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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ㅣ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80
데이비드 로빈슨 지음, 지현 옮김 / 시공사 / 1998년 6월
평점 :
품절
어제 찰리 채플린 경(Charles Chaplin Sir, 1889-1977)의 <모던 타임즈>를 두 번째 보았습니다. 강의시간에 당신의 무성영화를 본다는 것은, 당시의 생애를 다시 한 번 회상하게 하더군요. 런던 뮤직홀의 삼류 배우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황금광시대>(1925), <시티라이트>(1931), <모던타임즈>(1936)로 산업자본사회라는 시대의 嫡子였던 당신의 생애를 말입니다.
어제의 <모던 타임즈>는 저에게 당신이 과연 누구인지를 궁금하게 했습니다. 영화배우보단 영화감독으로, 영화감독보단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당신은 얼마나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당신은 슬랩스틱 코미디의 일인자로서 자본주의적 스타시스템의 스타였습니까? 아니면, 유나이티드 아티스츠(United Artists Corporation)의 설립자로서 메이저 영화사와의 경쟁을 벌였던 인디 영화감독이었습니까? 혹은 소비에트 학파의 에이젠슈타인(S. Eisenstein)과 어깨를 견줄만한 이데올로기적 영화를 만들었습니까? 저는 당신의 영화가 거리두기(distanciation)와 같은 기법에 충실했는지, 아니 그 방법을 통하지 않고도 이데올로기적 내용에 관객이 비판적 시각을 고양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모던타임즈>는 분명 '욕망에 대한 금욕주의적인 조절과 통제'가 얼마나 지옥같은 현실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노동이 노동의 자기 원인에로 지향하는 충전적인 운동을 하지 못하게 억압한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인 사회입니다(스피노자, 1985). 흔히 말하듯, 노동의 대상화, 인간의 소외, 상품의 물신화가 결정되어 있는 사회이죠.
그러나 저는 이진경씨가 말하듯 당신이 자본주의의 유쾌한 분열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당신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내면화된 주체가 어떤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공장, 컨베이어 벨트, 경찰, 감옥, 혁명 등은 모두 이에 대한 신랄한 풍자였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중반 이후로 어떤 대안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다만, 자본주의적 체제의 무게에 압사하는 한 소시민의 상상과도 같은 스토리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것은 분명 이진경씨가 들뢰즈를 빌려 말하는 '탈주' 개념이나 '분열증' 개념이 아닙니다. 이에 관한 들뢰즈의 저작이 말하는 욕망(d sir)은 역능(potentia) 개념이 집합적으로(collectively) 구성된 욕망의 '강도(intensity)'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모던타임즈>는 처음보면 그의 익살에 웃지만, 두 번째 보면 자본주의에 대해 절망적이고 대안없는 잿빛 노동자를 보여줄 뿐입니다.
채플린은 자본주의의 양상을 보여주었을 뿐, 이론과 실천의 관계나 코뮤니즘과 이행의 문제를 사고하지 않았습니다. 채플린의 롤러 스케이트는 자본주의의 경계 안쪽으로만 정향되어 있습니다. <모던타임즈>에는 '對抗權力'이 부재합니다. 당신은 나의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