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여섯살난 딸아이와 포도를 먹고 있었다. 포도씨를 하나하나 골라내는 딸아이에게 '씨앗은 몸에 좋아, 그냥 먹어도 된단다'고
얘기해주었다. 우리 집에서는 뭔가를 먹을때 아빠가 이건 '뭐에 좋구 뭐에 좋구' 얘기해주는걸 아이들이 좋아라 한다. 물론 그 시작은 편식이
습관화된 아이들을 위한 궁여지책이었지만... 어쨌든 딸아이가 그런 씨앗은 어디에 좋냐?고 묻는다. '응 씨앗은 그 속에 우리 몸에 좋은 영양소가
다 들어있구, 씨앗으로 인해서 또 다른 나무가, 열매가, 그리고 먼훗날 아빠는 떠나지만, 너희들이 커가고 또 아빠 엄마가 되는거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더랬다. 아이들이 알아들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
에쿠리 가오리의 작품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을 읽으면서 문득 딸아이와 나눴던 이런 저런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 작품은
우리 세대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일상적이지만 다양성을 지닌, 그냥 그런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이런
가족, 삶에 대한 이야기속에서 딸아이와 잠깐 나눴던 씨앗이 나무가 되고, 아이들이 이 아빠의 자리에 서는...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책속에
담겨져 있다.
야나기시마 일가의 이야기는 1982년 가을, 둘째딸 리쿠코와 남동생 우즈키, 오빠 고이치가 '학교에 가는건 어떨까?'라는 아빠의 갑작스런
제안에서 시작된다. 야나기시마 일가는 정규교육대신 집에서 가정교사를 불러 교육을 받는 시스템이었기에 리쿠코를 비롯한 아이들은 의아하기만 하다.
어쨌든 학교라는 곳에 다니게된 세 남매, 하지만 그들의 학교 생활은 달랑 3개월, 적응이 쉽지 않았던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1982년에서 시작된 야나기시마 일가의 이야기는 갑자기 시공간을 초월한다. '60년대로 갔다가 다시 '80년대로, 또 다시 '70년대로
그리고 '90년대, 2000년대 까지... 3~40년의 시간을 쉴새없이 오가게 된다. 시공간의 이동과 더불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주인공의 시점도
변화한다. 둘째딸 리쿠코의 시점에서 외삼촌, 그리고 엄마, 언니, 아빠, 그리고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시각에서 그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그들에게 숨겨져 있던 이야기들을 잔잔하면서 섬세하게 그려낸다.

"비참한 니진스키" , "가엾은 알렉세이에프" ... 야나기시마 일가에게만 소통되는 습관적 표현, 유행어인
이 말들이 색다르다. 할머니가 러시아 분이기에 가능한 가족사의 한부분일 것이다. 집에서만 교육을 받다가 학교를 가게된 아이들이 내몰린 사회라는
공간속에서 느끼는 아이들의 위태로움이 안타깝고, 불륜이라는 잘못된 행동이 만들어낸, 다른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도 잘 동화되어가는 그들의 모습이
유쾌하다. 아버지가 다른 누나, 어머니가 다른 동생, 이혼한 이모와 결혼이 늦은 외삼촌! 복잡한 가정사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 삶을
헤쳐나간다.
오랫만에 만나는 작가 에쿠니 가오리! 너무나 반갑고 왠지 모를 따스함에 포근함이 느껴진다.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이들의 시간은 어른들이 알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어른들이 살아온 시간 역시 아이들은 모른다. 한 가족임에도 서로 평생 알지 못하는 시간이
존재하고 그 느낌을 살려 이런 작품을 쓰게 됐다고 말이다. 아빠의 젊은 날들은 오래된 사진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고, 집을 떠나 어느정도
커버린 아이들의 시간을 부모들은 쉽게 알 수 없어진다.
'집이 있고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갈마들며 세대가 바뀌고
등장인물 전원이 사라져도, 그 집은 이후로도 계속 남을 테지요.' - 에쿠니 가오리
포도를 함께 먹으면서 딸아이에게 들려줬던 씨앗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이 책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것은, 아마도 이 작품속에 담겨진 작가의 생각이 드러났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제목속에 담겨진 '라이스에는 소금을'이란 말의 뜻이 궁금하다. 이
말 뜻은 '성인이 되어 다행이다. 자유 만세' 라는 의미를 담는 야나기시마 일가의 또 다른 유행어라고 한다.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 것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어른이 되는 시간동안 그들을 지켜주는 테두리 역시, '가족'이라는 공간과 사람들일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가슴 아픈 이별과 상처를 겪으면서, 그 속에서 성장하고 변화해간다. 무엇이든 다 알 것 같은
가족이지만 그 구성원 구성원이 가진 시간과 상처, 숨겨진 이야기와 고독까지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굳이 다 알지 못하면 어떤가?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가족이라는 그 말이, 따뜻한 포옹과 위로의 말 한마디로 인해 세상의 중심은 가족임을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요즘 즐겨보는 '아빠를 부탁해'나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이런 가족의 소중함과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아빠, 혹은 아이들'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그려져 색다른 감동을 전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를 통해 가족이라는
이름을, 그 속에 숨겨져있던 하마터면 알수 없었을 속마음까진 들여다 볼수 있었다. 오늘 떨어져 있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보자. 그리고 용기내어
말해보자. 조금은 쑥스럽지만 사... 사... 사랑한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