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 시공 로고스 총서 16 시공 로고스 총서 16
존 라이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시공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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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촘스키에 대한, 내가 본 것 가운데 가장 잘 설명이 되어 있는 입문서이다. 그것은 존 라이언스 경의 권위와 더불어, 이 책이 블룸필드 학파를 비롯해 현대 언어학의 전반적인 목표와 태도를 언급하고 있으며, 생성문법과 변형문법의 간단한 모델을 보여주면서 촘스키 언어학의 뼈대를 잘 간추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아울러 '촘스키계 언어학에서의 Aspects 이후의 발전'과 촘스키 혁명을 하나의 보고서 형태로 다가가 그의 언어학이 지금도 발전하고 있음을 되짚은 신중함은 이 책에 대한 신뢰를 더욱 배가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작지만, 독자들에게 많은 편의를 준다.

특히, 부록에서 형식언어와 형식문법에 대한 설명은 전공자에게 아주 유익할 것이며, 또 다른 부록에서 제시된 촘스키와 그의 배경에 관한 다른 배경을 언급함으로써 공정함과 객관적인 시각도 확보하고 있다. 존 라이언스 경이 최신의 자료를 토대로 만든 참고문헌도 유용하며, 권장도서로 제시된 목록도 주변의 언어학 전공자들의 얘기를 종합해볼 때, 훌륭하다. 아마 이 책이 국내에서 촘스키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라는 점은 확실할 듯 하다.

이 외에도 이 책은 촘스키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철학이나, 행동주의 심리학, 그리고 정치학적 측면에서의 접근에 대해서도 상당히 유용하며 개방적이다. 예컨데, 철학적인 측면에서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은 그 기원을 플라톤의 언어관에서 찾음으로써, 예름슬레우나 방브니스트, 그리고 로만 야콥슨과 대비되는 촘스키 언어학의 특징을 변별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히 소쉬르 언어학에 힘입어 하나의 센세이션을 불러온 후기구조주의의 담론이 반플라톤주의를 특징으로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프랑스 내의 알랭 바디우와 같은 플라톤주의자와 촘스키 언어학을 묶어서 연구해보는 것도 좋은 과제가 될 것이다.

결국, 이 책은 미덕이 많은 책이다. 그리고, 입문서로서 아울러 촘스키 사상을 개괄한다는 점에서 공정하다. 더욱이 이 책 초판을 촘스키가 읽고 견해를 피력했다는 점에 있어서, 입문서에서 흔히 저질러지는 실수도 최소한으로 막았다는 점에서 더욱 신뢰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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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새길아카데미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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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하면서 많은 입문서를 읽었었다. 여타의 학문들이 그렇겠지만, 철학은 특히 그 학문 저변에 많은 관심층을 확보하고 있지만, 막상 학문에로 진입하기가 쉽지 않다. 철학 내부에서 쓰이는 개념들에 익숙해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철학 입문서들은 철학사를 통해서 개념의 변화를 살피는 방법을 주로 쓴다. 그런데, 이런 책들이 주로 영국이나 독일, 일본의 철학자들에 의해 많이 씌여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많았다.

이진경 선생의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그런 점에 있어서 반가움을 주는 책이다. 국내의 학자가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철학입문서를 썼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이전에도 많은 철학 입문서를 썼다는 점에 있어서 신뢰를 가지고 첫장을 펼칠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사회학을 전공하기는 하였지만, 책을 50페이지만 읽어도 그가 근대 이후의 철학에 얼마나 깊이있는 공부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중세 이전의 철학에 대해서는 개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이 책은 많은 철학자들의 중요한 사상을 건드린다. 딱히 공평한 입장을 보여주지 못했다 할지라도, 현재 논의되고 있는 철학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의 입장으로서 이 정도의 글을 손으로 써낼려면 상당한 내공을 쌓아야 한다. 근대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내가 정확한 언급을 할 수 없지만, 스피노자를 위시해 데카르트, 그리고 경험주의자들을 거쳐 헤겔에로 이르는 일단의 철학에 대한 서술은 상당히 매끄럽다. 그것은 이진경 선생이 그만큼 중요한 문제들을 빠짐없이 언급하고 있음을 뜻한다.

단, 이 책의 전반에 깔린 러셀 역설(혹은 거짓말쟁이 역설)의 구도에 따른 진리의 자기정합성의 논의를 밑바탕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주의해둬야 할 것이다. 두 명의 굴뚝청소부가 누구의 얼굴이 더러운지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철학의 주객일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진리가 어떻게 상호 일치하여 소통되는지를 연구하려는 관심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어떤 일정한 방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진경 선생은 책의 에필로그에서 이 책의 주장을 의심하라고 권고한다는 점에 있어서 이 또한 책의 미덕이라 하겠다. 철학은 다름아니 주체적으로 반성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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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80
데이비드 로빈슨 지음, 지현 옮김 / 시공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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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찰리 채플린 경(Charles Chaplin Sir, 1889-1977)의 <모던 타임즈>를 두 번째 보았습니다. 강의시간에 당신의 무성영화를 본다는 것은, 당시의 생애를 다시 한 번 회상하게 하더군요. 런던 뮤직홀의 삼류 배우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황금광시대>(1925), <시티라이트>(1931), <모던타임즈>(1936)로 산업자본사회라는 시대의 嫡子였던 당신의 생애를 말입니다.

