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 거울을 가진 마술사의 신화 재원 미술 작가론 2
강홍구 지음 / 재원 / 1995년 8월
평점 :
절판


팝 아트가 1960년대 초,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그 이미저리는 미국 소비문화의 방대하고도 공허한 공간으로부터 심각한 고급 미학의 영역으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이에 대해 예술계의 많은 사람들이 경악한 것은 물론이다. 심각한 회화와 조각이 햄버거 상점과 도색잡지,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엄청난 광고와 영화·텔레비젼으로부터 도피처를 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세련된 비구상적인 작품들인 '미니멀'과 흐름을 같이하여 1965년에는 지난 10년간을 지배하던 회화적 온기와 표현적인 열정은 완전히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팝아트가 전세계를 장악하였으며, 워홀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와 맞먹는 명성으로 이 선두에 서게 된다.

그는 이미지를 창조해냈다기보다 이미 있던 매력적인 레디메이드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기존의 이미지를 세련되고 아이러닉하며 진지하게 다룬 반면, 워홀은 자신의 예술에 있어서 세속적인 부분을 삭제하는 것을 거부했다.

또, 그는 자신의 예술이 자아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우리는 그를 매료시키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 이유는 확실히 모른다. 예술가의 내면적인 동기는 스스로 자신을 분석하여 보여준다 하더라도 항상 모호하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구심점인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 즉 대상/인식의 근대적 사고를 전도시켜 음성우월주의를 낳게 한 철학사조와 동시대에 서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워홀 역시 무엇을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없다는 것에 마음을 같이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워홀의 의도-그림을 '그림의 해석'이 아닌 '그림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는 독자들에게 곡해되어 그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즉, 겉으로 보기에 철저한 베일에 가려진 그 그림에서 독자는 끊임없이 해석에 대한 욕구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워홀의 생에에 관한 설명이나 개별적 작품에 대한 서술은 팝 아트라는 미술사조에서는 그 특성상 불필요할 것 같다. 나는 단지 '마티스처럼 되고 싶어하는' 워홀의 작품에 대해 대상으로서의 해석이 아닌, 직관으로서 그림을 '보고' 싶을 따름이다. 이렇게 해야 완전한 無만을 암시하는 워홀의 그림을, 회화적인 시대상을 피하려는 그의 의도로서 알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마릴린 시리즈와 캠벨 수프 깡통을 통해서 앤디 워홀이 가지는 位相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자본주의와 토템신앙에서 찾고 싶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자본주의 시대에는 실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시뮬라르크(모조품)만이 있는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본 것과 맞물린다. 즉, 워홀의 작품은 오리지날의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대량생산이 가능한데,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열광한다. 왜일까? 나는 그것이 토테미즘에서 찾고 싶다.

우리는 자신의 옷이나 구두가 대량생산된 공산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자신만의 의미를 가지며 숭배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인이 벌어들일 수 있는 자본의 한계에서 연유하는 것 같다. 이렇게하여 현대미술은 원본의 희소성이라는 위험없이 팝 아트로서 대중들의 지속적인 미술에 대한 관심을 고수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비록, 나의 지식으로 팝 아트가 가진 미술사적 성패여부는 알 수 없지만, 자본주의에서 팝 아트는 대중의 의식에 깊이 뿌리박혀, '대중이 원하는 미술'로서-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미술로서 굳게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자리에서 앤디 워홀의 팝 아트는 우리들에게 친근한 이미저리로서, 단지 오브제가 아닌 소비되기 위한 미술로서 위치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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