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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지옥 ㅣ 이타카
유메노 큐사쿠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몽상(夢想)'은 모든 상상력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다. Fantasy 혹은 Dream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몽상'이라는 말, 사람들은 일생 동안 30%정도의 시간을 몽상을 하는데 사용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몽상이란 단어는 철저하게 외면되고 배제된 것으로 억압 받고 있다. 현실을 벗어난 이야기들, 삶에 가치를 두지 않는 문학적 토대.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는 훌륭한? 몽상가를 더이상 원하고 있지 않은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개인적으로 일본 문학을 즐겨하는 이유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들속에서 '몽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즐거움이자 행복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행복한 '몽상가'와 만남을 갖게 된다.
'유메노 큐사쿠!'. 스기야마 다이도라는 본명보다는 유메노 큐사쿠라는 필명을 주로 사용했던 이 작가는 사실 조금은 낯선 이름이다. 후쿠야마 방언으로 유메노 큐사쿠는 '몽상가' 라는 뜻이라고 한다. 너무나 익숙한 에도가와 란포, 오구리 무시타로와 더불어 1920~30년대를 대표하는 미스터리 소설 작가라는 그 이름이 왜 이렇게 낯선 것일까? 그의 작품의 특징을 몇 가지 단어로 나열해보자면 '기괴함', '환상', '호러'와 '서간체 형식'에 능숙한 작가라고 말 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을 처음 만나게된 독자로서는, 첫만남인 이 작품 <소녀지옥>을 통해 그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을것 같다. 1936년 갑작스런 뇌출현로 사망했다는 몇 안되는 그의 작품들 또한 너무나 궁금하다.
일본 최고의 몽상가, 유메노 큐사쿠의 <소녀지옥>은 그 이름과 표지가 역시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강렬한 색감을 담은, 기모노를 차려입은 한 소녀와 '소녀지옥'이라는 몽환적 분위기가 책의 전반을 압도한다. '우스키 도시하라' 라는 이비인후과 원장이 시라타카 히데마로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소녀지옥>의 첫번째 이야기 '아무것도 아닌'이 시작된다. 자신을 찾아온 한 신사의 손에서 건네진 한 통의 편지속에는 '히메구사 유리코'가 자살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병원에서 자살을 하고 산부인과인 병원장에게 심장마비고 사망한것처럼 처리해달라고 했다는 히메구사 유리코. 그녀와 우스키, 시라타카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있는 것일까?
'그녀는 실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고통받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인해 죽어갔습니다. 공상이 그녀를 살아 움직이게 했습니다. 공상이 그녀를 죽였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 P. 115 -
우스키 이비인후과 개업 전날 자신들을 찾아온 히메구사 유리코는 자신을 간호사로 써달라고 요청하고 우스키의 가족 모두 그녀의 묘한 매력에 채용을 결정한다. 간호사로서 천재적인 실력과 천부적인 매력을 갖춘 유리코는 모든 환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그녀로 인해 병원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이던 상황, 하지만 어느사이 유리코 자신을 '수수께끼 여자'로 만들어 버리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천부적인 거짓말쟁이, 시라타카 선생과 우스키 가정 모두를 끔찍한 악몽에 빠뜨리고만 수수께끼 여자, 히메구사 유리코는 우스키에게 쫓겨나게되고 결국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게 된 것이다.

<소녀지옥>은 표제작인 '소녀지옥'이란 내용과 연관된 세편의 중단편과 또 다른 세편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친구에 대한 복수로 연쇄살인마를 살해 하는 버스 여차장, 표면적으로 고매한 성품을 가진듯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횡령에 성폭행을 일삼는 교장의 전횡을 죽음으로써 폭로하는 육상 선수... <소녀지옥>이라는 제목답게 모두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1920~30년대 횡횡했던 여성에 대한 상대적 편견과 억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미스터리라는 장르속에 담아낸 조금은 기괴하면서도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외침과 비참함이 담겨져 사회파 소설에서 보여지는 여러 요소들을 그려낸다.
'그 깊숙한 곳에 숨은 양심과 순정을 밑바닥까지 전율시키고, 경악시켜, 실신시키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는 예술을 탐정소설이라 이름 붙이게 된 것이다.' - P. 325 -
역시 가장 재미있게 만난 작품은 '아무것도 아닌'이다. 서로 다른 이야기와 주인공들이 이야기를 그려내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일관된, 연관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소녀, 혹은 여성 주인공들과 그들의 자살과 분신 등 죽음을 통해 자신들의 의지를 내어 보일 수 밖에 없는 시대 상황적 특성이 인상적인다. 앞서 유메노 큐사쿠라는 작가에 대해 열거했던 '기괴함', '환상', '호러'와 '서간체' 형식이라는 특징들을 이 작품 한 권 속에 모두 찾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편지글로 써내려간 이야기들속에서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가진 복선과 트릭를 스며놓고 기괴함과 환상적인 이야기들로 마지막을 이끌어낸다.
사실 이 작품속에서 조금은 실망한 부분이 특별한 반전이랄 것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넘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짜임새나 구성이 너무 재미있어 책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지만 미스터리가 갖추어야 할 반전의 미학 측면에서는 조금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소녀를 위한 변명'이라는 역자 후기를 읽고는 오싹함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자살'이라는 사실로 연관된 이야기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했던 우매함이 반전이란 묘미를 놓치고 말았다는 사실말이다. 작가의 치밀함이 여기에서 더욱 돋보이는것 같다.
전율시키고, 경악시켜 실신시켜야 만족되는 예술! 유메노 큐사쿠가 말한 탐정 소설과 작가의 사명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몽상가 유메노 큐사쿠! 그와의 첫번째 만남은 이렇듯 독특한 분위기와 작은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된다. 일본 미스터리 3대 기서(奇書)라 불린다는 '도구마 마구라' 를 비롯한 다른 이야기들도 꼭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전혀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은, 그 시대를 이해하고, 그 시간속 미스터리를 만나는 즐거움과 함께 한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몽상! 이 말을 다시한번 되새겨보게 된다. 유메노 큐사쿠라는 이름과 함께~~ ^^