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poleon Bonaparte>


 
 1 生涯

  1.6  絶頂期




 * 아우스트리트전투(영:Battle of Austerlitz-불:Bataille d'Austerlitz-독:Schlacht von Austerlitz)
   ※ 앞에서 계속...


                  <우측 백마-나폴레옹, 좌측 백마-아렉산들1세=현실적이지 못한, 일종의 상징도임>


 <전후 처리>

 
12월 4일, '프란츠2세'는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
아렉산드르1세'는 끔찍한 모습으로 '러시아'로 도망쳤다.
 12월 26일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화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에 굴복했다.
 그리하여 '제3차 대불대동맹'은 붕괴했다.
 그리고 이어서 '
프란츠2세'는 '신성로마 황제 位'로부터 퇴위했고
 그로인해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이어서 '독일'에는 '라인동맹'이 성립했다.


 
 ** 프레스부르크 화약(불:Paix de Presbourg, 영:Peace of Pressburg, 1805년 12월 26일)

 '나폴레옹전쟁' 중에 '오스트리아 영내'의 '프레스부르크'(현: 슬로바키아공화국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체결되었던 강화조약.
 '
프레스부르크 강화조약'(불:Traite de Presbourg, 영:Treaty of Pressburg)라고도 불린다.


<성에서 바라본 브라티슬라바의 舊 市街>
------------------------------------------------------------------------------------------------

 <개요>

 '
오스트리아'는 1805년 '영국' '러시아' 등과 '제3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했고, 이어서 '북쪽 이탈리아'와 '바이에른'을 침공했지만 '프랑스황제 나폴레옹1세'에 의해서 '울름의 전투'(1805년 9월 25일~10월 20일)와 '아우스트리트 전투'(12월 2일)에서 각각 패배했다.

 
그 결과, 12월 4일에 양국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나폴레옹1세'와 '신성로마황제 프란츠2세'(오스트리아황제 프란츠1세)는 '프레스부르크'에서 평화 교섭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강화 조약에 의해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왕국'을 승인했던 것과 동시에, 同國에 '베네치아'를 할양했다. 그리고 또 '프랑스'에 ‘이스트리아’와 ‘달마치어’를 그리고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바이에른왕국’과 ‘뷰르텐베르크왕국’ ‘바덴대공국’에 ‘치롤’ ‘콘스탄트’ ‘브라이스가우’ 등의 '오스트리아 령'을 할양했다. 게다가 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4,000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강화 후 '나폴레옹'의 세력 확대>

 
그 강화를 기회로 '나폴레옹1세'는 각지에로의 세력확대를 추진했다.
 그리고 1806년 2월 '나폴리왕국'을 점령해서 형 ‘죠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또 동년 5월에는 '바타비아공화국(네덜란드)'을 '네덜란드왕국'으로 해서
 남동생이었던 ‘루이 보나파르트’를 국왕으로 앉혔다.
 그리고 7월에는 '베루크대공국'을 수립(樹立)해서 의동생이었던 ‘뮤라’를 원수로 앉혔고
 또 '서남 독일' 각국의 연합체에서 親 '나폴레옹'의 '라인동맹'을 성립시켰다.


 
 ***  라인동맹(영:Confederation of the Rhine, 독:Rheinbund, 불: Confederation du Rhin)

 19세기의 '독일'에서 '프랑스황제 나폴레옹1세'의 압력에 의해서 성립했던 국가연합.
 '나폴레옹'의 패퇴와 함께 해체되었다. (자세한 것은 생략)



<Rheinbund>



 <나폴레옹의 승전 연설>

 병사들이여! 나는 제군들에 만족한다. 제군들은 이 '아우스트리트 전투'에서 내가 제군들의 용감함에 기대를 걸었던 것에 대해서 결코 실망을 시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군들은 제군들의 軍旗를 영원한 불멸의 영광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러시아황제'와 '오스트리아황제'가 지휘하던 10만의 군대는 불과 4시간도 되지 않아서 제군들의 손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또, 다행스럽게도 제군들의 포화를 면했던 적병들도 결국에는 도망을 가다가 호수에 빠져서 모두 다 죽었다. 그리고 또한 '러시아친위대'의 40개의 군기와 120문의 대포 그리고 또한 20명의 장군과 3만 이상의 포로가 영구히 영광으로 빛나게 될 이날의 전과이다.
 
제군들에게 이제 더 이상 무서워해야 할 적은 없다. 그러므로 병사들이여! 우리 조국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서 필요한 일들이 생길 때, 나는 제군들을 기꺼이 '프랑스'로 다시 돌려보낼 것이다. 그러면 '프랑스'의 온 국민들은 제군들의 귀환을 기뻐하며 환영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제군들은 그들 앞에서 당당히 <나는 '아우스트리트 전투'에 참가하고 돌아온 사람이다 !>라고 말을 한다면, 그들은 또 이렇게 제군들에 대해서 말을 할 것이다.
 
<아! 저 사람이 바로 '아우스트리트'의 영웅(勇士)이다!>라고...


 어쨌든, 그곳에서 '나폴레옹'은 교묘한 작전으로 완승했고
그 결과로 12월에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프레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또 그로인해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고액의 배상금 지불과 함께
영토의 할양 등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제3차 대불대동맹'은 붕괴했다.

그러자 '영국'의 수상이었던 ‘윌리엄 피트’는 그 패전의 충격으로 병이 나서 그 다음해에 죽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현재의 '개선문(凱旋門)'은 그 '아우스트리트전투'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이 1806년에 건축을 명했던 것이었다.


 
 * 에투알 개선문(불어:Arc de triomphe de l'Etoile)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도로'의 서쪽 '샤를 드골광장'에 있는 凱旋門이다. 그것은 '
파리'의 상징적인 건조물의 하나로, 단지 '개선문'이라고만 하면 그 '에투알 개선문'을 가리키는 수가 많기 때문에 세계의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개선문'을 중심으로 '샹젤리제 거리'가 시작되고, 그로부터 12개의 大路가 방사상(放射狀)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그 형태가 마치 지도상에서는 밝게 빛나는 <별-toile>과도 같게 보인다고 해서 그 광장은 <별의 광장(에투알광장)-la place de l'Etoile>이라고도 불렸다. 그 때문에 그것은 <에투알광장의 개선문>이라는 의미의 <Arc de triomphe de l'Etoile>이라는 정식명칭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 현재의 그 광장은 <샤를 드골광장-la place de Charles de Gaulle>이라고 명칭이 변경이 되어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개선문-Arc de triomphe>의 직역이<승전(勝戰) 또는 전승(戰勝)>의 아치>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선문> 그 자체는 전승기념비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고대 그리스'와 '로마' 건축을 모범으로 했던 '신고전주의 건축'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
에투알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명(命)에 의해서 건설이 시작되었지만, 그 완성은 ‘루이 필립’의 '복고왕정시대'였던 1836년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본인은 그 '개선문'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그 문을 처음으로 빠져 나갔던 것은 1840년 '파리'에 유해가 이장되었을 때였다.

 그 '개선문' 아래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던 '무명용사'들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또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의 '파리점령'으로 그곳에 '나치스旗'가 게양되었고
 '히틀러'가 전차를 타고 지나가기도 했다.
 



<에투알 개선문>








 

 

 

 

 



< Napoleon Bonaparte(24)- 끝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