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라팔가르 해전(영:The Battle of Trafalgar, 불:Bataille de Trafalgar)
1805년 10월 21일에 '스페인'의 '트라팔가르 곶'<트라팔가 곶(Cabo Trafalgar)
'스페인' 남서안(南西岸), '지브롤터해협'의 북서(北西) 약 50킬로에 위치해있는
곶('지브롤터'와 '카디스'의 중간)>에서 벌어졌던 해전이었다.
<트라팔가르 곶의 등대>
'나폴레옹전쟁'에 있어서의 최대의 해전이었으며, 그 결과 '영국'의 대승으로 일시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유럽제국'은 대륙에서의 '아우스트리트 싸움'은 막아내질 못했다.
<배경>
1805년 '유럽'대륙은 '황제 나폴레옹'이 인솔하던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여있었지만
그러나 해상의 지배권은 그때 '영국'에 있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그때 '해상봉쇄'를 실시하며
'프랑스'의 해군력을 억제했던 한편 '영국본토'의 침공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러했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영국해군'을 해상에서 일소할 것을 결단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스페인'(당시,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지배하에 있었다)연합함대를 편성했다. 그리고는 '해상봉쇄'를 돌파하기 위해서 '불로뉴 항구'에 집결시켰던 35만의 침공군에게 '영국본토'에의 상륙을 명했다. 그러자 '영국'은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함대를 내보냈다.
<경과>
그때 '넬슨제독'의 '영국함대'는 <빅토리-HMS Victory>를 기함(旗艦)으로 해서 27척이었다.
** 빅토리 HMS Victory)
'영국해군'의 군함으로 104門 탑재의 전열함(戰列艦).
현존하는 유일한 전열함인 것과 동시에, 세계최고의 현역함이기도 하다.
<역사>
소형이고, 기동력이 뛰어난 艦(배)을 좋아했던 18세기 당시의 '영국해군'에서는 드물었던 것으로, 100문 이상 탑재의 1급 전열함으로써 수주되었다. 건조 도중에는 '7년 전쟁'이 종결하기도 했었고, 뼈대(骨組)만의 상태로 3년 가깝게 도크에 방치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1765년에 진수(進水)되었다. '존 쟈비스'와 '호레이쇼 넬슨' 등 많은 제독들의 좌승함(座乘艦)이 되었고 '미국독립전쟁'이나 '나폴레옹전쟁' 등 중요한 해전에서 활약했다. 특히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는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의 대열에 수직으로 돌진하는 <넬슨 터치>의 성질상 약 30분에 걸쳐서 적함대로부터 집중포화를 받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연합함대의 포격미숙에 힘입어서 잘 견뎌내기도 했다. 1812년에 퇴역했고, 나중에 사관학교의 연습선으로 이용된 후, 1922년에 '포츠머스 항'에 기념함으로써 전시되게 되었다. 형식상은 현재도 '제독旗'를 내거는 현역함이다. ('포츠머스 군항'의 '항만사령관'의 '기함') 그리고 또, 2005년 10월 21일에는 왕실관계자들도 참석했던 가운데 '넬슨' 사거(死去) 200주년행사가 그곳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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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에 맞섰던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는 ‘피에르 뷔르누브’가 인솔하던 33척이었다.
** 피에르·뷔르누브(Pierre-Charles-Jean-Baptiste-Silvestre de Villeneuve)
1763년 12월 31일-1806년 4월 22일
19세기 초두(初頭)의 '프랑스해군' 제독. 백작.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인솔해서 '호레이쇼·넬슨'이 인솔하던 '영국해군'과 싸웠다. 그리하여 그는 '넬슨'을 전사시켰지만, 그러나 해전에서는 대패(大敗)했고, 포로가 되었다. 이후, 그는 사면(赦免)되어 '프랑스'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러나 그 후에 '렌'(Rennes-프랑스 북서부에 있는 도시. 교통의 요충지이며, 농업과 축산업 그리고 여러 가지 공업이 발달한 곳이다. 브르타뉴의 지역권에 있다)의 호텔에서 자살했다. (타살설도 있지만, 유서를 남겼기 때문에 자살이 유력하다)
*** 렌 (Rennes)
'프랑스 북서부'에 있는 도시.
교통의 요충지이며
농업과 축산업 그리고 여러 가지 공업이 발달한 곳이다.
'브르타뉴'의 지역권에 있다
<렌을 흐르는 빌렌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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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넬슨제독'은 적의 함대를 분열시키기 위해서
2열종대로 돌진하는 ‘넬슨 터치(Nelson Touch)’ 라는 전법을 사용했다.
<넬슨 터치-적색이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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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또 '뷔르누브'도 '다종렬(多縱列)'에 의한 분단작전을 예측해서
마스트에 다수의 저격병을 배치시켰다.
** 마스트(mast)
범선의 갑판에 돛을 치기 위해서 세웠던 수직(垂直) 봉.
'마스트' 혹은 '돛대'라고 번역한다. 한자로는 '장(檣)'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범선의 마스트 구성은 배의 사이즈에 따라서 다르다,
(큰 배는 많은 마스트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20세기 전의 마스트는 각각 1개의 목재였을 뿐이었지만
배가 커지자 3개정도의 마스트를 연결해서 보다 높은 1개의 마스트를 구성했다.
