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는 마법의 주문이다. 새벽부터 보슬보슬 내리는 빗소리에 책 한 권을 여유롭게 펼쳐든다. 주문을 외우듯 자연스레 책을 펼쳐들게 만드는,
커피 한잔의 여유까지 선물하는 빗소리에는 정말 마법같은 어떤 주문이 숨겨져 있다. 몇일 전에도 내리는 빗소리에 취해 사랑이야기 들려오는 작은 책
한 권과 마주했었는데... 대신 오늘은 하얀 가면이 놓여진 미스터리 한 권과 마주하고 있다. 무섭게 생긴 삐에로 가면도 어울릴 것 같은 본격
미스터리, 새로운 작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작은 기대로 빗소리에 귀기울이며 커피 한모금, 그리고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긴다.
".... 그날 밤, 저는 당직을
서려고 차를 타고 다도코로 병원에 갔습니다."
좁은 취조실에 하먀미즈 슈고는 경찰과 마주하고 있다. 벌써 열시간도 넘게, 3일전 악몽과도 같던 그 날의 일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
밤 다도코로 병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슈고가 겪은 일을 이제 우리가 그의 목소리를 통해 조심스레 따라가본다. <가면병동>은
그렇게 하야미즈 슈고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선배의 부탁으로 교외에 있는 다도코로 병원에서 하룻밤 당직 대타를 서게 된 슈고, 다도코로
병원은 요양병원으로 의식이 온전치 못한 환자나 의료적 조치가 필요한 환자들이 주로 입원하고 있는 병원이다. 그래서 특별한 사건 사고 없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 였던 셈이었다. 그렇게 가벼운 맘으로 들어선 다도코로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치넨 미키토! 조금은 낯선 이 이름과 함께 찾아온 <가면병동>은 '클로즈드 서클'을 표방한다. '외부와 연락을 일절 취할 수
없는 완벽하게 고립된 장소에서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현상'을 말하는 이 표현은 다시말해 고립된 장소, 밀실, 통신수단 불가능, 무리에서
이탈한 인물의 죽음 등 특별한 상황과 배경을 전제로 하게된다. 우리가 익히 만나온 다양한 일본 미스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던 설정인 것이다.
교외의 밀폐된, 외부에서 접근이 어려운 공간을 배경으로 갑작스레 찾아온 등장인물에 주인공 슈고와 병원관계자들 모두 인질이 되고 만다.
보직 알바를 생각하고 찾았던 요양병원에 사건이 벌어진건 당직 일을 시작하고 오후 9시를 넘긴 시간쯤이었을까? 갑작스런 호출에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간 슈고! 삐에로 가면을 쓴 편의점 강도와 그가 쏜 총에 배를 맞은 여인이 인질로 병원에 들어온 것이다. 이 흉칙한 삐에로는
슈고에게 총에 맞은 여인, 마나미의 수술을 요구한다. 그녀를 살려내면 슈고와 다른 병원 관계자들을 해치지 않고 조용히 나가겠다는 제안을
하게된다. 슈고는 마나미를 무사히 수술하고 경찰에 신고하려 하지만, 병원장의 만류로 휴대전화를 빼앗기고 만다.

삐에로 강도에게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되는 병원장 다도코로, 예상치 못한 간호사의 죽음으로 병원의 어둠은 점점더 깊어진다. 요양병원이 이
곳에서 환자를 수술한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휴대전화와 내선전화를 끊어버리는 병원장의 행동은 점점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 병원 내부에
존재하는 비밀장소들, 요양병원과는 관련 없을 것 같은 첨단 의료장비들, 병원장을 조심하라는 경고와 다도코로 요양병원이 가진 비밀이 서서히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삐에로 강도는 왜 이 병원을 찾아왔던 것이고, 인질이었던 마나미와 사라진 3천만엔의 행방은 또 어떤 결말로 이야기를
끌고갈지 궁금증이 더해간다.
'내일 아침까지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
새벽까지만 버티면 살아날 거라고 믿었던 단순 인질 사건, 하지만 인질 강도와 병원 내부 인질들사이의 싸움처럼 보여지던 사건의 시작은 점점
병원 내부의 숨겨진 미스터리에 초점이 맞춰진다. 병원장의 이상스런 행동들, 신원불명의 환자, 폐쇄된 요양병원 이라는 밀실이 주는 공포와 맞물려
탈출과 경찰에 연락하려는 인질들의 긴장감 넘치는 모습들도 긴장감을 더해준다. <가면병동>은 범죄 사건과 의료 미스터리를 교묘하게
믹스해놓은 구성 조차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내과의사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의사이기도 한 치넨 마키토의 의료계 경험과 맞물려 병원 내부의 설정과 사건 전개속 의료현장의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져 현장감을 더해준다. 300페이지 조금 넘는 분량은 이 미스터리를 담아내기에, 가독성 넘치는 이야기를 펼치기에 적당한 몰입감을 선물한다.
어찌보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구성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촘촘하게 짜여진 사건의 구성과 조금씩 조금씩 밝혀지는 진실이 전해주는 짜릿함은 재미를
더하고 빠져들게 만들기에 충분해보인다.
섬세하고 스릴 넘치는 심리 추격전, 잔인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긴장감이 느슨한 그런 작품도 아닌, 반전에 반전 그리고 본격 미스터리에서
빠질 수 없는 마지막 대반전이 전해주는 카타르시스는 <가면병동>이 가진 빼놓을 수 없는 미덕임에 틀림없다. 마법의 주문으로 펼쳐 들게
된 작은 순백의 책 한 권이 오랫만에 본격 미스터리의 재미를 선물해준다. 낯선 작가, 하지만 짙게 남은 인상으로 치넨 마키토 '병동' 시리즈의
또 다른 작품인 '시한병동'을 기다려지게 만든다. 마지막 무더위의 끝에서 시원한 선물과 함께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