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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병리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10
조르주 캉길렘 지음 / 한길사 / 1996년 6월
평점 :
절판
조르쥬 캉킬렘은 바슐라르-캉킬렘-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 인식론 계보의 주축이다. 이 계보는 상당히 유명하며, 캉킬렘 자신에게도 푸코를 비롯해 알튀세, 드장티, 세르, 발랑 등의 학자들에게 생명철학과 의학철학을 바탕으로한 과학 을 의미를 가르쳤다. 그는 철학교수이면서 의학박사이기도 하였는데, 이는 분명히 실증적인 바탕에서 철학이 구성되는 프랑스의 특별한 문화적 전통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소개가 들뢰즈나 푸코 등 몇몇 학자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쉬운 점이 많다. 철학 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들도 그렇듯이, 철학은 철학사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상과 개념이 나오면 거기에 대한 보충이 있고 반대가 있고, 또한 극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구성하는 것이 철학이고 철학사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캉킬렘의 과학사 연구인 <과학사와 과학철학연구>(1968)와 <생명과학의 역사에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1977) 등도 속히 번역되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문학은 해당 전공의 언어를 익혀야만 접근할 수 있는 학문이라면, 지금 흔히 이야기되는 인문학의 위기 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많은 대중들이 알 수 있고, 같이 이해할 수 있는 학문이 되어야만 인문학은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고, 스스로 학문으로서 정체성을 확고히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자생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인문학이라 하더라도 우선은 자본주의의 체계에 순화되어야만 비판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 그런 어려움이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나에게 던져줬던 느낌이나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 과 같은 사회학의 연구가 합쳐진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캉킬렘의 정상과 병리 이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전통적으로 바슐라르 뿐만 아니라 과학사에 대한 깊이와 전문성이 유명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캉킬렘을 공부해본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작업일 것이다.
이 책에서 흔히 이야기는 하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과학과 인문학이 拮抗하는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통찰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했는데, 독자 여러분은 어떨지 궁굼하기도 하다. 그리고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언급되는 병원 의 개념이 규정되는 것과 질병이 하나의 가치 문제로 다루어지는 문제는 바로 캉킬렘의 이 책에서 직접적으로 연원한다는 사실이다.
캉킬렘이 말하는 정상 은 생명의 규범에 대한 표현이다. 하지만 생명의 규범은 일탈상태, 즉 질병에서 더 잘 인식된다. 질병도 생명의 규범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와 과학 자체의 경계 및 정체 문제를 이해하는데 이 책은 좋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프랑스의 과학사와 인식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필독서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