<마스트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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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 '연합함대'는 수적(數的)으로는 뛰어났지만, 하지만 그 중에는 '스페인해군'도 섞여있었기 때문에 지휘계통도 복잡했고, 또 사기(士氣)나 훈련도도 낮아서, 함재(艦載)포의 사속(射速)도 1/3발(發)정도나 '영국'에 뒤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다 '영국해군'은 그때도 사기도 훈련도도 높았던 데다가, 사속 또한 1분 30초에 1발정도로 아주 우수했다. 그리하여 그 격전 끝에 '연합함대'는 격침 1척, 포획파괴 18척, 전사 4,000명, 포로 7,000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냈고, 거기다 또한 '뷔르누브 제독'도 포로로 잡혔다. 그런 한편, '영국함대' 또한 상실함은 0척, 전사 400명, 전상(戰傷) 1,200명이라고 하는 경미한 피해로 끝나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그때 '넬슨제독'은 '프랑스' 저격병이 쏜 총탄에 넘어졌다. 그리고 그때 '넬슨제독'은 승전보를 듣자 <신에 감사한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했다고 한다.
<영향>
'나폴레옹'은 그 패전소식을 접하자 <폭풍우 때문에 졌다>라는 말을 강조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해상권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나폴레옹'은 그 후에는 '영국침공'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또 그에 비해서 당시 '유럽'에서는 그 전쟁의 결과로 어떠한 동요(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승전을 위한 축하도 없었으며, 더욱이 승리를 했던 '영국'조차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 패배의 위기를 그로부터 2개월 후에 '아우스트리트'에서의 승리로 회복했다.
그러자 또 그때 '영국수상'이었던 ‘피터’는 그 패전에 쇼크를 받아서 실망을 거듭하다가 그 다음 해에 병사(病死)했다.
** 윌리엄 피트(William Pitt-1759년 5월 28일~1806년 1월 23일)
'영국'의 정치가, 수상. 통칭은 작은(어린) 피트(Pitt the Younger).
'영국'의 정치가로, 수상(首相) 직도 맡았었던 ‘체탐 백작-윌리엄 피트(통칭-大 피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병약했지만 , 타고난 재능으로 14세에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재학 중에도 건강 때문에 많은 고생했던 그는, 나중에 귀족의 특권을 행사해서 시험 없이 그 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졸업 후, 그는 곧 '캠브리지 대학'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하원(下院)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다음번엔 학벌의 힘과 커넥션을 활용해서 '애플비(Appleby)'의 '부패(腐敗)선거구'에서 보궐선거로 당선했고, 하원의원이 되었다. (후에 캠브리지 대학으로 轉業)
※ 그러나 그 후에, 그가 부패선거구의 폐지운동을 이용해서 인기를 끈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조금 시니칼(cynical-냉소적, 가소로운)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미국독립전쟁'으로 인한 정치의 혼란과 함께 국왕과 대중의 지지를 받아서 1783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수상에 취임했다. (그 기록은 사상최연소)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총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그로인해 17년이라는 장기정권의 기초를 쌓았다. 그리고 그는 1793년까지는 '자유주의 노선'에 따라서 제 개혁에 임했다.
1- '미국' 상실 후의 새로운 제국의 건설('캐나다'의 행정개혁과 '동인도회사'의 재구축)
1- '프랑스'와의 사이에 자유무역적인 통상조약의 체결 등.
1- 그리하여 1786년에는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했지만, 그러나 그로인해 '영국'은 '산업혁명'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후에 '영국'은 염가에다 양질이었던 '영국 상품'을 '프랑스'에 쏟아 부으면서 '프랑스 산업'에 큰 타격을 주게 된다. 그리하여 또 '프랑스'는 '혁명'으로 치달았고, 사회적인 혼란이 계속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1788년에는 '유럽'에서의 '고립(孤立)외교'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서 '프로이센'과 '네덜란드'와의 '삼국(三國)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또 그는 가톨릭교의 해방도 생각했었지만, 그러나 국왕 '죠지3세'(재위:1760년~1820년)와의 의견이 맞지 않아서 사임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고 그 흐름이 과격하게 변해가자, 그에 대한 위기감을 부각시켜서 1793년부터 3회에 걸쳐서 '대불대동맹'을 조직했고, 그 혁명을 해결하려했다.
물론, 그는 그 때문에 '프랑스'로부터 <인민의 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후 '대불온건파'가 지지를 잃게 되자 '대불강경파'에다 '주전(主戰)파'였던 그는 1804년에 다시 내각을 조성했다. 그리고 또 1805년에는 '제3차 대불대동맹'을 조직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동년(同年)의 '아우스트리트 싸움'에서 패배했고, 그 충격으로 그 다음해 1월에 병으로 죽었다.
그는 '영국'의 '보수 세력'을 규합해서 야당의 '휘그당(Whig Party- 영국의 정당. 후의 자유당, 현재의 자유민주당의 전신에 해당한다)'의 지도자였던 ‘폭스’와 함께 정당정치의 확립에 공헌했고, '영국'의 2大 정당정치의 토대를 쌓아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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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승리로 해서 '영국'의 해상제패(海上制覇)는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폴레옹전쟁'의 일대전환까지는 되지 못했다.
그것은 1815년 '워털루 싸움'에서 '나폴레옹'이 지게 되자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승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런던'의 '트라팔가르광장(Trafalgar Square)'이다.
그리고 현재, 그 광장에는 '넬슨제독'의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트라팔가르광장과 '넬슨제독'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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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편 '프랑스국민'에게 있어서의 그 패배는 '트라우마(Trauma-심적 외상, 쇼크)'가 되어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패배’라는 충격으로 <트라파르가>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모리스 르브란(Maurice Leblanc-1864년 11월 11l일~1941년 11월 6일: 프랑스의 소설가)’의 모험 추리소설 <루팡 대 홈즈>에서도 '프랑스'의 괴도 ‘아르세이누(알센) 루팡(Arsene Lupin)’이 '영국'의 명탐정 ‘셜록 홈즈’에게 보냈던 도전장에서 <트라파르가의 복수>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그 후의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에 있어서, 그것은 종종 인용되어지게 되었다.
<'모리스 르브란'과 '루팡' - 상세한 것은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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