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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피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3월
평점 :
마에카와 유타카, 제15회 일본 미스터리문학대상 신인상 수상이라는 거창한 수식과 함께 그 이름을 만나게
되었다. <크리피>라는 심상찮은 이름을 가진 작품으로 다가온 마에카와 유타카, 그리 대수롭지 않게 마주했지만, 책을 펼치자마자 이
작가에게 빠져버린다. '크리피 creepy'의 뜻은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혹은 '기분 나쁜, 소름 끼치는' 의 의미를 가진다고 주인공
다카쿠라는 책속에서 말한다. 책을 펼치고 내려놓을 때까지 그 기분 나쁜, 소름끼치는 공포가 왠지 마음을 무겁게 억누르는듯 느껴진다.
"그 사람은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범죄심리학 전공 교수, 마흔 여섯의 다카라쿠에게 다가온 이상한 이야기들이 그와 아내, 가족의 삶을 뒤바꾸어
버린다. 불륜까지는 아니더라도 졸업논문을 쓰며 가까워진 린코라는 학생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더니, 경시청 경부가 된 30년 만에 만난 동창
노가미가 범죄심리학 교수인 자신에게 8년전 일어난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히노시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을 가지고 찾아온다. 하지만 이후 노가미는
실종되고, 얼마지나지 않아 앞집에 살던 두 노모녀 집에 화재가 발생해 죽게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옆집에 사는 니시노씨의 딸은 니시노가 자신의
아빠가 아니라고 말 하는데...
숨가쁘게 벌어지는 사건 가운데에서 과거 히노시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과 노가미, 그리고 옆집 니시노 사이에 어떤 인과 관계가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하지만 노가미가 행방불명되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 와중에 교수와 여제자라는 어정쩡한 은밀한 관계가 중간 중간
등장하면서 이후 또 다른 사건의 단초가 될것을 암시하기도 하고, 결국 옆집 니시노의 딸 미오가 다카라쿠의 집에 밤 늦게 도망쳐오는 일을 시작으로
사건을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속도를 낸다.
'크리피'라는 제목 답게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의 느낌이 역시 'Creepy'했다. 미궁속에 빠진 8년전 행방불명 사건, 새롭게 벌어진
살인사건과 또 다른 납치 도주 속에서도 무엇하나 속시원히 해결되는 것 없이 기분 나쁘고 오싹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별 연관성이 없을 것 같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사건들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하나로 연결되고 퍼즐이 맞추어진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는 사건의 실체, 정체를 드러낸
범인이 있지만 그 모습은 사라져 뭔가 석연찮은 느낌을 전해준다. 마지막까지 책을 놓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오랫만에 정말 온 마음을 빼앗겨버린 작품과 마주하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행방불명 사건과 살인 사건들의 연관성이 서서히
밝혀지고 사건의 범인을 짐작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확실한 결말을 예측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크리피>라는 제목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지도 모를일이다. <악인>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속 그 악인을 바로 이 작품속에서
다시 만난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악인'은 절대적인 '악'이 아니라 정신분열적 '악'이라 느낌이 든다.
당신의 '이웃'이 어쩌면 우리 삶에서 가장 무서운, 위험한 존재는 아닐까? 삭막한 세상속에 고립된 현대인들이 가진 취약점이 어쩌면 이
작품의 소재가 된다. 근친상간, 소아성폭력, 살인, 방화, 스토킹 등 다소 거친 소재들로 가득하지만 잔인한 부분들이 부각되지는 않아 그리 무리한
느낌은 없어보인다. 매스컴과 미디어의 폭력성을 말하고 이웃과 공존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 이런 사이코패스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바로 이런 우리 사회의 고독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카쿠라라는 주인공이 가진 평범함이나 사건의 범인, 그 위험 인물을 예상하면서 평범한 학생들과 함께 찾아간 무모함 등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기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에카와 유타카의 <크리피>는 가독성 만큼은 정말 최고의 작품으로 꼽으수 있을것 같다. 탄탄한 구성과
끝없는 반전이 전해주는 묘미, 몇몇 캐릭터들이 전해주는 매력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첫 작품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준 마에카와 유타카의 다른
작품들도 너무나 궁금해진다. 또 어떤 괴물들이 그녀의 멋진 작품들을 삼켜버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