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푸코
질 들뢰즈 지음, 권영숙 외 옮김 / 새길아카데미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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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푸코. 이 두명은 지금 국내의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하나의 키워드로 읽힐만큼 새롭게 연구가 되고 있는 학자이다. 철학 전공자인 나에게도 이 두명의 학자는 젊은 학도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영역이다.

예컨데, 들뢰즈의 <앙띠 오이디푸스>나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아가는 것은 선대의 어느 철학자들 못지 않다. 또한 <의미의 논리>나 <담론의 질서>를 비교하며 그들의 후기구조주의적인 면모를 살피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정우 선생은 이를 객관적 선험으로 개념화하기도 했다) 들뢰즈의 푸코는 이 둘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유일한 단행본이다.

물론, 그들은 대담에서 몇차례 만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마가진 리테르뜨에서 그들의 핵심단어인 욕망(desir)과 권력(pouvoir) 개념을 서로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들뢰즈가 푸코를 위해서, 그의 연구를 세심하게 논의하였다는 것은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대담과 단행본의 의미구성이나 농밀함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서 들뢰즈는 그가 익히 스피노자나 니체와 같은 학자들의 주해를 달때에도 그랬듯이, 푸코의 주해도 그의 미래의 연구를 위한 공부이기도 했다. 즉, 푸코의 미시적인 권력분석에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스스로 그를 공부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역사적 선험성이나 외부(dehors)로 이해되는 에피스테메, 들뢰즈의 특이성(singularite)과 푸코의 미시정치학을 비교한 부분, 가시적인 것과 언표가능한 것의 관계 등의 문제를 논의하는 부분은 푸코를 이해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푸코에 비춰진 들뢰즈 자신의 思惟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학문에서의 정신적인 교감과 그들의 유대를 알 수 있는 책이 들뢰즈가 쓴 <푸코>이다. 전공자라면 이 책에서 두 사람의 사유가 교차하는 부분을 많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이 책의 결점을 하나만 꼽자면, 책의 구서이라든가 용어 사용의 문제에 있어서 들뢰즈가 그의 후기 용어들을 너무 많이 쓴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니체나 스피노자, 흄의 주해와는 다른 것이다. 즉, 들뢰즈는 푸코의 미시권력 개념에 대해 하나의 반론을 펼친다는 인상도 풍기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공평하게 이해하려면 적어도 들뢰즈와 푸코의 주요저작을 읽은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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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병리 한길그레이트북스 10
조르주 캉길렘 지음 / 한길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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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쥬 캉킬렘은 바슐라르-캉킬렘-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 인식론 계보의 주축이다. 이 계보는 상당히 유명하며, 캉킬렘 자신에게도 푸코를 비롯해 알튀세, 드장티, 세르, 발랑 등의 학자들에게 생명철학과 의학철학을 바탕으로한 과학 을 의미를 가르쳤다. 그는 철학교수이면서 의학박사이기도 하였는데, 이는 분명히 실증적인 바탕에서 철학이 구성되는 프랑스의 특별한 문화적 전통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소개가 들뢰즈나 푸코 등 몇몇 학자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쉬운 점이 많다. 철학 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들도 그렇듯이, 철학은 철학사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상과 개념이 나오면 거기에 대한 보충이 있고 반대가 있고, 또한 극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구성하는 것이 철학이고 철학사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캉킬렘의 과학사 연구인 <과학사와 과학철학연구>(1968)와 <생명과학의 역사에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1977) 등도 속히 번역되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문학은 해당 전공의 언어를 익혀야만 접근할 수 있는 학문이라면, 지금 흔히 이야기되는 인문학의 위기 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많은 대중들이 알 수 있고, 같이 이해할 수 있는 학문이 되어야만 인문학은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고, 스스로 학문으로서 정체성을 확고히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자생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인문학이라 하더라도 우선은 자본주의의 체계에 순화되어야만 비판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 그런 어려움이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나에게 던져줬던 느낌이나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 과 같은 사회학의 연구가 합쳐진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캉킬렘의 정상과 병리 이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전통적으로 바슐라르 뿐만 아니라 과학사에 대한 깊이와 전문성이 유명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캉킬렘을 공부해본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작업일 것이다.

이 책에서 흔히 이야기는 하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과학과 인문학이 拮抗하는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통찰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했는데, 독자 여러분은 어떨지 궁굼하기도 하다. 그리고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언급되는 병원 의 개념이 규정되는 것과 질병이 하나의 가치 문제로 다루어지는 문제는 바로 캉킬렘의 이 책에서 직접적으로 연원한다는 사실이다.

캉킬렘이 말하는 정상 은 생명의 규범에 대한 표현이다. 하지만 생명의 규범은 일탈상태, 즉 질병에서 더 잘 인식된다. 질병도 생명의 규범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와 과학 자체의 경계 및 정체 문제를 이해하는데 이 책은 좋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프랑스의 과학사와 인식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필독서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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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란 무엇인가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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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선생의 책은 여러권 베스트셀러에 올랐는데, 이 책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밝혔듯이 이 책은 1985년 11월 고려대학교에서 2천여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한 강의의 서론을 글로 옮겨놓은 것이다.

