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쓰미 쇼이치. 사진작가, 사진 주간지에서
사진을 조작했다는 누명을 쓰고 업계에서 퇴출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 사진 조작이 그와 상관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고서도 한동안 다시금 그의 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흥신소 일을 도와주다 탐정 사무소를 내게 되고 잠시 탐정 활동에 몰두 했던 그, 이제 그는 자신의 사진집을
내기 위해 다시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표지를 장식할 사진을 찾기위해, 폐허가 된 한 건물 앞에 선다. 그곳에서 예기치 못한 살인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창백한 잠>의 표지가 참 인상적이다. 카메라 프레임인 듯한 표지는 군청색으로 물든 렌즈속 풍경이 담겨진다. 언듯 공장의 잔해들
같기도 하고, 가만히 보니 물위에 뜬 정유시설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이것은 사진작가인 주인공 다쓰미 쇼이치의 카메라속에 비친 풍경이리라.
그의 가깝고도 먼 연인 후지코는 그를 '쇼'라고 부른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여기서 그를 '쇼'라고 부르려한다. 쇼! 이제 자네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까?
앞서도 언급했듯 쇼는 자신의 사진집의 표지를 장식할 한 장의 사진을 위해 몰락한 시골 마을 다카하마에 머무르게 된다. 그곳에서 폐허가된
다카하마 호텔을 둘러보던 중 한 여인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고 경찰에 연락을 취하게되면서 이 흥미진진한 하드보일드 소설의 시작을 알린다. 그
여인의 정체는 이 마을에 들어설 공항을 반대하는 모임에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 아이자와 다에코라는 여성이다. 그녀의 전 남편이던 지역신문 기자
안비루를 비롯한 공항건설반대모임 관계자들의 요청으로 쇼는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게된다.
아이자와 다에코가 활동했던 공항건설반대 활동이 이 살인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살해동기로 부상하는 가운데, 그녀에게 얼마전 협박장이 도착했고,
그녀 방에서 도청장치가 발견되었다는 사실들을 듣게된다. 5년전 발생한, 폐허가 된 다카하마 호텔 화재사건의 신문 스크랩을 가지고 있던 아이자와
다에코, 화재사건과 이번 살인이 연관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그녀의 휴대폰은 어디에 있을까? 다에코와 쇼의 연인인
후지코가 인터뷰 하던 도중 걸려온 전화의 상대방은 누구일까? 이런 의문들로 이 살인사건의 물음표는 쇼에게 건네진다.

어쩌면 단순 명확해 보이는 인과 관계를 가진듯한 살인사건이 점점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깊숙히 머리를 들이민다. 쇠락한 마을,
그리고 그 속에서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들, 갑작스럽게 대두된 개발이 불러온 문제들, 그리고 잔인한 살인사건... 그리 오래진 않지만 탐정 활동을
했던 쇼는 그런 복잡 미묘한 관계들 속에서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고 찰라의 순간을 담아내는 사진 작가가 가진 특별한 능력(?)의 도움으로
진실을 찾아 사건을 풀어나간다.
'폐허의 완전한 실루엣을 담고 싶었다. 군청색의 세계속에서
오도카니 홀로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는 폐허. ... 그러나 무리였다. ... 태양이 얼굴을 내밀면 폐허는 실루엣을 드러내겠지만 그때가 되면 푸른
세상은 사라져 없어진 후였다. 푸른 세상이 아직 살아 있을 동안은 폐허도 그 푸른빛 속에 잠겨 있기 때문에 완전한 실루엣을 드러내지 않았다.'
- P. 9 -
가노 료이치. 두번째, 그리고 일년만의
만남! '환상의 여자'를 통해서 지난해 처음 만났던 가노 료이치를 오랫만에 다시 만난다. 미궁속에 빠져든 살인사건, 지역개발을 둘러싼 또 하나의
비극이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이 작품 <창백한 잠>과도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그의 작품들에 주로 하드보일드
서스펜스 라는 수식이 많지만 그와 더불어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사회파 미스터리에 더 초점을 두고 싶다. 이 시대를 아우르는 시선이 그에게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개발에 따른 자연의 파괴와 낙후된 지역의 개발논리를 두고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마찬가지 상황들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이
작품의 배경인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공항 건설때문에, 우리가 좋아라하는 신도시 건설도 그렇고, 지난 정권때 추진해 지금도 문제가 심각한 4대강
건설도 그렇다. 이익을 쫓는 사람들, 그때문에 사지로 내몰리는 사람들, 그리고 자연파괴에 대항하는 사람들... 돈과 권력! 쉽지 않은 문제지만
언제나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가난'이란 약자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몫이다. 그런 사회에 담긴 솔직한 시선들이 가노 료이치의 시선속에 고스란히
담겨 본문속에 녹아든다.
개발과 이권다툼, 초반에 예상했던 추측이 적중하지만 조금더 복잡하게,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사건에 독자들은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미스터리 측면에서 아쉬움이 묻어나기도 하지만, 사건을 리드믹컬하게 서술하고 풀어내는 작가의 역량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가노
료이치하면 '제물의 야회'라는 작품을 빼어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수많은 독자들의 찬사를 받고 있는, 개인적으로는 아직 만나보지 못해서 조금은
더 그립고 즐거운 작품이다. 빠른 시일내에 가노 료이치와의 세번째 만남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일년여만에 만난, 이제는 낯익은 이름의 이
작가가 좋아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