어제의 <모던 타임즈>는 저에게 당신이 과연 누구인지를 궁금하게 했습니다. 영화배우보단 영화감독으로, 영화감독보단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당신은 얼마나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당신은 슬랩스틱 코미디의 일인자로서 자본주의적 스타시스템의 스타였습니까? 아니면, 유나이티드 아티스츠(United Artists Corporation)의 설립자로서 메이저 영화사와의 경쟁을 벌였던 인디 영화감독이었습니까? 혹은 소비에트 학파의 에이젠슈타인(S. Eisenstein)과 어깨를 견줄만한 이데올로기적 영화를 만들었습니까? 저는 당신의 영화가 거리두기(distanciation)와 같은 기법에 충실했는지, 아니 그 방법을 통하지 않고도 이데올로기적 내용에 관객이 비판적 시각을 고양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모던타임즈>는 분명 '욕망에 대한 금욕주의적인 조절과 통제'가 얼마나 지옥같은 현실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노동이 노동의 자기 원인에로 지향하는 충전적인 운동을 하지 못하게 억압한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인 사회입니다(스피노자, 1985). 흔히 말하듯, 노동의 대상화, 인간의 소외, 상품의 물신화가 결정되어 있는 사회이죠.

그러나 저는 이진경씨가 말하듯 당신이 자본주의의 유쾌한 분열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당신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내면화된 주체가 어떤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공장, 컨베이어 벨트, 경찰, 감옥, 혁명 등은 모두 이에 대한 신랄한 풍자였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중반 이후로 어떤 대안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다만, 자본주의적 체제의 무게에 압사하는 한 소시민의 상상과도 같은 스토리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것은 분명 이진경씨가 들뢰즈를 빌려 말하는 '탈주' 개념이나 '분열증' 개념이 아닙니다. 이에 관한 들뢰즈의 저작이 말하는 욕망(d sir)은 역능(potentia) 개념이 집합적으로(collectively) 구성된 욕망의 '강도(intensity)'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모던타임즈>는 처음보면 그의 익살에 웃지만, 두 번째 보면 자본주의에 대해 절망적이고 대안없는 잿빛 노동자를 보여줄 뿐입니다.

채플린은 자본주의의 양상을 보여주었을 뿐, 이론과 실천의 관계나 코뮤니즘과 이행의 문제를 사고하지 않았습니다. 채플린의 롤러 스케이트는 자본주의의 경계 안쪽으로만 정향되어 있습니다. <모던타임즈>에는 '對抗權力'이 부재합니다. 당신은 나의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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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짓기 -상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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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가 점차 관심을 끌어가고 있는 점은, 소위 '언어공산주의'라고 부른 것에 대한 비판 속에서 촘스키와 소쉬르의 언어이론이 역사적 조건의 문제를 도외시했으며 그 결과 주체의 문제를 생략할 수 밖에 없었다는 강력한 비판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는 언어이론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실천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을 구성하려 했다는 식으로만 요약할 수 있는 박학다식과 면밀하고도 날카로운 사유방식을 지녔으며, 그에 못지 않게 그 자신이 실천적인 지식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비판의 예에서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듯이 그는 (포스트) 구조주의의 '주체의 죽음' 앞에 주관주의는 죽어야 하지만 주체성마저도 사멸해서는 안된다는, 어떻게 보면 고답적인 문제제기를 던지면서, 또 어떻게 보면 이제는 '동일성의 제국주의 요새'라고 비난받고 있는 '변증법적 종합'을 강력하게 주창하면서 구조/행위 간의 이분법적 대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갈구해 온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어준다.
그러나 그의 종합은 결코 진부함이나, 비일관성, 혹은 단순한 절충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 물론 교육.언어.종교.이데올로기.취미(taste) 등 다양한 문화의 영역을 분석하는 부르디외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사회구조와 상징 구조 사이의 상응관계를 전제로 지식과 사회적 인식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을 시도하였던 뒤르켐의 관심을 직접 계승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뒤르켐이 합의와 통합을 강조했던 반면에 그는 상징구조를 투쟁과 지배의 관계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또 이 관계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경제적인 자본만이 아니라 상징자본, 문화자본, 교육 자본 등의 무수한 자본의 관계 망을 통해서 분석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오히려 맑스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 1950년대에 레비-스트로스의 영향력 하에 인류학을 연구하면서 구조주의적 관점을 수용했으나 60년대 중반 이후 '지식활동에 의하여 구성된 객체에 불과한 구조를 역사적 행위의 주체나 실천을 구속할 수 있는 힘으로 취급'한다고 구조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장 잘 알려진 개념인 아비투스와 장(champ)은 바로 이런 종합을 행하기 위한 그의 중심적인 개념이다. 물론 이 개념들에 못지 않게 중요하면서 이 개념들을 보충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상징권력, (상징권력과 물질적 권력을 위한) 전략과 투쟁, (경제적, 문화적, 상징적 자본 등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자본 등의 개념이다.

