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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보트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11월
평점 :
요즘들어 주말이면 으레이 눈이 내리는 것 같다. 겨울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주말부부인 내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힘겹게 만드는 녀석이 그리 기쁠리는 없다. 대선으로 온 나라가 시끌벅쩍, 이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가 싶더니 연말을 맞은 대한민국은 지난것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기대들로 조심스레 떨려오는듯 하다. 그동안의 어지럽고 지저분하고 혼란스럽던 일들을 덮어버리듯 흰 눈이 온 세상을 가득채운다. 그리고 그 흰 눈 처럼 언제나 순수한, 아니 순수해야만 할 것 같은 이야기들로 한 해의 마지막을 함께한다.
얼마만일까? 꽤나 오랫만이란 느낌이든다. 에쿠니 가오리와의 만남... 세상 모든것을, 결코 순수하지 않은 것들 조차도 순수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것에 어떤 특별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그녀, 에쿠니 가오리의 조금은 오래된 책과 오랫만에 만난다. <하느님의 보트> 라는 이름의 이 작품, 왠지 또 다른 기대를 품게 된다. 에쿠니 가오리와 김난주! 오랫만에 만난 반가운 그녀들이 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버리기 전에 어서 책에 내 눈을 맡겨봐야겠다.
'... 왜 자꾸 이사를 하는데? 엄마는 내 머리에 몇 번이나 입맞춤하면서 말했다. 엄마랑 소우코는 하느님의 보트에 탔으니까. 하느님의 보트? 되물었지만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래, 하느님의 보트. 그러고서 엄마는 나를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그 얘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 P. 42 -
소우코와 요코!! 낮에는 피아노를 가르치고 밤에는 바에서 일하는 서른다섯살 엄마 요코. 벌써 세번이나 이사를 다니고 학교를 옮겨다니는, 얼마후면 열한살이 되는 소녀 소우코. 하느님의 보트를 탄 이 모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에쿠니 가오리는 이 작품을 두고 '지금까지 내가 쓴 소설 중에서 가장 위험한 작품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에게~ 엄마와 딸 이야기가 위험해봐야 뭐!!' 하겠지만 그녀가 그렇게 호언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녀들의 위험한 항해속으로 함께 떠나보자.
<하느님의 보트>는 바로 소우코가 태어나는 시점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짧지만 강렬한 사랑, 그리고 치명적인 사랑으로 잉태된 소우코. 그리고 그녀들의 위험한 여행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아빠! 그 아빠를 기다리고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엄마! 치명적인 사랑으로 태어난 소녀의 시선에 비친 이 가슴 아픈 사랑의 흔적을 에쿠니 가오리는 섬세하게 그려낸다. 소우코와 요코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그들의 눈으로 마음으로 이야기가 이끌려간다. 서로에게 보물일 수밖에 없는 엄마와 딸! 하지만 소우코가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면서 그들의 사이에선 작은 변화가 생겨나는데...

드라마 왕국 대한민국에서 소재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바로 불륜이 아닐까 싶다. 아침드라마도 그렇고 저녁시간대, 그리고 주말 가족이 둘러앉은 자리에서도 불륜 드라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노출된다. 누가 쓰면 불륜도 사랑이 된다는 말처럼... 따지고 보면 이 작품 <하느님의 보트> 역시 하루의 불같은 사랑이 잉태한 고독한 시간들을 그려내고 있다. 에쿠니 가오리이기에,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이후의 시간들은 그다지 위험하다기 보다 위태로운 그녀들의 시간들이 그려진다. 거센 파도를 타고 보트위를 항해하는 위태로운 그녀들의 이야기가 불륜이란 현실을 뒤엎어버린다.
이 작품은 결국, 극단의 그리움, 광기를 이야기한다. 한 남자에 대한 여자의 끊없는 사랑과 기다림. 하지만 이것을 바라보는 딸, 한 소녀의 시선은 안타까움과 고통, 그리고 상처 그 자체다. 성장기 소녀의 눈에 비친 엄마의 사랑. 이해할듯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할듯 하다가도 같은 여성의 시선은 그녀를 담아낸다.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자 한 여인의 채우지 못한,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성장을 다룬 이야기가 바로 이 작품 <하느님의 보트>인 것이다.
' '상자 속'은 엄마와 나 사이에서만 통하는 말이고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일, 즐거운 일도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P. 19 -
엄마와 딸은 과거로 포장된 상자속에 갖혀 살아간다. 담배와 커피에 몸을 내맡긴채... 딸은 조금씩 성장하면서 그 상자를 열고 밖을 향해 작은 걸음을 내딛는다. 같은 배를 타고 가다가 딸은 엄마의 보트에서 내리고 만다. 그렇다면 엄마는 어떻게 될까? 그렇게 그리워하고 기다리던 아빠를 만나 해피엔딩을 보여줄 수 있을까?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에쿠니 가오리의 펜끝이 다시금 섬세하게 떨린다.
<하느님의 보트>는 2002년도에 국내에 출간되었다가 이번에 새롭게 옷을 갈아입은 작품이다.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한 남자와의 짧지만 불같았던 사랑, 그 사랑을 찾아 떠다니는 한 여인. 그 여인을 바라보는 소녀! 그리고 그녀들의 시간들. 쉴새 없이 파도에 흔들리는 그녀들의 위태로운 이야기들이 에쿠니 가오리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성속에 녹아든다. 우리도 그녀들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지는 않을까? 상자속에 같혀, 의미없는 항해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뜨겁고 위험하고 위태로운 이 사랑의 이야기가 이 겨울을 녹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