책의 앞머리에 김용옥 선생은 모든 언명은 그 자체가 표현하고자 하는 명제의 완전한 표현일 수가 없다 는 러셀 역설을 원용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김용옥 선생의 스타일답다고 하겠다. 개인적으로 김용옥 선생의 모든 저작을 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절반 정도는 읽어보았다. 물론, 내가 동양철학의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깊이있는 말은 하지 못하겠지만, 이 책은 상당히 재밌으며 검토해보고 싶은 글이다. 더군다나 그가 이 말들을 다 강연으로 쏟아부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가 공부를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물론, 그가 이 책을 아직까지 완결하지 못했고, 서설이 너무 길다는 단점을 극복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치명적인 결점임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옥 선생의 글은 재미있고, 가히 천재라 할만하다. 언젠가 강준만 교수도 그를 두고 천재이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여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했을 정도니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그때의 젊은 김용옥 선생의 강의를 듣지 못한 아쉬움이 많이 생긴다. 물론 그때 나는 어려서 강의를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그의 열정을 肉聲으로 듣고 싶은 욕망이 인다.

어쨌든 글에는 상당히 자투리 내용들도 많지만, 본문으로 들어가면 또 상당히 전문적이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에 대한 동양철학적 관점의 깊이도 심오하다. 그래서 나는 감히 이 책을 김용옥 선생의 주저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그가 기왕에 강의에 더 신바람이 나고, 더 열성적으로 내용들을 전달하는 특성을 가졌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독창성도 보이는 것 같다. 비록 내가 동양철학 방면을 잘 모르기 때문에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의 해석은 상당한 고증과 학문적 열의로 불타있다. 젊은 날의 신진학자가 가지고 있는 그런 열의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김용옥 선생의 이 책을 읽어본다면 김용옥 선생 식의 강의와 저술이 가지는 장단점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독자 여러분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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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분석 홍신사상신서 41
칼 구스타프 융 외 지음 / 홍신문화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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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은 취리히에 있는 부르크헬츨리 정신 병원의 의사였으며, 신경증보다 더 심한 정신 질환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방법을 최초로 시험해 본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콤플렉스라는 그 유명한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으며, 진단을 위한 단어 연상 시험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융은 그의 스승인 프로이트와 결별한다. 그는 프로이트를 존경했지만, 자신이 그를 방어하고 있다고 믿었다. 어떤 이들은 프로이트의 학설에 대한 그의 비판이 너무 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의 비판은 대체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쾌락을 얻으려는 것이 곧 성욕은 아니다', '리비도를 성적인 것으로 규정하면 안된다', '육아 성욕이라는 개념은 타당성이 약하다' 등으로 프로이트가 어린 시절과 신경증의 성적 원인에 대해 발견해 낸 학설의 근본개념을 공격했다. 프로이트는 그와 같은 융의 '독립'을, 무의식에 대한 저항이며 아버지를 없애고 싶어하는 소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의식에 관한 이론은 프로이트와 융에 의해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프로이트와 융이 서로의 이론에 관해 많은 질의를 가했고, 거기에 대해 서로 답변하기가 난해했다는 점에 근거한다. 여기서 나는 융의 학설에 몇가지 개별적이고 일반적인 의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모든 의문을 다 적을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만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융에게 있어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관한 의문이다. 사고는 자아라는 상위범주를 가진다. 그래서 오성에 의해 의식이든지 무의식이든지 동일한 범주에 속한 사실[의미]들은 제3의 생성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의미]들은 그 억압과 정화에 따라 의식과 무의식을 옮겨가며 생성할 수 있는 것일까?

무의식에도 superego와 ego가 있는데, 이 요소들은 전의식과 의식에도 있는 요소들이다. 그렇다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는 유동적인 것이 아닐까? 본능 또한 무의식만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이성과 육체의 본능이라는 측면에서 의식의 상태에서도 나타난다고 본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유동적이라면 과연 순수한 무의식은 있는 것일까? 무의식의 요소는 모두 前의식에 다름 아닌것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라는 라캉의 주장은 무의식과 주체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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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시전집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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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시인은 의사이면서 시인이다. 그리고 그의 시전집은 내가 곧잘 읽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마종기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우연히 병원에서였다. 그때 나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병원에 10개월가량 입원을 하면서 수술도 여러번 받았는데, 그때 만났던 것이 마종기 시인의 시였고,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특히 그 가운데, 「戀歌4」와 「戀歌9」는 白眉인데, 그 각각의 詩를 나는 지금도 외우고 있다.

그의 시는 간명하면서 삶에 대한 단면을 잘라 보여준다. 마치 우리의 살갗 밑을 방사선으로 찍어내어 그 속내를 들여다보듯이, 그는 시를 통해 삶의 단층면을 잘라보여준다고 나는 느꼈다(그는 실제로 오하이오 아동병원 부원장 겸 방사선과 과장이다). 의사의 직업이 가진 천명이랄까? 시인의 말마따나 사람들을 전송하면서 살고 있는 그가 그 친구들의 허전한 웃음 끝을 몰래 배우게 되는 그런 과정들 말이다. 그래서 그의 시집들을 차례대로 읽어나가면 조용히 그리고 부드럽게 흐르는 낮은 클래식 음악을 듣는 기분이다.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그런 음악 말이다.

삶과 죽음의 계보를 가로지르는 그의 시어의 음조들이 어우러내는 '평균률'을 들으며 나는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완쾌되는 병이 아니었기에 나는 허전한 웃음 끝을 의사들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의 미안한 마음의 전송을 나는 알고 있었다. 삶은 그런 것이리라. 서로에게 작은 마음들을 비춰주고, 그들의 쓸쓸함을 조용히 어루만져 주는 그런 것.

나는 이번 겨울 다시 병원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다시 수술을 할지 모른다. 그럴 때, 몇가지 옷가지와 책을 챙겨갈 것이다. 물론, 잊지 않고 마종기 시전집도 들고가겠지. 그의 허전한 웃음 끝을 다시 한 번 음미하고 싶다. 그의 교훈을 다시 한 번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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