우리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그 모색의 실천방안을 고심하고 있을 때 새로운 개념을 형성하고 변형하고 창안해 내며 이를 실증성의 수준에서 검색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의 실천적 자양분을 위해서 그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이런 점에 있어서 부르디외의 '구별'은 좋은 책이다. 게다가 여타 프랑스 지식인들보다 덜 사변적이고 더 실천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유독 '문화'와 관련한 것이 가장 잘 팔리고 있는 대학이라는 장, 지식이 생산되고 소비되고 분배되는 이 장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재 상황에서 그의 연구 작업은 우리의 새로운 사유, 새로운 실천을 구가하는데 마땅히 좋은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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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 거울을 가진 마술사의 신화 재원 미술 작가론 2
강홍구 지음 / 재원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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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트가 1960년대 초,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그 이미저리는 미국 소비문화의 방대하고도 공허한 공간으로부터 심각한 고급 미학의 영역으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이에 대해 예술계의 많은 사람들이 경악한 것은 물론이다. 심각한 회화와 조각이 햄버거 상점과 도색잡지,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엄청난 광고와 영화·텔레비젼으로부터 도피처를 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세련된 비구상적인 작품들인 '미니멀'과 흐름을 같이하여 1965년에는 지난 10년간을 지배하던 회화적 온기와 표현적인 열정은 완전히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팝아트가 전세계를 장악하였으며, 워홀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와 맞먹는 명성으로 이 선두에 서게 된다.

그는 이미지를 창조해냈다기보다 이미 있던 매력적인 레디메이드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기존의 이미지를 세련되고 아이러닉하며 진지하게 다룬 반면, 워홀은 자신의 예술에 있어서 세속적인 부분을 삭제하는 것을 거부했다.

또, 그는 자신의 예술이 자아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우리는 그를 매료시키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 이유는 확실히 모른다. 예술가의 내면적인 동기는 스스로 자신을 분석하여 보여준다 하더라도 항상 모호하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구심점인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 즉 대상/인식의 근대적 사고를 전도시켜 음성우월주의를 낳게 한 철학사조와 동시대에 서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워홀 역시 무엇을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없다는 것에 마음을 같이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워홀의 의도-그림을 '그림의 해석'이 아닌 '그림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는 독자들에게 곡해되어 그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즉, 겉으로 보기에 철저한 베일에 가려진 그 그림에서 독자는 끊임없이 해석에 대한 욕구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워홀의 생에에 관한 설명이나 개별적 작품에 대한 서술은 팝 아트라는 미술사조에서는 그 특성상 불필요할 것 같다. 나는 단지 '마티스처럼 되고 싶어하는' 워홀의 작품에 대해 대상으로서의 해석이 아닌, 직관으로서 그림을 '보고' 싶을 따름이다. 이렇게 해야 완전한 無만을 암시하는 워홀의 그림을, 회화적인 시대상을 피하려는 그의 의도로서 알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마릴린 시리즈와 캠벨 수프 깡통을 통해서 앤디 워홀이 가지는 位相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자본주의와 토템신앙에서 찾고 싶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자본주의 시대에는 실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시뮬라르크(모조품)만이 있는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본 것과 맞물린다. 즉, 워홀의 작품은 오리지날의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대량생산이 가능한데,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열광한다. 왜일까? 나는 그것이 토테미즘에서 찾고 싶다.

우리는 자신의 옷이나 구두가 대량생산된 공산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자신만의 의미를 가지며 숭배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인이 벌어들일 수 있는 자본의 한계에서 연유하는 것 같다. 이렇게하여 현대미술은 원본의 희소성이라는 위험없이 팝 아트로서 대중들의 지속적인 미술에 대한 관심을 고수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비록, 나의 지식으로 팝 아트가 가진 미술사적 성패여부는 알 수 없지만, 자본주의에서 팝 아트는 대중의 의식에 깊이 뿌리박혀, '대중이 원하는 미술'로서-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미술로서 굳게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자리에서 앤디 워홀의 팝 아트는 우리들에게 친근한 이미저리로서, 단지 오브제가 아닌 소비되기 위한 미술로서 위치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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