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한 보통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종이접기는 기분이 착 가라앉는 놀이다. 특히 처음 접어보는 것일 때는 책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집중하다보면 머리가 텅 빈다.' - P. 106 -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은 아마도 <소란한 보통날>에서 화자인 '나', '고토코'가 말하는 '종이접기'와 닮아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기분이 착 가라 앉는, 처음 만나다보면 다소 지루하다거나 따분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하지만 아마도 그것이 전부는 아닐것이다. 잔잔한 이야기들속에는 작가의 섬세한 감성들이 녹아 있고, 여성적이면서도 조금은 독특한 사랑의 방식들이 색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차분함속에 개성 넘치는 그녀만의 색깔을 담아두고 있다고 표현해도 좋을까.

 

6월말부터 장마가 시작되었다. 태풍 메아리라는 녀석때문에 조금은 더 시끌벅적한 '비의 시간'이 시작된 셈이다. 지금도 창밖에는 빗방울들이 아직 끝나지 않은 비의 계절을 알리고 있다. 어둠이 가득한 정적속에 들리는 빗소리, 그 소리에 어울릴 에쿠니 가오리의 분홍빛 가족 이야기 <소란한 보통날>을 집어든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비오는 날은 왠지 쓸쓸하다'는 고토코의 말처럼 왠지 이 작품은 비오는 이런날 어울리는 작품이란 생각이든다.

 

미야자카 씨네 여섯 가족의 보통날이 에쿠니 가오리식 감성으로 그려진다. 평범한 회사원인 아빠와 계절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 식탁을 꾸미고 '멋진'이라는 말을 너무 좋하하는 소녀감성의 엄마 유키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재는 백조?인 열아홉살 '나' 고토코의 시선속에 평범한 이 가족들의 이야기는 그려진다. 작년에 결혼한 큰언니 소요, 직장을 다니는 작은 언니 시마코와 다소 여성적인 모습이 엿보이는 열다섯살 남동생 리쓰. 이렇게 여섯식구 사이에서 작고 사소하지만 소란한? 일들이 벌어진다.

 

'나는 감탄스러웠다. 남자 친구가 왼손잡이면 굉장히 편리하겠다 싶었다. 그런 감상을 말하자, 후카마치 나오토는 웃었다.' - P. 10 -

 

친구의 소개로 고토코는 열아홉의 마지막 사랑을 시작한다. '남자친구가 왼손잡이면 편리하겠다'고 말하는, 순수해 보이기만한 그녀가 만난지 얼마되지 않은 남자친구에게 육체관계를 갖자고 먼저 말을 꺼내는 당돌함에 우습기도, 낯설기도 하다. 고토코는 시마코 언니를 '묘하다'는 말로 표현한다. 월급날이면 가족 모두에게 어김없이 선물을 사오고, 사귀던 남자에게도 지극 정성을 다하는 시마코. 하지만 그녀의 선물은 조금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학창시절엔 따돌림의 대상이기도 했고 과거에는 남자 문제로 두번의 자살시도가 있기도 했던 시마코, 이번엔 어떤 소란한 일들을 만들어낼까?

 



 

어김없이 시마코에 의해서 소란은 시작된다. 가족들에게 소중한 손님을 초대했다는 시마코가 데려온 것은 다름아닌 여자였다. 독특한 성적 취향 때문이 아니라 그 여자가 임신한 아이를 입양하겠다는 시마코. 이게 뭔 시츄에이션!!! 이 보통 가족에게 이런 몇가지 작은 소란들이 생겨난다. 작년에 결혼한 소요의 갑작스런 가출도 그렇고, 착하기만한 리쓰는 학교에서 정학을 맞기에 이른다. 아빠가 생일에 선물했던, 엄마가 그토록 원하던 햄스터 윌리엄은 엉뚱한 사고를 당하고...

 

<소란한 보통날>은 바로 '가족!'의 이야기이다. 무뚜뚝해 보이지만 자녀의 잘못된 결정에 걱정하고 고민하는 부모, 그런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따스함을 간직한 딸. 크리스마스에 모여 앉아 만두를 빚고, 설날에는 축하주를 마시며 새해맞이 글쓰기를 연례행사로 하는 가족다운 가족. 어떤 잘못된 선택에 대해서 나무라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진 가족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그려진다. 평범하지만 이 가족의 딸들은 여전히 위태롭게 흔들린다. 평범한 사랑을 찾지 못하는 시마코도, 이혼이라는 결정을 내린 소요도. 이제 스무살 새로운 '인생'과 사랑을 준비하는 고토코도 말이다.

 

'때로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시간에 대해, 그동안에 생기는 일과 생기지 않는 일에 대해, 갈 장소와 가지 않을 장소에 대해 그리고 지금 있는 장소에 대해. ... 내게 인생은 비스코에 그려진 오동통한 남재애의 발그레한 얼굴처럼 미지의 세계이며 친근한 것이었다. 내 인생. 아빠 것도 엄마 것도 언니들 것도 아닌 나만의 인생.' - P. 189 -

 

하지만 이들 가족 그 누구도 질책하고 힐난하지 않는다. 언제나 내 몸을 쉬고, 돌아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가족들의 곁인 것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고, 따스한 시선을 던진다. 그들이 벌이는 소란은 소란이 아니라 단순히 작은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가족의 이야기 속에는 불륜도, 알고보니 아버지네 남매네? 하는 출생의 비밀도, 그 어떤 폭력도 담겨져 있지 않다. 그렇게 자극적이지 않아서 간혹 평범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손끝의 떨림으로 더욱 긴장감 넘치고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가족이란 복잡기괴한 숲만큼이나 매력적'이라는 작가의 말이 아니더라도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소란한 보통날>은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고토코의 시선속에 그려진 그들 가족의 일상과 과거의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들을 뒤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아쉬움속에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고만다. 가족이란 무엇인지, 청춘들에게 인생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은 어떤 색깔인지... <소란한 보통날>속 이 가족들의 작지만 소란한? 일상 속에서 유쾌하고 행복넘치는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분홍빛 가족이야기는 이 비(雨)의 계절에 쓸쓸, 아니 유쾌한 빗소리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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