절했다. 그 후, 곽거병(霍去病)과 위청(衛靑)은 자주 비교되었고, 그래서 위청(衛靑)은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던 경험으로 평생을 겸손하게 살았지만, 그러나 곽거병(霍去病)은 그 막강했던 배경을 타고 태어났던 때문으로 오만했으며, 또 어떤 때는 병사들이 굶고 있었는데도 그는 호화로운 막사에서 연회를 연 일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이상하게도 인기는 곽거병(霍去病) 쪽이 더 높았다고 하며, 위청(衛靑)은 계속해서 그 곽거병(霍去病) 때문에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래서였던지 무제(武帝)도 그를 더 총애했으며, 그리고 또 그의 이름인 거병(去病)은 병(病)이 떠난다는 의미였다지만, 그러나 그는 그 반대로 요절했다. 그리고 또 그의 무덤은 현재 무제의 무덤인 무능(茂陵) 근처에 있다고 하고, 공원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고 하며, 그리고 또한, 그의 무덤에서 그의 이름인 곽거병(霍去病)이란 글자를 손으로 만지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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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21 |
~BC115 장건(張騫) 오손(烏孫)으로 여행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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