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바이에른 公國령(現 독일령)' '슈투트가르트' 근교의 마을 '울름 교외'에서
'나폴레옹'이 인솔하던 '프랑스군(大陸軍)이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쳤던 싸움이었다.
그 전쟁에서 기동력(機動力)만으로 승리했던 '나폴레옹'은 상대에게 5만의 피해를 주었다.
-------------------------------------------------------------------------------------------------
<배경>
1805년 8월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영국'등과 함께 '제3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해서 '바이에른'에 침공했다.
그때 '나폴레옹'은 영국침공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제3차 대불대동맹'이 결성되었기 때문에 그 계획은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던 중에 '바이에른 침공' 소식을 들었던 '나폴레옹'은 '바이에른' 및 '빈' 침공을 결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동년 9월 23일, 원로원에서 <나는 군의 선두에 서서, 나의 동맹국을 구하러 갈 것이다>라고 선언하고는 그 원정을 개시했다. 그렇게 하여 ‘산 크루 궁전(Saint Cloud)’을 출발했던 '프랑스군'은 그때 대략 80,000이었는데, 그래서 그때부터 '프랑스군'은 ‘그란 타루메(Grand Armee)’ 즉
'대육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산 크루 궁전의 과거 모습>
어쨌든, 최종적으로 예비군을 포함해서 全7군단 총병력 21만의 대육군은
9월 24일 '라인 강'을 따라서 집결했다.
그런 한편, 그에 맞섰던 '오스트리아군'은
'맥(마크) 장군' 인솔로 72000명이 '울름'과 그 주변지역에 포진했다.
--------------------------------------------------------------------------------------------------
<경과>
<검은 숲 위치도>
그때 '검은 숲'으로부터 진격해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맥 장군'을 속이고 '도나우 호반'까지 진격했던 '프랑스군'은, 그렇게 해서 간단하게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를 돌아서 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맥 장군'은 그런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전혀 알아차리고 못하고 '울름' 농성을 고집하고 있었다.
<검은 숲 풍경>
그러자 1805년 10월 14일 '에르틴겐'을 지키던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로
‘네이 元帥’가 인솔하던 '프랑스군'이 돌격해서 들어갔다.
그러자 대혼란에 빠져버린 '오스트리아군'은 '울름' 근교로 후퇴했다.
그 승리로 '네이 원수'는 나중에 ‘에르틴겐 公’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 네이(Michel Ney) 1769년 1월 10일-1815년 12월 7일
|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姓의 Ney는 이중모음 <네이>가 아니고, <네-(nε)>가 원음에 가깝다.
당시의 '프랑스령'이었던 ‘자르(Saarland-독일 연방 주의 하나. 검은 숲 근처) 지방’ 출신이다.
<용사 중의 용사>로 알려져 있다.
|
그 다음날, 기세를 탔던 '프랑스군'은 '울름'의 서북쪽 거리가 내려다보였던 곳에 구축해두었던 방어선인
‘미헤르스베르크 고지’를 강습하여 점령했다. 그러나 '울름' 공격은 성벽에 가로막혀서 하는 수 없이 후퇴했다.
그러자 동맹국 '러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오스트리아군'은 점점 사기를 잃어갔다.
※ 그때 '러시아군'은 '폴란드'에서 체류하고 있었다.
그에는 또 일설에 의하면, 그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쓰던 달력이 달랐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자 그런 상황을 확인했던 '나폴레옹'은 '맥 장군'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그러나 좀처럼 항복해 오지 않던 '맥'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던 '나폴레옹'은
18일, 성내(城內)의 포격을 명했고, 그에 위협을 느꼈던 '맥 장군'은 19일에서야 마침내 항복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황후였던 ‘죠제피누’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군사 6만을 포로로 잡았고, 대포 120문 이상과 군기(軍旗) 90개 이상, 그리고 30만 명 이상의 장군을 잡았다>
라고 전과를 알렸다. 하지만 그 숫자는 조금 과장된 것이었고
실제로 획득했던 것은 포로 25,000명에다, 대포 65문, 군기는 140개정도로 추측되고 있다.
--------------------------------------------------------------------------------------------------
<戰後>
21일 '나폴레옹'은 점령지였던 ‘슈바벤(Schwaben-독일 남서부지역)’의 '오스트리아군' 무기고와 식료창고의 접수를 고시했음과 동시에, 점령지 稅와 통상 세(通常稅)를 부과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군'은 그때 막대한 손실을 내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군의 주력(主力)은 아직도 건재해있었고, 그리고 또 '러시아'의 원군도 점차로 그곳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신의 도움으로 이번에도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는 전쟁 속행의 의사를 원로원에 전달했다. 그리고는 12월 14일 '프랑스군'은 이미 버려져있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입성했다. 그리고 또 16일에는 ‘쉔브룬 궁전(Schloss Schonbrunn)’을 출발해서 북쪽으로 군을 진군시켰고, 21일에는 '브르노'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피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의 주력들과의 전투를 위해서 그 대비에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